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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관한 시모음 31)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07|조회수0 목록 댓글 0

나무에 관한 시모음 31)

 

나무들은       /손상근


나무들은 마음이 좋다
나무들은 잔설을
안스러하기도 한다
폭설이
얼마나 가두고
얼어붙게 했는가를
쉬 용서 하나보다
잔설은
음지에 간신이 남아 있거나
골짜기에 움추려 지내고 있다
대설주의보로
뿌리채 떨게 하더니
봄소리에 지워지고 있다

나무들은 쉬 잊어버리나보다
음지에 골짜기에
잔설 그대로 둔 채
침묵에서 일어나
봄볕 앞에 선 나무들
두터운 추위 털고
잎을 피우는 나무
꽃을 피우는 나무
푸르고 희고 붉으며
어우러진다
나무들은
봄이 좋은가보다

 

 

나무를 안고        /이해인

길을 걷다가
하도 아파서
나무를 껴안고
잠시 기도하니
든든하고
편하고
좋았어요

괜찮아
곧 괜찮아질거야

나뭇잎들도
일제히 웃으며
나를 위로해 주었어요

힘내라 힘내라
바람 속에 다 같이
노래해주니
나도 나무가 되었어요

 

 

나무의 주석        /송종규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을 때

한 세계에서 한 세계로 건너가고 있었을 때

미망(迷妄),

꽃이 피는 순간은 그런 것일 것이다

노란 장미가 피어있다 컵 속에

당신이 먼 해안이듯이, 당신은 정말 파도치는 먼 해안인지

누가 고여 있는 내 방의 공기를 뚫고 다녀갔다

가시가 건드린 내 방의 공기는 반죽처럼 쉽게 봉합되지 않는다

 

안개에 가린 듯, 어슴푸레하고 낯선 이 풍경이 처음인 듯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 어슴푸레하고 낯선 풍경은 아주 오래 전에 본 듯하기도 하다

 

그것은 미래이기도 하고 과거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하다

 

아무도 누설하지 않았지만

잎이 생긴 뒤에 피는 꽃잎은 나무의 주석이다

나비의 애벌레가 꽃잎 뒤에 붙어있다

 

 

나무심기         /강정식

 

묘판에 정강이까지 깊이 박고 서서
튼튼히 자랐지요
바람만 불고 나비는 아직 없던 날
나는 싫다고 졸라 댔지만
뽑혀서 맨발로 묶여 왔습니다
졸업은 했어도 취직은 불가능했어요
차에서 한꺼번에
어느 앞마당에 수북이 부려져
즉결 재판소에 끌려간 시국 사범들처럼
새끼줄에 줄줄이 묶인 채 앉아 기다렸습니다
까다롭게 고르다가
그냥 가 버리곤 하더군요
며칠씩 물 한 모금 못 얻어먹었지만
견디어야 했어요
제대 후에도 이력서를 들고
이곳 저곳 찾아다녀 보았지만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요
그러다 말라죽을 뻔했거든요
어린 나무를 심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어머니가 안마당에 심은 감나무도
그래서 아직 감이 잘 안 열리나 봐요
아직 젊으니까 기다리면 기회가 오겠지요

 

 

새를 삼킨 나무        /나희덕

가슴 붉은 새 한마리가
휙, 내 앞을 지나 숲으로 들어간다
저녘 하늘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빛, 그 빛을 따라
방금 그 새가 앉은 나무에게로 걸어간다
분명히 날아오른 기척이 없었는데
조심스레 다가가 올려다보니
새가 사라졌다

아, 검은 입으로 새를 삼킨 나무

새의 눈동자만 같은
붉고 마른 열매
부리로 제 옆구리를 콕콕 쪼는 소리
낮게 우는 나뭇가지들

그 새-나무 그늘에 아무리 앉아 있어도
끝내 나를 삼켜주지는 않고
어둠만 어둠만 밀려와
닫혀진 문 앞에서 나 오래도록 서성거리고

 

 

나무            /채호기 

 

봄날의 나무 밑에서는 입을 닫고 조용히
귀를 열고 기다려야 한다.
딱딱한 나무속을 깨금발로 살금살금 걸어 다니는
수액의 조심스런 발걸음, 처음 말하는 어린아이의
오물거리는 입들로 가지들이 속삭이기 때문이다.

 

매끈한 껍질을 찢고 단어들이 움튼다.
마치 흰 종이 위에 매달리는 언어들처럼
눈동자에 미세한 진동을 울리고 귓구멍을 간지럽힌다.

 

단어들은 말하기 직전의 볼록한 입술이며
종이에 닿아 쓰기 직전의 뾰족한 펜촉이다.
단어들은 겨울의 검은 땅으로부터 걸어 나와
나무의 빽빽한 시간들을 살아왔다.

 

뿌리에서 나무둥치 그리고 가지 끝까지
가지에서 다시 나무뿌리에 까지
흐르기도 하고 걸어 다니기도 하는 그것은
느낌이 아닐까? 무엇에 대한 느낌일까?
누구의 느낌일까? 나무의 느낌? 아니면
나무를 바라보는 것의 느낌?

 

가지에서 돋아 오른 움들이 열리는 순간
나무는 말한다. 보들보들한 연두색으로.
그 들리지 않는 엄청난 목소리
바람이 흔들어놓은 것 같지만,
잎 하나에 하나의 목소리, 수많은 목소리들이
합창으로 말하는 화음에 공기가 깨어나고,
움직이는 허공에서 바람이 생겨나는 것.

 

어떤 새 움들은 목소리를 삼키고
단어로 매달린다. 한 꽃 한 꽃
회려한 색깔의 향기로운 단어들.
유혹하는 단어들은 그걸 읽는 순간
영혼을 빨아들인다. 벌처럼 붕붕거리는 영혼들을.

 

나무 앞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떠나
가지들이 매달고 있는 단어들
가지들이 피우고 있는 건반 속으로 들어가
나무가 경험한 무수한 감각과 감정과 생각들의
삶을 다시 살아보는 것. 깊은 기쁨과
슬픔의 오래된 나무가 되어보는 것.

 

 

첫 나무       /홍영숙 

 

  어머니가 사라졌다 어머니 세상의 문 닫고 당신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무도 알려 하지 않고 누구도 모른 체 않는,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어머니의 부재

 

  가자가자 감나무 오자오자 옻나무 십리절반 오리나무…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 흥얼흥얼 폴짝폴짝 제 키보다 훌쩍 자란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뛰어놀던,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 발그레 두 볼 붉히던 계집아이의 첫 나무, 알곡처럼 키워온 애틋한 사랑살이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 호된 시집살이 일생을 기대어 온 너하구나하구 살구나무… 차마 두고 오지 못해 돌아보고 돌아보며 너하구나하구 살구나무…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 내 나무……

 

  비밀스레 닫혀있던 어머니 오래된 입술 말문을 연다 빛바랜 치마저고리 변색된 첫아이 배냇저고리 낡고 헤진 포대기 노란나비 수놓인 무명손수건 날선 회초리… 노래인 듯 넋두리인 듯 주절주절 그렁그렁 열리지 않던 비밀의 상자 나비자물쇠 풀어 칠십 평생을 늘어놓는 어머니 웃다 울고 울다 웃는다 반질거리는 손바닥 만큼이나 얇은 사진첩 갈피마다 꽃 같은 어머니, 푸른 그 나무 아래 수줍은 미소

 

 

나무의 소리       /임보

 

나무가 운다고 했다.

충청도 깊은 산골에 천년을 넘게 산 은행나무가

이른 봄이면 소리 내어 운다고 했다.

깊은 밤 문풍지를 울리듯 운다고 했다.

 

그 소리를 아직 듣지 못한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개울물 흐르는 소리일 것이라고도 하고

댓잎에 스치는 바람 소리이겠거니 했다.

 

지난봄에 그 소리를 들어 보려

우이동 시인들 몇이서 달려갔다.

나무는 영동의 깊은 산골 천년 묵은 한 절 앞에 서 있었다.

천만 가지의 끝마다에 푸른 잎새를 피워내고 있었다.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가 우리들은

나무님의 거대한 몸통에 매미처럼 매달려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별이 이슥히 기울도록 들었다

 

그것은 나무의 울음이 아니라

나무의 혈관들을 타고 올라가는 물소리

봄을 맞아 잎을 피우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빨아올리는 나무의 영혼이 빚어낸 소리라고 했다.

 

그러나 청롱관(靑聾觀)*이 나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때묻은 사람들의 귀엔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 청맹관(靑盲觀)을 패러디해서 만든 조어

 

 

나무         /안선희

 

나무만큼 평화로운 품을 본 적이 없다

홀로 먼길을 달려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부비다 쳐다보면 나무는

마알간 햇살 비추며 가만히 웃곤 하였다

 

나무만큼 무례한 손님을 본 적이 없다

초청도 받지 않은 오후에 버젓이 들어와

휴식마저 공유하려는 나무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앉았다가 인사도 없이 나가곤 하였다

 

나무만큼 숙련된 이야기꾼을 본 적이 없다

매일 오후 명랑한 햇살 손을 잡고 찾아와

밤의 달빛과 별들의 이야기 들려주는 나무는

삼라만상 꿰뚫는 재담꾼이다

 

나무만큼 아름다운 벗을 본 적이 없다

 

 

원숭이는 날마다 나무에서 떨어진다     /이진숙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가 진짜 원숭이다
 서 있는 나무는 늘 그 나무지만
 원숭이는 늘 다른 나무를 탄다
 떨어지지 않으면 다시 오를 수 없는 새로운 나무를 위해
 원숭이는 나무에서 날마다 떨어진다
 오 뛰어내리자
 이 황홀한 절망,

 

 

사랑나무       /권옥희
 
오래된 모과나무 속에
키를 훌쩍 넘긴 말채나무가 삽니다
별꽃이 수없이 피다 진 자리처럼  하늘을 펼치고
겨드랑이 있는대로 뻗어 마련한 꿈자리 속에서
나무도 삼삼한 사랑을 합니다
헤어지면 어쩌나
팔뚝 굵게 힘을 키우고
확대되는 초록의 떨림을 느낌으로 깨우면서
서로 빈 가슴 한모퉁이를 차지했습니다

저 아래 사랑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비에 젖고
쪼개지는 빗방울을 받아들이는 물관처럼
내 안에 네 기관이 관통하면서
몇 백 년 살아가는 일이 순간이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닭살처럼 송글송글 솟는 사랑은
오래된 습관이었습니다
속 비면 꺾일 목숨 안에 깊이 뿌리 박아
이렇듯 서로를 지탱해 가는 것
즐겁게 하늘을 보며 고맙다
고맙다 등 두들겨 보는 것
나무도 뭉클한 사랑을 합니다.

 

 

푸른 나무·1      /김용택

막 잎 피어나는
푸른 나무 아래 지나면
왜 이렇게 그대가 보고 싶고
그리운지
작은 실가지에 바람이라도 불면
왜 이렇게 나는
그대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지
생각에서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고
암만 그대 떠올려도
목이 마르는
이 푸르러지는 나무 아래

 

 

나무에게 말을 걸다     /나태주

우리가 과연 만난 적이나 있었던 걸까
나무에게 말을 걸어본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가진 것을 모두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과연 우리가 만난 적이나 있었던 걸까
바람도 없는데 보일 듯 말 듯
나무가 몸을 비튼다.

 

 

나무에게    /정태중

 

제법

여린 가지 마다

연초록 옷을 입었네.

 

극심한

다이어트로

앙상한 뼈같은 겨울을 지나

 

어느새

고웁게 색단장 하고

봄에게 시집가는 나무야

 

무럭 무럭

이파리 키워

넓은 그늘 만드려무나

 

너로 인해

아픈 마음, 기쁜 마음들이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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