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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모임방

그시절 야간 통행금지 싸이렌 들어 보셨나요

작성자가을사랑.|작성시간26.01.06|조회수122 목록 댓글 26

 

야간 통행금지 정책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조선총독부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명의로) 1945년 9월 7일 서울,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 시작하였고 미군정에서도 이어졌다. 
표면적인 목적은 치안 유지였지만, 이 정책 때문에 통금이 시행된 약 36년간 국민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권리를 제약받았다.
처음에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중심으로 20시부터 익일 5시까지 야간 통행금지를 시작했다가 나중에 22시부터 익일 4시로 단축되었다.
그러다 6.25 전쟁 직후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61년부터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1982년까지의 통상적 통금 시간은 자정부터 4시까지였다. 
다만 1960년 4.19 혁명 당시에는 21시부터 5시까지 통금이 연장되었고

1979년 부산·마산 민주 항쟁 당시와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한 계엄령이 발동될 때는 밤 22시부터 4시까지 통금 시간을 2시간 늘린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나이 불문 전 연령층이 통금 대상이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 거동 수상자로 곧바로 체포해 파출소 등서

조사를 받고 다음 날 새벽 통금이 풀릴 때까지 유치장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고,

통금 해제와 동시에 약식 재판에 넘겨져 범칙금을 내고 풀려났다. 
이 당시에는 과장 좀 보태서 경찰 기관들이 일종의 숙박업소 역할을 했는데, 

통금 시간까지 집에 못 돌아갈 거 같은데 근처에 경찰서가 있다면 아예 자진해서 통금 직전에 경찰서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시네에서 시간 보내다가 해제 시간에 맞춰 나가기도 했다.

물론 통금 위반 그 자체는 중범죄가 아니어서 응급 환자가 발생했다는 등 사정을 말하거나 반성하는 모습 좀 보이면 좋게 넘어가 줬으며, 면이나 리 단위에서는 이웃집이나 마을회관, 구멍가게 잠깐 오가는 정도 등은 암암리에 봐주기도 했다.
다만 불행하게도 유신 정권 독재 시절이나 해제 전 전두환 정권 시기(1980년 8월 4일~1982년 1월 5일)

통행금지에 잘못 걸린 소수의 사람들은 공권력에 의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끌려가 부랑자라는 오명을 쓰고

대한청소년개척단,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과 같은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 된 사례도 있었다.

그래서 통행금지 바로 직전인 23시~24시 사이에는 집에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으며

읍 이상 단위에서는 대체로 잘 지켜진 편인데,

존 위컴 장군은 한미연합사령관 시절 부인과 야간에 산책을 즐기며 한밤중에 쥐 한 마리 안 보일 만큼 적막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 편했으며,

한국인들이 야간 통금을 칼같이 지키는 데 늘 놀랐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최소 1970년대 초중반 출생자라면 자정 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확실히 기억할 것이다. 
파출소나 동사무소에서 내보내는 사이렌 소리인데 자정이면 이미 자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이렌을 울렸다. 

동장, 통장의 직권으로 주택가는 볼륨을 좀 줄이기도 했다.
 
그러다 1982년 1월 5일 전두환 정부 시기 전 지역이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특정 날짜가 되면 그날만 일시적으로 풀어주기도 했다. 주로 경사스러운 날에 주로 해제해 줬는데 부처님오신날, 성탄절과 신정 연휴인 1월 1일~3일이 있었다.
또한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날 역시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통금을 풀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식당도 야간 통금 예외가 되었다. 
설렁탕 가게와 부산 지역 돼지국밥집이 대표적으로, 설렁탕과 돼지국밥은 음식 특성상 각각 소와 돼지 사골 육수를 계속 우려내야 해 심야에도 영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경에서 피의자 조사할 때 배고프면 설렁탕을, 설렁탕보다 돼지국밥이 더 대중적인 부산 지역에서는 돼지국밥을 야식으로 자주 배달시켜 먹었다.
심야에 순찰도는 경찰관들도 설렁탕 및 국밥 배달부는 검문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여기서 유래된 전설이 바로 그 유명한 코렁탕이다.

1982년 야간 통금이 풀리기 전까지는 북한이 남한을 이러한 야간 통행금지 제도를 들먹이며 인민 탄압을 이유로 비난하기도 했는데,
이미 북한은 1955년에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북한이 려행증을 명분으로 구군계를 넘을 때도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걸 감안하면 매우 아이러니한 일인 것이다.
 
합법적으로 야간 통행이 필요한 경우, 야간 통행 허용 스탬프를 찍어주기도 했다. 
자정을 넘어 역에 도착하는 열차 편이나 고속버스 막차를 타고 버스 터미널에 도착한 사람들이 주로 적용되었는데, 이 경우엔 해당 역/터미널의 관리 직원이 하차한 승객들에게 찍어주었다.

그 외에도 심야에 환자 등이 발생할 경우는 예외였다. 
당시는 119구급대가 발족되기 전이기도 하고 전화기가 부의 상징이던 시절이라

어지간한 집에는 전화기도 없어서 직접 환자를 데리고 병원에 가거나 소방서 등 관공서,

공중전화 부스나 전화가 있는 이웃집 등에 뛰어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는 단속 다니는 경찰에게 요청하거나 아예 파출소로 직접 가서 사정을 말하면 경찰이 직접 병원을 연결해 주거나 처음 단속한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굳이 사정 설명하느라 귀찮지 않게 즉석에서 야간 통행증을 발급해서 면책했고, 상태에 따라서 아예 경찰 차량에 태워 주기도 했다.
또한 공무원, 의사, 기자, 목사, 군인 등의 일부 특수 직종 한정으로 즉석이 아닌 장기간 효력이 있는 야간 통행증이 발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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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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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가을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6 추억이지요
  • 작성자대구산지기 | 작성시간 26.01.06 그시절 한잔하고 늦개 숨어가던시절
    파출소에 잡혀 가기도 했습니다
    7학년 후반이라 그추억이 떠오름니다
  • 답댓글 작성자가을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6 60대도 그럴겁니다
  • 작성자굿세라 | 작성시간 26.01.06 그런시절이 있었네요.
  • 답댓글 작성자가을사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6 굿세라님 모르시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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