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소신료들이 떼지어 날 겁박하는 것이냐”
“난 어진 임금이 아니다. 부덕한 임금이라 마음대로 한다”
“정승 1000명이 나와 말해봐라.
그래도 난 굽히지 않는다.”
“분명한 일은 임금 독단으로 한다.”
이 역시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말본새입니다.
유교국가에서 무슨 불당을 짓겠다고
저런 험한 말을 내뱉으면서까지 고집했을까.
이유가 있었습니다.
얼마전(1446년) 승하한 부인(소헌왕후 심씨·1395~1446)을 추모하려 했습니다
소헌왕후는 기구한 여인이었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상왕(태종)이 뒤집어씌운 역적죄 때문에
친정아버지(심온·1375~1418)가 억울하게 죽어갔습니다.
이때(1418년) 세종이 임금이었지만
군권을 휘두르던 상왕(태종)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처가가 멸문의 지경으로 몰렸지만 속수무책이었겠지요..
남편 세종으로서는
그런 부인의 가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다합니다.
이에 세종은 석가의 일대기인 <석보상절>과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불당까지 만들어 독실한 불교신자인 부인을 추모하려고 했습니다.
“임금 노릇 못해먹겠으니 선위하겠다”고 배수의 진을 치면서까지
불당건립을 강행한 세종의 독단에는
부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녹아있습니다.
불당건립은 한 나라의 군주이기 전에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었기에 이렇듯
독단적으로 설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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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곰나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11.21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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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아세(이민숙) 작성시간 23.11.21 물러났으면 지켜봐야지
뒤에서 휘두르는건 비겁한짓이지요.
세종 -
답댓글 작성자곰나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11.21 세종을 위해서 외척에 시달리지 않도록 그리 한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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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더덕채취꾼 작성시간 23.11.21 저런 기개로 심온을 왜 못 구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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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곰나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11.21 조선시대 풍습상 아버지를 겁박하지는 못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