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을 살아보니
구라청에서 발표하기를 "새벽에 눈이 온다"해서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눈을 치울까 해서 새벽 05시에 일어나서 보니 다행히도 눈은 오지 않았다.
기왕지사 일어났으니 다시 누워 자기도 뭣해서 잠시 생각해본다.
우리 세대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6.25동란이라는 동족상잔의 미증유의 전쟁와중에 태어나서 가족들이 죽어나가는 비참한 전쟁을 겪었고, 초근목피(草根목皮)로 연명해야만 하는 보리고개라는 춘궁기(春窮期)에 배를 골아야 했으며, 미국이 PL480으로 무상지원해 준 밀가루로 보리고개에 굶어죽지않고 허기를 면해 살아남았고, 6.25전쟁과 땔감으로 남벌되어 황폐화된 산림을 복구하고자 사방사업에 부역으로 동원되어 나무를 심은 결과 벌거벗고 황폐화되었던 산들이 지금의 울울창창한 푸른 산림이 되는 걸 보아왔고,
정치인들의 무능과 부패를 보다 못해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던 4.19와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일어났었던 5.16을 보아왔으며,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하에 반강제적으로 강요되었던 '새마을운동'덕에 헐벗고 배고팠던 굶주림을 이겨내고 급기야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자 세계 5위의 군사강국이 되는 것을 보아왔으며,
해야 할 공부대신에 밤낮으로 데모했었던 학창시절을 보내고 급기야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가차해온 소위 '유신(維新)'이라는 군부체제 하의 일인독재도 경험했고, 정치꾼들의 무한 방종을 억압한 결과 성공리에 마무리된 1.2.3차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고속도로라는 나라의 대동맥이 건설되면서 급속히 성장했던 산업화로 인하여 일자리가 넘쳐나서 취업해야 할 곳을 쇼핑할 정도로 일자리가 넘치면서 생동감 넘치는 사회도 경험했다.
우리나라 1인당 GNP USD61일때 국제경쟁입찰로 미국대사관 건설공사를 따냈던 1인당 GNP USD 1260의 필리핀을 부러위하던 나라가 어느새 USD35000여로 급속 성장하면서 '미국의 원조로 연명'하던 나라에서 이제는 '다른 나라를 원조' 해주는 나라로 급속 성장했던 반면 일인독재하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 때문에 경제가 급속직하(急速直下)한 탓에 '원조하던 나라'에서 '원조 받는 나라'로, 또 이제는 대학을 졸업한 어엿한 여성 엘리트들이 남의 나라(특히 우리나라) 가정부로 팔려오는 기가막힌 현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면서 무능한 지도자가 나라와 국민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를 실감하고 있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100만불도 수출하지 못하여 나라가 이를 달성시키고자 100만불 수출탑상을 내걸 정도로 최빈국에서 이제는 몇조단위 수출국가로 급속 성장하는 나라를 보고 있기도 하다.
자연의 이치는 '음양제로섬'이라서 좋은게 있으면 그만큼 나쁜 것도 있기 마련이라 급속 성장으로 경제적 호황과 여유를 느끼는 만큼 정신적인 성장은 물질적인 성장을 못쫓아와서 사회곳곳에서, 특히 정치분야에서는 피를 먹고 성장하는 민주주의 특성상 정치적 민주화는 거의 막장으로 가고 있는 막장드라마를 보는듯한 기막힌 꼴을 보고 있다.
그 사이 소위 '민주화'라는 미명하에 내가 낸 세금으로 놀고 먹는 날 건달들이 판을 치는 세상도 보고 있고, 또 각종 '언론 육성', 문화.체육.예술 지원과 육성'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하에 없어져야 할 일부 경쟁력 없는 신문.방송. 문화. 체육.예술 등이 국민이 낸 세금을 아귀(餓鬼)마냥 뜯어먹고 버젓이 운영되면서 놀고 먹는 눈꼴 사나운 못볼 꼬라지도 보고 있다.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에 시골서당에 다녔고, 중교시절에는 태권도 학원과 고교시절 학교앞 심도관(心道館)에 다녔기에 무도(武道)에 관심이 있어서 차력(借力)을 알고자 고교시절 도서관 장서들을 거의 다 봤고, 대학에서는 검신(劍神)으로 불리웠던 우리나라 최고의 유단자인 검도 9단의 도모(某) 선생에게 경찰국 상무관에서 검도를 배우면서 이 바닥에 인연을 맺은 후 전국의 기인일사(奇人逸士)들을 찾아다니면서 이 세상에 없는 이들을 많이 만나서 보고 듣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물질 창조와 소거(消去)를 마음대로 하는 세수(歲壽) 450세(당시 나이)인 분도 있었고 사과씨를 땅에 심어서 단 2시간만에 큰 나무로 성장시켜서 사과를 열리게 해서 따서 먹게 해준 분도 있었다. 그 당시는 내가 아는 현대과학과 지구장법칙 및 우주중력법칙상 도저히 이해가 되지를 않았는데 후일 기(氣)에 통달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고 나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선가(仙家)에 발을 담그면서 부터 선가와 도문(道門)을 들락거리고 주유천하(周遊天下) 하다가 인연이 닿아서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한달동안 네팔의 푼힐전망대(3400m)
와 데우랄리를 거쳐 장엄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130m)를 올랐고, 미국 출장시 미국 가는 비행기안에서도 보이는 구름 위로 우뚝 솟아있는 북미의 최고봉이라는 흰 눈이 덮혀있는 마운틴 레이니어(4392m) 및 카자흐스탄을 둘러싸고 있는 만년설이 뒤덮흰 천산산맥의 최고봉인 해발 5130m의 따우갈산(따우갈은 카자크어로 산이라는 뜻)도 올랐는데 이 산을 오르고 보니 온 세상이 내 발 아래로 보였다.
또한, 차마고도란 다쿠멘터리 덕분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해발 5396m의 하비(哈巴)설산과 해발 5596m의 위롱쉐산(玉龍설山) 사이 해발 2500m ~ 3200m에 조성되어 있는 아주 좁은 소로길[그래서 새와 쥐만 다닐 수 있는 길이라는 뜻에서 조로서도(鳥路鼠道)라 불림]로 티벳 천창을 지나가는 엄청난 낭떠러지길로 다소 위험한 차마고도를 보름 동안 걸으면서 옥룡설산 최고봉인 선자두(5596m)를 올랐을때 늘 봐왔었던 그런 지구가 아닌 외계행성을 봤고, 안나푸루나 베이스캠프를 올랐을때 어찌나 크게 울리던지 마치 북치는 소리 같으면서도 심장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왕중양(王重陽)이 창시한 중국도교 전진교 용문파(龍門派)의 제18대 전인(傳人. 將敎)이라는 일면식도 없는 분이 뜬금없이 "물어볼것이 있다"면서 찾아와서 사흘 밤낮을 성명쌍수(性命雙修)로 토론을 한 후 "화산 인후봉(華山咽喉峰. 날아가지 않으면 갈수없는 곳)에서 봅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시라졌다.
이후 우리기공회 회원들과 전국 방방곡곡 명산대천(名山大川)과 명찰(名刹).암자(庵子). 숨은 토굴과 숨어있기에 찾기 어려운 암자 및 명당(明堂) 등을 간산답사(看山踏査)하면서 좋은 기를 받기 위해서 그곳(암자. 사찰. 토굴. 산중)에서 자면서 수련하다보니 어느날 나무도 말을 걸어오고 돌맹이도 말을 걸어오고 산새도 문안차 아침인사를 해오드라.
뿐만아니라, 계룡산에서 수련할때는 천문(天門)이 열리는 자시(子時)에 고약한 검은 기운들이 아직 축기(蓄氣)전인 회원들의 목을 조르면서 그 기운을 잠식하기도 해서 혼을 내고 쫒아내기도 했다.
유럽인들은 만물정령(萬物精靈)을, 아메리칸 인디언들이나 운남(雲南)에 사는 니시족(納西族)들은 만물개신(萬物皆神)을 믿고 있는데 이는 인간은 누구나 깨끗하고 맑은 정신과 무념무상한 마음을 가진다면 볼수도 있고 느낄수도 있으며 소통도 가능하다. 이것이 소위 선가나 도가에서 말하는 통신통령(通神通靈)이고 이보통령(耳報通靈)이다.
5000년 인류사에서 수 많은 선현(先賢)들과 현철(賢哲)들 및 선지식들이 한결같은 의문을 품고 절치부심토록 갈구했지만 뚜렸한 정답을 찾지못한 의문점들이 세가지가 있으니 ,
바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왜 사는가? " 이다.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일뿐인데 그 나일뿐인 나는 누구인가?
우리나라 팔만대장경의 원본격으로 중국 원나라 경덕연간에 편찬한 '경덕전등록' 중 현 대한불교 조계종의 바이불이라고 불리우는 '벽암록(佛果圜悟禪師碧嚴錄)'의 원본격인 '조사전(祖師傳)'에는 수많은 역대 조사들의 오도송과 해탈송이 나와 있는 바, 이들의 한결같은 의문도 바로 "나는 누구인가?"였다.
오죽했으면 임제종의 법맥(法脈)을 이은 우리나라 조계종 백양산문의 참두 공안이 바로 "이 뭣꼬?" 즉 "부모미생전 본래진면목(父母未生前 本來眞面目)?"이란 화두다.
조계종 전 종정이였던 서옹선사가 조실(祖室)로 있었던 고불총림 백양산문은 죄를 짓고 인간계로 내려와 양이 되었던 흰 양이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의 설법을 듣고 천계(天界)로 다시 올라갔다해서 백양사(白羊寺)란 이름이 붙여진 사찰로 백양산문의 이 참구화두의 근원은 위앙종의 위산문하에서 득도했었던 자한에 있으며, "부모미생전 본래진면목?"이란 화두는 항엄의 화두다.
결좌부좌하고 면벽한체 이 화두를 들고 참구해 보시라.
내가 누군가가 보이는지를.
(2) 나는 어디서 왔는가?
부모가 낳았으니 나는 부모로 부터 왔지만, 그 부모는 또 어디서? 를 계속 참구해가다보면 결국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로 귀결된다.
인간은 어디서 왔을까?
인류의 역사는 고작 10,000년, 그것도 희미한 기록이나 흔적이라도 남아있는 것으로 보면 고작
5000년 밖에 안되지만, 찰스 다아윈의 진화론에 의거하여 양서류에서 진화되었다는 가설만 있을뿐 아직도 어디서 왔는지는 오리무중이다.
저 멀리 수십억년 전의 우주탄생은 커녕 고작 5000년 전의 인류탄생도 우리는 아직까지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선가의 옛 선현들은
'태초에 빛이 생기고 이 빛이 대폭발하면서 입자(氣)
가 만들어지면서 이 입자들이 모여서 온 우주 천지자연과 만물이 생성되었다(소위 빅뱅이론)'고 하는데 이견(異見)이 없고 나도 이렇게 본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왜 왔을까?
(3)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무엇때문에 살까?
먹기위해서.
일하기 위해서
후손을 남기기 위해서
그도 아니면,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사는걸까?
매일 아침 깨어나면 드는 의문이지만, 아직까지 그 답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답과는 상관없이 매일 아침 일어나서 씻고, 밥먹고, 양치하고, 똥싸고, 일하고, 주식시세판 보고, 사람 만나는 똑같은 일상의 반복 즉 다람쥐 체바퀴 돌리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이같은 일상적 의미가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날이 그날 같은 똑같은 날의 변함없는 반복인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명분을 잘도 갖다붙이고, 잘도 싸우고, 잘도 투쟁하고, 잘도 경쟁하면서 살아들 간다.
그같은 행위들이 그들의 삶에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침에 새봄을 맞아 활기차게 돋아나고 있는 고패삼을 보고 있노라면 '때 되면 절기기운따라 어김없이 생을 반복하는 자연현상'에 따라서 인간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뿐.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닌데도 인간들은 쓸데없이 조그만 것에 목메면서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한다. 그러면서 또 쓸데없이 오래살려고 발버둥친다.
지나간 어제나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이나 하나도 변하거나 바뀐게 없는 삶을 살면서도.
그러면서도 뭣하려, 또 뭣때문에 그리 오래 살려고 발버둥칠까?
인간의 눈에 하잘것 없어 보이는 하루살이를 보면 인간의 삶이 반면교사적(反面敎師的)으로 보인다.
아침에 태어나서 아침에 요절하나 아침에 태어나서
점심때 죽으나, 천수를 다 누려서 저녁때 죽으나 100년을 사는 인간의 눈에는 그거나 저거나 다 하잘것없는 도찐개찐으로 다 부질없는 짓으로 보일뿐, 뭐 특별한 것이 없지만, 하루살이의 눈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억겁을 사는 존재의 눈에는 인간의 100년 삶도 하루살이 삶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럼, 과연 신선들처럼 억겁을 사는게 좋은 것일까?
인간은 늘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추구한다. 진나라 시황제 영정부터 시작해서 오느날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다 장생불로(長生不老)하고 싶어한다.
근데, 오늘이나 다가오는 내일이나 다람쥐 체바퀴 돌리듯이 똑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굳이 장생불로가 왜 필요할까? 귀찮기만 한 것일뿐.
한때 나도 인간의 몸을 가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영생(羽化登仙)하고자 피나게 수련해서 그 경지까지 갔었고 그럴기회가 왔지만 부질없는 짓이라서 스스로 포기했다.
그렇게 천년 만년 사는게 뭔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한창 수련하던 시절 세수 500세가 넘은 개운당조사를 도장산(道藏山)에서 만났을때 사는게 궁금해서 물어봤다.
"사시는게 어떠세요?"
"........."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 눈에는 다 부질없는 짓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곳에서 왜 사는가를 물어봤지만 해답은 듣지 못했다. 아니 원래 해답이 없는 질문이었으리라.
우리는 왜 사는가?
매일 아침 되묻는 질문이나 여태까지 어느 누구도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
고작 한다는 소리가
生也一片浮雲起(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며
死也一片浮雲滅(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
浮雲自體本無實(본디 뜬구름이란 그 자체가 實體가 없는 것)이니
生死去來亦如然(삶과 죽음, 過去와 未來, 인간의 오고 감이 또한 이와 같구나!)
- 함허득통화상게송(涵虛得通和尙偈頌)
이 또한 하나 마나한 뜬 구름 잡는 부질없는 헛소리로 그야말로 그저 뜬구름 뜨다니는 소리일뿐이다.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닌 것을!
당(唐)나라 시성(詩聖)이라는 두보(杜甫)는 그의 명시(名詩) '곡강(曲江)'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읊었다. 요즘말로 '칠십까지 사는 인간 드물다'라는 뜻이다.
그는 '곡강이수(曲江二首)'의 제 2수(首)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
조회에서 돌아와 날마다 옷을 전당잡히고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
매일을 강 어구에서 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
술빚이야 늘 가는 곳마다 있지만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사람이 칠십 살기 옛날부터 드물다네.
穿花蛺蝶深深見(천화협접심심견)
꽃 사이 나는 나비는 보일 듯 말 듯 날고
點水蜻蜓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
물을 치고 나는 잠자리 천천히 날아 다니네.
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류전)
만물은 함께 유전한다고 봄 풍광에 말 전하노니
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
잠시 감상함을 방해하지 말거니"
그런데 요즘은 영양이 좋고 의술이 발달하다보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들 백세까지 살려고 한다.
2025년 한국국민 중 70세 이상은 전체의 13.9%로
20세 인구보다 많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국가데이터처 자료), 지난해 20대 인구는 630만2000명으로 전년보다 19만3000명이 줄어든 반면 70대 이상 인구는 지난해 654만3000명을 기록해 24만1000명 차이로 20대를 앞질렀다. 70대 이상 인구가 20대 인구보다 많아진 것은 1925년 통계 집계 이후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하여, 우리나라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그기에 나도 들어가서 70을 살고 80고개를 바라보다보니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고 인생도 무상(無常)하다.
전쟁기, 격동기, 격변기, 보릿고개, 성장기, 안정기, 급속한 물질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국민들의 정신적 공황기, 때로는정신병자가 아닌지 의심스러운 정치꾼들의 막장기를 겪고보니 일체가 무상(無常)이라.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권력이 높고 많아도,
아무리 명예가 높아도,
아무리 인기가 높아도,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아무리 발버둥쳐도,
누구나 다 예외없이
때가 되면 시중의 장삼이사(張三李四)가 가듯이
그렇게 누구나 다 예외없이 간다.
해서 제행무상이요 인생무상이다.
이점에서만 보면, 장자크 루소(1712년 6월28일~1778년 7월2일)가 외친 "모든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사회계약론)"는 만민평등사상은 일견 타당한 것 같지만, 실제 우리직원들을 관찰해본 결과는 '인간은 절대 평등하지 않고 그 능력도 천차만별이였다.
하여, 칠십년을 살다보니,
돈도, 명예도, 재산도, 물질도, 물건도, 친구도, 허영도, 사치도, 귀중품도, 주위사람들도, 욕심도 모두 다 부질없고 그저 믿을 건 건강한 시체에 깃든 건전한 정신만이 남에게 부담을 주지않으면서 인생을 내 페이스대로 즐겁고 보람되게 만들수있다.
하여 마음 먹기 나름 즉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해서 이것을 빨리 깨달은 사람은 인생을 재미있게 즐기다 갈것이고, 그렇지 못한 인간들은 힘들게 살다갈 것이다.
인류의 성인이라 부리우는 네명 중 소크라테스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 즉 고다마. 예수. 공구 등은 자신만을 아는 철저한 Egoist들이다. 이들은 말로는 "인간관계 즉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더불어 살아가야한다"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그들은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다갔다. 이는 본인의 삶을 위해서 처자식을 버리고 수도에 전념한 고다마에서 보다 더 극명해진다.
나도 내 삶을 위해서 절간이나 산으로 들어가면 아주 마음 편히 살수있겠지만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책임 때문에 못하고 있듯이 다른 분들도 똑같지 않을까 보여진다.
나이 칠십을 살아보니 다른 건 다 부질없고 두 다리가 튼튼해야 가고 싶은 델 갈수가 있고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삶을 편하게 산수가 있다
하여,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만 인생이다.
이 문장이 가진 무게는 젊을 때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20대, 30대에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르고,
40대, 50대에는 여전히 등산을 다니며
“아직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70대를 넘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화장실 가는 것,
현관문 여는 것,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이 모든 게 협상의 대상이 된다.
젊을 때 우리는 성취, 돈, 평판을 위해 달렸다.
승진, 연봉, 사회적 지위가 삶의 척도였다.
밤을 새워 일했고, 건강은 담보로 맡겼다.
“나중에 쉬면 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나중이 왔을 때, 쉬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노년에는 정작 아주 작은 것들이 삶의 질을 가른다.
스스로 양말을 신을 수 있는가?
혼자 목욕을 할 수 있는가?
손자를 보러 버스를 탈 수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과거의 직함이나 계급장, 명성, 인기 등과 가지고 있는 통장 잔고는 빚을 비내고 무력해진다.
걷기, 일어서기, 계단 오르기.
이런 단순한 동작이 무너지는 순간, 삶 전체가 흔들린다.
처음에는 “오늘따라 좀 힘드네”로 시작한다.
그러다 지팡이를 짚게 되고,
이내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날이 오거나 이름 등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온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다.
기본 체력은 노후의 독립성과 자존심을 지키는
최소 필수조건이었다는 것을.
돈이 많아도 이 능력을 잃으면 생활의 자유 대부분을 잃게 된다. 24시간 간병인을 고용할 수 있어도, 스스로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욕구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타인에게 의지해야 하는 순간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조금씩 깎여 나간다.
70 이후의 행복은 큰 재산이나 화려한 조건이 아니라 기본 체력에서 나온다.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 커피를 내릴 수 있는 것.
근처 공원까지 걸어가 벤치에 앉을 수 있는 것.
친구를 만나러 동네 찻집에 갈 수 있는 것.
이런 평범한 일상이 가능할 때,
노년은 여전히 살아있는 삶이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아직 계단을 오를 수 있고,
버스에 뛰어오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이다.
그 축복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오늘도 걷고, 움직이고, 몸을 쓰는 것.
근육은 배신하지 않는다.
50대에 쌓아둔 근력은 70대의 존엄이 되고,
60대에 유지한 유연성은 80대의 자유가 된다.
인생의 마지막 10년, 20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몸을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명품 가방이나 고급시계를 사는 것보다, 매일 30분 걷는 습관이 더 값질 것이다.
은퇴자금을 모으는 것만큼, 스쿼트 10개를 할 수 있는 허벅지 근육을 모으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결국 인생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쓰이는지도 모른다.
“나는 끝까지 내 발로 걸으면서 갔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품위 있는 결말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심산(深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1.08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
작성자마가목리 작성시간 26.01.08 저의 관심분야이기도해서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속의 만남과 수련들이 심산님의 실제 경험체험인지 여쭤보고싶군요.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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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심산(深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1.08 실제 경험입니다.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 -
작성자심바라 작성시간 26.01.08 긴 터널을 벗어난 후 느끼는 환희!
인생의 여정에서 마음이 편하면 바로 행복이지요. -
답댓글 작성자심산(深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1.08 맞아요.
다 내려놓으면 막힌것 같았던 속이 후련하면서 상쾌하고 시원해지지요.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