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십자가(놋뱀)만 바라보는가?
요한복음 3:14-21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혹시 작년에 미국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팀 티보우(Tim Tebow)라는 풋볼 선수를 기억하십니까? 크리스천이라면 풋볼 게임을 할 때마다 눈 밑에 까만색 바탕에 흰 글자로 “John 3:16”이라고 쓴 아이 패치를 붙이고 경기를 했던 팀 티보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대학시절에 경기를 할 때마다“John 3:16”이라고 쓴 아이 패치를 붙이고 경기를 했기 때문에 “스포츠 선교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NFL 덴버 브롱코스에 입단한 뒤에는 규정에 따라 아이패치가 금지되어서 ‘요한복음 3장16절’이라는 패치를 붙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경기 시작과 경기 중간에 한쪽 무릎을 꿇고 경기장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알렸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은 ‘티보잉’이라고 불렀고,티보잉의 열풍이 불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 무릎에 한쪽 팔을 대고 기도하는 자세를 따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결승전을 앞둔 경기에서 정말 대단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작년(2012년)1월8일에 피츠버그의 스틸러스팀과의 경기를 하는 도중, 3쿼터 23대23 동점인 상황에서 연장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팀 티보우는 평소에 패싱을 잘하지 못했는데, 그날은 패싱으로 터치다운을 성공하여 4쿼터 역전승을 했습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그날 기록한 10개의 총 패스 길이는 316야드였습니다. 패스 한 개마다 31.6야드를 기록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리서치 조사결과 그날 시청률은31.6%였다고 합니다. 그날의 승리 이후에 구글에서 요한복음 3장16절은 1억2천번이나 검색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요한복음 3장16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모두들 외우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외우고는 있지만, 그 말씀에 대해 잘못 해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오해를 풀고 그 말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세상’이라는 헬라어는‘κόσμος(코스모스)’입니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세상’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름답게 장식하다는 뜻의 ‘장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영어 cosmos(카즈모스)가 나왔는데, 영어의 코스모스는 ‘우주’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질서 정연하게 장식해 놓으신 것이 바로 ‘우주’(universe)입니다. 여기에서 ‘화장품’이라는 cosmetic(카즈메틱)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쓰여진 말 그대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그 말 속에 숨어있는 다른 뜻을 찾아야 하느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영적인 사람만이 구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진리이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이큐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니고데모처럼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성경에 능통한 사람일지라도 거듭난다(born again)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세상’을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 그래서 항상 ‘거룩’과 ‘세상’을 분리해서 말씀합니다. 또한 “세상은 마귀에게 속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씀하는 ‘코스모스’라고 하는 ‘세상’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지옥에 가야만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성경에서는 또다른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16에서 쓰인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야만 하는 사람들 중에서 택하심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된 사람들 즉 ‘교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17장9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세상’은 지옥에 갈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이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주신 자들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17장6절을 보겠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여기에서 말씀하신 ‘세상’도 지옥에 갈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39-40절에도 예수님께서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또 사도행전 13장48절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3장16절에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라는 조건절이 붙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라는 조건이 있는데도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 때문에 혼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믿는 자”라는 말은, believe나 trust 정도의 말이 아니라 Faithfulness를 말합니다. 즉 believe 또는trust는 주체가 ‘나’입니다. 내가 믿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faithfulness라는 말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지 내가 어떠한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자마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택하신 자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쓰인 ‘세상’은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갈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장소를 말합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세상’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를 살펴보면, 본문에 나오는 ‘세상’은 보편적인 세상이 아닌,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택함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건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도록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이처럼 사랑한”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앞에 쓰여진 말씀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한국어 번역성경에는 빠져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예수님도 들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예수님도 들려야 한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이 사건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에서 미리암이 죽은 뒤에 물도 없고 무화과나 포도나 석류도 없다면서 왜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서 여기서 죽게하느냐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들을 향해 화를 내면서 반석을 2번 쳤습니다.그 일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고,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아론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호르산에서 죽습니다. 그 이후에 그들은 에돔땅을 지나서 가려고 하는데 에돔왕이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싸우자고 나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고 불렀습니다. ‘호르마(חָרְמָה, (k)Hormah, devotion)’라는 뜻은 ‘완전히 멸했다(destroy utterly, completely destroy, exterminate)’ 또는 ‘저주, 금지하다’라는 '카람 חָרַם'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이름 그대로 하나님은 그들을 전멸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의 뜻이 '바침, 헌신, 봉헌(devotion)'이란 의미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큰 전쟁의 승리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는 길이 힘이 들자, 그들의 마음이 상했습니다(discouraged). 아무리 힘들어도 얼마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으면 감사하면서 그 힘든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그래왔듯이 또다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데리고 나와서 이 광야에서 죽이려고 하느냐? 여기에는 빵도 없고 물도 없고, 우리가 먹는 이 끔찍한(קְלֹקֵל, contemptible, worthless) 음식은 정말 진절머리난다(קוּץ 쿠츠, loathe)”라고 불평하기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셨고 많은 사람이 불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겁이 난 사람들은 모세를 찾아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위에 달았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라는 말에서도 그랬듯이 이 부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뱀’은 무엇을 상집합니까? ‘사단’ ‘마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뱀에 물려서 죽은 것은 이해가 되지만,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쳐다보면 산다는 말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십계명에서 그 일을 금하고 계시며 또한 뱀은 죄와 마귀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뱀’에 대해 성경에서 긍정적으로 말한 부분이 한 군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1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애굽에서는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겼던 것과 또한 뱀의 신중한 속성 때문입니다. 뱀은 간교하고 징그럽기는 하지만, 매우 신중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위험이 닥치는 것을 너무나 잘 파악하여 아주 능숙능란하고 재빠르게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동물입니다.따라서 영적 전쟁터에서 살고있는 우리는 마귀의 공격이 언제, 어떻게, 누구로부터 올지 모르기 때문에 뱀처럼분별력을 갖고 지혜롭게 위험으로부터 잘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이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했던 뱀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이기 위해 광야에 나왔던 불뱀들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뱀을 보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왜 보내십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들을 깨시고 죽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을 다시 살리시기 위함(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 것이라는 ‘처방’을 내려주셨습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병원이나 약국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픈 사람은 의사의 진단을 받아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살려주기 위해 불뱀을 보내 그들을 죽이셨던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죽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싸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꾸만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까 고개를 돌린 그곳에서 고통을 받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현재 힘쓰고 애쓰고 있는 부분이 어느 부분입니까? 돈입니까? 가족입니까? 이웃입니까? 명예입니까? 사랑입니까?물질입니까? 무엇입니까? 거기에서부터 눈을 떼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있는 한, 여러분은 계속해서 그것을 통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뱀에 물리지 않은 사람은 놋뱀을 쳐다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심각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뱀에 물린 사람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놋뱀을 쳐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인데, 많은 이들이 가볍게 흘려버립니다.
뱀은 ‘죄’ 즉 ‘사단’을 뜻합니다. 그런데 뱀의 형상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저주’를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뱀’처럼 매달렸다고 하는 것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즉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모든 이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모두 전가(imputation)시켜서 죄인의 몸으로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뱀을 놋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놋(brass)’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구원을 주시려고 작정하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의 한 몸에 다 전가시켜서(imputation) 심판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심판을 받아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듯이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구원이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만 구원을 받는 것처럼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놋뱀을 쳐다보면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산다는 말입니다. 환난이나 죄악이나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뱀에 물려서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전혀 죽는다는 자각증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그것 한 번 쳐다본다고 정말로 내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돼?”라고 하면서 자신의 자아(ego)가 죽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절대로 놋뱀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아무리 “고개만 돌리면 되지 않느냐?”라고 권해도 목이 곧은 사람들 즉 교만한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목을 돌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견고한 진을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이 더 옳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식과 머리를 믿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불뱀에 물려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살 수있는 ‘복음(Gospel)’이라는 처방전을 주었지만, 그들은 평생을 교회에 다니면서도 목회자와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며 자기가 모든 것을 조종(control)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통해 주시는 그 약을 먹지 않고 그 치료를 거부하는 한,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훈련을 받아 연단되기 위해서는 풀무불 속에서 연단시키시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결코 힘든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냥 고개만 들라고 하십니다. 그저 우리가 향하고 있던 시선을 주님께로만 바꾸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없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죽기보다 힘이 듭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때, 물에 빠진 사람은 힘을 빼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조하는 사람이 곁에 가면, 그 사람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함께 빠져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구원해주는 이가 하라는대로 그저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죽을 것만 같아도, 잠시 물을 먹더라도, 힘을 빼고 구조하는 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으면서도 자기의 생각과 지식을 버리지 못하여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개를 돌린다고 하는 것, 지시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죽여야 하는 것이고 또한 내 생각이 옳지 않을 수 있다고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은 끊임없이 환경을 불평하고 주위 사람들을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불뱀에 물리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그리고 죽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만 요구하십니다. “나를 바라봐라.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은 나만 바라보아라. 그럴 수 없겠니? 고개를 돌리는 것이 그렇게 힘드니? 힘(교만, 의식주의 문제, 정욕, 명예 등)을 빼는 것이 그렇게 어렵니?”라고 하시며 지금도 애타게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불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인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법이 없으면 사람들은 무법천지 속에서 죄가 죄인 줄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런즉 선한 것(율법)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율법)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롬 7:7, 13). 즉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고 율법인 성경은 끊임없이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님의 구원의 길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인 불뱀에 물려야 합니다. 그리고 물렸습니다. 율법을 보면서아무런 통증(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는 양심에 화인맞은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면, 또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율법을 통해 조명해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관절과 골수를 찌르는 아픔이 우리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가시에 조금만 찔려도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우리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 관절과 골수를 양날가진 칼로 찌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찔림을 당할 때, 우리는 "이제 죽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 전혀 아프지 않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을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찔림을 받을 때, "목사님이 오늘 나 들으라고 일부러 저런 말씀을 하시는구나"라며 목사님을 욕합니다. 이런 사람은 찔림만 받고 회개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에 찔림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있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찔림을 받아 고통스러우면 회개하면 됩니다. 회개는 거듭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래서 찔림을 통해 너무나 고통스럽다면, 우리는 놋뱀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저는 주님 없으면 죽습니다. 지금 이 순간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저와 저희 부모님과 조상들의 죄로 인해 현재의 이러한 고통이 저와 저희 가정에 임했습니다. 이젠 참된 주의 종과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며 비난하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저 때문에 제 자녀들까지 고통스럽게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심판을 받을 사람은 저인데, 저 때문에 저를 대신하여 주님이 죽으셨네요”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고백과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딤전 1:15)라는 고백과 아울러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며 기독교의 참된 정신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공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이외의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의 모든 문제로부터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문제로부터 눈을 떼고 주님만,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육의 구원을 날마다 받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의 죄악과 허물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야할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저 대신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모든 저주를 받아 심판을 받게하심으로 구원하여 주신 그 놀라우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삶 속에서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저와 저희 조상들의 죄로 인한 결과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환경 속에 살아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며, 깨달음을 주는 주의 종을 향해 돌을 던지며 살기도 했습니다.그것이 모두 저의 곧은 목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너무 교만했습니다. 저희 부모님과 조상들도 너무나 주님 앞에서 목이 곧고 이마가 굳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환경을 통해 계속해서 주님께 나아와 죄악된 삶을 고백하여 거듭난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시는데도 너무나 목이 뻣뻣해서 주님께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저와 저희 조상들의 모든 죄를 주님께 내려놓사오니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끊임없이 반역을 일삼던 이스라엘을 통해 저희의 죄악을 볼 수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역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주님께 반역하며 주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핍박하며 죽이는 피의 역사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저희 가정은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원합니다.
간절히 주께 비옵나니 목이 곧아서 부러지지 말고, 성령 충만하여서 주께서 변화시켜주시는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순종의 종으로 주안에서 기쁘게 살기를 원합니다.
자주(가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을 원망하고 제 뜻대로 조종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고백하오니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제가 몰라서 그랬습니다. 저희 조상들도 몰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지각이 부족해서 그랬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대신 저희의 의가 충만해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살아계셔서 운동력있게 저희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에 찔려 고통스러울 때면, 회개보다는 오히려 더욱 비난하고 분노를 참지 못해 화를 냈습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인생을 무엇이 사랑스러워서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붙잡아주시며 구원해주시는지요?
저같으면, 벌써 이런 인생을 버리고도 또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감히 저희 인생이 따라갈 수 없어서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라고 표현하는가 봅니다.
주님은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필요없이 제 자아만 죽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저의 모든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요?
그저 고개만 돌려서 놋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는데... 현재 집중하고 있는 문제에서 시선만 돌려서 그리스도만 바라보면 되는데... 그렇게 시선을 바꾸고 고개만 돌리는 일이 왜 그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성령의 충만함 속에 살지 못하고, 아직도 제 자신을 부인하지 못해 제 자아가 너무나 크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저의 모든 견고한 진들을 주님 앞에 무릎꿇게 인도하여 주시고, 단단한 이마와 곧은 목과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오늘도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시고, 성경 말씀을 조명해주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씀을 제대로 알고 깨달은대로 순종하며 충성된 주님의 군사로서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 퀸즈 리폼드 교회
New York Queens Reformed Church
Rev.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