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엡 6:11-13)

작성자김수경|작성시간13.10.01|조회수717 목록 댓글 0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

에베소서 6:11-13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에베소서 6장11절과 13절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야 하는 이유로 11절에서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하며 13절에서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싸움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뒤에서 조종하는 마귀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과 자꾸만 싸우려고 합니다. 분별력을 갖고있는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게 해도(웃어도, 울어도, 화를 내도) 그 싸움은 피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가려있는 상태에서는 지혜자의 지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며, 지혜가 빛이기 때문에 어둠이 더욱 싫어하여 그 빛을 없애기 위하여 자꾸만 달려드는 것입니다. 
 

"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잠 29:9=10). 

이런 저런 방법으로 피하면 피할수록 어둠의 속성은 더욱 달려드는 속성을 갖고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과의 다툼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지 말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노를 품은 자는 언제 그 노를 드러낼 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다툼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를 본받아서 우리의 영혼까지 늪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전자전" "Monkey see monkey do"라는 말이 있듯이 나쁜 것은 배우라고 하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배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주 그러한 행위를 보고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사람과 함께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찌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잠 22:24-25). 

크리스천이라면 사람을 통해 화가 나도록 하는 마귀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귀의 궤계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서 자꾸만 거짓말을 하며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영적인 말을 하면 너무나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마귀에게 속해있는 사람은 영적인 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의 세계를 착각합니다. 영의 세계는 성령과 마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다니지만 경건하게 살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그래도 교회에 다니니까 아직 성령은 받지 않았어도 중간 영쯤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마 마귀에게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기쁨),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확실히 그의 언행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주님 안에 거한다면 빛되신 주님의 자녀답게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한 빛의 열매를 맺습니다. 
에베소서 4장을 보면 마귀의 궤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4:14-15,25-27, 31)

영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은 여러 가지로 꾸며서 하는 말들을 들으며 요동합니다. 바람이 부는대로 이리 저리 흔들려가는 요동하는 배처럼, 영적으로 아직 어린 아이의 수준에 있는 사람은 어떤 이가 거짓으로 또는 교활하게 하는 말과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이웃에 대해 거짓을 말해도 그것을 그대로 믿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참된 것과 거짓으로 말하는 궤술과 간사한 유혹을 구분하지 못하여 즉 믿음이 없어서 실족합니다. 또 믿음 대신에 다른 마음이 들어가는 순간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 73:2, 3). 

반면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고통 속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 순간에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하고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어둠을 드러내고 자신의 빛되심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신 것처럼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기도 하지만, 결코 실족하지 않습니다. 
"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시 37:30-33). 

그런데 빛되신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둠이 있는 밤에 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실족할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요 11:10).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6). 

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도 감옥에 갇히게 되자 즉 어려움이 닥치자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정말로 메시야입니까?"라고 물어보게 했고,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라며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에 그가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는 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 사람의 열매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말을 듣고 판단하는 실수를 너무나 많이 저지릅니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께 세례를 주면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리는 것도 보았고, 자기 입으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멜 수 없는 사람이며, 그분의 앞길을 인도하기 위해 온 사람일 뿐이며, 그분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헤롯에게 잡혀서 감옥에 들어가자 갑자기 그 동안 자기가 전해왔던 메시야에 대해 회의감에 빠지고 의심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것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 11:11)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즉 모든 인류 가운데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만나서 직접 예수님의 앞길을 닦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기 때문에 그 모든 선지자들보다도 가장 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의심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작은 자'는 예수님 이후의 신약의 성도들을 말하고, '큰 이'는 세례요한이 대표하고 있는 구약의 성도들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구속의 사건을 확실히 알고 믿은 것이지만, 구약의 성도들은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할 뿐이었고, 그것이 확실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즉 세례요한은 구약의 모든 성도들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아무리 보잘 것없는 아이라고 할지라도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용기있게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만, 소심하여 쉽게 좌절하고 우울해하며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우리에게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예수는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시면서 끊임없이 적들과 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극적으로 싸워서 차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적당히 봐주거나 타협하지 말고 완전히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노약자들도 있고 동물들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어린 아이들까지 죽이라고 하시는지, 또 동물들은 얼마든지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데 왜 죽이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깝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소심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했던 동물들의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버리셨고,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이 죽을 때까지 다시는 사울왕을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인본주의적으로 살아가면 안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자신이 피조물인 것을 잊고 하나님처럼 군림하려고 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소심한 마음이며, 신적 마음이 아니라 인간적인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담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군림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섬겨줍니다. 그러나 소심한 사람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안심이 되고,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어야만 마음이 놓이기 때문에 자꾸만 남을 비난하고 욕을 해서라도 그 사람보다 자신이 높다라는 것을 밝히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런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욕을 먹는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비판을 하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가 있어? 말도 안돼! 절대로 그러면 안되잖아?"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것을 보고 실족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테스트하기 위해서이지. 즉 네 믿음의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해서 믿음의 단계를 올려주어야 할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려고 하는 거란다"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래도 그건 말도 안 돼요"라고 따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토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따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셔도, 성경에는 뭐라고 써있어도 제 생각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라는 듯이 끊임없이 비판하고 계속해서 힘써서 '자신의 의'를 이루기 위해 살아갑니다. 

"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마귀가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아마 마귀는 이렇게 하고 있지 않을까요? "잘한다. 잘해. 그래 더 잘해라! 너희들끼리 치고 박고 다 해라. 절대로 용서하거나 사랑하면 안 된다~.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한다거나 이해한다거나 하면 절대로 안되는 거야! 이제 내가 없어도 당분간은 잘 싸울 수 있겠구나. 자~ 거짓말하고 이간질 시키고 질투심을 불어넣어주고 짜증과 분노를 일으키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폭언과 폭력을 행하게 하고 비난하게 하고 미워하게 하는 더러운 영들아! 우리 모두 힘차게 박수 쳐줄까? 쟤네들 봐라.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정말 대단하지 않냐?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너무 훌륭해! 부라보! 그럼 나는 잠깐 다른 곳에 가서 또 이간질 시키고 분란을 좀 일으켜야 겠다. 내가 올 때까지 그 마음 변치말고 잘 싸우고 있도록 너희 졸개들은 남아서 계속해서 그들을 부추겨라!"

영적인 미성숙자와 어둠에 속한 자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영적 미성숙자는 보이는 현상과 들리는 것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쉽게 넘어집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보다 자기의 자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자기가 주인이므로) 자기의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므로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어둠에 속한 자의 특징은 이미 실족한 상태에 있으면서 또한 동시에 다른 이들까지  넘어지게 합니다. "예수
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눅 17:1). 어둠에 속한 자는 이웃을 해하려고 참된 것을 말하거나 행하지 못하고 거짓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는 어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그 순간에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실제로는 자신의 모든 것이 옳다라고 착각하면서) 마귀가 조종하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나오는 거짓된 말들은 너무나 술술 잘 나옵니다. 왜냐하면 어둠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조종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렇게 사람을 뒤에서 조종하는 이유는,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거짓된 말들을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었는데, 저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정말 대단한 걸 깨달았네"라며 스스로 깨달음을 감탄하며 마귀가 넣어주는 말을 진짜로 믿어버리게 되어 계속해서 자기가 한 거짓말에 속아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자기 입을 통해 나온 말이 정말이라고 믿으면서, 거짓으로 말한 사람을 결코 사랑할 수 없고 원수처럼 미워하게 되어 더욱 어둠 속으로 깊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을 참이라고 믿어버리므로 계속해서 이웃에 대해 거짓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술술 나오던 그 말이 정말 중요한 것인데 미처 모르던 것을 깨달은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파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말을 그럴듯하게 지어내므로 사람들이 금방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7가지(7이라는 숫자는 완전을 뜻합니다. 즉 완전히) 가증한 것(거룩과 반대)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이 믿을만하게 들리더라도 믿지 말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불을 켜면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듯이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
감정 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찌라도 믿지 말 것은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찌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 거짓
 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잠 26:24-28)

참된 것이라는 것은 진리를 말하며, 진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공의를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이 없이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말은 모두 마귀로부터 온 거짓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한다"라고 합니다. 즉 자기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자기의 어떠한 것을 건드렸기 때문에 그것이 미워서 그 미움을 표현하다보니, 조금 덧붙여서 말하고 또 조금더 덧붙여서 말하다가 결국은 계속해서 그 미움과 질투의 대상에 대해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거짓을 버리고 이웃에게 참된 것을 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것 즉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둠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사랑을 이론적으로는 알더라도, 정말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희생의 사랑을 할 수도 없고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be angry, be wroth)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
ακά
empty, idle, worthless(ethically), 
senseless, empty headed man
)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foolish, fool)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마 5:22-26)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함부로 크리스천에게 화를 내는 것을 예수님께서 금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을 내는 것은 마귀의 궤계에 넘어간 것이므로, 그 순간은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옥에 가두어 결단코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옥'이 어디입니까? 22절에서 '지옥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그 순간은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듯 맹렬하게 상대방을 공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 속에 지옥의 불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그가 지옥불로 상대방을 태워서 죽이는 것처럼 그 역시 같은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결코 크리스천 형제 자매에게 화를 내거나 억울하게 거짓말을 지어내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께서 섬겨주신 것처럼 섬겨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성품이 아니라 마귀의 성품 즉 지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
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육체의 열매를 맺는 자. 갈 5:19-21)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 아니하리라
"(벧후 1:5-10)

우리가 "우리의 의"를 입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싸움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싸움터에서 "자기의 의"를 높이는 사람은 결코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이 가장 먼저 영적 전쟁터에서 쓰러지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는 자기를 죽이는 즉 자폭하기 위한 폭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데 그 이유는 "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일을 행한 후"라는 말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후"를 말합니다. 즉 영적 전쟁을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전신갑주를 갖춘 다음에 전쟁터에 서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직까지 구원의 투구와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와 믿음의 방패와 평화의 복음의 신발을 신지 않았다면, 마귀의 궤계에 넘어질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영적 전쟁터에 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은 훈련을 받아 무장을 하고 나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우리의 삶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앞장서서 나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섬겨주는 가운데 승리의 깃발을 올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무나 악한 세상 속에서 죄악에 물들어 살아가는 저를 오늘도 불쌍히 여기시사 주의 말씀으로 다시금 일어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저의 감정을 공격하며, 저의 단점과 부족한 것을 찔러서 기분을 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미워하게 하고, 제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게 하여 다른 이들도 실족시키고 또한 저까지 자꾸만 실족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귀가 저를 넘어지게 하고 또한 가족이나 이웃들과 이간질시켜서 서로 멀어지고 미워하도록 하기 위해서 쓰고있는 계략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너무나 쉽게 넘어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제 지식과 경험과 판단력을 믿고 비판하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둠에 속한 행위라는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잘못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섬겨주지 못하고 오히려 저를 섬기라고 하고 제 말에 복종하라고 하며 제 뜻대로 살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세례요한도 순간적으로 고난이 닥치자 실족한 것을 보면서, 어느 정도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보며 위로를 받지 말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진리안에 거함으로 예수님께서 저에게 보여주신 그 희생의 사랑과 섬김의 태도를 닮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저를 넘어뜨리려고 달려드는 모든 더러운 영을 다 내쫓아주시고, 온전히 성령으로만 충만케 하셔서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전신갑주를 입지 못함으로 소심한 상태로 인본주의 사상을 갖고 '자기의 의'라는 폭탄을 몸에 달고  
전쟁터에서 제일 먼저 타겟이 되어 쓰러지는 자가 되지 말고, 온전히 성령 안에서 담대한 믿음을 갖고 성령의 검과 말씀의 검으로 모든 악한 것들을 물리치도록 저를 도와주옵소서. 저를 무장시켜 주옵소서.
오늘도 저를 통하여서 모든 어둠이 물러가며, 온전히 주님의 빛만이 비추어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제가 서있는 모든 곳이 거룩한 땅으로 변화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 퀸즈 리폼드 교회
Rev.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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