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영적 전쟁터(예수님과 베드로)(엡 6:11-17)

작성자김수경|작성시간13.10.03|조회수91 목록 댓글 0

오늘의 말씀: 우리의 삶은 영적 전쟁터(예수님과 베드로)

에베소서 6:11-17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
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는 이유는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싸우기 싫은 사람은 전신갑주를 입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신갑주에 대해 관심도 없습니다. 오히려 입으라고 권하는 사람을 향해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돌을 던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화살을 맞고 힘들게 살아가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이대로 살다가 죽을래"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지각이 있어서 전쟁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알기에 전신갑주를 입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항상 전쟁을 두려워하며 전쟁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려고 하지만, 젊은 세대들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왠만하면 타협을 하려고 합니다. 싸우지 않으려고 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좋은 게 모두 좋은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평화를 위장하면서 속으로 이를 가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시 55:21). 악한 것과는 반드시 싸워야 합니다. 죄는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기 위해 나쁜 것을 알면서도 입다물고 미소짓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가증하게 보십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악한 것을 볼 때에 예수님처럼 "독사(마귀)의 자식들아"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는 즉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서부터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거룩입니다. 어둠과 타협하면서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는 자가 바로 위선자입니다.

12절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씨름'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말 그대로 레슬링(wrestling, 
πάλη
 팔레)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사람들과 매일 씨름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보이는 가족과 친구와 직장 상사나 동료들과 교회의 교인들과 몸으로 부딪치며 씨름이나 레슬링을 하듯이 서로 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가족과 이웃과 그렇게 몸부림치며 살아가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몸부림치며 싸워야 할 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한 영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가족과 이웃은 희생의 사랑으로 섬겨주어야할 대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어떨 때에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하며, 어떨 때에 잘못을 지적하며 수정해 주어야 할까요? 우리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사랑해야 할 때와 싸울 때를 혼동하여 그 상황이 뒤죽박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셨을 때 여러 답변이 나온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로 알고있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복이 있다면서 칭찬해주십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사흘 뒤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스승이 돌아가실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러한 것이 예수님께 결코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우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말해야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인간적인 염려(자기 딴에는 위로하고 배려한다는 것)를 이용하여 예수님의 구속사를 방해하려는 마귀의 음모를 아셨기 때문에 "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라고 호통을 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마 16:24-28).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너는 참 복이 있는 자구나!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거야! 네가 지금 했던 그 말을 기초로 내가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가, 금방 완전히 대조되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의 사역을 도와서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역을 못하도록 넘어지게 방해하고 있구나! 어떻게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으로 감정적으로만 생각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즉 나처럼 자기를 죽이고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재림할 때에, 너희들이 정말로 나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처럼 자신을 죽이며 희생하며 살았는지를 행위록에 기록된 것을 보면서 너희들이 행한대로 다 갚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근(칭찬)과 채찍(책망)을 한 자리에서 주셨는데, 당근을 먼저 주시고 채찍을 나중에 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채찍질을 한 다음에 당근을 주어야 교육에 효과가 있고, 인간관계도 그렇게 해야만 잘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세상의 지식이나 세상의 상식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살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나, 아직 교회는 다니지만 영적 미숙아나 또는 거듭나지 못한 이들에게는 베드로가 한 것처럼 이해가 되지 않고, 그 일이 틀린 것처럼 느껴지며, 그 일을 막아야 된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나서야만 그 일이 중단될 것 같아서 끼어들지만, 그것을 예수님은 칭찬하시지 않고 사단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렇게 심하게 말씀하셨지만, 마지막 말씀을 통해 베드로를 위로해 주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복음 9장에는 이것을 "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9:27).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예수께서 왕권을 갖고 계시기에 기록한 자의 의도에 따라 다르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뒤 8일 쯤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그들
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늘의 왕권을 갖고 계신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현재의 일만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현재 눈앞에 보여지는 스승의 죽음만 보며 즉 육적인 일만 보면서 슬퍼하거나 마음이 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하늘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일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바른 말을 할 때에는 칭찬을 해주시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영적이지 않고 세상적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말을 할 때에는 가차없이 "사단아"라며 책망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사단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수시로 사단과의 싸움을 하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사단과의 싸움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제자와 같이 함께 동고동락을 하거나 자주 만나는 사이 또는 매우 친한 사이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보았을 때에는 예수님처럼 단호하게 사단을 내쫓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감정적이거나 세상적인 생각을 멈추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 기분에 치우쳐서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래도 어떻게 그렇습니까? 내가 볼 때에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세요"라고 베드로처럼 물고 늘어집니다. 그럴 때에는 그것을 다 받아주어서는 안되고, 예수님처럼 잘라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는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단호히 말해주는 것을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나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영을 깨우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에 믿음이 있는 자는 실족하지 않지만, 믿음이 없는 자는 그 말을 듣는 당사자나 옆에서 듣는 사람 모두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실족하는 일로 인하여 화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실족시키는 자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실족시킨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을 했으나 상대방이 믿음이 없어서 상처를 받아서 실족한다는 말이 아니라, 죄를 지음으로 그 죄를 보며 실족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없어서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영적으로 옳은 말을 함으로 상처를 주는 것을 실족시키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제일 많이 연자멧돌을 달아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사단아! 너는 내 일을 망치는 자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단 둘이 있을 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베드로가 민망하고 창피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가르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복된 자의 행동이며 마귀의 행동인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실 때에 한 명도 다른 말로 대꾸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우리는, 물론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면서 언행을 삼가야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언행과 죄악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삼가라는 말이지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데도 잘못을 지적하면 상처를 받을까봐 그것을 조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긍정의 힘'을 쓴 조엘 오스틴처럼 "저는 회개하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좋은 말만 듣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라는 식으로 사람을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는 선한 목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교회를 어지럽히거나 같은 크리스천을 넘어뜨리는 말이 나온다면 그 즉시로 잘라내야만 합니다. 지도자에 대한 불평은 곧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간을 스데반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즉 교회에서 끊임없이 모세를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불뱀에 물려서 죽기도 하고 염병에 걸려서 죽기도 하고 땅이 갈라져서 음부로 곧장 빠져 죽기도 하며 수시로 불평할 때마다 죽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그 사람이 아무리 상처를 받더라도 지적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충고가 나중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자마자 "고맙다. 너 밖에 없다. 역시 내가 제자 하나는 정말 잘 키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래? 그런데 너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나를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할거야"라고 사람 복장터지는 말씀만 하십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났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내 기 좀 살려주시지, 왜 자꾸만 나를 밟아 뭉개실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정말 수제자 답게 "예수님, 제발 이제 그만 저 망신 좀 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며 자신의 충성을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굳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기에 성령을 받자 수천명을 회개의 길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그러한 말씀을 들었었기 때문에 정말로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뒤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 말씀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1-62). 들은 말씀이 있어야 우리는 생각을 하게 되고 회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충고가 회개의 길로 인도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사단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 1:19-20). 
 
"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 5:5). "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딤후 3:7-8)

교회 안에서만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고 밖에서 만나면 세상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교회 안에서도 세상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을 이야기하다보면 세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속에서의 크리스천의 삶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간만 보내며(kill time)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크리스천들이 모이면 영적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미성숙한 이들이 그것을 듣고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라고 이름을 쓴 것처럼 때로는 어떤 이가 잘못한 것을 예로 들면서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칭찬하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한 것처럼, 우리는 그 사람을 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영적인 일을 알기 위해서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전쟁터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인본주의 사상에 지배를 받으면서 상대방이나 듣는 사람의 기분이 나쁘거나 또는 불편할까봐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거나, 그 사람이 원하는 말만 해준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가 잘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없이 있다가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잘못한 사람의 영향을 받도록 내버려두는 실수를 범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서 예수님처럼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교회안에 들어가서 교회 안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모든 것을 뒤짚어 엎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을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또 느헤미야처럼 도비야의 세간을 다 밖으로 집어 던지고 방을 정결케 하며 레위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대로 삯을 받고 일하도록 하며,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 자기 나라 말은 잘 못하고 이방 나라말만 하는 것을 보며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을 때리며 머리털을 뽑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책망하며, 안식일에 물건을 팔러 오는 자들에게 한 번만 더 하면 잡을 것이라고 무섭게 공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비슷하게 흉내를 낼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보는대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아브라함
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요 3:38-47) 
"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 
"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3-15).

베드로와 제자들은 어떤 것이 사단의 일이라는 것을 확실히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었던 것이며, 모두 순교자의 길을 담대히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활 속에서 베드로처럼 "사단아, 또는 그런 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행동이다, 그런 것은 어둠의 종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그런 것은 목회자와 교회를 넘어뜨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듣더라도 기분은 나쁘지만, 그것을 통하여 무엇이 사단의 일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교인들이 각자 다른 신앙의 배경을 갖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들 중에는 참된 성도도 있지만, 영적 미숙아도 있고,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있고, 가라지도 있습니다. 사람을 사귀기 위해 나오는 사람도 있고, 돈을 목적으로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나오는 사람도 있고, 사회적 명성을 얻기 위해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여러 종류의 사람을 교회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가라지나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을 만족시키는 곳이 되면 절대로 안됩니다. 교회는 하나님만 만족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라 세상적이며 전혀 믿음이 없는 이들이 하는 말에 좌우되는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소리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교회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고, 또는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그들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들의 말을 더 듣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는 불행히도 영적 전쟁터에서 이미 패배한 교회이며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7교회 중에서 2교회만 칭찬을 받고 나머지 교회들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즉 교회의 3분의2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책망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교회는 안전합니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와 치열하게 잘 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방비상태로 마귀의 궤계와 전략에 넘어갔으면서도 넘어간 줄도 모르고 계속 어둠의 종노릇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히브리서 12장4절에는 "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서 왠만하면 피를 흘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최전선에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후방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최전선에서 피흘리며 싸워줄 교회의 목사와 리더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혹시라도 그들이 피흘리며 죽어가더라도 전쟁이 치열해지면, 그들이 막지 못해서 이렇게 우리가 고생을 당한다고 원망하고 불평만 한다면, 그 전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패배하게 되어있습니다. 전쟁 중에는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나 후방에 있는 사람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일사불란(
)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참모가 지시하는대로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 것이 전쟁중에 있는 군인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또한 전쟁 중에는 상사의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에는 군사재판도 없이 그 자리에서 사살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전쟁 중에는 한눈을 팔아도 안되고 불평을 해서도 안되고 무조건 입다물고 참모의 지시에 따라 충성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영적 전쟁터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한가하게 앉아서 "내 생각이 어떻느니, 인간적으로 볼 때 어떻느니..." 등의 말을 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옆에서 전우가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올 겨를이 없습니다. 일단 사람을 살리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살리려면, 그가 아프더라도 칼로 총알을 도려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칼로 살을 찢으면 얼마나 아프겠어요? 너무 한 것 아니에요? 피는 또 얼마나 흘리겠어요? 차라리 그냥 놔두세요"라고 한다면, 그처럼 멍청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리의 검 즉 말씀의 칼로 적군으로부터 총을 맞은 부위를 도려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living) 운동력(active)이 있어, 좌우에 날선(two-edged) 어떤 검(sword)보다도 예리하여 혼(soul)과 영(spirit)과 및 관절(joints)과 골수(marrow)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thoughts)과 뜻(intentions)을 감찰(judge)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영적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총을 맞아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양쪽에 날이 선 수술 칼로 그것을 도려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반드시 고통이 동반됩니다. 고통없는 수술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거나 치료를 받을 때에 아픈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씀으로 수술을 해줄 때 아프면, 수술하는 자의 실수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수술하는 도중에 그만두라고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어리석은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 이미 칼을 댔고 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상처가 악화될 수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수술하지 않고 아무 통증없이 고쳐줄 사람을 찾아 헤메이다가 칼을 댄 곳에 염증이 생기고 곪아 터져서 그것을 불평하며 원망하다가 고통가운데 인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있는 전쟁터는 어떠합니까? 안전합니까? 불안합니까? 적군의 총을 맞은 전우들은 얼마나 됩니까? 한쪽에서는 죽어 나가는데, 한쪽에서는 술이나 먹고 인터넷게임이나 TV만 보면서 농담이나 우스갯 소리로 전우가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전쟁이 치열해지면, 리더가 실수해서 그렇다면서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불평과 비판만 하지는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와 교회의 리더들을 위해 얼마나 피흘리기까지 기도하고 있습니까? (가짜가 아닌 진짜)교회의 리더들은 지금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땀흘려가며 기도와 말씀 속에서 죽을 힘을 다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한 리더를 위해 아론과 훌처럼 옆에서 지치지 않도록 기도와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합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죽음을 통해 세우신 교회를 세우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피흘려 세운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성도들도 역시 각자 자신의 피를 흘리는 고통을 감수하며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에게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이 즐겁고 기쁘기만 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의 길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내의 길이며 희생의 길이며 핍박받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걸어가는 성도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그 길을 찬송하며 기쁘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는 길은 고통의 길이지만, 가는 태도는 즐겁게 찬송하며 감사하며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전쟁터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감사와 찬송이 있는 곳에는 마귀가 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오늘도 고통의 길에서도 고통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고 감사의 제목으로 올려질 수 있음에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희생하신 그 보혈의 사랑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이렇게 세워졌는데 저희 교회들은 서로 육적인 것 때문에 싸우느라 정신들이 없습니다.
조금만 자기의 생각과 다르면 또 다른 파를 만들어 내며,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면 이단이라고 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창피할 정도로 세상보다 더 악한 곳이 교회인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교회 안에는 참 성도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영적 전쟁터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저 역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상하고, 보이는 사람과 다투며 언쟁을 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 보여주신 영적인 태도로 책망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으로 하는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경우도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기분이 나쁘고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주 제 생각이 앞섭니다. 주님의 생각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보다는 제 지식과 상식과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실수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제 확실히 무엇이 영적 전쟁인지 알았사오니, 쓸데없이 수다를 떠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온전히 크리스천으로서 합당한 말과 행동만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의 의지를 굳세게 하여 주옵소서.
때로는 성령께서 인도해주지 않아서 넘어진다며 책임을 모두 하나님께 전가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제가 하고싶지 않아서, 제 의지를 사용하지 않아서 넘어질 때가 대부분인데 아담의 후손이 아니랄까봐 자꾸만 환경과 하나님 탓을 하며 살아가는 이렇게 어리석은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주님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영적 전쟁터에서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입을 열고 싶을 때, 불평과 비판이 쏟아져 나오려고 할 때 제 입을 이사야의 입에 대셨던 숯불로 지져주시고 온전히 충성만 다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아론과 훌처럼 교회의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며 그를 세우는 가운데 저희 교회가 든든히 서가도록 힘쓰는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영적 전쟁에서 쓰러지지 말도록 진리의 말씀만 붙잡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매순간 승리의 깃발을 올리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 퀸즈 리폼드 교회
Rev.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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