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퀸즈 리폼드 교회
오늘의 말씀: 평안의 복음의 신
에베소서 6:15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배에 이어 세번째 장비는 평안의 복음의 신입니다. 의의 흉배는 심장을 보호하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발은 그렇게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신을 신지 않고 걸어다니다가 발을 다치면 아무 곳에도 갈 수 없기 때문에 신발이 3번째로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시대의 군인들의 군화는 영화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샌들 밑창에 징이 박혀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샌들은 미끄럽기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오늘날 지뢰를 숨기듯이 그 당시에는 적군을 다치게 하기 위하여 바닥에 못이나 나무 끝을 날카롭게 깎아서 땅에 박아놓기 때문에 그것을 밟지 않도록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조그마한 가시라도 발바닥을 찌르면 아파서 걷기가 힘들 때가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발을 찔렀을 경우,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넘어진 상태로 적군의 포로가 되든지 아니면 적군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첫째로 심장을 보호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전진하거나 후퇴할 때 신속히 움직일 수 있도록 어떤 신발을 신고 있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즘 여성들에게 유행하고 있는 킬힐(kill heels)을 보면, 예전에 하이힐(high heels)도 높다고 했는데, 킬힐은 보기만 해도 겁이 날 정도로 높고 또한 굽
이 무기같이 느껴집니다. 만약 그러한 것을 신고 발을 헛디딜 경우에는 발목이 삐거나 다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전쟁시에 그런 신발을 신고 싸우러 나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옷차림과 신발을 보면서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었다면 어디를 놀러간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츄레이닝복에 운동화를 신었다면 운동을 하러 나왔다고 생각할 것이며, 드레스에 구두를 신고 있거나 턱시도에 구두를 신고 있다면 파티나 결혼식에 간다고 생각할 것이며,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있다면 직장에 가거나 교회에 예배드리러 간다고 생각할 것이며 온통 검은색을 입고 신고있다면 장례식에 간다고 생각할 것이며 쪼리(flip-flops)나 슬리퍼를 신고있으면 바닷가에 놀러가거나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곳에 간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신고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분과 현재의 상태를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이 신어야 할 신발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땅에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선한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결코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이며 평안입니다. 그래서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으라는 것입니다.
또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에서 '예비한 것'이라는 헬라어 'ἑτοιμασία, 헤토이마시아'는 '준비가 갖추어진' 즉 '준비 태세, 준비 완료'(preparation, readiness)를 뜻하는 여성명사로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쓰인 단어입니다. 이것은 마귀와 싸우기 위하여 준비 태세를 갖춘 것을 말하며, 준비태세를 갖춘 내용물은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복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어떠한 복음(가짜 복음)도 마귀와 싸우기 위한 준비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복음이 그 속에 없고 다른 것들이 있다면,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달려나가거나 후퇴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에 빠져서 마귀의 포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동료들은 달려나가는데, 복음의 신을 신지 않고 있는 그 사람 때문에 모두 그 사람을 기다리느라 지체하다가 모두 적군의 포로가 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여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말씀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기동성을 길러야 합니다. 말씀의 기초가 없기 때문에 적군이 달려올 때에 싸우러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싸우러 나갈 수 있는 신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둥지둥 신발을 찾다가 적군의 포위를 당하여 포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 적군의 포로가 될까요? 세상은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누군가와 경쟁을 하여 경쟁 상대를 짓밟고 내가 올라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입니다. 도전자가 있고 챔피언이 있는 곳이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이기려고 하는 것을 우리 크리스천은 하면 안 됩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해야 할 것은 함께 이길 수 있는 것(win-win)이나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누구와 경쟁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기를 하고 스포츠도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이기려고 합니다. 이겨서 나의 가치를 스스로 높이 평가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쾌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에게 포로가 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절대로 경쟁을 하면 안 되고, 오히려 경쟁 상대의 발 밑에 꿇어 앉아서 그의 발을 닦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의의 경쟁은 해야합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섬겨주기 위해 꼴찌를 해준다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까지 경쟁이라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것을 세상에서는 등수를 따져야하므로 세상 방식으로 경쟁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 풍조에 휩쓸려 따라가지 말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 안에서는 라이벌이 있을 수 없고, 질투심이나 시기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지만 꼴찌를 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면 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1등을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1등입니다. 세상에서는 박수를 받을 일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꾸중을 들을 일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욱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어딘가를 간다는 말입니다.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걷거나 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를 갈 것인지 또 누구를 만날 것인지는 어떤 신발을 신었느냐로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그 신발은 반드시 평안의 복음의 신발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평안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마귀와 싸워서 승리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평화"라는 말을 착각합니다. 그래서 마귀와도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마귀와 타협하는 것을 평화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대적해서 싸워서 무찔러야 할 대상이지 불쌍하다고 손을 잡아줄 상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아주 심하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그리스도를 닮은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으라는 것은 발바닥에 징이 박혀서 어떠한 뾰족한 날이 선 무기로 마귀가 공격을 할지라도 뚫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으로 무장되어서 똑바로 서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가 쳐놓은 덫과 무기가 뚫고 들어와 피를 흘리며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쓰러진 자리에서 마귀의 포로가 되어 마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마귀와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요 14:27)
"(요 16:33).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육체를 따라가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할 수 없고, 성령의 말씀을 듣는 자는 육체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내가 육체의 열매를 맺고있는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참된 평안의 복음의 준비된 신을 신고 오늘도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육체
시간이 있으신 분은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고, 나름대로 종교생활을 통해 구원받기를 원하는데,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진짜 복음을 믿도록 허락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제 삶을 되돌아보면, 언제든지 뛰어나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으면서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지도 않았고,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고 그저 세상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그것이 옳은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크리스천은 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제가 위에 서야한다고 잘못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크리스천은 함께 잘 되어야 하며, 함께 선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교회 안에서도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질투하며 시기하면서 혼자 열등감에 빠져 힘들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부추기는 말에 휩쓸려서 그들의 거짓말에 동요되어 함께 욕하며 함께 비난하며 마귀의 종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복음의 신을 신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거짓 평화와 참된 평안을 제대로 분별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주시는 평안을 맛보며 살기 위하여 마귀와는 결코 타협하지 말고, 마귀의 종노릇을 하는 이들과 손을 잡거나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도록 저에게 분별력을 주시고 저를 지켜주옵소서.
그래서 참된 영적 분별력을 갖고 육체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매일 매순간 승리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그 동안 저에게서 맺혀졌던 모든 육체의 열매를 거두어 주시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저를 통하여 오늘 하루도 주께서만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Rev.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