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퀸즈 리폼드 교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오늘의 말씀: 듣고 응답하시는 하나님
호세아 2:21-23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2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응하다"라는 히브리어 '아나'(עָנָה)는 '대답하다(answer), 듣다(hear), 증거하다(testify), 노래하다(sing)'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바로 앞에 15절에서는 한국어 번역으로 "응대하다"라고 되어있지만, "저가 거기서 노래하기를"로 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and she shall sing there) 어렸을 때와 애굽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 2:15). 이 부분을 "... 저가 거기서 노래하기를(and she shall sing there) 어렸을 때와 애굽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21절과 22절에서는 "응하다"라는 단어가 "듣다(hear)"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미워하는 사람 또는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마음의 귀를 닫고 듣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또는 아예 말조차 하지 못하도록 못 들은 척하며 대꾸를 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원하는 대답이 아닌 엉뚱한 대답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대답'(answer)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듣고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고 말(주장)하는 것"입니다. 특히 상대방에게 듣기 싫으니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의 말만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귀를 막고 하는 말은 결코 부드러울 수가 없고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 결국은 그 칼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찌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시 58:4-5)
왜 그렇습니까? 마음 속에 꼬인 실타레가 풀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열 수가 없고, 미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는다는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는 고문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직까지 예수님의 용서와 긍휼을 몰라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로부터 용서와 긍휼함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랑하라고 주신 가족으로부터 사랑이 아닌 미움과 증오를 받으며 자랐다면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마음 속에 꼬여있는 실타레를 풀지 않고 놔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실타레를 풀기 위하여 접근하며 말을 걸어보지만, 너무나 많이 꼬여있는 사람과의 관계는 좀처럼 풀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을 풀 수가 없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못하므로 관계를 회복할 마음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상대하기 싫은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아직 예수님이 주인도 왕도 아니고 자신이 주인이기 때문에 사랑하며 관계를 잘 맺으며 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러한 주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잘 맺고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며, 인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계속해서 관계를 망쳐놓고 관계를 끊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엉뚱한 생각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과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고립된 삶을 살아가도록 부추깁니다.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간 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이야기를 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기를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고립된 것처럼 상대방도 고립시키기 위해 그가 보는 앞에서 다른 이들과 웃고 떠들며 연극배우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하신다"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용서하시며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주시자, 금방 교만해져서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호 13:1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활 속에서 가시덤불이 퍼지게 하시며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마다 담으로 막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거친 들로 데리고 나가셔서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시고 홀로서기를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호 2:8-9).
이스라엘을 위해 주셨던 모든 것을 다 빼앗으시고 징계하시며 훈련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하늘에 응답하시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그것들이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1장11절에서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라는 말씀의 성취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스르엘'의 뜻은 '심다'와 '흩어버리다'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어서,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씨를 뿌리듯 여기 저기 흩어버리시지만 궁극적으로 뿌린 씨앗이 땅에 심겨져 결실을 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23절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 흩어버렸던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심으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 동안 저주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이제는 축복의 대상으로 신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찌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12)
저주의 대상을 축복의 대상으로 신분을 변화시켜 주시는 이유를 23절에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즉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절대로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꾸만 그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토기와 같은 피조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 토기장이처럼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23절의 말씀은 2장1절 말씀의 반복입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즉 '로 루하마(לֹא רָחַם)'는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라는 뜻이며, '로 암미'(לֹא עַמִּי)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인데, 그 단어들 앞에 부정을 나타내는 '로(לֹא)'를 빼고 '긍휼히 여긴다'라는 '루하마'와 '백성'이라는 '암미'로 이름을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나님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했던 이스라엘인 우리를 이제는 긍휼히 여기시며,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백성으로 삼아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받아서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복 중의 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체험하여 사무엘을 낳은 한나는 다음과 같은 믿음의 기도를 했는데,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한나의 기도는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삼상 2:6-10).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며, 긍휼히 여길만한 일도 하지 않은 저를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저를 긍휼히 여겨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저보다 선하고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저같은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까?
주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셨는데, 저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도 사랑하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엄한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별로 알지 못하고 살았기에 별로 사랑이나 긍휼이나 은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생활이 습관화되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배려나 관심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베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를 주님께서는 긍휼히 여겨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만큼은 저를 사랑하시며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비록 제가 교만하여 잘못된 삶을 살지라도 징계의 가시와 담을 통해서라도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며 또다시 포도주와 곡식과 기름을 풍성히 내려주시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저는 마치 제가 잘나서 얻은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제가 똑똑하고 연구를 많이 해서 무엇을 잘 하는 것처럼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제가 잘 알고있어도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시면, 제 지식과 경험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서 날아가버린다는 것을 경험해놓고도, 사람들 앞에서는 왜 그렇게 자랑이 쉽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자신에 대한 것은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하셨는데도, 저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보다는 저를 자랑하고 저를 높이는 말을 너무나 많이 하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 손에 달려서 주께서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는데, 저는 마치 제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상대하고싶지 않은 사람이 말을 할 때에는 마음의 문을 꽉 닫고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의 말을 무시하며 대꾸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저의 이런 강퍅한 마음 때문에 제 주위가 얼마나 어둡고 힘들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제 위주로 생각하고 제 생각대로만 살아온 죄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도 제가 드리는 기도에 귀를 막고 계시다면, 저는 어떤 심정일까요?
저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제가 하는 말에 귀를 막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햐는 말에는 반드시 반응을 해야 하며, 그것도 제가 원하는대로 반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저 자신은, 다른 사람은 물론이며 하나님의 말씀에도 귀 기울여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도, 저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배우자조차 사랑하지 못하고 살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제 부모님이나 자녀나 형제들도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듣기만 할 뿐 실천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제가 기분이 좋을 때에는 열심히 실천하려고 하지만, 제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저는 제 마음과 귀를 막아버렸던 죄인입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께서 은혜를 베풀며 긍휼을 베풀어주시지 않으시면, 저는 살 수가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맛보며 저도 그렇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저를 고쳐주셔서 새롭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주옵소서.
저도 변화되지 않는 저 자신을 볼 때 정말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주여, 어서 속히 저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주여,
제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속히 변화시켜 주셔서 제 주위가 낮과 같이 밝은 천국을 이루어가며 살 수 있게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하여 제 주위를 환한 주님의 빛으로만 비추고 싶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엄습해오는 모든 어둠을 물리쳐 주시고, 주님의 빛만이 제 주위에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긍휼하심이 저를 통해서 흘러넘치게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의 삶을 어떻게 주께서 인도하시는지를 저의 삶을 통해 보여주옵소서.
주께서 제 기도 소리를 들으시는 것처럼, 저도 주님의 말씀에 청종하여 제 가족과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그 동안 잘못했던 것을 회개하며 살도록 저를 이끌어주옵소서.
가끔 마음과 귀를 닫았던 습관들이 사라지게 하시며, 상대하기 싫은 사람들과 관계를 끊는 습관도 없애주옵소서.
주께서 하라고 하시면 제 기분과 생각과 상관없이 할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귀를 막은 독사가 되어 주위를 힘들게 하는 삶이 아니라, 마음과 귀를 열고 모든 이들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저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저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주께서 주관하여 주셔서 제 뜻대로 살지 않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셨사오니, 제 마음을 제가 주장하지 못하도록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셔서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대로만 살게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 자신을 위하여 저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래서 변화된 저를 통하여 주께서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