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 (3)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호 8:8)

작성자김수경|작성시간14.08.13|조회수425 목록 댓글 0

오늘의 말씀: 하나님의 심판 (3)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

호세아 8:8

8. 이스라엘은 이미 삼키웠은즉 이제 열국 가운데 있는 것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 같도다

호세아 8장 8-10절까지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인하여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뒤에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8절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은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었을 때에 그의 마음에 흡족한 그릇이 있고 불만족스러운 그릇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기뻐하지 않는 그릇과 같다고 합니다. 만약 그릇을 만들었는데 불만족스럽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깨뜨려 버리거나 오물을 담는 쓰레기통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거나 구석에 처박아 둘 것입니다. 결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자리에는 그 그릇을 올려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은 깨뜨려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שָׁחַת 샤헤쓰, destroy, mar)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 18:2-4)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렘 19:11)
"모압의 모든 지붕에서와 거리 각처에서 애곡함이 있으니 내가 모압을 재미 없는 그릇 같이 깨뜨렸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48:38)

성경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그릇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귀히 쓰이는 그릇이며 다른 하나는 천히 쓰이는 그릇입니다. 또한 하나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이며 다른 하나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 9:21-23)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디모데후서 2장21절을 보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란 무엇입니까? 19절에서 언급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의 "불의"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의"는 세상의 불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것 이외의 모든 것 즉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선한 일 같아도 하나님께서 그것이 선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가 행한 착한일도 불의를 행한 것입니다. 

만약에 사탄을 숭배하는 롹 가수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을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했다면, 그것이 선한 일일까요? 세상에서는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뉴스에 떠들썩하게 보도하고 신문에는 대문짝만하게 화보를 실어서 알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초청하여 토크쇼의 주인공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볼 때에 그는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불의를 행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서 하는 모든 행위를 성경은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반대편에 있는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많은 이들을 자기처럼 사탄의 종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탄의 종노릇을 매우 성실히 충성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의 충성으로 인하여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이들은 그의 메세지를 따르고 그가 믿는 우상을 섬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착한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선한 일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21절에 쓰인 '불의'라는 헬라어 '아디키아(ἀδικία)'는 여성 명사로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쓰였습니다.
"행악(ἀδικία, iniquity)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눅 13:27)
"주인이 이 옳지 않은(ἀδικία, unjust)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눅 16: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ἀδικία, unrighteousness)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ἀδικία, unrighteousness)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곧 모든 불의(ἀδικία, unrighteousness),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9)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ἀδικία, unrighteousness)가 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롬 9:14)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ἀδικία, wrong)을 용서하라"(고후 12:13)
"혀는 곧 불이요 불의(ἀδικία, iniquity)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 3:6)

특히 디모데후서 2장 16-18절에서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21절에서 말씀하는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는 것은 교회안에 있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 더러움을 피하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4-5절을 보면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ἀδικία, unrighteousness)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ἀδικία, unrighteousness)의 삯을 사랑하다가...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12-15, 20- 22)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일컬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아노미아 ἀνομία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들은 또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마태복음 25장41절 이하에 나오는 왼편에 있는 염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왕 앞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 25:44)

이들은 열심히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내쫓고 선지자 노릇도 하며 많은 권능을 행하여 치유사역을 하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감옥에도 찾아가서 전도했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했던 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언제 하지 않았느냐?"라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자기 행위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성경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을 바리새인(오늘날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단)이라고 욕을 하면서 자기도 말씀을 지키지 않고 다른 이들도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라고 가르치고,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이나 습관이 되어서 고칠 수 없는 것은 율법의 행위라면서 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굳이 말씀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또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대로 다 지키면서 살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특히 구약은 이미 지나갔으므로 구약시대에 말씀했던 것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라고 가르치는 자에게 시비를 걸고 그를 넘어뜨리는 데에 앞장을 섭니다.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나 자기 고집(자기 의)이 우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것이 명령하는대로 살아가느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날 조차도 심판받는 자리에서 따지고 불평하며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그러므로 불의한 자의 태도는 교만하여 순종하지 않고 따지며 원망하며 자기의 고집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고집 즉 자기가 옳다라고 생각하며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하나님도 건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가인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동생 아벨을 죽이려고 죄악을 품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죄를 짓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고집을 굽히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동생을 죽입니다. 그후 하나님께서 또 찾아오셔서 그에게 동생이 어디있느냐고 물으시자 가인은 오히려 오만하게 자기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하면서 따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대로 살라고 권면하면 "네"하고 순종합니까? 아니면, "지금 내 상황을 몰라서 그러느냐?", "나를 이해해달라", "이것만 해결되면...",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어도 그것만큼은 지금은 할 수 없다", "지금은 내가 하고싶은 것이 따로 있다", "당신이나 잘 해라" 등의 반응을 보입니까?

예수님께서 "불법(아노미아 ἀνομία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하신 대상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말로 지켜야할 내면의 법(의 judgment, 인 mercy, 신 faith)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그릇의 겉은 깨끗이 잘 닦았는데, 안을 닦지 않아서 더러워서 음식을 담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judgment, mercy, and faith)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 23:23)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입니다.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와 쭉정이가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알곡은 천국백성이며 가라지와 쭉정이는 지옥자식들입니다. 그런데 쭉정이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아주 가볍게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분별이 되지만, 가라지는 알곡처럼 알맹이가 있어서 식별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또한 가라지들은 자신들도 알곡인 줄로 착각하며 살기 때문에 가장 불쌍하다는 말입니다. 

가라지들의 특징은 교회 안에서 중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흣을 했다"라는 것은 교회 안에서 리더쉽을 갖고 양무리를 치고 양육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으며 권능을 행하며 귀신을 쫓아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탄도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사탄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지만 그가 예수님께 했던 말은 사실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공중권세를 마귀가 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귀를 "이세상 임금"(요 12:31)이라고 하셨고, 성경은 그를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히 2:14), "악한 자"(요일 5:19)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9)

사탄은 매우 큰 능력을 갖고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사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그는 천사장 미가엘과 싸울 때에 "천사장 미가엘도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 1:9)라고 할 정도로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마가복음(5:9, 15)과 누가복음(8:30)에 기록된 거라사인 속에 들어있던 마귀는 자신을 "군대(레기온 λεγιών, legion)"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레기온(λεγιών)이라는 말을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군대" 그리고 마태복음 26장53절에서는 ""이라고 표현했는데, 각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군대의 숫자가 달라집니다. 예수님 당시 즉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는 그 숫자가 6천8백26명 정도였습니다(보병: 6,100명, 마병: 726명). 이처럼 사탄은 많은 마귀들과 귀신들을 거느리고 능력을 행합니다. 마가복음 16장17절에 기록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의 "귀신"에 대하여 원어로는 "데모니아(δαιμόνια)" 즉 마귀들(devils)이라는 복수로 쓰였습니다.

에스겔 28장 12절을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3-15절에서는 "...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라고 말씀하면서 마귀의 정체는 "불의를 행하는 자"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찬양하며 예배하는 천사들의 리더로 세움을 받았던 아름답고 완전히 능력을 갖춘 자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도취되어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신에 자신이 찬양을 받고 싶어져서 하나님께 반역을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천사장에서 마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귀의 행위가 바로 "불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가장 타락하기 쉬운 때는 칭찬을 받고싶어질 때이며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싶어질 때입니다. 그 순간 마귀가 틈을 타서 우리를 자기와 똑같이 교만해져서 타락하도록 이끌어가므로 정신을 차리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한순간에 공든탑이 무더지듯 하나님 앞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장 쉽게 무너지는 순간이 "공평하지 못하다"라고 생각할 때입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It's not fair!(불공평해요)"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이런 말은 대체로 마음이 많이 상했을 때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예나 지금이나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찌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겔 18:25)라고 반문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의 마음 속에 공평치 못하다는 마음을 심어줌으로 말미암아 불평 불만이 생기게 하여 불순종하며 반역하도록 유혹하기 떄문입니다. 태초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가 바로 불공평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동안 피조물로서 잘 살아왔던 인간은 갑자기 마귀가 심어주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 불평등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똑같이 되고 싶은 욕망이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면서 평등한 삶을 살기 위하여 반역의 길, 불순종의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금도 불공평하다(unfair)라고 생각되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누구는 교회에서 목사, 장로, 권사의 직책을 받았고 나는 겨우 집사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장로나 권사보다도 더 성경을 많이 알고있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장로나 권사가 그럴 수 있느냐며 비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목사라면 ... 해야하는데, 어떻게 목사가 그럴 수 있느냐며 사람들 앞에서 불평과 욕을 서슴없이 하고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비난하고 비판하는 이유는 "불공평의 원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불만족이 싹터서 열매로 맺힌 것이 바로 불공평이라는 타당한 이유를 갖고 하는 비난과 비판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왜 광야에서 그 많은 사람이 떼죽음을 당했습니까?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께 불평했기 때문입니다. 왜 모세만 리더가 되어야 하느냐며 자기들도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땅을 갈라지게 하여 모세에게 반기를 든 모든 자를 음부에 쳐넣으셨습니다. 또 가나안땅을 정탐할 때에도 모세가 아닌 다른 지도자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자고 했던 자들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모세를 원망하고 반기를 들었던 이유는 "불공평"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자기들도 얼마든지 모세의 자리에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모세의 하는 일들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불만족할 때에 가장 범죄하기 쉽습니다. 무언가 자기 생각과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 순간 인간은 쉽게 마귀의 밥이 됩니다. 그래서 마귀가 던지는 미끼를 덥썩 잡고 그것을 놓지 않으므로 마귀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온 몸이 상하는 줄도 모르고 그 미끼를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그것을 마귀는 너무나 잘 알기에 각 사람에게 맞는 미끼를 항상 준비하고 있다가 적당한 때가 오면 그것을 그의 눈앞에 던져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잡는 순간 마귀는 미끼를 문 먹이감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그가 불의한 자가 되어 불법을 행하도록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귀히 쓰는 그릇과 멸하기로 준비된 천히 쓰는 진노의 그릇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모든 불의한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씻음을 받아 새롭게 된 자들입니다. 즉 마귀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자가 된 자들입니다. 매순간 세상속에서 살기 때문에 죄의 유혹을 받으며 살아가면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베드로처럼 금방 뉘우치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밤새 침상을 적시며 회개한 뒤에는 회개한 것을 다시는 범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 즉 멸하기로 준비된 천히 쓰는 진노의 그릇은 마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도 하지만, 결코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의 티를 보면서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인신공격을 가하며 비난과 비판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즉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심판자이심을 모르고 자기가 심판자가 되어 자기의 가족과 교우들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여기 저기 칼을 휘두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방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들이 만든 법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자기들이 만든 신을 섬기라고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좋다고 생각한 백성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자기들이 만든 우상과 자기들이 만든 법을 따라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들과 방백들이 비난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자기들이 추종하고 있는 자들의 말에 따라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의를 밥먹듯이 행하여 "주여 주여"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마귀처럼 마지막 심판날에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고 하며 불못에 던져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그릇 즉 멸하기로 작정된 그릇들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디모데후서 2장20절에는 "금, 은, 나무, 질그릇"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큰 집"은 교회를 뜻하며 그릇은 교회 안에 있는 각 개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기도 하시고 천히 쓰기도 하시는 그릇을 달란트 비유에 대입해서 살펴본다면 "5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금그릇", "2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은그릇". "1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나무 또는 질그릇"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5달란트나 2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각기 그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서 두배로 이윤을 남겼으나 1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달란트를 땅 속에 뭍어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것"이라고 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게으르고 교만한 1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그나마 있던 한 달란트마저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저주를 받습니다. 즉 귀히 쓰는 그릇은 "주인의 즐거움"인 천국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고 게으르고 교만하여 자기의 달란트를 전혀 활용하지 않았던 천히 쓰는 그릇은 하나님의 기뻐하지 않는 그릇이므로 깨뜨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릇을 사용하려면 깨끗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그릇을 쓰려고 할 때에 가장 우선순위는 내가 원하는 그릇이냐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것이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원하는 그릇에 다른 것이 담겨져 있다면 그것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것을 버리고 깨끗이 씻어서 사용할 수도 있고, 다른 그릇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만든 그릇들인데, 그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샐러드를 먹자"라고 하신다면, 샐러드가 담겨져있는 그릇을 가져올 것입니다. 만약 샐러드가 담져진 것이 없다면 샐러드를 만들어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그릇에 담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릇에 무엇이 담겨져 있다면 그것을 다른 그릇에 옮기거나 버리고 깨끗이 씻은 뒤에 샐러드를 담아서 가져오거나 시간이 없을 때에는 깨끗한 다른 그릇에 담아서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샐러드를 가져올 때에도 드레싱은 가져오는 사람 마음대로 넣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가져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현재 어떤 상태에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깨끗이 닦아놓고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쓰고 싶으셔도 여러분의 고집과 세상의 잡다한 것들이 들어가 있어서 쓰실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준비(예비)된 자"라는 것은 성경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잘 가르칠 수 있는 기술이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너무 모르는 것이 많고 능력도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자신의 생각을 접고 무조건 "네"하고 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을래"라고 하면서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처럼 무책임하고 게으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교만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일 아무런 변화가 없이 살던 그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혹시나"하는 기대감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마귀가 쳐놓은 미끼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삶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권면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속삭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것은 이러한 마귀의 미끼에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세상에서도 인정해주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타가 공인하는 똑똑한 사람은 이미 마귀처럼 찬양을 받고 싶은 자리 즉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갈 준비가 되었거나 이미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삶의 주인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는 자와 항상 다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굽히는 순간 왕좌에서 내려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위에 있게 된다는 두려움과 절망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처럼 죽으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같고, "당신이나 잘 해라"라며 반항하며 빈정거리며 반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삶은 마귀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타락한 삶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이 되어 마지막날 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잠들지 말고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좌절해서도 않되며 교만해서도 안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부르시면 "네"하고 쓰임을 받게끔 깨끗이 씻어서 거룩하게 유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보다 다른 것에 더 관심이 있어서 깨끗이 씻고 싶지 않습니까? 조금은 남겨두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고 시간도 여러분이 정하지 않습니까? "지금 말고 조금만 더 있다가요...", "제가 원하는 어떤 것만 성취한 뒤에요...", "그러니까 그걸 도와주세요"라고 엉뚱한 기도만 하고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그 일꾼은 자신의 마음을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정결케 하여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는 그런 사람입니다. "언제쯤 나를 써주실까?"하며 고대하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써주실 그날까지 깨끗하고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날마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성령을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이런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어떠한 상황과 환경과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고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현재 내 그릇에 담겨져 있는 것들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있을지라도 버리게 해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이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속에 있는 더럽고 추악한 것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고 갖고싶은 것들을 깨끗이 몰아내어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으로써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방황하고 반항하며 불순종한 삶을 살아서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그릇인 더럽고 쓸 수 없는 그릇으로 전락하게 되어 그들이 의지하고 따라갔던 앗수르에 의해 망하는 것을 보며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스라엘의 삶을 보면, 저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과 별로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해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이 생각이 납니다.
인간의 역사는 에덴동산에서부터 불순종과 불의로 장식되어 왔습니다.
하나님 품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면 싸움이나 슬픔이 없이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저희는 하나님 품을 벗어나서 저희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지 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저희 속에 있는 죄의 속성으로 인하여 매순간 깨어있지 않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의 길에 서있거나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떠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저의 삶을 살펴보니 저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는 그릇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제 속에는 버리고 싶지 않은 욕망들이 있고, 그것들이 자주 꿈틀거리며 저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지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니 하나님보다 제 속에 있는 것들의 유혹이 강하게 저를 끌고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유혹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고, 그 유혹을 즐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의 삶이 토기장이가 던져서 깨어진 그릇처럼 자주 금이 가고 깨어지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그 유혹을 이루어달라고 오히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 기도 아닌 기도를 드렸습니다.
깨어진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자기가 원하는 그릇으로 만들어달라고 때를 쓰는 격이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저에게 깨닫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시기에 이런 깨달음을 주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런데 저는 자주 깨닫기는 하는데, 깨닫는 것에서 그치고 그 다음단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깨달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는데, 믿음이 없다면 신앙생활도 모두 헛일이 아닙니까? 그러하오니 주여, 저에게 진정한 믿음을 주옵소서.
그래서 깨닫는대로 행하는 언행일치의 삶, 안팎이 같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지금까지는 제가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려고 별로 노력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긍휼의 그릇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셔서 진심으로 온맘을 다하여 성화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주옵소서.
제 의지만으로는 너무나 힘이 듭니다. 때로는 결심도 하고 결단도 하지만, 주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결단하면 무엇합니까? 작심3일이라는 말도 있듯이 정말로 거룩한 성화의 삶이 쉽지가 않습니다. 
제 삶이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며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하심을 받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를 도와주옵소서. 이끌어주옵소서. 변화시켜 주옵소서.
오늘도 제 속에 있는 모든 불의함을 다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저의 고집과 자존심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도록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이제는 제 뜻대로 살지 말고 온전히 주님 뜻대로만 살아서 주님의 뜻이 저를 통하여 매일 매순간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진정으로 영광받기로 예비한 긍휼의 그릇이 되기를 소망하오니 저를 주님의 뜻대로 빚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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