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궤(Ark, 아론 אָרוֹן)

작성자김수경|작성시간14.09.03|조회수3,507 목록 댓글 0

오늘의 말씀: 언약궤(Ark, 아론 אָרוֹן)
출애굽기 25:10-16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12.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내지 말찌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성막에 들어가면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성소의 금등대와 떡상과 분향단을 지나 휘장 뒤에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있는 언약궤가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위에는 정금으로 만든 속죄소가 있으며 그 속죄소에는 두 그룹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법궤 또는 증거궤, 여호와(יְהֹוָה, LORD)의 궤라고도 하는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법 즉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법궤라고 부른 것이며 또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증거판'이라고 불렀기 떄문에 '증거궤'라고도 부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39절을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 증거판이 들어있는 궤이므로 '증거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우리는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살지 못한다면 말씀 안에 거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궤'라고 하는 것은 영어 성경에는 'the ark of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궤"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주님'이라고 번역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십계명 중 제3계명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기에 옛날에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고 그래서 그 단어가 나오면 발음을 하지 않았고 "여호와(여호봐 יְהֹוָה)"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 대신에 주님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는 처음에는 모음이 없었기 때문에 발음이 구전되어 내려오지 않으면 글자만 보아서는 어떻게 읽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맛소라 학파가 모음부호를 추가하면서 "YHWH"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추가하여 만들어진 소리가 "여호와" "야훼"입니다. 그후 70인역으로 번역할 당시에는 이것을 계승하여 헬라어로 '주님'을 뜻하는 '퀴리오스'(κύριος)로 번역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는 주님께서 우리 앞서서 가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승리로 이끄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4장11절에서는 "모든 백성이 (요단강)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라는 말을 통하여 여호와의 궤는 백성들보다 먼저 요단강에 들어갔으며, 요단강 한 가운데에 서서 모든 백성들이 요단강을 무사히 건널 때까지 지켜주셨고 또한 백성들이 모두 무사히 건너자 다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로 왔습니다. 또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에도 여호와의 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여리고성을 돌며 그곳을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하신 약속은 창세기 3장15절에 나와있습니다.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사단)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불순종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인자하시며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의 댓가를 치르도록 징벌하시는 동시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의 결과로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이 상징하고 있는 마귀와 원수가 되어 이땅에 오셔서 죄의 댓가를 치르게 하시므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백성을 만드시고,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광야와 같은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하난미 중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성막과 성전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면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언약궤'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만나셨고 모세에게 해야할 일들을 지시하셨으며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모든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성소에 있지 않고 지성소에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에 선전 안의 모든 기물은 새로 만들었지만, 이 언약궤 만큼은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오리지날 언약궤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언약궤는 길이가 2규빗 반(114cm, 4 feet), 넓이와 높이가 1규빗 반(68.4cm, 2.5 feet)의 조각목(싯딤나무)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씌운 직사각형의 상자입니다. 이처럼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기물은 그것이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입혔거나 아니면 정금으로만 만들거나 겉으로 볼 때에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책을 보면, 예전에는 책 가장자리가 붉은 색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붉은 색으로 성경의 테두리를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붉은 색은 사라지고 금색으로 테두리를 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막을 연구하면서 성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금색이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한 책으로 구약은 오실 메시야, 신약은 오신 메시야 즉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한 것이므로 금색으로 바꾼 것입니다.

성소 안의 모든 기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루신 일들과 사역을 예표하고 있지만, 언약궤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만을 예표합니다. 언약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쌌는데, 조각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며, 금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라고도 하는 아카시아 나무인데, 이것은 사막과 같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가시 나무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본 것은 떨기나무의 불꽃이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7장30절을 보면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이라고 스데반은 말했습니다. 즉 모세가 보았던 나무는 조각목이었습니다. 이 나무에 대하여 예레미야 17장6절에서는 "사막의 떨기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나무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사람이 없는 땅에서 외롭게 자라는데, 이것은 이사야 53장2-3절에서 예수님을 묘사한 것과 같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조각목을 금으로 씌워서 만든 언약궤는 이세상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초라한 모습과는 달리 정금으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상징합니다. 누가복음 9장28절부터 36절까지를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던 것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장에는 사도 요한이 용모가 변화되어서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자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 초라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 있었는데, 이 두 돌판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택한 대제사장은 아론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 역시 참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 이외의 다른이가 예수님 역할을 할 경우에는 다 죽을 것이라는 것 즉 영원한 죽음인 지옥에 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 그 옆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 역시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잘못 알고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을 넣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상 8장9절과 역대하 5장10에는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6장33-34절에는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민수기 17장10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를 증거궤 앞에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민 17:10)

그런데 히브리서 9장4절을 보면, 언약궤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답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로 성막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앞에 있던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가 들어있는 금항아리를 이동할 때에는 언약궤 안에 넣어서 이동했었기 때문에 언약궤 안에 그 3가지가 있었다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왕기나 역대기가 쓰여진 배경은 성막시대가 끝나고 솔로몬의 성전시대에 쓰여진 것이므로 더 이상 언약궤가 이동될 필요가 없으므로 원래대로 그 안에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만이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히브리서 9장과 열왕기상 8장과 역대하 5장을 비교하면서 성막을 이동하면서 솔로몬시대에 이르러서는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분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견해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뒤에 하나님께서 원래 말씀하셨던 대로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만이 들어가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솔로몬왕은 말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기도 했지만, 초기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준행했던 왕입니다. 따라서 성전을 지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 안에 두 돌판만을 넣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언약궤도 떡상처럼 4개의 발(feet)에 금으로 고리를 만들어서 이동할 때에 그 고리에 채(긴 막대기)를 끼어서 메고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발'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 '파암(פַּעַם)'은 '모퉁이'(corner)라는 뜻도 있고 '발'(foot)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KJV에서는 corner라고 번역했고, NIV에서는 foot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의 사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위쪽 코너에 고리를 만들어놓은 모습이었고, 그런 것은 발이 없습니다. 그러나 앞의 사진은 4개의 발이 있고 거기에 고리를 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렇게 아랫부분에 있는 발에 고리를 달아서 메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언약궤에 조금이라도 닿지 않을 수 있기 떄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스러운 거룩한 물건에 함부로 몸이 닿지 않도록 매우 세밀하게 일일이 지시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여호와의 궤를 메고 가도록 하지 않고, 새 수레에 싣고 가게 하여서 가는 도중에 소가 날뛰는 바람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궤를 특별히 구별한 레위지파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가도록 명령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 당시 이방 사람들의 풍속대로 새 수레에 실어서 소가 끌고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언약궤를 메고 가도록 네 모퉁이에 '금고리' 넷을 만들어 놓았고, 그 고리에 집어넣어서 들고 갈 '채'도 만들어 놓았지만, 그들은 고리보다는 바퀴가 훨씬 편하며,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가는 것보다 소가 끌고가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퀴가 달린 수레에 언약궤를 실어서 소가 끌고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뻬어내지 말찌며"라며 언약궤를 메고갈 '채'를 고리에 항상 끼워두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기만 해도 메고가야할 성물이라는 것을 알았을텐데...

이렇게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편리한 것을 좋아합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귀찮은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을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을까 등을 생각합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까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우리의 지식과 감정에 따라 합리적이며 편리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에도 예배드릴 동안 예배당의 의자가 편한지, 목사님의 설교는 길지 않은지, 성가대의 찬양을 들을만 한지, 예배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를 살핀 다음 교회 시설을 살펴봅니다. 많은 이들이 예배가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을 내고, 에오콘이 없는 교회를 싫어하며 아이들 교육시설이 잘 갖추어진 곳을 찾아다닙니다. 몸과 마음이 편하고 만족해야만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며 그런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언약궤의 모퉁이에 고리를 달고 거기에 금으로 씌운 막대기(채)를 끼워놓고 빼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떠나라"라고 명령하시면 즉시 채를 어깨에 메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분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항상 준비된 상태로 주인의 명령이 어떻게 떨어지건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종의 마음으로 항상 말씀에 순종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떠나라고 하실 때에 지체하지 않고 즉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녀라는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은 "설마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하겠어?"라는 게으르고 교만한 마음 때문에 즉시로 순종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아무리 준비하라고 해도 준비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하라고 할 때에 몇 번을 말해야 간신히 그것을 하거나 또는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민수기 10장33-34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행진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행진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에 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으며, 진을 칠 때에는 언약궤가 있는 성막을 진의 한 가운데에 세우고 성막을 중심으로 그들의 장막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 상징이며 또한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시는 '보호자'와 '구원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 말씀을 돌에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면서 온전히 주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3절에는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tablets of stone)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tablets of the heart)에 한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말씀을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증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둘어있는 것이 '증거궤'이기 때문에 우리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판에 써있는데, 우리가 나가서 엉뚱한 말이나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저런 편지를 우리에게 보냈어?"라고 하거나 "하나님이 저런 분이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 어떠한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데, 그 안에 주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고난 속에서 쩔쩔 매며 어찌할 줄 몰라서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빨리 죽고싶다면서 하루하루를 죽지못해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로 다가가서 "아니다. 이세상은 우리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나는 좌절하고 우울해서 이렇게 낙망하면서 살 시간이 없다. 내 모든 시간은 빛으로서 살아가야 된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어둠을 내쫓고 빛을 밝히 비추어주며 썩어가는 곳에는 소금처럼 부패를 방지하며 또 소금이 간을 고르게 하듯이 은혜롭고 덕이 되는 말을 해주면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라며 그들을 빛으로 인도하며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언약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는 교회에 다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인과 성도는 매우 다릅니다. 교인은 알곡도 있지만 쭉정이와 가라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중에는 천국에 갈 사람도 있고 지옥에 갈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알곡이며 천국백성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며 거룩을 수없이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해야만 합니다. 즉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그들과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며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우리의 확신이나 신념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을 갖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마귀의 유혹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낼 뿐만 아니라 성령의 검, 말씀의 칼로 단호히 무찌르고 거룩한 행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말씀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며, 또한 말씀의 파수꾼으로서 죄의 길로 달려가는 이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나팔수 역할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증거궤 또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삶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가 상징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그분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증인의 삶을 잘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원시복음을 주시면서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과 사단이 원수가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사단의 권세를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실 것을 저희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인자하시며 긍휼이 한이 없으신지요!
주님께서는 약속을 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주님과는 반대로 저는 약속을 해놓고도 그것을 저희 마음이 원치 않거나 마음이 변하면 그 약속을 파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주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제가 주님으로 또 아버지로 섬길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를 주님의 자녀로 선택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또한 죄의 종이었던 저를 의의 종으로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마귀의 군사로써 달려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저를 주님의 의로운 군사로 만들어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성소에서 귀하게 쓸 수 있는 거룩한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한 번 쓰임받고 버려지거나 깨뜨려버릴 질그릇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서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주님의 사명을 받아 주의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언약궤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제 속에 얼마나 주님의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마음판에 확실하게 새겨져 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 속에 주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이 더 많이 새겨져 있는지 살펴보면서, 만약 세상의 것들이 더 많이 새겨져 있다면 그 모든 견고한 진들을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할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시간을 저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정말로 주님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서 주님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제가 믿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것이 저의 신념일 뿐,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그 믿음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잘 구분할 수 있도록 저에게 성령 충만함을 부어주시고 영들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분별의 은사를 주셔서 이 악한 세대 속서에 제대로 깨닫고 분별해서 예수님만 붙잡고 나아가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저와 함께 하셔서 주님의 언약궤가 먼저 앞서 가셔서 저의 갈 길을 인도하시며 또한 제가 어느 곳에 진을 치려고 할 때에 저의 삶의 중심이 되셔서 저를 이끌어주시며 보호자가 되시며 반석이 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부터 저는 주님의 자녀로서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말씀을 모시고 주님의 임재가운데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면서 주님 뜻대로만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저에게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옵소서.
그래서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님께 영광돌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의 삶을 잘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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