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는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마 5:4)

작성자김수경|작성시간14.10.13|조회수452 목록 댓글 0

오늘의 말씀: 위로는 애통하는 자가 받는 복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다'라는 헬라어 '펜쎄오'(πενθέω)는 '슬픔'이라는 뜻의 '펜쏘스(πενθέω)'라는 중성명사에서 나온 동사입니다. '애통하다'는 것은 평상적인 슬픔보다 더욱 강렬한 슬픔을 토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쓰였습니다.

"자기(야곱)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요셉)을 위하여 애통하니"(창 37:3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막 16:10-11)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2:21)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8-10)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계 18:19)

여러분은 언제 애통하며 통곡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인생길에서 슬픔으로 인하여 애통하고 통곡하며 살고 싶습니까? 아마 그렇게 살고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애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애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 때문에 스스로 겸손한 자리에 내려가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눈물로 고백하려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와 교통하실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며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 스스로 우리의 죄인됨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가슴을 치며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슬픔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애통할만한 어떠한 상황과 환경을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면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가슴을 치며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8복 중에서 두번째 복으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는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며 애통하고 싶어하지 않는 세상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슬픔을 싫어하고 다른 이들로부터의 위로를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사람들의 위에 군림하면서 강자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세상에서는 "위로받을 상태에 처한 것"을 "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울지 않기 위하여 온갖 죄를 저지르며 다른 사람의 죄를 보아도 애통하기보다는 무관심하거나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 죄와 허물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애통은 크게 3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오는 슬픔이나 비탄이며 둘째는 환경과 상황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나오는 한탄이며 셋째는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고 오히려 자꾸만 실수하며 죄를 짓는 자기 자신을 보며 자신의 죄를 깨달음에서 오는 통회 자복하는 애통입니다. 이 중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은 세번째에 해당하는 죄 때문에 슬퍼하는 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세상의 모든 슬픔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대상으로 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불교의 석가모니가 깨달았다는 "인생은 고해(고통의 바다)"가 맞는 말이라고 해야 됩니다. 불교의 우상이 된 석가모니는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며 늙는 것도 고통이며  병이 드는 것도 고통이며 죽는 것도 고통이라면서(생로병사(生老病死)) 인생은 고통의 바다를 헤엄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괴로움의 바다를 헤엄쳐 건너서 부처가 있다는 열반의 세계에 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부처가 지옥에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 이들이 죽어서 가는 열반의 세계는 바로 지옥입니다. 따라서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은 괴로운 세상에서 그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도록 스스로 수행을 하여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스스로 선을 행하여서 부처가 될지언정 그들의 결국은 지옥행입니다. 이세상에서 슬픔과 고통을 뛰어넘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어도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을 지옥에서 애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곳에 그들이 섬기던 부처가 함께 있으면서 아무리 위로해준다고 한들 그것이 정말로 위로가 될까요?

이와 반대로 크리스천은 어떠한 착한 행위를 통해서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이세상과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부처를 믿는 이들은 모두 지옥에 가야하지만 그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이세상과 영원한 세상에서 천국에서의 삶을 살도록 해주시기 위하여 이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야할 우리에게 지옥 대신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시며 가장 큰 위로를 해주셨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위로이지 지옥에서 함께 있겠다고 하는 것은 위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고통과 행복이 모두 있는 곳입니다. 햇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도 불고 비와 눈도 내리는 곳입니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느끼고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늙는 것이 고통이라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 20:29)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사야 46장4절에서는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라고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늙어서 죽을 때까지 우리를 품어주시며 구원해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항상 고통의 바다를 헤엄쳐야만 한다는 것과 상반되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애통하는 자"는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으로 인해 슬퍼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그 빛이 우리의 어둠을 밝혀주므로 더럽고 추악한 것들이 모두 드러나게 될 때에 우리 스스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깨끗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도 자기 속에 있는 죄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애통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8-24)
 
이렇게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가슴을 치며 애통할 때에 하나님께서 위로자(comforter)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죄악들을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성령님께서는 더 많은 위로로 우리를 채워주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며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3번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셨습니다. 첫번째는 나사로의 죽음(요 11:33-35)을 보시고, 두번째는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할 것을 아시고(눅 19:41-44), 그리고 세번째는 십자가의 길을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히 5:7)였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님께서 이렇게 3번 눈물을 흘리신 것은 나사로의 죽음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이 슬퍼서가 아니라, 나사로의 죽음을 초래하게 한 죄와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가져올 죄와 모든 인간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애통할 때, 동료가 와서 위로해 주면 기분이 나아집니다. 그런데 동료보다 상사가, 상사보다 대통령이, 대통령보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애통하는 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가장 큰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어떤 모습이 진정으로 애통하는 모습인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 당시에 세리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공식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치며 애통하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었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가 강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자로 재보고 조금이라도 눈금과 맞지 않으면 남을 비판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자기의 죄는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죄만을 늘어놓고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기도할 때에 "하나님~ ㅇㅇㅇ가 오늘 어떠 어떠한 언행을 했습니다..." 라며 다른 이의 죄와 허물을 늘어놓은 적은 없습니까? 그러면서 기도가 아니라 그 사람이 들으라는 식으로 설교를 하지는 않았는지요? 만약 자식이나 여러분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 잘못하면 훈계식으로, 또 배우자나 교회의 중직자가 잘못하면 자신의 기분이 얼마나 상했는지를 알려주면서 잔소리까지 더해서 그것을 기도라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도는 애통하는 것 같지만 그의 잘못으로 인해 슬퍼하며 안타까와서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접 상대방에게 자기의 감정을 풀 수가 없으니까 우리의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서 나오는, 말하자면 어린애가 엄마한테 고자질하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언행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기도는 바리새인처럼 세리와 따로 서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라고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도 위로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만 받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예를 말씀하신 뒤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세리)이 저(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3번이나 부인했지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마음 속에서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죄를 통곡하며 회개를 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윗은 밧세바로 인하여 그의 남편과 부하들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뒤에 밤새 울면서 침상을 적시며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가 그의 죄를 회개하며 지었던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그는 시편 51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애통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음이 부유한 사람은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존심 상하게 애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며 자신이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고 있음을 스스로 평가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때에 즉 교만이 사라지고 마음이 가난해졌을 때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는 애통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더럽고 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원죄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악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밖으로 나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가 악한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이처럼 더러운 것들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절제가 필요한데 인내와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 살아가야만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죄악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며 성령의 열매만 맺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로 우리의 죄악과 허물로 인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둘째로 예수님께서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애통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이 죄로 인해 망할 것을 보며 그들을 위해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위로해주신다고 하십니다. 울지않고 슬퍼하지 않는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죄와 다른 이들의 죄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통할 때에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며 기쁨을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일이 잘못될 것 같아서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보면서 불안해하며 초조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워말라"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안심하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더이상 무엇을 두려워하고 걱정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최고의 위로는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천국에는 눈물도 없고 아픈 것이나 죽음도 없으며 슬퍼서 애통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시는데 그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7)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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