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죄의 결과
창세기 3:6-13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재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즉 오늘날로 말하자면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성공해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성공하고 싶어하면 할수록 성공에서 멀어진다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디슨 같은 경우도 전기를 발견하기까지 1만번의 실패를 거듭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수많은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기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한두번 또는 수없이 많은 도전을 했다가 실수나 실패를 하게되면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합니다. 성경에는 실패자들과 실수한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의 결과와 그것을 주안에서 극복해 냈을 때의 결과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또는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금방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그 길에서 돌아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가 살고있는 땅에 기근이 심해지자 하나님께 여쭙지도 않고 그곳을 떠나서 애굽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아내를 다른 남자의 아내로 팔아 넘겼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씩이나 그랬던 사람입니다. 한 번은 실수라고 봐줄 수도 있겠지만, 두 번씩이나 그랬다는 것은 실수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넘긴 정말 나쁜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어느 곳에 가던지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예배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판단하기에는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취한 행동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끊임없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시켜주시며 그의 믿음을 성장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조카 롯은 달랐습니다. 그는 고의적으로 아브라함을 떠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따라와서 함께 살다가 아브라함이 서로 헤어지자고 하면서 그에게 땅을 고르라고 했기 때문에 소돔땅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고의적으로 나쁜 행동을 한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는 소돔성에 하나님의 불심판이 내리기 직전에 천사들에 의하여 그곳에서 끌려 나가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았으나, 그의 아내는 소금기둥으로 변했고, 그의 두 딸은 차례로 아빠와 관계를 가지며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힌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수를 거듭하면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알 수 있었으나, 롯은 실수하지 않고 소돔성에서도 법관처럼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의 결과는 성공이 아닌 실패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잘못을 몰랐기 때문에 실수가 아닌 실패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받아 구원함을 얻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즉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질문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 때문에 그랬다면서 자기 아내에게로 탓을 돌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자 그의 아내도 똑같이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실수라고 인정하지 않고 뱀에게로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과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생활은 매우 다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문제로 인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엄마 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에 봉착하더라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은 영의 눈이 닫히고 육의 눈이 열리기 때문에 문제가 매우 크게 보이고, 그 문제 속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육체의 눈이 밝아져서 자신들의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는 벗고 있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매우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적인 눈이 열리는 순간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자신의 벗은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문제 속에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멀리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교회에도 가지 않고 내 멋대로 사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벗은 것을 깨닫는 순간 수치스러움을 모면하기 위하여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말라서 시들어버릴 그런 나뭇잎으로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때에는 벗은 모습이 전쳐 수치스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하나님을 떠난 순간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이들의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과 태도가 달라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뱀의 말대로 정말로 선악과를 따먹자 눈이 밝아졌던 겁니다. 눈이 밝아진 결과 제일 처음으로 한 것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뭇잎으로 수치스러움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의 해결자는 하나님이신데,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기들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본문 8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육체의 눈이 밝아진 사람은 영의 눈이 닫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자동적으로 그 음성을 피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피해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그들의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도할 때 또는 교회에는 다니지만, 영적으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그들 안에 있는 두려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걱정 근심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건 계속해서 거기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문제를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 있으므로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빛이 비춰지는 순간, 자기들의 어두움이 탄로날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본문 12절과 13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떠난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기는 커녕 모든 것을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고 계속해서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게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여러 유형의 정신병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음의 여러 가지 장애를 느끼게 됩니다.
*정동장애(우울증, 조울증, 조증(조울증 중 들뜨는 상태가 두드러지는 증상))
*불안장애(공황장애, 경박장애, 외상후 스트레스성 장애)
*신체형 장애(신체화장애(병이 없는데 각종 통증을 느낌), 전환장애(병은 없는데 심리적 갈등으로 몸이 마비되거나 감각이 없어짐), 건강염려증)
*인격장애(편집성 인격장애, 히스테리성 인격장애, 자기애적 인격장애, 경계성 인격장애, 의존성 인격장애)
*정신분열성 장애
*적응 장애(불안 동반 적응장애, 품행장애-스트레스로 인해 우울과 불안이 나타나고 공격적 행동을 하거나 위법행위를 함)
*충동조절장애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육체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 동안 영의 눈이 떠서 살아갈 때에는 육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육의 눈이 떠지는 순간 육신의 문제가 여기 저기에서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남자는 열심히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끊임없이 먹고 살기 힘들도록 여기 저기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겨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아기를 낳을 때 매우 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도록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3장8절을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마귀에게 속아서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므로 그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로마서 10장9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이름의 뜻인 "죄인들 구원하실 자"라는 그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을 인정하며 시인하며 그분만 바라보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두려움과 걱정 근심 속에 살지 않을 수 있으며, 우리의 어떠한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서, 나는 과연 영의 눈이 열려있는가 아니면 육신의 눈이 열려있는가를 먼저 깨달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의 육신의 눈이 열려있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보고있으며 어떤 문제에 빠져있는지를 깨달아 알아서 그 문제를 모두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산성이시며 방패이시며 피난처이시며 구원자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Esther Soo-Gyung Kim, Pastor
뉴 욕 퀸 즈 교 회
Esther Soo-Gyung Kim, Pastor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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