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6월 셋째 주일은 아버지날(Father's Day)로 지킵니다. 아버지의 날을 맞이하면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이 잘못 가르치고 있는 ‘아바 아버지’에 대해 바로 알고, 하나님 아버지를 진정으로 경외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현대 교회는 성경 본연의 의미보다 대중의 입맛에 맞춘 '값싼 위로'를 전하는 데 치중해 온 경향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어린아이처럼 친밀하게 불러라"는 가르침입니다.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와 문화적 문맥을 살피지 못한 채, 사람들의 감정적 정서에만 맞춘 해석이 강단에서 들려오곤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 무지를 분별하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 위에 다시 서야 합니다.
1. 구약의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오해
의외로 많은 가르침 속에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잘못 전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을 깊이 살피지 못해 생긴 오해입니다. 성경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을 자신들을 지으신 엄위하신 '아버지'로 고백했음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신명기 32:6 –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사무엘하 7:14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시편 89:26 –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이사야 64:8 –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정서에 따라 가볍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늘 자기 백성의 절대적인 주권자이자 엄위하신 '아버지'이셨습니다.
2. 아람어 '아바(Abba)'를 한국어 '아빠'로 혼동하는 오류
신약성경에 세 번 등장하는 "아바 아버지"의 '아바'를 한국어의 친근한 '아빠'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을 크게 왜곡하는 일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이 아람어 발음대로 표기한 것을 두고, 그것이 마치 한국어 '아빠'와 같은 개념인 양 오해하고 가르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문법적 형태를 보면 진실은 전혀 다릅니다.
🔹언어적 기원과 의미:
성경의 '아바(Abba)'는 한국어가 아니라 '아람어'이며, 히브리어 '아브(אָב, Father)'에서 유래한 엄연한 '그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정관사가 결합된 형태:
히브리어 원어 기본형은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אָב)'입니다. 여기에 고대 아람어의 정관사 어미인 '아(א)'가 결합하여 '아바(אַבָּא)'가 된 것입니다. 즉, '아바'는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이 아니라, '그 아버지(The Father)'라는 뜻으로 특정한 한 분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매우 격식 있고 장엄한 표현입니다.
🔹헬라어 원문의 동의어 중첩:
신약성경 원문을 보면 이 단어는 '아바 호 파테르(Ἀββᾶ ὁ πατήρ)'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의 '아바(אַבָּא)'는 아람어이고, 뒤의 '호 파테르(ὁ πατήρ)'는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아바는 히브리어 '아브(אָב)' 어미에 정관사 '아(א)'를 붙여 '아바(אַבָּא)'가 된 것입니다. 즉 '그 아버지'라는 뜻이며, 뒤에 오는 '호 파테르(ὁ πατήρ)' 역시 헬라어로 '그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의 "아바 아버지"는 응석 부리는 아빠를 뜻하는 게 아니라, 생사와 화복을 주관하시는 절대자 앞에서 "그 아버지, 그 아버지!"라고 간절하게 두 번 반복하여 부른 엄숙한 고백입니다.
🔹성인의 언어, 아버지:
아람어 '아바'는 어린아이가 부르면 '아빠'처럼 들릴 수 있을지언정, 예수님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한 '아바'는 중엄한 고대어 '아버지' 그 중에서도 '그 아버지'인 '하나님 아버지'를 일컫는 단어였습니다.
3. 문법적 의미와 형태
▪️히브리 원어(기본형): 아브(אָב) = 아버지
▪️아람어: 정관사 결합: 아브(אָב) + 아(א) = 아바(אַבָּא)
▪️의미: '그(The) 아버지' 라는 뜻으로, 특정한 아버지 즉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정관사가 포함된 형태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마가복음 14:36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라 부르며 기도하셨는데, 여기서 '아바(Abba)'는 아람어 원문이고, 뒤이어 나오는 '아버지(Father/Pater)'는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입니다.
4. 고대 사회의 '아버지'를 현대적 정서로 해석하는 한계
우리는 현대 사회의 친근하고 유연한 부모 자식 관계를 고대 성경의 세계관에 그대로 대입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절대적 권위의 대상:
고대 사회에서 아버지는 자녀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절대 권력을 가진 권위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면(카바드 כָּבַד) 장수한다"는 계명은 일차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 그 자리에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던 고대 사회의 엄중함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참고) '공경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바드'(כָּבַד)는 'be heavy, weighty, burdensome, honoured' 등의 뜻을 갖고있습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18:20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중하다"라고 할 때 "중하다(be grievous)", 출애굽기 5장 9절에서는 바로가 이스라엘의 고역을 무겁게 할 때 "무겁다"(be laid), 출애굽기 8장 15절과 32절에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여"에서 "완강하다"(hardened), 레위기 10장 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영광스러운, 명예로운"(honoured) 등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즉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은 우리의 진짜 부모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한다는 것으로, 그것은 생사가 달린 매우 무겁고 힘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가 우상 하나님이 된 현대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자기 부인을 하며 죽는다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학설의 맹점과 하나님의 참뜻:
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가 제안했던 "어린아이가 부르는 친밀한 아빠"라는 해석이 현대 교회에서 큰 환호를 받은 이유는, 너무나 개인화되고 '치유'라는 이름으로 위로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아빠"라고 불러야만 친밀하고, "아버지"라고 부르면 친밀하지 않다고 믿습니까?
"아버지"라는 부름 안에는 존경과 경외, 그리고 그 무엇보다 깊고 성숙한 신뢰와 친밀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이들이 유독 어린아이의 호칭에 집착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성인으로 서기보다 응석받이 아이로 머물고 싶어 하는 영적 나태함 때문은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값싼 위로의 말로 가짜 일회성 치유를 유도하며 우리가 평생 미성숙한 어린아이처럼 머물러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철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죄 사함을 허락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나아가 우리가 영적인 유아기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지혜를 갖춘 온전한 성인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상한 감정을 달래준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성경 본연의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오죽하면 사도 베드로가 성도들을 향해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이렇게 준엄하게 경고했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16-17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그분은 외모가 아닌 우리의 모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공의롭고 거룩한 심판주이십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일수록, 이 땅에 나그네로 사는 동안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준엄하게 명령한 것입니다.
5. 성경 구절이 보여주는 엄숙한 문맥
신약성경에서 '아바 아버지'가 쓰인 장면들을 보면, 결코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듯 가볍게 '아빠'를 찾을 수 있는 문맥이 아닙니다.
(1) 마가복음 14:36 (겟세마네의 통곡)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해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며 아버지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생사를 주관하시는 절대 권력의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처절한 사투의 자리를, 어린아이가 칭얼대며 '아빠'라고 외치는 정서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의 엄숙함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생사를 주관하시는 절대 권력의 '그 아버지'께 모든 주권을 맡기며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2) 로마서 8:15 & 갈라디아서 4:6 (법정적 양자 선언)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해설: 우리가 두려워하는 죄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합법적인 상속자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엄숙하고 공식적인 법정적 선언입니다. 이 역시 공적인 권위를 지닌 법적 '아버지'를 부르는 자리입니다.
🔸에베소서 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6. 결론: 진리 위에 서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교회
성경의 단어는 인간의 필요나 시대적 기호에 따라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위로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가 모여 칭찬한다고 해서 참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자지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단 한두 사람이 모일지라도 성경 본연의 순전한 진리가 그대로 선포되는 곳이 진짜 교회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할지라도, 타협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온전히 외칠 수 있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날을 계기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경외로움을 버리고 오로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원하는 "친밀감"만을 주장하며 다가갔던 우리의 모습을 깊이 돌아봅시다.
이제는 사람 중심의 사랑이나 가벼운 위로에서 벗어나, 우리의 생사와 화복을 주관하시는 온 우주의 통치자, 참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두렵고 떨리는 거룩한 경외함을 회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합심 기도]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거룩한 경외함을 회복하게 하소서
거룩하시고 자비하시며 온 우주 만물을 공의로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6월 미국 아버지날을 맞이하여, 저희를 지으시고 저희의 생사와 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참된 엄위하심을 말씀 앞에서 다시금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이 시간 저희의 무지와 영적인 가벼움을 통절히 자복하며 회개합니다. 그동안 저희는 성경의 깊은 뜻과 고대 사회의 준엄한 의미를 무시한 채, 그저 저희 귀에 달콤하고 저희 마음에 편안한 ‘값싼 위로’만을 좇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이번 아버지날을 계기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경외로움을 버리고 오로지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원하는 가짜 "친밀감"만을 주장하며 다가갔던 저희의 부끄러운 모습을 깊이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인간적인 온정주의로 난도질하여, 감히 온 우주의 재판장이시며 주권자이신 예수님을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가볍게 대했던 저희의 영적 오만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통곡하시며 "아바 아버지"를 부르짖으셨던 그 처절하고 엄숙한 사투를 다시금 묵상합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가벼운 응석이 아니라, 아람어의 본뜻 그대로 온 우주에 오직 한 분뿐이신 통치자, 즉 '그 아버지(Abba)'의 뜻 앞에 자신의 온 생명을 굴복시키는 장엄한 복종의 고백이었습니다.
저희가 이 피 묻은 진리를 잊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기도 역시 저희의 뜻을 관철하려는 어린아이같은 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권위 앞에 저희의 온 삶을 복종시키는 결단의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하시며,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을 저희가 감히 두렵고 떨림으로 '아버지'라 부르고 있음을 상기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 엄위하신 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을 향해 이 땅의 나그네 시기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한 말씀을 되새기며, 저희가 아버지라 부르는 분이 얼마나 무섭고도 거룩한 심판주이신지를 뼈저리게 묵상하게 하옵소서.
바라옵기는 저희 마음속에 인간적인 친밀감으로 위장한 저렴한 위로의 '아빠'라는 우상을 깨뜨려 버리게 하시고,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참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두렵고 떨리는 거룩한 경외함을 회복하는 성도와 자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유행이 어떠하든, 수많은 무리가 어디로 몰려가든,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시퍼런 양날이 선 진리의 말씀만을 온전히 붙들고 외치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습니다.
저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단 한두 사람이 모인 자그마한 처소일지라도, 타협 없는 순전한 진리가 선포되고 그 말씀 앞에 엎드려 전율하는 진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의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을 품고, 오직 아버지의 주권만을 높여드리는 신실한 자녀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저희의 영원한 구원자 되시며,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경외하는 모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구역/셀 소그룹 나눔] '아바 아버지'의 참된 의미와 하나님 경외하기
이번 아버지날을 맞아, 우리가 무심코 사용해 온 '아빠 하나님'이라는 호칭 뒤에 숨은 영적 가벼움을 돌아봅니다. 생사와 화복을 주관하시는 온 우주의 통치자, 참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경외함은 무엇인지 함께 나누어 봅시다.
[질문 1] 나의 하나님 호칭 돌아보기 (마음 열기)
우리는 평소에 기도하거나 찬양할 때 하나님을 어떤 이미지로 가장 많이 떠올리나요?
(예: 친근하고 다정한 친구, 모든 것을 다 받아주시는 부모, 혹은 두렵고 엄위하신 창조주 등)
내가 하나님을 주로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질문 2] 말씀 속 진리 마주하기 (말씀 발견)
오늘 칼럼을 통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부르짖은 "아바 아버지"는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이 아니라, "그 아버지(아람어), 그 아버지(헬라어)"라고 한 것으로, 절대자 앞에서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준엄한 고백임을 배웠습니다. "그 아버지"를 두 번 반복해서 부른 것은 하나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부른 것입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목사나 교회의 지도자로서 한국어 "아빠"라고 친근하게 부르라고 한 적이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원어 사전을 단 한 번이라도 찾아보았습니까?"
'아바'는 함께 쓰인 헬라어 '파테르(πατήρ, 아버지)'와 완벽히 같은 뜻입니다.
마가복음 14:36을 함께 읽고, 예수님의 이 처절한 기도가 나의 기도 생활에 주는 도전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질문 3] 내 안의 영적 가벼움 성찰하기 (삶의 직면)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의 편의대로' 왜곡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 내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존재로 가볍게 대하진 않았나요?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두렵고 떨리는 거룩한 경외함'을 놓쳤던 순간이 있다면, 솔직하게 고백해 봅시다.
[질문 4] 거룩한 경외함 회복하기 (결단과 적용)
세상의 유행이나 대중이 좋아하는 '값싼 위로'를 따르지 않고, 오직 성경 본연의 시퍼런 진리 위에 서기 위해 이번 한 주간 내가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 타협 없는 말씀 묵상, 기도의 태도 정돈하기, 삶의 주권 온전히 내어드리기 등)
김수경 목사 Pastor Esther Soo-Gyung Kim
뉴 욕 퀸 즈 교 회
†he 2nd Life Foundation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