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능스님 말씀]
한문 경전에서 '나(我)'라고 하는 것은 범어 아뜨만(atman 개체적 자아)
인도에서는 아뜨만에게는 세 가지 성질이 있다고 한다.
<1>영원하다(常)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고,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면..
한결같지 않으면 상일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2>단 하나이다(一)
예비로 있거나, 여러 개 있으면 그것을 '나'라고 할 수 없다
부지런하게 법당에 온 나와, 집에 두고 온 게으른 나가 따로 있나? 불가능하다.
<3>나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주재성(主宰性)이고
경상도말로 하면 "남이사~"라는 말이 있다
("내가 내 맘대로 하는데 왜 간섭하냐?")
그런 세 가지 성질의 것이 과연 있을까?
얼핏 보면 있는 거 같지만, 부처님은 없다고 하셨다.
"영원하고 한결같으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씀을 인도말로 표현하면 안아뜨만(anatman), 한자로 하면 무아(無我)
그래서 불교를 '무아(無我)의 가르침'이라고 할 때
그 '나(我)'는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을 후에 대승불교에서 자성(自性,원질)이라고 표현)
다른 종교들은 명칭은 다르지만 어떤 불변의, 절대적이고, 근원적이고..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불교는 이것을 부정한다.
- 불교: "일체는 無常->苦->無我이다."
- 악행이나 분노도 그것이 '일어나야 겠다'해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내가 화를 내야겠다' 해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주재하고 관리하는 어떤 존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 오온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불변의 실체는 없다 (무아=空)
한편 인도 바라문경전 까타까 우파니샤드에서는 아뜨만의 크기와 위치를 명시하고 있다
바라문교에서는 우주의 근원으로서 창조의 신 브라만이 있고
그분이 창조한 모든 개체의 근원을 아뜨만(我,나)이라고 하는데..
까타까 우파니샤드에서는 아뜨만의 크기는 엄지손가락 만하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심장 속에 있다고 한다.
* 붓다 "나는 손톱끝으로 집을 수 있는 작은 흙먼지 크기 만큼이라도
내 몸과 마음 안에서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 업(業)을 행하면 그 결과로 아뢰야식이 생기고
거기에서 자아의식이 형성되어 '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업보(業報)는 있지만 작자(作者)는 없는 것이다.
*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신체는 과거이든 미래이든 현재이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열등하든 뛰어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이 모든 신체에 대해서 올바른 반야로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느낌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지각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작용력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의식은 과거이든 미래이든 현재이든, 내적이든 외적이든
거칠든 미세하든, 열등하든 뛰어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이 모든 의식에 대해서 올바른 반야로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http://cafe.daum.net/santam/IaMf/400
* 자아에 대한 자각
<1>존재의 다발(오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자아 -- 아뜨만(atman)
<2>존재의 상속으로서의 자아 -- 존재, 중생, 사뜨바(sattva)
<3>삶의 마지막까지 지속으로서의 자아 -- 생명, 지바(jiva)
<4>새로운 삶의 형태인 집착으로서의 자아 -- 영혼, 푸드갈라(pudgala)
☞ 베다의 논리와 연기, 아뜨만과 안아뜨만 http://cafe.daum.net/santam/IQZL/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