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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이야기

모례의 집에 찾아 온 아도 화상

작성자햇빛엽서|작성시간09.08.08|조회수278 목록 댓글 1

 

신라 49대 눌지왕(417년) 때였다.

어느 가을 날, 걸친 옷은 비록 남루했지만 용모가 예사롭지 않은 한 젊은 고구려인이 신라 땅 일선군(지금의 경북 선산)에 있는 모례의 집에 찾아들었다. 모례는 일선군 내에서 내노라하는 부자였다.

모례는 행색과는 달리 용모가 준수한 낯선 객을 예의를 갖추어 맞아들이면서 경계의 눈초리로 물었다.

"어찌하여 저희 집에 오게 되었는지요?"

"저는 묵호자(아도화상)라는 고구려 승려입니다. 인연이 있는 땅을 찾아 왔으니 저를 이곳에 머물게 해주십시요."

당시 신라에는 불교가 공인되지 않았었다.

토속신앙을 고수하는 배타적인 신라인들의 생활 양식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를 받아들일 여건이 아니었다.

아도가 승려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생명마저 위태로운 실정이었다.

모례는 아도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 잠시 주저하며 망설였다.

아도는 모례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 주었다.

모례는 아도의 불법에 관한 설명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지만 예삿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지하에 토굴을 만들어 아도를 머물게 했다.

 

이 무렵, 양나라 사신이 신라에 와 불상불경, 명단(溟檀)을 조정에 바쳤다.

조정에서는 명단의 용도를 몰라 설왕설래하며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모례 집에서 은둔 수행하고 있던 아도는 그 소문을  듣고 주위 사람들을 불러 일러주었다.

"이는 향이라는 것으로 부처님 전에 이 향을 태우며 지극한 정성으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영험이 있는 물건이지요."

얼마 후, 그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모례 집에 사람을 보내 아도를 초청했다.

그 당시 신라 궁중에서는 공주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인 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불법을 펴기 위해 모례 집에 숨어 때를 기다리던 아도에겐 더 없는 기회였다.

아도는 승려로서 위의를 갖추고 서라벌로 향했다.

승복을 입고 삭발을 한 아도가 입궐을 하자 양나라 사신들은 이 나라에도 고승이 있구나 찬탄을 하며 삼배를 올렸다.

아도는 공주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불공을 드렸다.

삼칠일 기도를 마치자 비로소 공주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다.

왕은 몹시 기뻐하며 아도에게 소원을 물었다.

"빈승에게는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불법을 널리 펴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왕의 배려로 포교를 하던 아도는 왕이 죽자 귀족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는 부처님의 인연이 닿지 않음을 한탄하며  다시 모례의 집으로 도망와 지하 토굴에 숨어버렸다.

 

    - 모례의 시주로 도리사 창건 -

 

아도는 고구려인 어머니와  중국 사신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출가한 아도는 16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현창화상 문하에서 3년간 수행을 하고 다시 고구려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도를 신라 땅으로 보내며 이렇게 당부했다.

"신라 땅에는 천경림을 비롯하여 7곱 곳의 대가람 터가 있으니 모두 부처님의 인연지로 앞으로 불법을 널리 펼 곳이다. 가서 불법을 전하거라."

어머니의 당부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신라 땅에 온 아도는 신라 땅에는 아직 불법을 펼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음을 알고는 모례 집 지하 토굴에서 10여년 간 은둔 수행을 했다.

 

그러 던 어느 날, 아도는 모례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모례는 서운한 마음으로 울먹이며 가는 곳을 물었다.

"스님, 어디로 가시렵니까?"

"3년 후 눈이 많이 왔을 때 칡넝쿨이 그대 집을 넘어오면 내가 있는 곳을 알게 될 것이오."

그 말을 남긴 아도는 모례 집을 떠나 어디론지 사라졌다.

 

3년이 지난 어느 겨울 날이었다.

불법을 펼 길지를 찾아 신라 전역을 떠돌던 아도는 냉산(冷山;지금의 태조산) 높은 곳에 이르렀다.

만산이 하얗게 눈이 덮힌 가운데 눈앞에 신비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얀 눈 속에 도화가 만발한 것이 아닌가.

한눈에 이곳이 바로 불법을 펼 길지임을 간파한 아도는 그곳에 토굴을 지었다.

 

그해 겨울이었다.

엄동 설한인데도 불구하고 칡넝쿨이  담장을 넘어 모례의 집안으로 들어왔다.

3년 전 아도의 예언을 잊지 않은 모례는 칡넝쿨을 따라 아도의 토굴에 이르게 되었다.

모례가 토굴에 이르자 아도는 기쁘게 맞아들였다.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모례가 복짓는 인연을 청했다.

"여기에 신라 최초의 절을 세울 테니 시주를 하시오. 그러면 그대의 복이 자손 만대로 이어지리다."

기꺼이 승락을 하고 하산한 모례는 즉시 쌀 3천섬을 시주했다.

불사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사명은 한 겨울인데도 도화가 폈다 해서 도리사(桃李寺)라고 지었다.

신라 불교의 발상지 도리사는 이렇게 창건되었으며,

선산과 구미의 남북을 꿰뚫고 있는 낙동강의 동쪽 구미시 해평면 송곡동 태조산에 자리잡고 있다.

 

※모례(毛禮) :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

                    모례의 원래 이름은 털례 이며, 모례는 이두식 표기라고도 함 (毛=털)

                    또 털례[毛禮]의 음이 변하여 절[寺]이라는 말이 생겼다고도 함

                    毛례('털례'의 이두식 표기) -> 덜 -> 절

                    일본어로 절(寺)을 데라(てら)라고 함 - '절'을 옛날엔 '덜'과 유사하게 발음했을 것이라는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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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손오공 | 작성시간 13.11.08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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