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국의 수로왕(首露王)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후와 결혼하여 열 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큰 왕자는 김(金)씨로 왕위를 계승했고, 둘째 왕자는 허(許)씨, 셋째 왕자는 인천 이(李)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칠 왕자는 그들의 외숙인 보옥선사(장유화상)의 수행력에 감화되어 처음 입산 수도한 곳이 가야산 칠불봉이라 하며, 수로왕 62년에 홀연히 크게 깨달아 성불하였다.
가락국 즉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金)씨의 시조인 수로왕 또는 김수로(金首露)는 다른 다섯 명의 아이와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 시조대왕께서 나라를 세우신지 7년째 되는 가락기원 7년 어느 날, 대왕께서 유천간에게 명하여 작은 배와 말을 끌고 망산도에 가서 망을 보게 하셨다. 때마침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 위에 붉은 빛깔의 돚을 달고 검붉은 빛의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 한 척이 있었다. 일행중에는 공주(公主) 한 분과 시종 20인이 타고 있었고, 공주께서 가져온 화려한 비단과 의상 그리고 금은주옥 패물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중신들이 일행을 모시고 대궐로 들려 하였으나 공주께서는 엄숙히 말씀하시기를 "나와 그대들은 초면인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리오" 라고 하시었다.
대왕께서도 이를 옳게 여기시고 대궐을 떠나 몸소 영접을 하시었다. 공주께서는 별포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비단치마를 벗어 산신에게 예물로 바쳤다. 공주께서 점차 대왕이 계신 곳으로 가까이 가자, 대왕께서 친히 나아가 정중히 맞아서 함께 장막궁전으로 드시었다. 공주께서 조용히 말문을 여시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이옵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는데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인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공주를 보내어 연을 맺도록 하라 하시었다'고 하시면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대왕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도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오. 이제 이렇게 만났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하오."
이렇게 해서 대왕과 공주는 혼인을 맺고 슬하에 열 명의 왕자를 낳게 된 것이다. 훗날 가야의 일곱 왕자가 입산 수도하고 있을 때,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든 아들들의 안위가 걱정이 된 왕비가 이 곳 가야산을 수차례 찿아와 만나고자 했으나, 이미 발심출가하여 세상을 잊은지 오래인 일곱 아들을 만날 수 없자, 일곱 왕자가 수도하고 있는 봉우리가 그림자져 비치는 연못에서 그 그림자만 보고 그리움을 달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에 사람들은, 가야산 정상 우측의 봉우리들을 '칠불봉(七佛峰)'이라 하고, 왕자들의 그림자가 비쳐졌던 연못은 '그림자 못'이라 하여 '영지(影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일곱 왕자는 지리산으로 수도처를 옮겨 그 곳에서 도를 깨달아 생불(生佛)이 되었다고 전한다.
금관가야 초대왕 김수로의 황후이면서 김해 허씨의 시조로 추앙받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서기 48년 가야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읍지’ 등 여러 고문헌에서 "파사석탑은 돌빛이 붉게 아롱졌으며, 재질은 좋으면서 무르고, 조각된 것이 매우 기이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조각된 무늬가 마모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파사석탑의 재질인 ‘파사석’은 우리나라에서 잘 나지 않는 돌로, 인도 남부지방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돌이다.
* 인천 이씨는 가락국 수로왕의 후예로 전한다.
수로왕의 장남은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아 김씨가 되고, 차남과 삼남은 어머니 허황옥의 성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 이씨는 허씨에서 갈린 분적종(分籍宗)이다.
허황옥의 23세손 허기(許奇)가 신라 경덕왕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는데 때마침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고(755년) 이때 당나라 현종을 호위한 공으로 당나라 황제의 성인 이씨를 사성받았다. 당시 그는 이씨와 허씨를 합쳐 '이허'를 성씨로 사용하였는데, 그의 10세손 이허겸(李許謙)이 바로 인천 이씨의 시조이다.
고려사 후비열전에 따르면 원성태후의 외조부인 이허겸은 고려 현종 15년에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개국후에 추증되면서 소성현(邵城縣)에 식읍(食邑) 1천 5백 호를 하사받았는데, 그곳이 현재의 인천이며 이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며 관향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