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정기 산행후기

순천 조계산의 선암사와 송광사

작성자문보 정해관|작성시간18.03.12|조회수324 목록 댓글 0

순천 조계산의 선암사와 송광사

1. 송광사 (松廣寺)



(요약) 사적 제506호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이며, 이전에는 대길상사·수선사라고 했다.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힌다.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송광사사적비>에 의하면 신라 말 체징이 길상사라는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거의 폐허화된 것을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결사인 정혜사를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길상사로 옮긴 후부터 대규모 수도도량으로 발전했다. 이후 조선 초까지 진각· 태고· 환암· 무학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하였다.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 또는 파괴되어 다시 중건되었다.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금동 요령(보물 제176호)· 묘법연화경찬술(보물 제206호) 등이 있다.

 

고려 인종 이후 거의 폐허화되었는데,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결사(修行結社)인 정혜사(定慧社)를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길상사로 옮긴 다음부터 대규모 수도도량으로 발전했다. 고려 희종은 정혜사의 이전과 때를 같이하여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修禪寺)로 개명하라는 제방(題榜)을 내렸고, 이후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80여 년 간 진각(眞覺)· 각엄(覺儼)·태고(太古)· 나옹· 환암(幻庵)· 찬영(燦英)· 각운· 무학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소위 수선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1395년(태조 4)에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전당을 중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중인(中印)이 1420년(세종 2)에 당우를 증축하는 한편 절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종의 윤지(綸旨)로 설립된 수륙사(水陸寺)를 폐지하고 선종사찰로 복귀했다.

그 후 수선사가 언제 송광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폐사 직전에 놓인 송광사는 응선(應善)과 부휴(浮休) 등의 노력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했다. 1842년의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되고 다시 중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6·25전쟁 전의 가람배치는 의상(義湘)의 법계도(法界圖)와 같았다고 하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 국사전(國師殿:국보 제56호)· 하사당(下舍堂:보물 제263호)· 약사전(藥師殿:보물 제302호)· 영산전(靈山殿:보물 제303호)· 청량각(淸凉閣)· 척주각(滌珠閣)· 우화각(羽化閣)· 천왕문· 해탈문· 대장전(大藏殿) 등 50여 동이 있어 대가람의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송광사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혜심고신제서(惠諶告身制書:국보 제43호)· 고려고문서(高麗古文書:보물 제572호)· 경패(經牌:보물 제175호)· 금동 요령(金銅搖鈴:보물 제176호) 등이 있으며 1093년 간행된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제205호), 1095년에 간행된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보물 제206호)과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대반열반경소(보물 제90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보물 제204호), 영산전목불좌상 등이 있다.

 

♣ 순천 송광사의 구시와 안변 석왕사의 뒷간은 어느 것이 클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두 곳의 입심 좋은 스님들이 길을 나서서, 속리산 법주사 쯤에서 만나 서로의 귀물(?)에 대한 소개를 했다고 한다.

석왕사 스님 : “송광사의 구시가 크다고 소문이 났는데 도대체 얼마만한 크기입니까?”

송광사 스님 : "크기는 말하기 어렵군요. 지난 해 동짓날에 팥죽을 거기에 끓이지 않았겠소? 상좌께서 작은 배를 타고 죽물에 닻을 저어 바람을 일으켜가더니 여태까지 돌아오지 않았다오."

이 말을 듣고 석왕사 중이 놀란 표정이다.

"과연 크군요. 이건 동해보다 더 넓습니다."

"아무렴 동해보다야 넓겠소."

그러면서 송광사 중이 석왕사 중에게 뒷간의 높이가 어느 정도냐고 물었다.

"그 높이를 형용할 수 있나요. 소승이 절을 떠날 때 사승께서 대변을 보셨는데 그 덩어리가

아직도 땅에 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되오."

이 설명을 들은 송광사 중은

"과연 높긴 높구려. 아마 구만리장천보다 더 높겠구려." 하며 경탄해 마지않았다.

석왕사 중이 "그 보다 더 높기야 하오리마는 크게 차이나지는 않으리라 생각되오."

두 사람은 이야기를 잘 들었으니 가서 볼 까닭이 없다고 하며 이내 서로 헤어졌다.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얘기이며, 송광사의 구시 대신 합천 해인사의 가마솥을 지칭하기도 한다.)

 

2. 선암사 (仙巖寺)



(요약) 신라 542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사적기〉에 의하면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1092년에 의천이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60년에 재건을 시작했다. 1701년에 불조전이 완성되었고, 대웅전의 개수 및 승선교 축조 등 대대적인 확장과 정비가 이루어졌다. 181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중건했고, 1823년 다시 화재가 나자 해붕 등이 중수했다.

6·25전쟁 때 많은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팔상전· 천불각 등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3층석탑(보물 제395호)과 승선교(보물 제400호), 대각국사진영(보물 제1044호), 대각암부도(보물 제1117호), 북부도(보물 제1184호) 등이 있다.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다.

 

542년(신라 진평왕 3)에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사적기〉에 의하면 875년(헌강왕 1)에 도선 국사가 남방비보를 위해 경상남도 진주 영봉산의 용암사, 전라남도 광양 백계산의 운암사와 함께 선암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1092년(고려 선종 9)에 대각국사 의천이 크게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1660년(조선 현종 1)에 경잠·경준·문정이 재건을 시작했고, 1698년(숙종 24)에는 호암 약휴선사가 원통전을 짓고 그 안에 목조관음보살상을 봉안했다. 이어 1701년에는 약 30년간에 걸쳐 완성된 불조전에 과거 53불을 비롯한 60여 구의 목조불상을 봉안했으며, 대웅전의 개수 및 선암사 입구의 석조 다리인 승선교 축조 등 대대적인 확장과 정비가 이루어졌다. 1819년에 불이 나서 건물들이 소실되자 곧 상월이 중건했고, 1823년 다시 불이 나자 해붕· 눌암· 월파 대사 등이 중수하여 대규모 가람을 형성했다.

 

이 절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사찰령과 사찰령시행규칙에 따라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었다. 6·25전쟁 때 많은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1호)을 비롯하여 원통전· 팔상전· 천불각· 장경각· 강선루 등이 남아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3층석탑 2기(보물 제395호), 입구의 석조 다리인 승선교(보물 제400호), 대각국사진영(보물 제1044호), 대각암부도(보물 제1117호), 북부도(보물 제1184호), 동부도(보물 제1185호), 금동향로(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 화산대사 사리탑, 순조가 친필로 쓴 '대복전'과 '천인'이라는 편액 등이 있다.

 

2. 산행코스 : 선암사 - 장군봉 - 연산봉 삼거리 - 피아골 - 송광사

조계산 장군봉은 884m의 아담한 산봉우리지만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고, 송광사까지 이어지는 산등성이 길은 다소 지루한 코스였다. 그래서 주최측에서는 4시간 이내에 완주하기를 바랐지만, 5시간 30여분이 걸렸다. 오늘도 예외 없이 산에서의 중식시간은 서로를 배려하는 회원들의 봉사적 보시가 감동의 물결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