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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방

위대한 후예(금강) 제2장 끝없는 악연(惡緣)

작성자검은눈동자.|작성시간20.03.06|조회수469 목록 댓글 7

제2장  끝없는 악연(惡緣)


「일부러 란아의 집으로 가지 않고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건만 아직도 뒤를
따라오고 있단 말인가? 과연 귀왕혈이란 집단은 간단하지 않구나!」
내심 신음한 금정신니는 어둠에 잠긴 숲 저쪽을 잠시 쏘아보다가 곽승고를 보았다.
『우리 뒤를 따르는 자들의 추격이 간단치 않으니, 여기서 잠시 노니를 기다리고
있게. 저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다시 돌아오겠네!』
금정신니는 곽승고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는 그대로 훌쩍 몸을 날려 빗속으로
사라져갔다.
『노사태(老師太)!』
곽승고가 다급히 그녀를 부르며 몸을 일으켰지만 금정신니의 신형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잠긴 숲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쏴아아……!
「도대체…」
잠시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그 자리에 서 있던 곽승고는 엄습해오는 고통에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간이 고통으로 절로 찡그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회칼로 가슴을 저미는 듯한 슬픔이 무섭게 밀려왔다.
그처럼 존경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그리고 그토록 사랑했던, 단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부용이의 그 참혹한 주검이
그의 눈앞에 튕겨져 올라왔던 것이다.
그렇게 잔인한 일이 있을 수 있다니!
그렇게 밝고 맑고 아름다웠던 부용이의 그 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다니, 웃음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떠올리는 순간이면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처럼 처절한
고통에 죽어간 그녀의 마지막을. 그 처참한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곽승고는 이내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격렬한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흩어지면서 빗방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져 나갔다.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이건… 아니야! 절대로
이건 사실일 수가 없어!!』
곽승고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도리질 하던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육체의 고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아무리 부정하고자 하지만 그는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안다.
이젠 아버지도 없고 부용이도 없었다.
그것이 진실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
머리를 움켜쥔 곽승고의 전신이 문득 굳어졌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눈빛에는 긴장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가 몸을 의지하고 있는 바위는 가히 집채만 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그를
감추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그 일대는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고 수풀이 우거져 바로 옆에 누가 있다고 해도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잘못 들은 것인가?」
잠시 숨을 죽이고 주위의 기척을 살피던 곽승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린 듯해서 숨조차 죽이고 전신을 긴장시켰더니 고통이 밀려오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바위 옆의 수풀 속에서 들려왔다.
곽승고의 전신이 긴장으로 굳어지는 것과 동시에 한 사람이 바위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의 출현은 너무도 돌발적이라 곽승고는 일시지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타난 사람은 수풀을 헤치며 기어나온 것이다.
『끄으으…!』
그 사람은 모습을 보이자마자 그대로 바닥에다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이내 안간힘을 쓰면서 고개를 들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기라도 하듯이 그는 다시 손을 내밀면서 기려고 했다.
이제 보니 그는 가히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혹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바로 그의 얼굴이었다.
『맙소사!』
그 얼굴을 보게 된 곽승고는 일시에 전신이 얼어붙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그 얼굴은 곽승고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는데,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얼굴 전체가 시뻘건 핏덩어리였다. 눈도 코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짓이겨 놓은 핏덩어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괴인은 곽승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인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피투성이와 흙탕물로 범벅이 된 그 손은 곽승고를 향해 안타깝게
떨리고 있었다.
『나, 나를 백련교(白蓮敎)… 백련교의 총단으로…』
『백련교라고?』
괴인의 짓눌린 음성에 곽승고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백련교는 남송(南宋)의 승려 모자원(茅子元)이 창건한 백련종(白蓮宗)에서
기원한다. 하지만 그후 미륵신앙으로 변하여 창세주인 「무생노모(無生老母)」가
미륵을 속세에 보내 흩어진 자녀들을 거두어들여 진공가향(眞空家鄕)에 귀의시키는
천년왕국이 인간세계에 실현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민간에 파고들었다.
억눌리고 짓밟히던 백성들에게 파고든 백련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장한
종교적인 비밀결사로 발전했고, 원말에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군웅들중 상당수는
백련교도로 알려졌다.
지정(至正) 11년(1351) 한산동(韓山童)이 「천하대란(天下大亂)
미륵불하생(彌勒佛下生)」이라 하여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으로 자처하면서
봉기하였다가 잡혀 죽고 난 다음, 그의 아들인 한림아(韓林兒)가 지정(至正)
15년(1355)에 유복통(劉福通)의 옹립을 받아 황제로 즉위한 것이 그 이유였다.
한산동은 송 휘종(徽宗)의 8세손이었으므로 소명왕(小明王)이라 불린 한림아는
유복통의 옹립을 받아 황제가 된 다음에 국호를 송(宋)이라고 하고 연호를
용봉(龍鳳)이라 했다.
스스로 송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민족부흥을 내건 한림아의 칭제 이후, 원말에
각지에서 봉기한 군웅들은 모두 그를 주인으로 받들게 되었고 한림아는 바로 당대
백련교의 중심인물이었으므로 그를 받든 군웅들중 상당수가 백련교도임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곽자흥(郭子興)의 부장으로 출발하여 명을 일으킨 주원장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따로이 명교(明敎)라 불린 백련교는 종교결사인지라, 새로 나라를 세운
주원장에게는 부담이 되었다. 누대를 내려온 유림(儒林)을 자신의 후원자로 하기
위해 그는 백련교를 외면했고, 자신과의 관련을 부인하면서 탄압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익히 아는 곽승고인지라 놀라 괴인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곽승고를 향해 다가오려던 참혹한 모습의 괴인은 갑자기 울컥! 핏덩이를
쏟아내면서 풀썩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곽승고가 바위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자, 괴로운 숨을 몰아쉬면서 그는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 곽승고에게 내밀었다.
『부, 부탁… 이, 이것을 백련교에…』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사각형의 옥패(玉佩)였다.
『제, 제발… 백련교에… 나의 죽음… 죽음을…』
안간힘을 쓰면서 손을 내밀었던 그는 그대로 머리를 진흙탕에다 박고 말았다. 손에
쥐어진 옥패는 흙탕물을 뒤집어쓰고서도 선명하고 영롱했다.
『……』
잠시 망설이고 있던 곽승고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어보았다.
괴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삼척동자라도 그가 이미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곽승고는 그의 손에서 빛을 뿌리고 있는 옥패를 빼냈다.
손바닥에 들어올 만한 크기의 옥패를 쥐자 서늘하고도 청량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평범한 옥이 아님은 분명했다. 연꽃의 형상이 가운데 새겨져 있고 거기에 미륵불의
모습이 선명했다.
『이건…』
곽승고가 그 옥패를 유심히 살펴보는 순간에 갑자기 손이 진동하더니, 옥패가 그의
손을 벗어나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맙소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곽승고가 깜짝 놀라 옥패가 날아가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옥패는 빗줄기가 쏟아지는 속을 뚫고서 원을 그리며 그와 이장여 떨어진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 말해서 거기에 우뚝 선 한 사람의 손으로 빨려들어간
셈이었다.
그는 커다란 방갓을 쓰고 있었고 일신에는 눈과 같이 흰 백의경장을 입었다.
손에는 붉고 푸른 수실이 어울려 늘어진 보검을 쥐고 있었는데 옥패를 받아 쥔
그는 그 검의 손잡이로 방갓을 슬쩍 밀어올려 곽승고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방갓 아래 자리한 얼굴은 스물대여섯 정도? 마치 옥을 깎아 만든 듯이 단아한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검미와 준령과 같이 우뚝한 콧날. 여인의 것처럼 선명한
입술.
그는 곽승고와 눈길이 마주치자 씽긋 웃음을 떠올렸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군!』
그는 망설임없이 옥패를 자신의 품으로 집어넣으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건 원래 내 물건이라서 말이지… 그건 그렇고 저자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소?』
그의 행동은 명쾌하고 거침이 없다.
마치 곽승고가 당연히 그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만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곽승고는 그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지금까지 앉아 있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굳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겁을 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태도가 뜻밖인지, 방갓의 백의청년은 묘한 눈빛으로 그를 다시 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서린 미소는 여전히 부드럽고도 완강한 모습으로 곽승고에게
대답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곽승고에게 한걸음을 내디뎠다.


곽승고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와 백의청년과의 거리는 불과 일 장. 장정이 두어 걸음을 걷게 되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백의청년이 한걸음을 다가오자 곽승고는 묘한 기세가
자신을 핍박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을 할 작정이오?』
곽승고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나직이 외쳐 물었다.
『아무것도. 다만 그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듣고 싶을 뿐』
『당신도 백련교도요?』
곽승고의 되물음에 백의청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또 무슨 말을 했나?』
『아무 말도. 그저 당신이 가져간 옥패를 백련교의 총단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을
뿐이오』
『그런가…』
백의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곽승고는 그가 쥔 검의 호수구를 엄지가 밀어올리고 있음을 보았다. 무가의
장손인 그다. 저것이 발검을 위한 자세임을 모를 리 없다. 더구나 저런 형태의
발검을 하는 사람은 빠른 속도로 검을 쓴다.
그것은 그가 손을 쓴다면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피할 수가 없다는 의미와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누가 엿보고 있느냐?』
백의청년이 갑자기 싸늘하게 외쳤다.
우렁찬 웃음소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왔다.
『으하하하… 듣건대 백마공자 백무결(白馬公子 白無潔)이 당금 무림중에서 가장
무서운 후기지수(後起之秀)라고 하더니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로군』
그리고 뒤를 이어서 한 사람이 숲속에서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흙탕물이 그의
발걸음에서 튕기지만 그는 상관치 않는 듯했다. 마치 고독한 늑대를 보는 것 같은
분위기를 지닌 사람.
『냉면검신 자의후(冷面劒神 紫衣侯)?』
그를 본 백의청년의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쳐갔다.
동시에 검자루를 밀어올리고 있던 엄지가 본래대로 돌아갔다.
『영광이로군. 나를 그렇게 쉽게 알아봐주다니…』
황의무복의 사내가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은 얼음처럼 찼다. 그리고 그는 곽승고를
쳐다보았다.
『보기보단 매우 바쁜 친구로군. 여기서 또 만나게 되다니…』
곽승고는 쓴 웃음을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버드나무숲에서 만났던 바로 그 황의인이었던 것이다.
그 광경에 백마공자 백무결이라 불린 백의경장 청년의 미간이 슬쩍 찡그려졌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면 내가 여기 더 머무를 필요가 없겠군…』
그는 곽승고를 보면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 같군』
휙.
가벼운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면서 그의 신형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백무결은 당세의 위장부로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대협이란 칭호까지
받는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그의 행동은 신비롭기 이를 데 없군』
그가 사라짐을 보고 중얼거리던 냉면검신 자의후라고 불린 황의인은 곽승고를
바라보았다.
『상처를 입었나?』
『…』
곽승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의후의 미간이 슬쩍 찡그려졌다.
『백무결에게서?』
『아니오』
『그렇다면 다행이군』
고개를 끄떡인 그는 가볍게 걸음을 옮겨가 죽어 넘어진 괴인을 일별(一瞥)하더니
중얼거렸다.
『얼굴 가죽을 벗겼군! 누군가가 이 자의 얼굴을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가?』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도 안색조차 변치 않고 중얼거리던 그는 곽승고에게 물었다.
여전히 시체를 내려다 본 채였다.
『뭔가 본 것이 있었나?』
『아무것도. 그저 자신의 죽음을 백련교에다 알려달라는 말뿐이었소』
자의후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백련교? 백무결이 백련교와 무슨 관계가 있었단 말인가?』
그는 시체에게서 눈을 떼어 백무결이 사라진 숲을 바라보았다.
쏴쏴- 쏴아아-
빗줄기는 여전했고 바람도 여전했다.
숲도 그러했고, 하늘도 땅도 여전히 비바람에 휘감겨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너도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
그곳을 떠나려던 자의후가 말했다.
『…』
곽승고는 쓰게 웃었다.
대답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꾸가 없자, 그를 힐끗 바라본 자의후의 미간이 문득 찡그려졌다. 그리고 그는
바람처럼 곽승고에게 다가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곽승고는 반항하지 않았다. 물론, 반항을 하고자 해도 반항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양천사독을 만난다면 해독약을 가져다 주겠네


『정말 중독이 되었군?』
그의 맥문을 잡았던 자의후가 그의 손목에서 손을 떼면서 중얼거렸다. 원래 그가
곽승고의 손목을 잡았던 것은 그의 안색에 검은 기운이 어려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
『알고 있었나?』
곽승고의 안색이 여전함을 보자 자의후가 물었다.
곽승고가 말없는 고개의 끄덕거림을 보이자,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의 중독은 매우 심하다. 누군가가 적시에 손을 써서 독기를 눌러놓기는 했지만
이대로라면 사흘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
곽승고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그처럼 무서운 독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슨 독인지 알고 있나?』
『천고지독이오.』
싸늘한 자의후의 얼굴이 돌변했다.
『천고지독? 그럼 귀왕혈의 오대마왕중 가장 지독하다는 앙천사독이 네게 손을
썼단 말이냐?』
곽승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앙천사독… 앙천사독이란 말이지…」
그는 입술을 으스러져라고 깨물고서 어둠에 잠긴 빗속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수천,
수만번을 되뇌어서라도 가슴 속에 새겨두어야 할 이름이었다.
우둑둑…
그의 움켜쥔 주먹에서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앙천사독을 만났단 말이냐? 나와 헤어진 다음에?』
『그렇소. 아주 처절하게 만났소…』
빗줄기 속에 드러난 그의 이마에 핏대가 은은히 드러났다. 이마 아래에 자리한
눈에서 무서운 원한이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그는 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려 자의후를 보았다. 풀어져
흩어져 있던 긴머리가 우산처럼 퍼지며 빗줄기를 튕겨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소! 절대로… 방법이 있다면 가르쳐 주시오!』
곽승고와 자의후의 눈길이 격하게 부딪쳤다.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던 자의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천고지독은 무림오대절독(武林五大絶毒)중의 하나로 불리는 것으로 앙천사독
본인의 해약없이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묘강의 독왕(毒王)
우잠(于蠶)과 천산의 천산의선(天山醫仙)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너무 멀어서 시간내에 거기에 당도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설혹 거기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들이 네 중독을 치료해줄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곽승고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자의후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결자해지(結者解之)일 뿐…』
『결자해지?』
『그렇다.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말처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앙천사독에게서 해독약을 얻어내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다는 빛이 곽승고에게서 떠올랐다.
그리고 허탈한 웃음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과연 확실한 방법이군…』
쏴아아…
비는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서 쏟아져 내렸다.
곽승고는 화석과 같이 그대로 굳어져 서 있었다.
서 있는 그의 눈에, 뇌리에 아버지 곽대장군과 부용의 생전 모습이 떠올랐다.
그 맑고 밝았던 부용이…
그리고 그처럼 엄하면서도 다정했던 아버지…
「이대로, 이대로… 이처럼 허무하게 죽어가야만 한단 말인가? 그 참혹한 죽음을
그대로 두고…」
그는 입술이 찢어지도록 깨물었다.
이미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움켜쥔 주먹의 손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더 움켜쥘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깨문 입술에서 선혈이 흘렀다.
심중의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한 그는 절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는 곽승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자의후는
그가 십여보쯤 멀어지자, 문득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내가 앙천사독을 만나게 된다면 네게 해독약을 가져다 주겠다』
『!』
터벅터벅 그 자리를 떠나던 곽승고의 발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자의후를 돌아보았다.
그는 곽승고를 향해 문득 한줄기 희미한 웃음을 떠올려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땅을 박차고 떠올랐다. 허공에서 반쯤 신형을 돌린 그는 빗속을 뚫고서
숲속으로 바람과 같이 사라져갔다.
『…』
곽승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이 자의후가 사라진 숲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쏴아아아…
빗줄기가 무심히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잠시후.
한가닥 바람이 스치며 금정신니가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곽대공자!』
곽승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놀라 안색이 굳어진 그녀는 낮게 외치며 바람과 같은
신법으로 일대를 수색했다. 그리고 발견한 괴인의 시체. 그 시체를 발견한
금정신니는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곽승고의 종적은 없었다.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주위를 세심히 다시 수색한 그녀는 빗줄기 속에 드러난 곽승고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가 간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자의후나 백무결과 달리, 경공을 지니지
못한 곽승고의 발자국은 그렇게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 * *
번쩍!
어둔 밤하늘을 산산이 찢어발기는 번개.
꽈르르…릉!
세상을 공포로 떨어울리면서 천둥이 뒤이어 천지를 흔들었다.
산세는 험악했다.
잇달아 번뜩이는 번갯불에 드러나는 산세는 이미 심산유곡을 방불케 했다.
앞쪽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그 아래에는 폭우로 인해 불어난 물줄기가
급류를 이루면서 무섭게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용류(湧流)하고 있었다. 좌충우돌,
수십장의 계곡을 으르렁거리면서 급류는 그렇게 흘러갔다.
곽승고는 그 절벽에 서서 아래에서 그렇게 흘러가는 급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든 것 같군…』
혹시나 길이 있을까 해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던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돌리다
그대로 전신이 굳어졌다.
그의 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의 괴인이 무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거리는 불과 이삼 장.
번쩍! 꽈르르릉…
다시금 번갯불이 세상을 갈라놓았다.
복면을 한 괴인의 모습이 일순간 선명히 드러났다.
전신을 휘감은 것은 흑의경장. 등에는 한자루의 장검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음산한 기운이 전신에서 느껴졌다.
『장군부에서 도망친 꼬마가 너냐?』
곽승고가 자신을 발견하자 복면괴인이 입을 열어 물었다.
『그럼 귀왕혈?』
그의 물음에 곽승고의 안색이 돌변했다.
『흐흐흐흐…!』
곽승고를 쏘아보고 있던 복면괴인에게서 음산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꽈꽈-꽝! 번쩍!
그 순간,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었다.
그리고 흑의복면 괴인의 등뒤에 걸려있던 검이 섬광과도 같이 곽승고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가히 전광(電光)과도 같은 빠르기.
곽승고는 찰나지간에 목을 비틀며 몸을 뒤로 눕혔다.
슉!
검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섬뜩한 느낌이 전해지면서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잘려져 날았다.
『!』
찰나.
곽승고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뒤로 눕혔던 몸을 지탱하려 뒤로 내밀었던 발이 밑으로 미끄러졌던 것이다. 물에
젖어 있던 흙과 바윗돌이 그가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자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앗!』
곽승고의 입에서 놀람에 찬 비명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누가 잡아당긴 듯이 그대로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꽈르릉!
그것과 동시에 천둥이 크게 울었다.
본의 아니게 헛손질을 하게 된 복면괴인은 멈칫, 검을 거두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일개 서생의 몸놀림이라곤 믿기 힘든 신수(身手)로군…」
검을 거둔 그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쏴아아…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자리한 절벽에는 칡과 같은 덩굴들이 담쟁이 덩굴처럼
붙어있었다.
그 깎아지른 아래로는 까마득히 어둠 속에서 허연 이빨을 사납게 갈아대면서
울부짖고 있는 흙탕물이 보였다. 원래 급류가 흘러가고 있었던 곳인데 폭우가
쏟아지면서 물이 불어서 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견뎌낼 재간이 없어 보였다.
잠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던 복면괴인은 싸늘히 중얼거렸다.
『어쨌든 끝났군…』
그는 미련없이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웬만했다면 반드시 내려가서 확인을 해볼 그였다.
하지만 그 아래 펼쳐진 광경은 웬만하지 않았다.
발 하나라도 잘못 디뎌 저 급류에 휩쓸리기라도 하는 날이라면 그로서도 살아나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래가 험악했기에 그는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떠나고 있는 자신의 뒷모습을 누군가가 보고 있음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자리를 떠나는 복면괴인을 보고 있는 사람.
어둠 속에서 전혀 망설임없이 백의를 드러내고 있는 그는 바로 백무결이었다.
그가 있는 자리는 묘하여 일대가 한눈에 보이면서도 울창한 숲으로 인해 또한
남들의 시선은 잘 미칠 수 없는 곳이었다.
「이로서 다시 손을 댈 필요는 없어졌군…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귀왕혈이 살수들을
보내어 그를 추적한 것일까? 닭 한 마리 잡을 수 없어 보이는 그 서생에게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백무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 * *
먹구름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처럼 앞도 보이지 않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조금 가늘어져 있었다.
누각 하나가 그 먹구름을 가리며 우뚝 솟아 있다.
방가대원 후원에 자리한 그 누각의 이층은 바로 방약란의 침실이었다.
『뭐라구요?』
날카로운 외침이 급하게 터져나왔다.
마치 피를 토하는 듯, 다급하고도 불신에 가득찬 음성.
방약란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부
금정신니를 바라보았다. 격동을 참지 못해 벌떡 일어선 전신이 절로 덜덜 떨리고
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방약란은 어쩔 줄을 모르고 다시 물었다.
금정신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도 어찌된 일인지… 내가 그들의 주의를 돌려놓고 그 자리에
갔을 때는 이미 그 사람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 있었다는 시체, 그 시체가 설마?!』
『아니』
제자 약란의 다급함을 가라앉혀 주려는 듯 신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이 사부가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 시체가 있었다는 것은…!』
제자의 다급한 마음을 어찌 모르랴.
금정신니는 측은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어쩔 줄을 모르고 왔다갔다 하던 방약란이 자리를 벗어나 문을 향해갔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가봐야죠! 가서 그를 찾아봐야죠!』
금정신니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는 일이다. 이 사부가 그 일대를 샅샅이 다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그
사람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처럼 비바람이 심한 상황에서는 제
아무리 대단한 추종(追從)의 대가라 할지라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방약란이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 말을 부정하듯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대로 있을 수 있겠어요?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있을 수가… 으흐흐흑…!』
마침내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어깨를 들썩이고, 얼굴을 감싸쥐고서 울음을 터뜨린 그녀의 등을 금정신니는
조용히 두드려주었다.
『좀 있으면 날이 샐 게다. 그때 우리 다시 한번 가서 찾아보기로 하자꾸나』
『아니예요!』
약란이 발딱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 애타게 제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도저히 그냥
있을 수는 없어요, 사부님!』
세차게 고개를 저은 방약란이 몸을 날려 놀란 기러기와 같이 누각의 창을 통해
날아나갔다.
『난아!』
금정신니가 그녀를 불렀지만 방약란은 이미 가는 빗줄기를 뚫고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업보야!』
길게 탄식한 금정신니는 방약란의 뒤를 따라 널찍한 승포를 펄럭이면서 창을 통해
몸을 날렸다.
* * *
단계(端溪)의 벼루에 갈아놓은 짙은 송연먹(松煙墨)을 듬뿍 찍은 붓은 천하에서
알아주는 조선(朝鮮)의 낭미필(狼尾筆).
강인하게 그 붓을 잡은 손은 앞에 활짝 펼쳐진 강서(江西)산 백록지(白麓紙) 위에
훌쩍 떨어진다.
그리고 푹 눌러찍은 붓끝. 붓끝에서는 검은 먹이 백록지 위를 굼실거리며 흐른다.
동그라미(圓).
붓이 휘둘러져 그려진 것은 일그러진 동그라미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사람은 승려였다. 나이 육십에 가까운 그의 눈매는 매처럼
날카롭다.
웅크린 채 백록지 위에 그려진 일그러진 동그라미를 바라보던 그는 가차없이
그것을 구겨 옆으로 종이를 밀어냈다. 밀어낸다기보다는 팽개치는 듯한 몸짓.
그러고 보니 그 옆으로는 이미 구겨버린 종이가 가히 산과 같이 쌓여 있었다. 그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 것이 짧은 시간이 아님을 의미하는 듯.
그는 다시 먹을 찍어 다시금 일그러진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그것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듯이 그렇게 그는 다시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동그라미를.
그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것은.


'일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멈추게 할순 없다'


『누구냐?』
승려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광조(光照)입니다』
『무슨 일이냐?』
『연락이 왔습니다』
승려가 여지껏 고집스럽게 웅크리고 있던 몸을 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문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그의 얼굴은 바로 연왕 주태와 이야기를 하던 그 승려의 것.
『들어오너라』
말과 함께 승려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듬직한 체구를 지닌 30대의 승려 하나가 그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손은 꿇은 무릎에다 올린 단정한 자세.
『어제 그들에게서 온 연락대로 응천부의 서로대장군 곽천수가 죽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광조라 자칭한 중년 승려가 낮은 음성으로 또렷이 말했다.
일그러진 동그라미 하나가 다시 구겨져 옆으로 밀려났다.
『그들에게 약속한 대가는 지불했겠지?』
『이미 하고 왔습니다』
『되었다. 그만 나가보도록 해라』
승려가 고개를 끄떡였다.
광조가 고개를 숙여보이고 나가자, 승려는 다 그린 동그라미 안에다 붓을 꽉
눌러버리며 고개를 들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것일까.
그는 이것을 기다렸던 것일까?
그의 세모꼴의 눈에 방금까지와는 달리 격랑이 일고 있었다.
『드디어 일이 시작되었다. 이제 아무도 이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는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대장군부의 참화(慘禍)가 있은지 사흘.
연경(燕京)에 위치한 경수사(慶壽寺)의 방장실에 자리한 그의 이름은 역사가 일러
도연(道衍)이라 하였다.
* * *
폭우는 여전했다.
바로 곽승고가 절벽에서 떨어지던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미친 듯한 바람소리가 귓전을 찢어내는 듯했다.
바람이 그의 전신을 세차게 밀어올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악마의 손길과 같은
힘은 그를 점점 더 무섭게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바람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비명이 터져나오고 공포가 밀려왔다.
곽승고는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무서운 속도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절벽 아래로.
『살아야만 해! 이렇게, 이렇게 개죽음을 할 순 없어!』
비명이 터져나온 다음에 떠오른 생각.
누구나 다 그러할 것이다.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면서 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살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결사적으로 전신을 허우적거려도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질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쾅!
격렬한 충격이 그의 전신에 부닥쳐왔다.
허우적거리던 그의 몸이 튀어나온 벼랑에 사정없이 부닥친 것이다. 얼마나 강한
충격이던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대신 입에서 뿜어진 것은 피분수.
그러나 그로 인해 튕겨졌던 그의 몸은 옆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다. 곽승고는
자신의 신체가 어딘지 모르게 푹신한 곳에 닿았다가 구르는 것을 느끼고 아득하게
멀어지던 정신이 번쩍들었다.
손에 뭔가가 잡혔다.
잡힌 것은 절벽에 엉겨 있는 칡덩굴이었다.
우두둑!
곽승고가 절벽에 엉겨붙은 칡덩굴을 잡고 매달리게 됐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그
하중을 견디지 못한 칡덩굴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았다. 칡덩굴이 끊어져 나가는
것이다.
쫘아악- 칡덩굴이 그를 매단 채 쭈욱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가 움켜잡은 한가닥 칡덩굴은 엉켜있던 다른 덩굴들을 끊어내면서 계속해서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리 부닥치고 저리 부닥치고… 전신에서 피가 튀고 뼈가 부서져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이 한가닥 생명줄을 놓을 수 있으랴.
한 순간이 영원과도 같은 공포와 고통의 시간.
갑자기 팽팽한 충격이 그의 전신에 엄습했다.
그의 신형은 춤을 추듯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칡덩굴이 절벽에다 뿌리를 박고서 그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네를
타듯이 그렇게 출렁거리며 곽승고는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잠시 죽은 듯이 칡덩굴 한줄기에 의지해 매달려 있던 곽승고는 세차게 귓전을 치는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쿠쿠쿠…… 쏴쏴!
그의 발길 8, 9장 아래로는 칼날 같은 기암괴석이 삐쭉삐쭉 솟아 있고 그 사이로
무서운 급류가 용틀임하면서 광류(狂流)하고 있다. 혈육지구를 가진 사람으로서
저기에 떨어지기만 하면 그 순간에 걸레가 되고 말 것이다.


은은한 빛은 내뿜는 과일…가슴이 시원해졌다


맙소사!
곽승고는 가슴이 서늘해져 부지불식간에 눈을 감았다.
저기에 그대로 떨어졌다면 아마 시체조차 찾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와드득 소리가 들리면서 그가 잡고 있는 칡덩굴이 갑자기 출렁,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놀란 곽승고가 고개를 쳐들어보니, 그가 잡고 있는 칡덩굴이 그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뽑혀져 나오고 있었다. 팔뚝만큼 굵은 칡덩굴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떨어지면서 준 충격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다급해진 곽승고는 칡덩굴에 매달려 있던 몸을 흔들어 곁에 있는 절벽의 튀어나온
곳으로 가 발을 뻗어 한발을 그곳에다 버팅겼다. 무게를 줄여볼 셈이었다.
그러나, 칡덩굴은 전혀 사정을 봐줄 기세가 아니었다. 계속해서 몸이 뒤로
젖혀지려는 것으로 보아 끊임없이 뿌리가 빠져나오고 있는 모양.
곽승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 마당에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 없다.
그는 격하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죽을 힘을 다해서 칡덩굴을 잡고 발을 놀려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가슴이 어떻게 된 것인지 숨을 쉬는 순간에
가슴이 뻐개지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가히 풍차처럼 손을 놀리고 발을 놀려 칡덩굴을 잡은 채 위로 올라갔다. 비례해서
칡덩굴이 빠져나오는 기세는 더욱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곽승고가 매달려 있던
칡덩굴은 뿌리째 뽑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헉헉헉…』
곽승고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칡덩굴이 뿌리째 급류로 추락하는 순간에 그는 칡덩굴이 엉겨 있는 곳에 도달해
다른 칡덩굴의 줄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마당에 그것은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만들어낸 가히 초인적인 힘이었다.
절벽에 가득 담쟁이덩굴처럼 엉긴 칡이다.
얼마나 오래 자란 것일까. 잠시 매달려 있어도 탈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좀전의
그 칡덩굴도 그가 떨어지는 힘이 가해지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몸무게 정도는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 굵기였다. 이곳의 칡은 한줄기가 아니고 얽히고설켜
있었으므로.
쏴쏴-
무심한 비바람은 여전하다.
잠시 매달려 있던 곽승고는 정신이 조금 돌아오자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힘을
쓰다가 하마터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했다.
무서운 고통이 가슴에서 폐부로 엄습했던 것이다.
『으윽! 조금 전에 부딪쳤던 것이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갈비뼈 몇대는 부러진
듯…』
곽승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더 힘이 빠지기 전에 방도를 마련해봐야 했다. 일단,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자 점점 숨쉬기가 어려웠다. 한번 숨을 들이켤 때마다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 엄습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이 아닌가.
곽승고는 코를 벌름거렸다.
한가닥 말로 형용키 어려운 묘한 향기(香氣)가 코끝을 스쳤다. 부지간에 그 향기를
들이마신 곽승고는 그처럼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꼈다.
마치 어릴 때 어머니가 배를 쓸어주던 그 느낌이라고 할까.
『대체 이 향기가 무엇이기에?』
곽승고는 미간을 굳힌 채 향기의 출처를 찾았다.
칡덩굴에 매달린 곽승고는 천천히 손과 발을 움직여 향기가 나는 곳으로 몸을
이동해갔다.
그리고.
『여긴!』
그의 눈에 놀람의 빛이 차올랐다.
팔뚝 굵기의 칡덩굴이 우거진 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바위 틈에 동굴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향기는 바로 거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위의 생김이나 위치로
보아, 바로 그가 떨어지면서 부딪친 곳 같기도 했다.
코끝에 와 부딪히는 향기가 더욱 짙어졌다.
숨쉬기가 더욱 편안해졌다.
이런 상황하에서 동굴 안을 살펴보지 않을 사람은 없다. 곽승고는 더욱 짙어진
향기를 맡으면서 칡덩굴을 헤쳤다.
『!』
놀람의 빛이 다시 그의 눈에 떠올랐다.
동굴, 폭이 서너자 가량 되어보이는 절벽에 난 그 동굴은 온통 칡덩굴의 뿌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오랜 세월 동안 칡덩굴이 바위를 파고 들면서
만들어진 동굴로 느껴질 정도였다. 얼기설기 얽혀진 칡덩굴의 뿌리. 그 칡덩굴의
뿌리 틈 사이로 흰빛이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칡덩굴을 헤치면서 고개를 들이밀고 보니, 흰 과일 같은 것이 달려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과일은 어둠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은은한
빛을 뿌려내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고, 모두 3개인 듯했다.
향기는 더욱 짙었고, 가슴 속은 더 시원해졌다.
칡덩굴 뿌리를 헤치듯 곽승고는 몸을 비비며 이를 악물고서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런 형태로 자라난 과일이 평범한 것이 아님은 분명할 터.
어쩌면…
곽승고는 희망을 품고서 서슴없이 과일 하나를 따서 입에다 집어넣었다.


가장 부드러운 과일이라면 역시 잘 익은 수밀도이리라.
하지만, 대체 이건 무엇인지 입에 넣자마자 그대로 물이 되어 버렸다. 혀를 몇번
우물거리자 그대로 달콤한 물이 되어 싸한 향기를 그의 전신에다 뿌려주면서
목으로 넘어갔다.
이런 맛이 세상에 있다니!
곽승고는 자신도 모르게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과일 하나를 집어삼키고는 다시금
과일 하나를 따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쉿!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뭔가가 번개처럼 튀어나오면서 곽승고의 손을 콱 물었다.
『윽!』
무슨 고통이 이처럼 지독한가?
뼈가 저리는 통증에 이를 악물면서 손을 본 곽승고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뱀이었다.
전신이 먹을 칠해 놓은 듯한 뱀.
막대기와 같은 기이한 생김세에 크기는 불과 한자 가량이다.
혼비백산한 곽승고가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검은 뱀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곽승고의
손을 문 채로 매달려 대롱거렸다. 그러면서도 녹색의 눈빛을 빛내면서 곽승고를
노려봄을 잊지 않았다.
『저, 저리 가!』
창황중에 당한 일에 놀라 곽승고는 다급히 손을 휘둘렀지만 손뼈가 부서져 나가는
듯할 뿐, 뱀은 끄떡도 없이 매달려 있었다.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뻐개지고 몸이 아프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곽승고는 아픔마저 잊고는 자신의 손을 물고 있는 뱀을 벽에다 짓이겼다.
짓이겼다는 표현보다는 주먹으로 벽을 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었다.
쾅! 쾅!!
요란한 소리.
마치 주먹이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이 엄습하면서 뱀은 간신히 곽승고의 손에서
떨어졌다.
웬만한 뱀이라면 그대로 짓이겨졌을 터이지만, 이 놈은 끄떡도 없이 훌쩍 몸을
추스리더니 곽승고와 한자 가량 떨어진 그 흰 과일이 있는 곳으로 가서는 똬리를
틀고서 파르르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뿐인가.
머리를 까닥거리며 곽승고를 노려보는 녹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히 전율(戰慄)스러운 모습이다.
뱀에게 물린 손등엔 이빨자국이 깊숙하고 피가 흐른다.
손이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부어오르고 있었다.
-뱀을 만나면 물러나면 안된다!-
뱀뿐 아니라, 맹수를 만나게 되면 철칙으로 지켜야 할 말이다. 뒤로 움츠리는
모습은 바로 공격을 한다는 신호로 보여 맹수의 공격을 유도하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머리에 이미 몇 수레의 책을 담고 있는 곽승고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입안에서
침이 말라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그맣지만 결코 평범한 뱀이
아니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깊은 산속에 있는 기초이과(奇草異果)의 곁에는 그것을 지키는 영물(靈物)이
있다고 하더니, 저 흰 과일도 그런 것이었단 말인가?」
흰 과일을 보며 곽승고는 부지중에 신음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크게 변하는 그의 얼굴.
묵홍사(墨虹蛇)!
오래 된 책이다. 기수이진도보(奇獸異珍圖譜)라고 했던가?
크기는 불과 한자.
다 자란 크기가 한자이며, 그렇게 자란 묵홍사의 전신에는 검은 무지개빛이 돈다.
독은 비할 바 없이 강력하여 설사 황소라 할지라도 일단 물리게 되면 한식경을
버틸 수 없다 하였고, 행동이 신속하고도 빨라 산에서 만나면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구절을 떠올린 곽승고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을 한번 더 보았다.
이미 코끼리 뒷다리처럼 손등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눈앞이 아물거리고 감각마저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이미 독기가 발작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적시에 손을 써서 독기를 눌러놓기는 했지만 이대로라면 사흘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귓전에 자의후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엎친 데 덮친 격! 이젠 3일은커녕, 3분도 살아 있을 수 없게 되었구나!」
그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낄낄낄……
묵홍사는 그런 곽승고의 태도를 즐기듯이, 비웃듯이 삼각형의 조그만 대가리를
위협하듯이 좌우로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따금 슛슛-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이를
드러내보이면서.
눈싸움하듯이 뱀을 노려본 곽승고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흰 과일을 땄다.
감히!
노기충천한 묵홍사가 다시금 그의 손을 덥석 물었다. 하지만 곽승고는 놈이 물었건
말건 간에 딴 과일을 단숨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른 손을 내밀어 하나 남은
과일마저 땄다.


망연한 눈빛,무표정한 약란…생기가 전혀 없었다


손이 부서지는 듯 묵홍사가 사력을 다해 깨물고 있는데도 곽승고는 남의 일인 양,
허겁지겁 과일을 먹어댔다.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맛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일.
-어쩌면 이 과일은 천하에 보기 드문 영과(靈果)인지도!-
그렇다면 그가 중독된 이 공포의 절독(絶毒)을 해독할 수 있을는지도 몰랐다. 옛날
기협전(奇俠傳) 같은 곳에 보면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심산에 있는
영과(靈果)를 먹고 신선이 되었다는…
곽승고는 순간적으로 그 생각을 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만약 그렇다면 화가 변하여 오히려 복이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막 마지막 과일을 입에다 우겨넣던 곽승고의 눈에 격렬한 고통의 빛이
폭발하듯이 튀어 올랐다. 막 물로 변하여 목으로 넘어가려던 과일이 절반이나
폭포수처럼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크-으-윽!』
폐부를 짓이겨내는 듯한 괴이한 신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목이 타는 듯했다.
갑자기 열기가 전신을 뒤덮었다.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이런 고통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던가! 목을 움켜쥔 채로 곽승고는 바닥에 뒹굴었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고 있었다. 소리치고자 하나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천지가
암흑으로 가득 차고 의식의 끈이 어둠 저편으로 둥둥 떠올라 사라졌다.
* * *
노을이 핏빛처럼 붉다.
하늘을 덮은 구름도 붉었다.
방가대원 후원에 자리한 채 그 하늘을 이고 있는 이층누각 또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각의 앞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하나 가산(假山)과 더불어 자리한다. 가산이란
조경을 위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둔 산이다. 때에 따라서는 하나의 야산만큼 큰
것도 있지만 대개 그 형상을 모방함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무성히 우거진 버들이 바람에 전신을 내맡기고 조용히 흔들거리며 이따금 기분
좋은 바람소리를 내는 그 가산, 방약란은 거기 휘영청 늘어진 버드나무에다 등을
기댄 채로 서서 하늘을 불태우다 스러지고 있는 노을을 보고 있었다.
버들이 흔들리듯 그녀의 머리카락도 나부끼지만 그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망연한 눈빛에는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가씨…』
문득,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의 뒤에 그녀의 시녀인 홍앵(紅鶯)이 소반에 받쳐든 음식을 들고 서 있었다.
『계용율미탕(鷄茸栗米湯)을 조금 가져왔습니다』
『가져 가거라』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물조차 입에 대지 않은 지 벌써 사흘이 되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물러가거라』
『아가씨』
『물러가라지 않느냐』
방약란이 미간을 찡그린 표정으로 홍앵을 쏘아보았다. 그녀는 쉽게 성질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홍앵은 고개를 조아리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문다.
『아가씨. 곧 노마님께서 납실 것입니다』
『할머님이?』
『예. 아가씨께서 이미 이레나 곡기를 끊으신 것을 들으시고 걱정이 크셨습니다.
아가씨께서 만일 이대로 아무것도 드시지 않는다면 저희들로서는 그 죄를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먹었다고 말씀드려라』
귀찮다는 듯이 방약란은 손을 한번 저어보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홍앵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가지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버틴다고 해서 말을 들을 아가씨가 아님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노마님을 속였다가는 그 불 같은 성미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때 그 계용율미탕을 담은 소반을 받아드는 손이 있었다.
놀란 눈을 크게 뜨는 홍앵에게 그 손의 임자는 조용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를 본
홍앵은 황망히 그에게 허리를 굽혀보이고는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물러났다.
잠시 마지막 장관(壯觀)을 연출하고 있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던 방약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가 오신다면 편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다.
『그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심을 한 듯 몸을 돌리던 방약란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탄성.
『숙부님?』
『녀석… 많이 야위었구나?』
홍앵이 들고 있었던 소반을 든 채로 조용히 그녀의 뒤에 서 있었던 중년인이
자애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머리엔 사방평정건(四方平定巾)을 쓰고 일신에
선비들이 입는 난삼(▦衫)을 걸친 그에게서는 묘한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방효유(方孝孺).
나타난 사람은 방약란의 삼촌이자 당대 제일의 석학이라는 방효유였다.
자(字)는 희직(希直)이라 하고 영해(寧海) 사람인 그는 어릴 때부터
경민(警敏)하였고, 그 학문이 출중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중부(漢中府) 교수였다가 혜제가 등극하면서 한림원(翰林院) 시강(侍講)이 된
그가 당대 제일의 유학자임은 누구나가 인정한다.
오죽했으면 후일, 연왕이 병을 일으켜 북평을 떠날 때 도연이, 『승전할지라도
결코 방효유는 항복하지 않을 것이지만 절대로 그를 죽이지 마십시오. 그랬다가는
천하 독서(讀書)의 씨가 마를 것입니다』라고 그에게 신신당부하였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그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대학자라고 소문난 사람이 허연 수염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뜻밖에도 이제 갓
사십을 넘은 나이의 중년인임에.
방약란은 그녀의 숙부인 방효유와 같이 연못가를 거닐고 있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녀의 아버지 효문(孝聞) 대신 자신을 보살펴준 방효유는 그녀의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권에 의해서 방약란은 율미탕 한 그릇을 다 비울 수밖에 없었다.
『장군부의 참화가 있은 지 벌써 이레. 황상(皇上)의 명으로 금군(禁軍)이 쉬지
않고서 수색을 하고 있지만 승고의 소식은 아직도 없구나』
『……』
약란은 그의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자칫하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숙부의 앞에서 눈물을 보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너무 상심치 마라. 장군부의 식솔이라면 누구나 다 변을 면치 못했음에도 그
아이의 시신만 없다는 것은 어쩌면 천우신조하여…』
방효유가 위로의 말을 했지만, 그 말은 그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실 장군부의 참화에 대해서 그녀만큼 아는 사람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날
밤을 새면서 자금산을 미친 듯이 뒤진 그녀는 그후, 거미줄처럼 깔린 금군의 눈을
피해 매일처럼 장군부에 숨어들어 곽승고를 기다렸었다
그러길 벌써 일곱밤….
살아 있다면 이렇게 소식이 없을 리가 없었다.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며 바람소리 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던 그녀는 절망에 빠진
상태였다. 그나마 사부 금정신니마저 구대문파의 회동 때문에 삼일 만에 떠났다.
졸지에 사랑하던 사람을 잃어버린 소녀가 생의 의욕을 잃어버림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녀가 금정신니의 제자임을 아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아는
것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침묵.
무심한 바람만이 연못에 파문을 그리고 있었다.
문득 방약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방효유에게 장군부를 멸망시킨 것이 강호상의 살인청부집단이라는 귀왕혈임을
말하고 금군을 동원시켜 그들을 쫓게하면 혹시 무슨 단서라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저…』
그녀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방가의 총관사 두운정(杜雲定)이 그들 앞에 나타나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냐?』
『태상경(太常卿)과 병부상서(兵部尙書) 나으리께서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알겠다. 잘 뫼시도록 해라. 곧 갈 테니』
총관사를 돌려보낸 방효유가 조용히 말했다.
『장군부의 식솔들의 독살은 범상한 것이 아니라서 무림인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리고 금의위(錦衣衛)가 조사에 착수했다. 곧 결과가 나올 것이다.
너무 상심치 말고 몸을 돌보도록 해라. 할머니가 많이 걱정하신다』
『예』
방약란은 낮게 대답했다.
말할 기회를 놓치고서 휘적휘적 사라져가고 있는 방효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참지 못하고 입술을 즈려무는 그녀의 창백한
뺨위로 눈물이 방울지어 흘렀다.
근래에 들어서 그녀의 가슴은 타버린 재와 같았다. 잠도 오지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의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하고 이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쏴아아-
서늘한 바람 한줄기가 그녀의 허전한 가슴 속으로 파고 들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  *  *
방가대원의 대청에는 이 나라를 움직이고 있다는 중추인물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방효유와 제태(齊泰), 황자징(黃子澄).
황자징(黃子澄)은 이름이 식(湜)으로 홍무 18년에 회시제일(會試第一)로 급제한 뒤
황태손의 독서를 책임지다가 혜제의 등극 이후에 태상시경(太常寺卿)이 되어
제태와 함께 국정을 맡게 되었다.
홍무제 때에 병부시랑(兵部侍郞)이었던 제태는 혜제 즉위와 더불어 병부상서가
되어 병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연왕이 무슨 재주로 곽장군 일가를 독살하겠소?'


『곽장군의 죽음은 정말 큰 손실이오』
『백만대군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소…』
차를 마시고 있던 황자징이 입을 열자 방효유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그는 고려의 유신이오. 유사시에 대임을 맡길 만한 사람일
수가 없소』
제태가 강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원 이름은 덕(德). 지금의 이름인 태(泰)는 홍무제가 하사한 것이다.
홍무제가 그에게 이름을 하사한 것은 대내(大內)의 정전(正殿)인 근신전(謹身殿)에
벼락이 친 일이 일어났을 때, 묘당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지난 9년간 잘못을
범한 적이 없는 사람이 제관으로 필요했는데 마침 그가 거기에 합당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9년간이나 잘못을 범한 적이 없다함은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웅변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제태의 말에 방효유는 암중에 탄식했다. 병부를 맡고 있는 그의 말이니 굳이
뭐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천수의 죽음은 분명히 컸다.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내 생각에는 이번 사건이 연왕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어떻게 생각하시오?』
황자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효유가 미간을 찡그렸다.
『나도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수천리 밖의 연왕이 무슨 재주로 곽장군의
일가를 모조리 독살할 수가 있겠소?』
『흠… 그렇긴 하지만 하려고만 들면 못할 것도 없지 않겠소? 지금 경사에는 그의
분신이 셋이나 와 있는데…』
제태가 의미심장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연왕의 세 아들을 말씀하시는 거요?』
황자징의 물음에 제태가 마시던 찻잔을 탁자에다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음… 그들이 경사에 와 있긴 하지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소? 금의위에서
암중에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데…』
제태가 코웃음쳤다.
『굳이 그들이 직접 움직이는 서툰 짓을 할 리가 있겠소? 더구나 고후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음이 있을 거요』
『하긴…』
황자징에 이어 방효유도 동의를 표했다.
연왕 태에게는 기록상으로 네명의 아들이 있다.
그중 셋은 한 어머니의 소생으로 주고치(朱高熾), 주고후(朱高煦),
주고수(朱高燧)다.
태조 홍무제의 사후, 연왕은 북평을 떠나 상을 입으려 하였지만 혜제는,
『제왕(諸王)은 각자의 나라에서 상을 입도록 하라』는 태조의 유조(遺詔)를
내세워 경사에 오지 못하도록 했다.
혹시라도 있을 불미한 사태를 경계한 것이다.
이에 연왕은 자신의 세아들을 보내 문상을 했지만 그때부터 조정과의 신경전은
시작되었다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문상을 온 고치등의 세 아들은 아직 경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장자인
고치는 현명한 사람이었지만 둘째인 고후는 용력(勇力)이 과인한데다 사나운
성품이라 뭐든 눈에 거슬리는 것을 참아내질 못했다.
말썽이 끊이지 않고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태가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면서 근엄한 미간을 찡그렸다.
『고후의 입조한 뒤에 하는 행동은 실로 안하무인이오.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것은
예사고 조정의 백관들이 아예 눈에 뵈지 않는 듯 행동하고 있소이다』
『나도 들은 바 있소이다…』
제태의 말에 방효유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를 이용한다면 일이 의외로 쉽게 풀릴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소』
『일이 쉽게 풀리다니?』
황자징의 물음에 제태가 미소했다.
『그를 부추겨 계속해서 무법을 자행케 한다면 제 아무리 천하의 연왕이라 한들,
어찌 그물을 벗어날 수가 있겠소?』
『서둘 일이 아니오』
방효유가 고개를 저었다.
『주왕을 폐서인 했다고 하나, 제왕(諸王)의 세력은 아직 그대로 있소. 어차피
하루이틀에 끝날 일이 아닌 바에야 차근차근히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옳을 거요.
더구나, 우리의 목표인 연왕의 세력은 아직 그대로요. 그는 정말 용과 같고 범과
같은 사람이라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오』
『그건 사실이오』
제태가 동의를 표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그냥 둘 수가 없는 거요. 지난날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과
같은 난세를 겪지 않으려면… 그가 발동하기 전에, 그의 사지를 하나하나
잘라버리면 그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겠소?』
황자징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초칠국의 난이란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에 각지에 봉해진 황족들이 연합하여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사건을 말한다.
이들은 현재의 정치상황이 전한 초기와 비슷하다고 판단하고는 그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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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스트
  • 작성자닮아가는자 | 작성시간 20.04.15 ㅈㄷㄳ
  • 작성자에스피 | 작성시간 20.04.15 즐감하고 갑니다.
  • 작성자아침의 나라 | 작성시간 20.05.19 감사...
  • 작성자님프(요정) | 작성시간 20.06.15 즐독하고 갑니다.
  • 작성자장군바위 | 작성시간 20.06.19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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