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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방

위대한 후예(금강) 제8장 무공전수(武功傳授)

작성자검은눈동자.|작성시간20.03.11|조회수387 목록 댓글 8

제8장 무공전수(武功傳授)


나타난 사람 역시 복면을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고 냉정했다. 다른 자들과는 달리 아무런 무기도
손에 들지 않았다.
『또 다른 자가 들어갔단 말이냐?』
보고를 받은 그는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던 복면인이 돌연 말끝을 흐렸다. 복면속 그의 두 눈은
경악과 공포, 고통으로 찢어질 듯이 부릅떠져 있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쳐 이 모양을 만들고는 이젠 외인까지 드나들게 해?』
복면인이 음산한 음성으로 질타하며 수하들을 쓸어보았다.
그의 앞에 있던 예의 복면인이 소리도 없이 앞으로 엎어졌다. 그의 목에서 흐르는
피가 바닥으로 흘러 스며들었다. 누구도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싸늘한, 사람의 심신을 억압하는 살기가 일대를 단숨에 뒤덮었다.
『공격한다!』
그가 차갑게 소리쳤다.
그의 앞쪽으로는 기암괴석 사이로 스물거리는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마의소년(麻衣少年)의 뒤를 따라 안개속으로 들어선 왕승고 일행의 첫느낌이었다.
마치 구름 속에 들어온 듯 하였다.
겨우 손을 내밀면 자신의 손을 볼 수 있을 정도?
긴장된 안색으로 잠시 바깥의 기척을 살피고 있던 마의소년이 그들에게 말했다.
『제 발걸음을 유의해서 따라오십시오!』
『이 은제곡의 입구에는 묘한 장치가 되어 있죠. 무슨 진이라고 하는데, 처음 왔을
때는 이곳에서 반나절을 헤맸었습니다』
채노야가 보충했다.
『오행미리진(五行迷離陣)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흐려서 진세를 알지
못한다면 평생을 걸어도 곡내로 들어올 수가 없게 하죠』
마의소년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좌삼(左三), 우칠(右七).
난석더미 사이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마의소년의 걸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왕승고는 부지중에 나직히 중얼거렸다.
『좌삼이니 목(木)이고 우칠이니 화(火)라, 동방(東方)으로 가니 다음은
남방(南方)이며, 목생화(木生火)이니 길지(吉地)라 곧 생문이로구나』
그의 말에 앞서가던 마의소년이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순간, 갑자기 그들의 시야가 돌변했다.
거의 일이장 밖을 보기 힘들던 안개가 갑자기 걷히며 맑은 밤하늘이 창창히 올려다
보이는 것이다.
그들의 앞에는 밤의 나래에 몸을 묻은 아늑한 골짜기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그윽한 꽃향기.
서너간의 모옥(茅屋)이 그 골짜기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 모옥의 좌우로는 빽빽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도록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골짜기 전체를 덮고서 자라고 있었다. 향기는 바로
거기에서 연유하는 듯…
곡구를 벗어난 왕승고등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뜻밖에도 곡구의 주위에는 칠팔명의 사람들이 앉고 선채로 모여있었던 것이다. 그
행색은 다양해서 승려와 도사, 속가인등이 골고루 섞여있는데 한가지 공통점은
모두 나이가 육십대이상의 노인이라는 점쟁  이었다.
그들은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은 청삼을 걸친 노인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닥에 앉은채 눈을 감고서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안색은 창백했고, 찢겨진 옷자락에 군데군데 핏자국까지 보여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듯했다.
『오늘따라 본곡에 손님이 많군요. 일년내내 사람의 발길이 없는 곳인데 하필이면
사부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마의소년이 혀를 찼다.
『무슨 소리야? 그럼 목노형이 출타중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형과 함께 약초를 캐러 가셨습니다』
『어, 언제쯤 돌아오시지?』
『글쎄요, 한번 나가시면 대충 육개월쯤…』
『언제 가셨길래?』
『한달 쯤 됩니다』
『이런 낭패가…!』
채노야가 입을 벌렸다.
『귀왕혈이 왜 이곳을 노리는 것인가?』
장군충이 물었다.
『그건…』
난감한 빛으로 마의소년이 곡구에 포진한 노인들을 바라보았다.
『아미타불… 그것은 우리들 때문입니다. 우리로 인해 시주 일행께 폐를 끼쳤다면
사죄드립니다』
『지금 그것이 문제겠소? 당장 이곳을 벗어남이 문제이지! 이 일이 어찌 우리들의
잘못이란 말이오?』
황색가사를 걸친 노승이 눈을 뜨고 입을 열자, 그 앞에 앉아 곡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듯 하던 청삼의 노인이 고리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생김새에서부터
괄괄한 성미가 여실했다.


『양해하시게. 육장문인(陸掌門人)의 성미가 원래 괄괄하셔서…』
노승이 마의소년을 향해 웃어보였다.
『별 말씀을요, 상세는 어떠십니까?』
마의소년은 노승에게 물었다. 이미 청삼노인의 성미를 익히 아는 듯했다.
노승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별로 나아지지 않았소그려. 아무래도 우리들은 여기서 뼈를 묻게 될 모양이오』
안타까운 빛이 소년의 얼굴에서 떠올랐다.
『사부님께서 계셨다면 해독을 하실 수 있었을 터인데, 소생의 능력이 모자라서…
죄송합니다』
『아미타불… 그것이 어찌 소시주의 탓이겠소? 소식도 없이 이곳으로 불쑥 찾아온
우리들의 잘못이지. 저들의 산공독(散功毒)은 너무 지독하여 해독할 가망성이 없는
이상, 우리는 한줌의 진기가 남아있는 동안 이곳을 떠나는 것이 옳겠소. 그것이
소시주에게 그나마 폐를 끼치지 않는 일이…』
『무슨 말씀을요, 만약 그러신다면 사부님께서 절 쫓아내실 겁니다』
『흥! 목노괴(木老怪)의 성미로 잘쫓아냈다고 하지 우릴 봐줬다고 칭찬을 할까?』
청삼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마의소년이 그를 노려보았다. 노기어린 시선이지만 상대가 노인인지라 참고있는
듯했다.
그것을 보면서 왕승고는 그의 사부라는 목씨노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저 나이에 저렇게 참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하 구대문파의 수뇌들이 이런 처경에 처할줄이야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아미타불…』
옆에서 한 사람이 다시 눈을 뜨면서 탄식했다.
그 말에 문득 그를 본 왕승고의 눈이 커졌다.
노승. 하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승이다.
늙은 비구니老尼.
그 얼굴은 왕승고가 익히 아는 것이었다.
지난날 장군부에서 앙천사독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바로 늙은비구니였기
때문이다. 그는 몰랐지만 그 노니야말로 방약란의 사부인 금정신니였다.
『노사태…』
왕승고가 그녀를 향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누구… 노니를 아시는가?』
잠시 그를 보던 금정신니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한 일이다. 방약란도
몰라본 그의 얼굴을 금정신니가 어찌 알아볼까.
그녀의 물음에 왕승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장군부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저를 구해주셨지요. 종산에서 헤어진…』
왕승고가 말끝을 흐렸다.
지금에 이르러 곽이란 성을 쓰기도 뭣하고 아니쓰기도 이상한지라 자연 말이
명확하지 못한 것이다.
그 말에 금정신니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종산에서 헤어졌다니? 시주는…』
『장군부의 곽대장군께서 가친되십니다』
『!』
금정신니의 눈에 경악이 뛰쳐나왔다.
『그, 그럼 곽대공자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어, 어떻게?』
금정신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서 왕승고를 쳐다보았다. 누가 그의
얼굴을 보고서 그가 이렇게 된 것을 믿을 수가 있을까?
『그 뒤, 좋지 않은 일이 좀 있었습니다. 간신히 살아나긴 했지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때 중독이 된 것이 아직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아미타불! 이런 공교한 일이… 노니는 아미산의 금정이오.
약란은 나의 기명제자가 된다오』
『약란이라면, 방가의 난매를 말씀하시는겁니까?』
『그렇소. 그날 장군부에서 공자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난아의 신랑감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기 위해서 갔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지금은 우리도 곽공자와 비슷한
처지가 되어 마침 점창산의 육장문인과 친분이 있으신 목노선생을 찾아왔으니…』
금정신니가 길게 탄식했다.
왕승고는 비로소 방약란이 어떻게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독기가 시간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소. 해독약이 효과가 없는 이상,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소이다』
노도사 한사람이 감고있던 눈을 뜨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나간다면 제자들의 죽음마저 허사로 돌리게 될 가능성마저
있소』
『흥! 우리가 전력을 다한다면 놈들이 제아무리 날고긴다고 한들 어찌 우리를 막을
수 있겠소?』
육장문인으로 불린 청삼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이 문수원에 모인다는 구대문파의 수뇌들이십니까?』
그때, 생각에 잠겨있던 왕승고가 금정신니를 보면서 물었다.
『그렇소만, 곽공자가 그걸 어찌?』
금정신니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왕승고가 품에서 피에 젖은 봉서를 꺼냈다.
『이건…』
그가 폐찰에서 만났던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는 그 봉서를 건네자 사람들의 얼굴이
일제히 굳어졌다.
『아미타불 문시주까지 실패했단 말인가?』
황색가사의 노승이 장탄식을 했다.


봉서를 건네준 왕승고 일행은 그들이 뭔가 숙의하고 있음을 보고 마의소년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서너간 정도의 모옥의 안은 의생의 거처답게 약향으로 그득했다. 천장에는
약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장군충의 부상은 의외로 간단하지 않았다. 두어군데 검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어깻죽지에 파고든 비표 하나는 뼈까지 파고든 상태였다.
『독이 묻어있군요』
채노야가 치료하는 것을 보고 있던 마의소년이 봉지에 싼 가루약을 가져왔다.
『이것을 바르고 드시도록 하십시오. 본곡의 제독산(除毒散)인데, 웬만한 독이라면
모두 해독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목노선생께서는 언제 돌아오실지 모른단 말인가?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채노야에게 어깨를 맡기고 있던 장군충이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된 빛이
역력했다.
『그렇습니다. 약초를 캐러가신다면 날짜가 일정할 리가 없지요. 채노야께서도 잘
아실겁니다』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어디로 가신 것인지는 아는가?』
채노야의 물음에 마의소년이 미간을 찡그렸다.
『장백산쪽으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장백… 요동의 그 장백산(長白山:백두산)까지 말인가?』
『그렇습니다』
『찾아갈 수도 없게 되었군!』
채노야의 탄식이 왕승고가 입을 열어 물었다.
『저분들은 언제 이곳에 오셨소?』
『얼마되지 않습니다. 한시전쯤입니다』
그때, 문득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의소년이 안색이 변해 밖으로 달려나갔다.
문을 열고 보자 안개속을 뚫고 곡구밖에서 불화살이 날아들고 있었다. 약초밭에다
모든게 나무인 이곳이다. 불화살이란 치명적일 수 있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밖을 내다보고 있던 장군충이 단도를 잡고서 일어났다.
『장호법은 쉬어야…』
『그럴 틈이 없습니다. 저들이 정말 문수원에서 회동했던 구대문파의 수뇌들이라면
상황은 참으로 간단치 않습니다. 무림중의 구대문파라면 가장 막강한 세력인데,
그러한 그들이 저런 행색으로 쫓기고 있다는 것은…』
『말로 짐작건데 암중에 산공독에 당한 모양이오』
채노야가 말했다.
산공독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몸에 있는 공력을 흩뜨리는 독이다.
일반인들에게야 무력감을 줄 뿐이지만 일신의 공력을 쓸 수 없게 하는 이
산공독이야말로 무림인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 아닐 수 없다.
『구대문파 수뇌의 비밀회합이 외부에 알려지고 귀왕혈이 그들을 습격했다는 것은
그만큼 준비를 했음을 뜻합니다. 저들이 문수원에서 이곳까지 피신해왔다는 것은
놈들의 일차공격이 실패했다는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놈들이 사력을 다해 마무리를
하려고 할겁니다』
『이곳을 공격하겠군…』
채노야가 안색이 변해 중얼거렸다.
『그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는지도…』
장군충이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중간에 그 자를 만나고도 문수원으로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저들이
이곳으로 찾아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니!』
채노야가 답답한 듯이 안절부절 하지못하고서 모옥의 안을 서성거렸다.
그의 심중이 초조함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주군의 독을 해독키 위해서 수천리를 달려왔는데, 하필이면 사지(死地)에 찾아든
꼴이니 어찌 초조하지 않겠는가.
그때, 마의소년이 나타났다.
『신니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왕승고가 나타나자 금정신니가 그에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긴말은 할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설명하겠소. 우리는 원래 몇가지 긴요한 안건을
놓고 문수원에서 회동하였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그것이 저들에게 알려져서 이
모양이 되었소… 이제부터 우리는 혈로를 뚫어볼 생각이니 혹여 우리가 저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곽공자께서 란아를 찾아가 오늘의 일을 알려주시오.
그리고…』
금정신니는 옷자락을 찢어서 혈서로 쓴 편지 하나를 꺼내 왕승고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구대문파중 한군데에다 전해주시오』
『신니! 이 일은…』
『신니! 더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청삼노인이 소리치고는 안개속으로 몸을 날렸다.
『부탁하오. 난아에게 무공을 더 연습하고 싶다면 아미파에 가면 된다고
일러주시오. 그럼!』
금정신니는 왕승고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는 미풍이 스치는 사이에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산공독에 중독되어 체내의 공력이 감퇴되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 여덟명의
움직임은 가히 바람과 같았다.
『…』
왕승고는 잠시 말없이 그녀가 남겨놓은 혈서만을 움켜쥔채로 우뚝 서 있었다.
착잡했다.
이도 힘없어서 당하는 일이었다.
힘을 기른다! 남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을…
왕승고는 이를 악물었다.


왕승고와 장군충, 그리고 채노야는 긴장된 표정으로 안개가 덮인 곡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나간 다음에 날아들던 불화살은 멎었다.
하지만 그 직후, 안개속을 뚫고서 은은히 격렬한 호통소리와 싸움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날아든 불화살을 처리한 마의소년도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의 옆에 와 섰다.
『 다른 통로는… 아마 없겠지?』
장군충이 소년에게 물었다.
『 있었다면 저 분들이 저렇게 무리하게 움직이도록 두지 않았지요』
『 갈 작정이오?』
장군충이 손에 쥔 단도를 움켜잡으며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고 왕승고가 물었다.
『 그렇습니다. 지금 가야합니다』
『 말도… 그놈들이 버티고 있는데…』
채노야가 고개를 저었다.
『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습니다. 그들이 성공을 하건 못하건간에, 귀왕혈은
우릴 그냥두지 않을 겁니다. 놈들은 자신들의 행적을 목도한 사람들을 그냥 둔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방금 이곳을 떠난 사람들은 구대문파의 수뇌들입니다.
결코 그 일이 알려지는 것을 놈들은 원하지 않을겁니다』
그는 한걸음을 앞으로 나섰다.
『 그들이 돌파하려는 혼란을 틈타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입니다』
『 맙소사! 어쩌다 일이 이 지경으로…』
채노야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때, 왕승고가 중얼거렸다.
『 기회는 사라진 것 같소』
은은히 들리던 싸움소리가 돌연 격렬한 음향으로 변하면서 안개속에서 조금 전에
사라졌던 금정신니등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밀리고 있는 모습.
『 여기 계십시오!』
장군충이 바람처럼 그들을 향해 덮쳐갔다.
보지 않아도 그 뒤를 귀왕혈이 추격해오고 있음을 알기에 취하는 행동이다. 그들이
이 은제곡 안으로 들어온다면 이미 모든 것이 끝일 것이기에.
『 진세가 깨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왕승고가 미간을 찡그렸다. 곡구 일대를 뒤덮고 있던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 그럼 큰일났는걸!』
마의소년이 놀라 달려갔다.
『 여기 계십시오. 가보고 오겠습니다』
왕승고도 소년의 뒤를 따라 곡구로 달려갔다.
채노야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 마당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안개속에서 급급히 후퇴하고 있는 금정신니 일행중 두어명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나머지도 급격하게 힘이 쇠한 모습이었다.
장군충은 복면인들 대여섯명이 뒤를 따라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대갈일성하면서
검과 하나가 되어 그들을 덮쳐갔다.
그틈에 금정신니등은 일단 진세 뒤로 몸을 뺄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면서 복면인들의 모습은 난석(亂石)더미 사이로 점점 더
많아졌다.
단숨에 두어명의 복면인을 쓰러뜨린 장군충은 이미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무리를
한터라, 아차하는 순간에 수세로 몰려 잇달아 난석더미 밖으로 밀리고 있었다.
『 놈들! 감히…!』
물러나 있던 청삼의 노인이 대갈하면서 수중의 검을 번개처럼 휘둘러 장군충을
핍박해오던 복면인 하나를 대번에 피를 뿌리게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는 신음과 함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하면서 전신을
휘청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
『 진세를 회복시킬 수 있겠나?』
왕승고가 다급히 마의소년에게 물었다.
『 가능하지만 저들이…』
『 그럼 됐어! 내가 저들을 막을테니까 그 동안 진세를 회복시키게!』
왕승고는 입술을 깨물면서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바람을 받으며 그의
옷자락이 서서히 펄럭이기 시작했다. 눈에 자광이 떠올랐다.
『 장호법! 뒤로 물러나시오!』
『 주공! 위험합니다! 물러나십시오』
서너명의 복면인에게 둘러싸인채 조금씩 밀리고 있던 장군충이 그를 돌아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 윽!』
하지만 그렇게 한눈을 판 사이에 그는 어깨에 일검을 격중당하고 단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날아드는 검광!
다 틀렸다!
장군충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번뜩이더니 처절한 비명이 일어났다.
장군충의 눈앞으로 방금 자신을 공격하던 복면인이 허공을 타고 훌훌 날아가고
있었다.
『 주공…』
자신의 앞에 선 것이 왕승고임을 본 장군충이 믿을 수 없는 듯이 중얼거렸다.
『 물러나시오. 내가 뒤를 막는 동안… 어서!』
왕승고가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쳤다.
웅웅-
지난날 백련교를 상대할때와 같은 음향, 왕승고의 손에서 자광이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면서 벌떼가 날개짓하는 듯한 소리가 일어났다.
그 앞으로 복면인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으악!』
『으으악-!』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문다.
안개가 마치 폭풍에 휘말린 듯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마치 튕겨지듯이 나가떨어지는 복면인들의 모습이 뒤를 이었다.
가히 가공할 위력.
밀물처럼 공격해들어가던 복면인들의 발놀림이 주춤, 멎었다.
귀왕혈은 살수집단(殺手集團)이다.
살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객(刺客)을 의미하는 것이며, 남을 암살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귀왕혈은 바로 그러한 살수들로 이루어진 집단이고 청부에 의해서
대가를 받고 남을 죽인다.
그런만큼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타나기 보다는 암중으로 모든
준비를 하고 상대를 죽일때에만 나타나게 된다.
실력보다는 상대의 틈을 엿본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귀왕혈에는 살수행에 더해 본신의 실력으로 우뚝한 존재 다섯이 있어
오대천왕이라고 불린다. 앙천사독 또한 그중 하나였다.
오늘의 일은 실로 중대했으므로 귀왕혈은 여기에 전력을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슴에 손을 수놓은 복면인. 천수앙신(千手殃神)이라 불리는 그는 오대천왕중
하나로서 이 은제곡을 공격하고 있는 귀왕혈의 살수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구대문파의 수뇌회동을 습격하는 것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저력은 과연
대단하여 산공독에 중독이 된 상태에서도 그들중 수뇌 대부분은 포위망을 뚫고서
도주했다.
그러나, 무엇때문인지 그들은 밖으로 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산속으로 들어왔고
이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서 포위망을
뚫고자 하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다시 안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뜻밖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천수앙신은 비명과 함께 수하 서너명이 한꺼번에 훌훌 날아오르는 가운데, 안개가
흩어지면서 그 가운데 왕승고가 눈에서 자색광망을 폭사하면서 우뚝 버티고 서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기이한 흐름이 생기면서 갑자기 안개가 앞을 분간할 수 없게 일어났다.
『진세가 변한다! 공격해!』
천수앙신이 몸을 날리면서 소리쳤다.
쏴쏴-
그의 손에서 벌떼와 같이 암기가 날아갔다. 비표, 수리검, 독침등등… 마치 수십
명이 한꺼번에 암기를 쳐내는 것과 같은 상황! 그의 별호가 왜 천수앙신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수였다.
주춤했던 복면인들이 일제히 왕승고를 향해 덮쳐갔다.
우웅웅-!
공포의 자광이 다시 일어났다.
『으아악!』
뒤를 잇는 비명의 합창.
『이럴 수가…?』
천수앙신이 이삼 장 밖으로 깃털처럼 날아내리며 신음했다.
직접 겪어보는 것은 보는 것보다 더했다.
자광은 가히 천근의 폭포가 쏟아지는듯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위세에 휘말린
서너명의 수하들이 다시금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나뒹굴었다.
오죽하면 그 또한 순간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그 자리를 피했을까.
찰나. 마치 거짓말처럼 시야의 모든 경물이 사라져버렸다. 눈앞을 가리며 다시
일어난 안개. 이제 확실했다. 이 곡 일대를 가리고 있는 짙은 안개는 그저 산세의
영향으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슨 일인가?』
까마귀가 소리치는 듯 껄끄러운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대머리의 흑포괴인 하나가 천수앙신의 뒤에 나타나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얼굴.
그는 바로 장군부를 멸하고 왕승고를 죽이고자 하였던 앙천사독이었다. 그 뒤를
따라 흑의복면인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겠소. 갑자기 웬 괴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아무래도 놈들이 이곳으로
숨어든 것이 그놈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오』
천수앙신이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켈켈켈… 실력이 녹이 슨건가? 진세를 깼다면서도 어떤 놈이기에… 이, 이건…!』
괴이한 웃음을 터뜨리던 앙천사독이 돌연 눈을 찢어질 듯이 부릅떴다.
왕승고의 일격으로 인해 나가떨어진 복면인중 하나가 그의 발 아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전신이 급속하게 부패해 들어가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맙소사! 이런 독이…』
그의 상태를 본 앙천사독이 주름투성이의 녹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안개로 덮인
은제곡을 바라보았다.
『 설마 독왕 우잠이 여기 있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독왕이라니? 묘강의 독왕이 왜 여기 있어! 그 놈은 새파란
애송이였어!』
천수앙신이 코웃음쳤다.
『애송이라고? 애송이가 어떻게 이런…』
믿을 수 없는 듯이 앙천사독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시야에 보이는 것은 일렁이고 있는 안개뿐이었다.



눈앞을 가리며 폭발하듯이 일어나는 안개.
무섭게 달려들던 복면인들의 모습이 그 안개속에 묻히는 것을 보고 왕승고는
신형을 휘청였다.
나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 주공!』
장군충과 채노야가 황급히 달려왔다.
『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
왕승고는 나직이 소리치고는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의 어깨와 가슴께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언뜻 박혀있는 표창의 끝부분이 보였다.
『 부상이 심하십니까?』
채노야가 안절부절 못하고서 물었다.
『 괜찮소』
그에게 고개를 끄떡여보인 왕승고는 굳은 표정으로 마의소년을 보았다.
『 진세가 제대로 발동한건가?』
『 이미 전진이 훼손되어서… 일단 생문을 닫아버리고 진세를 전도(顚倒)시키긴
했는데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군요』
마의소년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마음이야 말해 무엇할까. 사부도 없는 마당에 외인들이 몰려들어와 진을 치고
있고 살기등등한 적들이 금방이라도 쳐들어오려고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눈앞에서는 안개가 마치 소용돌이처럼 회오리치고 있었다. 처음 시야만
막고 있을 때와는 다른 형상이었다.
은제곡에 설치된 오행미리진은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중의 수화상극(水火相剋)의
묘를 응용하여 안개霧를 일으키는 것으로 사람을 해하기보다는 길을 잃게 만드는
진세라 할 수 있었다.
진세라고 하는 것은 원래 군사를 움직여 대오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람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진세를 형성하는 것은 지난날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의
팔진도(八陣圖)에서 비롯한다. 황제(黃帝)가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팔진도를 세상에
선보인 사람이 제갈무후인 까닭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전해지는 팔진도에 관한 기록은 이러하다.
지난날 오의 육손(陸遜)이 촉의 유비를 크게 이겨 그 뒤를 쫓다가
어복포(魚腹浦)에 이르렀을 때, 강물을 끼고 있는 산발치에서 살기가 치솟음을
보고 못내 의심하여 군사를 멈추었었다. 하지만 필경 있으리라 생각했던 매복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군사를 시켜 염탐하니 강변에 돌무더기 칠팔십개가 있을 뿐이라 했다.
전에 이곳을 지날 때 제갈량이 군사를 풀어 돌을 주워다가 모래벌판에 쌓은 것인데
그때부터 구름같은 기운이 돌무더기 안에서 치솟았다는 인근 주민의 말을 듣게 된
육손은 코웃음을 치고는 그 돌무더기石陣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돌연 미친듯한 바람狂風이 일며 위세를 떨치니 단숨에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러다닐 정도가 되지 않는가.
뒤이어 하늘과 땅이 온통 캄캄해지면서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돌더미들이 삐죽삐죽
일어나 칼을 세워 둔 것 같고 바람에 날아오른 모래언덕도 마치 높은 산과
같아졌다.
뿐만 아니라 바람에 이는 물결소리도 창칼이 부딪고 북과 징이 울리는듯하여
살기가 등등했다.
혼비백산한 육손이 황급히 그 석진을 벗어나려 했지만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길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그의 앞에 한 노인이 나타나 그를 구해 진밖으로 인도하니, 겨우 숨을 돌리게
된 육손은 그가 제갈무후의 장인임을 알게 되었다.
『 이 진의 이름은 팔진도라 하오. 각기
휴(休)'생(生)'상(傷)'두(杜)'경(景)'사(死)'경(驚)'개(開)의 여덟 개의 문이
시시때때로 상호호응하면서 변화를 부리니, 가히 10만의 정병(精兵)에 비길 수
있소이다. 사위가 떠나면서 「뒷날 동오의 대장이 이 진속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니 그를 내보내지 말라」고 하였지만 이 늙은이老夫는 평생 착한 일하기를
좋아했으니 차마 장군이 그곳에서 죽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생문(生門)으로 인도한
것이오』
그의 말을 들은 육손은 자신이 도저히 제갈무후에 미칠 수 없음을 알고는
탄식하면서 유비 쫓기를 포기하고는 군사를 되돌렸다….
이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기물(器物)을 이용하여 진세를 벌린다는 말이 결코
허황하기만 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적절치 못한 비유일수도 있지만 고대
크레타의 섬에 있었던 크노소스의 미궁(迷宮) 또한 이러한 진세의 기초적인
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빨리 치료해야겠습니다!』
왕승고의 어깨에서 검은피가 흘러내림을 보고 채노야가 안절부절 못하고 재촉했다.
다급하기는 장군충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보호해야할 왕승고가 오히려 그를
구하기 위해서 부상을 당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채노야가 그의 어깨와 가슴팍에서 수리검 하나와 강표(鋼▦)를 빼내는 것을 보자
마의소년이 미간을 찡그린채 말했다.
『 암기에 극독이 묻어 있는 것 같군요. 빨리 손을 써야하겠습니다』
『 독이라면 내게 해를 끼칠 수 없을 거야』
왕승고가 그에게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의 눈빛은 아직도 은은한 자광이었다.
상처를 대강 싸맨 왕승고는 눈을 부릅뜬 금정신니를 보게 되었다. 좀 전과는 달리,
왼쪽어깨에서 가슴까지 온통 선혈로 물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왕승고를 보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왕승고가 묻자, 금정신니는 꿈에서 깬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 대체 어떻게… 언제 무공을?』
왕승고는 쓰게 웃었다. 그 복잡한 일을 어찌 한마디로 정리해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 우격다짐이지, 무공을 배운건 아닙니다』
『 그건…』
금정신니는 말끝을 흐렸다.
무공을 배웠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와 헤어진 시간이 얼마라고 그새
저러한 무공을 연마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방금 그가 보인 가공할 위력은
분명히 외공이 아니라 내가의 공부였다. 내공이라고 하는 것이 일조일석에 이룰 수
없음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지라 금정신니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 채노. 이 분들을 도울 수 없겠소?』
채노야를 보며 말한 왕승고는 금정신니에게 다시 말했다.
『 채노인께서는 의술의 행가(行家)이시니 혹, 도움이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금정신니의 흐른 피를 살펴보고 그녀의 맥을 짚어본 채노야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곤 다시 옆에 있던 황색가사의 노승의 맥을 짚었다.
『 어떻소?』
채노야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왕승고가 물었고 금정신니가 침착히
입을 열었다.
『 아미타불… 노니등은 이미 생사를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주저하지 말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 두분을 살펴본 결과, 산공독에 중독이 되어 일신의 공력이 이미 대부분 사라진
상태입니다. 더구나, 독을 쓴 자는 여러분들을 반드시 죽이기 위해서 아마도
폐혈산(廢血散)류의 독을 쓴 것 같습니다』
『 폐혈산?』
『 피를 썩게 하는 독입니다. 체내의 공력이 산공독에 의해 모두 흩어지게 되면
아마도 발작을 하게 될겁니다…』
『 발작을 하게 되면?』
『 일각이상을 견디기 힘들겁니다』
『 이런 죽일 놈들!』
성미급한 청삼의 노인이 옆에 있던 바위를 검으로 후려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놀랍게도 검이 바위에 박혀들었다. 제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 할지라도 저런 위력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그들 일행의 얼굴은 놀랍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두웠다.
청삼노인의 공력을 생각한다면 검이 바위에 박히는 것이 아니라 바위를 두쪽 내야
옳았기 때문이다.
금정신니 일행은 무거운 얼굴로 뭔가를 숙의하고 있었다.
왕승고는 장군충과 함께 은제곡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은제곡의 지세는 특이했다. 일종의 호로병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호로병과
같이 정말 앞쪽 외에는 통로가 없었다. 입구 외에는 깎아지른 절벽.
『 절벽쪽으로 올라갈 수가 없을까?』
왕승고는 경사가 조금 완만한 모옥 뒤쪽의 절벽을 바라보면서 마의소년에게
물었다. 그래봤자 높이는 삼십여장이상이나 되어 보였다. 쉽게 말해서 안개에 묻혀
높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 은제곡 일대의 절벽으로는 사람이 오를 수 없습니다. 잡을 곳이 없어요.
튼튼해보여도 사람이 잡으면 부스러져 버리고 말…』
그 말이 채 끝나지 않아서였다.
비명이 길게 꼬리를 끌며 급속히 떨어져내려와 그들의 앞에 쿵! 소리와 함께
쑤셔박혔다.
참혹.
피가 튀고 살이 흩어졌다.
흑의에 복면을 한 자임을 그래도 알아볼 수 있었다. 뒤이어 몇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잇따라 추락하하는 것을 보고 왕승고는 절벽으로 올라갈 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적도 몇번의 시도 끝에 단념한 듯 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채노야는 사색이 되어 은제곡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그가 어찌 상상이라도 했을까.
왕승고는 마의소년이 무거운 표정으로 곡구에 서있음을 보고는 그에게 물었다.
『 무슨 일이지?』
『 안개가 흩어지고 있어요. 아무래도 저쪽에 진도지학에 정통한 자가 있는
모양이에요. 저로서는 배움이 얕아서 더 이상 막을 수가 없는데…』
『 진세가 깨지고 있다는 뜻인가?』
『 그래요』
마의소년의 대답에 왕승고는 나직이 신음하면서 안개에 묻힌 곡구를 바라보았다.
과연 안개가 옅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 곽공자. 잠시 의논을 할 일이 있습니다만…』
금정신니가 그를 불렀다.
그녀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들중
두어명은 이미 기름이 떨어진 등잔과 같은 모습이었다.


왕승고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금정신니 일행을 보았다.
『 아미타불… 갑작스럽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소. 우리의 제의를 거절하지 마시오』
황색가사의 노승이 탄식했다.
그의 법명은 공도(空渡). 바로 소림사(少林寺)의 대리장문인(代理掌門人)이었다.
소림사의 당대 장문인인이자 그의 사형인 공허선사(空虛禪師)가 산문 밖으로
나서지 않은지 삼십년. 소림사의 대소사를 그가 맡은지 벌써 십년이 넘는다.
이 자리에 있는 여덟명의 신분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금정신니가 그러하고,
성미급한 청삼의 노인은 열화신검(烈火神劍)이라는 별호를 가진 점창파의 당대
장문인인 육수웅(陸首雄)이다.
그외 무당파(武當派)를 비롯한 공동'청성파(靑城派)의 수석장로가 여기 있었고
화산(華山)과 종남파(終南派)의 장문인이 여기에 있었다. 거리가 멀어 미처 회합에
오지 못한 곤륜파(崑崙派)를 제외한 무림중 구대문파의 수뇌들이 여기 다 모여있는
셈이었다.
『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소생은 무공을 연습한 적이 없는 백면서생입니다』
『 노납이 잠시만 소시주의 맥을 짚어보아도 되겠소?』
공도선사가 왕승고를 보았다.
『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를 만지시게 되면 중독이 되어…』
『 그 말씀은 채시주께 들었소. 하지만 곧 죽게 될 우리들이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소? 노납의 본신 공력도 이미 태반이 사라진 상황이니…』
그렇게 되어 왕승고는 그에게 맥을 맡겼다.
그의 맥을 짚어본 공도선사는 묘한 얼굴을 했다.
『 정말 묘한 기운이로군… 우리가 하려는 일이 과연 곽시주께 화가 될지 복이
될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 저보다는 우리 장호법이나 이 소년…』
『 아미타불… 불가하오. 장시주는 이미 부상을 당한데다가 근골이 굳어있고,
소시주는 무공을 연마하기에 적합한 체질이 아니라 우리가 펼치려는
격체전수대법(隔體傳授大法)을 받아들일 수가 없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왕승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공도선사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는 방금 왕승고의 손목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검은 기운이 서서히 손목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 정말 대단한 독기로군. 이런 독을 체내에 담고 견딜 수 있다니… 어서
이리오시오. 이젠 시간이 없는 듯하니 곽시주는 노납이 일러주는 바를 명심하여
기억하시오』
공도선사의 말이 떨어지자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의 앞을 반월형으로 늘어앉아
가로막았다.
『 격체전수라는 것이 어떤 의미요?』
채노야가 궁금한 듯이 장호법을 보았다.
『 불가의 개정수예대법(開頂授藝大法)과 같은 의미로 자신의 공력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주는 것 같습니다. 여덟사람이 자신의 남은 공력을 모두 우리
주공에게 옮겨주어 그 힘으로 주공이 이곳을 벗어나게 하려는 거지요』
『 그런 일이 가능하겠소?』
『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질에 달려있다고 들었습니다. 시간도 필요하고…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장호법의 반문에 채노야는 고개를 끄떡이며 구대문파의 수뇌들에게 둘러싸인
왕승고를 보았다.
그들이 왕승고에게 요구한 것은 어렵고도 간단했다. 자신들의 힘을 전수하여 그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대신에 그들이 남긴 물건을 구대문파에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 이것은 본문의 절학인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이오. 아마도 곽시주가 이제부터
받아들일 공력을 내쏟을 가장 좋은 무공이 될터이니 잘 들으시오』
공도선사는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예중 몇가지를 왕승고에게 구결로 전수하고
대력금강장의 운용에 대해 강(講)하고는 그와 양손바닥을 마주하고 앉았다.
뜨거운 기운이 공도선사의 손바닥을 통해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칠십평생을 통해 고련(苦練)한 진원지기(眞元之氣)이었다.
「노납이 곽시주의 근골을 씻을터이니 저항하지말고 마음을 편히하고서 조용히
노납의 기를 받아들이시오…」
공도선사의 말이 머리속에서 울리듯 들려왔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그에따라 왕승고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뚝뚝, 하는 뼈마디 마주치는 소리가 왕승고의 전신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반면에 공도선사의 얼굴은 백지장과 같이 창백해지고 급속히
생기가 사라지면서 전신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 무량수불… 빈도에게 차례를 넘겨주시오』
무당파의 상청관주(上淸觀主)인 자허도장(紫虛道長)이 비통한 얼굴로 왕승고의
뒤쪽에서 그의 영대와 명문혈(命門穴)에 손바닥을 붙였다.
동시에 공도선사의 신형이 흔들거리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입에서 선혈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에 왕승고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 눈을 감으라! 그리고 정신을 한데 모아야 한다!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작정인가?』
자허도장의 꾸짖음이 천둥처럼 울렸다.


공도선사는 왕승고에게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눈을 감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검었다. 그의 죽음은 이제 시작이었다.
뒤를 이은 자허도장은 왕승고에게 무당이 자랑하는 검결(劍訣)을 남겼다. 그가
쓰러지자 공도선사가 있었던 자리에 화산파의 장문인 육지매화검(六指梅花劒)
궁초량(宮楚粱)이 앉았다.
무림의 서열이나 연장의 순이 아니었다. 독기의 발작이 심해 견디기 힘든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육합검결(六合劍訣)을 남긴 궁초량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자 대기하고 있던
금정신니가 자리했다.
왕승고가 괴로운 빛을 띠고 있음을 보자 그녀는 자애한 미소를 머금었다.
『 어차피 죽어갈 목숨이오. 오늘 죽지 아니하여도 살날이 얼마 남지않은 나이가
아니겠소? 삶과 죽음이 다 겉보기일 따름이니 마음에 두지마시오. 다만… 란아가
마음에 걸릴 따름… 그 아이의 겁수(劫數)는 아직도 끝나지 아니하였으니 후일, 그
아이의 뒤를 부탁하오』
말을 끝냄과 함께 부드러운 기운이 왕승고의 체내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지금까지 그의 근골(筋骨)을 두들겼던 기운들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왕승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전신은 이제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 정말 대단한 근골이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점창파의 장문인 열화신검 육수웅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공력을 전수하고자 하더라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양쪽 다 해가 될
수밖에 없다. 비록 본신공력의 상당부분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잇달아 네명의
진기전수를 왕승고는 거뜬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쾅! 하고 폭음이 들리더니 곡구를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급격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 진세가 깨졌어요!』
마의소년이 안색이 변해 외쳤다.
흩어지는 안개사이로 흑의복면인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장군충과 열화신검 육수웅,
종남파의 장문인 구운자(九雲子)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격한 피비린내가 은제곡을 다시 휘몰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진세가
무너진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 소형제, 목노형으로부터 하독지법(下毒之法)을 배우지 않았나?』
그 광경을 보고 채노야가 다급하게 마의소년에게 물었다.
『 조금은 배웠지만 저는 해독을 공부…』
『 이것저것 가릴 틈이 없어! 아무거나 아는 대로 손을 써보게! 늦으면 우리
모두는…』
채노야의 말이 끝나기 전에 마의소년이 모옥으로 달려갔다.
장군충등은 일시지간 적을 막는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은 불과 일각을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기 시작했다. 흑의복면인들은 어둠과도 같이 밀려들었다.
『 윽!』
장군충이 단도를 떨어뜨리며 신음했다. 그를 향해 복면인 셋이 한꺼번에 달려들고
있었다.
『 물러나라!』
위기의 순간에 그를 구한 것은 점창파의 장문인 육수웅이었다. 그는 점창파가
천하를 독보하는 분광칠십이수검(分光七十二手劒)을 펼쳐서 복면인 하나를
쓰러뜨리면서 장군충을 구했지만 이내 나직한 신음을 흘려야 했다. 어느새 그의
팔뚝에 꽂혀있는 수리전(袖裏箭) 하나.
『 가증한 놈들! 누가 암습을 하는가!』
육수웅이 소리치면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암기를 연달아 쳐날렸다. 하지만
공력이 전과 같지않아 그는 다시 비틀거려야했다. 두어개의 비표가 그의 검세를
뚫고 가슴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 흐흐흐… 대점창파의 장문인이 그 정도를 막지 못한단 말인가? 가소롭군!』
음산한 웃음과 함께 천수앙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 천수앙신? 네놈 따위가 감히…』
육수웅은 이를 악물었지만 지금의 그는 어제의 그가 아니었다. 본신의 진력은 이미
산공독으로 인해 오륙할이나 사라져버린 상태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천수앙신과 같은 살수가 그의 앞에 이렇듯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며, 그가
암수에 당할 것이랴…
육수웅 등은 종남파의 장문인 구운자의 비호아래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들의 뒤에는 왕승고가 있어 비켜날수는 없는 것이다.
묘한 빛으로 천수앙신이 그들의 뒤를 건너보았다. 왕승고를 둘러싸고 있는
장문인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 쳐라!』
그의 외침과 함께 귀왕혈의 살수들이 날았다.
하지만, 사납게 장군충등에게 밀려가던 그들이 돌연 신음과 함께 픽픽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 독이다! 물러나라!!』
날카로운 부르짖음.
동시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었고 이어 단말마의 비명이 일어났다. 피를
토하며 날아가고 있는 그 비명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마의소년.
『 애송이 놈이…』
음산한 눈을 번뜩이며 나타난 것은 앙천사독이었다.


모옥으로 달려갔던 마의소년은 장군충등이 밀리는 급박한 상황을 보자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가지고 나온 주머니를 풀어 독분(毒粉)을 날렸다.
과연 그것은 효과가 있어 저들의 발길을 순간적으로 저지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앙천사독이 나타나자 무공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의소년이 앙천사독의 손에 피를 토하고 나뒹굴자 채노야가 놀라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귀왕혈의 잔인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나타난 자는
잔인무도한 앙천사독인 것이다.
그는 채노야의 움직임에서 그가 무공을 모르는 사람임을 알았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데 무슨 망설임이 필요있을까?
그의 손은 조금의 주저함이 없이 채노야의 머리를 수박깨듯이 부서버리고 말았다.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채노야가 죽어갔다.
『 네놈이!』
창졸간에 벌어진 일에 장군충이 노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든 것은 난도질하듯이 번뜩이며 달려드는 검과 암기였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졌다. 단숨에 십여군데의 상처가 벌어지고 피가 쏟아졌다.
그를 구한 것은 종남파의 장문인 구운자였다. 그러나 종남의 천하삼십육검을 펼쳐
그를 구한 구운자는 귀왕혈 살수 하나에게 깊숙이 배를 찔려야 했다.
『 으아악!』
검을 돌리는 사이에 귀왕혈 살수의 목을 날려버렸지만 형세는 이미 기울었다.
『 아미타불! 이곳은 빈니가 맡으리니, 어서!』
문득 그의 앞에 금정신니가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돌연 백세는 되어버린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 살아있었다.
구운자가 주저없이 몸을 날렸다.
『 이게 누군가? 설마 정말 금정 계집중인가?』
앙천사독이 그녀를 보고 음산한 눈을 껌벅였다. 구면인 그였던지라 그렇게 변한
그녀를 보자 놀라서 묻는 것이다.
『 앙천사독… 우리에게 하독한 것이 너로구나!』
금정신니가 신음했다.
『 켈켈켈… 그걸 이제 알았다면 너무 늦었지! 이젠 그만 갈때로군! 늙은 계집중!』
앙천사독이 대뜸 손을 썼다. 그들의 움직임에서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시간을
보내지 않을 심산인 것이다. 천하의 금정신니가 그의 손에 피를 뿌리는 것은 채
반각도 걸리지 않았다.
『 무슨 짓을 하는게지?』
앙천사독이 까마귀 발톱같은 손을 금정신니의 심장에다 박아넣고는 음산하게
물었다.
『 모, 모르는게 좋을… 아, 아미타불… 아미… 그걸 알게 된다면 공포에 질려…』
우두둑! 금정신니의 심장을 빼내 그대로 바닥에 팽개친 앙천사독은 그녀를
땅바닥에다 패대기치고는 몸을 날렸다.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장군충이다.
그는 앙천사독에 의해 죽지 않았다. 그의 목을 깊숙이 찔러 숨을 끊은 것은
천수앙신의 옆에 있던 귀왕혈의 살수였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마지막으로 앞을 막고있던 공동파의 함청진인(涵淸眞人)이 쓰러졌을 때, 왕승고의
앞에는 다섯구의 시신이 쓰러져있었고 마지막으로 청성파의 장로
태일도장(太一道長)이 공력을 전수하고 있었다.
그는 등뒤에서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끝을 보곤 미간을 찡그렸다.
『 으아악!』
그가 한손을 떨치자 등뒤에서 그의 가슴까지를 검으로 꿰뚫은 복면인이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 부디, 우리의 바람을 헛되이 말기를!』
그는 말과 함께 마지막 힘을 다해 왕승고의 가슴팍 중정혈을 쳤다. 그리고 그는
피를 토해내면서 뒤로 벌렁 쓰러졌다. 눈도 감지 못한채였다.
참으로 한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은제곡 안에 있던 사람중 살아 남아있는 것은 눈을 감고서 앉아있는
왕승고 뿐이었다.
『 저건… 뭐하는 놈이야? 없애라!』
천수앙신의 명령에 귀왕혈의 살수 둘의 검이 좌우에서 왕승고의 가슴으로
찔러들었다.
순간, 왕승고가 눈을 번쩍 떴다. 가히 태양과 같은 자광이 그의 눈에서 폭사되며
쏟아져나왔다.
『 으와아아악…!』
꼬리를 무는 비명. 그를 공격하던 복면인 둘이 태풍에 휘말린 가랑잎과 같이
날라갔다. 일거수에 그들을 장난감처럼 날려보낸 왕승고는 공포스러운 자광이
무섭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앙천사독을 쏘아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눈빛을 받자 앙천사독은 가슴이 철렁했다.
『 쳐, 쳐라!』
그는 부지중에 소리쳤고, 그의 수하들은 각종 암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면서
왕승고를 공격해갔다.
공포스러운 도살(屠殺)!
그렇게 불려야 할 살인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은제곡내에 밀려든 귀왕혈의
살수는 무려 구십사 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은 공포에 떨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앙천사독과 천수앙신 또한 피를 토하면서 허겁지겁 은제곡을 벗어나고
있었다.
검을 찔러도 소용없고, 암기도 통하지 않고 독을 써도 피해를 줄 수 없는 괴물이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악몽(惡夢)이었다.


1부 줄거리
대환(大桓) 수호신문(守護神門)의 제자 환호국(桓護國)은 백두산에서 민족재건의
대명(大命)을 받고 하산한다.
십여개 성상이 흐른 후, 때는 명조 초기. 주원장이 죽고 난 다음 즉위한 손자
혜제는 강대한 삼촌들을 겁내어 즉위 원년(서기 1397년)에 황자징, 방효유등의
신하들과 더불어 그들의 세력을 깎는 삭번의 계(計)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기존 세력인 각지의 왕들이 반발할 것은 필연.
하지만 그 앞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대장군 곽천수. 주원장이 일으킨 수많은
옥사로 인해 명의 유수한 명장들은 다 죽었지만 곽천수는 그중 유일하게 남은 일대
명장(名將)이다.
그가 살아있는 한, 제왕(諸王)들은 감히 움직일 수 없다.
그러던 중에 무림중의 살수집단인 귀왕혈(鬼王血)에 대장군 곽천수의 암살이
청부된다.
그것을 알 리 없는 곽천수의 아들 곽승고는 방효유의 조카딸인 방약란과의 결혼을
결심하고 허락을 받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주검들 뿐…
장군부내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처럼 귀여웠던 동생 부용이도,
그처럼 존경했던 아버지 곽천수마저 그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장군부를 몰살시킨 귀왕혈의 오대천왕중 하나인 앙천사독(殃天邪毒)이
나타나 그를 죽이려 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그를 구한 것은 그의 연인인 방약란의 사부인 금정신니.
귀왕혈의 추격은 계속되고, 그들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하여 금정신니는 그 자리를
떠나지만 그녀를 기다리던 곽승고는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괴인을 만나 백련교에
전해달라는 옥패를 건네받게 된다.
뒤이어 나타난 백무결은 옥패가 자신의 것이라면서 가져간 다음, 곽승고와
일면식이 있던 냉면검신 자의후가 나타나자 그 자리를 떠난다.
자의후와 헤어진 곽승고는 귀왕혈의 추격에 결국 절벽에서 추락한다. 그곳에서
희귀독물을 영약으로 착각하여 복용한 그는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를 구한 것은
천하제일의 신의라는 천산의선.
살아남기는 했지만 시한부 생명이 된 곽승고는 장군부로 돌아가 아버지의 유서를
찾는다. 거기에 나타난 방약란과 일단의 복면인들. 관군까지 들이닥치는 와중에
곽승고는 독이 발작하자 괴력을 발휘, 방약란을 구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토지묘에서 정신을 차린 곽승고는 자신이 천산의선의 제자 운지룡에게 구함을 받은
것을 알게 된다. 운지룡이 방약란을 데려다 주러 간사이, 아버지의 유서를 본
곽승고는 경악한다. 자신이 곽장군의 친아들이 아니라니…
운지룡을 기다리던 곽승고는 장군부의 앞에서 만났던 괴노인에게서 천부신공이라는
심법을 전수받게 된다. 거기에 들이닥친 백련교의 고수들과 그들에게 쫓기는
흑포노인. 우여곡절 끝에 그는 곽승고와 함께 그곳을 떠나게 된다.
그는 곽승고의 독기를 치료해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치료가 끝나면 곽승고는
전신의 모든 기력을 빼앗겨 죽게되는 상황이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그를 살린 것은
괴노인에게 전수받은 천부신공.
그곳을 떠난 곽승고는 곽천수의 유서에 있는 여조약포를 찾아간다. 거기서 만난
것은 뜻밖에도 장군부에 나타났던 몽면인.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과 자신이 고려의 마지막
왕통(王統)을 이은 적자(嫡子)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해서 곽승고는 왕승고가 된다.
이제 그에게는 고려부흥이라는 거대한 책무가 주어졌다.
체내의 독기는 점점 심해지고,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서 왕승고는 여조약포의
주인인 채노야와 함께 황산의 해독대가(解毒大家)를 찾아 떠난다.
황산에 이르러 신비한 여인을 만나지만 아직 그 의미를 두 사람은 알지 못하고,
목적한 은제곡을 찾지 못한 왕승고 일행은 노숙하다가 구대문파와 귀왕혈과의
시비에 휘말려 그곳을 떠난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은제곡.
하지만 뜻밖에도 그들을 가로막고 나서는 괴인들은 바로 귀왕혈이다. 천신만고
끝에 은제곡에 도달한 일행은 구대문파의 수뇌부 일행이 그곳에 피신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귀왕혈의 공격이 시작되자 상황이 점점 급박해지고 구대문파의 수뇌들은 자신들의
희생으로 왕승고를 그곳에서 살려보내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부득이한 결정이다.
은제곡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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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닮아가는자 | 작성시간 20.04.15 ㅈㄷㄳ
  • 작성자에스피 | 작성시간 20.04.15 즐감하고 갑니다.
  • 작성자아침의 나라 | 작성시간 20.05.19 감사...
  • 작성자장군바위 | 작성시간 20.06.21 잘읽었습니다
  • 작성자오아시스 | 작성시간 25.06.03 은제곡에서 9대문파의 장문인들 살수들 귀왕곡을 만나 몰살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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