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추리 소설방

삼류무사 3권

작성자정 주|작성시간22.11.05|조회수709 목록 댓글 3

[11134]  [연재] 삼류무사-70    첨부파일 :

"이제 얘기할 때가 된 거 같군.”
위압감 어린, 그러나 맑고 차가운 음성. 북궁단야가 거검을 어께에 걸치고
천천히 걸어왔다.
“방장로님은 어떻게 했죠?”
당소소가 뾰족하게 물었다. 평소의 나른하면서도 그윽한 음성에서 이만큼
감정을 담아냈다는 건 그녀의 심정이 얼마나 급한것인가를 나타낸다고 하겠
다.
청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내렸다. 완패였다. 그로서는 이들
중 하나와 자웅을 결하기도 어려울텐데 상대는 전혀 이상없는 세명이다.
어쩌면, 이자만 없었더라도 마지막 공세를 취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청뢰는 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난 절대로 이자의 상대가 안돼.’
다시한번 당소소가 말했다.
“해를 입으신건가요?”
스산한 살기, 어느정도 포기한 당소소였다. 이들의 수는 열셋이라고 했다.
그들이 상대한 인원은 아홉, 네명의 행방은 묻지않아도 뻔하고 이들의 무위
와 그녀가 아는 방교명을 비교해 본다면 몇 합 버텨보기도 어려운 얘기다.
청뢰가 고개를 돌려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오, 허나 당신이 찾는 사람이 객잔주인 영감이라면 무사하지 못
할거요. 그를 쫓은 이 가 우리중 가장 강한 인물 이었으니까.”
당소소가 절망감에 지그시 눈을 감는 동안 쓰러져있는 청의인들은 경악했다.
누가있어 십이뢰성인 중 청뢰보다 강한 무위를 가졌다는 건가?
“그럼...”
그녀는 차마 뒷발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그 단어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
청뢰의 눈도 쓰러져 신음하는 청의인들을 우울한 마음을 담아 바라보았다.
"아마... 그럴거요.“
그녀가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렇지만 감정에 치우쳐 있을때가 아니다. 그
녀는 실회조원의 자격으로 여기에 왔고, 조장이란 책임까지 떠안고 있다.
“표물은 어디있죠?”
청뢰가 턱짓으로 풀숲을 가리키자 북궁단야가 표물을 가져와서 확인을 했다
.
“이상없소이다.”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그녀가 눈을 내리깔아 그녀의 발등을 쳐다
보았다. 언제나 그녀에겐 이말이 어려웠었다. 그리고 실회로에서 거의 그녀
가 이말을 했다.
“표물 탈취 이유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목숨값은... 받아내야 하는데... 순
순히 포승줄을 받겠어요, 아님...”
이 경우 대부분이 발악을 하며 달려든다. 아니 백이면 백 모두가 그랬다.
끌려가 봐야 욕이란 욕은 다먹고 결국 죽을게 뻔한데 어떤 바보가 포승줄을
받겠는가. 그녀의 시선이 청뢰에게 옮겨지고 곧 기묘하게 바뀌었다.
‘이자... 웃고 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청뢰의 입에서 한줄기 핏물이 베어 나오
며 자리에 털썩 나뒹굴었다.
“이봐!”
세명이 동시에 청뢰에게 달려들었다.
“이것으로... 쿨럭... 목숨값이... 되었소?”
흠칫!
재발리 그녀가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청의인들은 모
조리 심맥을 끊은 듯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혈도가 짚인 두 명 까
지도.
‘실수다. 고수급의 인물들이라면 한줌의 진기만으로도 스스로의 심맥을 끊
는다는 걸 잊다니!’
그녀가 스스로를 자책할 때 청뢰가 말을 이었다.
“... 중원의 평화는... 너무... 길었지.”
하운의 눈에서 신광이 어렸다.
“... 가장된 평... 화...”
그말을 끝으로 그는 숨을 놓았다.
‘가장된 평화...’
셋의 마음에 서늘한 무언가가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가장된 평화...
절정은 아니지만 일류를 훨씬 상회하는 아홉명이 초개와도 같이 목숨을 던질
수 있는건 그들에게 배후가 있다는 거다. 그냥 ‘배후’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집단. 무림사 천년 간 세상을 좀 어떻게 해 보려고 꿍
심을 품었던 집단이 어디 한 둘일까. 별처럼 많은 수의 비밀집단은 그 몰락
또한 유성과도 같이 덧없었다.
그렇게 치부하면 되는데, 그렇게 편하게 마음먹으려 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걸까?’
하운이 청뢰에게서 몸을 떼어 벌떡 일어섰다. 마냥 이러고 있어봐야 나오느
니 한숨이요, 드느니 근심이다.
“당소저, 상황은 종료된 듯 하오만.”
“아니죠, 쥐새끼 네 마리가 남아있어요.”
방교명을 쫓아갔다는 네명을 말함이리라. 그의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다.
‘이번 회수행은 최악이다.’
이때 모두에게 잊혀졌던 한 마디가 들려왔다.
“네 마리 안와!”
평소의 그라고 생각되지 않는 다소 우울한 음성.
“아, 장공자!”
무심했다.
아무리 신경쓸 일이 많았다고는 하나 동료의 부재조차 잊었다는 건.
브스럭 부스럭.
풀과 나무를 헤치며 누군가를 들처업은 장추삼이 모습을 보였다.
“장공... 어머, 장로님!”
말과 함께 당소소가 번개처럼 장추삼에게 다가가 업힌 이를 받아들었다. 그
리고 의혹과 안전과... 그 외 여러 가지 질문들을 담은 눈빛.
“안심해요. 이 노인, 보기보다 근력이 좋더군. 아님 그가 준 속명단이 탁
월했든지.”
“어떻게 된건가?”
“이분을 어디서 만났소?”
쏟아지는 질문들, 그러나 장추삼은 도리어 물었다.
“또 모두 자결했소?”
' ! '
' ! '
' ! '
방교명의 안위를 살피던 당소소의 손길이 딱 멎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하
운과 북궁단야의 움직임까지도...
“'또' 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장추삼이 말하기 귀찮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다.
“알면서 뭐하러 묻는거요. 나랑 치고받던 네 명처럼 이들도 죽어 나자빠진
것 같은데.”
경황이 없었고, 그의 등장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잘 몰랐는데 이제보니 장추
삼은 거의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넝마 처럼 헤진 윗옷, 퉁퉁 부어오른 손,
신발은 아예 안신는 게 나을 정도로 찢어지고, 묘하게도 그을려 있었다.
“아니 그럼 방장로님을 위해하려던 네 명의 청의인과 싸웠단 말이오?”
그래서 이겼다는 거요, 라는 말은 생략하고 하운이 다급하게 물었다. 느낌
상 그저 삼류건달은 아닐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본 장추삼이 네 명의 청의
인들을 한꺼번에 감당할 수준의 무공까지 지녔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북궁단야는 무얼 생각하는지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가끔 기묘한 눈길로
장추삼을 쳐다보는 것 빼고는.
“아까 말했잖소."
퉁명스럽게 장추삼이 내뱉었다. 이번에는 하운과 당소소의 눈길이 마주쳤다
. 아까 북궁단야와 당소소가 눈길을 마주했던 것 처럼.
“끄응...”
신음성과 함께 인상을 찌푸리며 방교명이 정신을 차렸다.
“장로님! 이제 정신이 드세요!”
이게 어디서 들려오는 소릴까, 소소의 목소리랑 닮았는데...
“저예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저 소소라구요 장로님!”
‘뭐, 소소!’
힘겹게 눈꺼풀을 치껴뜨고 흐릿한 가운데 자신을 내려 보는 얼굴 하나를 잡
아내었다. 성에 낀 유리창이 차차 맑아지듯 찬찬히 들어오는 얼굴. 아무런
미련없는 인생에 마지막 의미가 되어버린 마음속의 손녀.
“소, 소소냐?”
“예, 저예요 소소! 이제 정신이 드세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눈물을 죽 떨구었다. 하운도 북궁단야도 이순간 만
큼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빙그레 미소지었다.
“울면서 웃으면 어디에 털난다는데...”
누차 얘기하지만 어디든 꼭 이런 놈이 있다. 잔뜩 골이 난 어린아이 마냥 툴툴
거리는 장추삼인데 당소소에겐 그 어떤 존재보다 귀엽고 고마웠다.
“장공자, 고마워요! 고마워요!”
포권으로 부족했는지 그녀가 연방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심드렁하던 장추
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인생의 선배였고 직장의 최고참인데
다 장추삼에겐 한 번 도 가져본적 없는 누이와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이러지 마요, 진짜 이러지 말라니까!”
엉거주춤 일어서서 연신 손짓으로 만류하던 장추삼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큰
절이라도 했을지 몰랐다. 그녀에게도 방교명은 마음속의 친할아버지 같은
존재였으니까.
어느정도 정신이 드는 듯 방교명이 상체를 세워 그를 둘러싼 두명의 사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참 잘들도 생겼구나.’
그의 첫 인상이었고,
‘참 선한 삶을 살아왔구나.’
하운을 보며 미소지었고,
‘오오! 이만한 미남이 또 어디있을꼬, 훤칠한 키에 가만있어도 저절로 남
을 누르는듯한 기세까지!’
북궁단야에겐 감탄을 했다.
그리고...
‘저 거지녀석은 뭐야?’
두 눈 쫙 찢어지고 의복이 걸레가 된 상거지꼴의 - 머리마저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상태도 좋을 리가 없다 - 사내에게 당소소가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아닌가?
“얘, 소소야.”
방교명이 힘겹게 당소소를 불렀다.
“예, 장로님.”
어느정도 만족할만큼 감사의 표시를 하고 그가 좋아하는 돼지고기에 술을
실컷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은, 한달치 급료는 다 써도 좋다고 마음먹은 당소
소가 방교명에게 갔다.
“저 거... 아니, 청년은 누구냐? 동료냐?”
물론 ‘아니지’ 는 뺐다.
“예, 장추삼공자라고 저희 실회조원이예요. 장로님을 구해드린...”
“뭐, 날 구해?”
“ ? ”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반응인가? 분명 장추삼은 척 보기에도 부상당한 방교
명을 업고왔고 네명과 싸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근데 방교명이 하는 말은
또 뭔가?
당소소도 그제서야 의아한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장공자의 무위(?)로는 네명의 청의인을, 그것도 가장 강하다는 한명이 포
함된 인물들을 제압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하지만 곁에서 생활하며 느낀 건 절대로 없는 얘기를 만들어서 할 인물은
아니었다.
“아! 혹시...”
그거구나, 하는 얼굴로 방교명이 싸움의 전모 - 그가 기억할 수 있는 - 를
얘기해 주었다.
“저를 위해 그렇게까지... 흑!”
또 울먹이는 당소소에게 하운이 물었다.
“저... 제왕분이 뭡니까? 처음 들어보는 거랴...”
대답은 방교명이 해주었다.
“제왕분은 이 필부의 육십 평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아들 같은 놈이지..."
제왕분.
방교명이 마지막으로 날렸던 초록색의 분말.
이것은 독에 관한 한 당문을 대표한다는 방교명이 마지막으로 만들어낸 역작
이었다. 단 한호흡만 흡입해도 일체의 공력을 운기할 수 없고, 또한 독성분
마저 지독해서 즉시로 피독주 따위의 해독작용을 하는 무언가의 도움을 받
지 못하면 천고의 고수라도 독기를 체외로 몰아내지 못하고 일 다경만에 죽
음에 이르른다.
  [11161]  [연재] 삼류무사-71    첨부파일 :

"아!”
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동귀어진을 강행한 방교명의 제왕분에 비록 그를 격퇴시켰으나 네명의 청의
인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들은 피독이나 해독작용을 하는 물
건을 찾는 일방 독기를 몰아내기 위해 허둥거렸겠고 걔중 공력이 높은이가
바삐 움직이며 내공을 소모하여 동료들을 돌보았을 것이다. 이때, 룰루랄라
산보하듯 산에 오르던 장추삼이 아주 우연찮게 이들과 대면하게 된다. 눈치
빠른 장추삼은 쓰러져있는 노인과 수상한 네 명의 복색에서 직감적으로 이들
이 표물탈취범이란 걸 알았고 ‘깡’하나로 인생을 살아온 그였기에 상대와
자신의 능력따윈 상관없다는 듯 달려 들었을 것이다. 평소라면 날파리 쫓듯
장추삼을 털어냈을 청의인들 이지만 불행히도 지금의 처지는 일반인 보다도
못한 상태, 그나마 강하다는 인물이 장추삼과 어울렸겠고 장추삼 으로서는
피튀기는 그야말로 장엄한 박투 였겠으나 청의인 들에게는 졸전의 극치끝에
이들을 제압했으리라.
그러나... 방교명은 모른다. 그 들 넷은 당문의 여걸을 대비해 이미 피독환을
복용한 상태였고 동귀어진의 공격시에 호흡 자체를 차단했었다는 사실을. 그의
아들 이라는 제왕분은 그들의 손짓 한 번에 처음부터 없었던것 처럼 산산히
흩어졌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면 그렇지.’
나름대로 결론을 지은 하운이 홀가분한 심정으로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
리고... 그의 얼굴은 얼어붙었다.
“장형!”
뚱한 얼굴의 장추삼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는 만사가 다 귀
찮았다.
“아, 또 왜요!”
“잠깐 이리로... 아니, 내가 가리다.”
순간이동 하듯 삼장을 가로질러 하운이 장추삼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격렬한 싸움이었나 봅니다. 어디 다친곳은 없으시오?”
이 양반이 왜 갑자기 친절이야, 장추삼이 찝찝한 표정으로 하운에게서 약간
몸을 땠다.
“괜찮소, 괜찮아요!”
“아니, 아니, 괜찮지가 않구만. 어께하며 배하며.”
사실 아프긴 아프다. 그러나 사나이 장추삼이 이런걸로 겔겔거릴수는 없잖
은가?
하운은 연방 장추삼을 걱정하며 그의 몸을 살피고 쓰다듬고 있었는데 이건
딱 어디가서 맞고 돌아온 자식을 살피는 어미의 그것이었다.
“아, 괜찮대두, 신경 쓰지마요!”
무언가 머쓱해져서 장추삼이 벌떡 일어나 딴데로 슬슬 갔다. 이런건 그에게
익숙치 않을뿐더러 더더욱 남자가 이러는 건 절대사절이다.
"아니오, 아냐! 다쳤을 땐 조기치료가 약이라오. 지금 괜찮은 것 같다고 해서
방치하다 나중에 큰 병된다니까!"
따라 일어서며 하운이 장추삼을 잡는답시고 잡았는데 일어서던 와중이라
그런지 그의 배부분 옷을 움켜쥐었다.
"괜찮대두!"
몸을 홱 돌려서일까? 너덜거리던 그의 배부분 옷감이 쭉하니 찢어져 하운의
손아귀에 잡혔다.
"아, 이런 실례를!"
"괜찮소."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장추삼이 몸을 돌리자 마구마구 미안해하던 하운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장추삼에게서 찢어낸 천조각을 슬그머니 품속으로 집어
넣었는데 연방 불안해하며 떨리는 손끝을 보아 이런일에 익숙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긴, 그의 군자다운 성격상 이정도의 임기응변도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실회조가 순진하던 사람하나 버려놨다고 할까.
'이, 이건 뭔가? 어떻게 이 권법의 흔적이 장형에게서 발견된다는 건가?'
하운은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검을 땅에 푹 꽂고 여명을 응시하는
북궁단야나 - 하여간 저 친구는 행동 하나하나가 멋있다고 슬쩍 딴 생각도
들었다 - 제 이 차 신파극에 돌입해서 연방 울고짜는 당소소를 - 그녀의 우는
모습, 역시 미인은 눈물 까지도 아름답다는 게 하운의 결론이다 - 달래는
방교명, 그리고 엄한 돌멩이들을 뻥뻥 차대고 있는 장추삼... 모두 눈치 첸
기색은 없다.
'어서 장로님게 보고해야 한다!'
하운은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이 천조각이 갖는 의미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공력의 손실이 있었다 손 치더라도 분명 이 권법을 사용한 박투가
벌어졌었다는 건 장형의 천조각이 가감없이 말해준다. 그럼 비록 완전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이정도의 흔적을 남긴 '이 권법'을 받아내고 어떤식으로든
시전자를 제압한 것 또한 장형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제아무리 감각좋고
싸움을 잘하는 삼류무인이 이 권법을 받아내는게 가능한가?'
대답은 '절대불가'다.
이 권법에 괜히 신의 주먹(神券)이란 이름이 붙은게 아니란걸 하운은 잘 알고
있었다. 장추삼의 옷조각에 난 흔적은 타격에 의한 자국같은게 아니라 권력에
의해 생겼다는 거다.
권력... 허공을 격해서 상대를 상하게 하는 기의 무공!
그걸, 그런 상승무공을 삼류무인이 받아내고 거기다 이기기까지 했다?
하운은 긴 탄식이 터져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하운아, 하운아. 너는 어찌 그리도 사람보는 눈이 없더냐!'
여전히 장추삼은 돌멩이들에게 뭐가 그리 꼬였는지 화풀이를 해대고 있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특출한 기색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데...
'난 너무 장형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지도...'
북궁단야는 무얼 생각하는지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
"다시한번 생각해 보래두..."
"아, 정말 왜 이러세요. 자구 그러시면 저혼자 가버릴거예욧!"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다."
"장로님!"
일행이 하나 더 불어서 다섯명이 된 장추삼들은 귀로길에 올랐다. 노인들만
만나면 거지꼴인 장추삼은 이번에도 방교명이 옷을 사주었다. 때빼고 광내고
옷까지 입혀놓으니까 그나마 사람같긴 한데 역시 이들 둘과는 격이 달라도
한 참 다르다고 생각했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방교명이 그딴 쓸데없는 소리를
입에 담을리 없었다.
그는 쓸데있는 일만 한다!
장추삼을 사람꼴로 만들고 제일 처음 그가 한 일은 북궁단야에게 몰래 혼인
여부를 묻고 현재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느냐고 또 물은 것이다.
대답은 전부 '아니다' 였다!
고무된 방교명이 가족관계를 포함한 이것저것을 꼬치꼬치 캐어묻자 북궁단야는
짜증이 났지만 당소소의 얼굴을 보아 성실히 답변해 주었으나 이내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의 말에 연방 벌어지다가 결국 입이 귀밑까지 쭉 찢어지는
방교명의 반응은 뭘 의미하는가?
그 뒤부터 귀로길 내내 당소소로는 귀찮음의 시작이었고 북궁단야로는
민망함의 시작이었다.
"두살이 걸리는 게냐? 하! 웃기는 일이지. 중원천지에 네 나이를 네 나이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장담컨데 너와 북궁공자는 용과 봉황의 결합이라고
세인들이 우러를 것이다!"
"에휴!"
"북궁공자 봐라. 사람 번듯하지, 가문 좋지, 양친 생존해 계시고 척 보니까
배운 것도 많지. 그리고 니 말마따나 무공또한 고강하니 이보다 괜찮은 남자를
어디가서 찾겠다는 거냐?"
방교명은 앞서 말을 모는 북궁단야가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좋으시겠소?"
오랜만에 하운이 농짓거리를 하지 북궁단야가 쓰게 웃었다.
"방장로께서 객잔을 운영하시느라 눈을 많이 버리신 것 같소. 하형같은 인걸을
몰라 보시고 나같은 범부를 입에 올리시니 말이오."
"무슨말씀을! 북궁형과 나를 비교한다는 건 명월과 반딧불 같은 얘기요.
하하!"
평소같으면 '놀고있네'하고 툴툴 거렸을텐데 장추삼은 그 말을 눈으로
대신해서 한번 힐끗 돌아보고 아무 말없이 채찍질을 가했다.
("근데 북궁형, 장형말이오.")
느닷없는 전음. 의아스런 얼굴로 북궁단야가 돌아보자 하운이 전음을 이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들으시오. 북궁형은 장형이 그말 그대로 삼류건달이라고
생각하시오?")
("새삼스레 그 문제는 왜...")
북궁단야를 빤히 보던 하운이 고개를 저었다.
("하, 나만 바보였군. 북궁형도 장형에 대해 무언가 눈치 챈 것이 있었구려.")
눈치만 챈 정도인가? 그의 무공을 직접 보았거늘.
("갑자기 장형 얘기는 왜 꺼내는 거요. 혹시 장형이 뭐라고 했었소?")
("아니. 아니요. 그냥 싸움군이라 말하기엔 장형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기품이 있어서 그러오.")
어색한 기품... 또다시 하운의 임기응변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내색하지 마시오!")
북궁단야의 다소 경직된 전음이 하운의 귓가를 파고 들었다. 내색하지 말라니.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 라고 자신이 삼류건달이 아니란걸 모르겠소? 바보는 아닌 것 같은데...
나서기 싫어하는 건 천성같기는 하지만 그보다 장형은 무림에 큰 뜻이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놔두자는 말이오,")
맞는 말이긴 한데 북궁단야의 정색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의 심정을 하운이
어찌알랴!
내 동생이 저 놈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난 동생이 이런 음모중중의
무림에서 한 발짝 떨어진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이말, 죽어도 못한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하운은 막연히 북궁단야가 장추삼을 무척 챙기는구나 싶었다. 그의 말은 백번
지당했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현 무림은 '난세는 영웅을 부른다'는 말처럼 수
많은 기인괴걸이 출몰할 것이고 벌써 그 징후를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눈앞의 북궁단야도 그 중 한명이 아닌가!
영웅이 필요한 세상, 삼백년 가량 혼돈다운 혼돈 한번 없어서 이름을 떨치고
싶었던 수많은 준걸들이 조용히 사라졌던 걸 비추어보면 현 시대를 살아가는
무인들은 어쩌면 최대의 호기를 맞았는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목숨이 요구되든간에 말이다.
'무공을 익혔다고 해서 모두 무림인이 아닌것처럼 북궁형의 말대로 장형은
장형 그대로가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르지.'
("이건 하형과 나,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피치 못해 알려지는 거야 어쩔도리
없다고 해도 굳이 동네방네 떠들 필요는 없지않소. 다행히 다른 실회조원은
모르는 듯 하니 말이오.")
다짐받듯 북궁단야의 전음이 하운의 상념을 일깨웠다.
("이제보니 북궁형은 장형을 무척이나 위하고 있었구료.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어차피 장형은 무림과 크게 상관없는 인물이었으니.")
저놈을 위하는게 아니라 내 동생을 위하는 거야!
하운은 장추삼에 관해서 잊기로 했다. 사실 그는 눈앞에 펼쳐지는 수 많은
사건들을 정리하기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청의인들과 그들의 자결,
'그 권법'의 낙인이 찍힌 옷조각...
장추삼이란 인물이 보기보다 뛰어난, 어쩌면 능히 일류를 상회하는 고수라고
하더라도 그가 이 거대한 무림에서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성 싶었다.
'어쩌면 장형은 평범한 것 이야말로 행복의 근원 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사례 일지도.'
문득 하운은 뚱한 얼굴로 말을 재촉하는 장추삼이 부러웠다. 그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고 어떤 음모와도 자유로운 사람이니까.
뒤에선 여전히 시끄러운 말다툼이 계속 되었다.
"이런 답답한 경우를 봤나!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차도 유분수지. 니 일생에
저런 남자 한 번 만날 성 싶으냐? 나 같으면 울며불며 매달려도 시원치
않겠구만."
"오, 아 - 주 잘 됐네요! 그럼 장로님이 시집가세욧!"
   삼류무사-72
일행이 돌아왔을 때 제일먼저 튀어나온 건 예외없이 단사민이었다. 녀석은
뭐가 좋은지 눈내리는 겨울밤에 폴짝거리는 강아지마냥 방방거리다가 장추
삼을 발견하고는 실실거리며 농지꺼리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때요, 뒷골목 걸달패들과 붙었을 때 랑은 많이 다르지요. 그래도 몸하나
다치지않고 돌아온걸 보면 용하네."
장추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를 밥버러지나 월급도둑 쯤
으로 생각하던 단사민이기에 그가 말대꾸를 하든 안하든 녀석은 쉴세없이
주절거렸다.
"척 보니까 당누님들 싸우고 있을때 구석탱이에서 숨소리 안낼려고 노력한
것같은데...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실회조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니까?"
"아무나 하는게 아니라..."
장추삼이 중얼거렸다. 하운등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려 삼일만에 처음으로 말문을 연 것이다.
"그런거같군."
나지막히 뇌까리고 장추삼이 나가자 괜히 무안해진 단사민이 볼멘 소리로
하운들에게 물었다.
"왜 저런데요? 누구한테 엄청 당하고 돌아온 거 같은데... 설마 도움안된다
고 구박을 너무 심하게 하신거 아니예요?"
"당하긴 당했지."
북궁단야가 육호 침상을 바라보았다. 대기전에 머물러 있기 싫어해서 늘 비
어있던 장추삼의 침상.
"남이 아닌 자신에게..."
*              *              *
"아닌밤에 홍두께도 유분수지, 그게 무슨말이냐!"
"죄송합니다."
"당표사에게 대감의 얘기는 들었다. 물론 눈앞에서 사람의 죽음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림인걸 어쩌겠느냐."
"......"
표국주 이효의 집무전은 언제 보아도 검박하다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다. 그 흔한 닌초하나 가꾸지 않는다고 주위에서 얘기했을때 '언제 무슨일
이 있을지 모르는 표행길에 오늘도 십수명의 표사들이 길을 나서는데 표국
주란 자가 풀쪼가리나 보고 있는 건 직무유기'라며 껄껄 웃었다고 하지만
꼭 필요한것 외에는 단 하나의 장식품도 들이지 않았기에 별로 크지도 않은
그의 집무전은 웬만한 대기전처럼 넓게 보였다.
'허어!"
의자에서 일어선 이효가 무언가 안풀릴때면 늘 그러하듯 책상 주위를 뒷짐
을 지고 맴돌았다.
심각한 얼굴로 장추삼이 들어섰을때 직감적으로 일에대한 문제이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그만두겠습니다' 했을땐 어떤말을
해야할지 대책이 서질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조카와도 같던 장추삼의
눈에서 인생 다 산 노인네의 '회의'라는 빛깔을 강하게 느꼈으니까. 그
빛깔은 너무도 선명했기에 감히 함부로 다룰 성질의 감정이 아니었다.
'이 아이는 볼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나.'
"피와 살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느냐. 실회조를 보더라도 하표사나
북궁표사, 그리고 단표사 역시 첫 살인의 충격을 이곳 복룡표국에서 체험하
고 극복해 내었다. 너역시 첫 출장의 충격이 컸지만..."
"이숙!"
장추삼이 말허리를 잘랐다.
'아니 표국주님. 그래요, 살인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서
무림인이기에 어쩔도리 없이 살인을 하겠지요. 나이어린 단사민이도 얼마전
에 처음으로 검에 피를 묻혔다고 하더군요. 저 보다 여덟살이나 어린
나이인데도 저렇게 잘 이겨냈는데 뭐하는거냐고 비난한다면 할말은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잠깐 말을 끊은 장추삼이 쓰게 웃었다. 그 미소는 마치 썩어 있는 것 같았
다.
"그들은 스스로를 무림인이라고 규정짓고 출발했잖아요? 무림이 뭔지, 또
무림인이면 일반 사람들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전 아직 몰라요. 이숙이
보시기에 제가 무림인인가요?"
그는 이효에 대한 호칭마저도 왔다갔다 했다. 그러나 조카같은 장추삼의 고
민을 이제야 조금 알게된 그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어 주었다.
"아닌가요? 이숙도 아니라고 하신다면 저는 어떻겠어요. 무림인도 아닌 사
람이 골수부터 무림인인 사람들과 같이 생각하는 건 무리예요. 사람이 죽었
어요! 그것도 네명이 제 눈앞에서 말입니다. 그걸보고 그냥 넘기라구요? 이
번엔 그렇다치면 그 다음은, 또 그다음은? 그러다보면 죽음과 살인에 익숙
해진 저를 발견하게 되겠지요. 그게 무림인 인가요? 제가 생각한 무림인은
그런건 아니였다고요!"
정체성의 문제였다. 누구도 답해줄이 없는,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수 없는,
자기 자신만이 풀어야하고 안되면 끊어야하는 매듭이었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치지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삶에 쫒기고
찌들대로 찌들면 인생의 목적은 그저 '생존'이 전부가 되는 경우도 있다.
또 성취욕구가 남달리 높은 이들은 모든 과정을 결과에 수반되는 부산물
쯤으로 생각하기에 정체성 같은 건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 아이는 감수성이 참으로 풍부하구나.'
한 인물을 볼때 그의 특출한 면이 너무도 부각되어 부차적인 다른건 무시되
는 경우가 많다. 정혜란도 북궁단야도 그렇고 장추삼도 그랬다.
"그래, 무얼하고 싶은거냐."
더이상 잡는건 무리다. 그건 장추삼을 망치는 걸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일
어나 문가로 걸어가던 그가 우뚝서서 이효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성취욕구와 타인에의 배려를 가장 이상적으로 배려할 남자, 그는 문
득 이효정도의 신념을 가지고 싶었다.
"보겠습니다."
' ? '
"무림, 그리고 무림인을요."
"무림과 무림인을 본다라... 그럼 또 떠나겠다는 거냐?"
어느새 자리에 앉은 이효가 건성의 결제서류를 뒤적이며 묻자 장추삼이 미
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우물안에서 보는 하늘은 그저 동그란거잖아요."
"그래..."
파슛.
'래'자가 끝나기도 전에 이효가 장추삼에게 다가서며 연달아 삼장을 내질렀
다.
'!'
두발을 한번 엇갈린것 만으로 그의 공세를 피해내며 장추삼이 다급하게 외
쳤다.
"이숙, 미쳤어요!"
"말은 나중에해라!"
피하는걸 예측이라도 한듯 옆으로 비껴선 장추삼에게 세번의 발차기가 날아
왔다.
'이숙은 칼을 잘쓰는걸로 알았는데?'
그의 절기는 누구나 파풍십이도로 대변되는 양양이가의 독문도법이었다. 이
효의 부친 이진웅도 파풍십이도법 하나로 표국을 세웠다고 알려졌으니까.
'장난 이라면 심하고 아니라면 칼을 들 분인데?'
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발차기에 실린 위력은 나름대로 웅장한 것이었고
빠르기 또한 눈으로 쫒는게 어려울 정도로 쾌속했다. 그리고 방위,
인간이라면 가장 대처하기 어렵다는 상.중.하의 높이를 나누어 점유하면서도
거의 동일한 속도로 다가오는 '이 각법'은 분명 예삿 것은 아니리라.
'좋아!'
그의 몸이 허공에서 한바퀴 반을 회전하자 장내는 정리되었다.
'이, 이녀석!'
사실 이효의 발차기는 굉장한 빠르기와 위력으로 다가왔기에 피하거나 손으
로 막아내는 도리밖에 없었지만 장추삼은 반바퀴에 한번씩 발을 내질러 그
원심력까지 실은 발 뒤꿈치로 그의 공격을 무력화 시킨것이다.
퍽이나 작은 규모의 선풍각, 단 한바퀴의 반의 선풍각이었지만 그 회전의
빠르기는 통상의 선풍각 - 보통 다섯번이상의 회전력이 있어야, 그 만큼의
원심력이 뒷받침되야 선풍각 고유의 위력이 발위된다 - 을 넘어서는
위력이었고 특히나 마지막의 타격은 실로 막강한 위력을 가진것이어서
이효는 복숭아뼈에 쇠 몽둥이가 부딛친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갈까요?"
장추삼이 짖굿게 웃자 이효는 두손을 저으며 웃었다.
"아이고, 아니다. 아니야! 네녀석이 왜 양양 일대의 뒷골목을 주름잡았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렇다고 힘없이 늙어가는 숙부에게 무지막지한 발차기를
하다니!"
"힘없이 늙어가는 숙부요?"
장추삼의 째진눈이 오랜만에 위, 아래로 영역을 넓혀 제법 동그란 형태가
되었다. 언제나 자애롭고 근엄한 줄만 알았더니 이 사람도 농담을 하고 사
나보다 생각했다. 역시 사람은 단면만 보아서는 안된다.
"아, 맞습니다! 힘없이 늙어가는 숙부님! 오오, 너무도 힘이없어서 시중
철장포에서 굴러다니는 칼 하나만 오른손에 쥐어도 그저 별볼일없는 일·류
·고·수 따위는 몇합씩이나 써야 굴복시키고, 너무도 늙어서 큰 기침한번
하면 아무것도 아닌 각 표국들과 무도장에서 그저 버·선·발 로 뛰어나오
는 힘·없·이·늙·어·가·는·숙·부·님, 오오!"
두팔을 벌리며 과장된 농지꺼리를 하자 이효의 표정도 밝게 풀렸다.
"예끼, 이놈아!"
알밤을 먹이자 그제서야 장추삼이 팔을 내렸지만 여전히 이죽거렸다.
"역시... 힘없이 늙어가시기에 알밤의 위력은 가일층 상승하시네요."
다시한번 손을 쳐들자 '아니예요'를 연발하며 뒤로 죽 물러서는 장추삼에게
이효가 인자한 삼촌이 되어 말했다.
"아버님껜 상의 드렸느냐, 이번에 또 집을 나서는걸 아시게되면 무척이나
섭섭하게 생각하실텐데."
"이해 하시더군요."
장난을 그만두고 장추삼도 쓸쓸한 표정으로 이효를 바라보았다. 아버님을
부탁합니다, 란걸 얼굴에 써 놓은듯 그의 얼굴근육은 애잔한 움직임을 보였
다.
"그래, 양양은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말고 다녀오너라. 저번엔 너의 육체를
위한 여정이라면 이번도 저번만큼의 정신적 성숙과 안정을 가져다 즐 값진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이효가 가만히 장추삼의 손을 잡았다.
"청해복룡표국의 두번째 자랑인 실주회수조의 여덟번째 자리는 비워놓을 것
이야. 네놈이 돌아왔을때 또 백수일순 없잔느냐."
"그러지 않으셔도..."
손을 빼려는데 더 강한 힘이 가해지자 놀란 그가 이효를 바라보았다.
'이숙!"
이효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뺨을 적시고 있었다.
"난... 네녀석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구나! 넌 나의 조카이자...
아들이란걸 명심해라."
이효와 민경추 사이에 자식이 없어서만은 아닐것이다. 장추삼이 엇나갔던
이유에 관해 어렴풋이 짐작했엇고 그것이 자기책임 같아서 관심에 관심을
기울이다 든 정.
적어도 이효의 관점에서 장추삼은 튼실하고 괜찮은 조카였고, 아들같은
존재였다.
"예!"
더 있다가는 눈물이 나올것 같아서 장추삼이 황급히 자리를 피하자 가뜩
이나 을씨년스러운 집무전은 노년을 바라보는 사내 혼자서 지키게 되었다.
이백여 식솔을 책임지며 늘 자신만만한 목소리와 넉넉한 미소로서 표사들을
독려하던 그도 혼자 있을 땐 평범한 중년인이자 감정이 살아 숨쉬는 개인
일 뿐이다.
"삼음추를 막아내다니..."
이효가 장추삼을 몰아칠때 보였던 세번의 발길질은 사실 삼음추란 각법이었
다.
삼음추... 이 각법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옳을것이다. 그러나 이 각법을 사용하는 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없다.
바꿔말해 그 사람이 이 각법을 사용하는걸 모른다는 것이다.
"허허... 노야, 노야의 삼음추가 이렇게 깨졌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허탈한 미소속에 어린 득의의 빛, 이효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그렇게 웃고만
있었다.
  [11266]  [연재] 삼류무사-73    첨부파일 :

퇴근길에 술 한잔 하자며 따라붙는 당소소들을 따돌리고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 장추삼의 마음은 편할리 없었다.
어제 저녁, 실회로를 다녀온 아들이라고 대견해하던 부친에게 한다는 말이
또 집을 비워야 할것 같다는 것 이었으니 장유열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안봐도 뻔했었다. 화를 낼 기력도 없었던지 멍하니 장추삼을 바라는 그에게
자신의 솔직한 처지와 생각을 납득시키는데 무려 한시진을 소비했지만
부친이 과연 정신적인 납득으로 허락한건지 심정적인 납득으로 허락한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부친은 가타부타 말한마디 없이 그저 무겁게 '그래' 라고만 했을 뿐이니까.
이럴때 장추삼은 먼저가신 모친의 존재가 못내 그리웠다. 만약 그분만
계셨어도 늙은 부친을 홀로 남겨둔다는 죄책감이 좀 덜했을텐데...
'장가를 일찍 갈걸.'
점점 더 엉뚱한 생각으로 상념의 방향이 전개될 무렵부터 날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건 뚜렷한 기세를 담고있는 인간 날파리였다.
'이건 또 뭐야?'
'니들은 디들데로해라, 난 내 갈길이나 갈란다'하고 무시하는데 느닷없이
날아온 무엇이 있었다.
' ! '
한발짝 비켜서는것만으로 날아온 물체를 피했지만 깊숙히 땅에 박혀있는
그것을 보는 순간 장추삼은 폭갈을 터뜨려야 했다. 그건 팔면에 삐죽한
침이 박힌 암기였다.
"이씨, 가만히 길가는 사람한테 왜 시비를 거는거야! 당신들이 쫒아오건
말건 냅뒀던게 무서워서 그런줄 알아! 가뜩이나 기분도 꿀꿀한데 한번
해보자는 거야, 뭐야?"
모른는 사람이 보면 혼자서 뭔 짓거리하나, 내지는 '쯧쯧 젊은 나이가 살짝
맛이 갔구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육안으론 분명 혼자이지만
장추삼이 들어선 풀숲의 소로에는 열 아홉 사람이 분명 숨쉬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은신술이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본능적으로 발산하는 기의
통제는 그야말로 절대를 바라보는 초고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황당한건 세우삼십육도의 열여덟명이었다.
'그게 무슨소리야?'
'저 암기, 누가 날린거야?'
그들은 모추의 흔적을 쫒다보니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일 뿐 결코 장추삼의
뒤를 밟거나 하지 않았다. 당연히 위해를 가할 마음도 없었다!
"좋게 말할때 내앞에서 사라져. 나 당신들과 오래 노닥거릴 기분이
아니거든. 알아?"
'이런!'
그제서야 세우삼십육도들은 알았다. 암기를 날린건... 모추였다.
'교활한 놈!'
허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눈앞에 모추가 버젓히 있는데 어찌
그냥가겠는가? 명령을 떠나 절반의 동료를 죽인자를 용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추는 삼년동안 공으로 청빈로에 머문것이 아니란 걸 몸으로
보여주듯 세우삼십육도의 추적을 교묘하게 따돌리는 일방, 거짓 흔적
따위를 지형과 건물들 사이에 적당히 남겨 그들을 몇개조로 분산시켜
각개격파의 형식으로 그들 중 열 여덟을 살해했다.
'이제 다 잡았는데...'
물론 대가가 없었던 건 아니다. 모추는 크고 작은 검상을 제외하고도 팔
하나를 잃어야 했다. 장법을 쓰는 이에게, 그것도 변환의 기법을 사용하는
모추에게 있어서의 팔 하나가 가지는 의미를 말해 무엇하겠는가.
스륵-!
세우 삼십육도의 맏형이랄수 있는 세우일도가 장추삼 앞에 몸을 드러냈다.
"우린 귀하를 따라다닌 적도 없고 또한 암기를 날린 사실도 없소. 우리가
쫒던 인물이 귀하와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기에 따라왔을 뿐이니 귀하는
그냥 가던길을 가시오."
"그럼 당신들이 쫒는다는 인물이 계속 나를 쫒아온다면 당신들도 계속 나를
따라오겠군?"
말하는게 무척 귀찮았지만 세우일도는 침착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전에 끝낼거요."
직감적으로 장추삼은 이들이 무얼 원하는지 알았다.
'어쩌다 청빈로가 이렇게 됐지?'
낮은 탄식과 함께 몸을 돌리고 털레털레 걸음을 옮기는데 꽂히는 전음성.
무척 급박한 상태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곧바로 알수 있을 정도로
초췌하고 심각한 목소리.
("미안하네, 자네와 난 그저 한번 싸운것 뿐이지만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부탁하나 함세.")
물론 싫어요, 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그에게 지금 만사가 귀찮은
상태였으니까. 부탁도 뻔했다. 마환장이라 불리는 모추라는 걸 안순간 왈칵
짜증부터 났고 부탁이라면 척 보기에도 무림인이란걸 보여주는 이들 -
모추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면 적어도 깡패 수준은 아닐테니까 - 을
제압해 달라는 걸꺼다.
("그들을 제압해주게!")
'이런 젠장!'
싫었다, 정말이지 싫었지만 이들은 그저 희미하게 모추의 종적을 가늠하는
정도로 보이지 않는가. 만약 장추삼이 '싫어요' 하고 큰소리로 외친다면
'찾는사람 여기있대요' 하고 고자질 하는 격이다. 고자질... 사내치고 이
단어와 친한사람 별로 없다. 하물며 사나이중 사나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장추삼에게 고자질이 가당키나 한가?
'전음인지 뭐시긴지는 익혀두는 건데!'
후회해서 뭐하겠는가, 당장이 급한데. 발걸음을 우뚝 멈춰선 장추삼에게 뭘
느꼈는지 세우일도가 차갑게 뇌까렸다.
"우리가 찾는 사람은 귀하도 잘 알고있는 마환장 모추라는 자요."
울컥한 기분에 불을 질러도 유분수지, 온통 흑의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녀석의 말 뽐새는 '그러니 넌 빠져' 아닌가?
"왜,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보면 고해바치기라도 하라는 거요?"
세우일도는 말없이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속은 아니지만.
'듣던데로 성격이 아주 지랄맞구나. 이 순간만 아니였다면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는건데.'
당연히 고운말이 나갈리 없다.
"그게 귀하의 신상에 이로울거요."
"오호, 신상에 이로울거라?"
장추삼이 발밑에 있는 돌멩이를 발로 툭 찼다. 이건 그가 기분이 더러울때
즐겨 사용하는 몸동작이다.
"만약 보고도 못 본척 한다면?"
"......"
"아니, 숨겨준다면?"
"......"
"아니, 내가 보호하겠다고 하면?"
"......"
"어쩔거요?"
사람이 열받는 경우는 허다하다. 하루에도 몇번을 열받았다가 풀리곤 하는
게 사람사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너무하지 않은가.
'임무만 아니라면!'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결정타와도 같은 한마디가 장추삼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당신들이야말로 청빈로에서 꺼지는게 신상에 이로울거요."
번쩍!
세우일도의 눈에서 광채가 일었다.
"말로 들을 자가 아니로군."
기다렸다는 듯 열 일곱의 신형이 장내를 메웠다.
"대형, 어차피 모추는 부상이 심하여 이동거리에 한계가 있습니다."
"저자에게 교훈을 줄 시간정도는 있습니다."
여러명이 말을 하면 보통 '왁자지껄'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제각기
한마디씩을 하는데도 소란스러운 느낌을 주고있지 않다. 그건 이들이
그만큼 정신적으로 연계가 되어 있다는 의미다.
"귀하는 실수를 했소. 쓸데없는 참견은 늘 화를 부르지."
장추삼의 발에 맞는 돌멩이가 좀더 멀리 비행하기 시작했다.
"꼭 싸움 못하는 것들이 싸우기전에 주절거리더군. 흑월회의 노 뭐시긴가
하던 애꾸처럼 말이야."
촤르륵.
세우 삼십육도중 열 여덟명, 아니 이게 세우십팔도가 되어버린 그들이
장추삼을 가운데 두고 넓게 퍼졌다. 딱 반 원형으로 그를 에워싼 형국,
퇴로에 대한 배려는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두둑.
힘없이 내려졌던 양 주먹이 불끈 쥐어지자 그의 몸은 전능지체로의 빠른
전환을 보였다. 이제 그가 전능지체로 변화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엄청나게 단축되어서 마음먹는 순간 바로 실행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느새 빼어들었는지 싸늘한 예기를 발하며 피를 요구하듯 번들거리는 열
여덟자루의 얇디얇은 도. 이걸로 보아 그들은 환검의 일종을 사용하리라.
팟!
서전은 장추삼의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11288]  [연재] 삼류무사-74    첨부파일 :

'헉!'
무언가 희끗했다고 느끼는 순간 일도의 면전에 느껴진 강력한 기운이 그를
옆으로 비껴서게 했고 연달아 들어오는 공세는 그저 본능적으로 막아내는게
전부였다.
'바, 발차기잖아!'
그때까지 일도에겐 제대로 도식한번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순식간에 벌어진 공방이였기에 십칠인도 손을 쓸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스르릉.
반원의 대오를 그리고 있던 그들의 도진이 가운데가 오목한 호리병 형태로
변하며 장추삼의 양 옆으로 각각 두개씩 도합 네 개의 칼날이 날아왔다.
검(劍)과 도(刀), 긴 쇠의 가장자리를 다듬어 사람을 벤다는 것에서 똑같은
효용성을 가지고 있는 이 두개의 무기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선 날의 차이인데 검은 양면 모두에 날이 서있고 도에는 한쪽면만
서 있다.
이것은 두 무기의 기본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날이 서 있는 검은
어떤 측면에서도 상대를 벨 수 있는 강점이 있는 반면 그 만큼 다루기
어렵다는 얘기도 된다. 무공이 일정 수준에서 넘어서게 되면 그가 부리는
검의 변화 또한 기오막측해 지는 게 당연하고 양날, 즉 두면으로 공격이
가능하다고 하는것은 두가지 길의 검로가 열린다는 뜻이다.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머리아픈게 검이란 얘기다.
그에 비해 도는 베는 면이 한쪽밖에 없기 때문에 검보다는 다루기 쉬운게
사실이다. 그래서 도는 보통 중(重)의 기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애용하고
또 찾게된다. 양면으로 부리는 변화와 한면으로 부리는 변화는 어느게 더
많은 흔적을 남길것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으니까.
그런데 이들은 검보다도 얇은 도신(刀身)의 도를 사용하고 있다. 칼이
가벼워서 나쁠건 없다. 똑같은 힘과 위력을 받쳐주기만 한다면 일푼이라도
가벼운 무기가 다루기 더 수월할 테니까. 그러나 환(幻)의 기법을 사용하는
걸 포기했다면 힘, 즉 중의 수법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할 터이고 무기와
무기의 접촉시 조금이라도 상대방에게 타격을 안겨주기 위해선 사용하는
도 자체가 무거워야 한다.
재수가 좋아 전설속에 나오는 만년묵강 따위의 금석을 얻었다면 모르지만
그런건 어디까지나 전설이니...
가만히 귓볼을 간지르는 연인의 머리카락처럼 유연한 기세로 날아오는 네개
의 도날은 그 방위 또한 좌상, 좌하, 우상, 우하 라는 합격의 기본공식을 충
분히 따르는 것이라 장추삼으로는 뒤로 물러서는 도리밖에 없었다. 사실 말
이 쉬워 그냥 '물러섰다' 라고 표현한 것이지만 외발을 지면에 붙이고 오른
발로 일도에게 발길질을 하던 상대였기에 네명의 눈에는 그가 무동력으로
죽 물러서는것 같았다. 땅을 박찰때 주는 무릎 관절의 구부림을 최소화 했
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물러선 곳에 예외없이 또 네개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뭐야, 이거!'
어찌보면 무모할 정도로 똑같은 공격, 또 뒤로 물러나서 피하면...
'지금 날 몰고있는거야?'
과연 그들의 형태는 타원의 형태로 변해 있었다. 양 끝에 한명씩 서있고 양
옆으로 여덟명의 도수(刀手)들이 포진한 형태. 한발 더 물러선다면 그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좋아!'
알면서 하면 바보라고 한다. 나쁜걸 알면서도 할수밖에 없었다는 건 갈데없
는 멍청이들이나 하는 거다. 그리고 장추삼은 한발 뒤로 물러섰다.
촤릉!
이 순간을 노린 것일까, 여덟개의 칼날이 그를 쓸어왔다. 그것은 후상, 후
하, 전상, 전하, 좌상, 좌하, 우상, 우하의 공세로 사람이 공격당할수 있는
 가장 많은 경우의 수라 하겠다.
'고맙군.'
아직도 어정쩡하게 오른발을 들고 있는 상태, 그 순간 장추삼이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공격범위들이 그의 전방향에서 비틀리게 되
는 상태, 그리고 허공으로 사뿐히 몸을 띄운 그가 본시 좌하를 맡았던 도수
의 손등을 오른발로 한번 딛고 승룡선풍각의 기법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파박.
그의 왼발은 아주 빠른 속도의 회전력으로 상방을 맡았던 네명의 도수가 쥐
고있던 도극을 빠르게 한번씩 걷어찼는데 연도의 성질상 부러지지 않는건
당연했으나 당연히 세찬 진동이 도수들의 손아귀에 밀려 들어왔다. 연성이
강하고 얇은 철을 끝을 잡고 크게 뒤로 당겼다고 놓으면 제자리로 가려는
성질과 관성이 충돌하여 발생하는 현상.
부르르.
그들은 막대한 진동력에 도식의 전개는 커녕 도를 놓치지 않는것에 열중하
는게 할수있는 최선이었다. 그제서야 하방을 쓸던 도수들이 방향을 바꾸어
보려 했으나 진동력에 머뭇거리는 동료들 때문에 도로의 변화 또한 여의치
않았다. 잘못하다간 아군을 베게 생겼지 않은가!
'위헙하다!'
그렇다. 순간의 차이, 이것을 놓칠 장추삼이 아니었다. 본시 상대방의 하방
을 공격하는 의미는 인간의 신체구조상 허리를 굽히는 선행동작을 노려
방어의 틈을 발생하는 까다로운 공격인 반면 공격하는 이 역시 그만큼
무리한 자세 - 무릎이나 허리를 굽히는 - 를 취해야 하기에 공세의 전환을
위해서는 제 이차 동작이 반드시 필요할 터.
회전을 끝낸 장추삼에게 보인 단 한번의 틈, 결과는 자명했다.
빠박!
인간의 다리가 허공에서 이렇게 쫙 찢어 진다는 걸 보여주듯 양발을 벌려
전후의 하방을 노렸던 도수들을 잠재우고 떨어지는 그대로 다시 한번 왼발
끝을 찍어 반동을 받은 상태에서 살짝 몸을 돌려 띄우며 좌우 하방을 노린
도수들에게 한방씩을 더 날려주는데 걸리는 시간이 세우일도가 '위헙하다'
라고 생각한 것과 비슷했다.
"이익!"
겨우 도의 진동을 진정시킨 도수들이 허공에서 분분이 떨어지며 장추삼을
노렸으나 이번에는 정말 쉬운일이었다.
촤르륵.
천고의 보법 산무영이 펼쳐지며 네 명의 도수는 네 명의 장추삼과
만나야했다. 진동을 진정시킨 시간도,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시간도 똑
같을리는 없으니까.
빠바박!
순식간에 여덟명을 뉘어버린 장추삼의 기세에 눌린 세우인들은 순간 아무것
도 하지 못했다.
"휴우."
그제서야 장추삼이 큰 숨을 내쉬었다. 여덟명을 지면에 눕히는 동안 그는
단 한호흡의 숨도 내쉬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타고난 싸움꾼이다!'
모추와는 차원이 다른 싸움, 대단한 변화의 초식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경천
동지의 위력을 지닌 내공력을 쓰지도 않았지만 여덟명의 세우인을 지면에
나뒹굴고 있었다.
'정확한 순간포착, 싸움 자체를 자신의 그림대로 이끌어 나가는 장악력, 임
기응변...'
무엇보다도,
'호흡을 자제하여 움직임의 흐름을 최대한 원할하게 하다니!'
숨을 쉬지않고 살수는 없다. 또한 여하한의 운동을 하게되면 숨이 가빠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숨이란건 신진대사에 영향을 주는만큼 한번 호흡을 할때
인체는 필요한 걸 얻게되지만 순간적으로 사람의 몸은 느려진다.
외줄에 의지해서 허공으로 몇 번 널뛴 동작 같았는데...
눈을 돌린 장추삼이 일도에게 무겁게 말했다.
"계속할거요?"
조용히 세우일도가 도를 중극으로 세웠다.
'그나마 문답무용, 어쩌구 보단 낫군.'
팟!
일도에게 말한다고 싶었는데 그는 양발로 지면을 차며 그대로 몸을 뒤로 날
리며 허공에서 신형을 뒤집어 세우일도와 마주 보고있던 도수에게 쇄도했다.
'헉!'
그자는 세우이도로서 세우삼십육도중 두번째로 고강한 무공을 소지하고 있
는 인물인 바 당연히 도세의 한쪽은 맡은 것이도, 또한...
'당연히 당신이 무너져야겠지!'
도를 들어 막아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세우이도의 전면을 수놓는
무수한 주먹들!
추뢰유성!
이것역시 방금전 장추삼이 생각한 것으로 빠르기와 빠르기가 만난 최상의
쾌속 공격법일 것이다. 그리고 힘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유성우의 특성으로
추뢰무영과는 다르게 한번 시전했다고 해서 겔겔거릴 일도 없을 것이다.
파바방.
세우이도는 허리께까지 치켜온 도를 사용하지 못하고 지면에 처박혔다.
'어?'
그리고 장추삼도 주춤 신형을 멈추었다.
'이런, 의외로 힘이드네?'
무엇보다 아련히 들리는 파공성이 없었다. 비록 상대를 제압했지만 추뢰유
성은 추뢰유성이 아니였다. 완전하지 않은 몸...
츄아악!
은밀한 도기가 감지되었지만 당황한 장추삼이기에 일단 몸을 빼는데 급급했
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배후를 막아선 인물이 없다는 것이고 그에게는 방위
하나의 부담이 없어졌다는 것이지만 그 효과는 몇 배 더 위였다.
'일단 숨을 고르자.'
정신감각을 최대한 세워 여덟명의 공세를 보법없이 피해내던 장추삼에게 느
닷없는 도세가 날아왔다.
"탓!"
발을 들어 허공의 도세를 막아보려했으나 그것은 마치 미꾸라지처럼 방향을
바꾸어 장추삼의 옆구리 쪽으로 옮겨왔다.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날아다니
는 솜뭉치마냥 부드러우면서도 변화가 심한 도세!
강호 경험이 풍부한 노강호가 보았다면 비명과도 같은 한마디를 터뜨렸을
것이다.
"난화삼십육검!"
그렇다. 세우일도가 장추삼을 밀어부치는 도식을 아미의 진산절기라는 난화
삼십육검을 도로 빌어 펼쳐내는 형태였다.
'이런게 다 있어?'
밀어내도 밀어내도 은밀히 다가오는 공기처럼, 난화삼십육검의 도세는 은밀
하면서도 부드럽게 장추삼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뭐, 부드럽고 은밀하다
고 덥썩 받았다간 큰일 나겠지만.
  [11434]  [연재] 삼류무사-75    첨부파일 :

'이크'
장추삼도 영 바보는 아니어서 이 도세가 여태까지 상대해왔던 그것과는 다
르다는 걸 알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스르륵.
최고의 절기 산무영이 펼쳐지자 난화삼십육검의 도기도 엉뚱한 장추삼의 허
상을 도륙하는데 그쳤다. 일순간의 틈을 빌어 뒤로 몸을 밴 장추삼이 가만
히 전방을 주시했다.
'여덟명은 그런데로 상대하겠는데 괴상하게 칼을 휘두르는 하나가 문제다.'
그 '여덟명'들도 세우일도를 망연히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대형
이 언제 이렇게 고명한 도식을 익혔던가. 그것의 이름까지는 몰라도 어쨌
든 상승의 절기라는 건 바로 눈치챌 수 있는 것이 눈앞에 벌어진 장추삼의
후퇴에서 드러났고, 그 오묘한 변화는 흉내조차 어려운 것이니까.
아홉을 쓸어보며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던 장추삼이 문득 실실 웃었다.
'이런, 나란 녀석도 참으로 웃기는군. 언제부터 내가 무림인인양 이러고
있는 거야. 지금 난 어디까지나 싸우고 있는 거잖아?'
눈앞의 아홉명은 무림인이다. 그것도 훈련이 아주 잘된.
'그리고 난 싸움꾼이고!'
또한 싸움꾼 이라면 싸움꾼 나름의 방법이 있다.
'쪽수로 밀어부친건 당신네들이니 내 방식을 원망해서는 안되겠지.'
그가 발밑에 있는 돌멩이를 툭 찼다.
쌩!
'뭐야!'
가까이 있던 세우인 하나가 깜짝 놀라며 도(刀)로 돌멩이를 후려쳤으나 손
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여파가 거세게 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슝슝슝슝!
추뢰보의 힘으로 밀어낸 돌멩이들은 - 제대로 찼다간 날아가는게 아니라 부셔
질테니까 - 마치 암기처럼 무서운 위력으로 세우인들에게 날아갔다. 생각해보
라 , 손보다 세배의 위력을 가진 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그 힘을 그대로 받은 암기를 발로 던질 때의 빠르기와 위력을!
'이런!'
쨍쨍쨍쨍!
그들은 허겁지겁 암기화된 돌멩이를 쳐내는데 급급했다. 돌멩이는 철저한
방향성으로 날아들었지만 막기에 바쁜 여덟명은 그런것까지 편안하게 염두
할 상태가 아니었다.
핏!
거대한 암기 하나가 날아들었다. 한쪽으로 세우인들을 치우치게 하고 추뢰보
로 밟으며 장추삼이 돌멩이 대신 직접 몸을 날린것이다.
'헉!'
추뢰보를 접하게되면 아무리 방비를 하고 있었더라도 놀랄수 밖에 없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것도 없다가 솟아나듯 눈앞에 무언가 불쑥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당황할 테니까.
세우일도가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난화삼십육검을 전개하려했다.
스륵.
딱 물러선 만큼만 다가서며 장추삼의 현란한 발차기가 시작되었다.
스르륵.
언제봐도 소름끼칠 정도로 유려한 난화삼십육검이지만 그것도 거리가 있어야
제 위력을 발휘한다. 세우일도로는 그의 가슴팍까지 붙어서 발을 질러대는
장추삼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지만 어떻게 떼어낼 도리가 없었다.
'좀 떨어져, 임마!'
전혀 위력적이지 않은 난화삼십육검, 세우일도가 크게 검을 떨치며 뒤로 물
러섰다.
"아아! ...?"
그는 황당했다. 검을 한번 휘둘러서 만들어놓은 거리가 분명 있어야
하거늘... 놈은 여전히 앞에 있었다.
왼쪽 어께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
'뼈를 주고...'
살을 깍는다, 의 생각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장추삼의 오른손에서 살처럼
쏘아져나간 아홉번의 주먹질은 그를 상념없는 세계로 보내주었으니까.
뻐벅!
쿵-.
황당한 일전.
빙글 몸을 돌리자 멍청한 얼굴의 여덟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게 당신들이나 꺼지랬지?"
세우인들은 장추삼을 파악하지 못했고 그는 세우인들을 파악했다. 비록 훌
륭한 합격술과 난화삼십육검 - 장추삼에겐 그저 괴상한 검법 - 으로 무장한
세우인들은 무림인들이다. 훈련이 잘되었다 함은 그만큼 체계적인 과정과
정확한 지도가 따랐다는 얘기고 바꿔 말한다면 '통제'와도 연결된다.
그들은 비록 일류를 상회하는 고수였지만 일류를 상회하는 싸움꾼의
임기응변을 염두해 본적이 없었다. 시키는 데로 하기만 했었으니까.
우두둑.
소리나게 목을 좌우로 꺾고 장추삼이 귀찮은 파리쫓듯 이들을 내몰았다.
"가쇼, 오늘은 영 기분이 더러우니까 더이상 치고받았다간 좋은성질 버리겠
어."
지청완이 들으면 세번을 까무러칠 단어를 사용하며 얘기할때 여덟명의 눈길
은 약속이나 한듯 그의 왼쪽 어께를 주시했다.
'제 아무리 발을 잘쓰고 무서운 권법을 가졌다지만 놈은 다쳤다!'
칼은 든 이가 맨주먹보다 유리한건 병기의 잇점과 거리에 있을것이다.
피와 살로 된 육신보다야 금속이 단단하고 예리한건 말할 필요도없고 칼을
손에 쥐게되면 사정거리 역시 늘어난다. 칼든 깡패들과 무수한 싸움을 겪은
장추삼이 이를 모를리 없고 또한 약점도 알고 있었다. 그건 '거리'다.
장점이자 약점...
칼을 들게되면 상대와 자신의 일정거리가 있어야 그것은 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바꿔말해 거리를 주지 않으면 맨주먹이 칼보다 낫다는 얘기다. 칼은
금속이지 육신이 아니니까. 그래서 파고드는 장추삼을 무리하게 떨치려는
세우일도는 당연히 비켜설 줄 알았던 그가 몸으로 밀고 들어오자 뛰어난
도세한번 펼쳐보이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장추삼도 어께를 다치긴
했지만.
그들의 시선을 쫓아 자신의 어께를 돌아본 장추삼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내가 조금 다쳤다고 한번 더 해보려는 건 아니겠지? 괜히 객기부리지
말고 널부러진 동료들이나 데리고 가쇼, 예?"
잠시 갈등하던 흑의인들은 곧 기절한 이들을 옆구리에 기고 장내에서 모습
을 감추었다. 스무명이 웅성거리던(?) 소로는 단 두명의 사내만 남아 조용
한 침묵으로 아까의 싸움같은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 모두들 갔소, 그러니 당신도 제 갈길을 가쇼."
소매를 찢어 대충 어께를 감싼 장추삼이 귀찮은 어조로 한마디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모추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네에게 할말이 있네."
"난 없소, 들을것도 없고...'
노골적으로 귀찮음을 드러냈으나 모추는 신형을 숨긴채 계속 말을 이었다.
"반드시 자네가 알아야하네."
"난 알거 없다니까! 진짜 귀찮게 왜 이래요?"
스륵.
모추가 장추삼을 막아섰다. 짜증이 날데로 난 장추삼의 그의 멱살을 틀어잡
았다.
"내가 말했지. 들을거 없다고... 어?"
펄럭이는 그의 왼소매를 보고 장추삼이 오른손에 힘을 풀었다.
"정말 무림이란거 싫어지는군."
"동정할것 없네. 자업자득이니."
모추가 자신의 왼손을, 아니 왼손이 있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천하
를 울렸던 변환의 장법은 간곳이 없었다. 문득 슬퍼지는 걸 참을수는 없었
지만 지금은 그럴때가 아니었다.
"자네가 무림에 관심이 없다는것 쯤은 들은 풍월로 잘 알고있네. 그..."
"그럼 됐구려. 잘가쇼!"
평범한 삶도 나름대로 괜찮지, 어쩌구 하며 삭 몸을 돌리는 장추삼에게 참
을성있게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자네는 이미 피할 도리가 없다네."
우뚝.
걸음을 멈춰선 장추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건 마치 잔뜩 독이
오른 호랑이의 낮은 목울림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놀라운 기백에 모추는 세삼스레 장추삼의 뒷등을 바라보았다.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이란 말이 있다지만 이자처럼 볼때마다 사람을 놀라게하는 인물
이 몇이나 있을까.
'이녀석은 도데체...'
"그게 무슨말이냐고 물었소.'
다시 한번의 물음. 그 스산한 한기를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 모추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친구 때문이라고 들었다. 자네가 월영전에 난입했던거... 그리고 날 이겼
었지. 그 순간부터 자넨 그들의 주목을 받게 된거야. 모르지, 이순간 놓아
준 친구들도 또 뭐라고  보고할지..."
장추삼은 가타부타 아무말 없이 등을 보인채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지 않으니 모추로는 알기
어려웠다.
털썩.
갑자기 장추삼이 쪼그려 앉았다.
"그렇지 뭐, 내 인생이 그렇지. 어차피 꼬인건 잘 알고 있었지만 쌈질 한번
했다고 이렇게 개같은 결과가 돌아와? 하아..."
다소 엉뚱한 반응에 모추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장추삼이 사용한 단어
는 우스울 수도 있었으나 그 어투는 절절하기 그지 없어서 엄한 무추가 미
안한 감정이 들 정도였다.
한참을 비맞은 중마냥 궁시렁대던 장추삼이 벌떡 일어서며 모추를 돌아
보았다.
"쎈거요, 그놈들?"
'?'
"쎄냐구요, 당신을 사주했던 놈들 말이오. 도둑 노인네한테 들으니까 당신
이 마지막으로 쓴게 뭐, 무당의 십단금인가 그거였다면서... 내가 보기엔
당신은 무당의 담을 넘을 사람은 아닌것 같고 그놈들이 무당말코라고 보긴
어려우니까 그놈들이 넘었을텐데. "
그제서야 말을 알아들은 모추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생각할것도 아니네. 방금전 자네를 괴롭혔던 검식이 이름이 뭔줄
아나? 아미의 난화삼십육검 이었네."
"아미의 난화... 뭐요?"
모추가 똑바로 장추삼을 응시했다.
"아미의 난화삼십육검! 일대제자가 아니라면 전수하지 않는다는 절기중의
절기. 그럼 이들이 아미의 담도 넘었다는 얘길까?"
'!'
장추삼의 얼굴이 펴졌다가 이그러들었다. 펴진건 시시한 검식이 아니었기에
 고생했다는 자부심이었겠고 다시 우그러든건...
"진짜 꼬였군."
그가 내쉰 한숨은 무척이나 진했다.
"아주아주 더럽게 꼬였어, 무당에다 아미... 소림도 나와아 하는게 아냐?
난 어째 이따위냐!"
"그들은..."
입술이 마른지 모추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11459]  [연재] 삼류무사-76    첨부파일 :

"그들은 내게 책 한권을 찾아달라고 요구했었네. 댓가는 당연히 무당의 절
학이라는 십단금이었고."
'또 비천혈서 타령은 아니겠지.'
"책이름은... 전설로만 내려온다는 비천혈서 였다네."
"씨앙!"
참았던 짜증이 폭발했다. 그놈의 책은 무슨놈의 억한 감정이 있어서 자신의
주위를 이렇게 뱅뱅 맴도느냔 말이다. 마치 그누구처럼.
'짜증이 만발하누만!'
하나에서 파생된 짜증의 파고는 대상을 바꾸어 무척이나 엉뚱하게도 지청완
이 목표가되어 마구 높아져만 갔다.
'맞아, 동굴에서 보낸 시간이야 사기 건 아니건 간에 내가 선택해서 벌어진
것이니 탓할 사람도 없지만 오년만에 만난 '사람'이 그런 거머리 영감쟁이
였을때 알아봤어야 했어. 신세 한탄해봐야 뭐하누, 어차피 꼬일대로 꼬여서
풀길도 없는 인생인데!'
억울하지 않은가. 지금 청빈로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그 자신의 의지가 개
입되서 발생한건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굳이 들자면 월영전을 깨부수고 모추를 격파한 것 정도일텐데.
'지 친구가 곤란할 때 도와주는 것도 잘못이야? 도의에 어긋나는 행동도 아
니였는데.'
웬지 눈앞의 모추도 얄밉다. 자신에게 이런말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은 저
의가 뭔가. 아가 까만옷을 입은 놈들을 이겨주니까 동료의식이라도 생겼다
는 건가. 하! 천만에 말씀이다.
'아저씨가 인간적으로 매력있는 사람인건 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친구하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네요. 그런건, 그런 중요한 얘기는 나같은 조무래기
에게 할게 아니라 무림맹에가서... 무림맹, 무림맹?'
장추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은 무당과 아미의 진산절학을 알고있다. 또
한 거느린 무인들의 실력도 괜찮을 것이다. 왜, 강호십대장공 중 가운데 서
열에 해당한다는 모추가 시전잡배에게 팔을 잃었을리가 없으니까, 행사또한
 지극히 은밀하고 신속함은 청빈로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 바로
나온다.
그렇다면 이만한 무학과 추진력을 가진곳이라면...
'아냐, 내가 왜 이딴걸 생각해야해? 이러면 저 아저씨의 농간에 놀아나는거
아닌가? 관두자, 관둬!'
머리를 벅벅 긁던 장추삼이 모추를 힐끗보고 씨익 웃었다.
"뭐... 나중일이야 나중에 생각하고..."
"처음에는 무림맹을 의심했었네."
' ! '
기막힌 순간으로 장추삼의 말을 자른 모추가 어둑어둑해진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언젠가는 저 별을 보며 별과같은 존재가 되길 꿈꾼적도 있었고 그
만큼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무(武) 이외의 모든 생활은 반납했으며 감정까지도
접어두었었다.
'바라보는것 만으로 아름다운 것을 억지로 가지려한 벌일까...'
모추의 애잔한 눈빛과 다르게 장추삼은 호기심 이라는 마물에 이끌려 열심
히 머리를 굴려댔다.
'아닌가? 분명 저 아저씨의 어투에서 무림맹은 아니라는 걸 알겠는데 그럼
뭐야? 삼백년전 마교가 재등장한다고 해도 그들이 구파의 절학을 알리는 없
잖아.'
"사실 아직도 명확히 '이거다'라고 단정지을건 없지만 만약 무림맹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거 같네."
완연히 호기심으로 바뀐 장추삼의 표정이 쓸쓸했던 모충의 마음을 어느정도
달래주었다.
'참으로 알기쉬운 성격이구나. 자신이 느낀 감정을 저렇게 확실한 표정으로
얼굴에 남긴적이 언제였던가. 아마도 저친구 나이보다 훨씬 어릴때부터 얼
굴을 잊어버리고 살았던것 같은데.'
순진하다는게 바보가 되어버린 세상.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잔머리를 굴리고
, 재고, 탐색해서 자신이 얻을수 있는 최상의 잇속을 챙기는게 당연한 현
실인데 눈앞의 녀석은 그런거 하나도 모르겠다는 듯 생각이 부르는대로,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사는것 같지 않은가.
그럼에도 조금도 바보같거나 멍청해 보이지 않는건 왜일까.
이런것도 부러움이라고 해야 한다면 다소 유치하겠지만 팔을 하나 잃고서야
주위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고 무공말고도 소중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는걸
알게되었다는 건 너무 역설적이다.
"아, 왜 말하다 말고 사람보고 웃는거요. 내얼굴이 그리도 잘나보이오?"
하마트면 '그래'라고 할뻔했다. 그런데 웬지 그러기 싫다.
"이런, 착각도 유분수라는 말이 있다네. 그래, 말을 계속해야지. 다시한번
말하지만 밝혀진건 아무것도 없네. 정황적 증거로본다면 영락없이 무림맹의
개입을 의심해야 겠으나 심정적으로 아닌거 같다는게 내 판단이야. 무림맹
이었다면 나 말고도사주할만한 사람들이 지천에 널려있을 것이고 그만한 추
진력이라면 삼년씩이나 월영전을 두고보지도 않았을거야."
모추의 말을 듣고는 장추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꼭 그렇게만 보기도 좀 그런데..."
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보기엔 당신이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는 것 같소. 생각해봐요. 비천혈
선가 뭔가의 내용이 그렇게 중요하다면서요? 맞아요?"
"그렇다고들 하더군."
"그럼 봐요, 정말 재수가 좋아서 당신이 물건을 얻었다고 칩시다. 내가 보기
에 그자들은 책을 보지 말라고 했을거요. 맞죠?"
갑자기 주객이 전도된듯한 분위기였지만 둘은 그런걸 의식하지 못했다.
"그렇게 얘기했었지."
"흠, 내가 보기에 당신은 절대로 책을 펼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되고, 또한
그들도 그렇게 보였기에 당신을 책임자로 삼았겠지만 세상에서 떠드는만큼
그 책의 내용이 경천동지하다면 당신을 사주한 이들이 '만의 하나'같은 가
능성을 따졌다는 건 뻔한 일이오."
모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진한건, 천하의 바보는 다름아닌 자신이
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순진하다고 생각했던 이에게 그런 얘기를 듣는건
정말이지 싫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뭐겠소? 책을 봤든 아니든간에 그 사실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하기 위해서 말이오."
'이럴수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장추삼이 그만 말했으면 했다. 그러나 귀를 막지도
못했고 장추삼은 말을 이었다.
"그들로는 오히려 잘 알지못하는 인물을 기용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지.
그것도 실력은 있되 세력은 없고, 정사(正邪) 중간이라면 더할나위 없는
조건이었을 것이고."
'난 그저 소모품에 되려 사십년을 살아왔단 말인가?'
자괴감에 빠진 모추를 보며 장추삼은 이정도의 가정도 하지 못한 그를 이해
하기 어려웠다. 그로서는 모추의 인생과 십단금이 그에게 가졌던 의미를
알수 없었으니까.
"고로 무림맹이 아니라는 가정은 무의미해 졌소. 근데 진짜루 비천혈서가
있기는 있나? 있다면 내용이 뭐길래 그 난리들이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모추를 힐끔거렸지만 도데체가 움직임이 없으니
 괜시리 무안해져서 장추삼은 헛기침으로 표정관리를 대신했다.
"어허험, 그, 그래서 하는 말인데 기회가 닿는다면, 허험, 그 비천혈선가
뭔가 내가 발견한다면 아예, 험, 발기발기 찢어버려야지."
"약속하겠나?"
"예엣?"
쓸데없이 주절거리던 장추삼은 갑자기 말문을 연 모추에게서 형용키어려운
압박감을 느껴서 저도 모르게 한걸음뒤로 물러섰다.
'이런젠장, 내가 뭔소리를 지껄였었지? 분위기가 적응안되서 열심히 줏어삼
킨것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안나니, 원.'
"약속할수 있겠나. 그 말?"
'글쎄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다니까!'
모추의 표정은 그 어떤일이 벌어져도 어떤 대답을 듣기전에는 절대로 물러
서지 않을것같은 완고함을 담고 있었다. 본래도 완고함을 철철 흘리던 사람
이 완고함을 가득담은 눈빛을 부라리자 엄청난 무엇이 되어 장추삼을 사정
없이 옥죄었다.
이순간에 '제가 뭐라고 했남요?' 따위의 썰렁한 문장은 감히 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건 한사람의 무인이 그 인생의 전부를 포기하면서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
으로 부탁하는 걸세. 방금전 그말 책임져주게. 약속할 수 있겠는가?"
'아, 죽겠네.'
장추삼이 허공을 바라보자 그럴거라는 듯 모추가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장추삼이 했던 말은 그저 의지만 가지고 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해하네, 분명 어렵고 힘든일이 예상되겠지. 허나 그 일 만큼은 정파도
사파도 아닌 제 삼자의 손에서 해결해야만 할것 같다는게 내 느낌일세."
'글쎄, 그것이 뭐냐니까?'
"비천혈서... 그것이 가져올 풍파가 도데체 어느정도일지..."
'아! 비천혈서 얘기였구나. 그래서... 엥?'
"잠깐, 잠깐만요! 난 단지..."
모추의 표정이 더없이 숙연해졌다.
"무인의 길을 걸은지 이십오년, 실패한 인생이었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것이
 단 한번의 선택 때문이라는게 너무 서글프다. 사람에게 세번의 기회가 주
어진다는데 이미 두번의 기회는 놓친것 같으니 마지막 한번은 자네에게 걸
고싶다.  다시 묻겠네. 그말... 반드시 책임져 주겠지?"
'죽겠네!'
늘상 이런식이다. 도데체 자신에겐 선택의 기회라는게 주어지지 않으니!
한참을 버벅이던 장추삼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에, 뭐, 좌우지당간 내 눈에 띄면 없앤다는 건데... 에휴,
어쩌다 얘기가 그렇게 됬냐?"
"반드시 자네여야 해! 그렇지만 내용이 뭔가 특별하다면 스스로의 판단만을
믿지 말고 주위의 조언을 들어야겠지. 예를들어 그 때 그 분이라던가."
' ? '
장추삼에겐 조언을 구한 주위가 없다. 거기다 '그 분' 소리를 들을만한 사
람은 더더욱.
"누구요?"
"누구긴, 월영전에서 뵈었던 그 노선배님이지. 모르긴해도 강호상에 그만한
풍모를 가진분은 없으니... 자네와는 특별한 관계같더군. 아주 친하지도 않
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정도, 그래도 명호정도는 알고있겠지?"
이 아저씨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긴했나보구나, 하고생각한 장추삼이 측은
하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뭘 착각하신것같은데... 그 노인 별볼일 없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 분'
같은건 아니라구요."
"그게 무슨소린가? 자주 얼굴을 대한듯 싶은데... 자네는 느끼지 못했나?
그분의 기세와 느낌을 말이야. 허, 참."
'기세? 느낌? 쯧쯧... 액면에 속는 사람이 너무 많구나!'
외관상으로야 일대종사지, 생각하면서 가뜩이나 힘들어하는 모추를 자극하
기 싫어서 장추삼이 순순히 대답했다. 죽는사람 소원한번 들어준다는데 그
정도 못해줄 정도로 야박하진 않다.
"그, 러, 죠, 뭐."
"좋네.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할것이야."
결심한듯 모추가 말을 이었다.  [11489]  [연재] 삼류무사-77    첨부파일 :

                *                            *                             *
어느새 달은 둥실 떠올라 처연한 얼굴로 대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달의 뒤
편이 보이는 면 만큼 밝은게 아니라는 듯 달빛을 내리받고있는 청년과 노인
은 아무런 말없이 찢어진 천조각을 응시하고 있었다.  새하얀 백의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따끔따끔한 예기를 쏘아내는 노인, 백무량이 손에
쥐고있던 천을 품안에 넣었다.
"계양사제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 했었거늘... 사실이구나."
좀체로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않는 그로서 파격적이라고 할만큼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원래 백무량은 양양의 외곽을 맴돌면서 사건의 추이를 관찰했
었지 나서서 하운과 접촉하거나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상 위와같
은 일은 맞지않았고 행여라도 남의 눈에 띤다면 골치아파진다. 무림에서 삼
장로, 삼장로 하지만 얼굴이 알려진건 백무량 정도고 제일 유명한 인물도
백무량 이기에 행보 하나하나를 조심했던 것이다.
외진 수풀가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앞에 계양이 나는듯 달려왔을때도
그 나이에 웬 호들갑이냐고 퉁박을 주었었다. 조금도 잘못한 거 없다는
얼굴로 그의 사제가 입을 열었고 백무량의 안색은 싹 변했었다.
"어디있느냐? 당장 만나보아야 겠다."
백무량의 첫마디였다.
하운은 백의도포를 펄럭이며 생각에 잠겨있는 백무량을 감히 올려보지 못하
고 고개를 숙인채 말을 이었다.
"제자역시 반신반의 하였으나 십년전에 보았던 권인이 너무 뚜렷하여 감히
이런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소란이라니... 아니다, 아니다. 그런데..."
백무량이 정말 궁금하다는듯 하운에게 물었다.
"분명히 네가 말하길 장추삼이란 아이는 동네 건달패라고 하지 않았더냐.
권인(拳印)으로 볼때 최소한 사성(四成)은 익힌 흔적이었다. 그 아이가
특출한 외문기공을 익히지도 않았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
"외문기공의 도움없는 상태에서 일개 동네건달이 사성의 백보신권을 몸으로
받아냈다는 거냐?"
백보신권(百步神拳)!
말이 씨가 된 것일까. 그건 아니다. '... 소림도 나와야' 어쩌구 했을때
이미  그는 백보신권을 상대 했었으니까.
백보신권.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소림 최강의 권법중 하나!
이 무공은 담을 넘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그런게 아닌것이 몇장의
앙피지로는 설명이 안되는 깊이가 녹아 있다는데 기인한다.
오래 산 소나무를 화폭에 담는다고 가정하자. 정교한 묘사로 그 외양을 그리
는 정도는 그림에 재능이 있다면 누구나 해낼수 있는 작업 이겠지만 속에
담긴, 나무가 겪어왔던 여러 풍상들을 붓하나로 표현하자면 단지 그림실력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늙은 소나무의 깊이를 이해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소나무와 같은곳을 보아야한다.
백보신권이 그러한 무공이다. 이 권법은 뛰어난 초식이기 이전에 소림이
걸어온 역사이며 소림을 상징하는 정신과도 같은 것이다.
외양이야 얼마든지 흉내낼 수 있지만 내면의 깊이는 따라하지 못한다. 심연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고고한 정신은 들여다 보는것조차 버거운 일일터!
그런 백보신권을 사용한 인물이 있었다는 건 매우 중대한 사건일 것이다.
시전자는 누가 보아도 소림 출신의 무승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깊이를 받아낸 동네건달이라... 허, 참!'
백무량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하운을 훑어보고 있었다. 마치 '너 생각이 콩
밭에 가 있어서 중요한건 다 놓치고 있는건 아니냐'는 듯.
"제자는..."
말을 잊지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경우가 다 있을까!
누가 보아도 장추삼은 동네 건달이다. 말뽄새,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뜯어봐도 '좀 괜찮은 인간성' 정도나 추가할까? 그의 상의에 난 권인만
없었다면 아직도 그렇게 느꼈을 거다. 사실 흔적만으로 유추하는 것이지
아직 본적도 없다, 그의 무공을.
이 장로님께서 직접 보시죠, 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도덕과
예의범절에 충실한 하운이 그런말을 할수야 없다. 그래서...
"제자는 아직 경험이 미숙하여 사람을 판단하는데 미숙함이 많은것 같습니
다. 기회가 닿는다면 장형을 이 장로님께서 직접 보시죠."
라고 했다.
"직접 보라..."
백무량이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렇수야 없지."
' ? '
방금전의 말은 장추삼을 이미 주목하고 있었단 말인데, 무엇때문에?
"계양사제가 그 녀석에게 무척이나 신경을 쓰더군. 듣자하니 장추삼이란 아
이가 강호로 나간다고 하던데..."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반선수가 장추삼의 얘기를 이것저것 백무량에게 했
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아이에게 흥미가 없는것은 아니지만 별 계기도 없이 만나는건
우스운 일이다. 읽어보거라."
품속에서 잘 접힌 서찰을 하나꺼내 하운에게 던져주고는 백무량이 눈을 감
았다.
'언제나 풍운을 몰고 다니는 존재가 있는 법이지. 그 자신이 의식하든 안하
든, 의도하든 안하든간에 말이야. 작은 일부터 큰일까지 그의 주위에서 벌
어지고 전개되는 경우. 장추삼이라... 어떤아이 일까?'
서찰을 다 읽고 하운이 놀라 물었다. 그에게 비워진 칠년동안 강호는 쉬지
않고 흘렀는데 점점 알기 어려운 방향으로 치닫는것만 같았다.
"아니, 어찌 이런일이 가능한 겁니까? 관(官)은 무얼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까다로운 사안이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만해도 벅차거늘..."
잠시 생각에 빠졌던 하운이 그제서야 백무량의 의도를 알아챘다.
'난 참으로 둔하구나!'
"이장로님 말씀은..."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그 문제도 그 문제려니와 장추삼이란 아이 때문이
기도 하다."
'? '
"가까이에서 접하니까 모르겠지. 그러나 한 발자국 벗어나서 그 아이의
주변과 갑자기 굴러가기 시작한 폭풍의 수레바퀴를 한번 되짚어 보거라.
묘한 우연이 너무도 많다."
우연도 우연 나름이다. 우연이 여러번 겹치면 필연이 된다.
"그럼 양양은...'
"내가 있고, 니 사매도 있다. 양양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더이상
신경쓰지 말고 넌 그 아이와 함께 다녀오거라."
속으로는 좋았지만 드러내고는 내색하긴 어려워 하운이 걱정스레 한마디했
다.
"정말... 무림맹과..."
백무량의 신색이 침중해졌다. 방금 전 하운의 말은 무림공적으로 몰려도 하
등 이상할 것이 없는 말이었으나 상황이 너무 묘하다.
"그런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거라, 고작 무공초식 하나가지고 섣부르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너도 잘알고 있지 않느냐. 입은 만화(萬禍)의
근원이니 한 마디를 뱉아낼때도 세번, 네번 생각하거라."
"예."
고개를 숙이는 하운의 어께에 백무량의 손이 올라왔다.
"너는 대 화산의 대사형이다. 어딜가든, 무슨일이 있든, 화산의 영령들이
널 지켜줄것이다. 신중하게 행동하되 마음속에 자부심을 잊지 말거라.'
예를 표하고 하운이 사라지자 혼자남은 백무량이 나직히 도호를 외웠다.
"무량수불... 칠년의 시간동안 무슨일이 있었던걸까? 화신의 초식을 모조리
잊어버렸다는 아이가 볼때마다 놀라운 느낌을 주는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허공에서 계양이 툭 떨어져 내렸다. 살찐 몸에 어울리지 않는 유려한 신법.
"너는 어째 나이가 들수록 고양이를 닮아가느냐."
"허! 그렇잖아도 내 신발이 앞꿈치만 닳아있다는 걸 어떻게 아시었소?
이사형의 신통력은 날이갈수록 깊어지는구려."
과장된 포권까지 하며 반선수가 너스레를 떨자 백무량이 고소를 지었다.
"그래, 갔던일은 어찌 되었는냐?"
"생각한 대로요."
아무 바위에나 털썩 주저앉아 무릎을 콩콩치며 투덜거리는 계양은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노인네가 화가 나면 아주 무섭다.
"무림맹 호북지부는 아무런 일없이 잘 돌아가고 있소. 지부장이란 작자도
숨기는 건 없는 것 같더이다. 하긴, 이런 정도의 사안이 말단들에게
전달되었을리는 없지. 근데 이사형?"
' ? '
백무량이 돌아보았다.
"정말로 무림맹이 개입했을까요?"
같은말 두번하기 싫어서 그가 인상을 콱썼다. 이놈은 자신을 무슨 신선쯤으
로 안다, 대사형은 옥황상제로 여기고...
"그걸 조사하는 게 네 몫이 아니더냐? 내가 묻고싶은 말이야, 그건."
뚱한 표정으로 백무량을 올려보던 계양이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잘 해낼수 있을까 싶소."
하운을 걱정하는걸거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양양을 비워둘 수는 없으니
그저 마음만으로 격려할 밖에.
문득 백무량이 자신이 노인이 되었음을 절감했다. 무릎을 두드리는 사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 시대는 우리같은 노인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그럼 난 후진들에
게 등을 내어줘도 될까?'
수많은 신진고수들의 이상이자 목표였던 이름, 절대오존. 그중 한자리를 차
지하여 후배들의 앞을 걸어왔던 '치무환검존' 이기에 뒤따르던 후배들이 보
았고 젖히고 싶어했던 그의 등판.
위이잉-.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듯 낮은 검명이 울렸다.
'그건 내가 아니라 이녀석에게 물어야겠지?'
  [11506]  [연재] 삼류무사-78    첨부파일 :

 별리(別離)
이른 아침을 먹고 복룡표국을 찾은 장추삼이 그의 관물대에서 짐이랄것도
없는 간단한 물품들을 뺄 때 까지도 실회조원들은 그가 관두는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며칠전의 일이 괜히 미안했는지 단사민이 삐적삐적 다가와서
신소리를 해도 그냥 어울리지 않는 미소로 응대하고 적당히 시간을
죽이다가 퇴근시간에 맞춰 표국문을 나서는데 갈동이 급히 불렀다.
"장형, 장형!"
' ? '
아마도 실회조 대기전까지 갔다왔으리라. 표국내에선 신법을 전개하지않는
원칙도 무시하고 헐레벌떡 날아온 갈동은 장추삼 앞에서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만나지 못했더라면 집까지 갈뻔 했소이다. 어쨌든 다행이오."
"털보당주가 또 무슨 꼬투리라도 잡은거요? 퇴근시간 맞췄는데."
갈동이 집법당 소속이다보니 입싼 철무응이 생각나서 툴툴거리던
장추삼에게 그가 손을 훼훼 저었다.
"아니오, 아니올시다. 당주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엥? 그럼 갈형이 날 왜 찾았소? 갈형에게 빌린돈도 없는데."
"물론 없지요."
웃으며 갈동이 봉투하나를 꺼내 장추삼에게 내밀었다. 표국주 인장이
선명한 복룡표국의 문서 전달용 봉투.
"뭐요, 이거? 나 오늘부로 여기  관두는데... 시킬일 있으면 다른 사람 알
아봐요."
"표국주님께서 장형에게 전하라고 하셨소. 그럼 훗날 좋은 얼굴로 다시 만
나길 바라오. 난 바빠서 이만!"
어거지로 장추삼의 손에 봉투를 쥐어주고 나타날때와 같이 나는듯 갈동이
사라졌다.
"어? 이봐요, 갈형! 갈... 갔네."
바보처럼 오른손을 들고 어정쩡하게 갈동을 부르던 장추삼이 곧 손을 내리
고 내용물을 확인하였다. 몸 성히 돌아오라는 이효의 편지와 꽤 많은 액수
가 적혀있는 전표한장. 다소 큰 돈이기에 돌려주려 했으나 용돈한번 못 줘
본 숙부의 성의라고 생각하도 좋고 유능한 표사를 위한 투자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편지의 덧글을 보고는 고맙게 쓰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표국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부친의 손에 이끌려온 그날도
이렇게 활기찼었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표국의 문을 열면서 장추삼은 문고리의 차디찬 금속성이 웬지 정겨웠다.
갈동의 말처럼 언젠가 좋은 얼굴로 반대편의 문고리를 잡고 싶었다. 그때는
이렇게 조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게 소리를 질러서
낮잠자고 있던 사람들도 모조리 깨울것이다.
'나 돌아왔소'라고 소리처서.
*               *               *
친구들에겐 얘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돌아온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말
을 하겠는가. 차라리 아무말없이 사라지는게 나을것이다. 처음에야 욕을 하
겠지만 머리가 나쁜 녀석들은 아니니 곧 그를 이해하리라, 왜 떠나야만 했
는지 말이다. 그러나 청빈로를 뒤로하기전에 꼭 가고싶은 곳이 한군데가 있
어서 장추삼의 마지막 퇴근길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이른 시간인지 윤파파의 노상객잔은 한가했다. 두어군데 탁자에서 파전을
안주삼아 박주를 기울이는 장사치들 정도가 전부였기에 장추삼은 그가 가장
선호하는 모퉁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저 왔어요."
장추삼이 인사하자 윤파파가 '근데?' 하는 표정으로 장추삼을 힐끗 보았다.
"전하고 돼지고기좀 주세요. 맛있게요."
"그럼 언제는 맛 없었냐? 이놈 말하는 것 좀 보게!"
"아뇨, 아뇨, 그럴리 없죠. 오늘은 어떤술이 맛있을려나."
재빨리 윤파파의 공세에서 벗어난 장추삼이 죽엽청 한 담자를 담아 자리에
앉았다.
꿀꺽-.
'쓰다!'
그러면서도 노상객잔을 통째로 머리속에 심으려는듯 세세히 주위를 돌아보
았다. 몇년이 흘러도 똑같은 탁자와 의자, 힘 한번 주면 부셔질것만 같은
도마와 조리대, 어울리지 않게 날이 잘 서있는 칼들, 그리고 윤파파...
'파파, 건강하세요. 내가 돌아왔을때에도 또 전을 튀겨줘야해요.'
"어라? 저놈이 또 늙은이에게 눈웃음을 치네. 흉물스럽게 그러고 있지말고
이거나 가져가!"
히죽히죽 웃으며 안주를 받아들고 돌아서는데 무언가 막아섰다.
'키가 크군.'
쓱 비키려는데 그것이 불렀다.
"저기서 마시고 있나?'
'엥?'
이런곳과 너무도 어울리면서도 또한 평생을 이런곳에 발을 딛을것 같지 않
은사내.
"적대협이 웬일이요?"
적괴가 노상객잔을 한번 훑어보고 뺨을 긁었다.
"이렇게 괜찮은 술집이 있었다니... 의외군."
한마디하고 저벅저벅 장추삼이 자리에 앉아서 술을 따라 마셨다.
'어...'
"멍청히 서서 뭐하고 있나, 안주가 식잖아!"
'거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추삼이 맞은편에 앉았지만 적괴는 앞의 존재는 잊은듯
술을 비우고 전을 먹어댔다.
"술이 없군. 이보..."
"그게 아니오. 여기선 직접 퍼다 먹어야하오."
"......"
그렇게 네담자의 술이 비워지고서야 적괴가 말문을 열었다. 그때까지 장추
삼은 반담자의 술도 비우지 못했으니 적괴의 주량은 꽤 세다고 하겠다.
"떠난다고 들었다."
"......"
"아쉽군, 좀더 알고 싶었는데."
다시 한잔을 비우고 적괴가 장추삼을 보았다. 미소라고 짓는것 같기는 한데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냥 기분이 나빠서 인상을 긁는것 같았다.
"모추를 이긴건 자네였겠지?"
"누가 뭐라고 합디까?"
적괴의 인생에서 흥미라는 감정을 불러온 사람은 단 네명뿐이었다. 언제나
마음속으로만 불러보는 이름 하나와 표국주 이효, 지청완, 그리고...
'무슨생각으로 살고있는걸까, 이녀석은?'
안 물어보길 잘했다. 만약 질문을 던졌다면 그때부터 장추삼의 잔이 바빠질
뻔 했으니까.
"자네가 모추에 대해 물은 날 바로 월영전이 붕괴되고 모추의 패배가 장안
의 화제가 되었지. 그런 우연은 없다, 적어도 무림에서는."
특별히 대답할 말도 없고해서 장추삼이 한 담자 더 퍼오려고 자리에서 일어
났을때 적괴가 술담자를 뺏어 들었다. 그는 죽엽청보다 소주를 더 좋아했으
니까.
'그냥 딴거로 퍼오라고 하면 되지. 퉁명스럽기는!'
어느정도 술이 되었는지 적괴의 눈자위가 홍색을 띄었다. 술잔을 비우던 속
도도 눈에 띄게 떨어져서 한잔을 두 세번에 걸쳐 끊어먹기 시작했는데 한잔
한잔을 비우는 모습을 보니 그 역시 술을 무척이나 사랑하는것 같았다.
"지청완 노선배 말인데..."
'나, 참, 또 그 노인네 얘기네.'
장추삼이 있는데로 표정을 구겼지만 아랑곳없다는듯 적괴가 말을 이었다.
"도데체 어떤분인가? 강호 견식이 좁다고는 생각지 않았거늘 그분에
관해서는 도무지 잡히는게 없다."
'당연히 잡히는게 없겠지.'
"나도 모르오. 뭐, 방랑벽이 꽤 있다는거, 입심이 좋다는거, 또 뭐냐..."
"됐다!"
적괴가 말을 잘랐다. 들어봐야 뻔한 소리겠고 자신도 모르는 인물을 강호에
대해 거의 문외한같은 장추삼에게 물은게 잘못이다. 그나마 친해보였는데.
말이 잘린 장추삼이 퉁퉁 부운 얼굴로 자작을 했다.
'뭐야, 묻지나 말든지. 기분나쁘게 사람 말허리는 왜 싹둑 잘라?'
그 모습을 보자니 아주 오래전에 잊고 살았던 것 같은 어떤 감정 하나가 되
살아나는 적괴였다.
'이녀석은 참으로 재미가 있구나. 순수하다고 해야하나 바보같다고 해야하
나.'
"오년전 여자한테 차였다고 들었다."
' ! '
벌떡 고개를 들어 적괴를 보았다. 그야말로 오년전 이었다면 주먹부터 날아
갔겠지만 지금 그가 놀란건 강시의 입에서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가 흘러나
왔다는데 있다.
"기분 나쁘게 들었다면 어쩔도리 없지만 놀리자고 한 말은 아니야. 그때 그
렇게 괴로웠나?"
별걸 다묻네 하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장추삼에게 대답했다.
"당연한거 아니오. 몇년을 사랑했는데..."
이녀석에겐 얘기해도 될것같다. 혼자만이 간직해서 오래전에 재가 되어버린
슬픈 사람의 편린들을... 이녀석은 어쩌면 이해할 지도 모른다.
"잊혀지던가?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어께를 한번 으쓱하고 장추삼이 적괴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강시도 술을
마시면 순간적이나마 인간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가보다.
"세월이 약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되었소. 다시 한번 할려고해도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는데 어쩌겠소. 행복을 빌어야지."
"만약 그여자가 아직은 혼자라면?"
'아직은'이란 말에 강한 힘을 실어서 적괴가 물었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
지 손에 쥐고있는 술잔이 부서질것만 같았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 여기 또하나 있네. 손에 힘이나 푸쇼. 에... 혼자라...
음... 그렇다면 한번쯤 시도해볼만 하겠지. 단!"
장추삼도 '단'이란 글자에 힘을 실었다. 주먹쥔 그의 오른손에서 검지 손가
락이 죽 펴졌다.
"한가지, 자기 자신부터 확실히 선 상태여야 겠지."
어찌보면 지극히 평이한 대답, 그러나 적괴에겐 세상 어떤 미사여구보다 올
곧게 다가와 가슴에 자리잡았다.
"자기 자신부터 확실히 선 상태라..."
몇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이는 그를 보며 다시한번 사람은 한번만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장추삼이었다.
  [11534]  [연재] 삼류무사-79    첨부파일 :

몸 건강하라는, 적괴로는 좀체로 쓰지 않지만 누가 들어도 흔하디 흔한
인사말을 남기고 그가 일어나자 장추삼은 비로소 호젓한 기분이 되었다.
비운 술담자들은 많았으나 그가 머문 시간은 반 시진도 되지 않았기에
아직도 자리는 많이 비어있었다.
'강시양반, 마음에 두고있는 사람이라도 있는거야? 하긴, 그도 사람이고 총
각이니까 당연한 일이지.'
하며 술 한잔을 따르려는데 그의 앞에 누군가 섰다.
"아, 또 누구... 어, 우형이오?"
우건이 동그란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낮은 목소리로 장추삼에게 물
었다.
"그 무섭게 생긴 사람 완전히 간거에요?"
"엥?"
사실 우건이 노상객잔에 온 건 적괴가 자리에 앉고 얼마 안되서다. 장추삼을
찾고는 기쁜 마음에 걸음을 옮기다 무시무시한 인상의 남자와 말없이 술잔
을 기울이는 걸 보고는 찔끔해서 괜히 뚝 떨어져 앉아있다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쪼르르 달려온걸 장추삼이 어찌 알겠는가.
"갔소. 그 사람이 그리도 이상해 보이오?"
어이없어서 장추삼이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
는 듯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모습으로 우건이 대답을 대신했다.
'누구는 액면으로 '분' 소리까지 듣고 누구는 액면 때문에 처음보는 사람도
슬슬 피하니, 내 참!'
장추삼의 시선을 느꼈는지 우건이 어색한 말로 상황의 타개를 꾀했다.
"아하하... 뭐, 그분 대협이 뭐, 꼭 강시같이 보여서가 아니라... 뭐, 아하하...
이런, 안주가 없네!"
벌떡 일어선 그가 안주를 주문하며 윤파파와 이얘기 저얘기를 나누었다. 그
날 이후로 몇번 더 왔으리라.
"떠난다고 들었어요."
머리고기를 내려놓으면서 우건이 물었다.
'약속이라도 했나?'
어째 앉으면서 하는 말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까.
"내가 참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네. 그 얘긴 어디서 들었소?"
"그야 오...!"
장추삼의 의아한 시선이 계속 우건을 쫒았다.
그가 떠난다는건 표국내의 몇몇 빼고는 아는이가 없다. 부담없이 말을 하던
우건이 급하게 입을 봉하고 아까처럼 눈이 똥그레졌다. 본디 커다란 눈
이었는데 똥그레지기까지 하자 더할나위없이 귀여웠으나 장추삼은 내색치
않았다.
"묘하군, 표국 사람들도 잘 모르는 일을 알고 있다니 말이오. 우형이 복룡표국
사람들과 돈독한 관계를 가진건 몰랐는데 말이오."
"그, 그냥 오다가다 들었어요."
씩 웃으며 장추삼이 술한잔을 들이켰다.
"진짜에요!"
아니라고 했다간 맞아죽게 생겼다. 여전히 장난끼어린  눈빛으로 우건을 쓱
처다본 장추삼이 기겁을 했다. 그는 당황에서 분노를 넘어선 얼굴이었다가
아예 울상이 아닌가.
"아니, 이보시..."
또르륵.
끝내 한방울의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나쁜 자식, 꼭 그렇게 사람을 망신줘야 하는거야? 내 딴엔 지가 돌아왔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데.'
"아니, 저기..."
엉덩이를 살짝 떼고 우건에게 손을 뻗치다 '손치워욧!' 하면서 고개를 홱 돌
리는 순간 장추삼은 저도 모르게 장탄식을 토했다.
'도데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광경은 누가 보아도 그의 사과가 당연한 것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으니 진정하시오."
"흥!"
울면서도 특유의 콧방귀는 잊지않는 우건이 얄미웠지만 그 감정은 일단 접
어두는게 좋을것 같았다. 급한 불부터 끄는게 우선이니까.
"자자, 진정하고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사람이 그런걸 가지고 삐지고 그러오."
"삐질말을 했으니까 삐지지!"
'에휴!'
한대 치고 싶었지만 그럴수는 없다! 장추삼은 스스로를 사나이중의 사나이라고
자부하니까.
"안그러겠소, 앞으로 안그럴테니 기분푸시오."
"앞으로 그러지마요!"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니까 이건 아예 가관이다. 내참을 연발하며
장추삼이 겨우 술한잔을 따라주었다.
"남자가, 아니지 사람이 그러면 못써요. 큰 사람이 되려면 남의 작은 실수
따위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갈줄 알아야 한다구요. 알아들었어요?"
'끄응...'
사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곧 우건은 활기를 되찾고는 장추삼의 실회로에 관해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그의 무용담이 나오면 펄쩍펄쩍 뒤며 좋아하기도 했다.
장추삼도 이런 분위기가 싫지는 않아서 그의 물음에 꽤 성실히 대답해 주었고
뢰성인들과 싸움부분에서는 일어서서 폼까지 잡아주었다.
"근데요, 장형."
갑자기 무게를 잡으며 우건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거칠것없이 얘기를 풀
어내는 성격으로 볼때 지금 꺼내려는 얘기가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아까 건너편에 앉아있다가 우연히 들은건데... 아, 절대로 엿들을려고 한것은
아니예요!"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어가며 강조하는 우건을 보며 장추삼이 웃었다.
"뭔 얘긴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알았으니까 그냥 말하시오."
"그... 뭐, 그랬잖소. 그 여자가... 에, 혼자라면... 다시 시도해볼만 하다고
말이오."
"그런데?"
"지금도... 그런거요?"
장추삼의 얼굴을 보기 싫은지 술잔과 열심히 눈싸움을 하는 우건이었는데 술을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유난히 상기된 볼이 귀여웠다.
"지금도 그럴까... 힘든 질문이네."
연거푸 석잔을 들이키고 장추삼이 우건을 보며 싱겁게 웃었다.
"왜, 참한 소저라도 하나 소개시켜 주려고?"
"대답이나 해요."
농지꺼리도 대꾸가 있어야 신명나는 법이다. 맥 빠진 우건의 응대에 힘을잃은
그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일반적으로 봐서..."
"일반적인거 말고 장형을 얘기해봐요. 백번 일반적인거 찾으면 뭐해요?"
그말을 꺼낸이후 처음으로 우건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망울은 너무 커서
모든걸 담을듯 했다. 이 탁자를 담고, 노상객잔을 담은 뒤에 청빈로를 담
고, 남으면 장추삼까지 담을 것 처럼 맑고 영롱하게 빛나는 눈망울이 웬지
낯익어서 은근슬쩍 고개를 돌리며 장추삼이 쓰게 웃었다.
"나같은 사람 뭐하러 관심두고 그러시오, 별볼일도 없는데."
그건 자조였다.
나름대로 진지한 그의 말은 우건에의해 간단히 부정되었다.
"그건 말도 안돼요.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판단하는게 아니라구요. 그딴
소리로 말 돌릴려고 하지 말아요. 정 얘기하기 곤란하면 안해도 되지만..."
"난..."
말을 꺼냈는데 막상 할말이 없다. 흥분해서인지 모르지만 장추삼이 관심 운
운한건 누가 보아도 남자에게 할말은 아니었을텐데 그런건 상관없다는 듯
우건이 말을 잇고 있다. 사실 우건은 꽤나 감정이 고조된 상태였으니까.
"하아, 그래요. 못할말은 아니지. 잊혀지는 사랑이 어디있겠소. 그런게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였을 테니까. 내가 볼때 사랑이란 감정은 지우고
싶다고해서 백지처럼,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얗게 되는건 아닐것이오.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옅어지는 것이겠지."
"얼마나 옅어졌어요? 장형의 사랑은."
어떻게 사랑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까. 우건은 분명 장추삼에게 무리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인간사가 아니겠는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은 우연과 억지가 반 이상을 차지할테
니. 그것이 이성간의 관계라면 수치가 더 올라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성(異性)간의 교류는 감정이 이성(理性)보다 앞서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무슨 말을 듣고싶은건지... 어쨌든 한가지는 말할 수 있소. 과거때문에 미
래를 포기할 정도로 바보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거... 아까도 말했지
않소?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면 해보겠다고 말이오."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난 지금의 감정상태를 묻는거잖아요?"
알고 있다. 하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일까? 먼저 떠난건 그녀
였는데.
'비록 내가 잘못한건 많았지만...'
우건의 눈을보니 물러설 태세는 아니다. 그래, 솔직해질 때가 된거다. 얼마
나 옅어졌냐고? 백지는 아니라고 얘기했었다.
"그냥...하! 그냥... 또 하나의 그림을 그릴 정도는 되는가 보오."
정말 하기 싫은 말을 힘겹게 꺼냈다.
'오랬 동안은 하지않을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하구나.'
씁쓸한 기분으로 우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름대로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술이 없구려."
담자를 들고 일어서는데 또다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와서 장추삼은 고
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사님과 꼬마는 여기 웬일이야? 설마 나때문에 온건 아닐테고...'
"아! 거기 있었어요? 사마대가, 저기 있네요, 저기!"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호들갑을 떠는 단사민이 싫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혼자 있을날이 아닌가보다.
"오! 장형, 한참을 찾았소이다."
언제 들어도 기분좋은 음성으로 사마검군이 다가오다 이내 흠칫했다.
"일행이 계셨구려."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건이 고개를 돌려 사마검군과 단사민을 보았다.
"아! 사마... 아니지. 앉으세요. 장형보러 오신것같은데..."
그러면서도 갈려고는 안하는 폼을 보니 문득 아까 생각이 났다.
'강시였다면 줄행랑을 놓았을걸?'
  [11554]  [연재] 삼류무사-80    첨부파일 :

싱글거리며 사마검군들에게 자리를 권하는 우건이 왠지 밉지만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게 아닐까. 본능적으로 미추(美醜)에 근거해서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이란게 말이다. 또한 그는...
"술 생각이 나서 이곳을 찾은 건 아닌 것 같고, 날 찾아온거요?"
"사람이 어찌 그렇게 매정할수 있나?"
사마검군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목소리 만큼은 예술이라고 다시 한번
느꼈지만 그냥 미소로 대신했다.
"제가 또 뭘 잘못했다고..."
"잘못했지요. 그래도 근 한달을 같이 지냈는데 그만둔다는 걸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을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말아요? 어..."
종알거리던 단사민이 우건을 보고 깜짝 놀라다.
소시적에 미소년 이라고 수없이 찬사를 들어왔던 그였지만 눈앞의 인물에
비교하자니 우스개도 안되는 얘기다.
이런 아름다움을 사람들은 흔히 '천상의...' 같은 어구로 표현한다고 하던가?
"우와! 이분 형님은 정말 잘생겼네요. 안그래 장형?"
또 액면이다. 뻔히 나이를 알면서도 장형,장형 거리던 놈이 좀 괜찮은 얼굴을
보더니 초면에 바로 형님이라?
'아유, 요 자식을 그냥...'
"아우도 잘생겼는데? 중원의 여인네들 방심은 혼자서 독차지 하겠는걸?"
"하하, 형님을 보니까 여지껏 자부했던 제얼굴이 원숭이보다 좀 나은 수준
이란걸 알겠는데요? 저는 단사민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형님의 함자를 알 수
있을까요?"
"본래 단공자였군. 우형(愚兄)은 우건이라고 해."
연신 표권을 하며 서로에게 금칠을 해대는 둘의 모습이 가소롭기 그지없어서
콧방귀라도 날리고 싶은데 마침 콧구멍이 막혔는지 그 조차도 잘 안된다. 꼴
같지 않아서 무어라 한방 먹여주고는 싶은데...
'놀고있네.'
핏 하며 고개를 모로꼬는 장추삼을 보며 사마검군이 술담자를 들었다.
"사석에서 처음으로 만난는 것 같군. 내 술을 마시지는 못하지만 한 잔
따라 줌세. 받게나."
여전히 우건들은 시시덕 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복숭아 정원이라도
찾으러 일어날 것 같다. 이름은 '미남결의(美男結義)' 쯤으로 걸고 말이다.
"나는 아직 자네를 잘 모르네. 이전에 들어왔던 얘기들과 자네의 모습을
결부시키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자네와 깊은 대화 한번 나누어 보지도
못했으니 말일세"
사마검군은 자연스럽게 말을 놨는데 크게 걸리는 것도 없고 해서 장추삼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물론 곁눈질로 우건들의 웃기는 수작을 힐끔거리긴
했지만.
"이번에 실회로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자네가 그렇게 충격을
받았다고는 보기 어렵고,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사실 어이가 없었다. 동네 건달이 뭐 대단한 일을 겪었다고 강호로
나가보겠다는 건지.
말에 늘 진중한 사마검군이기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장추삼이
고담과 단사민의 첫반응을 보았다면 열받아서 십년정도 수명이 줄었을 것이다.
어쨌든 세상경험이 별로 없는 사마검군에게 장추삼이란 존재는 퍽이나
특이했다. 있을땐 몰랐는데 없으면 왠지 허전하고 별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주위에 사람들을 모으고, 지랄맞은 성격 같으면서 다시 돌아보면 꽤 괜찮은
인간인것도 같고.
'하여간 의문투성이야 이친구는!'
"기왕 결심한 일이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겠네. 그리고..."
품을 뒤적이던 사마장군이 작은 비단주머니를 하나 꺼내서 장추삼에게 건냈다.
"뭐요, 이게?"
"당소저가 전해주라고 하더군. 그녀는 무언가 바쁜일이 있는 것 같았네."
'바쁜일?'
주머니에서 나온건 곱게 접힌 종이와 실에 매달린 빨간색의 새모양 노리개
였다.
'윽! 당소저는 날 뭘로보고 이런 노리개를...'
-추삼!
동생같아서 이름한번 불러보고 싶었어요. 기분 나쁘지 않지요?
그래요, 뭐든 털어버릴 일이 있으면 확 털어야 해요. 방구석에 처박혀서
머리를 쥐어 짜봐야 헛일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무림을 보겠다고요, 좋지요.
요즘 세상은 칼만들면 무림인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는게 당연한 것처럼
되었지만 아직도 진정한 의(義)와 협(俠)이 있고, 인정이 있고 멋이 있는곳이
무림이랍니다. 이런건 백번 말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직접 보고,
부딛쳐야만 느껴지니까.
세상은 넓어요. 얼마나 넓은지...
나역시도 작은 표국에서 벗어나 옛날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유로운
인생을 즐기고 싶답니다. 비록 못먹고 대충대충 새우잠을 자더라도 내일은
또 다른 무엇이 나를 기다릴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면 그런건 문제도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나갈수가 없어요. 왜냐구요? 여기서 꼭 매듭지어야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 일' 이 생각날때면 고개가 자꾸 처지곤 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곤해요.
'힘내자. 당소소! 이깟걸로 뭘!'
이렇게요.
많이 보고, 접하고, 직접 부딛치세요. 그리고 느껴봐요. 무림이 어떤곳이고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이예요. 그 뒤에 고민하는
거예요.
'나에게 있어서 무림은 어떤 의미고 어떤 삶을 걸어야 하는가'
에 대해서 실컷 생각하는 거예요. 술을 마시고 소리도 질러보고 고래고래
노래도 불러봐요. 진정으로 치열하게 번뇌해야만 좋은 결말이 도출되니까요.
결국엔 찾게 될꺼예요. 찾게되면 그때 양양으로 돌아와서 큰소리 한번 질러요.
"당소저, 술한잔 사시오!'
그럼 냉큼가서 밤새도록 술상대를 해줄게요. 밤새도록 얘기를 들어줄게요.
그땐 내옆에 누군가도 같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말이 길었어요. 무엇보다 유의할 것은 몸보중 이예요. 천하를 얻어도 건강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듯이 어떤일이 있더라도 건강을 유의하고 운동을
게을리 하면 안되요. 그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게요.
                                                                당소소.
추신, 동봉한 물건은 잠깐 빌려주는거예요. 그러니 잘 사용하고 돌려주여야
해요. 혈봉황(血鳳凰)은 비록 작고 예뻐보이나 당문 역사상 가장 무서운
암기중 하나랍니다. 실의 줄을 가운데 손가락에 감고 던져서 상대를
격상시키는 무기인데 무공이 다소 떨어지는 장공자에게 많은 힘이 될 거예요.
원래 이 물건은 장공자에게 주머니를 건낼 남자에게 주려했는데 목석같은
양반이라서 그런지 어렵네요.
편지를 접으며 뚫어지게 사마장군을 바라보자 그가 의아했다.
"아니, 왜그런가?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가?"
"아니올시다."
'세상에, 중원 최고의 미녀가 이토록 뜨거운 마음을 보내고 있는데 저 양반
말하는 꼴 좀 봐! 뭐 무슨 문제가 있느냐구?  어이구 답답해!'
그 마음을 탄식 한 번과 한 잔 술로 대신했다.
"그럼 우리도 가봐야 겠네. 몸성히 다시보세. 가자 사민아."
"예엣?"
한참을 신나게 주절거리던 단사민이 깜짝놀라 사마검군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지금의 분위기가 - 우건이라는 존재겠지만 -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지금
일어나고 싶은 생각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도 청춘인데 놀고 싶었다.
매일매일 검술수련도 좋고 참선도 좋지만 이런 자리에서 얘기하며 웃는것도
좋다!
"대가. 자, 잠시만 더 있으면 안되겠습니까?"
"그럼 넌 더 이따 들어오너라."
사마검군이 벌떡 일어나자 황급히 뒤따라 일어났지만 단사민 표정엔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더 계시지 않고..."
"아니야. 할말도 다 했고, 전할 물건도 전했으니."
단사민의 내심을 짐작해서 장추삼이 한마디 해주었으나 사마검군은 성큼
걸음을 옮겼다.
얼핏보면 사마검군과 하운은 무척 닮은꼴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도사풍의 인물들은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 었다. 지금의 경우가 아주 좋은
예인데 사마검군은 무척 완고하다. 자기완결형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까?
그에 비해 하운은 무척이나 폭이 넓다. 모든걸 바라보려 하며 어떤것이든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뱉아낸다.
시간나면 고서점으로 놀러오라는 말도 단사민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한 듯
처연한 표정으로 그가 가자 좌석은 둘만이 남아 어색한 상태가 되었다. 조금전
까지도 웃고 떠들던 우건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겨있었고 뭐라 말을
걸려했던 장추삼도 이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홀로 술을 따라마셨다.
얼마나 흘렀을까?
"가야겠어요. 피곤하네요."
갑자기 우건이 일어섰다. 그의 입가를 보니 무언가 고민하던 것을 이제야
해결했다는 듯, 또는 결정지었다는 듯 자신에 찬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도 갈거요. 여기서 더 먹었다간 집 조차도 찾아가기 어려울 것 같소."
어느정도 취기가 오른 장추삼도 기분좋게 노상객잔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정도면, 이런 술자리를 가졌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갑시다. 기왕 방향도 같은데."
  [11590]  [연재] 삼류무사-81    첨부파일 :

자다가 억지로 일어난다는 것처럼 짜증스런운 경우는 없다. 아무리 마음 좋
은 군자라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인상이 구겨지는건 어쩔도리가 없고 성격이
좀 안좋은 사람은 쌍소리가 튀어 나오기도 한다. 적당히 들어간 술과 안
돌아가는 머리를 나름대로 굴린탓에 심신이 노곤해질대로 노곤해진 장추삼
이 단잠에 빠져서 기분좋게 음냐거리고 있을때 들린 그 소리는 비록 아름다
웠지만 일단은 싫었다.
(“장형, 장형 ! 잠깐 일어나시오!”)
' 우웅... '
(“ 장형 ! 일어나라니까 !”)
‘웅... 뭐야?’
절대로 눈뜨기 싷어서 어떻게든 개겨보려 돌아눕는데 갑자기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뭐야? 전음이야?’
세상에, 전음으로 잠을 깨우다니... 눈이 번쩍 떠졌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전음으로 잠을 깨우는 사람은 정신이 나갔거나 매우 절박한 사정이 있을 것
이다. 그래도 일어나기는 싫어서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데 제차 전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안 일어난다면 평생 그대를 저주 하겠어요. 좋은말 할때
눈뜨는게 좋을걸? 일어나욧!”)
' 아이고, 시끄러워. '
우건의 목소리였다. 무공을 한다는 것 쯤은 짐작을 하고 있었으니 별로 놀
랄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헤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들 다 자는 이시간에
올빼미처럼 사람을 부르느냐 이거다.
‘모르는체 하고 그냥 더 잘까?’
정말이지 파곤했다. 육체적으로 하는 노동보다 정신적인 그것이 주는 피로
도는 느껴본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만큼 부담감을 준다. 이 삼일을 그
렇게 보내니까 사람꼴이 영 말이 아니다. 오늘만큼은 푹 자보려고 했는데.
("진짜 안 일어나네?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흥! 그 이후에 일에 대
해서 전적으로 장형이 책임져야 할꺼에요. 내가 뭐 할일이 없어서 이런 한
밤중에 숨바꼭질 하듯 장형을 부르는줄 알아요? 알고보면 나도 바쁜몸이라
구욧!“)
' 아이... 진짜. '
어기적어기적 일어나서 대충 옷을 입고 밖에 나왔다.
' 어딨는거야? '
(“아휴, 잠꾸러기! 이제야 일어난거에요?  좋아요, 오늘 한번은 넘어가 주
도록 하죠. 하지만 다음번에도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킨다면 , 흥! 가만안둘
꺼에요!”)
' 글쎄, 어딨냐구? '
큰소리도 못내는 것이 부친과 정혜란이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있을 것이다
.
“ 아!... ”
집뒤의 공터에서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곳과 집까지는 어림잡아도 십여장,
전음을 할줄은 모르나 들은 풍월로 얘기하자면 대략 오륙장 거리까지 전음
을 전달하는 수준을 일류로 본다고 했는데....
‘멀리서도 사람을 부르네. ’
과연 공터에는 우건이 서 있었다. 달빛을 마주하고 서있는 모습은 남 ,여
라는 구분을 떠나서 누구나 감탄을 자아내게 할 아름다움으로 초라한
공터를 빛내주었다.
‘ 사람하나 서있는 것 만으로 허름한 공터가 궁궐보다 화려하게 보이는 구
만. ’
칭찬하기는 싫고해서 어색한 헛기침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허험,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슨 볼일이 남아서 날 부른거요? 우형도
꽤나 피곤해 하는 것 같던데. ”
망연히 하늘을 바라보던 우건이 고개를 돌려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 눈망
울의 아름다움이란!
당소소의 아름다움은 농염하면서도 세월의 무게가 실린 기품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건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란 청순하면서도 세상에 있을
것 같지않은 신비감이다.
“장형, 아니 장공자.”
호칭도, 목소리도 변했다. 억지로 내리누르던 목소리를 본래의 음성 그대로
실어보내니 이른아침에 풀잎에 맺혔다가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이슬방울이
 따로 없었다.
‘ ! ’
아무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장추삼을 한번보고 다시 하늘가
로 눈을돌린 우건이 탄식을 지었다.
“ 하아, 사실 나는 개인감정 같은건 가져서는 안돼는 몸이었어요. 처음 술
자리에서 말했었잖아요, 해야할 일이 있다고... 오늘 만약 장공자가 모두
잊었노라고 했다면 차라리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지낼수도
있었어요. 자신의 과거를, 그것도 사라이란 추억을 그렇게 간단히
지워버릴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과 앞으로 무얼 얘기하고 무얼
공유하겠어요? ”
여전히 장추삼은 말이 없었다. 완전히 깨지 않아서 약간은 흐리멍텅 하던
눈빛도 제자리를 찾았고 정신도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있었으나 일단은 우건
에게 기회를 주었다.
슥.
우건이 늘 쓰고있던 유생건에 손을 가져갔다.
‘ ! ’
잠시 망설이더니 장추삼을 한번 보고는 눈을 질끈감고 풀 듯이 유생건을 벗
었다.
차르륵.
“ 아... ”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 유생건 속에 감춰져 있던 그, 아니 그녀의 삼단같은
머리가 세상밖으로 외출을 하자 본래의 아름다웠던 얼굴과 하나가되어
인세의 그 누구도 감히 구경해 본적없는 미의 극치를 이루어냈다.
여전히 눈을 감고있는 우건에게 꽤나 조심스럽게 장추삼이 말을 했다. 단지
아름다움 때문이라면 이렇게 조심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아름답구려, 여자라는거....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이정도로 아름
다울줄은....”
‘? ’
“알았다구요? ”
꽤나 큰 결심으로 머리를 풀었는데 이자의 반응은!
“언제 알았어요? 언제에욧? ”
‘에구, 그냥 앞에 말만 할걸. ’
방금전 까지만 해도 선녀강림 이었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원녀재림이다.
잡아먹을 듯 장추삼을 노려보던 그녀가 무엇이 그리도 분한지 어깨마져 부
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자리에 폴짝 주저 앉았다.
' 에구... '
졸지에 좋던 분위기는 다 날아가고 공터에 남아있는건 어정쩡한 두 남녀와
황량함이 전부였다.
“ 미안... 하오. 그냥 가만히 있는건데... ”
여전히 묵묵부답, 쪼그려 앉아있는 그대로 반응이 없어서 장추산도 같이 쪼
그려 앉았다.
“ 그냥 알게 된거요. 그러니... 어? ”
'또 우는거야? 하... '
청승맞은 표정은 혼자서다 보이겠다는 듯 울고있는 우건을 보자니 앖는 미
안함까지 저절로 생겨날 판이다. 무언가 꺼림직 하기도 했다. 그것의 정체
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자가 여자를 울리는건 썩 보기 않좋다.
“미안하오, 소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한 건 절대로 아니었소. 본래 나
란놈은 생각나는데로 말을 뱉어내서 종종 오해도 사고 그런다오. 이해해주
시오. ”
그래도 대답이 없다. 어지간히 서운했나보다.
“기분이 많이 상했구려 그럼 이렇게 합시다. ”
그는 우건의 손목을 잡아서 자신의 가슴팍에 대었다.
“내가 얄밉소? 그런 기분이 풀릴때까지 때리시오. 기꺼이 맞아주겠소. ”
우건이 조용히 손목을 빼서 옆의 바위에 장력을 날렸다. 물론 고개는 쳐박
은체로.
피슛.
꽝!
“허걱! ”
아이만한 바위가 그녀의 손짓 한번에 산산조각이 났다. 식은땀이 한방울 흘
려내렸지만 여전히 자신감 어린 목소리로 장추삼이 호기롭게 외쳤다.
“소저의 기분이 풀린다면 이깟 가슴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치시오, 마음
껏쳐요! 후련해질때까지 때려도 좋소이다! ”
“관둬요. 피하는 것 빼면 시체면서. ”
울면서도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우건이 말했다.
' 살았다... 엥? '
이번엔 장추산이 의혹의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승세는 이미 그녀에게 넘어
가 있는 상태라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우건이 말했다.
“다 봤다구요, 당신이 싸우는 모습, 이상한 보법으로 피하기만 하던걸요?
그게뭐야, 박력없게. ”
그녀가 보았다면 모추와의 싸움일 것이다.
“그랬구려. ”
이제 다 울었다는 듯 ' 앞으로 그러지마요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못
헤아려 주면 나중에 고생해요 ' 어쩌구 하며 우건이 일어나자 그도 엉거주
춤 일어났다.
“어때요, 그냥 볼만은 한가요? ”
머리를 뒤로 제치며 그녀가 함초롭게 웃었다. 당연히 볼만했다!
이게 어디 볼만하기만 한가!
“최고요! ”
엄지손가락을 쭈욱 내밀어서 감탄의 표현을 대신했다. 말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봤자 그녀의 미에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 당신을 처음봤을때 누구나 한 목소리로 얘기하던 동네건달은 어디에도
없었고 내 눈에는 삶에대해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 청년이 앉아 있었어요.
또다시 보았을때는 강한 무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순진함이 좋았고....
마지막은 아까 얘기했지요. ”
그녀가 정추삼을 뜯어 보았다. 속눈썹 개수라도 세어 보겠다는둣.
“저는 아직 당신을 잘 몰라요. 당신도 역시 그러하겠지만... 우리 이렇게
 해요”
그녀가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뭐요, 이거? ”
“걸어요! ”
애들도 아니고, 어쩌구 하던 장추삼이 우건의 냉엄한 눈길에 재빨리 손가락
을 걸었다.
“약속하세요. 당신이 중원으로 나가서 조금 더 큰 어깨가 되어 돌아오기
로. 제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돌아 오겠다고 말이에요.
그때까지, 그때까지 서로를 더욱더 생각해 보기로. 만약 우리다시
만났을때, 그때도 서로의 마음이 원한다면 우리의 얘기를 시작해봐요.
당신이나 저나 아직은 젊잖아요. ”
' 하! '
이렇게 마음에 드는말이 또 있을까? 그녀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미래를
말하고 있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속에 남자의 성장을 바라고 있다. 또한 그
것은 장추삼이 바라고 있는 스스로의 내일이다.
왈칵 껴안아주고 싶지만 겨우 자제하며 그가 입을 열었다.
“약속하리다. ”
“좋아요. ‘
손을 빼고는 그녀가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허리에 손을 척 얹고는 괜시리
턱을 주욱 뺐는데 딴에는 고고해 보일려고 했는지 모르나 그냥 귀여워 보였
다.
“ 당신은 지금 큰 행운을 잡은거에요.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무
림삼화중 한명이란걸 알아야 해요. ”
‘ ! ’
무림삼화!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명의 여인, 근데 중요한건...
' 난 당소저 외에는 잘모르는데? '
장추삼은 나머지 둘에관해 아는것이 전혀 없다는데 있었다.
수절 당소소야 너무 유명한 얘기고 화산의 가장 아름다운 꽃 이라는 검절
조소령이 그 둘째요, 천산에 있는데 볼수는 없는 꽃이라 하여 비절 이라 불
리는 이름모를 여인이 바로 우건을 일컫는 말이다.
“삼화든 뭐든 중요한게 아니지, 소저는 그런거에 들지않아도 충분히 아름
다우니까. ”
“흥! 그럼말로 여자를 꼬시나 보지요? ”
콧방귀를 날렸지만 싫지만은 않은 얼굴로 우건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무서운 오라버니가 계세요. ”
‘난 더 무서운 사람 많이 겪었네. 북궁 얼음덩이가 얼마나 무서운줄 알아
? ’
“나중에 뵙게되면 조심해야 할꺼요. ”
“알았소. 가슴깊이 새겨두리다. ”
내심이야 ‘제깟것이 ’지만.
그윽한 눈망울로 장추삼을 바라보던 우건이 신형을 둥실 띄웠다.
“이만 갈께요. 몸성히, 제발 몸성히 돌아와줘요. ”
그녀가 사라지자 공터는 삽시간에 을씨년스런 모습이 되었다. 사람 한명이
들고났을 뿐인데...
‘마치 꿈만 같구나! ’
선녀처럼 하늘로 오르던 우건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방금전까지의 일은
무언가 비현실적으로 장추삼에게 다가왔다. 환상의 꽃길을 걸어도 이보다
더 몽환적일까.
‘어쨓든 무언가 시작된 것인가? ’
그것이 사랑인지 인연인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오년동안 꽁꽁 봉인해놓은
무언가가 이제 터져 나왔다는것 뿐, 아직 미래를 말하기는 이르다.
‘ 일단은 더 자자...’
뒷머리를 긁으며 장추삼이 집으로 향했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접했기
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전에 좀 자야겠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발걸음 발걸음마다 우건의 영상이 겹쳐졌다.
  [11672]  [연재] 삼류무사-82    첨부파일 :

점심을 차려놓고 정혜란이 집을 나선건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이 들었던
장추삼이 강호로 나가는데 가만 있을수만은 없어서였다. ‘ 주인집 아들 ’
이었다면 떠나든 말든 신경쓰지 않아도 그만이었지만 전혀 ‘ 주인집 아들’
같지 않았기에 이렇게 시장에 왔다.
‘에구, 장가가가 괜한 객기로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장대인 아저씨
한테 피붙이라곤 하나밖에 없으니, 대사형께서 같이 가신다니까 그나마
안심이 좀 되기는 하지만. ’
삼류무사라고 강호유랑을 떠나지 말란법은 없다. 무공이 좀 딸리는게 문제지.
의협심 많은 장추삼이 괜히 무림인들간의 분쟁에 끼어들었다간 맞아죽기 딱
좋다고 생각해서 정혜란의 걱정은 탄식으로 바뀌었다.
‘ 내가 참으로 무심했구나, 제대로된 장법 한초식이나 권법 하나라도
어떻게든 둘러대고 가르치는 것인데, 언제나 옆에 있을것만 같아서 자연히
마음을 놓았었어. ’
이런저런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새 시장이었다.
‘쌉니다, 싸요! ’ 라든가 ‘ 이번기회에 ’부터 여러 가지 상인들의
호객소리와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과 고객들의 분주한 발걸음 속에 그녀도 아
까의 일은 잊기로 했다. 후회해 봐야 무었하겠는가, 차라리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맛깔스럽게 만들어 한상 차려두는게 낳지. 그래야 그녀의 마음도 좀
편할꺼 같고 말이다.
‘어디보자.... 장가가는 돼지고기 볶음을 좋아했었지? 장대인께서는 잉어회를
즐기시니까 이따가 어물전은 들르기로 하고... 음 술은 뭘 준비할까?’
바삐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양손에 묵직한 감촉이 왔다.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체워지지 않았다. 조금 더 살것이 있을 것이다.
검을 잡은지 올해로 십 육년, 천애고아였던 그녀의 인생에서 혈육이라고 부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화산내의 식구들은 '사(師)' 자의 의미가 너무 강했다.
귀찮고 창피스러운, 그저 '임무' 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시비의 일을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혈육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마음속은 물론 호칭조차도
시비라고 단 한번도 부르지 않는 부자(父子)에게서 말이다.
'빠진게 있을거야. 빠진게...'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웅얼거리던 정혜란이 사람들과 부딛쳤다. 아직은 시장이
바빠질만한 시간은 아닌데.
'뭐야... 어?'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대 여섯의 여인네가 뭉쳐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얼씨구?'
쉽게 말하면 뭉롱한 상태라고 할까. 개중엔 '어쩌면 좋아' 까지 연발하는
처녀도 있었다.
'그래, 뭘 어쩌면 좋은데?'
정혜란이 키가 크다는건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여럿이 뭉쳐있다고 해봐야
그녀의 콧선대에도 미치지않는 높이라서 굳이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지
않아도 그녀는 소란스러움의 원인을 볼수 있었다. 그녀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건 패옥을 파는 노점에서 노리개를 고르고있는 남자였다.
'뭐야... 어!'
후리후리한 키와 긴 장발로 옆 얼굴을 가리고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인상이 낯이있어서 그녀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이곳 양양에서 아는 남자라고는
장씨 부자와 대사형 하운, 시장에서 물건파는 아저씨들 정도. 그리고...
'장발 꺽다리!'
"이봐요, 장발 꺽다리!"
여인네들의 군집을 거의 파괴시키며 그녀가 장발청년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 ? '
자신을 부르는 것 같긴 한데 누가있어서 그런 괴상한 호칭으로 소리칠까? 다소
의아한 얼굴로 북궁단야가 고개를 돌렸다.
"아!"
"아는 무슨 아예요. 노리개 고르고 있었어요? 정인(情人)에게 주려나보네?
누군지 모르지만 좋겠다!"
좋겠다는 부분을 과장되게 늘이며 정혜란이 싱글거리자 그가 다시 패옥에
눈길을 주었다. 생전에 이런걸 골라본적이 없으니 뭘 사야 좋을지 모르겠다.
"동생 줄거요."
왜 그순간 기분이 좋았을까. 하도 수유지간에 든 상념이기에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정혜란이 종알거렸다.
"그런건 여자가 골라야지. 이런 만남도 인연은 인연일테니 내가 골라줄게요.
동생은 어떤색을 좋아해요? 설마 당신처럼 무뚝뚝하진 않겠지요? 원판은
당신따라 간다면 걱정할거 없겠고, 좋아하는 동물은 뭐예요? 왜 멍하니
있는거예요? 에구, 관둬요. 내가 직접 고르는게 더 낫겠네. 어디보자..."
정인 줄거라면 절대 골라줬을리 없다!
"아니, 이보시..."
"됐네요. 여자맘은 여자가 잘 안다구요 내가 지금이야 이런꼴이지만 그래도
화산쌍화라고...읍!"
열심히 종알대던 그녀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화산....쌍화?'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 명호다. 화산제일화라고 조소렵에 관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그 명호는 화산장문 구양승하고 정혜란밖에 모르니 북궁단야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생소할 수밖에 없지만 지레 놀란 그녀가 토끼눈이 되었다.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라 어쨌든 내가 골라줄게요. 음, 이건 좀 싸구려로
보이고, 이건 색깔이 좀 그래. 이건..."
'이것, 참!'
갑자기 끼어든 정혜란으로 인해 주위에 몰려있던 여인네들 사이에서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뭐 대부분 반응은 '재 뭐야?' 나 '아유 재수없어, 키만 큰게!' 로 압축
되어지는 부러움 반 투덜거림 반 이었는데 전혀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정혜란은 노리개 고르는데 열중이었다. 구경패중 얼굴에 자신이 있던 여인네
하나가 괜시리 정혜란 앞에 섰었는데 그녀는 곧 꼬리를 말고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혜란의 눈빛은 사람의 것이라고 부르기 어려웠었으니까!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던 북궁단야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정혜란이 손에
비취노리개 하나를 들고서 빙글 돌아섰다.
"어때요?"
"음!"
확실히 여자가 낫다고 생각했다. 반시진을 헤매도 갈피를 잡기 어려웠는데
그녀는 일다경도 안되서 훌륭한 장신구를 찾아낸 것이다. 색깔도 모양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과연... 고맙소이다."
계산을 치르고 가려는데 여전히 정혜란의 시선이 느껴져서 북궁단야가 고개를
들렸다. 그제서야 정혜란의 양손 가득 식료품을 발견했다. 저 정도면 제사나
잔치상에 어울리는 양이다.
'힘도 좋군!'
그가 어찌 정혜란을 알겠는가. 그녀는 화산에서도 통크기로 따지자면 누구에게
도지지 않는 여자였다. 양이 많다고? 아직이다!
"우리 장가가께서 강호유람 가시잖아요. 오늘 한번 배터지게 먹여줄라고요.
근데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 있어요? 진짜 실망이야."
"내가 뭘 말이오?"
'실망' 처럼 기분나쁜 소리도 없다.
"목소리 깔아봤자 하나도 안무서워요. 그래, 없는 시간 쪼개서 동생선물 골라
줬더니 과연 고맙소이다가 다에요? 선물을 안골라줬어도 그래, 아녀자가
이렇게 짐을 많이 들고 있는데 나몰라라 하고 갈려고 했어요? 세상 인심
야박해졌지."
'하..'
잠시 생각하던 북궁단야가 노리개를 품에 넣고 손을 내밀었다.
"주시오. 댁까지 들어다 주겠소."
"아직 집 안가요. 장볼거 더 남았다구요."
"아니, 이보시오. 소저!"
"따라와요."
양손에 들고있던 짐을 모조리 북궁단야에게 건내주고는 시장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옯기는 정혜란은 빙글빙글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야했다.
"하아..."
막연히 서있던 북궁단야가 고개를 한번 젓고는 터덜터덜 걸음을 옯겼다.
이런게 코를 뀐 상태라고 한다나?
"뭐예요? 사내가 그렇게 동작이 굼뜨면 나중에 처자식 어떻게 먹여살려고
그래요?"
"가고있소."
"장만, 잠깐! 생각해보니 오리를 안산 것 같아. 내가 또 오리요리라면
자신있지. 어서와요!"
"..."
그녀는 꽃밭에 놀러온 나비마냥 시장구석구석을 누볐는데 북궁단야도 처음으로
이런시간을 가지는 터라 내심 좋아했다.
"에이 비싸요. 조금 더 깍아주세요. 아님 딴 가게 갈거예요."
"이것봐 소저. 우리도 먹고 살아야하지 않겠나. 지금 그 가격도 완전 원가라고
원가! 손해를 볼수는 없지 않아?"
"딴 데 가야지 오리 파는 집이 여기 하난가...?"
"알았네! 알았어! 거 시원시원해 보이는 소저가 동전 일문 깎겠다고... 내가
손해를 보고 말지!"
푹풍검 정혜란이 시장에서 가격 흥정을 한다! 선머슴아 같은 그녀의 성격에
어느정도 노련함까지 가미되자 능란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런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던 북궁단야가 문득 정혜란을 불렀다.
"소저!"
' ? '
"소저는 장형을 퍽이나 좋아하는구려."
동생이 뭔지...
"그럼요, 내가 얼마나 장가가를 좋아 하는데!"
북궁단야의 얼굴이 싹변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혜란은 여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사실 고아예요. 피붙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죠. 그래서 더욱 강해야만
했어요. 정신적이든 외적이든 말이예요. 그거 알아요? 여자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려면 왠만한 독심(毒心) 가지고는 어렵다는거..."
몰랐다. 활기차고 당차보이는 내면에 그런 사연이 있었는줄은.
"그래요, 그렇게 살았어요. 남들도 인정하는 정도로 노력했어요. 하하, 잘은
몰랐는데 그게 힘들었었나봐요. 뭐, 어쨌든 그렇게 살다가 어떻게 장가가의
집에 오게 됐지요. 근데 이분들은 다르더군요,."
장유열 부자를 말하는 것 이리라.
"세상에 시비더러 소저라고 부르는 사람이 중원 천지에 어디있었어요? 그 집에
머물면서 단 한번도 자존심이 상한적이 없어요. 그분들은 정말로 절 가족처럼
대해주고 있어요. 장가가요? 좋지요. 언젠가 모든게 잘 해결되면 꼭
결의남매를 맺고말 거예요."
처음 물었던 의도마져 잊고 그녀의 얘기를 듣던 북궁단야가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정혜란이란 여인, 첫인상과 달리 건전한 사고와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어?"
북궁단야의 미소... 그거 마력이다. 거의 치명적이라고 부를 정도다. 좀처럼
보기 어려워서 그렇지.
'이런 젠장... 내가 왜 이러는거야!'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퍽!
'크윽!'
오른손으로 북궁단야의 가슴을 한번 치며 정혜란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봐요, 당신도 웃으니 그럭저럭 볼 만 하잖아요. 괜히 무게만
잡으려 하지 말고 자주 웃도록 해요. 남자가 경박한건 문제지만 너무 무게만
잡아도 땅속으로 파고든다구요."
장난이라고 친 것 같은데 장난이 아니다. 당황한 정혜란의 손에 힘이 좀
가해졌으리라.
"이번엔 절루 가봐요, 절루."
키큰 두남녀는 열심히도 시장을 누볐다. 한번도 이런 시간을 가져본적 없었던,
사문과 가문이란 이름아래 청춘을 저당잡혀 있던 그들 이었기에 정혜란의
웃음소리가, 북궁단야의 미소가 더 맑고 싱그러웠는지도 모르겠다.
  [11841]  [연재] 삼류무사-83    첨부파일 :

하운의 동행제의에 별달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사연많은 남자라는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최소한 이 사람은 남을 어떻게 해볼려는 심산같은걸
가질 인물이 아니다.
사실 환영이다.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테니까.
"근데 하형은 뭐땜에 유람을 가는거요? 나야... 쩝, 나도 특별한 이유가
없구나."
말하다 멋적어서 한번 웃는 장추삼은 하운의 표정이 전에없이 굳어있다는데
놀랐다. 누가 있어 이렇게 올곧고 마음선한 인물의 심기를 건드렸단
말인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이에 맞지않는 포용력으로 감싸안는
하운인데 말이다.
혹시...
'실연?'
가능성 있다. 아주아주 가능성 많다. 보통 이런 사람들이 한번 마음 아프면
진짜로 오래간다. 술먹고 주정을 부리거나 하는 해소수단도 없기 때문에
그저 속으로만 삭여야 한다. 혼자서 모든걸 반추해서 지우거나
극복해내야만 한다는거... 힘든일이다.
'아, 이런거는 단도직입적으로 못 물어보는데... 하형이 술이라도 즐긴다면
어떻게 자리를 마련해서 말할 자신은 있는데.'
혼자서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장추삼을 돌아볼 겨를이 하운에겐
없었다. 장추삼의 생각대로 하운은 올곧고 마음이 선하다. 보통
이런 사람들이 한번 열받으면 진짜로 무섭다.
그리고 하운은 지금 화가 나 있다. 그가 백무량에게 건네받았던 쪽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기록부와도 같았던, 몇건의 사례와 화산삼로
- 즉선검인이겠지만 - 의 짧막한 소견과 거론된 단체 하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심하구나, 하운아! 너는 강호출행이란 한마디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지
않았더냐. 그러고도 스스로를 화산의 대사형이라 자처할 수 있겠느냐,
한심하구나!'
솔직히 강호로 나가라는 말에 아무생각없이 기뻤었다. 그 순간의 감정이
왜이리 부끄러운지.
으드득.
자책과 분노의 감정은 그의 턱 근육에 작용했고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엥?'
깜짝놀란 장추삼은 또다시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이를 간다는건 어떤
대항에 대한 적개심의 가장 솔직한 표현일테고 지금 그의 입장에서 분노의
상대라면...
"어허험, 내가 뭐 아는게 많아서, 허험, 그러는게 아니라, 허허험, 그 뭐냐
여자라는게 워, 원래, 험, 왜이리 말이 안되냐, 하여간 간사한거요. 나도
뭐, 허험..."
도데체 이게 무슨소린가? 하운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무시하고 장추삼이
버벅이면서도 끝끝내 말을 이었다.
"... 해서 잊는게 낫소. 우린 아직 젊잖소. 에구, 내가 무슨 말을 한건지."
'이런!'
그제서야 장추삼이 떠듬거리면서 지껄인 말의 요지를 깨닫고는 하운은
고소를 머금었다. 엉뚱한건 알았지만 이렇게 황당한 면이 있었다니.
"나 실연같은거 안했소. 장형이 뭔가 착각한것 같은데..."
"숨길필요 없어요. 뭐 그리 창피한 일이라고 혼자서 고민하려 하오? 자랑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그런 경험이 있어봐서 잘 알아요."
"정말 아니라니까."
"생각보다 고집이 세군. 좋소, 본인이 그렇게 감추려고 한다면 더 이상
캐물을 맘은 없으니 나중에 안정이 되거든 말해요. 혹시 알겠소? 내가
도움이 될지."
'하...'
졸지에 실연자가 된 하운이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묵묵히 말을 몰았다.
북궁단야의 말이 옳다. 이런 남자는 강호와 어울리지 않을것이다. 온갖
귀게와 음모가 난무하는 무림에서 본것을 그대로 믿고, 느끼고, 생각한 바
또한 가감없이 말로 토해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무림처럼 현실
논리가 정확히 반영되는 곳은 없다. 평화기 였다면 또 모르지만 지금은
삼백년만에 들이닥친 격동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하운이야 어떤 생각을
하고있든 장추삼은 여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표정에 대고 뭐라 말하겠나. 그냥 실연한 사람이 되고말지.'
동네 어귀까지 오며 그들은 한마디도 안했다. 장추삼은 하운의 아픈마음(?)
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였고 하운은 할말이 없었다.
기실 둘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혼자 갈걸.'
그 모습이 북궁단야로는 의외였으리라.
"어째 표정들이 않좋군."
"어?"
"아... 북궁형? 여긴 왠일이시오."
관도로 통하는 초입에서 말을타고 서있는 북궁단야는 여전한 얼굴로 둘의
놀람을 무시했다. 그도 역시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그건 숨겨야할
부분이고 일단 해야할 일이었다.
"세상을 좀 보려고..."
동시에 하운과 장추삼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정도의 의미를 파악못할
바보들은 아니다. 무언가 껄끄러운 것을 만지고 있을때의 찝찝한 표정이
스친이도 있었고 백만원군의 출발보고라도 받은듯 화색이 돈 이도 있었다.
"뜻밖이오, 정말 뜻밖입니다. 나야 북궁형과 동행한다면 그보다 든든한
일이 어디있겠소, 환영하오."
하며 장추삼을 휙 돌아보니 그곳엔 석달을 굶은 똥개가 한마리 앉아
있었다.
'싫어!'
물론 절대 입밖에 내지 못했다. 아니, 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얼음덩어리의 눈빛에서 전에없는 스산함을 느꼈다. 특히 자신을 볼때는
그 강도가 몇곱절은 배가 된 상태로 말이다.
'세상에, 저 표정을 보니 사람하나 잡기 쉽겠군. 북궁형이 장형에게 뭐
기분 나쁜거라도 있나?'
하운까지도 눈치챌 정도였으니 긴 말이 필요없으리라.
보자마자 대뜸 인상을 구기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근데, 근데
말이다. 웬지 몰라도 반항할 수가 없다. 억울하지만, 원통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믈스믈 기어나오는 어떤 감정때문에 감히 대들지 못하고
엉뚱하게 눈을 내리깔게 된다.
"기분 나쁜가?"
말투는 물음인데 억양은 그런게 아니다. '너 여기서 한마디라도 뻥긋하는
날엔 죽음이야'가 따로 없다. 전에도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이 얼음덩이만
보면 어쩐지 주눅이 든다.
"아니... 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횅하니 돌리고 선두에서 천천히 말을 모는
북궁단야의 등판에 장추삼이 무언의 주먹질을 해댔다. 속으로 오만
상소리를 곱씹으면서.
("장형에게 무슨 섭섭한 감정이라도 있으시오? 아까 우리더러 표정이
안좋아 보인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북궁형의 안색은 더없이
굳어있다오."
하운에게 이 둘의 관계는 더없이 재미있다. 세상에 거리낄것 없다는 듯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할말 다하는 - 심지어 절대오존중 최강이라는
적미천존도 늘상 도매급으로 씹힌다 - 장추삼이 북궁단야라면 저승사자보다
무섭고 어려워서 늘상 꼬리를 마는것도 그렇고, 냉막하지만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기에 표정에 변화가 거의 없는 북궁단야가 장추삼만 보면
쥐잡듯 인상쓰는 것도 웃긴다. 정말 재미있는건 그러면서도 북궁단야가
장추삼에게 쏟는 관심도이니...
'하연간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야."
내심 북궁단야도 미안한 것이 기분나쁜 일과 하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공연히 그가 나서는 것이다. 원래부터 이것저것 잘 챙기는 성격인건
알지만 하운도 사람인 이상 얼굴 굳은 사람과 같이 있는다는건 분명 피곤한
일일 것이다.
("왠만하면 기분 풀지 그러시오, 동네도 벗어나기 전에 손발이 안맞으면
나중에 더 힘들어지지 않겠소. 연장자의 입장에서 북궁형이 마음을 푼다면
얘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소이다.")
잠깐 하운을 돌아보고 북궁단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번 맞는 소리다.
저 멍청한 놈이야 강호를 보네, 무림인들을 겪겠네 하는 팔자 편한 목적의
여.행.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이건 유람같은 거랑은 거리가
멀다. 척 보기에 하운역시 자신과 비슷한 목적의 행로인것 같고.
앞으로 어떤 위협과 난관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무공에 대해 절대적이라고는 말 못해도 어느정도 자신이 있는 그 였지만
자만은 금물이다. 또한 무림은 너무나 거대하여 드러난게 감춰진 것에
삼분지 일도 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이런 험로를 목전에 두고 일행같지도
않은 일행이지만 장추삼과 얼굴을 붉히는건 여러모로 좋지않다.
'그렇긴 그런데...'
너무 기분이 나쁘다!
어떻게든 풀어야 겠다. 이대로 넘어가만 담아둔 울화가 원인이 되어
화병이라도 생길것 같은데 그냥 없었던 일로 할수는 없다.
우뚝.
말을 멈춘 북궁단야가 말잔등에서 내렸다.
"잠깐 내리게."
"나말이오?"
의아해하는 장추삼을 무시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북궁단야의 얼굴은
더없이 싸늘했다. 엉거주춤 내려선 장추삼이 '뭐야?' 하는 얼굴로 몸을
돌리는데 번개같은 일권이 그의 배에 꽂혔다.
퍽!
'헉!'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장추삼이 자리에 주저 앉았다. 물론 공력따윈 실리지
않았다. 아니, 공력보다 훨씬 무서운 '그 무엇'이 담겨있기에 방금전의
일권은 더없이 무겁고 강력했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실회조에서 신입이 들어오면 고참 하나가 인생의
매운맛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전통에 대해 말이야."
"그, 금시... 쿨럭... 초문인데..."
"그렇다면 그런줄 알아."
다소 황당한 하운에게 눈을 한번 찡긋해 주고 북궁단야가 말에 올라탔다.
실회조의 전통?
물론 그딴거 없다.
'한번만 더 울리면 그땐 죽을줄알아...'
  [11897]  [연재] 삼류무사-84    첨부파일 :

일행이 첫 행선지로 잡은곳은 북경이었다.
북경, 그 이전까지는 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웠던곳, 그전엔 진의 시황제에
게 자객을 보내거나 당말에 안록산이 현종과 양귀비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장소 정도로 기억되었던 북경은 금이 나라를 세웠을때는 중도라하여 동아시
아를 이분하는 세력의 중심이었고 원왕조 시대에는 연경이라 하여 나라의
도읍이었다. 명조에 수도는 남경이었는데 연왕 주치가 힘으로 제위를 찬탈
하며 수도마저 연경으로 바꾸고 이름을 북경이라 칭했다한다. 한마디로
수대에 걸쳐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서있는 도시이니 이곳을 첫 기착
지로 삼은건 당연할 것이다.
노구교에 서있는 장추삼의 표정은 지극히 행복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드믈게 아름다운 다리'라는 찬사를 듣는 돌다리. 영정하에 걸려있는 노구교
는 북경에 들른 외지인 이라면 한번쯤 꼭 가보는 곳이라고 했다.
"히야, 이게 금나라때 만들어졌다구요? 믿기지 않아,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아."
연방 감탄을 하는 장추삼을 보며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하운도 생각했다.
본래 그의 목적지는 이보다 좀 더 못미친 하냥땅이었으나 북궁단야의 강력
한 제의로 북경에 온것이다. 스스럼없이 경치에 관해 노닥거리는 장추삼과
하운은 망연한 북궁단야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했다.
협소한 호북땅에서 벗어나 하남을 거쳐 북경에 당도하면서 보게된 광활한
대륙과 수많은 사람들속에 그의 고립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천산
에서 양양까지 올때야 동생을 찾을 수 있다는 일념과 강호에 걸쳐져있는
암운따윈 생각도 안했기에 특별한 감정없이 눈에 들어왔던 정경이련만.
'이건 너무 넓구나. 차근차근 범위를 줄인다고 해도 성 단위로 나누어 진다
면 무슨수로 단서를 발견한단 말인가!'
옆에서는 돌다리 주위에 있는 사자상의 갯수에 관해 열띤 공방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구교의 양 옆에 일렬로 세워져있는 사자상은 눈으로 파악하기 어
려울만큼 많았다.
"이백삼십팔, 이백삼십구... 어구, 헷갈리니까 하형은 속으로 세요."
"이백십오, 이백십육... 어, 장형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아시오? 장형이나
조용히 종 세시오."
"에잇, 이런식이면 하루 온종일을 해도 끝이 없겠어."
손가락으로 먼곳부터 하나하나 가리키며 수를 헤아리던 장추삼이 벌떡 달려
나가 노구교의 절반쯤 되는 위치에 섰다.
"하형은 여기까지 세요, 난 여기부터 끝까지 셀테니!"
큰소리로 하운에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킨 장추삼이 몸을 돌려 다시 사자
상을 셌다.
'어린애들 같긴...'
절반만을 세어서일까? 둘은 서로가 확인한 갯수를 더하고는 갯수를 알아냈
다고 좋아했다.
"백지장도 맡드는게 낫다더니... 진작 이렇게 할걸 그랬소, 하핫."
"그러게 말이에요."
하며 북궁단야를 슬쩍 쳐다보는 장추삼의 얼굴에는 '너도 무게만 잡지말고
같이 세었다면 훨씬 빨리 끝냈잖아'라는 책망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렇구나!'
북궁단야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새겨졌다.
'강호는 넓다. 내가 찾아야 할 건 오리무중이고... 허나 나에게는 동료가
있지 않은가.'
그 미소를 보고 하운과 장추삼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어떻게들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강호로 나온건 목적이 있어서요."
객잔에 들어 간단한 식사와 술한잔을 곁들인 상을 받은 후에 북궁단야가 말
을 이었다. 객방으로 음식을 가져왔기에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수한 동기의 동행이 아니었던 것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이럴것 없소이다."
일어서서 포권으로 사과를 하는 북궁단야에게 하운도 맞포권을 하며 웃었다
.
"순수한 동기라는 것, 그런게 어디있겠소. 사람은 누구나 목적의식을 가지
고 행동을 하지요. 아무 생각도 없이 움직이는 것은 바보나 할 일이오."
바보가 하나 있기는 있다.
"어허험!"
재단엔 쑥스러워서 헛기침을 하는 장추삼을 무시하고 하운이 말을 이었다.
"북경까지 오면서 한마디도 하지않던 북궁형께서 느닷없이 그런 소리를 한
건 우리들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일것 같소이다."
눈을 내리깔고 무언가 생각하던 북궁단야가 술 한잔을 털어 넣었다. 이들이
자기의 말을 얼마나 사심없이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북궁단야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래서 부탁을 할 결심이 선 것이다.
"다소... 억지처럼 들리더라도 내 말을 이해해주시오."
그는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서찰을 하나 꺼냈다.
" '왜?' 라고 묻는다면 다답해 드리지 못하오, 지금 당장은 말이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에 어느정도 다다랐다고 느꼈을때 얘기하리다. 여기..."
장추삼과 하운에게 종이를 한장씩 나누어 주고는 붓을 든 북궁단야가 그 종
이마다 대 여섯개씩의 이름을 써주었다. 사람의 이름, 혹은 문파나 단체의
이름이었는데 생소한 것이라 하운과 장추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본적이 없는데?"
자신의 종이에도 글자를 적어넣으며 북궁단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거요."
뚱하니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바라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들었다. 뭘 시킬건
지는 알것 같은데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세명씩이나 나선다는 건가.
"별거 아닌것 같은데. 여기 적힌 사람이나 단체에 대해 알아보라는거 아니
오? 남들이 알고 있을 정도면 꽤나 유명했을텐데... 뭐, 일도 아니겠구먼."
"그럴까?"
씁씁한 어조로 말을 받고는 하운에게 눈을 돌린 북궁단야가 다시한번 포권
을 했다.
"북경을 상분하여 이름들을 써보았소. 두분이 해주셨으면 하는건 이들, 또
는 단체의 몰락원인에 대한 정확한 이유요. 사사로운 부탁으로 폐를 끼치는
 점 다시한번 사과드리오."
"몰락... 원인?"
"그럼 지금 현존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포권을 받을 생각도 못한듯 하운과 장추삼이 북궁단야를 쳐다보았다.
"그렇소, 몰락원인! 어떤어떤 사람이 누구와 비무를 해서 패한것이 원인이
되어 죽었다는지, 모모 단체, 또는 어떤어떤 사람과 충돌이 있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든지, 대를 잇지못해서 문을 닫았다는지... 하여튼간에 종이에
적힌 이름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이유에 대해 되도록이면 정확
하게 알아봐주시오. 덧붙여 종이에 적힌 이름들 중 현존하는 건 하나도
없소."
"그래도 북궁형이 알 정도라면 꽤나 유명했겠구려."
하운의 물음에 북궁단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최소한 그 지방에서는 무서운게 없는 이름들이었소. 한때는
말이오."
'한때는'에 힘을 주었지만 하운과 장추삼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둘의 생
각은 '쉽겠네'로 귀착되었으니까.
               *              *              *
"그럼 모르신다는 거예요?"
"허, 참. 답답하구먼. 백년도 넘게 지난일을 어떻게 알아? 그때는 우리 부
친께서도 태어나시지 않으셨었어. 조양검파가 유명했던건 모르는 이가 없지
만 그들이 어떻게 망했는지 정확히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게야. 풍문으
로 떠도는 얘기야 많지만서두."
"하아..."
쉽겠다는 생각, 이거 완전 오판이었다. 이른 아침을 먹고 헤어져 부지런히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해가 중천에 뜬 지금까지 얻은 성과는 단하나. '한때
는'의 의미가 최소한 백년전 이라는 거다. 말이 좋아 백년이다. 백년전이라
고...?
내공이 너무높아 주체불가능한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백살이고 이백살이고
산다고 한다. 전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치고 백년정도는 우습게 본다. 그런
관점에서의 백년은 아무것도 아니다.허나 일반적으로 사람의 수명은 오십
에서 육십이다. 칠십을 넘기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고희라고 부르겠는가. 근
데 백년도 넘게 지난일을, 그것도 문파나 개인의 몰락이라면 민감하면서도
대체적으로 감춰지는것이 상례인 부분을 알아내란다.
'기가 막히네.'
응달진 바위에 주저앉아 한숨을 푹푹쉬던 장추삼이 품에서 어제 받았던 종
이를 펼쳐보았다. 일곱개의 이름이 북궁단야의 성격을 대변이라도 하듯 날
카로운 획을 그리며 씌어 있고 그중 확인한 건 셋. 모두 백년전 인물이거나
 단체였고...
"어째 일을 시켜도 이따위걸 맡긴다냐.  백년전? 하... 나라도 그런건 모르
겠네."
이대로 풀숲에 들어가서 한숨잘까, 하던 장추삼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하기로 했으면 모르되 기왕 맡은 일이고 성과가 있든없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아는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듯 엄청 장수한 노인을 만나
서 둘이 잡아내지 못한 단서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릴지 말이다.
'여태껏 접근방법이 잘못되었을지도 몰라. 그 동네에서 가장 큰 무도관을
찾을게 아니라 가장 오래된 무도관을 찾자. 변설자들이 가장 빈번히 출입하
는 식당이나 반점이 그 동네에서 가장 오래산 노인들보다 짭잘한 정보를 줄
지도 몰라.'
스스로에게 힘을 북돋아주고 다음 마을로 향한 장추삼은 우선 가장 오래된
무도관을 찾기로했다.
'어디보자. 오라, 저녀석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골목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광경은 유년기를 거친 모든이에게 한번쯤 옛추억
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리라. 잠시 할일도 잊고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이 노는걸 지켜보던 장추삼이 그 중 술레가 된 아이에게 다가갔다.
"얘, 말좀묻자."
눈을 감고 벽을 향해 양손을 포개고 있던 아이는 깜짝 놀라 뒤를 바라
보았다.
"예?"
감자기 숨어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너, 졌어! 술레가 눈뜨는 법이 어딨냐?"
"웅이는 눈떴데요, 눈떴데요. 눈떴데요~."
"웅이는 또 술래래요. 또 술래래요. 또 술래래요."
'헉!'
술래였던 아이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왜 모르겠는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패배한다는게 얼마나 가슴아픈지 말이다.
"잠깐, 잠깐! 이건 공정치못해. 이녀석이 눈뜬건 아저씨가 말을 시켜서 그
랬던 것이니 무효다. 무효!"
"아녜요. 술래가 눈뜨면 안된다구요. 어저씬 어릴적에 숨바꼭질도 안해보셨
어요?"
"맞아요, 술래는 다 숨기전에 눈뜨면 안되요."
숨바꼭질을 안해봤냐구?
"무슨말이냐? 아저씨는 너희만한 나이에 숨바꼭질계에서는 그야말로 전설로
통했었다."
"에-"
"니들은 사나이지?"
아이들의 볼멘소리는 장추삼의 한마디에 일순 잦아들었다. 사나이... 아이
건 어른이건 사내로 태어난 이들에게 묘한 감흥을 일으키는 한마디.
"사나이는 어때야 하냐? 아저씨가 말해볼까? 우선 약자를 보호해야 하지?"
끄덕끄덕.
"그리고 정정당당 해야하지?"
끄덕끄덕.
"그럼 방금전에 정정당당했다고 말할 수 있어?"
"그래도 눈뜬건 눈뜬건데..."
"정정당당 했냐구?"
"......"
"좋아, 너희들이 깨끗이 인정하니까 아저씨가 기분이 좋아서 유과를 주마."
"와!"
유과를 나누어주며 이 판은 다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장추삼의 눈은 술래
였던 아이의 갸냘픈 다리를 쫒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간 뒤에도 체력이
약한 아이는 해가 저물도록 술래만 할지도 모른다. 그건 장추삼이 어떻게
할 부분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도 안된다. 그저 그는 박탈당한 기회를 다시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으니까.
  [12286]  [연재] 삼류무사-85    첨부파일 :

열심히 유과를 으적이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장추삼이 모두에게 물었다.
"근데 아저씨가 이 동네에 처음와서 길을 못찾고 있거든? 누구 요 근방에서
가장 오래된 무도관을 알고있는 사람 있으면 말해주지 않겠어?"
갑자기 아이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와하하' 웃었다. 애들은 유과를 먹으면
일각뒤에 발작증세를 보이나 했지만 일단은 암말않고 서 있는데 그중
술래였던 아이가 한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이런...'
그곳은 술래였던 아이가 눈을감고 수를 헤아리던 기둥의 바로 옆 대문이었다.
              *                 *                           *
무해관주(武海館主) 오충양(吳忠梁)은 느닷없이 대문을 열고 들이닥친 청년
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북에서 왔다며 찢어진 눈으로 수련생들을
휙 둘러볼때는 기분이 얹짢아졌다. 그래도 대도(大都) 북경에서 무려 백사
십년이나 이어오고있는 전통의 무해관일진대 척 봐도 백수티가 역력히 흐르
는 녀석이 대뜸 '관주가 뉘시오' 했으니 배알이 꼬인건 당연했다.
"본인 이외다!"
일부러 내공을 실어서 대답했다.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청년이
그때서야 '아' 하는 표정으로 돌아섰는데 놈의눈은 자신의 배를 노골적으로
직시하고 있지않은가? 요즘 이것때문에 가뜩이나 심사가 사나운데 말이다.
"관주께 몇마디 도움을 청할까 하오."
'하오오?'
아니,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는가? 기껏해야 조카벌도 안되보이는
녀석이 초면에 '하오' 라니! 응대역시 고울리 없다.
"뭘?"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가? 포권으로 두번씩이나 에를 갖추었거늘
한다는 소리가 '뭘' 이라니! 기껏해야 '건강체조회' 정도를 운영하면서
말이다.
북경에서 백몇십년을 지켜왔는지는 모르지만 '무의바다' 란 휘황찬란한 이
름을 떡하니 걸고있는 무도관의 관주란 작자의 배를 한번 보라! 피둥피둥
찌다못해 옷밖으로 외출을 꿈꾸는 살들의 애처로운 비명소리가 귓가에도 생
생할것 같지않은가! 뒤에서 흉보는것 같아 이런말하기 싫었지만 연무장에서
무술수련인지 보건체존지 알기어려운 움직임을 보이고있는 사람들도
가관이다. 에닐곱살부터 열 서너살 까지의 얼라들 아니면 환갑 전후의 노인
들로 갈라져 있고 가운데의 나이군(群)은 쏙 빠져있다.
'이름이 아깝다.이름이...'
뱃살과 거만함은 정비례관계인가? 배불뚝이 관주의 어의없을 정도로 거만한
눈빛은 평소의 그였다면 일각도 마주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아쉬운건
자신이다.
"이곳이 오랜전통의 무도관이라고 들었소이다."
"그런데?"
"끄응... 그래서 뭣좀 물어보..."
"뭘?"
잘만하면 한판 재대로 붙을것같은 분위기, 체조 비스무리한 동작을 반복하
던 노소들도 관주와 괴청년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둘의 하
는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이씨, 질문이고 나발이고 확 관둬버릴까?'
오충양은 여전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뒷짐까지 떡하니 지고.
 입을 꼭 다물고 콧구멍으로만 큰숨을 한번 내쉬고는 결심한듯 장추삼이
말을 이었다.
"다소 황당하겠지만..."
그 말을 듣던 무해관주 오충양은 어이가 없어서 장추삼의 전신을 쓱하고 한
번 훑터보았다. 말 그대로 황당하지 않은가?
"이것보시게, 그런걸 이제와 묻는 이유까지야 내 알바는 아니지만 무해도장
이 백사십년이 된 것이지 내가 백사십년을 산 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고
 백년을 넘게 산 사람이 흔한것도 아니고... 가만?"
한심하다는듯 혀까지 차가며 훈계조로 장추삼에게 말을 하던 오충양이 순간
적으로 들고있던 부채를 소리나게 접었다.
"생각해보니 한군데가 있긴 하네만..."
은근슬쩍 말을 놓은 오충양의 거만함이 우스웠지만 단서를 준다는 한마디에
 장추삼의 기분은 확 풀렸다. 하루 종일 품을 팔고도 낱알하나 건지지 못했
는데 이제야 무언가 비치나보다.
"어디를 말하는 거요?"
"검화관(劍畵館)!"
"검화관?"
그때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수련시간을 방해한건
사실이니 미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노인네들 끼리 검화관 운운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맞장구치며 얘기를 나누는데 '전통' 미니 '장수'
니 어쩌구 하는걸로 보아 꽤다 유명한가 보다.
"어디요, 거기가?"
급하게 묻는 장추삼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볼품없는 턱수염을 손으로
문지르며 오충양이 뜸을 들었다.
"꽤나 먼 거린데..."
"그런 걱정은 내가 하오. 관주께선 어딘지 말만 해주시오."
"정 원한다면... 저기 산 하나 보일걸세. 거기가 부악산 이라 하는데 겉
보기에는 만만하지만 들짐승들이 간간히 출몰해서 왠만한 담량 가지고는
넘기 힘들지. 산세도 험한 편이고..."
"저 산만 넘으면 되오?"
"아니지, 아니지."
부채를 쥔 손을 들어 좌우로 까닥까닥 움직이며 오충양은 노인들의 의아한
시선을 흘려보냈다.
"산을 넘으면 벽가촌이라는 마을이 나오고 거길 지나서 진성촌이라는 마을로
 가게. 진성촌에서 검화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테니 찾기는 쉬울꺼야. 말해
놓고 보니 그렇게 먼거리도 아니였네 그려."
표권을 하고 급히 몸을 돌린 장추삼이 순간 몸을 움찔했다.
'핫! 처음에는 그렇게 틱틱거리다가 갑자기 자상해진 이유가 뭐지? 거리도
만만치 않은것 같은데 무턱대고 갈수는 없잖아?'
"왜그러시나?"
오충양이 뚱한 얼굴로 장추삼을 쳐다보았다. 완연히 '그만 가주었으면' 하
는 표정으로.
"자꾸 귀찮게해서 미안하오만 검화관이란곳에 도데체 뭐가 있다는 거요?"
순간 오충양의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이런, 내가 그말을 하지 않았군! 가만보면 나도 정신이 없네. 허허허...
그곳엔 이 근방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이 사신다네. 세수가 무려 백살
하고도 삼십을 헤아리시지. 게다가 그분 역시 부도관을 운영하셨으니 아까
들었던 얘기들에 관해 아실지도 모르지 않겠나."
"아..."
이보다 괜찮은 정보가 어디있을까? 장추삼의 얼굴은 벌써 한건 한 도박꾼마
냥 득의만만한 것이 되어 눈오는 겨울날 폴짝거리는 강아지처럼 경쾌한 발
걸음으로 무해도관을 나섰다. 그의 뒤를 오충양의 기이할 정도로 짖굿은 미
소가 배웅해 주었지만 들뜬 장추삼으로는 알도리가 없었다.
"근데 관주님..."
장추삼이 문을 닫자마자 웅성거리던 노인네들 중 하나가 오충양의 앞에섰다
. 노인은 문을 연방 힐끗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는데 의아한 기색이 역
력했다.
"전전대 검화관주님 이라면 백소유 대협을 말씀하시는것 같은데 그분은..."
오충양이 너털웃음으로 노인의 말을 막았다.
"아하하...저 역시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모든일에 '만약' 이란게 있는겁니
다. 혹시 압니까? 아까 소협이 원하는 정보을 우연찮게 얻을지 말이오.
사실 이 근방에서 그런 질문에 답할분이라고 백노대협 이외엔 아무도 없지
않소?"
노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그건 그래', '맞다' 어쩌고 하는 중에 오충양이
큰소리로 이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미꾸라지 같은 친구때문에 쉬실만큼 쉬셨으니 다시 시작합시다. 이
번에는 보법의 총체적 기본이라고 하는..."
여전히 그의 짖궂은 미소가 입꼬리에 달랑 걸려 있었지만 누구도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존장의 예도 모르는 녀석은 고생좀 해봐야 돼.'
장추삼이 진성촌에 도착한것은 술시말(오후9시)가 다 되서였다. 미시(오후3
시)에 무해관을 나섰으니 꼬박 세시진을 쉬지도않고 걸음을 옮긴것인데 처
음에는 몰랐지만 벽가촌을 지나서부터 갑작스레 피로감이 쌓이고 걷는것도
지루해졌다.
원래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 목표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만큼 멀리있으면 그
저 아무생각 없이 그것을 향해 달려나간다. 피로감? 자신없음? 그딴건 아에
생각하지도 않고서 말이다. 실체를 보지 못하니 반응도 뒤따르지 않는것일
게다.
그런데 참 신기한것은 어느정도 목표에 구체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그때까지
어디 숨어있었는지도 모를 수많은 인간적인 감정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나를 봐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보통 이때가 '고비' 라고 하겠다.
이맘때 쯤이면 심신이 어느정도 느슨해져있는 상태이고 평상시라면 아무렇지
도 않게 지나칠 유혹들에 덜컥 자신을 맡기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진성촌
에 들어섰을때 아무 객잔에나 들어가서 허기를 체우고 한숨 잔후에 움직여
볼까도 생각했지만 기다리고 있을 하운들이 눈에 밟혀서 주린 배를 움켜쥐
고 물어물어 겨우 검화관이라는 곳을 찾았다.
'장추삼, 너 장족의 발전이다!'
검화관의 문고리를 잡으며 장추삼이 스스로에게 한마디 던졌다. 예전 같았
으면, 오년전 건달패 시절에는 이렇게 무언가를 위해 충실하지 못했었다.
귀찮은건 싫어하고 진득하니 뭐 하나에 메달리지 못했던 성격...무당의 속가
제자가 연적이었기에 그녀가 떠난건 아닐것이다. 그의 흐리멍텅하고 우유부
단한, 그래서 모든일에 행동보다 말이 앞서던 지난날의 성격이 이별의 가장
큰 원인이었으리라.
후회? 무수히 많은 후회를 했고 지금 이순간에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란 발전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 어떤 쓴약보다도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요즘들어 - 기껏해야 동굴출도 이후이니 한달 남짓 기간이지만 - 장추삼은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버릇이 생겼다.
너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고...
상념은 일단 접어두고 문고리를 두드리며 그가 크게 외쳤다.
"계십니까?"  [12556]  [연재] 삼류무사-86    첨부파일 :

소리를 질러놓고 순간 뜨끔한 장추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술시말이라면
꽤나 늦은 시간이다. 무도장이든 일반집이든 이런시간에 방문한다면 어
지간히 친해도 실례라고 할 정도다. 뚝 끊긴 인적이 그걸 대변이라도 하듯
검화관의 주변에 숨쉬는 것이라곤 산들바람이 전부였다.
'이거 어쩐다지?'
삐걱-.
문이 열리며 삼십대의 장한이 몸을 드러냈다.
"늦은 시간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
웬 환대란 말인가? 쫒겨나지나 않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아, 예... 저는 양양에서온 장추삼이라고 합니다. 귀관을 방문한건 다름이
..."
포권하는 장추삼을 얼싸안듯 대문 안으로 들이며 장한 역시 만면에 미소와
함께 포권으로 답했다.
"본래 장대협이셨구려. 저는 검화관을 맡고있는 백능풍이라고 합니다. 어서
드시지요."
"예..."
얼떨결에 들어선 검화관은 말 그대로 온통 그림으로 수놓아진 '화원(畵園)'
이었다. 산수화부터 신선도를 비롯하여 미녀도까지... 없는 종류의 그림은
고작해야 춘화정도일까? 문에 영 문외한인 장추삼이 보기에도 여기저기
걸려있는 그림들은 예삿솜씨로 그려진 것들이 아닐성 싶은것이 꽃밭에
앉아있는 나비는 나비대로 허공을 차오르는 백로들은 백로대로 빈틈만
준다면 족자를 뛰쳐나와 자유로의 도피를 감행할 것 처럼 사실적으로 묘사
되어 있었다. 그외에 산수화나 인물화들도 장추삼이 모르니까 그냥
지나쳤을뿐 그림에 관한 조예가 깊은 이들이 보았다면 무릎을 칠만한
작품들이 허다했다.
그런데...
'여기 화방이야?'
그렇다. 검화관이란 이름중 '화'자에 대한 이해는 아주 쉽게 다가왔지만 맨
앞의 '검'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언젠가는 연무장으로 쓰였을지 모를
너른 공지에 얽히섥히 자라난 잡초와 야생화를 제쳐두고라도 무도장이라면
그곳만이 가지는 특유의 내음따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흔한
병장기 하나 걸려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곳은...
"그래, 장대협께서는 어떤 그림을 보려고 오신겁니까?"
"그림 요?"
"예, 그림."
그제서야 장추삼은 백능풍의 환대를, 누가보아도 결례의 방문인데 반색한
이유룰 알 것 같았다.
처연한 표정으로 우뚝 선 그의 자세에서 무언가 느꼈을까, 백능풍도 가식적
인 미소를 걷고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후, 뭔가 착각하신것 같은데 내가 귀장을 방문한 목적은 그림같은 거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소. 오해를 살 정도로 늦은 방문... 사과드리오."
백능풍의 표정에서 짧은 순간 실망의 기색이 스쳐갔다. 그러나 본래의 성정
이 착한듯 곧 신색을 회복한 그가 장추삼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럼 장대협께서 본장을 찾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사실 본장을 방문하는
외부인들은 그림에 관계된 경우를 제외한다면 거의 없는 실정이라..."
"아, 예..."
미안은 하지만 기왕 이렇게된것, 장추삼은 무해관을 거쳐 이곳에 오게된 경
로를 간략히 설명함으로서 자신의 방문목적을 백능풍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내비쳤다. 그의 말을 들은 백능풍의 표정이 또다시 묘한 색채를 보였다는건
장추삼만의 착각일까? 백능풍의 시선은 장추삼에게서 별채라고 부르기 뭐할
정도로 큰 방을 쫒았다.
"고조부님을 말씀하시는구려..."
음성에 담긴 애잔함에 퍼뜩 놀란 장추삼이 급히 물었다.
"혹시 백 노대협께서..."
"아니오, 아니오."
장추삼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백능풍이 손을 휘휘 저었으나 얼굴에 깃든 수
심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듯 제자리를 맴돌았다.
"일단 뵙도록 합시다. 고조부께서도 오랫만의 방문객을 보시고 차도가 좀
있으실지도 모르니 말이오."
'차도?'
물론 병환중의 사람에게 사용하는 단어란걸 장추삼도 알고 있었지만 별채로
안내되면서 장추삼은 한마디도 묻지 못했다. 그런 얘기를 꺼내기엔 백능풍
의 표정이 너무 쓸쓸했으니까.
"여기요, 장대협께선 너무 놀라거나 실망하지 말길 바라오."
웬만한 안채보다 큰 별채의 문 앞에서 백능풍이 장추삼에게 준 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백소유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드르륵.
' ? '
굉장히 큰 방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하나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닥에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종이들에도 빼곡히 그림이 채워져 있는데
무얼 그렸는지 알긴 어려웠지만 붓 끝에 담긴 힘 만큼은 무척이나 웅혼한
것이었다.
'뭐가 문제라는 거야?'
문을 열고 장추삼들이 들어왔지만 노인은 눈길 한 번 주지않고 그림에
몰두해  있었다. 가는귀가 먹었으니라.
'세수 백삼십을 바라본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고조부님, 소손 능풍입니다."
여전히 노인은 대꾸가 없었다.
"오랫만에 고조부님을 찾아온 손님이 있습니다. 양양에서 오신 장추삼 대협
이라고 합니다.
' ? '
마치 벽에대고 말하는듯 소리의 높낮이없이 말을 잇는 백능풍의 옆모습을
보며 장추삼이 고개를 돌려 백발노인을 자세히 관찰하려 했지만 고개를 숙
이고 있기에 노인의 표정을 안다는건 무리였다.
부스럭부스럭.
종이를 다썼는지 노인이 종이를 찾기 시작했다. 시력도 많이 안좋아진듯 바
로 옆에 쌓아둔 종이들을 찾지 못하는게 답답하여 장추삼이 백소유에게 다
가갔다.
"백노대협, 여기 종이가..."
백소유의 눈은 하계(下界)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아득히 먼곳, 닿을 수
없는 무언가를 잡으려는듯 그의 눈망울은 조첨없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십년 전이었소. 고조부께서 넋을 놓으시게 된 것이 말이오."
엉거주춤 몸을 들지도 펴지도 못하고 있던 장추삼의 손에서 백소유가 종이
를 빼앗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장대협께 도움이 못되어 죄송하오. 휴우-."
"아니 별말씀을...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낭패감은 이루 말할수 없었는지 저절로 굳어지는 인상
은 어떻게 제어가 안됬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가?
무해관주 오충양의 야릇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배불뚝이 관주놈...'
"저녁도 못하셨을텐데 식사나 하고 가시오. 해드릴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구
려."
"괜찮..."
그때 밖에서 백능풍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관주님! 오대인이 찾아오셨습니다."
"이런, 손님이 오신모양입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소이다. 곧 저녁상을 들
이도록 할테니 천천히 쉬시다 가시오."
"아니, 괜찮..."
드르륵- 탁!
"이보시..."
배 떠난뒤에 아무리 손 흔들어봐야 무엇하겠는가. 안타까운 장추삼의 부르짖
음은 얇은 장지문에 막혀서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노인의 방을 메아리
쳤다. 백능풍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함도 아니다. 오랫만에 고조부를 찾아온
 손님이기에 비록 넋을 놓았다고는 하나 분명히 숨을 쉬고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노인의 옆에서 잠시라도 머물러주길 바라는 걸게다. 그러나 장추삼은
너무 피곤했고 - 오죽하면 밥생각마저 없겠는가 - 기다리는 동료들을 생각
하면 이런곳에서 노닥거릴 처지가 아니었다.
'미치겠네!'
노인은 여전히 고개를 박고서 그림그리기게 몰두해 있었다. 마을에서 들은
풍월로는 지금 넋놓고 눈이 돌아간 치매노인일지 몰라도 과거의 백소유는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했다. 검을 잡으면 북경 일대에서 세손가락에 꼽힐정
도로 놀라운 절예를 가진 무인이지만 붓 한필만 들면 그 어떤 명가도 부럽
지않은 세계를 화폭에 옮길줄 알았으며 성격마저 관인하여 그를 아는 사람
들은 모두들 '군자검' 이라 부르며 칭송했었다고 진성촌에서 만났던 촌노가
침을 튀겨가며 얘기했었다. 넋을 놓은 얘기를 안한것도 군자검에 대한 예의
였을까?
멀뚱히 서있던 장추삼이 탁자옆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대로 그냥 가기는
어려울것 같고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
'에라, 반시진 좋은일 했다고 치지, 뭐."
문득 바닥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는 종이들과 또다시 같은것은 생산해내는
노인의 모습이 한눈에 담겨왔다.
"참 웃기네요. 그렇게 쓰레기처럼 버릴걸 왜 자꾸 그리는거예요? 하기야,
노인장에게 그림이라도 없다면 너무 적적할 것 같지만서두..."
문득 웃기는 생각이 들었다. 왜들 버릴거면서 그때를 잊은 양 얼마 안가서
같은것을 찾을까? 의지력의 부재? 후회뒤의 찾아오는 도약?
'응?'
나름대로의 상념에 빠져있던 장추삼이 그제서야 편액을 발견한건 방안의 기
묘한 분위기 탓만은 아닐것이다. 살아 움직일것 같이 꿈틀거리며 방안을 내
려보고있는 편액엔 어떤 의지가 담긴듯했다.
힘을 기른뒤에 후회해도 늦지않다.
"아..."
무언가, 무언가가 생각날듯도 한데 얼른 기억나는 것이 없다. 전에 자신도
이런기분을 품은적이 있었지만 이 글씨를 쓴 이와 비교하자면 어린아이 장
난수준이리라. 서예와 그림같은 걸 보는 안목같은건 없지만 글에 담긴 박력
 - 그래봐야 비침 정도를 판단하는 거지만 - 정도는 느낄수 있으니까.
그렇게 본다면 위의 글은 엄청난 기운을 함유하고 있었다. 몇마디 말로
설명이 안될 정도로 말이다.
"이글... 노인장이 쓰셨소?"
묻고는 고소를 지었다. 대답이 나올리 없잖은가. 어떻게하면 그럴수 있을까
할 정도로 노인은 처음처럼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뭐, 열받는 일 있었어요?"
쓱쓱쓱.
아무 대꾸없이 붓을 놀리는 노인이나 그런건 상관없다는듯 중언부언 떠드는
 장추삼이나 각자의 세계에 몰입되어 반은같은건 신경쓰지 않았다.
"노인장께서도 검께나 쓰셨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센 상대이기에 힘을 기
르고 후회를 해요? 나도 적미천존인가 뭐시기를 만나면 맞싸울건지 도망갈
건지 심각하게 고려하겠지만 말이오. 들은걸로 봐서는 엄청나게 쎄다는데,
어쩐다지?"
오랫동안 주절거리면 배가 고파진다. 점심과 저녁을 거른 상태인지라 장추
  [12791]  [연재] 삼류무사-87    첨부파일 :

'어이구... 뱃가죽이 등을 아예 얼싸안을라고드네.'
황량할 정도로 넓은 방이기에 배고픔의 효과가 극대화 되었는지도 모른다.
한번 간 백능풍은 근처 우물에라도 빠졌는지 아주 감감무소식이고 밥달라고
큰소리칠만큼 대단한 방문객이 아니라는것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주린배만 움켜쥐는게 고작이다.
"노인장 식사하셨어요? 하긴,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어?"
시덥잖은 농을 던지다 장추삼의 눈을 끈 것은 백소유의 탁자에 놓여있던 아
이 손바닥만한 월병이었다. 대저 노인네들 옆에는 언제나 주전부리가 있는
법. 평소라면 한번 쳐다보고 말 간식거리가 이순간만큼은 그 어떤 산해
진미보다도 탐스러워 보이는건 왤까?
'그 맛있는 부귀닭도 저놈보단 못할꺼야, 암!'
부귀닭... 닭이나 오리따위를 털 뽑지 않은 상태 그대로 온몸에 진흙을 발
라서 통째로 불에 구어서 알맞게 익었다 싶었을때 진흙을 깨트리면 털과 기
타의 표피가 벗겨지고 고소한 속살이 나오는 요리법이다.
왜 '부귀(富貴)'닭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느냐함은 민정시찰을 위해 변복을
한 황제가 무척 시장해하고 있었을때 밥술이나 빌어먹던 거지하나가 마침
운좋게 얻은 닭으로 이 요리를 해서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변변한 조리기구
하나없고 달콤한 향신료 한주 얻기 어려웠으니 택할수 밖에 없는 요리법
이지만 그 맛만큼은 썩 괜찮은 것이라 황제가 매우 만족해했고 그 거지는
팔자를 고쳤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부귀'닭인데 눈앞의 전병
하나가 이보다 못함은 역시 잡을 수 없는 이상보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더 가깝기 때문일까.
"도, 도대체 뭘 그리고 있어요?"
슬금슬금 백소유에게 접근했지만 넋은 논 사람이기에 기척따위는 상관없는
듯 그는 그림만을 그릴 뿐이었다.
"어디보자... 어이구, 잘그리시네요! 신필이야, 신필!"
눈으로는 전병을 쫒으면서 보고있지도 않은 그림에대해 헛소리를 하는 연방
전병과의 거리를 서서히 좁히는 장추삼의 모습은 실로 가소로운 것이었으
나 다행히 정신나간 노인을 빼면 보는이가 아무도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야아... 그림 좀 봐도되요? 음... 사람이구나... 음음... 검을 들고 서있
군."
오른손으로 탁자를 집고 어께동무하듯 백소유의 등을 감싼 그의 왼손이 확
실하게 목표물의 위치에 접근하고 있었다. 잠시후면 뜻을 이룰것도 같았다.
... 그런데!
짝-!
전병의 코앞에 둔 그의 손등을 번개처럼 후려친것이 있었으니.
'어, 이거 우연이야, 뭐야?'
장추삼의 왼손등을 때린건 다름아닌 백소유의 붓이었다. 기가 막힌건 그의
눈은 여전히 초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연일거야, 노인네가 힘이 없어서 붓을 잘못 움직인거라구, 그래!'
다시한번 조심스레 손을 뻗어보았다.
짝-!
"이런젠장!"
저도 모르게 성질을 내고 아차하는 마음에 백소유의 눈을 보았으나 처음 들
어왔던 그 빛깔 그대로 였으니.
"아... 아하하. 손이 미끄러졌나봐요. 사나이 장추삼이 쫀쫀하게 월병하나
때문에 이럴리 없잖소. 못믿겠으면 우리동네 가봐요. 원래 전 단거 싫어한
다는거 소문나 있다구요!"
단거? 무지 좋아한다!
"어디까지나 노인장 그림볼려고 몸을 숙이다가 중심을 잃었던거요, 아하하..."
물은이도, 들어줄이도 없건만 괜히 무안해진 장추삼은 백소유가 그려놓은
그림을 한웅큼이나 꺼내들고 너스레를 떨었다.
'넋을 놨지만 생존본능 만큼은 꼭 움켜쥐고 있겠다는거야?'
"에구, 사람을 그렸네요. 검을 들고... 어디 다른건 뭘 그리셨나... 어?"
그림 한장을 무심히 넘긴 그가 고개를 갸유뚱거렸다. 왜냐하면 뒷장에도 역시
같은 인물이 칼을 들고 서있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교교한 달빛아래 검을
뽑아들고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물하나. 놀라운건 주위의 경물을 어
찌나 생생히 묘사했는지 그림인지 실제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다.
"똑같은 그림만 계속 그린거예요?"
종이를 넘기며 노인과 그림을 번갈아 힐끔거리던 그가 무언가 나름대로 백
소유를 이해한건 넋을 놨건, 아니면 신필에 가까운 그림실력을 가지고 있었
건 눈앞의 노인이 꿈꾸었던삶은 무인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유추한건 아니
었다. 그러기에 그림에서 느껴지는 내음은 너무...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해야하지? 그냥 그림일 뿐인데?'
그뿐이다. 그 외엔 어떠한 이물질도 첨가되지 않은 그림이건만 시·서·화
같은 도락과 거리간 먼 장추삼에게 다가오는 정체모를 기문은 무엇일까?
'......'
여전히 백소유와 그림을 번갈아보며 갸웃거리던 장추삼이 생각을 털어버려
려는듯 고개를 휙휙 털었다.
"자아~ 보십시요. 노인장께서 그린 인물이 이런 모습이었지요? 달이 없어서
 섭섭하지만 그거야 할수 없고요~"
아무 종이나 둘둘말고 백소유가 그린 인물처럼 말린걸 검처럼 앞으로 쭉 내
민 장추삼이 이죽거렸다.
"뒷 장을 넘겨도 똑같은 자세입니다. 칼든 사람 어께 빠지겠네요~ 보세요~."
뒷장을 넘겨도 그 인물. 그 달, 그 자세...?
"아! 잘못 그리셨네요~ 팔 높이를 실수하셨습니다~ 약간 내려갔네요~"
다시 뒷장. 그 인물, 그 달, 그 자세...?
"예~ 또 잘못그리셨네요~ 이번엔 팔 높이가..."
그 뒤부터 암말 않고 종이를 넘기는 장추심이 안색은 그와 어울리지 않게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촥촥촥.
말없이 흔들이는 초롱불 사이로 우두커니 서서 그림을 넘기는 장추삼과 여
전히 그림을 그리는 노인하나.
"이런!"
갑자기 쭈그리고 앉은 장추삼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종이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종이들엔 예외없이 그 달과 그 전각과 그
사내가 있었지만...
종이들을 마구 넘기던 장추삼이 고개를 들어 망연히 백소유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더 이상 정신나간 노인네에게 보내는 동정따위가 아니었다.
"이, 이럴수가... 노인장께선 뭘 그리고 싶었던거였소?"
최종적으로 그의 손에 들린 종이는 열아홉장. 백소유가 그린것은 단지 열
아홉장의 그림일뿐이다. 달리 말해서 열 아홉장의 무한반복이라고 할까?
물론 열 아홉장은... 모두 다른그림이었다.
달, 건물, 사람... 모두 같았으나 사람의 동작에서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미묘한 차이가 각 장마다 있었다. 그렇다면 손의 위치가 틀린것뿐인 인물화
라는건데 그것 때문에 보이는 장추삼의 경악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정리된 열 아홉장의 그림을 쥔 그가 윗 모서리의 끝을 잡고 다른손으로 주
욱 넘겼다.
촤르륵-.
정지되어 있던 인물이 살아난다!
그림속에서 한가로이 검을 받쳐들고잇던 사내가 무엇에라도 홀린양 한바탕
검무를 추는것이 그의 눈에는 똑똑이 아로 새겨졌다. 이것은 정지된 그림의
연속적인 전개에의한 눈의 착각이겠으나 그것만으로도 백소유는 자신이 표
현하고자 하는것을 충분히 보여주었고, 장추삼은...
우두둑-.
전능지체로의 이완? 단지 그림만을 본것으로 그가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장추삼의 손에서 힘없이 떨구어진 열 아홉의 종이들은 그의 발키으로 비산했
건만 아무것도 모르는 듯 두눈사이로 한 인물이, 아니 검 하나가 불쑥 내밀
어졌다. 주위도 잊고 자기 자신마져 잊고 가상의 상대와 대치한 장추삼의
이마에서 땀 한방울이 뚝 떨어졌다.
심중안(心中眼).
상승의 무공을 연마했거나 그 단계로 진입하는 사람이 어떤 무서나 그림을
보았을때 그것을 형상화하여 자신과 비교한다는 경지. 이것은 대단히 중요
한 일로서 운공중의 혈관타통에 준하는 위험도가 따를 정도로 심각한 현상
이다.
교교한 달빛아래 이름모를 사내와 그 자신이 홀로 서있다. 언제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묻지말자. 그와 사내는 만났고 사내가 든 검은 자신을 노린다는
걸 아는것만큼 중요하진 않으니까. 패배하지 않으려면, 아니 죽고싶지
않다면 사내의 검로를 피하던가, 봉쇄해야만 한다...
"누구라고 했지요?"
"양양에서 왔다는... 장, 뭐라고 했더라?"
"장추삼?"
"아, 맞다! 장추삼! 근데 조소저께서 어떻게 장공자를 아십니까?"
"어디있죠?"
"그러고보니 식사를 가져다주기로 했는데 깜빡했군! 이런 정신머리하곤..."
"어디있죠, 그사람?"
"어이쿠, 왜 소리를 지르시고... 아, 아닙니다. 별채에 있습니다. 별채요."
"별채라면?"
"예, 증조부께서 기거하시는 그곳말입니다."
"아직 안갔겠지요?"
"물론입니다... 조소저?"
백능풍은 쏜살같이 달려가는 여인을 막을수 없었다. 누가있어 저 여인의 발
길을 제지할까? 천하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검을 잘쓴다는 여인을 말이다.
"실례해요!"
한참을 기다렸지만 대답이 없다. 백능풍의 말대로라면 세시진을 쉬지않고
달려왔으니 피곤해서 뻗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례해요!"
이번에도 역시 대답이 없다. 자는 사람 깨우는건 예의가 아니겠지 하고 뒤
돌아서던 그녀가 문득 놀라운 기세를 느껴 뒤돌아보았다.
펄럭펄럭-.
종이 따위가 날아다니는소리! 장지문 반대편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음인데
 정상적인 형태는 아닐터였다. 체면이고 뭐고 따질 개제가 아닌것같아 막무
가내로 문을 열었다.
왈칵!
"아아아..."
우뚝 선 사내는 눈을 감고 있었다. 꽉 쥔 주먹은 얼마나 긴장했는지 땀방울
마저 떨어지고,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기세에 바닥에 깔려있던 종이들이 이
리저리 허공에 나부끼는데...
'심중안!'
절대 방해해서는 안된다. 뒤따라 들어오려던 백능풍을 밀어내고 그녀 역시
문을 막아선 상태에서 저도 모르게 검을 뽑아들었다.
'저 사내...'
장추삼, 사형에게 듣기로는 쌈질 꽤나하는 뒷골목 건달출신의 표사. 묘하게
사람 끄는 힘이 있고 조금은 삐뚤어진 성격. 사매에게 듣기론 무의 재질
괜찮은, 또한 인생관 확실한 보통의 청년. 그런데...
굳게 잠긴 입술을은 태산이 눌러도 움직이지 않을듯 또렷한 기운을 풍기고
내리깔은 두 눈에서 금방이라도 타오를것 같은 화광의 눈말울이 비쳐지는건
그녀의 착각인가?
'저 사내가... 장추삼?'
흐르는 기운마저도 대기를 압도하고 북경전체를 압도하고 검절이라 불리우
는 자신마저 압도할 것 같은 저 사내가... 뒷골목 건달에 보통의 청년?
스륵.
단지 반보를 움직였음에도 그녀가 꿀꺽 침을 삼켰다.
스륵.
다시한번 반보, 별채는 넓디넓어 그가 계속 뒤로 간다해도 벽에 닿으려면
반시진은 걸릴성 싶었다.
  [12861]  [연재] 삼류무사-88    첨부파일 :

'이럴수가!'
눈앞의 검은 그가 상대했던 여타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것이었다. 그렇
다고 검 자체가 간장이나 막야 따위의 보검이라는건 아니다. 검이 앞으로 움
직일 길을 훤히 알고있는 상황이라 장추삼에게는 더할나위없이 유리한 조
건이라고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적인 생각일뿐이고 그에게 도움
이 되는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힘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내가 달빛아래서 한바탕 벌인
검의 춤은 선빵이 최우선이라고 거의 맹목적인 신념을 가지고있는 장추삼의
발걸음 자체를 꽁꽁 묶어놓을 정도로 위험한 '그 무엇'을 내포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상념과 나름대로의 사투를 벌이며 물러난 거리만해도 어른 걸음으
로 열발자욱이 넘었으니.
'어떡하지, 이럴땐 어떻게 해야하지?'
처음이었다. 싸워보기도전에 겁을 먹은건. 아니, '겁'이란거 자체를 몰랐기
에 장추삼은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고 이해도 하
기 어려웠다. 그건 그대로 그의 정신체계에 혼란을 가져다줄만큼 위험한일.
퍽-.
코피가 터져나왔다. 인체의 혈관중 가장 약한 부분에서 심리적 압박감의 부
하를 견디지못하고 먼저 반응을 보인것이다.
'위험하다!'
그녀가 보기에 장추삼은 심중안을 처음 겪는게 분명했고 처음 심중안의 상
태에 들면 불안감과 초조함을 수반하는 공포감에 제대로된 싸움 - 물론
정신적인 싸움이다 - 한번 변변히 못해보고 주화입마에 빠져들기 쉽상이다.
명문거파에서야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나름대로 정리하여 제자들에게 숙지
시킨다지만 장추삼처럼 돌볼이 하나없는 외토리는 지극히 난감한 경우라 아
니할 수 없다. 사실 몇차례의 심중만을 넘겨보았던, 지고한 경지의 고수라
하더라도 똑같은 경우가 닥쳤을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당혹감만은 어쩔 도리
 없거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그녀가 낮은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그건 마치
 사이비교주들의 주문과도 같이 억양없는 것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자 어찌 참 용기에 관해 말할수 있을까. 인간으로서 마땅
히 느끼는 오욕칠정을 거부한다면 그는 더이상...")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추삼은 이제 양 어께까지 부르르 떨고 있었고 파리
해진 안색은 흡사 강시와도 같았다.
'가장 기본적인 도움도 거절한다는 건가? 가만, 가장 기본적인것?'
장추삼에게 가장 기본적인게 무얼까? 그녀는 자신이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
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지금 눈앞에서 몸을 떨고있는 사내는...
'침착하자, 침착해야해 조소령.'
사형과 사매가 말해주었던 - 물론 전서구를 통해 - 장추삼을 나름대로 머리
속에서 형상화했다. 깡, 의리, 인생관, 삐딱한 말투, 여자에게 차이고
가출... 엥? 이건 관두고... 아, 그래!'
다시한번 그녀의 꽃봉오리 같은 입술이 열렸다. 내용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말을 토하기위해.
('뭐야, 양양성을 주름잡았다더니 그깟 허상에 쫄은거야? 이름이 아깝다,
이름이 아까워.")
우뚝.
기가막혔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에 떨리던 어께가 진정되는걸 보며 역시 이
렇게 나가는게 낫다고 생각하고 내친김에 좀 더 강하게 밀었다.
("눈 앞에 뭐가 보이건 별거아냐. 한방먹여!"
사문의 모든이가 들으면 다섯번을 기절할 소리를 하며 그녀가 씨익 웃었다.
이거... 생각보다 굉장히 재밌지 않은가.
무언가 소리가 들린다. 두려움이 어쩌구... 공염불 같은 헛소리가 귓가를
두드리는데 신경질만 더 난다. 형체모를 검은 여전히 요사스런 모습으로 옥
죄어오고... 도망가고 싶다. 그런데.
("뭐야, 양양성을... 아깝다, 아까워.")
삥-.
'누구야? 죽고싶어?'
("눈앞에... 한방먹여!")
'오냐, 이놈부터 처리하고 보자!'
으득-.
이를 악물고 전방을 주시하자 검밖에 보이지않던 경물들이 이제야 찬찬히
눈앞에 들어온다. 빌어먹을 달, 꺼벙해 보인는 전각, 재수없는 검, 그걸 들
고 있는놈. 근데 그놈은 얼굴이 없다. 잘됐다! 그 얼굴을 얼음덩어리로 생
각하고 한번 패줘야지.
'아냐!'
얼음덩어리는 이렇게 검을 쓸리없다. 자신의 키만한 검을 쓰는이가 이토록
정교하고 이토록 요사스러운 겁법을 펼칠수는 없을 것이다. 성격도 그렇고.
.. 어쨌든 얼음덩어리는 안된다. 현실감이 없다!
'누구로 하지?'
어느순간 장추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딱 한사람이 있다!
'휴우-.'
안도의 숨을 쉰 그녀가 그제서야 들고있던 팔을 내렸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검을 쥐고있던 오른손바닥에 식은땀이 그득했다. 보아하니 심적인 여유는
찾은거 같고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품어야할 부분이다.
곧 장추상은 어울리는 상대를 찾을수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이정도로
정교하고 이정도로 이상한 검법을 펼칠만한 사람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좋아!'
주먹을 쥐고 늘어뜨렸던 양손을 조금 접고 그가 한발자욱 앞으로 딛었다.
쿠오오오-.
해파리처럼 허공을 유영하던 종이들이 돌변한 그의 기세에 편승이라도 하듯
 꼿꼿이 펴지며 무수히 허공으로 비산했다.
"대체, 무슨일이오. 소저!"
"쉿!"
안달하는 백능풍을 가볍게 제지하고 고개를 돌리는 그녀에게 갑자기 종이비
가 쏟아져 내렸다.
'어머!"
손으로 종이를 쳐내려던 그녀의 눈에 처연한 달과 이름모를 전각이 보이고
검을 든 사내, 그 사내의 검무가 들어온건 단순한 우연일까? 종이들이 비산
하며 만들어내는 사내의 검무는 너무도 완벽했다.
'당신, 도데체 어떤 사람이지?'
손꼽히는 검식을 가진 그녀로서도 감당키 어려운 검법과 대치하고있는 동네
건달. 그녀는 검무속으로 한발을 딛은 장추삼의 입에서 낮지만 또렷한 목소
리를 들을 수 있었다.
"쫒다 쫒다 산산히 흩어지기에 이제는 보내줘야 하는가."
슬픈 울림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가 움직였다.
파박.
추뢰무영!
하늘아래 장추삼만이 알고, 펼칠수있는 최고의 보법!
사내의 검은 지독한 현기를 띠고 공간 자체를 점유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연
속으로 불어나는 네명의 장추삼이, 아니 하나이면서 넷이고 넷이 하나인
장추삼의 잔상과 실체들이 일련의 변화들을 모조리 와해시키고 사내의 면전
으로 접근하는 걸 보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마지막 하나의 신형을 놓치다니!'
팟!
섬광과도 같이 나타난 마지막의 장추삼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보법은 쾌속했으면서 변화 또한 자연스러웠다.
이전과는 또다른 추뢰무영. 한번 더 탈피한 자연의보법. 그는 스스로가
한단계 올라섰다는걸 알고나 있을까?
"휴우ㅡ."
마지막 발을 밟으며 긴 한숨을 내쉬자 허공에서 노닐던 종이들이 떨어지는
눈송이 마냥 찬찬히 지면으로 내려앉았다.
'미안해 바른생활.'
사실 끔찍한 대결이었다. 이름모를 목소리가 자신을 부추키지만 않았더라면,
 검무를 추는 이에게 제 二초식이 있었더라면.
'내가 뻗었겠지.'
숨을 고르고 슬며시 눈을 뜨자 몇십, 몇백장의 종이 때문에 난장판이 되어
버린 방이 들어오고 문가에 멍청히 서있는 여자 하나가 보였다. 검을 빼들
고 막아서듯 문을 등지고있는 여인은 뭐가 그리 놀랐는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웃기는 것이 사람마음 이라고 누가 보아도 절세미녀라 칭할만한 여
인을 앞에두고 그는 탄식과도 같이 한마디했다.
"배고파."
문득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빛낸 그녀가 이쁘게 웃으며 한마디했다.
"수고했어요. 곳 맛있는걸 먹게 될거예요."
그런데 장추삼이 형상화하여 두들겨 팬 대상이 그녀의 대사형 하운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조소령이 그렇게 이쁜 미소를 지었을지 모르겠다.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2935]  [연재] 삼류무사-89    첨부파일 :

말과는 달리 장추삼은 밥을 먹지 않았다. 비단 밥을 안먹은것은 물론 백소
유에게 작은 예를 한번 올리고 그 즉시로 검화관을 나섰다. 뒤따르는 조소
령이 의아스러웠지만 그녀의 한마디에 동행을 허락해야만 했다.
"장공자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는 몰라도 백소유노대협에 대해서는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없지요, 그의 증손자도 포함해서 말이에요."
            *                 *                 *
자정이 넘어 잠을 청하려던 두 사내는 장추삼의 늦은 합류에 의아해 했으나
 그의 등뒤에서 화사하게 웃고있는 미녀를 보고 그런 생각이 확 달아났다.
장추삼의 성격을 잘 알고있는 북궁단야이기에 그가 이시간까지 여자나 꼬시
고 다녔을리는 만무할 것이고 - 들어서자마자 교자를 삼인분이나 시키는 걸로
보아 저녁도 먹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 사실 그가 보기에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장추삼의 말 몇마디에 녹아서 이 늦은 시간까지 따라
다녔을리는 없다. 그래서 더 희한한 것인데 그의 표정은 하운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직접 묻은 시신이 되살아나도 이보다 더 놀랍진 않을것같은 표정.
흥분, 의아함, 설레임 그리고 애잔함까지... 인간으로서 표현가능한 모든
감정을 잘  버무려서 얼굴에 덧씌우면 나올것 같은 기묘한 안면근육의
움직임. 입은 아무리 큰 교자를 넣어도 들어갈만큼 벌어져있었고 눈동자에
어린 눈물은 또 무엇인가?
'사, 사매... 니가 왜 여길...'
조소령도 눈가가 젖어듬을 참느라 고개를 돌려야했다.
'사형, 건강하셨군요.'
교자를 입에 쑤셔넣던 놈은 이 어색한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아, 뭐하는거야. 설명은 천천히 할테니 각자 통성명들이나 하라구."
황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하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양, 양양 복룡표국 심삼조원, 아니지 휴직중인 하운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소저를 뵙게되어 영광이오."
"같은 소속, 같이 쉬고있는 북궁단야라 하오."
언제나 군더더기 없는 자기소개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북궁단
야의 인사말이 끝나자 잠시 조소령이 장추삼을 한번 쳐다보았다.
"화산의 조소령입니다. 두분 공자를 뵙게되어..."
"검절(劍絶)?"
어지간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북궁단야가 저도 모르게 한발 나섰
다. 무림 삼화중에 검절이라 불리우는 대화산의 이제자 조소령이었다는 건
가!
당연히 놀랄만한 일이다. 그에 비해 하운의 표정은 안온하기 그지 없었다.
입가로 옅은 미소마저 맺힌건 왜인지는 모르지만.
"검절이 뭔데?"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교자 삼인분을 뱃속으로 밀어넣고서 손을 탁탁털며
장추삼이 탁자로 털레털레 다가왔다. 놀라서 입을 떡하니 벌리고있던 북궁
단야가 장추삼의 반응을 보고는 쓰게 웃었다. 저 문외한은 아직도 배울게
너무 많을것같지 않은가.
"무림삼화.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세명의 여협에대해 들어본적이 없었
나? 그 중에서 검을 가장 잘쓰며 화산제일화라고까지 불리우는 여협, 조소
령소저가 저분인데 자네는 그것도 모르면서 조소저을 안내했다는 건가?"
"또 무림삼화야? 거 되게 흔한가 보네, 무림삼화."
이게 무슨소린가. 강호에 몸담은 남정네치고 단 한번이라도, 단 한명이라도
 만나보길 원하는 이름이거늘.
'하기야, 저녀석은 그 세명을 모두 만나는 행운을 누리고 있군.'
그런 자신역시 똑같은 행운아면서도 북궁단야는 남의 얘기처럼 장추삼을 보
았다. 그런데 조소령이 왜 여길 왔을까. 어차피 무림삼화란 이름은 호사가
들이 멋대로 갖다붙인 허명에 지날지도 모르지만 조소령에게는 구파일방중
최고의 성세를 누리고있는 대화산에서도 일대제자란 지고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왠만한 무림명숙의 반열에 들 지위가 있다는 거다.
그런 그녀가 왜?
장추삼이 뭐라하든 여전한 얼굴로 미소짓고 있는 조소령이 북궁단야의 심정
을 눈치챘는지 그를 한번 보고는 열린 창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맑은 여름날의 밤 만큼이나 고운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제가 여러분을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뵙게 된 이유는 미흡하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예요."
"도움?"
하운이 의자에 묻어두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래요. 어떤 이유때문에 장추삼공자가 백소유 노대협을 방문했는지 모르
지만 백 노대협은 이미 정신을 놓은지 오래, 그렇다고 그집 식구들이 알고
있는건 극히 미미한 수준이죠. 다행히 저는 백노대협에 대해 이것저것 들은
게 있어요."
삼화삼색(三花三色)이라고 했던가?
당소소가 성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면 우건은 인세에 있을것 같
지않은 신비로움, 그리고 천진난만하면서 여리디 여린 발랄함일것이다.
그럼 조소령은?
"왜요? 이사저는 고아한 안방마님 체질이고 저는 함만센..."
정혜란의 일갈 그대로 그녀는 고아했다. 등뒤에 걸린 칼 한자루가 아니라면
 누가 보아도 고관집 따님 그대로의 기품이 있었다. 다만 그런류의 인형같은
아름다움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곳이 한군데 있으니 그건 그녀의 지혜로운
눈망울이다. 혜광과 겸손함이 교차되는 그녀의 눈. 과연 무림삼화는 허명이
 아니었다.
"백소유 노대협?"
북궁단야가 고개를 돌려 장추삼을 돌아보았고, 장추삼은 백소유에 관한 얘
기를 안할수 없었다.
"세수 백삼십의 노 무림인을 찾았다... 그저 장식품으로 달고다니는 머리가
 아니였다는건가."
울컥.
주둥아리가 오리마냥 삐져나오는 장추삼을 보고 하운이 급히 물었다. 이들
은... 역시 어렵다.
"그래, 어떻게 되었소. 그분은 만나뵈었소?"
궁시렁거리던 장추삼이 하운을 일별하고 투덜거리듯 말을 했다.
"만나기야 만났는데... 그게..."
"그게?"
"그분은 오래전에 정신을 놓으셨지요."
조소령의 조용한 한마디에 장추삼을 채근하던 하운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
물었다.
"얘기하고 싶은게 뭔가? 정신나간 노인네의 얘길 하자고 이 밤에 사람을 깨
운건 아닐테고."
"당연히 아니지."
북궁단야의 말을 받아치고 품속에서 종이뭉치를 꺼내드는 장추삼의 표정은
실로 묘한것이었다. 한건 했다는 자랑스러움도, 그렇다고 미안함도 아닌.
"보다시피 그림인데 이게 좀 묘하거든. 전에 아미의 난, 뭐더라. 난... 난
화 삼십검인가 뭔가를 보았는데 이거보다 못한것같어. 듣기로 백소유 노인
이 검을 좀 썼다고는 하지만 구파일방을 누를 정도로 대단한적은 없다고 했
는데 이건 뭐냐구. 거기다 뭐가 그리 사무쳤는지 이 노인네, 이것만 죽어라
고 그리더라구."
"장형이 난화삼십육검을 보았다... 그래, 그렇수도 있겠지. 허나 이 그림의
 검식이 난화삼십육검보다 낫다는걸 어떤 증거로 판단하는 거요?"
"그냥."
허탈했다.
"직접보라구."
아니기만 해봐라, 하면서 다소 장난스런 마음으로 종이를 넘기던 하운이 손
이 얼마를 지나지않아 파르르 떨렸다.
"왜 그러시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하운이 암말않고 북궁단야에게 그림을 넘겼다.
"아우- 피곤해. 난 잘거니까 나가서들 얘기하라구, 아님 자든지."
침상에 몸을 눕힌 장추삼이 침까지 흘리며 잠이들자 미동조차없이 굳어있던
 두 쳥년이 퍼뜩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까지 조소령은 그린듯 앉아있었다.
"나갑시다."
북궁단야의 한마디에 기운차게 코를 고는 장추삼을 두고 모두들 무거운 발
걸음으로 객방을 나섰다.
객잔 뒤편의 공지는 황량했다. 모인 이들의 마음은 더 황량했다. 특히 북궁
단야와 하운은 그 안색이 침중하다 못해 죽어있었고 조소령마저도 분위기에
 휩싸인듯 아무말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하운이 조소령을 쳐
다보았다.
"아까 도움을 준다고 했던것 같은데..."
얼마나 놀랐으면 이제서야 물을까. 사형의 속내가 짐작가지 않은바는 아니
지만 쓴 웃음이 나는건 어쩔도리가 없었다.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그래요, 백소유대협은 일반적으로 알려진것과 다른
삶이 있었지요. 군자검 백소유는 그것을 가린 허울에 불과했구요."
백소유, 알려진대로 검과 그림에 능했으며 마음마저 온후했던 협객중의 협객.
그런데...
"그분은 나이 육십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어요. 아니, 할수가 없었겠죠. 일
년의 반 이상을 천하 각파로 유랑다녔으니 말이에요. 그것도 검을 쓰는 문
파로만 말이에요."
검화관을 창시했으나 실질적인 운영은 그의 동생이 맡았다고 한다.
"그분의 이력중 특이한게 하나 있어요. 알려지기로 사부없이 홀로 자수성가
했다지만 그건 거짓이죠. 그럼 백노대협은 사문과 사부를 배신했다는건데
그분의 성품은 그런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이상하지 않나요. 사문을, 사부를
언급하지 못하는 사연이 뭔지 말이에요? 또한 그분의 사부는 그리 녹록치않은
, 아니 누가보아도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는데?"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아졌다.
"호목(虎目) 조용인. 당시 무림십좌중 일인이자 북경제일검 이었죠."
하운과 북궁단야의 안색이 헬쓱해졌다. 무엇에라도 끌린듯 그들의 품에서
빠져나온 종이에 또렷히 적혀있는 이름하나.
호목 조용인!
"또한 백소유 노대협이 검화관을 열고 외유를 시작한건 호목의 원인 모를
 실종 이후라고 하더군요."
쿠궁!
"마지막 한가지, 그 그림에서 무언가 느낀바가 없나요?"
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를때없이 기오막측한 검식이랄것 밖엔..."
하운의 말을 자르는 그녀의 음성이 왠지 씁쓸했다.
"집착, 제가 여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건 집착입니다."
여름인데도 어쩐지 바람마져 황량한 색깔을 띄고 있었다. 거기에 실리듯 담
긴 조소령의 한마디는 슬픈 나비의 몸부림처럼 조용히 나래짓다 지면으로
내려 앉았다.
"백소유 노대협, 아니 청년 백소유는 스믈 일곱 그해에 무언가를 보았을 것
이고 그의 인생은 그 시점에서 정지되어 방해할 이 없는 그림에서만 끊임없
는 윤회를 거듭하는게 아닐까요... 영원히 반복되는 윤회를 말이에요."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2951]  [연재] 삼류무사-90    첨부파일 :

시간이란 놈은 결코 기다림을 모른다. 앞만 보고 돌진한다는 맷돼지도 늙고
병들면 그 행보를 멈추는 건 정한 이치건만 나이를 나누어줄 뿐 스스로는
단 한살도 먹지 않기에 쉼 없이 쉼 없이 전진할 뿐이다.
그들이 북경에 온지 벌써 이십여일이 후딱 지났지만 다리품을 팔며 보따리
장수마냥 여기저기 문을 두드린 것 빼면 별로 한일이 없었다. 잠깐 합류했던
조소령은 이틀을 같이 지내고 화산으로 떠났는데 두 번,세 번 뒤를 돌아보며
아쉬워한 이유야 화운을 빼면 알도리가 없을것이고 그들의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칠만한 일도 아니었다.
종이에 적힌 이들은 분명 많았으나 한 장, 한 장 마다 ‘마침(完)’을
써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을 들고 있는 서로를 발견하게 되었고
호기가 발동한 북궁단야가 북경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요리를 잘한다는
취화선거(翠花仙居)에서 저녁을 내기로 하자 모두들 반색을 한건 물론이다.
장추삼이야 맛있는 술과 식사라는 지극히 동물적인 욕구가 발동했겠지만
하운으로서는 이제 북궁단야의 심중을 들어야할 때가 된 것 같고 취화선거
정도되는 요리집이라면 정원이 딸린 별실(別室)이 있을 것이다. 얘기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쉽게 풀리는 법이고 전망 좋고 음식 좋아서 나쁠 건
없을테니.
으리으리한 문을 밀고 들어갈 때 까지만 해도 이들의 기분은 꽤 넉넉했었다.
“별실이 모두 차 있다고?”
“참 답답하십니다. 공자님들께서 뭘 모르셔도 한참을 모르시나본데 저희
취화선거 별실을 예약도 없이 당일 이용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자금성
황제폐하 말고 아무도 없습죠. 만약 지금 서둘러서 예약신청을 하신다고
해도 족히 사, 오일은 기다리셔야 합니다요.”
그 뒤에 점소이놈이 지껄인 취화선거의 지랑 따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요리 한상값이 네 식구 일주일치 식비와 맞먹는다는 객잔의 별실이 -별실
이용료까지 곁들인다면 그 백수는 두 배 이상으로 배가될 것이다 - 만석(滿席)
이다 못해 예약을 해도 며칠씩을 기다려야 한다니.
객관적인 관점에서 장추삼들은 고소득을 올리는 사회인이 분명했다. 그런
그들도 이정도의 객잔에서 식사한번 하는 것은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거늘.
“저희 객잔을 이용하시는 분들치고 왠만한 세가(世家)분들 아닌 분이
없지요. 뭐, 강남의 남궁세가의 소가주 분도 그러시고 화북 평가의 대협이나...”
승상집 자식놈 얘기까지 나왔을 때 장추삼은 지집이라도 되는 양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거들먹거리는 점소이 녀석의 얼굴에 한방 먹일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어떻소 북궁형. 이만 갈까요? 음식점이 이곳만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오.”
“이층이 비어있으니 올라가기로 합시다. 별채만은 못하지만 꽤 호젓한 듯싶소.”
북궁단야의 말대로 취화선거 본채의 이층은 북적거리는 일층과 달리 비워져
있었다. 여덣개가 넘는 탁자와 꽤 커다란 객실로 보아 족히 사십명 이상은
수용가능 할 듯 싶은데도 본래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탓인지 위층으로 가려는
손님들은 아무도 없어보였다.
“그렇구려. 갑시다.”
“안됩니다요. 공자님들!”
“뭐가 또 안돼?”
참다참다 못해 소리 지르는 장추삼의 기세는 실로 무서웠으나 스물이 갓
넘어 보이는 점소이 녀석은 이런 경우에 이골이 났는지 여유만만하게 말을 이었
다.
“위층을 전체 예약이 끝나있는 상태입니다. 오늘 하루 종일 말씀입죠.”
“또 예약이라는 건가?”
탄식과는 같은 한마디. 그러나 북궁단야의 서늘한 눈이 점소이에게
내리꽂히자 마냥 유들거리던 그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일순간 말을 멈췄다.
‘세상에... 이, 이런 사람이 다 있다니!’
그것이 그의 얼굴 때문인지 기도 때문인지 잘 몰랐으나 점소이는 곧 기운을
차렸다. 보아하니 셋 중 둘은 무인인 것 같고, 그렇다면 자신이 있다.
“오늘은 경사십수의 모임이 있는 날입죠.”
제딴엔 한껏 무게를 잡고 말을 했는데 이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경사십수? 하형은 들어본 적 있소?”
“모르겠소만.”
“경사... 뭐?”
가관이 아닌가!
“아니 세상에 경사십수도 모른단 말입니까? 공자들께서 그러고도 어께에
칼을 메고 다니는 것 입니까?”
놀람에서 분노로까지 바뀐 그의 음성은 북궁단야에 의해 간단히 부정되었다.
“경사십수고 뭐고 간에 내 알바 아니니까 그만 지껄이게. 하여튼 이층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요지 아닌가? 그럼 일층의 아무 곳이나 안내하면 되는
게 자네가 할 일이야. 경사십수니 어쩌구 떠들게 아니라.”
무언가 불만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스칠 사이도 없이 북궁단야와 눈이
마주치기 싫은 듯 점소이는 재빨리 이들을 안내했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취화선거의 총관이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굳이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해야겠소?”
“그렇소.”
“ ? ”
“내 미식가는 아니지만 괜찮다는 요리는 거의 먹어보았다고 자부하고 있소.
이리 건방을 떠는 요릿집 음식 맛이라도 봐야겠소.”
냉소까지 짓는 북궁단야를 누가 말리랴.
‘역시 북궁형은 가슴속에 뜨거운 무엇이 있군.’
하운의 생각과 달리 장추삼은 마냥 신났다. 하남 양양에서 신의 혓바닥이네
뭐네 소리를 들은 그의 미각일진데 황제가 기거하는 북경에서 최고로
요리를 잘한다는 음식집에 앉았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장형은 그리 많이 먹지도 않으면서 매우 기뻐하고 있구려.”
싱글싱글.
“인간이 단순하니까 그렇겠지.”
빙글빙글... 물주에게 화낼 필요 없다.
그냥 바보처럼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비 거는 건 재미적은 일이라
북궁단야는 점소이를 불렀다.
“뭘 잘하나?”
“예...우선 성도(城都) 북경에서 최고의 역사와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저희 취.화.선.거에 왕립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희...”
주절거리던 점소이가 급히 말문을 닫았다. 그것이 신호가 된 듯 음식을
나르고 주문을 받고 식탁을 치우던 여러 점소이들도 하던 일을 급하게
끝내고 취화선거 문 앞으로 집결했다.
‘ ? ’
장추삼들은 이 희한한 광경을 이해할수 없었지만 암 말 않고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황제라도 납시나?”
주문을 받던 녀석이 사라졌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다소 큰 목소리로
투덜거렸지만 장추삼의 말에 응대하는 점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의도
적인 무시가 맞는 표현이리라.
자연 부산하던 손님들 마져 말을잃고 종내 젓가락마져 모두 놓았다. 이
희극적인 순간은 이층에서부터 출입구까지 붉은 비단길이 깔리는 것으로
정점을 이루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물론 점소이들에 의해.
“경사십수 소협들의 왕림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열로 늘어선 점소이들의 우렁찬 외침. 뒤이어 열명의 청춘남녀들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비단길로 들어섰다.
“오오오. 저들이 경사십수 로군!”
“보게 저 현양한 기태를 풍기는 미공자가 진주 언가의 둘째아드님인 언군휘일세.”
“등 뒤에 검을 메고있는 공자님은 낭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석(南宮奭)이라지?”
중인들의 왁자지껄 함에 만족스러운 듯 만면에 미소를 띠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남궁석은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 바로 옆 탁자의 정적이 왠지 기분
나빴다. 본시 사람됨이 용렬하고 주목받는 것에 익숙해서 일까? 등을
보이고있는 둘은 얼굴이 안보여서 뭐라고 못하겠으나 자신들을 빤히
쳐다보는 사내의 찢어진 눈과 입가에 어린 조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하시오. 남궁형!”
“어서가요, 남궁가가.”
동료들의 재촉에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는 순간.
“패엥-”
“ ! ”
어디선가 기운차게 코푸는 소리!
“어, 시원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놈이었다.
‘저, 저... 찢어진 눈 녀석!’
그렇다고 자신들에게 어떤 욕도,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어께만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한술 더 떠서 등을 보이고 있는 둘의
말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코가 막혔었나 보오. 그런 건 참으면 안되지.”
“시원하겠군.”
부들부들.
기묘한 대치를 눈치 챈 점소이 하나가 재빨리 튀어 와서 얼른 자리로
안내하지 않았다면 무슨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
'이노옴, 오늘은 날이 날이니 만큼 참겠다. 재수 좋은줄 알아라!'
이층에 앉은 경사십수들도 이내 자신들의 세계에 빠져서 얘기꽃을 피우고
장추삼들도 나온 음식이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기에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요리 쪽에 해박한 지식 - 거의 노칠에게서 들은거지만 - 을 선보이며
좌중을 주도한 장추삼덕에 하운과 북궁단야는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반주로 나온 술 몇 잔으로 자리는 충분히 화기애애 했다.
위층은 위층대로 열기가 더해가고 있었다.
“그럼 남궁세가의 재산이 도대체 얼마란 소리요. 우둔한 나로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소이다!”
“하하하! 재산이 많아봐야 얼마나 많겠소. 강남에서야 뭐, 알아준다지만
자금성 황제폐하에 비한다면 어림도 없소이다.”
하북 팽가의 셋째라는 녀석이 슬쩍 띄워주자 과장된 웃음과 함께 멍청한
돈자랑을 하며 탁자의 맨 오른편에 앉아있는 여인을 쳐다보던 낭궁석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안돼, 저것도 싫어... 그럼 네가 관심두는 게 뭐냐?’
사실 오늘 모임은 낭궁석이 주최한 것이고 이유는.
‘어떻게 하면 너의 마음에 들겠느냐?’
그저 화사하고 깔끔한 척 겉멋에 신경 쓴 아홉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마의(麻衣)소녀 단리혜를 남궁석과 짝 지워주기 위함이었다.
진주 언가의 둘째라는 녀석이 술잔을 떨어뜨리는 척 하며 남궁석에게 몸을 숙였
다.
“남궁형, 단리소저는 무공광(武功狂)이니 다른 것 보다 무공 쪽으로 화제를
바꾸는 게 좋을듯싶소만...”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머리를 갸웃거리던 남궁석이 생각난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여러분 혹시 무림십장 중에 염라수 적괴라는 인물을 알 것이오!”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2966]  [연재] 삼류무사-91    첨부파일 :

그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던지 이층에 있던 모든 사람이 들었음은 물론
구석자리에서 젓가락질을 하던 노인이 호기심이어린 눈길로 힐끔거릴
정도였다. 당연히 계단 바로 옆의 장추삼들에게도 들렸다. 아주 자-알.
기분좋게 오리 다리를 뜯던 장추삼의 귀가 순간적으로 꿈틀한 것 같은 착각
이 들었고 조심스레 생선살을 발라내던 북궁단야가 동작을 멈추었으며 턱을
괴고 있던 하운이 팔을 풀고 단정히 앉았다. 일련의 동적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장추삼들과 경사십수들은 실로 묘한 위치에서 마주보고 있는 입장이었다.
일층과 이층의 높이차는 그리 크지 않았고 계단을 따라 장식된 난간 바로
앞으로 이층의 망나니들이 앉았는데 바깥쪽에 앉은 녀석들은 두 청년의 등
뒤로 장추삼의 얼굴을 마주보게 된 구도였다.
그 말은 장추삼 역시 난간 쪽에 앉은 망나니들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도
뜯어볼 수 있다는 건데...
일층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소요가 있었다.
“염라수 라면 한설오식(寒雪五式)으로 유명한 침투장(浸透掌)의 달인 아닌가?”
“왜 아니겠어? 낭인계열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장법의
고수지. 그의 손아래 쓰러진 명숙 만해도 부지기수 일걸?”
중인들의 웅성거림은 의외로운 것이라 장추삼이 오리다리를 내려놓았다.
“강시가 한가닥 하긴 하나봐? 염라수 라니까 저렇게들 수군거리는걸 보면말야.”
“그럼 장형은 무림십장이 그저 허명인줄 알았소?”
워낙 시끄러웠기 때문일까, 장추삼들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남궁석이 기운차게
말을 이었는데 이제 보니 대놓고 일층의 모두도 들으라는 식이었다.
“알려진대로 염라수 적괴는 불패의 고수요. 그렇지 않소 단리소저?”
마의소녀 단리혜는 갑작스런 질문에 눈이 동그래 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라수 적괴, 분명 무시못할 고수다. 그렇지만...
“흐음”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남궁석이 술 한 잔을 들이켰다. 나름대로 호쾌한 척
하려 했는지 꽤나 기운차게 목젖을 젖혔는데 힘조절에 실패해서 우스꽝스런
모습이었다. 단리혜의 살짝 찡그린 아미가 눈에 거슬렸지만 일단 무시하고
미소 지었다.
‘제깟 게 버텨봐야...’
남궁석이 왜 염라수 얘기를 꺼냈는지 눈치 챈 언군휘가 맞장구를 쳤다.
세 번만 더 들으면 백번을 꼭 채울 정도로 자주 나왔던 건데 잊을 리 있겠는가?
사정은 나머지 일곱명도 마찬가지인지 심드렁함이 그대로 얼굴에 베어있었다.
“적괴가 한번도 패한적 없다는 건 강호동도들 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오만 세삼스래 그건 왜 묻는 거요?”
역시 이놈은 손발이 잘 맞는단 말이야, 남궁석의 미소가 짙어졌다.
“맞소, 진적은 없지. 그럼! 도망간 적은 있지만”
뜸을 들었다가 툭 던지듯 말을 하는 남궁석의 표정은 우월감의 전형이었다.
“적괴가 한참 강호상에서 허명을 날리고 있을 무렵 이었소. 음... 한 육년
전인 것 같군. 간뎅이가 부었던지 그깟 작은 이름으로 우리 남궁세가와도
마찰이 있었소. 정말 웃기는 일이지. 일개 낭인 따위가 말이야!”
낭인 따위...
“킁! 그래봐야 지가 별수 있었겠소. 저 멀리서 우리 조부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꽁지가 빠지도록 줄행랑을 놓았다고 하더군. 아하하핫!”
“조부시라면 파랑검객 남궁선유 노대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파랑검객(波浪劍客) 남궁선유(南宮仙遊).
검정오존중 일인이자 활동하는 무림인중 최고수라 일컬어지는 인물.
전설의 장막 속에 가리워져 있는 절대오존은 마치 허상과는 같이 무림을
떠돌지만 강남의 한구석에서 검 한자루로 세상을 굽어보는 남궁세가의 이
전대가주는 실체 분명한 무림의 우상이다. 그가 펼치는 철검십식(鐵劍十式)
을 받아낼 인물은 현 무림인중 신화의 다섯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고 한다.
“하하핫! 단리소저도 잘 아시는구료. 그렇소, 파랑검객 남궁선유대협.
그분이 내 조부님이시라오.”
거의 광소에 가까운 웃음. 단리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중원 천하를 뒤져보아도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 속에 떠돌고 간곳조차
모르겠구나. 이렇게 되면 저 보잘것없는 남궁세가의 허풍장이에게 부탁을
해야만 하나. 죽도록 싫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인가.’
역시 남궁선유의 이름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층의 망나니들은 물론이고
일층의 손님들도 주저 없이 파랑검객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기 바빴으니까.
찬사가 칭송으로 바뀌고 염라수라는 명호가 고양이 에게 쫓겨 간 새앙쥐
만큼이나 오그라들 무렵 장추삼의 눈망울엔 핏발이 섰으나 그 이유까지
생각하진 못했다. 단순한 동료애 일까?
어째든 자리에 앉아있을 수만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참! 북궁형. 적괴대협이 왜 남궁세가와 시비가 붙었는지 아시오?”
앞자리의 하운이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별로 크지도 않은 목소리 였는데
중인들의 말소리 사이의 여백을 시의적절하게 가르는 것이라 그의 말은
취화선거 전체에 똑똑히  들렸다.
“말해보시오.”
북궁단야의 입가로 흰 심선이 그려졌다.
“육년 전, 아아...육년 전이 맞을 것이고 장소는 남궁세가가 위치한 강남의
주점이었다 하오, 배가 고팠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염라수가 주막에서
무언가 먹고 있었는데 작은 소란이 있었다고 하오.”
“혹시 그 소란이란 게 강남을 울리는 남궁세가 때문은 아니였을텐데?”
“왜 아니겠소. 당시 남궁세가의 외당(外堂)을 맡고 있던 남궁선유 노대협의
셋째아드님이 그날따라 뭐가 씌었는지 노래품을 팔던 맹인소녀를 찝쩍거리다
말을 듣지 않자 기물을 파손하며 난동을 부렸다고 합디다. 역시 술은 적당히
마시는 게 건강상이나 기타 여러모로 좋은 거 같소.”
눈앞의 잔을 멀뚱히 보고 있던 북궁단야가 찰랑이는 술이 보기 싫은지 얼른
마셨다.
“크-쓰군. 하여간 어찌되었소. 염라수의 성격상 그런 개.망.나.니 같은
짓꺼리를 하는 인물을 두고보지 않았을성 싶은데.”
묘한 부분에서 힘을 실은 북궁단야의 맞장구가 재미있어서 하운이 크게 웃었다.
“물론 가만히 있었다면 염라수 적괴가 아니였겠지. 그렇다고 술취한 사람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지는 없는 노릇이고... 그럴 땐 어찌해야 하겠소?”
“자고로 술 취한 개에게 매보다 좋은 약은 없지.”
장추삼이 끼어들었다. 주정부리는 남자는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부문 1호다.
“하하하! 맞소맞소. 흠씬 두들겨 맞고는 외당당주 남궁제고(南宮提高)가
본가로 가서 뭐라고 고해바쳤는지 몰라도 당시 무림을 쩌렁쩌렁 울리던
남궁칠검(南宮七劍)을 데리고 왔다고 하오. 그것도 모조리 말이요.”
“남궁칠검 전체라...”
낭궁칠검 이라하면 남궁세가에서 검을 가장 잘쓰는 일곱명의 교두(敎頭)를
말함이다. 이들이 있기에 남궁세가가 있고 이들의 힘으로 남궁세가의
후기지수가 검로를 열어가는 것이다.
“남궁칠검? 그사람들 쎈거요?”
강호물정 모르는 장추삼이 우스워서 그의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한잔
따라주고 하운이 북궁단야를 보았다.
“장형은 공부를 좀더 해야 할 것 같소.”
“많이 해야지.”
놀랍게도 남궁칠검 역시 염라수에게 모조리 패했다고 한다. 평소에 실없는
말 안하는 하운이고 보면 사실이라는 거다.
싸늘해진 공기를 의식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강남칠검 까지 패했다. 그럼 남궁가에 남은 밑천이 별로 없었겠는걸?”
“밑천?”
하운이 반문하고 물었다.
“그거 재미있는 표현이구려. 밑천...그렇소. 이제 남은 이라고는 남궁세가주나
파랑검객 남궁선유가 기거한다는 네명의 원로전(元老展) 고수가 전부였으니
남궁세가의 처지가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소?”
“한심하군.”
자르듯 북궁단야가 한마디 하자 싸늘해진 공기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층도 일층에서도, 그들 말고는 젓가락하나 놀리는 사람이 없었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의 단리혜와 싸늘하게 굳은 아홉명의 망나니들은 대조적인
마음으로 같은 탁자에 앉아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남궁석의 표정은 정말
볼만한 것이어서 모르는 사람이라면 의원 찾아가라고 점잖게 충고할 판이었다.
“염라수 적괴대협은 자신을 무림십장 중에서 가운데의 서열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본 실력은 능히 일, 이위를 다툰다고 봐야하오.”
“음음.”
“만약 남궁선유노대협이 세가의 움직임이 이상해서 나와 보지 않았더라면
남궁가까지 찾아온 염라수에게 무슨 망신을 당했을지 모르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장추삼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달리 하운과 북궁단야는 고소를 지었다.
사실 이 얘기는 실회조원 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도망간 건 도망간 거 잖아?”
그에 대한 답은 북궁단야가 해주었다.
“나이 서른도 채 안된 청년이 몇백년 전통의 남궁세가 주력(主力)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고수 중 고수라는 전대고수 때문에 물러났다면 그게 창피한 일일까?”
그대 폭갈이 들렸다.
“너희들 그따위 말을 지껄이고도 몸이 성할듯 싶으냐!”
멀뚱히 눈알을 굴리던 장추삼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씨근덕 거리며 일어선 남궁석이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둘을 가리켰다. 그의
기세에 탁자의 사람들도 모두 일어선 상태였고 일층 손님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 말이오?”
자리에서 일어선 하운이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아...”
“아...”
그순간 망나니들 가운데 여자 세 명이 한탄의 한숨을 지었다. 경사십수,
스스로를 육룡사봉(六龍四鳳)이라 스스로 치켜세우는 바보들 중 여성은 네
명이었다.
여자들의 반응이 더더욱 마음에 안들어 또 한명에게 소리 질렸으나 그건
남궁석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날... 불렀나?”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3030]  [연재] 삼류무사-92    첨부파일 :

‘ ! ’
일어선 장발의 사내는 무척 키가 컸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양 어께또한
넓고도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그의 등은 마치 광활한 평야를 보는
느낌이었다. 에감이란거... 누구에게나 존재하면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남궁석은 무언가 잘못된 걸 느꼈지만 이미 호랑이등에 올라탄
형국이라 앞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빙글-.
긴 머리의 사내는 천천히 돌아섰다.
“어머!”
“난 몰라!”
다시 한번 말 하지만 북궁단야의 매력은 마력 수준이다. 제아무리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미남들도 그를 본다면 더 이상 얼굴에 자신감을 잃게될 것이다.
거기다 싸늘하면서도 무언가 우수어린 분위기마저 더해지니 말해 무엇하랴!
하운을 보며 나지막한 신음성을 짓던 세 명의 여인들은 아예 해파리처럼
흐믈흐믈 녹았다. 가장 원시적인 감탄사를 연발하는 그녀들에게서 아까까지의
도도함은 한 점도 찾아보기 어려웠고 문제는...
‘이런 제길!’
남국석은 저도 모르게 뿌드득 이를 갈게 되었다. 언제나 냉정하여 철면선자
(鐵面仙子)라고 불리우는 단리혜마저도 야릇한 열기에 휩싸인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북궁단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부른 이유는?”
한점 온기도 없는 듯 차고도 맑은 음성.
“아아...”
급기야 북경에서 가장 돈많은 집 딸내미라는 이유만으로 사봉에 편입된
궁미연(宮美娟)이 털썩 주저앉았다. 사정은 나머지 두명도 별로 다를것이
없어서 양 어께를 자신의 팔로 움켜쥐고 있다든지 검지 손가락을 꽉 깨물고
폴짝폴짝 뛰고 있던지... 하여튼 가관이었다.
“가지가지 하고있네, 진짜!”
물론 장추삼이다. 그에게 지금의 광경은 가소로운 것 이었고 오직 아니꼬울
뿐이니까.
질투심에서 현실세계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남궁석에게현실은 냉엄한 것
이었다. 말이 좋아 육룡사봉입네 떠들고 있지만 변변찮은 수준이고 뒷배경
만으로 떵떵거리는 망나니들이다. 그나마 남궁석과 단리혜가 무도(武道)를
좀 걸었을까?
‘흐윽!’
그러기에 안다. 이자의 전신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하라.”
여전히 낮은 음성, 그러나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무엇이 담겨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 북궁단야의 낮고도 또렷한 말투이리라.
“안들리나본데?”
기분좋게 술한잔을 들이키며 장추삼이 쫑알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쌈구경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그이기에 지금의 순간은 최고의 기쁨을 줄
것이다.
“그럴수도 있겠군.”
북궁단야가 몸을 트는 순간 남궁석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너, 너희들은 우리 나, 남궁세가에 무슨 억한 시, 심정이 있어서 그 따위
소, 소리를 지껄여댄 거냐?”
“말은 할 줄 아는군.”
놀랍게도 이번에 빈정거린 이는 하운이었다. 미소는 짓고 있지만 그 역시
기분이 많이 뒤틀린 상태였다.
피식 웃고 북궁단야가 남궁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남궁세가에 단 한점의 감정도 없다.”
“그, 그럼 왜?”
“얘기의 잘려나간 부분을 보충했을 뿐이지.”
남궁석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놈들은 남궁세가의 이름따윈 길거리에
똥개가 싸놓은 물건보다 하찮게 취급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어떤 무림명숙
이라도 남궁세가라고하면 일단 한발 물러서 주는 걸 예의로 생각하거늘.
일층의 손님들은 어느덧 거의 빠져나가서 구석자리의 한둘이 전부였다.
그들 중엔 남의 말이나 사건을 이곳저곳에 옮기기 좋아하는 변설자도
끼어있을지 모를 노릇이고 만약 그가 이 상황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다면
그야말로 개망신 아닌가.
‘말로 풀어보자, 일단은 말로...’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차분하자고 스스로 다짐했건만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는
긴머리 청년의 눈빛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깊이가 있었다.
“너, 너희들의 일도 아닌데 왜, 나, 나서는 거냐? 강호에서 쓰, 쓸데없는
참견은 화를 부른다는걸 모,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저 친구는 자신이 부른 사람 앞에서는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나보군.”
느긋한 장추삼의 음성.
“그러게 말이오. 내 수전증(手顫症)에 대해서는 좀 들어본바가 있지만
설전증(舌顫症)이 있다는 건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오.”
역시 느긋한 하운의 대꾸.
이들의 대화가 재미있어서 웃을 뻔 했지만 북궁단야는 여전한 얼굴로 남궁석을
바라보았다.
“난 동료가 바보 되는 걸 듣고 지나칠 만큼 비겁하지는 않다.”
쿵-.
‘비겁!’
그 말은 남궁석에게 묘한 감흥을 주었다.
자신의 이런 모습을 조부께서 보셨더라면 얼마나 한심해하실까? 눈동자만
돌려 단리혜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녀는 자신을 거의 벌레처럼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이럴 수가, 내가 뭐하는 거지?’
이제껏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자신이 한심스러운 적은 없었다. 언제나 그는
떠받들여 졌었고 그것에 길들여져 본래의 남궁석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아니, 필요도 없었다. 파랑검객 남궁선유의 손주, 남궁세가의 소가주...
이것이면 만사가 해결됐었고 그것에 젖어 남궁석은 본래의 빛깔 같은 건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핫하...”
고개를 살짝 젖히고 헛웃음을 흘리던 남궁석이 자세를 바로하고 북궁단야에게
정중히 포권을 올렸다.
“소생은 강남 남궁세가의 제 오십팔대손 남궁석이라고 합니다.”
일변한 기세, 북궁단야도 느낄 수 있었다.
“천산의 북궁단야라하오.”
마주 포권을 하며 다시금 무림(武林)을 떠올리는 북궁단야였다. 전통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다. 전통은 오랜 시간과 그만큼의 피와 땀이 수반되어
쌓아올린 탑인 것이다.
“어라?”
놀라는 장추삼에게 하운이 웃어주었다.
“남궁가의 소가주는 오는 큰 가르침을 얻었나보오. 그의 일생일대에서 이와
같은 날은 아마도 짝을 찾기 어려울 것이오. 역시 북궁형이군.”
남궁석의 입매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왜 진작에 이런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까?
그의 옆에서 도락을 부추기던 자칭 ‘용’ 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입만 뻐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평정심을 찾은 남궁석을 보고 힘을 얻었음인가, 진주언가의 둘째라는
녀석이 등뒤에서 낮게 속삭였다.
“남궁형은 철검십식을 무려 오식까지 터득하고 있지않소. 누가 있어 남궁형의
검을 받아내겠소? 저런놈은 기껏해야 분위기로 한 몫을 보려하는 낭인 일 테니
혼구녕을 내주시오.”
‘이런 자를 친구라고 사귀었으니!’
상대가 강하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자신의 편에서 힘을 얻으면 금새 돌아와서
붙는 소인배의 전형. 그러나 방금전까지 그 안에서 놀던 건 다름 아닌...
‘부끄럽구나, 몹시 부끄러워!’
그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제나 자애로웠던 부모님, 근엄하지만
자신에게만은 모든 걸 다 해주신 할아버님, 못난 오빠를 하늘처럼 따르는 여동생!
‘죄송합니다!’
고개를 천천히 바로세우고 허리춤에서 검을 빼든 남궁석이 북궁단야에게
미소지었다. 질 것이다. 싸워보지 않아도 그정도는 안다. 그러나 여기서 조차
물러난다면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건... 싫다!
“나 역시 북궁형에게 무슨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감사드리고 있지요. 그러나 형장께서는 어떤 식 으로든 남궁세가를 욕보였으며
나는 세가의 소가주로서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양해하시길.”
남궁석의 눈을 들여다보던 북궁단야가 고개를 끄덕이고 어께에서 그만의
거검(巨劍)을 뽑아들었다.
무인은... 무인으로서 존중해야만 한다.
이때 분위기에 파묻혀있던 취화선거의 총관이라는 작자가 뛰어나갔다.
“싸, 싸움은 밖에서... 히익!”
둘 사이에 처진 미묘한 기류에 한바퀴의 나려타곤을 시전한 총관은 울상을
지었다. 탁자 서너개 가지곤 해결될 것 같진 않은데...
“오라!“
“사양치 않겠소.”
이쯤에서 일층으로 뛰어내리며 남궁석이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단지
수직으로 내친 것이건만 그 힘과 기세가 놀라워서 한발 뒤로하며 북궁단야가
몸을 뺐다. 그것을 예상이나 하듯 내리긋던 검은 중단에서 미묘한 호선을
그리며 북궁단야의 전신을 옭아맸다.
‘과연 남궁세가의 철검십식이다.’
장추삼과 함께 자리를 피한 하운이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
‘이대로 피할 북궁형이 아닌데?’
북궁단야는 오른손으로 검을 든 채 발로서 남궁석의 제 이식을 피해내고
있었는데 겨우겨우 버티고는 있었지만 옷고름 여기저기가 잘려나간 상태였다.
“차압!”
철검십식의 제 일초 분천지(分天地)와 제 이초 사방금(四方禁)이 발만으로
파훼 당하자 남궁석이 기합성을 지르며 제 삼초식을 펼쳐내었다.
천간투(天干透), 철검십식의 전오식(前五式)중 어쩌면 가장 위력적인 초식.
발만으로 피하던 북궁단야 역시 이번엔 그리 간단치 않음을 절감했다. 그
위세는 꽤나 살벌한 것이어서 일층에 있던 대부분의 식기들이 허공으로
치솟을 정도였으니까.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3044]  [연재] 삼류무사-93    첨부파일 :

묘한 건 일층 구석에 앉아있던 두 사람이었다. 둘 다 짚으로 엮은 삿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는데 체구가 작은 쪽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손을
둘 곳을 몰라하고 있었고 삿갓 밑으로 수염이 흘러있는 - 노인임이
틀림없었다 - 사람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격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경황중이라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앉아있는 탁자는 접시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검식의 파고는 놀라웠고 속도 또한 가공했으나 뒤로 밀리던 북궁단야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진 않았나보다.
그의 검은 빠르게 좌상에서 우하변으로 한번 내리그어졌는데 순간적으로
기이한 울림이 들렸다.
쫘아악!
“큭!”
공세를 펼쳤던 남궁석이 정신없이 세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탈색 됐으며 검을 든 손도 푸들푸들 떨렸다. 본래 천간투는
하늘처럼 넓고도 두터운 방패를 뚫는다는 이름처럼 예리하면서도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절기이건만 그보다도 강한 반발력으로 치고나오자 검식의 저지 이상의
여파가 그에게 되돌아갔고 충격은 거의 치명적인 수준이었다.
“후욱- 후욱.”
가쁘게 숨을 고르는 남궁석과 대조라도 이루듯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서있는
북궁단야의 모습은 언제 결전이 있었나싶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얄미울
정도로 안정적인 기복과 처음처럼 그렇게 젖어있는 눈, 언제든지 제 이초를
출수할 것처럼 유연하게 내려앉은 손목...
‘이 싸움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그러나 모두 하운 같은 생각으로 사는 건 아닌가보다. 사백년 역사의 남궁세가
소가주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상체를 비틀거리면서도 검을
곳추 세웠다.
“내, 내겐... 아직 이초식이나 남아 있소.”
북궁단야의 심유한 눈빛이 남궁석을 해부하듯 구석구석 살폈다. 어린아이
두들기기 좋아하는 못된 어른은 아니요, 이제 겨우 약관을 넘어선 청년에게
뼛골까지 패배의식에 휘말려들게끔 또 한번의 격돌을 유도하는 건 아니다.
“두개의 초식이라...”
검을 마루바닥에 푹 꽂아 넣고 잠시 눈을 감았다. 무엇이 옳은 길일까? 이
청년은 보기보다 고집에 세다. 검초 또한 그리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장난처럼, 손쉽게 와해시킬 만큼 만만하지는 않다는 거다.
“검에는 눈이 없다, 아는가?”
남궁석이 쓰게 웃었다. 동정이라면 사양이다. 어디서 이렇게 무지막지할 정도로
고강한 청년고수가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자존심만큼은 지기 싫다. 여기서
피를 토하고 죽더라도.
“제 사초 비류폭(飛流瀑)이오. 남궁세가의 철검십식은 형장을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펄럭펄럭.
전 공력을 운기 한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듯 남궁석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그의 전신에서 알 수 없는 접인지기가 흘러나와 근처의 접시들이 서로
부딪치며 깨져 나갔다. 육룡사봉입네, 경사십수네 하고 북경으로 검술수업을
와서 까먹은 일년이지만 강남에 있을 때는 그래도 충실히 검을 닦았었다.
이제 그 모든 걸 신명나게 펼쳐볼 때가 온 것 같다.
“타!”
슬쩍 움직였을 뿐인데도 어느새 북궁단야의 지척에 이르르며 남궁석의 검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렸다. 검은 하나인데 쏟아지는 검의 기세는 수의 법칙을
무시하듯 상하의 방향에서 때론 도도하게 쏟아져 오고 , 또한 치솟아 올랐다.
“훌륭하다!”
저도 모르게 하운이 감탄성을 질렀다.
비류폭, 일반적인 검세 와는 다르게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상대방을 윽박지르는
산검과 중검의 혼합검식. 그보다 하운이 칭찬한건 검초의 안정감으로 상변과
하변의 검세 에서 동일한 힘과 기운을 분배하였기에 어느 한쪽을 소홀히 대해선
안 될 일이었다. 과연 오대세가중 수위에 오를만하다고 하겠다.
번쩍.
북궁단야의 눈에서 섬광과도 같은 빛이 일었다. 앞에 있는 청년은 더 이상
동정의 대상 같은 게 아니다. 그는 망나니에서 하나의 잘 단련된 무인으로
되돌아왔고 그가 펼치는 검식은 무림을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다. 절정의 무인이
아닌 담에야 허투루 대하면 오히려 위험해지고... 아직 북궁단야는 절정이라고까

말하긴 어렵다.
거검을 움켜쥔 그의 손등에 힘줄이 불끈 일어섰다. 위, 아래에서 검풍이 이는
것은 검세의 방향 또한 상하를 향함이니 접점을 노린다는 건 그 만큼의 힘과
초식이 따라야한다.
꽝!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접점을 향해 힘으로 북궁단야의 검이 한번 움직였는데
효과는 폭음과도 같은 검풍의 소멸이었다.
“크헉!”
연달아 세 걸음을 물러선 남궁석이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처박았다. 힘을
제압하는 더 강한  힘!
남궁세가의 철검은 중(重)을 요체로 하는 검식이었고 북궁단야의 검식 또한
중을 요결로 한다. 본시 무공의 여러 가지 기법중에 같은 계열을 주로 하는
사람들끼리의 대전은 결과야 어떻든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게된다. 쾌(快)를
뛰어넘는 쾌, 변(變)을 뛰어넘는 환(幻), 중을 누르는 중... 이 모두가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쿨럭, 쿨럭!”
남궁석의 내상은 곧바로 코와 입에서 터져 나오는 피로 연결되었다. 외부 손상에
의한 출혈은 별 문제가 안 되나 지금처럼 신체 내부가 진탕되어 기혈이 역류한
경우는 빨리 손보지 않으면 자칫 큰 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궁단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을 짚으며 가까스로 일어서는 남궁석은 아직 패하지
않았다는 듯 패기어린 눈빛으로 북궁단야를 직시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쿨럭! 일초식이 남았소이다. 크헉!”
기침을 하면서도 의연하게 웃는 그의 기개가 아까웠으나 여기서 말린다면 혀라도
물 기세기에 망연히 서있는게 고작이었다. 한번 더 검을 섞는다면 남궁가의
이 젊은이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를지도 모른다.
“그럼, 갑니다.”
이때 조용하면서도 온화한 말이 끼어들었다.
“되었다. 넌 충분히 최선을 다했어.”
모두의 시선이 한 구석에 앉아있던 두 삿갓인에게로 모아졌다. 그리고 남궁석의
흐느끼는 듯한 음성.
“하... 할아버님!”
삿갓 밖으로까지 수염이 나와 있던 노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지
일어선 것 뿐이지만 그 동작하나로 공간 자체를 점유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노인.
그가 천천히 삿갓을 벗었다. 보통이 조금 넘는 키에 평범한 얼굴, 백설처럼
하얗게 센 머리와 하얀 수염, 그러나 깊은 눈은 이 노인이 보통 수양은
넘어섰다는 걸 단적으로 말해준다.
“북궁단야라고 했느냐?”
노인이 물었다.
“그렇소이다. 노선배가 파랑검객이라는 외호를 쓰시는 분이시오?”
한발 나선 노인이 북궁단야의 정면에 섰다.
“그렇다. 내가 남궁선유다.”
파랑검객 남궁선유!
설명할 필요 없는 현 무림의 최강자중 하나. 남궁세가의 철검십식을 극의에까지
깨우쳤다고 평가받는 검의 귀신. 혹자들은 검정오존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파랑검객과 나머지 네 명의 수준차이가 너무 극명해서
라고 하는데.
“소, 소손은 괜찮... 크엑!”
한사발의 피를 토하는 남궁석을 보는 노인의 표정은 복잡 미묘한 것이어서
누구라도 그 색깔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제 쉬어라.”
“오라버니!”
삿갓을 던지듯 벗으며 앳된 음성의 소녀가 남궁석을 부축했다.
“수, 수아도 왔구나. 오라비가 못난 꼴을 보여서 면목이 없다. 쿨럭, 쿨럭!”
“말하지 마세요. 말하지 말라 구요!”
남궁석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남궁수아(南宮秀雅)가 요상약을 꺼내면서 북궁단야

한번 노려보았다.
“저처럼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손속에 인정 한점을 두지 않다니!”
‘그건 오라비에 대한 모욕과도 같다.’
생각에 맡겨두고 남궁석은 운공상태에 들어갔다. 대개의 요상양이 그러하듯이
남궁세가의 보민환(保民丸)역시 복용 후 바로 진기를 순행해야만 효과를 본다.
솔직히 진기를 일주천 하지 않으면 부서질 듯 한 가슴의 통증을 제어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일련의 정리과정을 지켜보던 남궁선유가 고개를 돌려 북궁단야를 보았다.
정확히 말해 그의 오른손에 있는 거검을 응시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흠, 거참...”
말 없는 북궁단야의 응대에 상념에서 깨어난 남궁선유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미안하네. 예전에 어디선가 그런 식의 거대한 칼을 본 기억이
있어서. 하여튼 오늘 고맙네. 철모르는 손주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었어.
자네들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내가 직접 혼내주려 단단히 마음먹고
상경했었는데... 에잉, 한발 늦었어.”
머리칼을 한번 손으로 넘기고 북궁단야가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그럼 소생들은 이만...”
“잠깐!”
몸을 빙글 돌리는 북궁단야를 남궁선유가 제지했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그의 눈은 매섭게 빛나고 눈가에 잔주름마저 짙게 깔렸다.
“받을 건 미쳐 받고 가야하지 않겠나. 손주녀석이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은
듯하니 할애비라는 작자라도 대신 나서야 할 것 같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두 어번 눈을 깜빡이던 북궁단야가 고개를 들었다.
“나가시지요.”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3045]  [연재] 삼류무사-94    첨부파일 :

북경이 성도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 전체가 고루거각으로
가득 채워진 살풍경만은 아니다. 어느 도시나 그러하듯 번화가를 지나면 인가도
나오고 나지막한 야산도 자리하고 있었다.
장추삼들이 밖을 나섰을 때 하나 둘씩 별이 박히기 시작한 하늘은 여름의
서늘함이라는 다소 모순적인 정취로 온 천지를 수놓고 있었다.
“이곳이 좋겠군.”
동네 어귀의 야산은 평이한 지형과 인가와의 단절감 덕에 비무터 로는 그만의
조건이었다. 용이니 봉들은 남궁선유의 등장부터 모조리 꽁지를 빼서 따라오는
인원은 단리혜와 끝까지 뒤쳐져서도 미적미적 걸음을 옮기는 궁미연이 전부였다.
탁 트인 벌판에서서 남궁선유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쌀쌀하지도 않고 무덥지도
않은 초여름의 밤은 재미없는 비무나 하면서 보내기에 아까운 것인데.
장추삼과 하운을 눈으로 제지하고 북궁단야가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 공지의
중앙에 섰다. 따라붙는 단리혜에게 의아한 눈길을 한번 던지고는 남궁선유도
천천히 앞으로 나섰는데 그의 표정은 뭐라 형연키 어려운 난감함으로 뒤덮여
젊은 시절 철혈검객이라 불리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에... 우선 모양새가 무촉 좋지 않다는 것에 사과하는 바이네. 자네가
남궁가를 욕해서 또는 노부의 손주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었기에 이러는 건
아니야. 노인네의 변명이겠지만 굳이 자네와 손을 섞는 이유는 철검십식이
그저 그런 검식만은 아니란 걸 얘기해주고 싶어서일세. 이해하겠나?”
이해 안하면 어쩔 것인가. 남궁선유의 기세는 ‘반드시 알려주고 말거야’
라는 듯 벌써부터 실체화하고 있거늘.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북궁단야를 보며 남궁선유의 표정이 더 난감해졌다.
“그리고... 에... 원래대로라면 자네가 받아낼 초식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손주놈이 펼친 비류폭은 또랑물이 흐르는 것도 아니었어. 앞의
세 개는 그런대로 이해한 것 같았는데... 어허험!”
말미는 어색한 헛기침으로 대신하고 슬쩍 자신을 쳐다보는 남궁선유를 이해
못할 그가 아니다. 억지임에 틀림없으나 거절한다면 현 무림의 최고 명숙의
얼굴이 뭐가 되겠는가?
“파랑검객 남궁선유 노선배님의 귀한 검초를 두개나 견식 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북궁모는 감격할 따름입니다.”
‘멋진 녀석이군!’
저도 모르게 칭찬의 말이 나올뻔 했으나 급급히 입을 틀어막고 남궁선유가
자세를 바로 하였다.
“사문을 물어도 되겠나?”
“죄송합니다.”
“음.”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모든 싸움의 형식은 끝났다는 거다. 여지껏 동네
할아버지처럼 온화하던 그였으나 일단 출수하게 되면 경천동지의 위력이
담긴 검법을 쏟아낼 것이다.
꿀꺽-.
침을 한번 삼키고 북궁단야가 검을 빼어 들었다.
“오게.”
아까 와는 완전히 입장이 바뀌었다. 아니, 형편으로 따진다면 남궁석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눈앞에서 태산처럼 버티고 서있는 노검객은 말 몇 마디, 기세
따위로 논할 수준을 벗어나 있었으니까.
비스듬히 검을 쳐든 북궁단야가 좌상에서부터 천천히 검을 이동시켰다.
파라라락!
검풍의 막강한 압력 때문인지 끌어올린 공력 때문인지 길게 늘어트린 그의
머리가 솟구쳐서 마치 사자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석이가 당할 수밖에... 이 아이는 당년의 나를 한참이나 앞서가는구나.’
밀려오는 검풍의 파고속에서 남궁가의 철검식 외에도 이런 중검식(重劍式)이
있다는 것에 적이 감탄하던 남궁선유가 그의 검이 목전에 이르른 순간
늘어뜨렸던 검을 빠르게 위로 그어 올렸다.
츠으윽-.
그것이 시작이었다. 남궁선유의 비류폭은.
검기의 용암이 솟구치듯 위에서 솟아났다가 우박처럼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고 한때는 둘이 만나기도 하고... 몇 번의 칼질만으로 이런 변화 속에
무거움을 담을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울 뿐이라 장추삼들은 그저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헛!’
눈 앞에 밀려오는 검기의 수레바퀴는 인간의 힘으로 생성한 것 같지 않은
도도함으로 북궁단야를 압박해 들어왔다.
그가 여지껏 사용한 검식은 오직하나 사일귀무(斜一歸無)의 수많은 변형형
이었는데 이것 가지고는 남궁선유의 비류폭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궁단야의 검이 잠시 정면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목숨이 위태롭지 않다면 이초식부터는 사용하지 말거라!”)
아직 완전한 이해가 다르지 않은 상태라 펼칠 시 위험부담도 심할뿐더러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시전 자체를 꺼리는 듯했던 부친의 당부.
‘이런!’
잠시의 갈등사이 검풍은 검륜(劍輪)이 되어 노도처럼 공기를 짓이기고 닥쳐
들었다. 정면으로 향하던 검극을 급히 기울여 검기를 수레바퀴와 맹렬히
맞부딛혀 갔으나.
따당_.
“크윽!”
양발을 땅에 붙인 그대로 죽 밀려나던 북궁단야가 검극을 땅에 꽂아 신형을
안정시켰으나 밀린 거리만 해도 어른의 큰 발자국으로 열 걸음 이상 밀린 뒤였다.
‘낭패다!’
잠시의 갈등, 그 사이가 모든 걸 결정지었다. 원래 검초라는 건 일정한 틀에
의해 움직이는 게 정한 이치이나 검식을 몸에서 머리로 펼칠 정도가 되면
그 변화 또한 깊어지기에 일순간의 상념에 의해 검법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북궁단야는 두가지 초식에서 방황하다 뒤늦게 사일귀무를 펼쳤지만 그건 평소의
절반도 못 미치는 위력의 검초였고 노도와 같은 비류폭이 그의 정신을 훑고
가는 걸 막지 못했다.
당황한건 남궁선유도 마찬가지로 앞서의 전개와 힘으로 미루어 ‘이 정도는
견디 겠지’ 하고 펼친 초식에 느닷없이 얻어맞은 북궁단야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가지 짚이는 건...
‘저 아이는 검초의 변환을 시도하다 돌연 멈추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낭패를 보지도 않았으련만.’
하운이 뛰쳐나갔다.
“북궁형 괜찮소?”
부축하는 그의 손을 쓸쓸히 치우며 북궁단야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 이제 하나 남았소이다.”
“관두세. 자넨 몸이 상했어.”
칼을 거둔 남궁선유가 고개를 저었다. 순간의 호승심만으로 몸을 망치는
청년고수를 무수히 보아온 그로서 더 이상 대전은 무리란 걸 알고 있다.
그러기에 저 장발의 후기지수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운공조식하게.”
“난...”
말을 이으려는 북궁단야가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어께를 누군가 꽉
누르고 있었으니까.
“아니, 계속합시다. 노인장 쪽에서도 사람을 한번 바꾸었으니 이쪽에서도
한번 바꿀 거요. 괜찮겠지요?”
저놈은 뭔가?
‘노인장?’
찢어진 눈의 녀석은 남궁선유 칠십 평생에 처음 듣는 호칭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날리며 저벅저벅 걸어왔다.
“길게도 패였네. 저런 무지막지한 걸 직접 상대하니까 이렇지, 쯧!”
북궁단야가 뒤로 밀려나며 당에 밀린 자리가 우스웠는지 혀까지 차며
중얼거리던 장추삼이 뒤에서 뭐라 떠드는 - 그나마 힘도 없어서 속삭임
같았지만 - 소리가 시끄러웠는지 손을 살레살레 흔들었다.
“되었소. 당신은 충분히 최선을 다했소.”
“ ! ”
“ ! ”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남궁선유가 손주에게 했던 말을 대상만 바꾸어
이죽이는 장추삼이 우스웠는지 단리혜가 낮게 킥킥 거렸다.
“이놈, 네가 노부를 능멸하느냐?”
“뭔 소리요? 난 내 동료더러 말한 것 뿐인데 노인장이 왜 광분하고 그러시오?
노인장이 내 동료라도 되오?”
말끝마다 노인장, 노인장 거리는 것도 울화가 치밀거늘 녀석은 목까지 좌우로
꺾어 대는 것 아닌가, 물론 소리 나게.
“이... 노... 옴!”
파르르르.
전 공력을 일으켰음인지 남궁선유의 장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검기에
사이한 기운마저 맺혔다. 그런데도 놈은 겁도 안 나는지 여전히 이죽거렸다.
“아, 참! 난 노인장처럼 이 초식 하자고 안 할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 남았다는 일초만 합시다.”
츠츠츠츠.
사이한 기운을 파고를 일으키며 완연한 색채로 검의 가장자리에 맺혔다.
‘검기!’
북궁단야를 돌보던 하운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검기란 본래 고수들이 검식의
운용 중에 파생되는 기운인데 기세만으로 검기가 발생한다는 건 검기의 마지막
단계, 즉 검강의 초입에 들어서기 직전이라는 거다.
‘역시 파랑검객!’
그런데 뭘 믿고 장추삼이 나섰을까? 소령이에게 들은 바로는 심중안을 거쳤고,
마지막 움직임을 보지 못했고... 이거 다 하운에겐 뜬구름 잡기 같은 말일뿐이다.
백보신권 자욱의 옷자락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저 정도의 기세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왠만한 고수라도 오금이 저릴 만큼 패도적인 기세 속에 눈만 조금 가늘어진
- 그래서 진짜 째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 것 뿐 장추삼의 표정은 무덤덤함,
그대로였다.
“이제 가도 되오?”
검기를 모으는 와중에 남궁선유가 옛 성현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싸가지 없는 놈에겐 매가 약이랬지?’
그 몸짓을 좋다고 간주한 장추삼이 움직였다.
파박!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3128]  [연재] 삼류무사-95    첨부파일 :

무언가 희끗했다고 보이는 동시에 남궁선유의 정면으로 어떤게 들이닥쳤다.
‘흥!“
반보 옆으로 이동하는 것 만으로 그의 공세를 무력화시키고 몸을 돌리며
남궁선유가 세차게 검을 뿌려댔다.
꽈르릉!
검을 횡으로 그은 것 뿐인데 공기의 마찰음이 마치 천둥치는 소리처럼 요란
하게
들리고 막강한 압력으로 인해 관전자들의 얼굴이 겨울바람에 노출된 듯 따
끔거렸다.
‘어?’
추뢰보로 남궁선유에게서 기선을 빼앗으려던 장추삼이 목표물을 놓치고 방
향전환을
시도할 때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걸 느낄 사이도 없이 몸은 반응을 하고
있었다.
‘이거... 제대로 걸리면 골로 간다!’
실체화하지는 않았지만 반원형으로 넓게 퍼진 검기의 바람은 여지껏 그가
상대했던 무공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힘을 수반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현 무림인중 열 손가락안에 든다는 검객이 오를 대로 오른 약까지 포함해서
인정사정없이 뿌려낸 검식이란 거다.
광풍첩(狂風疊)!
철검십식의 전 오식 중 마지막에 올라있는 검식.
이빨을 지그시 깨물 사이도 없다. 뇌에서 명령을 하달하지도, 누가 시키지

않았거늘 장추삼의 발은 어떤 방위로의 이행을 감행하고 있었다.
타닥!
“억!”
하운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성이 터져 나오며 장추삼의 몸은 넷으로 늘어났
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분명 산무영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팟!
넷의 장추삼중에서 세 개의 신형이 검기의 파고들과 대항이라도 하듯 선풍
각으로
일종의 방어막을 형성한다고 생각들 무렵 최종의 신형은 완화된 검기의 틈

비집고 전진하듯 앞으로 나섰다.
“저, 저놈 대체 뭐야?”
분열 따위가 아니란 걸 안다. 그러나 동체시력(動體視力)에 의존을 넘어선
기시력(氣視力) 단계의 남궁선유조차 분간이 힘들만큼 쾌속하면서도 유연한
보법이 어디 있었던가. 저건 잔상인건 확실한데 실체처럼 힘과 세기를 가지

있다. 가장 웃기는 건 할 거 다하고 접근까지 시도한다는 거다. 파랑검객의
검기를 받아내고 말이다!
등차적(等差的) 추뢰무영!
기존의 추뢰무영이 분열된  - 그저 빠르게 움직여서 생겨난 잔상이지만
- 상들의 같은 움직임인데 반해 이번 것은 그 짧은 시간에 최소 하나의 신
형은
다른 일을 한다는 거다. 이전의 그라면 한번의 움직임에 지쳐 어께까지
들썩였겠으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분명 한 차원을 넘어선
모습이리라. 동일 시간대의 시간차라면 말장난일까?
‘이런 놈은 또 어디서 온 거야?’
처음 달려들 때는 그저 한수가 있나보다 했다. 녀석은 무지 빨랐으니까.
그래봐야 남궁선유에게 웃기는 정도고 기껏해야 옹알이도 안 되는 수준이다
.
근데 이건 아니다.
‘하지만 광풍첩 역시 아직 끝은 아니다!’
횡의 기운은 약화된 지 오래, 달려드는 장추삼은 좌하로 이동했던 남궁선유

검이 빠르게 위로 올라서는 걸 보았다. 광풍첩이라고 했다. ‘첩’... 중복
이라는 의미다.
꽈르릉!
세상을 좌우라는 이분법적인 개념만으로 나누겠다는 듯 직단으로 올려쳐진
검의 기세에 저도 모르게 움찔할 뻔했던 장추삼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한
지점에서 두발을 땅에 고정시켰다.
파바바방!
순식간에 터진 열 여덟 발의 주먹.
‘헉!’
움찔 뒤로 물러선 남궁선유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검과 한 발
자국 뒤로
물러선 거리와 그리고 세 걸음 물러선 장추삼을 보았다. 자신은 한 걸음,
녀석은 세 걸음 이라면 이긴 건 자신이지만.
‘기가 막히는 군.’
모든 싸움은 거리를 제압하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장력이란 공격법도 신체
에서 생성된 ‘기’를 분출하기에 상대방과 직접적인 접촉이 없다고는 해도
 시전자가 의도하고 뿜어낸 이상 타인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지점
이 있고, 검기 또한 마찬가지다. 본래 광풍첩은 검기의 중복된 힘으로 상대
방을 찍어 누르는 무서운 무공이지만 그것도 일정한 거리가 있어야 본래의
위력이 나오는 법.
‘코앞까지 들이닥친 놈에게 무슨 놈의 타격을 주겠누!’
거기다 시의 적절한 유성우의 난타는 힘없던 광풍첩의 ‘그나마’ 있던 기
운마자 와해시킨 것이니 남궁선유가 기가 막힐 수밖에.
“푸푸...”
남궁선유의 입에서 탄식 같은 소리가 새나오기 시작했다.
“후후후... 하하하... 와하하하핫!”
그것은 광소로 바뀌어 야산을 쩌렁쩌렁 메웠다.
주먹이 쓰라려서 호호 불고 있던 장추삼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아아... 요즘은 실성한 노인을 보는 게 일과인가 보다. 일진이 사나운 게
 틀림없어.’
한참을 웃고 있는 노인이 안쓰럽기도 하고 해서 그냥 서있자니까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다. 도대체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하형! 그쪽은 좀 어때요?”
떡 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하운은 망부석처럼 암말도 안하고 있었다.
“에잇! 하형!”
“어, 아아!”
그제 서야 정신이 든 듯 털털 머리를 흔들고 급하게 북궁단야를 바라보았다
. 안정된 호흡과 원할한 진기유통... 상기된 볼과 이마에 맺힌 땀으로 보아
 벌써 치유단계에 들었다는 걸 말해준다. 역시 정순한 심법을 익혔으리라.
“여긴 괜찮소!”
입을 쭉 내밀고있던 장추삼이 하운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켠 에서 구
경하고 있던 단리혜의 눈에 진한 아쉬움이 베어나고 있는 것을 상관하지 않
았다.
“이, 이보게! 이보게나!”
“아... 또 왜요?”
급하게 불러 세우는 남궁선유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짜증을 내는 장추
삼이었지만 화조차도 나지 않는지 파랑검객은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멋쩍게
 웃었다.
“아, 하하하... 자네와 나는 통성명도 하지 않았잖나. 이대로 가버리면 섭
섭하지.”
“귀찮네, 진짜!”
내가 만나는 노인들은 하나같이 이모양이냐, 어쩌구 꿍얼거리면서 몸을 돌
려 인사를 하기는 했는데.
“양양 장추삼이오, 됐죠?”
거의 붙이자마자 뗀 포권은 무성의를 그대로 보여주었고 완전히 돌리는 게
귀찮았는지 삐딱하게 틀었던 몸도 언제 그랬냐싶게 제자리로 돌아와서 갈
길을 재촉하려했다.
휙-.
기경할 신법.
어느새 장추삼을 막아선 남궁선유가 빙글빙글 웃으며 농지꺼리를 했다.
“아하하하... 자네는 성격이 너무 급하구먼.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거
늘 우리는 수(手)인사까지 나누었지 않은가? 이정도 라면 모르긴 몰라도 엄
청난 연으로 맺어졌었던 사이임에 분명할거야! 암, 최소한 친구, 아니지 어
쩌면 혈연관계였을지도 모를 일일세. 그런 우리가 이렇게 헤어져서야 되겠
는가?”
하운도 어이없었고 장추삼도 어이없었다. 그러나 가장 어이없었던 사람들은
 남궁가의 오누이 들이었다.
(“오라버니, 할아버님의 저런 모습을 본적있나요?”)
(“한번도 없구나, 허허... 참!”)
언제나 고고한 노송 같았던 자신의 조부였거늘 지금의 모습은... 입에 담기
조차 불경스러웠다. 그런데 왠지 실망스럽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다. 파랑검
객을 아는 노강호들 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만한 광경이었거늘
.
“그래요? 반가워요. 아주~아주 반갑습니다. 전생에 혈육이었을지 모를 노
인장! 됐죠?”
하고 옆으로 비켜서는데 남궁선유가 잽싸게 막아섰다.
“그렇지? 자네도 느끼지 않나? 나는 그걸 벌~써 알았다네, 암!”
이 노인이 느닷없이 망녕이 들었나 생각하던 장추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
가 맺혔다.
“노인장, 원하는 게 뭐요?”
깜짝 놀란 남궁선유가 말을 버벅였다.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데 난처한 사람
이 늘 그러하듯...
“뭐... 꼭... 원한다기 보다도... 굳이 말하자면... 에...”
자그마했던 미소를 실소로 터져 나왔고 장추삼은 품안에서 묵예갑이라 불리
 우는 검은 장갑을 꺼내 손에 착용했다.
“한 번 더 할까요?”
“그, 그래주겠나?”
반색을 하며 좋아하던 남궁선유가 주위를 의식했음인지 헛기침을 연발했다.
“어허험... 자네가 원한다면 한수를, 험험... 더 나눌 용의가 있네! 허엄.
..”
‘그렇구나!’
남궁석은 그제 서야 조부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찾지 못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건... 활기였다.
‘언제 할아버지께서 저리도 즐거워 하셨던가?’
없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저렇게 기뻐하는 조부의 모습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노인들은 외롭다. 그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커다란 권력이 있더라도, 세상
을 오시할 무림고수라고 하더라도 외로울 수 밖에 없다. 그 나이가 되면 실
질적으로 모든 걸 소유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만큼을 후세들에게 물려줘
야만 하고 자신이 맡아야할 일은 지극히 한정적인 범위에서 끝나게 된다.
돈 많은 상인이라면 직접 물건을 매입하거나 매출을 담당할 수 없다. 앉아
서 보고나 듣는 게 고작이다. 무인일 경우라도 직접 손쓸 일은 없다. 자신
이 나서기 전에 왠만한 사안이 처리되기 때문이다. 대란(大亂)이라도 나면
모를까?
그렇게 노인들은 도태되어 가는 것이다. 그들의 자리는 조금씩 갉아 먹혀서
 편안함 빼고는 남는 것이 없다. 간혹 나서려고 해도 주위의 눈과 만류로
인해 곧 뜻을 접게 된다. 남궁선유 역시 타고난 무인이다. 검을 사랑했으며
 검로를 밟았고 나름대로의 검에 대한 가치관도 세웠다. 그러는 동안 그의
청춘은 증발되었다. 한번 간 청춘이 다시 돌아 올리 만무하고 세월은 또 그
렇게 여류했다.
‘이놈은 너무 재미있다. 이 녀석과 싸우는 게 정말 즐거워!’
잃어버린 동심을 찾은 사람마냥 즐거워하던 남궁선유가 행여 마음 변할까
두려운 듯 재빨리 장추삼의 반대편에 섰다.
“사문을 물어도 되겠나?”
“쓸데없는 소릴 하면 그냥 갈 거요.”
“알았네! 알았어!”
장추삼이 검지손가락을 우뚝 세웠다.
“딱 한 초식만 더 예요. 알았소?”
“걱정 말게! 걱정마!”
두 손을 휘휘저으며 안심시키는 남궁선유의 모습은 장난감 뺏길까 두려워
뒷정리 잘하겠다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밤도 깊어지고 하니 빨리 끝냅시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가? 장추삼의 안하무인은 끝도 없는 것이었으나 파
랑검객에게는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눈앞에 밉살스런 말을 하
는 청년을 제지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가 먼저 나서서 톡톡히 버릇을 고쳐줄
 참이니까.
“그러시게, 편할 대로 하게.”
우두둑.
또 한번 장추삼이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주먹을 말아 쥐는 것으로.
휘르릉!
북궁단야로는 운기조식하고 있는 편이 나앗을 것이다. 기세를 끌어올리는
남궁선유의 모습은 지금까지와 판이하게 다른 엄숙함이 깃들어 있었고 기백
 또한 안으로 갈무리된 상태로 굳이 말하자면 최선의 예의를 다한 무인의
자세였으니까.
“철검십식중 육초를 시전 해야 겠지만 자네에게 팔초를 사용하고 싶네. 제
 팔초식의 이름은 오악세(五嶽勢)라고 한다네.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시끄럽
고도 귀찮을 걸세.”
“오악세라... 정말 멋있는 이름이구려.”
장추삼이 엄지손가락을 꼽으며 치켜세우자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남궁선유
였다. 언제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남의 칭찬에 기뻐했었던가.
“그런가? 와하하핫! 기분 좋은걸. 자네에게 칭찬을 다 듣고 말이야!”
‘장형은 참 특이한 사람이구나.’
하운의 눈가가 저도 모르게 주름이 잡혔다. 빙긋 나오는 웃음도 막을 도리
가 없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보법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누구
이든, 어떤 신분이든 끌어들이는 힘은 무엇일까?
‘하여간 알 수 없는 친구야.’
이때 운기조식을 끝낸 북궁단야가 눈을 떴다.
“후우-. 응? 아직도 안 끝났나?”
“몸은 좀 어떻소?”
“견딜 만 하오. 그보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둘의 대치상태에 의아해 하는 건 당연했다. 대주천으로 진기를 한번 돌리는
 동안 단초식의 승부가 나지 않았다면 팽팽한 대치상태를 의미한다는 건데
장추삼의 무공을 어림잡는 북궁단야로서 그가 남궁선유와 호각으로 어울린
다는 건 무리다.
“저건 뭐요?”
하운이 낮게 키득거리며 방금 전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하여간 실없는 놈이라니까.”
북궁단야의 입에서도 미소가 번져 나왔다. 궁미연인가 뭔가가 알 수 없는
탄성을 질렀지만 장내에서 그럴 신경 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싸움이 임
박했기 때문이다. 칼을 쥔 남궁선유의 손목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그래, 이거야! 이 흥분, 이 긴장감! 얼마나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감정인
가!’
“다시 갑니다.”
“음.”
‘음’ 이 끝나기도 전에 살처럼 뛰어나간 장추삼 이지만 남궁선유도 대비
하고 있었기에 막바로 일검을 쳐내었다.
우르릉.
검기 하나가 노도처럼 생성되어 달려오던 장추삼을 막아섰다. 그 기세가 어
찌나 장엄했던지 감히 맞받아칠 엄두도 못 내고 추뢰보의 탄력 그대로 산무
영을 밟아 개체분열을 시도한 장추삼이 한발 나가려는데 또 하나의 검기가
파공성과 함께 그를 막아섰다.
‘!’
보법으로 다시 추뢰보의 변형을 그려내었지만 연속적인 변화였기에 자연 고
유의 위력과는 차이가 있는 보법을 보이게 되었다.
우르릉!
‘이런 젠장!’
기다렸다는 듯 또 한번 그의 방향을 막아서는 하나의 검세! 이를 악물고 한
번의 보법을 더 밟으며 세삼 오악세라는 검식의 이름을 떠올리는 장추삼이
었지만 별 다른 대처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쾅! 쿠르르!
연달아 놓인 두개의 검세는 검의 산(劍嶽)이 되어 지칠 대로 지친 장추삼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어!”
저도 모르게 북궁단야가 벌떡 일어섰다. 남궁선유의 초식명이 오악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의 감각에도 우뚝 선 세 개의
검기를 돌파하는 장추삼의 앞을 태산처럼 가로막으며 전진하는 두개의 검기
가, 그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정말 대단하구나!’
단리혜도, 남궁석도, 모두 긴장된 마음으로 일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에게도 정확히 와 닿지는 않으나 뭔가의 기운을 거슬러 오르듯 전진을 시도
하는 장추삼을 가로막는 무지막지한 기세의 섬찟함에 머리털이 다 곤두설
지경이었다.
하운은 의외로 침착했다. 이 순진한 청년은 한번 사람을 믿으면 그의 능력
까지도 확대해석하는 경향이 있는지 느긋한 마음으로 검기와 악전고투 하고
 있는 장추삼에게 마음속으로 한마디 던졌다.
‘이번엔 뭘 또 어떻게 하려오, 장형?’
장추삼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아니, 말한 이는 없으니까 들린 듯한
착각임에 분명할 진데 그에게는 귀에 대고 크게 외친 것 보다 확실하게 느
꼈다. 소리를 몸으로 느꼈다는 거다. 그건 하운의 목소리와 거리가 먼 늙으
수레한 음성이었다.
<어떠냐? 요건 몰랐지?>
계속 한발씩을 보내다가 변칙적으로 두발을 연달아 쳐낸 남궁선유가 얄미워
서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는 분명 들었다. 이럴 때 화답을 안 한다면 장추
삼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저 밉살스런 노인네에게 한수를 보여줘야 할까? 어떻게든 뚫고 나가
야 할 텐데.
월야독작관추뢰...
우뢰를 쫒는 것은 발이 아니고 눈이다. 아무리 빠른 발도 그것을 직시하는
눈보다 느릴 것이다. 나는 우뢰를 발로만 쫒으려 하지 않았나? 우뢰를 쫒는
 다는 걸 하나의 싯구로 생각하지 않았나? 한번이라도 진정으로 우뢰를 쫓
아본 적이 있을까? 그저 빠름에 매혹당해 그 글자에 연연한건 아닐까? 아니
, 우뢰를 실체화해본적도 없다. 그렇다 장추삼! 우뢰를 쫓기보다 우뢰가 되
어야 하지 않을까?
꽈릉!
눈앞에서 한줄기의 우뢰가 지나간 듯 하다.
‘우뢰는 저런 거였어.’
자연스레 발이 움직였다.
파박!
가속이라도 붙듯 장추삼의 신형이 빨라졌다. 아니, 없어졌다. 그 자리엔 아
무것도 없었다. 원래 최상의 속도를 자랑하는 추뢰보였는데 거기서 한번이
더 빨라졌다면?
남궁선유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이, 이놈!’
두개의 검세가 체 생성도 되기 전에 빛살 - 아아, 그 표현도 부족하다고 생
각했다 - 처럼 빠져나오는 장추삼은 어느새 그의 면전에서 오른손을 치켜들
고 있었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떻소? 나도 한다면 하오!>
‘이크, 이 녀석이!’
꽝!
철검식의 일검 분천지였지만 남궁선유의 손에서 펼쳐지자 그 위력은 남궁석
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기에 장추삼 역시 전진을 멈추었다.
일순간 모든 사물이 정지한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심한 풀벌레들의
 먼 메아리만이 공터의 모두에게 긴장을 풀라는 듯 흐느끼고 있었을 뿐.
고개를 들어 장추삼을 한번보고 땅을 한본 보고를 반복하던 남궁선유가 눈
을 찡긋하며 그의 어께를 두드렸다.
“내가졌네! 완패야, 완패. 하하핫!”
“노인이 봐준 것 쯤은 다 알고 있소. 내가 뭐 바본 줄 아쇼?”
단리혜의 눈에서 기광이 흘러나왔다. 망연함, 기쁨... 그리고 기대였다.
“초식의 이름이 뭔가?”
“추뢰보라고...”
“추뢰보라...! 멋진 이름일세!”
엄지손가락을 꼽자 장추삼이 킥킥 거렸다.
“그럼 나는 ‘그렇소? 와하하핫! 기분좋시다. 노인장에게 칭찬을 다 듣고
말이오!’ 라고 해야 하는 거요?”
“떼끼!”
“하하하하...”
망년지우처럼 웃고 떠드는 둘을 보며 중인들은 묘한 감흥에 젖어 들었다.
만난지는 두시진이 조금 넘었을 뿐 이다. 말이라곤 지금 나누는 게 절반일
정도다. 그저 사내라서? 한번 쌈질하면 친해지는 것이 사나이들의 속성이라
서? 그건 아닐 것이다.
모두의 흥은 단리혜의 한마디에 의해 깨졌다.
“죄송합니다. 모두의 분위기를 헤치는 것 같아 감히 나서기를 주저했으나
이 자리가 아니면, 또 남궁노선배님을 위시한 여러 청년 고수 분 들을 언제
 뵈올 수 있을까 겁이 나서 미천한 몸으로 감히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서론이 너무 긴 것 같소.”
웃으며 건넨 하운이었으나 뒤따르는 단리혜의 말은 그의, 아니 모두의 안색
을 비추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3225]  [연재] 삼류무사-96    첨부파일 :

“검(劍)이란 게 무엇입니까?”
거창한 서두와 어울리지 않는 질문. 모두들 ‘뭐야?’ 하는 얼굴로 멍하니
단리혜를, 또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께를 한번 으쓱하거나 고개를 갸웃거렸
다. 워낙 확실한 대답이 서 있기에 대답 자체가 쉽지 않다. 술자리에서였다
면 쉽게 얘기했을지도 모르지만.
“단리혜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파랑검객 노선배님. 소녀 단리혜가 천하에 이름 높으신 남궁
선유 노선배님을 뵙게 되어 늦게나마 인사 올립니다.”
공손하게 포권을 하는 단리혜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남궁선유가 껄껄
웃었다.
“이름이 높긴... 너의 질문은 너무도 평이하면서도 굳은 얼굴로 보아 그리
 간단치...”
“사람 죽이는 쇠붙이지, 뭐!”
장추삼이 툭 끼어들었다. 어른 말하는데 끊는 것 처럼 못 배워먹은 행동도
없거늘 그에게는 별 상관이 없나보다. 그러나 사실 아닌가?
검이란 것은 병장기의 일종이고 병장기가 태동된 이유는 좀더 효과적으로,
빠른 시간 내에 적을 제압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상대방을 가장
확실하게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목숨줄을 끊는 것이다. 검의 재질이 하루가
다르게 강건해지고 날 역시도 예리하게 세워진 이유도 같은 것이다. 말이
좋아 검을 닦으면 마음이 닦이네 어쩌구 하지만 진짜 도인들이 아니라면 어
불성설에 불과하고 검을 참오 하는 진정한 이유는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의
실체적 접근과정을 풀어보겠다는 의지의 소산일 것이다.
“으음...”
검로를 밟고 있는 모두의 입에서 낮은 침음성이 세어 나왔다. 이어지는 장
추삼의 독설이 아프게 귓가를 두드렸지만 별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서 여기
저기 눈 둘 곳을 찾기에 바빴다.
“사실 검이라고 하면 멋진 장식에다가 형형색깔의 수실이 달려있고 이름까
지 새겨져서 얼핏 보기에 멋있지만 도부들이 소 잡을 때 쓰는 도끼랑 다를
바가 뭐가 있어? 자루가 나무를 대충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흔한 수
실하나 없어서? 킁! 바보 같은 소리지. 어차피 둘 다 쇠붙이로 만들어졌고
매일매일 날을 세우는 건 같아. 왜냐구? 둘 다 어떤 목적 때문에 만들어졌
다는 거야. 왜 도부들이 도끼를 쓰는 줄 알아? 소나 돼지 잡을 때 검보다
더 유용하거든. 만약 사람 상대 할 때도 검보다 도끼가 효과적이라면 너도
나도 도끼를 들걸.”
명검의 가치가 순식간에 도살장에서 쓰이는 도끼와 동류 취급을 받는 순간
이지만 거칠고 투박스러운 말투 속에는 굉장한 설득력을 함유한 단어들이
산재해 있는지라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하나 더 여쭈어보지요. 검법은 무엇입니까?”
“말을 돌리지 마시오.”
단리혜의 질문은 북궁단야에 의해 가로막혔다.
“선문답이나 듣자고 서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단리혜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이것을 한번 봐주세요.”
촹!
검을 빼들고 그녀가 초식하나를 시전 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목검을
쥐고 뒤뚱거리며 장난치는 듯 느리고 어색해 보이는 검법, 그나마 검초에
맞는 보법도 모르는지 허둥대는 기색이 역력했다.
“ ? ”
남궁선유는 단리혜가 뭘 얘기하고 싶은지 이해하기 어려워서 하품을 할려고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그러자 단리혜라는 실체가 사라지며 검의 궤적만
이 머릿속에서 몇 가닥의 선을 그리고 지나갔다.
‘ ! ’
얼마나 놀랐던지 하품마저 꿀꺽 삼켜버리고 남궁선유가 뭐라고 하려는데 장
추삼들의 경악성이 한발 앞서나왔다.
“어?”
“저것?”
손가락으로 연신 단리혜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추삼과 떡하니 입
을 벌리고 있는 하운, 그리고 한층 예리해진 눈으로 검의 방향을 쫓고 있는
 북궁단야.
이들이 반응이 의외였는지 초식을 거두고 단리혜가 장추삼들을 바라보았다.
‘왜?’ 란 물음을 담고서.
장추삼과 북궁단야의 끄덕임 속에 하운이 품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들고
한 장씩을 넘겨주었다.
“군자검이라 불리 웠던 백소유노대협이 그린 것이오.”
한 장 두장 넘어가는 그림은... 어설프게 펼치던 단리혜의 검식 이었다!
“어멋!”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느라 땅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을 생각조차 못하는 단
리혜를 일별하고 남궁선유가 종이를 받아보았다. 달빛 속에 춤을 추듯 검을
 놀리는 사내하나.
“중원천지에 이런 검식이 존재했었다니!”
그제서야 단리혜가 검법에 대해 물은 진의를 알게 되었다.
필살검초! 달 속에 그려진, 단리혜의 손에서 펼쳐진 검식은 오로지 사람을
죽이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다는 듯 요사스러운 흐름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강하다!’
남궁선유가 침을 꿀꺽 삼켰다. 실질적으로 철검십식중 마지막 초식을 전력
으로 펼친다고 해도 막아낼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보아하니 소저는 백소유노대협을 모르는 것 같구려.”
하운이 그림을 얻게 된 경위 - 장추삼이 말해준 그대로 -를 털어놓자 그제
서야 땅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 남궁선유에게 조심스레 종이를 청해서 모
았다.
“그분도 보셨나 보군요. 월광살무(月光殺舞) 중 제 일식을...”
“이런 젠장!”
느닷없이 터져 나온 폭갈. 모인 사람 중에서 이따위 막소리를 지껄일만한
인물은 오직 하나다. 가뜩이나 째져서 날카로운 눈인데 거기다 인상까지 쓰
니까 장추삼의 표정은 살기등등 그 자체였다.
“하나 피하는데도 죽을 맛 이었는데 더 있단 말이야? 차라리 날 죽여라,
죽여!”
하운은 쓰게 웃었고 북궁단야는 무덤덤한 얼굴로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
러나 단리혜의 반응은 달랐다.
백년을 허비했다, 무려 백년을!
“정말로... 정말로 월광살초의 제 일식을 깨뜨렸나요? 지난 백년 동안 노
력했었지만 우리 선조들께서 피눈물을 흘리며 찾아 헤메였거늘 결코 파훼하
지 못했던 것을?”
남궁선유가 망연히 하늘에 박혀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만남은 단
순히 우연의 중첩만은 아닌가보다. 무언가 거대한 흐름이 모두를 이곳에 불
러 모았고 기묘한 비무와 얘기를  유도한건 아닐까?
“왜? 못 믿겠어요?”
장추삼이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 하운의 어께를 쳤다. 백문이 불여일견이
라고 했다.
“자... 직접 보여주자고. 하형도 이거 할 줄 알지?”
“뭐, 그냥 시늉은 낼 수 있을 것 같소.”
둘이 공터로 나서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사실 남궁선유는 매우 기뻤다. 장
추삼들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기도와 유연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청년이었기
에 주시의 대상이지만 어떻게 물어볼 방법이 없었다.
스르릉-.
검을 뽑아들고 하운이 그림의 사내처럼 검극을 중극 으로 이동시켰다.
“오시오.”
입을 쭉 내민 장추삼이 돌멩이를 발로 찼다.
“이건 아냐!”
“ ? ”
“이건 아니라구. 새색시가 서방맞이하듯이 다소곳하게 ‘오시오’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적어도 그림 속에서 칼춤 추던 놈은 그렇게 공손하지 않았
거든.”
‘기세를 말함인가? 장형은 그림의 어디까지 본 것일까?’
실체적인 외면이야 두 눈 멀쩡한 누구라도 볼 수 있다. 감추어진 외면도 무
공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라면 어렵지 않게 유추해낸다. 그러나 정물화된 그
림에서, 그것도 얼굴조차 여백으로 자리한 인물화에서 분위기를 가늠한다는
 건 쉽지 않다. 이면의 이면... 그걸 장추삼은 본 것이다.
우우웅!
하운의 기세가 일변했다. 잘선 칼날 같은 기세, 그러나 장추삼은 여전히 딴
청을 부렸다.
“아냐, 아니라구. 그때 내가 느낀 건 그렇게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단 말이
야. 그래도 깡 하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꿇려본 적 없었던 이 장추삼이가 겁
을 집어먹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구.”
고수들은 분위기를 스스로 잡아내는데 능하다. 하운의 선한 성품상 그런 패
기나 살기를 품어본 기억은 별로 없다. 하지만 굳이 만들어내라면 못할 것
도 없다.
위이이잉!
검끝이 파르르 떨리며 사이한 기운이 떨어져 내릴 듯 검극에 맺혔다. 양 미
간이 좁아지며 하운은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개체적인 성격을 버리고 또 하
나의 인격체로 전이를 시도했다.
‘검의 귀신이 되어 피의 춤을 한번 춰 볼까나!’
파파팟-.
외향적으로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기세가 죽은 것 처럼 완화된
감마저 있었다. 그러나 장추삼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얼음덩어리는 이 검법하고 어울리지 않아. 하형밖에 없다. 이 괴상
막칙한 검을 소화할 사람은.’
순식간에 조여드는 살기! 마치 뱀의 동굴에 빠진 듯 전신을 옥죄어드는 사
이한 기운들!
이를 악물고 장추삼이 외치듯 말했다.
“이제 가오.”
말과 함께 전력으로 추뢰보를 펼쳤으나 어느새 하운은 그 자리에 없었다.
추뢰보를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의 신형은 어느새 한발 옆으로 옮겨져 있었
고 등골이 시릴 정도로 사이한 죽음의 검무가 하운의 손에서 펼쳐지기 시작
했다. 뱀의 혓바닥이 움직이듯이...
‘그래, 이런 기분이었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듯한 절망감. 검법이 아니었다. 이건 오로지 피와 죽
음만을 갈구하는 악마의 광소성처럼 은밀하면서도 거대한 기세로 장추삼을
휘감아오고 있었다.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3346]  [연재] 삼류무사-97    첨부파일 :

한 번을 상대해보았고 투로 또한 경험했었던 초식이거늘 실제로 펼쳐지자 머
릿속에서만 그려왔던 관념과 또 다른 위력과 기괴로움의 그림자로 너울너울
 다가오는 미친 검무. 방향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제멋대로 뻗어나가고 솜
처럼 부드러운 가벼움 속에 번들거리는 승냥이의 독아(毒牙)를 감춘 저주의
 손짓!
그런데 관전하는 모두를 놀라게 한 건 이 기경할 초식을 무리 없이 펼쳐내
는 하운의 몸동작이다. 마치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지극히 친근한 검로를
밟듯 그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웠으며 음산한 분위기까지 정확히 구현해 내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대저 모든 문파에는 비전의 절기가 있다. 소림의 삼대절학이 그것이고 무당
의 양의문검이 또한 그것이고 화산이라면 창궁우전검이 손꼽힌다. ‘비전’
 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것을 수록해놓은 구절 몇 자, 몸동작 몇 가지 만
으로는 본래의 위력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깊이가 들어있기에 내려받는 후
학들은 선사들의 이해 한 편, 시무 한 번이 금과옥조와도 같이 소중하고 값
진 비급인 것이다. 책자 하나 붙잡고 씨름해봐야 건질게 없다는 거다.
장추삼이 소지하고 있던 그림들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만큼 경천동지
의 위력을 함유한 검법을 수록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별무소용이다. 검
로에 맞는 보법하나, 깨달음 한 줄 쓰여 있지 않는 상태에서 무슨 재주로
검을 펼쳐낸단 말인가. 검법이란 게 상체만으로 펼쳐내는 아이들 골목놀이도
아니거늘.
‘오늘은 놀랄 일이 너무도 많구나! 당년의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패검
의 기재를 보는가 했더니 신체의 움직임을 극한의 자유까지 이끌어내는 괴
이한 녀석부터 검의 천재까지 만나게 되다니.’
그렇다. 하운은 보법하나, 조언 하나 없이 몇 십장의 종이만으로 누가보아
도 까다로운 검식을 내 것 처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스스슥.
추뢰무영이 펼쳐지자 한번 견식을 했던 남궁선유와 단리혜의 입에서 또다시
 탄식과도 같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건 누가 봐도 아름다웠으니까.
‘직접 대하니까 정신을 차리기 어렵군.’
눈앞에서 사람하나가 넷으로 불어난다고 상상새보라. 그러나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운의 검이 월광살무라고 명명된 검초의 마지막 변화를 시도
했다.
빙그르르.
곡선처럼 다가오는 직선인가 싶었는데 직선의 흐름을 살펴보면 커다란 호선
을 그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을 뭐라고 해야할까?
탓!
개체 분열된 세 명의 장추삼이 알 수 없는 선의 세계로 빠져드는 동안 남겨
져있던 장추삼이 빠르게 한보 나섰다.
파슛!
‘......’
‘......’
그것으로 비무는 종료되었다. 비무라기 보다 정해진 틀에 맞춰 보이기 위한
 겨룸, 즉 대타의 성격이었거늘 무언가에 홀린 듯 전력을 다해 지닌 바 모
든 것을 털어내고 둘은 서로를 외면한 채 숨을 골랐다.
장추삼의 눈은 베어진 자신의 오른쪽 묵에갑을 담담하게 응시했고 하운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아니 하늘 위 무언지 모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끝에 마지막에 당했어. 검쓰는 인간들이 죄다 이런 춤을 춘다면 맨주먹
가지고는 어렵겠는걸... 그나저나 묵예갑이 망가졌으니 녀석들에게 뭐라고
한다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빙글 돌아선 장추삼이 베어진 오른쪽의 묵예갑을 벗어서
 들어보였다.
“보다시피 이렇게 됐어. 다른 건 몰라도 피하는 건 선수라고 불리 우는 내
가 - 잠깐 우건의 말이 떠올라 고소 지었다 - 죽을 똥을 싸면서 이리저리
날뛰었지만 저놈의 검식은 끝끝내 쫓아와서 기어이 흔적을 남기고 갔거든.
뭐, 어떻게든 한번은 피했지만 또 다른 공격이 가해진다면 피할 도리가 없
다는 거지. 안그래, 하형... 어?”
하운을 돌아본 그가 깜짝 놀랐다. 밤하늘을, 그 뒤편을 응시하는 착한 젊은
이의 두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형, 왜 그래?”
말없이 그렇게 서있던 하운이 고개를 바로하고 장추삼에게 웃어 보이려 했
지만 잘되지 않는 듯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
“장형, 이 검식은 참으로 슬프오. 안 그렇소?”
“에?”
“그게 무슨 말이죠?”
단리혜가 냉큼 나섰다. 그녀로서는 하운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해
서도 안 된다. 고조부님을 앗아갔고 가문의 영광을 앗아갔다는 악마의 검식
이 슬프다니! 그건 피의 아수라무(阿修羅武)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것에
감정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런 미친 검식이 슬프다니! 맞아요, 슬프죠. 그 검식을 마주대한 이는
슬펐겠죠.”
그녀의 눈이 장추삼에게 옮겨졌다.
“공자의 보법은 실로 눈부시지만 제 이초가 날아왔다면 어떨까요? 또 한번
 피할 자신이 있겠어요?”
“어쨌든 이 검식은 슬프오.”
하운의 무거운 말은 중인들에게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반박하려던 단
리혜가 곧 고개를 가로젓고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의 고조부님께서는 태을검선(太乙劍仙)이라는 명호를 가지고 게셨습니
다. 물론 백년도 더 지나 이제 잊혀져가는 노을 같지만.”
“태을검선 단리고학!”
남궁선유가 깜짝 놀랐다. 그건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백 년 전에 가
장 강했던 세 명의 무인중 하나의 이름이, 남궁선유가 철들면서 우상처럼
들어왔던 명호가 언급되었으니까.
무림십좌(武林十座).
백 년 전의 가장 강했던 열명의 이름. 그중 태을검선 단리고학은 삼선삼목
사왕(三仙三目四王)중 가장 윗 서열인 삼선의 반열에 들었던 절대고수였다.
 삼선과 삼목 그리고 사왕중 두 명의 신비로운 실종 때문에 한때 무림계가
들썩했으나 강호의 속성은 이들의 이야기를 세월의 흐름 속에 묻어버린 것
인데.
“소저가 정녕 태을검선 노대협의 혈육이란 말인가? 이럴수가...”
그의 노안은 많은 질문을 담고 있었다. 태을검선의 실종원인과 검식의 상관
관계, 단리혜가 검식을 펼친 이유... 그리고 두 번째 초식의 실존여부 까지
도.
“증조부님께서는 월광살무의 이 초식을... 감당... 해내지... 못하시고...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단리혜가 두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렇다면!’
하운들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무림십좌중 최소한 둘 이상이 같은 검식에 의
해 희생되었다는 거다. 그것도 암습이 아니라...
누가 있어 백 년 전 천하십대고수들을 둘이나 해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
도 상대는 이초 이상을 쓰지 않았다는 거다. 단 이초만으로 백 년 전 천하
제일인을 바라보았던 인물을 죽였다.
그런데...
‘검법에 서리서리 맺힌 이 비애(悲哀)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하운을 갑자기 들고 있는 검의 무게가 너무 버거웠다. 슬픔은 한이 되어 세
월의 시공을 돌고돌아 이 젊은 청년의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무언가를 넌지
시 묻고 있는 것이다. 단지 초식한번을 펼쳤음 인대 시전자의 아픔을 느꼈
다는 건 상식선에서 말이 되지 않겠지만 하운은 눈이나 손이 아닌 온몸으로
 그것을 받아들였고 이해한거다. 예전, 화산에서 창궁검식에 매달렸던 일대
제자로는 도저히 불가능 했을 법한 일.
...... 잊어라, 잊어라 네가 배운 초식을 잊고 너의 마음속에 있는 상념을
잊고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와 무게를 잊어라. 너를 잊고 이 동굴도 잊고,
나도 잊고... 삼라만상 모든 걸 버릴 때 비로소 너는 하늘을 보게 될 것이
다......
상념을 털 듯 검을 칼집에 갈무리하고 단리혜에게 하운이 물었다.
“두번째 초식은 남아있지 않겠구려.”
“그렇습니다. 지금 소녀가 펼친 일초식도 겨우 재현해낸 것이니 이초까지
전해 내려오길 바라는 건 무리겠지요. 그런데 공자께서는 정녕 월광살무를
근자에 접한 것 입니까?”
“그렇소이다. 내가 이 초식을 접한 건 오일이 채 지나지 않았소.”
저도 모르게 하운의 아래위를 훑어보던 단리혜가 낫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들 삼인조는 뭐하는 청년들이란 말인가? 파랑검객 남궁선유 조차 감탄을 금
치 못하는 중검의 북궁단야와 백 년 동안 깨지지 않던 무적의 초식을 일순
간에 파훼해버린 장추삼, 그리고 몇 번 본 그림만으로 백 년 동안 묻혀있던
 고대의 초식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아니 그 속에 담긴 감정까지 집어내는
하운. 무엇보다 구색이라도 맞추어 놓은 거처럼 상이한 분위기를 지닌 셋의
 기질.
척 보기에도 물불 안 가릴 것 같은 천방지축의 장추삼과 두어 번의 생각 뒤
에도 한번을 더 장고(長考)하고 나서야 몸을 움직일 것 같은 북궁단야, 이
들의 중간에서 가교처럼 버티고 서서 아무런 특징이 없는 듯 묻혀있는 하운.
‘성격과 무공까지 일치한단 말인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듯 다른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상념에 몰두해 있었다
. 무언가 크게 놀랄 것이 있기는 한데 애써 자제하듯 어금니를 꽉 물고 사
고의 조직을 끼워 맞추려는 듯 턱을 숙이고 북궁단야의 모습을 보며 간혹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찢어진 장갑을 어떻게 하
면 기우지’ 하고 궁상을 떨고 있는 장추삼.
이때 망연히 서있던 남궁선유의 입에서 한마디가 터져 나왔는데 소리의 고
저가 없어서 그런지 을씨년스런 느낌마저 주었다.
“정녕 그들이 존재했단 말인가... 단순히 전설 같은 것 인줄 알았거늘...”
매우 작았으나 불문의 사자후처럼 모두의 귀를 세차게 두드리는 내용을 함
유하고 있기에 몰입해있던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모두의 시선이 남궁선유에
게 향했다.
그러나 뒷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멍한 눈빛과 다
물어지지 않은 입술이건만 거기까지가 한계인 듯 석고처럼 굳은 남궁선유는
 더 이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장추삼의 눈이 역팔자를 그렸다. 그의 성격상 이런 분위기는 당최 맞지 않
으니까. 그런데 왠 일 인지 나설 수가 없다. 무어라 한마디만 하면 위태위
태하게 지탱되던 어떤 것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아서 감히 어쩌질 못하고
 눈만 꿈뻑일 뿐이었다. 하운의 눈도 어떤 기대를 강력하게 담고 있었고 단
리혜도 마찬가지 였지만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했다. 보이지 못한다는 게 옳
은 표현이리라.
움직이는 것이라곤 바람에 몸을 기대어 이리저리 고개 짓을 하고 있는 나뭇
잎과 풀들 뿐. 반짝이는 별들의 몸짓이 전부였다.
그렇게 멈추어만 있을 것 같은 시간은 북궁단야의 낮은 물음에 의해 급박하
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둠의 율법자... 맞습니까?”
꽝!
벼락이라도 맞은 듯 남궁선유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자네가 그 이름을 어찌 안단 말인가? 자네의 연배로는 절대 알 수 없는,
묻혀진...”
“묻혀졌다고 해서 끝난 건 아닙니다.”
“맞습니다!”
단리혜가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으니 지혜로 충만한 눈망울
과 웃을 때면 들어가는 양쪽 보조개는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고 다소 애띤
듯 여린 목소리가 귀여운 여인. 그녀의 눈망울이 흐려져 왔다.
“백년을 허비해서 알아낸 건 단 한초식과...”
끝내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저주스러운 이름하나... 어둠의 율법자...”
어린아이처럼 눈가를 훔치고 선고하듯 말을 마치는 그녀의 모습은 강하려고
 노력했기에 더 처연했다.
“이게 전부입니다.”
“정말로 실존했단 말인가... 정말로...”
하운의 눈빛을 이해했다는 듯 그의 입이 열리기전에 북궁단야가 한 발 앞서
서 말했다.
“그렇소. 나 역시도 어둠의 율법자라 불리 우는 존재의 단서를 추적 중 이
었소. 말하지 않은 건 이해해주시오.”
“자네도 어둠의 율법자를?”
오늘 남궁선유는 십 년 치 ‘놀람’ 을 모조리 사용하겠다는 듯 연신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그렇습니다.”
“끊듯이 북궁단야가 말을 시작했다. 그리고 장내에서 그의 말이 끝날 때
까지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깜빡이던 별마저도 그의 이야기를 경
청하겠다는 듯 흔한 떨림 한번 보이지 않았고 나서기 좋아하던 장추삼도 무
얼 생각 하는지 모르지만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기까지입니다. 노선배께서 아시는 것과 큰 착오가 있는지...”
“아닐세, 오히려 자네가 더 정확히 보고 있는 것 같아. 그나저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린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남궁선유의 한숨은 자책으로 바뀌었으나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는 이 일에 나설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노선배께서 마음 쓰시는 건 이해하나 방법이 없었잖습니까? 그리고 북궁
형의 말대로라면 그들, 어둠의 율법자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보게. 그게 그리 간단치 않단 말이야...”
위로하는 하운에게 쓴 웃음을 던지고 남궁선유가 평평한 바위에 털썩 주저
앉았다.
“모든 일엔 원인이 있단 말이지. 생각해보게. 여지껏 전설로만 추정되었던
 어떤 일이 현실화되었네. 아직 단정 지을 순 없지만 거의 맞는 것 같아.
지금 내가 겁을 내는 건 말이야...”
이 대목에서 남궁선유는 길게 말을 늘였다.
“내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비록 나이는 어려도 ‘자네들이라면
’ 이라 생각이 들기에 말하도록 하지. 현 무림 최강자라고 한다면 누구를
꼽겠나?”
“적미천존!”
투덜거리듯 장추삼이 말했다. 그의 음성은 노골적인 적개심을 가득 담고 있
는 것이라 얼핏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남궁선유가 말을 이었다. 저녀석은
 원래 말투가 저런가보다 하면서.
“그래, 사람들은 누구나 적미천존이라고 말들을 하지. 그런데 그가 여지껏
 변변한 생사결 한번 치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나? 이상하지 않은가? 그
래, 천하제일인이란 자리가 목숨을 건 격투한번 하지 않고 오를 만큼 만만
하다고 보이나?”
“음음.”
고개를 끄덕이는 장추삼에게 남궁선유의 질문이 꽃혔다.
“이상하지? 그런데 나를 포함한 검정오존 모두가 본적도 없는 적미천존을
천하제일로 인정했다네. 왜일까?”
“아니, 노인들이 쑥덕쑥덕 결정한 걸 내가 어찌 알 수 있겠소!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괜히 무안해서 신경질 부리는 그를 무시하고 남궁선유가 하운을 보았다.
“중원천지에서 검을 가장 잘 쓰는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정말 이지 백무량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다. 사문의 장로라서가 아니라 존경
해마지 않는 완성된 무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분이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에
게 다른 대답을 할 것을 결정했다.
“만승검존 노선배로 알고 있습니다.”
만승검존!
제 이차 무림혈겁이라는 흉몽지겁이 벌어진 하남 땅에 홀연히 출몰하여 천
하를 평정한 절대의 검객. 절대오존중 이강에 속하고, 원하지 않았는데도
무림맹주에 오른 신화의 검도고수.
“맞아, 만승검존이지. 당시 그분의 능력은 실로 놀라워서 일 검을 받아낼
자(者) 얼마나 되었을까?”
잠시 과거를 쫓듯 아련한 곳을 응시하던 남궁선유가 침착하게, 그러나 충격
적인 말을 했다.
“그분 스스로가 말 한 걸세. 적미의 사내에게 당해낼 자신이 없다고 말이
야. 우스운 일이지. 말 한마디로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천하제일
인을 다투는 절대오존의 최상위 서열로 등극했다는 것이. 허나 어쩌겠나.
화자(話者)가 당시의 천하제일인 이였거늘.”
모두들 그윽한 시선으로 돌아본 남궁선유가 찬찬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분은 실종되었다네.”
쿠궁!
천하제일인의 이유 없는 실종. 단서 하나 없는 연기와도 같은 증발. 스스로
를 감추지 않은 이상 어느 누가 감히...
“노선배께선 혹시 적미천존을 율법자와 관련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지금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하겠나? 가정해봐야 억측일지 모르고 뱉아 놓아
 봐야 말장난처럼 공허한 얘기일진데.”
겉으로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하던 무림. 그러나 알고 보면 유리판처럼 매끄
러운 그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 아닐까?
무림에서 손꼽히는 명숙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올 때 이제 강호를 알게 된
 애송이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 하는 지 장추삼의 입꼬리
는 몇 번이고 비틀림을 반복하며 갸우뚱거리는 고개와 비대칭을 이루었다.
갑자기 무거워진 공기. 바람 한점 없거늘 한발 띄기도 어려울 만큼 밀도가
높아진 여름밤의 축축함이 싫었던지 남궁선유가 단리혜를 위로했다.
“태을검선의 실종 이후로 단리세가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거늘 의탁할 이 하나 없는 강호에서 백 년 전의 수수께끼를 풀기위해
동분서주 했다니, 정말 가상하구나. 여인네의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꼬.”
진심어린 말이었기에 단리혜의 눈망울에 물기가 맺혔다. 그러나 울 수는 없
다. 그녀는 아직 울어서는 안 된다.
“사실 소녀의 얘기는 끝난 게 아닙니다만...”
“엥?”
“음!”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장추삼들이 깜짝 놀랐다. 몸짓 한번, 이야기하
나마나 풍운을 부르는 그녀이기에 덜컥 겁부터 나는 건 당연했을지도 모른
다. 뭐, 그렇다고 ‘그만해요!’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려움에
앞서는 호기심이 모두의 솔직한 심정이었으니까.
그녀의 눈망울이 먼 옛날의 안타까움에서 현실적인 슬픔으로 자리를 바꾸었
다. 절절한 표정은 한마다 한마디가 꿈틀거리듯 살아있는 언어가 되어 한자
한자 여름밤을 수놓았다.
“제게는 오라비가 한 분 계셨었지요. 만인을 오시할 무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제갈량같은 지모를 가지지도 못했지만 열정 하나만큼은 남들보다
 위였기에 가문의 몰락과 흉수의 정체에 관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추적 하
셨었지요. 힘 하나 만큼은 장사소리를 들었었기에 거의 절전 되다시피 한
가문의 검법을 두자루 도끼로 펼칠 때면 나름대로 위력이 있었나 봐요. 강
호상에 ‘이규재래’ 라는 허명도 얻을걸 보면 말이에요.”
“비발쌍부?”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3459]  [연재] 삼류무사-98    첨부파일 :


그것도 그럴 것이 ‘이규재래’라 불리 우는 비발쌍부는 원재혁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오라버니가 그렇게 바꾸었답니다. 원한을 잊지 않겠다면서... 단리란 성
을 쓰는 것은 선조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랬었나...”
비발쌍부 원재혁은 사실 그리 만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두 자루의 도끼를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멋지게 구사하여 수호지의 백팔영웅중 도끼의 신이라
는 이규를 보는 듯하여 ‘이규재래’란 별칭까지 얻었고 강호 50대 고수 중
 도끼를 사용하는 유일한 인물로 등재되어 있는 특이한 무인이었던 것이다.
“근데 비발쌍부의 소식을 요 근래에 들은 기억이 없구나. 어찌된 일이냐?
설마...”
뒷얘기는 하지 못했다. 천지간에 오라비 하나와 서로를 의지하며 힘겹게 일
보일보를 딛고 있는 것 같은데 차마 그 말만은 꺼내기 어려웠다. 나이 젊고
,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던 무인이 갑자기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재기불능의 부상이나... 죽음밖에는 없다.
그러나 단리혜의 입에서는 다른 대답이 나왔다.
“오라버니는 몇 년째 연락이 되고 있지 않습니다.”
남궁선유의 노안이 흐려졌다. 엎어 치나 메치나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하
나밖에 없는 누이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는 처지라면 거동을 못할 상태인
것이다. 목숨이 붙어있건 안 붙어있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정도라면 무인
으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리
혜로는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 애틋한  마음을 어찌 짐작하지 못하랴.
“연락이 안 된다... 허어, 걱정이구나.”
실종은 답이 없다. 영원한 기다림의 지루한 반목이지만 바꾸어 말한다면 완
전히 끝난 건 아니라는 믿음과 기다림이 있기에 미결(未決)인 채로 사람들
은 종종 남겨두고 싶을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졌다. 축축해지는 공기가 아니더라도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처
럼 오연히 세상에 군림하고 있었고 이시간이 되면 둥지로 돌아가서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단리혜의 가련한 인생이 눈에 밟히지만 그건 무인의 길을
걷는 사람, 혹은 무인세가의 일원 중 패배자가 되었다는 경우의 수에 채택
되었다는 것뿐이고 그건 누구라도 해당가능한 일이기에 격려 이외에는 해줄
 방법이 없다. 뭐, 어둠의 율법자 문제라면 다르겠지만 이것 역시 현재로는
 밝혀진 사실이 너무 적다. 그리고 실체가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맡
을 수 있는 역할은 지극히 미미한 것이다. 솔직히 그들의 능력이 사실이라
면 그녀뿐 아니라 전 무림인이 나서도 추릴 사람은 손가락에 꼽아야 할 판
이기에 단리혜를 바라보는 남궁선유의 눈빛이 착잡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최종적으로 연락된 게 언제였더냐?”
위로의 말로 던진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건 다른 대답이었다
.
“오라버니의 종적이 끊긴 곳은 하남이었습니다.”
‘꽤 오래되었나 보군. 기간을 말하기 싫어하는 걸 보니.’
장추삼은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먹다 남긴 술은 애당초 마시지 않은 것
만 못할 정도로 미미한 양이어서 뱃속의 주충들이 오만상을 쓰며 항의를 하
고 과도한 힘을 몰아 썼기에 몸도 노곤한 것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다. 술을 마시면 한 시진은 족히 앉아 있을 것 같은데 또 잠자리에
든다치면 세상모르고 퍼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아우, 난 이런 분위기 싫어! 적응이 안된다구.’
목청껏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기에 더 힘들다. 그가 보기에도 단리혜
라는 처녀는 딱하다. 가련하다 못해 보호해주고 싶을 만큼 처연하지만 이렇
게 무게 잡고 탁상공론하며 신세한탄 들어주는 식은 정말이지 몸도 마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슬슬 고개도 돌려보고 목을 꺾어가며 소리 한번 내보고 발밑의 돌멩
이들을 툭툭 차보고 있지만 관심 두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정말 젠장이다!
‘이런 고문이 몇 시진 계속된다면 기밀이고 뭐고 모조리 불어 버릴 거야.
정말 무서운 상황설정이군.’
그런 인간은 자기밖에 없다는 걸 모르는 듯 또 하나의 고문법을 착상해낸
머리에 스스로 감탄하며 나름대로 그 방법과 시기에 관해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쓰잘데기 없는 곳에 탁월한 위력을 발하는 잔머
리라고 하겠다.
‘일단 시각은 저녁이 좋겠어. 음, 밥을 잔뜩 먹여놓고 나른해질 무렵 느닷
없이, 또는 불시에 신세타령을 하는 사람을 들여보내는 거야. 음음... 기가
 막힌 순간포착이로다! 그리고 피고문자에겐 단 한마디의 발언기회도 주어
지지 않아야겠지. 그래야 안타까움과 짜증이 배가 될 테니까. 그런 다음 무
게 잡는 놈 하나, 그냥 영감,  그래 영감 하나는 반드시 필요해. 여인네의
푸념을 남김없이 들어줘야 하거든. 캬- 뉘 집 자식인지 모르지만 두뇌회전
하나는 예술이구나. 에, 또... 뭐가 빠졌나..’
그가 객소리를 마음속에서 짖고 있든 말든 조손 같은 남궁선유와 단리혜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가 있어서 남궁선유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던가. 일과의 대부분을 장
로들과 한담이나 하면서 보내고 기껏해야 찾아오는 명숙들의 인사를 받는
게 전부여서, 그게 싫어서 모두가 잠든 밤이면 홀로 일어나 검을 휘두르다
가도 ‘내가 왜 이러지’ 하며 망연히 달을 올려보는 게 전부였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호기까지 수그러든 건 아니다. 기상만큼은 젊은 신진들에
게도 뒤져 본적은 없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그였다.
“누구와 생사결 이라도 치른다는, 아님 어떤 분쟁에 개입되었다는 연락은
없었던 것 같구나. 너 역시도 이유를 모르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노선배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의 근거 같은 게 있었다면 소녀,
 이렇게 넋 놓고만 있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라버니께서 보낸
마지막 서신이 마음에 걸려서...”
“마지막 서신?”
“예.”
“뭐라고 써 있더냐?”
갑자기 남궁선유의 피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무언가가 그를 기다리
고 있는 것 같다!
“그건...”
품속으로 손을 가져간 그녀가 작게 접힌 종이조각을 남궁선유에게 건넸다.
크기로 보아하여 이들 오누이는 전서구를 통신수단으로 이용했었나 보다.
세월의 흔적을 반증이라도 하듯 빛바랜 종이. 안타까움과 기다림에 지쳐 서
서히 타들어간 그녀의 마음처럼 낡은 종이의 때깔은 쓸쓸했다.
“흐음, 어디보자... 검을 잘 닦고 있느냐. 오라비는 여전히 건강하다. 얼
마 전 방문했던 무룡숙. 재미있더구나. 또 연락하자... 이게 다인가?”
다소 실망스럽게 종이를 건네주고 남궁선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징적인
 문구라고는 어디에도 없다. 기껏해야 등장한다는 무룡숙이란 이름은 강호
인들 사이에서는 경원의 대상이었고 신경쓸만한 부분은 눈꼽만큼도 없는 것
이니까.
움찔.
하운이 순간적으로 몸을 떨었다. 여지껏 담담하게 이들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었던 그였는데 남궁선유가 쪽지를 읽는 순간, 정확히 말해서 쪽지의 중간
을 읽을 때 반응을 보였다.
“무룡숙이라 하셨습니까?”
“들은 대로 일세.”
하고 단리혜에게 고개를 돌린 남궁선유는 하운의 기묘한 분위기에 흠칫했다
. 공교로움과 분노가 교차되는 감정 따윈 없을 텐데 하운의 얼굴에선 두 가
지의 생각이 서로 충돌하여 합쳐져 있지 않은가? 놀라서 치뜬 눈, 어금니를
 앙 다물어서 입주위에는 옅은 주름이 맺혀있고 두 주먹은 불끈 쥐어 당장
이라도 출수(出手)할 기세다.
- 무룡숙이란 단체에 주목하기 시작한건 너의 실종 직후였다. 네가 행방을
감춘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기에 별의 별 추측이 다 나왔으나 딱히 잡히는
 것은 없었고 기껏 생각해낸 것이 지루함에 못 견뎌 도피한 게 아닌가였으
니 이제와 생각해보면 웃음만 나오지만 당시로는 꽤 타당성 있게 와 닿았기
에 제자에 소홀했다면서 가슴을 치는 구양장문의 탄식은 옆에서 듣기에도
안스러운 것 이였다. 그래서 화산을 비우고 너를 찾아 떠나는 장문의 발을
잡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일파의 우두머리가 제자하나 찾자고 자리를 비우
는 것은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나 만약 우리가 말렸다면 밥숟가
락까지 놓겠다고 할 판이었으니 어쩌겠느냐...
무림의 평온을 그대로 화산의 평온으로 이어져 지난 삼백년간 화산파에서
벌어졌던 큰일이라곤 고작해야 칠년 전에 벌어졌던 대제자 하운의 실종사건
이 전부였다. 그리고 하운의 실종은 사실 ‘큰일’ 이라고 불릴만했다. 어
느 문파든 대제자라 함은 제자들 가운데의 구심점이자 웃어른들 에게는 희
망의 상징일 테니까.
아무리 화산 삼장로가 문파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하더라도, 구양승의 사백
이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힘이라고 하더라도, 어엿한 화산의 장문인은 구
양승이었고 그의 슬픔과 한탄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기에 장문의 신분으
로 강호행을 감행하는 걸 막지 못했다. 내심 하운을 찾아오기 바랬는지도
모른다. 석 달 뒤에 빈손으로 돌아온 구양승이 기묘한 말을 하지 않았더라
면 무룡숙의 일 같은 건 무림 구대문파라는 찬란한 위명의 화산에서 논의조
차 되지 않는 사안이었을 것이다.
“너무 심려치마시게. 하운은 박명의 상이 아니니 얼마 후면 웃으며 산문을
 들어설 것이야. 우린 오히려 장문의 건강이 염려되네. 그려.”
“저도 삼개월간 강호를 떠돌면서 많은 생각과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살아
있다면 화산을 버릴 아이가 아니고, 죽었다면 꿈에서라도 사부를 한번쯤은
찾아오겠지요. 그런데...”
“ ? ”
“이런 얘기를 갑작스레 아뢰어서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사백님들께서는 혹여
 무룡숙이라는 단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룡숙?”
“거기... 뭐... 그냥 노는 곳 이라고 들었네만?“
“예, 모두들 그리 알고 저 역시도 그런 인상이 너무도 뚜렷하여 혹시 이
녀석이 잠시 쉰다는 생각으로 그곳에 틀어박혀 있나 해서 방문해 보았습니
다.”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3544]  [연재] 삼류무사-99    첨부파일 :


구양승이 무룡숙을 방문한건 어디까지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 발버둥 치는 것’ 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신상태 하에서였다.
 누구나 코웃음을 치고 어찌 보면 멸시에 가까운 조소를 듣고 있는 단체이
기에 평소의 그였다면 신경조차 쓰지도 않았을 테고 마음에 담을 이유가 없
었지만 지근은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었고 또 아는가? 따분한 생활에
지친 젊은이가 현실도피적인 마음으로 온갖 놈팡이들이 모여서 논다는 곳에
 발을 들였다가 재미를 붙여서 ‘내일은...내일은...’ 하면서도 쉽사리 벗
어나지 못하는 경우인지.
중이 고기 맛 들이면 절간에 벼룩하나 남아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운이 이
런저런 강호경험을 지닌 상태였다면 모르나 그는 화산문하에 여덟 살 이란
어린 들어와서 십오 년을 단 한번도 외부세계와 접촉 없이 보낸, 한마디로
무림미숙아라고도 할 수 있다.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고 또 한번 자탄하며 구양승이 무룡숙에 배첩을 보
낸 게 하운의 실종 여섯달 후의 일이였다. 지금부터 칠년 전 하고도 꼬박
열달 전이니 꽤 오래전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화산파의 장문인이 보낸 배첩...
말할 필요 없이 현재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는 문파를 꼽으라면 소림과 무당
을 젖히고 ‘화산’ 이라는 두 글자를 강호인들은 머릿속에 그리게 되는데
칠년 전 이라고 해도 그 사정은 별 차이가 없는 것 이여서 무룡숙에서도 굉
장한 반응을 보인건  무림에 몸담고 있는 단체의 특성상 지극히 당연한 일
일게다... 그게 환대인지 또 다른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장문사형, 이곳을 꼭 가셔야겠습니까? 아무리 생각 해봐도 시간낭비일 것
 같은데요.”
구양승의 오른편에 서 있는 오십대의 장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전풍광수(電風光手) 온규협, 화산에서 가장 빠르게 검을 쳐낼 수 있다는 절
정의 검객이자 검정오존중 한명이다. 그의 검이 얼마나 쾌속한지 번개가 치
는 순간 전풍의 검이 날면 천둥이 치기도 전에 번개가 부끄러워 다시 하늘
로 올라간다고 했을까?
“온사제의 말이 맞습니다. 그냥 사천이나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구양승과 비슷한 연배의 중노인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그러자 뒤에서 암말
도 않고 걸음을 옮기던 두 명도 긍정의 몸짓으로 생각을 대신했고 화산을
이끌면서 한번도 망설임 없이 일을 처리했던 산화수의 안색도 갈등의 빛이
역력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의 옆에서 발길을 옮기고 있는 네 사람은 매
화사수였으니까.
매화사수(梅花四手).
화산 삼장로가 대화산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한다면 이들은 화산
의 실체적인 위력이라고 하겠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구양승의 사제들로 개
개인의 실력은 능히 강호를 오시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산문을 벗어나는 일
이 거의 없는 검객들이지만 이들의 검집에서 칼이 뽑히는 날엔 무림이 한번
 뒤집어진다고 했다.
구대문파중 최강의 성세를 자랑하는 화산의 장문인이 강호출행을 하는데 수
행원이 넷 밖에 없다면 의아해 하겠지만 그들이 매화사수라고 한다면 누구
라도 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도 지금의 내 마음을 잘 모르겠으니 사제들은 암말 말고 따라주기 바라
네.”
구양승의 음울한 말에 매화사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문인 이기보다
 존경하고 따르는 사형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우둔하지는 않기에.
무룡숙을 보고 이들 다섯 사형제는 무척이나 놀랐다. 찬란한 위명(?)을 날
리는 것에 비해 건물과 부지가 어마어마 했으니까.
“아니, 이곳이 무룡숙이 맞습니까? 이건 거의 명문정파 수준이로군요?”
“천명은 숙식을 하면 무공을 닦아도 되겠구먼. 누가 있어 이렇게 돈이 썩
어나는 거야?”
자칭 총관이라는 비염극의 안내를 받으며 이들의 놀라움은 황당함으로 바뀌
었다. 서른 개가 넘는 별채, 오백 명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식당. 여
섯 개의 연무장을 돌아올 때 구양승의 입에서 탄식마저 흘러내린 건 한 문
파의 수장으로서 당연했을지도 몰랐다.
현재 수용인원이 백 명도 안 된다는 걸 들으며 매화사수가 낭비니 어쩌구
떠들었고 구양승은 너털웃음을 지었으나 무룡숙 전체를 구석구석 살피면서
황당함이란 감정은 또 다른 이름의 것으로 자리를 바꾸기 시작했으나 그리
커다란 크기가 아니었기에 무시하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엔 대제자 하운의
걱정이 너무도 깊고 거대한 모양새로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여타의 사고
가 굴러갈 여자가 없었다.
하루 유하고 가라는 무룡숙 총관 비염극의 말을 거절하며 사천으로 행보를
옮길 때도, 매화사수들이 낭비타령으로 말 위에서 여로의 무료함을 달랠 때
에도 그 거대하고 얼토당토 않는 집단에 대해 단 한줄의 물음표 정도로 치
부하고 넘어갔었다.
“그래, 뭐가 그리 이상하셨다는 겐가? 세상에는 주체할 수 없으리만치 많
은 돈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많다네.”
“물론입니다. 무룡숙을 만들었다는 이가 소문대로 단순한 갑부라서 강호를
 동경하고 숭양하지만 지닌바 재주가 미천하여 그런 식 으로나마 무림에 일
조를 하려고 벌인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웃어넘겼을 것입니다. 희극적 이지
만 사매님들 말씀처럼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
요. 그런데 말입니다!”
“?”
“?”
“?”
“죄송합니다. 갑자기 흥분을 했더니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용서해 주십시
오.”
“오랫만에 장문의 큰소리를 들으니 잠깐 놀랐을 뿐이네 신경 쓰지 말고 말
씀하시게.”
“늙은이들은 무시하고 하던 말이나 계속하라구. 그러잖아도 세월이 여류함
에 따라 사형들이 가는귀가 ....에잇, 알았소. 가만있으면 될 거 아니오.
농담 한마디 가지고 그런 식 으로 사람을 노려보고 그러오!”
“...”
“저녀석은 언제나 철이 들려나...장로란 직함이 아깝구먼.”
“내가 뭐 어쨌다고 그러오! 사형들은 고고한 척이고 난 밥만 축내는 뚱땡
이라 이거요? 이리 설움 받으며  살 바에야 죽어버리는 게 나을 거야. 뭐
내가 죽는다고 신경 쓸 이 하나 없겠지만...서럽구나, 서러워!”
“자자...농담들은 그만하고 정문의 뒷말을 경청함세. 늙은이들이 재롱부리
는 것도 아니고, 허허헛!”
“예, 말씀 올리겠습니다. 방금 전에 언급했듯이 그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무룡숙을 다르게 바라본 건 아닙니다. 지나치자면 사소한 일 일 테고 무림
이라는 거대하고도 알 수 없는 곳에서 그 정도 일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지
요. 그런데 사천성과 섬서, 그리고 귀주를 오면서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
습니다.”
“?”
“무룡숙에서 무술을 배우겠다고 집을 나선 청년들이 생각보다 매우 많았습
니다. 아아...사백님들, 생각해 보셨습니까? 뒷배경 없고 가진 돈도 없는
빈농의 자식들이나 고아들이 무공 한수 익히려면 얼마나 고생하는지 말입니
다. 그들을 받아주고 양성시킨 기관은 무림 어디에도 없습니다. 구파일방,
예. 솔직히 저희 화산에서 조차도 소개장이 없다면 입문자격심사 조차 없이
 수많은 청년들을 돌려보내는 게 현실입니다.”
“그건 몰려드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 아닌가? 근본조차 알 수 없
는 어중이떠중이들이 하루에도 십 수명씩 몰려드는 게 현실이거늘 그런 녀
석들의 과거와 집안을 보고, 재질을 평가하고, 거기다 품성까지 가늠 한다
는 게 쉽지만은 않다네.”
“맞는 말이지. 제자 추릴려고 화산에 일을 아예 접을 순 없다구.”
“압니다. 그걸 뭐라고 하자는 건 아닙니다. 어떤 목적으로 산문을 들어서
는지, 배워서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제자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선택받은 소수만이 명문거파에 발을 딛는 것 역시 소수
입니다. 그런데 무룡숙이란 곳은 아무런 제한 없이 사람을 받아들인다고 했
고 단 한 푼의 은자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기부란 명목으로 거액을 받는 곳
이나 소개장의 유무로 사람을 판별하는 곳이 아니기에 그런 소외받은 청년
들 사이에서 꽤 높은 인지도가 있더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렇게 집을 떠난 청년들 중에 집으로 돌아온 이가 없다고 합니다.”
쿠쿵!
“그게 무슨 소린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놀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식선에서 이해가 안되겠지만 그건 사실입
니다. 왜 이런 일이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
“사회적인 최약자층, 관에서 조차 신경 쓰지 않는 이들, 그 숫자
마저 파악되지 않는 어둠의 존재들이기에 그들의 실종에 관심을 두거나 귀
기울일 사람은 아마도 없는 것입니다. 몇군데의 지방에서 그런 소식을 듣고
, 예 , 저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무룡숙에서 느꼈던 감정과
섞이니 그것은 하나의 단어로 귀결되더군요.”
“그게 뭔가?”
“의혹... 우선 무룡숙은 지나칠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가르
치는 무공은 기껏해야 삼류박투술이 전부입니다. 제가 방문 했을 때도 이름
만 거창한 구천마벽(九天魔劈)이라는 발차기를 연습하는 수련생들이 전부였
지요. 거의가 좀 산다는 집 자식들인 듯 화려한 복색에 연신 낄낄거리며 장
난처럼 발을 내밀고들 있었는데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오백 명 이상을 수용한다는 식당에서 느낀 첫 번
째 의혹은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
“몇 백 벌의 식기가 십년도 넘게 한번도 사용된 흔적이 없더군요. 창설할
때 사람 수 계산을 실수해서 어쩌다보니 그리될 수 있을까요? 몇 백 명씩이
나 말입니다.”
“으음...”
“대저 총관까지 있다는 문파를 세운 겁니다. 그 정도도 내다보지 않고 무
모한 정도로 돈을 투자했다는 건...거기까지도 그냥 넘어가라면 넘어가지요
. 그런데 세워져있는 전각들의 위치에서 의혹은 실체화 되었습니다.”
“...”
“삼재의 틀을 철저히 따르며 역 오행을 그리는 완벽한 건축구도, 이건 일
류의 무인들도 눈치 채기 어려운 최고의 위치선정입니다. 이런 설계가 단순
히 우연일까요? 우연이 아니면 이정도의 고수가 관여한 조직에서 기껏해야
구천마벽 따위의 삼류권각술을 가르치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십니까? 마지
막으로 그렇게 많이 있다던 청년들은 죄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강호상에
무룡숙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무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럴수가...”
“하도 같잖아서 무시했더니...가만! 이거 같잖음을 유도한거 아냐?”
“생각이 일치하시는 군요. 그저 저도 그렇게 봅니다. 거창한 편액과 약장
수들의 무공, 이를곳 없이 거대한 전각과 생동감 없는 수련생들... 이 모두
가 하나의 전시효과 였다면 무룡숙을 이끄는 자는 실로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지요.”

   17. 창작연재 [담당자-박
  [13629]  [연재] 삼류무사-100    첨부파일 :


구양승장문의 설명이 지나간 자리에 깊은 정적과 암울함이 남은 건 물론이
었다. 그래도 무림의 정신적 기둥이라는 구파일방에서 당당하게 자리 하나
를 차지하고 있다는 대화산인데 이런 심각한 사안에 대해 십년이 넘도록 무
관심할 수 있었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노릇이었고 무슨 소리를
 해도 변명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원래부터 농담을 즐기지 않는 이
사제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삼 사제가 심각한 표정을 일 각 이상이나 유지한
다는 건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라서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계양
사제의 건강을 염려했을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일반문도들에게는 극비로 했다. 일단은 심증뿐이고 밝혀진
물증이 하나도 없기에 - 잘못 언급했다간 역풍을 맞을 게 뻔하지 않느냐,
가뜩이나 우리 화산을 시기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이었거늘 - 신중을 기
하는 건 당연했고 또한 장문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룡숙에 관여된 인물들의
심기가 보통은 넘음을 알 수 있으니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야 없지 않느
냐?
무룡숙에 관련된 일은 화산삼장로와 구양승만이 아는 걸로 했다. 장문인의
사제들이자 화산의 실제적인 힘이라 불리는 매화사수에게 조차도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는 건 무룡숙이란 사안에 대해 얼마나 무거운 시선을 던졌
는지 잘 알게 되는 부분이다.
일단은 실체적 조사가 필요했다. 과연 무룡숙으로 떠난 청년들 중에 귀향하
지 않은 자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화산 같은 명문거파의 위대함은 본 문에 의해 비축된 힘이 강대해서만은 아
니다. 전국 각 처, 각 위치에 넓고도 골고루 퍼져있는 속가제자의 힘!
속가제자란 명문거파에 존재하는 제도로서 제자 입문을 거치고 무공을 배우
는 건 일반문도와 다를 바 없으나 본 파에서 어떠한 지위에도 오를 수 없고
 신분상이나 기타의 이유로 문파와 어느 정도 등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지위를 포기한다는 건 아무리 입문이 빠르고 재질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일대제자가 될 수 없음이니 문파 내의 커다란 일에 발언권은 있을지언
정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얘기다. 일대제자도
될 수 없고 영향력도 없으니 이들이 문파에 애정이 없을까?
그건 천만에 말씀이다. 속가제자들은 개인의 특성상 지위와 영향력을 포기한
것이고 그들 나름대로 사회에서의 신분이 있는지라 어쩔 도리 없이 문파와의
거리를 두고 있을 뿐 자신이 소속된 문파에 대한 자긍심은 일반문도 못지않게
높다.
오죽하면 자금성 내 신하들 중에서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문파의 속
가제자 둘이서 자신의 문파자랑을 하다가 서로 격분했으나 차마 손을 섞지
못하고 - 그러기엔 각자의 지위가 너무 높았다 - 육 개월 간이나 소 닭 보
듯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을까? 서로 경원시 하는 것 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이들이 맡고 있는 지위가 실로 대단한 것이었고 상호유기적인 위치에서 정
사를 돌보아야 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무제로까지
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행정의 공백상태로까지 이어졌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쯤 되니 곁에서 지켜보던 동료들도 진화에 나서서 어떻게든 둘 사
이를 화해시키려 하였으나 돌아오는 건 차가운 냉소와 콧방귀가 전부였고
상대방을 언급한다면 중재자와도 말을 나누지 않겠다는 반응까지 나왔으니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얼마나 차가웠는지는 별다른 묘사 없이도 설명 가
능하리라. 양 파의 장문이 친히 나서서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을 때
까지 서로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을 거라고 나중에 동료 대신들이 쓴웃음을
지은 것도 그저 빈말만은 아닐 것이다.
무룡숙에 관련된 사안을 조사하는데 대화산의 장로나 장문이 나선다면 무림
 전체가 주시할 건 뻔하고 아무리 무공이 높다하여도 이들 역시 사람인 이
상 지역 하나를 맡아서 관리하기도 어렵다. 거기다 대제자가 실종된 상태에
서 문파를 총괄하고 수호한다는 이들이 산문을 벗어난다는 것도 무리가 따
른다. 이럴 때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마음 편히 손을 빌릴 곳이 있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일 것이다.
다행히 화산의 속가제자들은 중원 뿐 아니라 전국 각 처에 산재하여 나름대
로의 직업에 충실하고 있었고 그 수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문파에 대
한 애정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 장문의 신분으로 보낸 서찰에 대한 신속
한 답변은 삼 장로조차 놀랄 수준이었다.
처음에 받은 보고서로는 종잡기 어려웠다. 속가제자들에게 속내를 드러내놓
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리저리 빙빙 돌려서 무룡숙이란 단어를 묻
히게끔 한 후에 그 지방에서 무학에 뜻을 두고 떠난 청년의 수와 귀환하거
나 생사가 확인된 수를 갑자기 알아봐달라는 문장을 써내려 가는 건 꽤나
성가신 일이었고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알 수도 없는지라 속가제자들
이 보인 의아함은 지극히 당연했다. 답변 역시 원론적인 수준으로 매년 일
정 수의 청년이 금의환향을 꿈꾸며 고향을 등지는 건 흔하디흔한 일이고 이
런저런 이유로 돌아오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당도한 보고서 가지고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그만큼의 보고서는 쌓여갔다…
두 해가 흘렀을 때는 몰랐다. 삼 장로와 구양승이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닐
까하고 생각이 들만큼 보고서의 내용은 변화가 없었다. 거의 비슷한 사람
수(數)가 나오고 또 들어오고… 삼 년 째가 되고 사 년 째가 되던 해에 처
음으로 즉선검인이 반응을 보였다.
“분명 이상한 점이 있기는 있구나. 이걸 보게.”
어디서 준비했는지 중원전도를 펼친 즉선검인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자, 보시게. 이게 무룡숙이 위치한 하남이고…”
붓을 꺼내 든 그가 커다란 지도에 각 파의 이름을 써넣기 시작했다. 소림,
무당, 화산…
“이곳이 무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는 십 오개 대파들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일세. 모두들 잘 알고 있겠지만.”
구양승과 두 장로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무시하고 즉선검인이 다시 한 번
붓을 들었다.
그는 각 성도에 여러 가지 숫자를 써 넣기 시작했는데 십 단위부터 백 단위
까지 천차만별이어서 그 의도를 가늠키 어려웠다. 차곡차곡 빈칸을 메워놓
은 즉선검인이 모두가 잘 보이도록 지도의 우치를 바꿀 때까지도 아무런 반
응이 없었다. 잠시 후에 소요가 있었다.
“이것 봐라?”
계양의 장난끼 어린 의문이 시발점이었는지 백무량의 두 눈썹도 역팔자를
그리며 훑듯이 지도 전반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구양승의 입에서 낮은 탄식
이 흘러나온 건 조금 지나서였다.
“숫자의 의미는 파악이 되었나보군.”
지도에서 고개를 든 백무량과 계양이 서로를 한번 쳐다보고 뒷말을 기다린
다는 듯 즉선검인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날 빤히 볼 거 없네. 써 놓은 그대로고 자네들이 생각하는 게 맞을 테니…”
“사형의 말씀은…”
“간단한 거야. 숫자가 적시하는 그대로인 게지.”
백무량의 말을 끊고 즉선검인이 구양승에게 올라온 보고서 더미를 건네주었다.
“무림에 구대문파가 있어서 그 이름 드높다고 하나 실상 우리 구대문파는
감숙성 공동파를 제외한다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국이라네. 가장 가깝게
이곳 섬서성만 보더라도 종남산에 종남파가 있고 우리 화산이 있네. 섬서성
 옆으로 봐도 붙어있는 하남 땅에 소림과 곤륜이 있지. 뿐인가 사천엔 점창
과 아미, 그리고 청성파가 모여 있어. 호북성도 그리 멀지 않아. 또한 사천
에 당문이 있고 하남에는 흑월회라는 사파 조직이 있다네. 이쯤 되면 무림
에서 힘 께나 쓴다는 문파가 알고 보면 대륙의 중앙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
겠지?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듯 가까이 있는 사람에겐 한 번 더 눈이 가
지만 거리가 멀어지면 자연 관심도 끊어진다네. 강호인들의 생각도 그렇고
우리 구파일방의 생각에도 무림에 꽤 커다란 영향력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
하고 있다지만 그건 중앙 무림의 일이고 사실 운남이나 광동, 절강 등지에
우리가 관심을 보인 적은 별로 없는 게 현실이네. 물론 그런 지방무림에서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 적은 없다지만 말이야. 그것이 지금 써 있는 숫자에
서 그대로 드러나는 게지.”
즉선검인의 꼼꼼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지도에 적혀 이는 각 성도 하단에 적
힌 숫자들의 편차는 워낙 도드라지는 것이라 세 사람의 안색을 무겁게 했다
. 중앙무림과 지방의 차이는 거의 백 명 이상이고 많게는 삼사 백을 헤아리
는 곳도 있었으니까.
“이것이… 귀향하지 않은 자들의…”
“고장을 떠나고 오 년이 넘게 소식이 끊긴 사람들의 평균 숫자야. 물론 무
에 뜻을 두고 길을 나선 자들의 수 뿐이고 이주나 기타의 사유는 기록되지
않은 걸세. 알려진 사람이 이 정도라면 파악되지 않은 수까지를 가정해 보세.”
“최하 두 배 이상은 오르겠지요.”
구양승이 무겁게 말을 받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지난 몇 년 간 무
림에서 시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소리 소문 없이 말이다.
“이 숫자가 무룡숙과 연계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네. 그래서 장문인
이 속가제자를 통해 알아보는 동안 나 역시 또 다른 경로로 한 가지의 사건
만 추적해 보았다네.”
즉선검인의 눈은 언제 보아도 신비로웠다. 음울한 보랏빛이 일렁이면서도
어떤 사안이 닥쳤을 때 마다 혜광으로 충만한 맑은 청색의 울림으로 화산
전체를 조율해주고 있다. 어느 것이 그의 진심이고 어느 것이 억지로 만들
어 낸 모습일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역시도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 그런데 그의 가면
은 특이한 것이다. 대개의 가면은 자신을 과다하게 포장하거나 약한 면을
감추어 상대방을 기만하려는 성질이다.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에게 무언가
얻어내려 한다는 게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거다.
그러나… 그의 가면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기 위해 스스로 뒤집어 쓴 고행
의 족쇄란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 족쇄를 풀 수 있는 날이 올까?
무심한 상념의 휘파람이 즉선검인의 뇌리를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구
양승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으며 그는 현실세계로 다시 발을 딛었다.
“잠시 딴 생각을 했다네. 음… 나는 우선 무림맹 하남성 지부에 사람을 대
어 현재 무룡숙의 개략적인 인원을 은밀히 조사시켰네. 물론 드러난 숫자만
 말이야.”
“별 변동이 없을 듯합니다?”
“그래, 그래. 장문의 말대로 한 사십 명 가량 늘었더군. 거기다 일문들과
무룡숙의 살림을 맡아보고 무공을 가르친다는 교두까지 합쳐봐야 이백 명이
 채 되지 않더군. 아무리 잡아도 이백 명이 안 된단 말이지.”
‘이백 명’에 집착하는 즉선검인이 의아스러워서 계양이 툴툴거렸다.
“아니, 대사형께선 이백에 무슨 한이라도 있소? 아님 주선이 생각이라도
난 거요?. 대사형께서 주선(酒仙)의 시를 애송하는 건 알겠지만 두 이(二)
와 오얏 리(李)는 엄연히 다르단 말이오. 오호라… 이제보니 세수가 백하고
도 이십이 넘어가시니까 슬슬 이백 살이 보이신다는 거요. 무림 최고 장수
노인의 기록을 갈아 치우고 싶은 게로군. 응, 좋지. 자고로 포부는 높을수
록 좋다고 했소. 그랬구나. 그랬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계양에게 구양승이 물었다. 과장되게 고개를 끄
덕이는, 그래서 본래 푸들거리는 턱살이 더없이 출렁이는 삼사백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야 별로 영양가 없을 게 뻔하지만 그 몸짓은 ‘물어봐 주지
않으면 울어버릴 거야!’ 라는 듯 격렬해서 별 도리가 없었다.
“무엇이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오! 그게…”
냉큼 대답하는 계양이었으나 담긴 얘기는 역사나였다.
“자네의 대사백께서 이백이란 숫자에 저리도 집착하시는 속내가 짐작이 가
서 그러네. 현재 우리 화산에서 검으로 천하를 오시하는 둘째 사형이 있고
무림 최고의 재간꾼인 내가 있고…”
“네가 언제부터 무림 최고의 재간꾼이었냐? 강호 최고의 근수에 도전한다
면 이해하겠지만 말이다.”
어이없어 하는 즉선검인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게양이 말을 이었다. 물론
즉선검인을 잡아 먹을 듯 꼬아보는 건 잊지 않으면서.
“하여간 그런데 이제 대사형께서 무림 최고령에 도전하신다니 이 어찌 경
사스러운 일이 아니겠나! 이백(二百)? 백오십만 넘어도 능히 기록을 갈아치
울 수 있을 게요. 내 이제부터 만사 제쳐두고 화산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닐
테니 대사형께서는 힘든 일 하지 마시고 머리도 그만 쓰시오. 석 달만 고생
하면 천년하수오는 몰라도 백 년 묵은 지네 한 마리는 잡을 수 있고. 그놈
을 푹 고아서… 흐흐흐.”
눈까지 빛내는 계양이었지만 즉선검인과 구양승의 표정은 허탈 그 자체였다.
백무량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질 때 쯤 계양의 야릇한 웃음이 잦아들었다.
“저놈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을꼬…”
한탄하듯 말을 던지고 즉선검인이 자세를 바로 했다. 한 번 더 쓸데없는 소
리하면 알아서 하라는 백무량의 따끔한 일갈에 풀이 죽은 계양이 마루바닥
을 긁으며 투덜거렸으나 나직한 즉선검인의 얘기는 모두의 귀를 사로잡을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백이라는 수자를 파악하고 나서 두 번 째로 알아본 것은 무룡숙에 반입
되는 식료품의 양이었다.”
꽝!
그렇다.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어떤 사람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특히나 무공을 익히는 한참 때의 청춘들은 왕
성한 식욕을 보이는 것이고 몇백 명이 살아가는 무도관에서 삼 일 치 이상
의 식료품을 저장하고 있는다는 건 무리다. 고로 어떤 식으로든 음식물을
조달해야만 하고 그 양을 계산해 보면…
질문이 쏟아질 법도 한데 좌중은 기묘한 정적을 유지했다. 말 잘 듣는 학동
들이 훈장님의 한마디를 기다리듯이 미동조차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고 눈
동자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의 용의주도함이 여실히 드러나더군. 한군데에서 대량 매입을 하는
게 아니라 각 점포마다 조금씩 사들이고 시차를 나누어 반입하기에 통계를
내는데 애를 먹었다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무룡숙 근처의 상인들을 모조리
 만나보는 수고를 대신한 속가제자도 있었고 개방의 힘도 빌었다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식료품의 소비와 무학 증진과의 관계를 알아본다는 얼토
당토 않은 이유를 달면서 고소를 금치 못했다네. 그렇게 일 년이 넘게 통계
를 내보니 답이 나오더군.”
꿀꺽!
누구의 목젖인지 모르지만 크게 한번 울렸으나 돌아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뒷말이 나오기만을 간절히 기대했기에 부차적인 건 신경 쓰는 이가 없
었다. 즉선검인의 분위기에서 사실 대답은 들으나마나 한 것이고 어쩌면 싱
거운 기다림인지도 모르지만 사림이란 알 수 없는 동물이라 이럴 때 종종
더 긴장되고 더 초조함을 느끼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볼 때… 무룡숙에서 매입하는 식료품은 장정 하루에 사백오십
 인 분이 조금 넘었다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쌀과 기타 육류의 소비만큼은
 감출 수 없는 노릇이었고 일 년 동안 음지에서 고생해준 속가제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겠지. 또한 무룡숙에서 버린 음식의 양은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어. 아무리 대식가가 많다고 해도 이백 명이 안 되는 식구들이 사
백오십 인 분의 식료품을 소화해 낸다는 건 어불성설일 테고… 그럼 뭘까?”
“어디선가 소화해내는 장소가 있다는 것 아니겠소?”
계양이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는 아까 몸무게 얘기를 아직도 잊지 않
고 있었기에 삐져나는 입 만큼은 집어넣지 안고 있었다.
“바로 그거야. 그런데 어디에고 물품을 보낸 흔적이 없거든. 그럼 그 안에
서 전부 소비한다는 건데 사람 수가 턱없이 모자라.”
“짚이는 게 있구려.”
백무량의 날카로운 눈이 반짝 빛났다. 그가 알고 있는 사형은 이런 식으로
시시하게 문제 제기나 늘어놓을 사람이 결코 아니다. 어느 정도 자신의 생
각을 정립시키고 한 번 더 숙고한 연후에 어떤 길이 보일 때가 되어서야 비
로소 말문을 열 사람이다.
“자네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군.”
즉선검인이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백무량은 여전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생각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하겠나. 그런 것보단 물증 하나가 아쉬운 판국
이야. 그렇다고 섣불리 나서서 타초경사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네. 다
시 한 번 말하거니와 만약 이들이 우리가 가정하는 대로의 인물들이라면 몇
 번을 조심해도 모자를 판이고 당장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아니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걸세.”
“혹시…”
계양이 또 나섰다.
“이놈들이 전설에서나 등장한다는 철골강시나 실혼인을 제조하는 거 아냐?
 그 왜 있잖아… 배교의 비본이라는 잠마주술이란 책에 쓰여 있다는… 에잇
, 알았소! 입 닥치고 가만있으면 될 거 아니오. 이 사형은 내가 말만하면
노려보고 그러오?”
“니가 멍청한 말만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 요즘 강시와 실혼인은 삼시
세 끼 밥에 고기까지 챙겨먹는다고 하더냐?”
“그러니까 가정 아니오!”
“뭘 잘했다고 큰소리냐. 저놈은 언제 철이 들꼬…”
사제들의 옥신각신을 말없이 지켜보던 즉선검인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강시와 실혼인…”
둘의 언성이 워낙 높았고 상황이 재미있었기에 구양승마저 이들을 바라보며
 미소짓느라 그의 독백을 미처 듣지 못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인간 강시, 멀쩡한 실혼인… 무림이란 참으로 흉험한
곳이니까.”
…하여 지난 일 년 동안 조사해 놓은 게 거기 수록되어 있다. 그들은 용의
주도하여 단 한 개의 허점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는 관여하지 못하는지라 여기저기서 문제의 부분들의 노출되었다.
문제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인데 우리 화산이 물증도 없이 사건을 확대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에 하나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한다면 문파
에 치명적인 손실이 옴은 물론 이들은 더 깊이 잠복할 것이다 그러나 두고
보기에도 시일이 너무 많이 흘렀음이니… 너는 화산의 대제자란 신분을 버
림은 물론 화산에 대한 어떤 증거도 남기지 말고 무룡숙에 관계된 모든 것
을 알아내야만 한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나 너는 화산의 어떤 무공도
사용하지 않고도 네 한 몸을 지킬 수 있으니 가장 우려되는 점은 피하게 되
는구나. 동료들의 도움을 얻은 것은 상관치 않겠다. 그들은 구파와 어떤 연
이 닿아있지 않고 또한 백 사제의 말대로라면 성품 역시 문제될 것이 없다
고 하였으니.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이 순간부터 너는 낭인 하운이다. 그러나 너의 양
어깨에 우리가 있고 화산 영령께서 걸터앉아 계시며 어쩌면…
즉선검인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떠올려보고 무룡숙에 대해 다시 한 번 결의
를 다지는 하운의 모습이 모두에게 의아스러웠다. 원래 차분한 사람이 한번
 감정을 드러내면 크게 티가 나는 법이다. 하물며 그는 주먹까지 불끈 움켜
쥐고 있었으니.
“하 형, 왜 그래? 무룡숙 출신이라더니 거기서 구박 받은 일 있어? 에이,
하 형 식력이면 까부는 놈들 쯤 혼내주는 건 쉬웠을 텐데…”
분위기 파악하고 장추삼이 조심스레 위로했으나 하문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미안하오. 기분이 좀 언짢구려.”
평소라면 억지로라도 웃어 보이는 그 일진데 전에 없이 딱딱하게 대답이 돌
아오니 농을 붙였던 장추삼도 찔끔할 밖에.
“미, 미안할 거 없어요, 뭐. 사람이 살다보면 기분 나쁠 때도 있고 그렇죠
, 뭐. 에구…”
머리를 긁으며 그가 비척비척 뒤로 물러나자 남궁선유가 하운에게 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이 선한 청년은 화가 나 있고 이런 사람이 화를 낸다는 건
반드시 타당성 있는 목적이 숨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시기가 매우 절묘
하지 않은가?
“무룡숙에 그렇게 반응을 보인 이유를 들어도 되겠는가?”
단리혜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아니더라도 하운은 할말이 있었다. 북경에서
의 일이 대충 마무리 진 듯하기에 일행과 더불어 하남 땅을 밟아야만 한다.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거늘.
“들으신 대로 저도 무룡숙에 한 몇 년 기거했었습니다.”
기거하긴 뭘 기거했는가? 무지 찔렸지만 해놓은 말이 있었고 얘기를 자연스
레 연결하자니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됐으나 처음 말을 시작하며 떨리
는 음성은 감추기 어려웠다. 그ㄹ나마 다행인 것은 ‘얼마나 흥분했기에 말
까지 떨까?’하고 이해하는 중인들의 반응이었다.
“제가 기거하면서 그곳에서 가졌던 크고 작은 의문이 몇가지 있었습니다.

그 뒤부터는 즉선검인의 말을 적당히 섞어서 그가 듣고 본 것처럼 진행시켰
다. 한번 말문이 트이자 언제 떨었냐는 듯 숨술 나오는 거짓말에 스스로 감
탄하며 얘기를 풀어갔고 사안의 실체를 들어가면서 모든 이의 안색 - 특히
남궁선유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놀라고 있었다 - 이 변해갔다.
“…해서 생각을 저리하던 중 단리 소저의 오라버니인 비발쌍부대협이 실종
되었다고 하니 당연히 놀라고 분노한 것입니다. 이제는 주위만 맴돌 수준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이럴, 이럴 수가! 오늘 내가 날을 만났구먼.”
벌떡 일어섰던 남궁선유가 다시 바위에 주저앉았다.
“하남 땅 가야 돼?”
장추삼이 얼굴을 찌푸렸다. 하남을 가면 소림이 있고 소림에서 감자바위를
먹인 걸 생각하면 사부가 떠오른다.
사부… 빌어먹을 사부!
‘왜 그렇게 일찍 간 거야!’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친다. 남들은 백 년도 넘게 잘들 산다는데 이놈의
영감은 뭐가 그리 바빠서 팔십을 겨우 넘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건가! 그것
도 같이 지낸 기간이라야 기껏해서 이 년이고 그나마 골골거린 게 대부분이
었다. 처음 보았던 그 미소는 이후에 한번도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간 것이
다.
‘빌어먹을…….’
한 방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번쯤은 더 웃어줘도 됐잖아!’
눈물을 소매로 쓱 닦고 그가 흰 이가 드러나도록 웃었다.
“그래, 가지 뭐! 까짓것 하남이면 어떻고 소림이면 어때!”
 ? * ? * ? *
그날 저녁 북궁단야는 적설산장에 보낼 편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천산까지
인편을 통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안의 중요성도 있는지라 전서구를 이용
해야 하기에 내요의 대부분은 흑화로 작성해야만 했다. 물론 편지의 부피
때문이다.
-삼가 조손이 할아버님께 글월을 올립니다. 현재까지 어둠의 율법자에 대해
 정확히 드러난 건 하나도 없으나 월광살무라는 괴 초식이 백여 년 전에 존
재했다는 걸 알아냈다는 건 그나마의 수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드러난
사실만 우선적으로 올리겠습니다.
무림십좌, 삼선삼목사왕 중 여덟 명의 이유 없는 실종 중에 두 명은 월광살
무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호목 조용인 - 북경 태생, 당시 삼목에 들었던 최고수 중 하나로서 가전무
공인 자전도를 극성으로 익혔음. 별첨한 월광살무라를 괴 초식의 목격자.
백소유의 사부로서… 후략.
태을검선 단리고학 - 하남 태생. 몰락한 전진교의 마지막 제자로 알려져 있
으며 추월오식이란 전진의 검식을 익힘. 삼선의 반열에 올랐으나 월광살무
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후손들이 주장함.
광도 이한모 - 북경 태생, 배교의 환술을 익힌 것으로 추정되는 괴도. 왕성
한 활동 중에 갑자기 실종. 이유는 밝혀지지 않음.
마창 염환귀 - 북경 태생, 점창에서 파문당한 이후 창법을 극한까지 깨우쳐
 창 하나로 북경 전체를 울렸던 인물. 실종 원인은 밝혀지지 않음.
귀염장 조치민 - 산동 태생, 어릴 때 북경으로 와서 관에 이문. 황궁 무공
을 나름대로 정립하여 스스로의 장법 체계를 세운 후 강호 출도. 한때 무림
십좌를 위협한다는 평가도 많았으나 역시 실종됨.
번천수 사마인 - 북경 태생, 유서 깊은 사마세가의 당대 가주로 가문도법인
 번천검법을 가장 완벽히 소화해내었다고 평가받았으나 갑자기 실종. 이후
사마세가는 내리막길을 걷게 됨.
전서구를 날린 뒤 밤하늘을 바라보며 북궁단야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데… 뭔가를…….’
동이 틀 때까지도 그 자리에 서 있었으나 끝내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놓지
 못했기에 그의 새벽은 더 쓸쓸했을지도 몰랐다.
‘분명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어…….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머루와들꽃 | 작성시간 22.12.03 감사합니다
  • 작성자새로운신사 | 작성시간 23.01.26 즐감했습니다
  • 작성자산촌 나그네 | 작성시간 24.09.07 감사 합니다 !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