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무사 274 시세출현
장추삼의 능청에 북궁헌이 대소를 터뜨렸다. 그렇게 그들이 몸을 돌
리려는데 뒤에서 잡아채는 음성 하나가 있었다.
"이대로 보낼 수는 없소이다."
철면자의 음울한 음성은 사건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였기에 새삼 매정방의 악귀 같은 모습이 떠올라 장추삼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아, 또 뭘 가지고 사람을 잡는데!"
"방금 전 노도우께서는 순차적인 해결을 주장하셨습니다. 이제 하나
의 사건이 해결되었으니 남은 하나를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량
수불......."
미안은 했나 보다. 잘 외우지 않던 무량수불까지 붙이고.
"내가 아까 말했지?"
심신의 피로가 그대로 몸과 마음에 전해진 탓에 장추삼의 음성은 전
에 없이 착 깔렸다. 원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라리는 것보
다 이런 감정이 말살된 듯한 중저음이 압박감을 심어주기 마련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적이 당황한 철면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겪은 바로 길길이 날뛰어야 정상일 텐데.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도 아닌데 당신들이 무슨 이유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거야?"
"물건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지 않나?"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법.
동문의 실수 때문에 저도 모르게 위축된 철면자였기에 그의 말엔 힘
이 없었고, 강압적인 분위기 또한 배제되었기에 장추삼의 응대도 자연
히 누그러들었다.
"뭐 좋시다. 무림을 위하고, 강호의 평화를 위하고, 또 다른 혈겁을
미연에 방지하자. 취지야 봄날 아낙네의 꽃단장만큼 번지르르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탄식처럼 장추삼이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청목자가 나섰다.
"취지를 이해해 줘서 고맙네. 철면이 말했듯 비천혈서를 우리가 어
쩌자는 건 절대로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게. 서로 의논하여 문제를 풀
어가자는 거야. 제삼차 무림혈겁, 다른 말로 흉몽지겁이라 불린 그 사
건을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무량수불....."
"쩝....."
장추삼이 입맛을 다시자 말이 먹혀들어 간다고 생각했는지 청목자가
한껏 온화한 어조로 본격적인 설득에 들어갔다.
"일개인이 소지하기에 너무도 위험한 물건이고 파급 효과 또한 종잡
을 수 없기에 죽을 날만 바라보는 늙은 도사가 이리 나선 게 아닌가.
그러니 일단......."
"그런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소."
다시금 뚝 자르고 나선 북궁노백이 청목자를 비롯한 팔파의 모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일개인이 가지고 다니기에 부담되는 물건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모
든 무림기보는 전부 무림맹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이겠구려. 그건
억측이오. 무림맹이 무림을 대표할지는 몰라도 전부일 수는 없다오."
번번이 무시당하면 여동빈이라도 울화가 치미는 건 당연한 노릇. 그
래도 청목자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물론 무림맹의 무림일 수는 없지요. 그러나....."
"어서들 가세나. 피곤할 게야."
그의 말을 싹 무시하고 몸을 돌린 북궁노백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
다.
"이보시오, 노도우!"
사형의 홀대에 속으로 화를 삭이던 청금자가 끝내 폭발했다.
"우리는 예을 다해서 대했거늘 너무 오만방자하구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소!"
우뚝 걸음을 멈춘 북궁노백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언뜻 스쳤다.
"예든 뭐든 결국은 당신들의 뜻을 따르라는 거 아닌가. 이것도 경우
인가?"
"무량수불...."
일단 나서고 봤는데 깔끔한 응대에 대꾸할 말이 없어서 청금자가 나
직이 도호만 외웠다.
"이 젊은이의 일신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넘겨짚어도 한참을 넘겨짚은
것이지. 이제 그만 말하고 싶어지는군."
눈처럼 하얀 턱수염을 쓰다듬고 뒷짐을 진 북궁노백이 잠시 하늘을
우러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대로 간다면 귀찮은 일이 반복될
게 뻔하고 상대하자니 피곤하다.
그래도 하나 선택해야 한다면,
"답답하군.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전자를 택할 그가 아니다.
"너무들 감정이 앞서신 듯합니다."
유쾌한 목소리로 알고자가 끼어들었다. 방금 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뭐 그리 기분이 좋을까만은 그래서 더욱 목소리에 힘을 실은 거다.
설상가상 말처럼 일을 꼬아놓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상대는 충분히
양보해도 될 만큼 위험한 인물로 사료되니까.
"저희의 말은 그저 약간의 담소나 나누자는 정도입니다. 호북지부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웬만한 객잔 수준은 됩니다. 뭐, 피곤하지면 제가
삼십여 년간 갈고닦은 비장의 안마로 노독을 풀어드릴 의향도 있습니
다. 어떠신지요?"
"허, 그 도사, 참....."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알고자의 장난기 어린 말에 너털웃음
을 터뜨린 북궁노백이 잠시 생각하다 장추삼을 돌아보았다.
"문제는 당사자의 의견이지. 그래, 어쩔 셈인가?"
"에혀......."
사실 장추삼의 입장은 참으로 곤란한 것이었다. 성질대로라면 꼴 보
기도 싫은 무림맹에 발을 디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하운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싹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
슬적 하운을 돌아본 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알았소. 가오, 가. 가긴 가는데 며칠만 기다려 주시오. 볼일 좀
보고 갈 테니. 우리도 균현에 유람차 온 건 아니거든."
일부러 자신을 외면하고 알게 모르게 한숨 쉬는 하운이 측은해서는
아니었다. 조금의 귀찮음으로 동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편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거다.
장추삼을 은근한 눈으로 살피던 북궁노백이 손뼉 한번 크게 쳤다.
"자자, 모든 일이 원만하게 처리된 듯하여 다행이로군. 댁들도 봤을
테지만 신의를 어길 만한 젊은이는 아니니 기다리도록 하시오. 그럼
이만 가지."
알고자가 깊은 포권을 하자 다른 이들도 덜떠름하지만 수긍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대표 격으로 이미 얘기를 해버린 터였기에 더는 붙잡을
명분이 없었던 거다.
"아, 잠깐만."
문득 청목자가 누군가를 불러 세웠다.
누구 말하는 거지, 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장추삼 일행은 청목자의 시
선이 곧 누구를 지목하는지 알게 되었고 지적당한 북궁노백이 수염을
한번 쓰다듬고는 비무대에 설치된 간이 천막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오?"
"아, 그게......"
그렇게 북궁노백과 북궁헌, 그리고 청목자, 무당 장문 죽선자와 알고
자를 제외한 이들이 비무대에서 내려서는데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
와 함께 황진을 일으키며 일단의 인마가 척석평으로 들이닥쳤다.
"음?"
뿌연 흙먼지에 눈살을 찌푸리던 장추삼이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인상
을 와락 구겼다.
"에휴, 또야?"
그럴 만도 한 것이 들이닥친 이들은 먹구름처럼 새까만 갑주로 전신
을 무장한 무인들이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이런 복장을 한 무인
집단은 오로지 하나, 무림맹 최강의 무투 조직이라는 철갑기마대가 아
니겠는가.
투투툭!
일사분란하게 멈춰 선 철갑대의 사이를 헤치며 선이 굵은 무인이 한
명 나섰다. 급한 말의 투레질 소리가 어울리는 남자, 철갑기마부 대장
고동규였다.
그는 말 안장을 짚으며 날렵하게 떨어져 내렸는데 분주히 주위를 둘
러보다 장추삼을 발견하고는 이산가족을 찾은 외톨이처럼 반갑게 포권
했다.
"아아! 장 대협,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간 별고없으셨소이까?"
"그런 말을 들을 만큼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을 텐데."
뚱하게 받아쳤지만 고동규는 뭐가 좋은지 여전히 반색을 하며 주절거
렸다.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하루가 다른 게 사람이거늘
무려 이십여 일이 흘렀는데 어째 반갑지 않겠습니까!"
"고사성어를 즐기나 본데 일신우일신을 여기다 취직시키는 건 무리
인 듯 하고... 근데 고 부대장. 나한테 안부 물으려고 여기 온거야?"
"아!"
신나게 이것저것 주워섬기던 고동규가 화들작 놀랐다.
"그게 말입니다......."
"그 대답은 내가 대신 해도 되겠소?"
고동규의 말과 겹쳐지며 철갑대의 뒤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
왔다. 나타난 인물은 오십대 초반의 문사건을 쓴 깡마른 사내였는데
단아한 표정과 달리 그 기도가 무겁고도 진중하여 만인을 압도할 기세
였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장추삼이 키득거리며 하운을 돌아보았으나 하운과 북궁단야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저 문사 차림의 사내가 소홀히 대할
인물이 아니라고 직감했으니까.
하긴, 현무림의 최고 관심사인 비천혈서에 관한 일을 이리도 쉽게
놓쳐 버릴 무림맹이 아닐 터. 그리고 파견한 철갑기마대와 이름 모를
인물.
절대.......
'녹록치 않은 자일 것이다.'
북궁단야가 저도 모르게 검집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몸을 드러낸 문
사건의 사내는 태연하게 말에서 내려 정중한 포권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나는 무림맹에서 문상(文相)이라는 과분한 직위를 맡고 있는 대겸형
이라 하오. 아울러 철갑기마대장의 지위도 겸하고 있소이다."
과분한 직위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당당함. 알고 보
면 대겸형이라는 자는 그만한 자신감을 가지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
었다.
천추일재(千秋一才) 대겸형(大兼炯).
나이 십여 세에 팔파의 모든 진세를 독학으로 파훼하여 이름을 높였
고 약관이 못 미친 열아홉에 무림의 태두라는 소림의 자랑, 백팔나한진
의 허점을 보완하여 전격적으로 무림맹에 발탁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무림맹의 일개 문사였던 그가 처음으로 벌인 일은 각 분타의 재정비
였고, 아울러 기동성과 무위에 초점을 맞춘 맹 고유의 무투 조직을 주
차하자 원로들의 따가운 질시를 받게 되었다.
이런 일은 함부로 손을 댈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에.
그러나 그는 무림맹 호북지부로의 파견을 지원하여 단 오 년 만에 불
가능에 가까워 보였던 조직을 만들어낸다. 일개인으로도 능히 강하나
뭉치면 당할 자가 없고, 기본적으로 승마술에 느앟기에 기동성 면에서
여느 무인 집단보다 앞서 나가는 조직.
그것이 바로 철갑기마대였다.
시범적으로 운영된 철갑기마대의 위용은 무림 각처에서 그 능력을 여
실히 입증했고, 그 공로와 능력을 높이 산 무림맹에서 일곱 개 주요 지
부에 철갑기마대를 창설하도록 지시했으며 그 전권은 대겸형에게 위임
했다.
그래서 철갑기마대는 일곱 명의 부대장이 단일 대장의 지위 체계 아
래 움직이는 유기적인 조직이 되었고 대겸형은 승승장구, 무림맹의 문
상 지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 본래 철갑기마대장이셨군요. 그런데 귀하신 무림맹의 문상이자
철갑기마대장이신 분께서 어쩐 일로 우리 같은 사람들의 발길을 막아서
는 것이오?"
무림맹은 일맹주쌍상(一盟主雙相) 체계이다. 다시 말해서 무림맹주
다음의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니 각파의 원로들과 장문을 제외하
고는 최고 서열을 가졌다는 의미다.
장추삼의 빈정거림에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대겸형이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소. 장추삼 소협은 나와 함께 무림맹
호북지부로 가셔야 하오. 물론 나머지 삼성 분들도 마찬가지요. 이건
발동되지 않은 무림첩에 준하는 사안이니 그리 알고 따라 주시길 바라
오."
어조는 부탁이나 들여다보면 명령이다. 그리고 대겸형도 굳이 그걸
숨기려는 기색도 아니었다. 천재들에게 종종 보이는 자신감치고는 다
소 강하다고 할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낸 대겸형이 턱을
비죽 올렸다.
"어이고, 무서라!"
장추삼이 호들갑스럽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경박한 태도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던 대겸형이 곧 신색을 바로 하고 몸을 돌려 말에 오르려
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
툭 던진 장추삼의 한마디에 대겸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본디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고, 꼭 말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최대한으
로 요점만 간추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말장난은 영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 헛들었는가?"
말등에 손을 얹은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겸형이 짧게 말했다.
"아니, 잘 들었어."
장추삼의 반말에 대겸형의 눈썹이 우뚝 섰으나 더 이상 말을 섞기 싫
어서 말에 오르며 그가 삼성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됐군."
"뭐가 됐는데?"
혼자만 되면 다 되는 건가, 하며 의뭉을 떠는 장추삼의 태도를 더는
참지 못하고 대겸형이 이를 악물었다.
"인내가 많아서 참는 것이 아니다. 고 부대장의 말이 아니었다면 벌
써 치도곤이 났을 터. 더 이상의 말장난은 허용하지 않겠다. 어서 따
르라."
"오우, 멋진걸? 어서 따르라, 요것도 써먹어야지."
어서 따르라, 어서 따르라 하며 킥킥거리는 장추삼을 분노에 찬 눈
으로 보던 대겸형이 나머지 두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특히 하운에게
로.
이때 누군가 황급히 튀어나왔다.
"문상을 뵈옵니다. 무량수불....."
"청성의 청오자가 아닌가. 그래, 별고 없었는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알고자의 인사를 받은 대겸형이 목을 뒤로 젖
혔다. 뭔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그가 취하는 버릇으로 알고자도 그
런 경우를 몇 번 봤기에 절로 긴장했다.
"덕분에 별일 없었습니다. 그보다 장 소협 건은 일을 마무리 짓고
스스로 찾아온다고 했으니 며칠간의 말미를 주심이 옳을 듯합니다."
"청오!"
버럭 소리를 지른 대겸형이 잠시 숨을 멈추고 분을 삭이다 겨우 입
을 열었다.
"팔파지교면 팔파지교답게 자신의 일이나 돌보라. 자네가 나설 자리
로 보이는가?"
"아니, 이번만큼은 청오의 말대로 따른 편이 낫겠네."
어느새 알고자의 옆에 선 청금자가 낮은 목소리로 도호를 외웠다.
"이런, 계셨습니까?"
말에서 천천히 내린 대겸형이 청금자를 비롯한 오송의 네 명에게 포
권 지례를 보냈다. 그러나 고개 숙인 그의 얼굴은 인사를 건네는 사람
이라고 도저히 볼 수 없는 싸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청오의 말처럼 이들은 스스로 무림맹을 찾겠다고 했네. 많지 않은
나이지만 자신의 언약을 저버릴 젊은이들이 아니니 일단 기다려 보세
나."
"오송 어르신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건 안 되겠습니다."
고개를 든 대겸형이 차갑게 대답했다.
"뭐?"
"무림맹 최우선 사안이 뭔지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인정에 이끌려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하실 말씀이 더 있다면 원로회에 직접 고하십시오. 더는 드릴 말씀
이 없습니다."
'허......'
이리도 단호하게 잘라 버릴 수 있을까. 어처구니없어 입을 벌린 오
송들에게 고개를 돌린 대겸형이 알고자를 쏘아보았다.
원로회에 직접 말하라는 건 이미 총체적인 제가가 난 사안이라는 의
미다. 그러니 오송도 꼼짝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 거다. 팔파지
교 정도로는 이의 제기 자체도 불가해진 거다.
"권위 그 자체로군. 꿈에 볼까 겁난다, 정말."
툴툴거리는 장추삼을 쏘아보던 대겸형이 문득 피식 웃었다. 같잖지
도 않다... 라는 마음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바로 저 웃음이라고 못 박
아도 손색이 없는, 그런 썩은 미소.
"그래서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따를 이유가 없잖나?"
대겸형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낸 장추삼이 몸을 돌리고 입이 떨어져
나갈 만큼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쩝쩝, 대장부의 눈물치고 가장 값어치없는 게 하품하면서 흘리는
거라지만 당최 제어가 안 된단 말이야."
눈가를 훔치며 태연스레 주절거리는 장추삼을 쏘아보던 대겸형이
손을 들어 올렸다.
척! 척! 척!
물러서 있던 오십여 철갑기마 대원들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뚜두둑!
"아~ 또 붙게 되는군. 그래 복습들은 잘했남?"
손마디를 꺾으며 장추삼이 한 발 나서려는데 그의 앞에 홀연 몇 개
의 신형이 나타났다.
"뭐야, 이거?"
"철갑대와의 일은 익히 들었다. 우리 대원들도 사람인지라 아무래
도 손속에 사정을 둘 테지. 그래서 삼성에게는 특별히 다른 분들을
모셨다."
"뭐?"
장추삼의 앞을 막아선 사람들은 세 명의 노인이었는데 눈에 어린
신광도 신광이려니와 잘 익은 대춧빛의 얼굴로 보아 예사로운 사람
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뭔가 아니다 싶었는지 주춤 행동을 멈춘 장추삼을 보며 대겸형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당하더니 왜, 무서워졌나?"
멀뚱히 서 있던 장추삼이 투덜거렸다.
"아따, 모긴가, 왱왱거리게."
부르르ㅡ
몸서리라는게 있다. 뭔가 분하거나 억울하거나 또는 무서울 때 흔
히 발생하는 생리적인 현상인데 지금 대겸형의 몸에도 이런 증상이 나
타난 것으로 보아 위의 세 가지 경우 가우네 하나인가 보다.
"오줌이라도 눴나? 왜 몸을 떨고 그래?"
성격이 좋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솔직히 말해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다소 더럽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막 나가지는 않는
장추삼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장유유서 하나는 확실한 인간이니까.
그런 그가 빈정을 넘어선, 거의 야유에 가까운 힐난을 퍼붓는 거 어
디까지나 대겸형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대겸형으로서가 아니라 무림맹
의 문상이라는 권위의 확신, 그것에의 반감이 장추삼을 움직이고 있었
다.
"모기에 오줌이라.......푸하하하하!"
정도를 넘어선 비난에 살짝 맛이 갔을까? 박장대소가 어울리는 순간
이 아니었는데 대겸형은 문사건이 거의 벗겨질 정도로 머리를 뒤로 젖
히며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그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 그대로 신색을 회복
하고 장추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성 가운데 괴성 장추삼이 걸물 중의 걸물이라더니 허언이 아니었
군. 다른 것은 몰라도 자네가 대장부라는 건 인정하겠네. 정말 대단
한 친구야."
별로 인정받고 싶지 않은 상대의 과찬에 장추삼이 뚱한 표정으로 입
을 쭉 내밀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호북지부로 당장 가자는 걸
테고 그건 눈곱만큼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나가자니 눈앞의 세 노인네와 한판 벌여야 할 판이고
그 뒤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상이라면 실질적
으로 무림맹을 이끄는 사람이고 그런 이의 행차라면 이 정도의 인원만
대동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 짜증나네.'
그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는데 뒤에 처져 있던 북궁단야
가 문득 고개를 돌려 하운을 바라보았다.
"하 형!"
".......?"
"무림맹 문상은 호북지부에 상주하는 거요?"
"그럴 리가."
뭔 말인가 하여 귀를 기울이던 하운이 어이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북궁 형도 알겠지만 지금 무림맹은 맹주님이 자리를 비운 상태로
되어 있소. 그러니 실질적인 일을 주관해야 할 사람은 문무쌍상이고
그 가운데에서도 문상이 맡고 있는 천추일재가 가장 바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요."
하나 하운의 생각과 달리 북궁단야는 집요하게 질문을 이었다. 문제
는 그 내용이었는데 당최 묻고자 하는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들이
라 참을성 하면 내로라 하는 하운도 지칠 지경이었다.
"무림맹 총단은 하남에 있고?"
"잘 알지 않소."
"그리고 무당신룡과 괴성의 비무가 강호를 떨쳐 울릴 대사건도 아니
고?"
"호사가들이나 좋아하는 정도였을 거요."
"매정방이가 비천혈서에 관한 얘기를 들은 것은 이틀 전이었고?"
"아까 같이 듣지 않았소."
"요 몇 달간 균현, 아니 호북성에서 커다란 사건이라고는 무림첩의
오발송이었지만 그것의 주무자(主務者)는 군가휘로 대표되는 팔파공동
문하였고?"
"그것 또한 직접 겪지 않았...."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하운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제 알겠다. 북궁
단야가 뭘 말하려는지. 철면자의 지속적인 언급으로 당연시했던 무림
맹의 출몰, 그러나 그들은 커다란 무언가를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그건 바로........
다소 김빠진 양상으로 되어버린 장추삼과 대겸형의 사이로 하운이 나
서며 천추일재에게 포권을 올렸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복룡표국의 하운이라고 합니다."
"음?"
돌연한 하운의 등장에 적이 놀란 대겸형이 감히 경시하지 않고 마주
포권을 하며 카랑카랑하나 정중한 음성으로 화답했다.
"화산의 애제자(愛弟子) 하운 소협이로군. 같은 식구이거늘 이런 식
으로 처음 대하게 되서 송구할 따름이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대겸형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하운을, 아니 그
가 걸어나온 삼성 쪽을 바라보았다.
복룡표국의 하운이라고 했다. 화산이 아닌, 아무리 중소군파라고 해
도 자파에의 자부심은 무림인으로서 기본적인 덕목이거늘 다른 것도 아
닌 화산의 대제자가 그걸 무시하는 발언이라니.
'대체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가, 이들은.'
그가 머리를 굴리는데 하운이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예를 끝내고 대
겸형의 뒤에 선 세 노인과 명을 기다리는 철갑기마대를 바라보았다.
예사 준비가 아니다.
"다름이 아니고 비천혈서에 관련된 얘기인데....."
"미안하지마 나중에 찾겠다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다네. 화산의 대
제자라도 이번 일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어."
"아니,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음?"
미루자는 부탁으로 지레짐작했던 대겸형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뭔가?"
"비천혈서에 관한 이야기... 언제, 누구에게 들으신 겁니까?"
"언제 누구에게 듣다니? 비천혈서에 얽힌 일을 모르는 강호인도 있
던가?"
"과거사를 얘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소지 문제 말입니다. 장 형
에게 비천혈서가 있다는 보고를 언제, 그리고 누구한테서 들었냐는 거
지요."
"아....."
그제야 하운의 말을 알아들은 대겸형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하며 넘기려 했으나 상대방의 신분 때문에 잠시 고심했다. 무림맹의
실권자라도 화산의 대제자는 무시할 상대가 아니니까.
"흐음... 원래 이런 건 밝히지 않는 게 관례이지만 내 대제자를 봐서
말하도록 하지. 발신자 불명의 서찰이 하나 도착했었네. 내용이야 설
명할 필요는 없겠고. 일시는... 무당신룡과 괴성의 비무 소식을 들은
다음날이었던 걸로 기억하네. 편지를 접수하자마자 하남에서 출발했
으니까. 왜, 밀고자를 알고 싶었던 건가? 그렇다면 유감이로군. 불
행히도 우리 역시 발신인의 정체를 모르니 말이야."
"비무첩 다음날이라고 하셨습니까?!"
하운이 고개를 돌려 북궁단야를 바라보았다.
"북궁 형!"
"최악이로군!"
거의 얼음장과도 같은 평정심의 북궁단야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
고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할 장추삼도 아니었다.
"이봐요, 문상 나으리. 우리 정말로 급하거든? 일만 끝내면 바로
갈 테니까 제발 보내줘요!"
"부탁드립니다, 문상!"
장추삼과 하운의 돌연한 태도에 대겸형이 움찔 한 발 물러섰다. 그
만큼 그들의 태도는 절실했으면서도 도전적이기까지 했다. 잠시 생각
하던 대겸형이 북궁단야까지 가세해 이제 세 명이 되어버린 청년들에
게 눈을 던졌다.
"이유를 설명해 주겠나? 맹에서 비천혈서의 존재를 안 시기가 왜 그
리 중요한지를 말이야."
하운이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장추삼이 불쑥 나섰다.
"그것도 당장 설명할 수가 없지만 어쨌든 보내줘요! 정말 급한 일이
라니까!"
"그럼 곤란하네."
잠깐 동안의 망설임을 접어버리고 대겸형이 잘라 말했다.
"납득할 만한 설명도 없이 무조건적인 양보를 바라는 건 어린아이나
할 짓이지."
벌떡!
숙였던 고개를 확 쳐들며 장추삼이 소리쳤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을 갚는다고 했던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대겸형의 단어 하나에 가까
스로 버티고 있던 장추삼의 자제력이 와르르 무너졌다.
"양보? 양보 좋아하네! 누가 누구에게 양보 운운이야!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양보고, 꼭 찾아갈 필요도 없는 얼어죽을 양보가 다 뭐야!
싸우기 싫고 귀찮아서 참는 거지, 누가 쫄아서 이러는 줄 잘아!"
"허........"
문젠 대겸형이 자기 완결형의 전형적인 인간이라는 데 있었다. 흔히
남들보다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에게서 보이는 성격인
데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이나 생각을 자신의 입장과 위치에 맞
춰 결정짓곤 한다.
이기주의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답답할 수 있는 성격. 그래서 장추
삼의 반발을 단지 단어 하나에 치우친 푸념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전
후를 돌아볼 생각 없이.
"말이 길어지니 이런 결과가 발생하는군. 나 역시 대화를 즐기는 편
이 아니야. 삼사사 어르신."
그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세 명의 노인을 청하자 뒷짐을 진 채로 석
상처럼 굳어 있던 노인들이 죽 앞으로 나섰다.
"너희가 삼성이라는 아이들이냐."
노인 가운데 하나가 물었다.
"알면서 물을 건 없잖아."
장추삼이 맞받아쳤지만 그들의 신분을 아는 순간 하운의 안색이 어두
워졌다.
삼사사(三司使).
무림맹은 작게 나누어 총단에 일전이각삼사(一殿二閣三司), 그리고
각 성에 둔 지부들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일전은 유수한 원로들로
이루어진 최고의결기관인 원로전(元老殿)이고 이각은 무상의 지휘 아
래서 무림맹 전반의 무력 상승을 추구하는 무각(武閣)과 문상의 지휘를
받는 문각(文閣)이 바로 그것이다.
그 아래로 포정사(布政使)가 이끄는 포정사사(布政使司)와 지부지휘
사(支部指揮使)가 이끄는 지부지휘사사(支部指揮使司), 그리고 제형안
찰사(提刑按察使)가 이끄는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로 구성된 삼사
가 각기 민간과의 교류와 지부 간의 단합, 그리고 총체적인 감찰 업무
를 뒷받침한다.
그 삼사의 수장들이 어떤 위치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터.
"듣던 것보다 입이 더 거친 아이로구나."
노인들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그보다 더 침중해진 하운과 상관없이
장추삼은 잘도 지껄였지만 북궁단야도 남몰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이들과 상대하게 된다면 이제부터 무림맹과는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의 행보에는 어마어마한 제약이 따를 게
뻔했다.
어디 돌아다니기나 할 수 있을지.
"뭔가 착각들을 하나 본데 내가 영강님들이 무서워서 꼬리를 만 게
아니라니까. 진짜 귀찮아서 그래요, 귀찮아서! 제발 좀 비키라고요!"
"음... 안 되겠군. 이런 녀석은 제형안찰사사로 끌고 가서 치도곤
을 당해야 정신 차릴 것이오."
제형안찰사인 듯한 노인이 뒷집을 풀며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
다. 장추삼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듯한 몸집이었는데 어깨를 펴자 노인
의 키는 갑자기 한자 정도 커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포정사사를 맡고 있는 유현(柳賢)이라고 하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무림맹과 이런 식으로 등을 돌린다면 누가 손
해일 것 같은가. 이건 무한 대립의 단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걸
세."
편안한 인상의 노인이 탄식처럼 손짓을 했다. 편안한 얼굴만큼 정이
많은 노인이지만 한번 화나면 불덩이라도 삼킬 사람이기에 무림맹의
원로들도 그가 화를 내면 한 걸음 양보한다는 인물이 바로 포정사라는
걸 이들은 알고 있을까.
무한 대립...
그럴 것이다. 일개 하부 조직도 아니고 총단의 수뇌부와 손을 섞게
된다면 그들과 무림맹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격이다.
승패야 어찌 됐든.
그러나 이런 식의 압박에 굴복한다면 앞으로 어찌 될까. 비천혈서의
성격을 잘 아는 장추삼으로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태워 버리고 말지.
"주위 사람들도 생각을 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이미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판이다. 그래
서 한 치도 물러나지 못하겠다. 그를 아는 이들이라면 앞으로 나아가
길 원할 테니까.
"빠질 사람은 빠져. 공연히 휩쓸리지 말고."
"건방 떨지 마라."
북궁단야가 차갑게 잘라 말하자 장추삼이 히히 웃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꿈쩍도 하지 않자 잠시 그들을 내려다보던 유현이 하운에게 눈
길을 던졌다. 뭔가 착잡한 기색으로.
"정 뜻이 그러하다면 하운 소협만큼은 빠져주길 바라네. 작금의 화
산과 무림맹의 관계를 잘 알 텐데 이렇게 해서 또 다른 간극을 벌일 참
인가."
"하아...."
하운으로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나서자니 사문이 걸
리고 빠지자니 동료가 걸린다.
"맞아, 맞아. 하 형은 빠져. 이 정도는 우리 두 명만으로도 충분하
다고."
장추삼의 건방진 말에도 유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만큼 화산과의
충돌이 거북했던 것이고 포정사의 입장에서 당연히 설득할 수 밖에 없
었다.
유현의 말대로 화산과 무림맹의 관계는 무림맹이 창건된 사백여 년
내로 지금처럼 안 좋았던 적이 없었다. 분기별로 열리던 각파 장문 주
관의 무학진흥회에 화산의 사람들이 언제부터 참석을 하지 않았는지는
기억하기도 어렵고, 무림의 대소사를 결정짓는 원로전에 화산의 노고수
들이 발길을 끊은 시기는 기억에서조차 아득한 형편이니까.
일 년에 한 번 씩 모이는 무림제전에 화산 장문이 얼굴만 비치고 발
길을 돌린다는 건 무림인이라면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속내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내용을 모르는 일반 무인들의 입장에서야 중흥기를 맞은 화산의 만
용이라고도 입방아를 찧기도 했고, 비대해진 무림맹의 처사에 대한 항
거일지도 모른다고 쑤근덕거렸지만 냉전의 당사자들이 나란히 함구하
고 있는 입장이라 드러내 놓고 뭐라고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판국에 삼사사라는 무림맹의 최고위직들과 분쟁을 일으킨다
면....
"포정사 어르신의 말씀은 가슴 깊이 새기겠씁니다. 그러나....."
전의를 불태우는 장추삼을 곁눈으로 슬쩍 보고 하운이 포권의 예를
올렸다.
"이 일로 누가 된다면 화산의 대사형 직을 내놓겠습니다."
"답답한!"
포정사가 가슴을 쳤다. 사람 상대를 많이 하는 입장에서 하운의 굳
은 의지를 한눈에 알아보았고, 절대로 말릴 수 없다는 것 또한 직감했
으니까.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을 듯하오. 이들에게 천외천을 보여주는 도
리밖엔."
화복(華服) 차림의 노인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화려한 복색과 어
울리지 않는 무심함이라 듣는 이로 하여금 다소 불쾌한 인상을 심어주
는 말투였기에 장추삼의 눈썹이 번뜩 치켜 올라갔다.
이 노인이 삼사사 가운데 가장 강하다는 지부지휘사 선우호운(鮮于
浩雲)이라는 사람으로서 일 처리가 단호하면서도 깔금하여 무인들의
신망이 두터운 편이었다.
"안타까운지고."
유현의 씁쓸한 독백을 기점으로 삼성과 삼사 간에 차디찬 기운이 흘
렀다. 괴성과 한성도 유성의 성격을 알기에 더는 만류하지 않고 서서
히 기세를 불러일으켰다.
장추삼으로는 별달리 일으킬 무엇도 없었지만.
"그럼 각오들 하시게."
유현이 부채를 꺼내 들었다. 강호 최강의 선법이라는 탄허선법(炭虛
扇法)을 극성까지 깨우쳤다는 유현이니 그의 부채가 어떤 위력을 발할
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부채를 들어 하운을 가리키자 선한 인상의 청년도 평소의 그와
다르게 긴장된 표정으로 칼을 빼들고 중극으로 검끝을 이동시켰다.
"나와 어우러질 녀석은 누구냐?"
화통 두어 개는 족히 삶아먹은 목소리로 우렁우렁 소리 지르며 자신
의 머리통만한 두 주먹을 치켜드는 노인은 채무관이라는 인물이었는데
제형안찰사에 어울리지 않는 폭급한 성격 때문에 오해를 많이 사는 편
이었다.
"꼭 싸워야 한다면 주먹질엔 주먹질로 상대해 주지."
장추삼이 콧등을 두 손가락으로 부비고 떡하니 나섰다.
"오냐, 네가 주먹질을 좀 한다는 장추삼이렷다? 진정한 주먹질이 무
엇인지 보여주마."
천왕수(天王手) 채무관.
지금은 무림맹 제형안찰사라는 직책을 맡아 조용히 지내고 있지만
알고 보면 삼십여 년 전 두 주먹만으로 천하를 평정할 듯 호기롭게 강
호를 누비며 무명을 떨쳐 범천왕의 재래라고까지 칭송받았던 인물이
바로 채무관이다.
"주먹에 좀이 쓸 지경이었는데 좋은 기회로군. 애송아, 너는 삼십
년 만에 노부의 천왕권을 몸소 견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걸 평생의
홍복으로 알거라."
그가 껄껄 웃으며 팔을 걷어붙이자 우람한 팔뚝이 드러났다.
'저거로 한 대 맞으면 그냥 골로 가겠다.'
장추삼이 혀를 빼물었다. 물론 맞으면.
"자연히 너는 나의 상대가 되겠구나?"
화복의 노인이 천천히 걸어나오며 북궁단야에게 눈길을 던졌다.
'평온한 가운데에서도 조금의 틈을 주지 않고, 공력을 일으키지 않
았는데도 천 근의 무게로 상대방을 압도한다. 이 노인은 고수 가운데
고수로구나!"
북궁단야가 검을 빼 들며 눈썹을 모았다.
"음."
그의 기수식을 지켜보던 화복의 노인, 선우호운도 진심으로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기, 분위기, 자세, 그리고 상대를 대할 때의 예의, 그러면서도 잃
지 않는 자신감. 너는 모든 면에서 내가 보아온 최고의 후기지수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너와 같은 아이를 길러낸 사람들을 뵙고 싶을
정도로구나!"
"저들에 비한다면 아직 멀었소이다."
"음?"
선우호운이 북궁단야의 말에 문득 고개를 돌려 장추삼과 하운을 바라
보았다. 화산의 대제자라는 하운이야 인정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천둥
벌거숭이 같은 장추삼이라는 아이를 이리도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뭘
까?
'저 녀석은 묘해. 단 한 번이라도 상대한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채켜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으니.'
그가 들은 소문만 해도 서너 잔의 차를 비울 때까지 떠들 정도였다.
그 모두가 장추삼에의 칭송이다.
장추삼을 묵묵히 쳐다보던 선우호운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성격 급
한 채무관이 천둥벌거숭이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아이에게 선공
은, 하며 웃으려던 그의 얼굴은 다음 순간 그대로 굳어졌다.
"간다, 이놈아!"
"싸우기 전에 이거 하나만 알아두시오."
장추삼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던 바와 달리 너무
도 침착한 태도라 일순 채무관이 흥미가 일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
다.
"이런 마당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만은... 당신들은 실수하는 거
요."
"뭐?"
협박인가, 감히 무림맹의 삼사사에게?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오."
후회하게 만들 것이오, 도 아니라 후회할 것이다... 라.
삼류무사 275 절대의 이름
뭔가 걸렸지만 채무관은 단순한 푸념 정도로 생각했다. 그렇게 여기
자 이 어린 녀석에게 뭔가 농락당한 것 같아 매우 불쾌해져 채무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스륵 ㅡ
채무관이 한 발 나서는가 싶었는데 이미 그는 장추삼의 앞에 이르러
양팔을 쭉 뻗었다.
쿠릉!
이것이 세상을 떨쳐 울린 천왕권의 전 삼초 가운데 제일초인 군왕출
진(君王出陳)이다. 위맹한 이름처럼 두 주먹으로 전방의 적을 한번에
쓸어가는 초식이기에 장추삼도 순간 멈칫했다.
파박!
주저함은 잠시, 주먹마다 깃든 공력에 떨리듯 몸이 흔들리며 그는
유려한 산무영으로 채무관의 군왕출진을 가볍게 흘려냈다.
'이놈 봐라!'
순식간에 나타난 환영에 넋을 놓던 채무관이 크게 호기가 일어 주먹
을 마구 돌리며 마지막으로 움직이는 잔상에 폭풍우와도 같은 주먹을
쏟아냈다.
쿠르르 ㅡ
날아들어 오는 채무관의 왼 주먹의 옆면으로 오른쪽 어깨를 맞대면
서 공세를 흘려낸 장추삼이 곰 같은 천왕수가 다음 동작을 취하기 전에
오른발 끝을 지면에 급히 박아 넣고 빙글 몸을 돌렸다.
파바박!
굳게 뿌리내린 오른발을 지지대 삼아 쭉 뻗은 그의 왼발이 공중에서
무려 아홉으로 불어났다. 처음부터 아홉이었는지, 하나에서 나머지 여
덟 개를 불러왔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분열이었기에 노련한 채무관도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맞아준다면 천왕수가 아니다. 한때는 무림제일까
지 꿈꿨던 그다. 삼십 년 전의 일패가 아니었다면 그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이런 애송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채무관이 왼 주먹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쿠르르르!
검수들의 수비식 가운데 최상이 검벽이라면 권법가에게는 권법이었
다. 왼손만으로 일순간 철벽같은 주먹의 성을 쌓은 채무관이 장추삼
의 발길질을 버텨냈다.
'이건 아니다!'
어차피 반격이었기에 완벽한 힘을 싣지도 못했다. 그저 주도권을 잡
아보려던 시도였는데 채무관은 단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그의 퇴법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척!
네 번째의 발길질을 끝으로 발을 거두며 장추삼이 한 걸음 뒤로 튕
겨 나왔다. 무모한 공격은 곧바로 치명적인 반격을 허용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채무관의 오른손은 독사처럼 그를 노리고 있었다.
"괴성... 만만하게 볼 녀석이 아니었구나."
왼팔로 명치를 가린 채무관이 묘하게 입꼬리를 틀며 이를 물었다.
'젠장....'
적의 창찬에 결코 헤벌쭉할 수 없는 입장이라 장추삼이 시근덕 어깨
를 들석였다. 힘이 덜 들어갔다고 하나 유성우였고 상대의 허점을 노
린 덕에 발로 펼칠 수 있었던 거다.
손의 세 배를 상회한다는 발의 이점을 감안한다면 비록 반쪽자리 초
식이지만 가만히 서서 막는 것으로 견뎌낼 유성우가 아니란 말이다.
"간만에 제대로 된 상대로군. 노부를 일깨워 준 대가는 톡톡히 치러
주도록 하지."
그런 대가 안 치러도 되는데.
흐흐 웃던 채무관이 둥실 몸을 띄웠다.
번쩍!
직선으로 치고 들어오며 채무관이 양팔을 깍지 깬 채로 힘껏 허공으
로 쳐들었다. 그에 따라 강력한 기운이 파생되며 채무관의 주위로 흡
사 섬광과도 같은 기운이 어려 감히 쳐다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천왕권법 전 삼초 가운데 가장 무섭다는 제삼초, 군왕판뢰(君王判雷).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수법 가운데 가장 위력적인 초식. 양팔의 힘
을 더하기에 공력이 배가되는 효과까지 있는 절대적인 무학이 바로
군왕판뢰다.
우릉!
뭔가 위에서 수를 쓴다는 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하려는지 몰라서
장추삼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이야말로 군왕판뢰의 무
서움으로 언제, 어떻게, 어느 곳으로 공격이 떨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워
방비할 틈도 없이 당해 버리는 거다.
'제기랄!'
튀어 올라가 보려고도 생각했으나 장추삼은 곧 생각을 거두었다. 아
래에서 위로 치받는 속도로 위에서 아래를 향해 떨어지는 것을 잡는다
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차력의 원리로 오히려 된통 깨질 수가 있다.
'능신뢰?'
그의 유일한 원거리 공격법이나 이 역시 무리다. 힘을 모아서 체내
로 방출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공력의 집결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을 놓
칠 노인네가 아닐 테니.
'어쩌면......'
저 교활한 곰 노인은 그런 순간을 학수고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공격하지 않는 것도 그런 심리전의 일환일지도 모른단 말이다!
심리전이라.....
후다닥!
순간 누구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고 장추삼이 내쳐 달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뜬금없기 그지없는 행동이라 허공에서 공격 기회만을 엿보던
채무관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 밖에.
'이놈이!'
그러나 달음박질은 그리 빠른 편이 아니었기에 몇 발 앞의 위치 정
도는 훤히 꿰뚫고도 남았다. 나름대로 공격점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갈지자로 달리기는 하지만 인간의 움직임에는 한계가 있는 법.
다람쥐마냥 뛰어다니던 장추삼이 일정거리를 달리고 막 반 회전을
그려낼 무렵 채무관의 눈이 번쩍 빛났다.
"가라!"
쿠르릉!
악덕에 악덕을 일삼던 탐관오리를 벌하려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심
판의 망치가 바로 이런 형태일까. 장중한 울림과 함께 천지를 뒤덮는
광채를 동반하면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장추삼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
다.
가속이 붙은 상황이라 피할 수도 없고, 막 회전을 끝낸 터라 방향
전환도 불가능한 상황.
순간 장추삼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파팍!
"어이쿠!"
권력의 여파를 몸으로 받아낸 장추삼이 붕 떠서 서너 발자국 밖에
착지했다. 그리고 체공 시간의 한계에 부딪친 채무관 역시 지면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너... 뭐냐?"
"아따, 그 노인네 힘도 좋네."
어깨를 문지르며 궁시렁거리던 장추삼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생각
해 보니 한시진이 넘도록 물을 마시지 못했다.
"아, 목말라."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다른 건 몰라도 저 녀석의 몸놀림 하나만큼은 일품이로군. 우뢰를
쫓아 앞뒤 없이 달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완급까지 조절하니
그야말로 유뢰보(遊雷步)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구나."
선우호운의 경악 어린 얼굴과 달리 북궁단야가 유쾌하게 말했다.
"우뢰를 쫓아 달리다[追雷步] 이제는 우뢰와 더불어 논다[遊雷步]...
강호상에 저런 보법도 있었던가."
그렇게 장추삼을 쫓던 선우호운의 눈길이 옆으로 향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웠을지도.
괴상한 놈의 괴상한 무공이 저런 식이라면 흐르는 별의 검은 어떤
모양일까.
"그런데 말이야....."
하운에게 준 눈을 돌리지도 않고 선우호운이 중얼거렸다.
"자네, 왠지 낯설지 않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비록 무림맹에서 이리 세월을 묵히고 있지만 한때는 천하를 가
슴에 품어보고자 웅비의 날개를 폈던 적도 있었지. 그때가 문득문득
그립구먼."
손자에게 옛이야기를 해주는 노인처럼 온유하게 웃으며 유현이 부
채를 쓰다듬었다. 본시 부드러운 성품의 그인지라 비슷한 성격의 하
운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그래서 더욱 호감이 가는지도 모른다. 신분
적인 것을 제하더라도.
그래서 상대로 하운을 고른 것이고.
"삼 초를 양보하겠네. 힘이 달리면 언제든지 그만 하자고 하고. 젊
은 날의 치기와 만용으로 모든 것을 날리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삼십 년 전의 유현도 그랬다. 천하를 떨쳐 울릴 자신과 의기로 가득
찼던 시절이.
"삼 초라고 하셨습니까?"
하운이 싱긋 웃었다. 건방지지도, 그렇다고 뭔가 다른 의미를 담지
도 않은 그런 자연의 미소를. 그래서 유현은 하운의 웃음이 어떤 성격
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양보의 폭이 너무 적은가? 그렇다면...."
"아니오, 아닙니다. 삼 초가 딱 적당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하운이 검을 뽑아 가슴까지 올리고 정중히 검례를 취
했다.
"화산의 하운이 무림맹의 포정사사를 맡고 계신 유현 노대협께 감히
한 수 가르침을 청합니다. 이 겨룸은 개인적인 원한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음을 밝혀둡니다."
하운의 정중한 인사에 유현도 씁쓸한 얼굴로 예를 보냈다. 업무의
연장이라지만 까마득한 후배와 손을 섞는다는 건 왠지 꺼림칙스런 일
이니까.
또한 모든 걸 떠나 너무도 마음에 드는 청년이 아닌가!
"포장사 유현이 화산의 애제자 하운 소협과 무담(武談)을 나누고자
하네. 비록 육체를 빌리는 형식이나 본연의 임무와 의지에 충실하기에
떳떳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할 거라 믿네."
스륵 ㅡ
유현의 덕담을 끝으로 갈라선 그들이 일 장 거리를 벌리고 대치했다.
츙!
가슴에 모았던 검을 천천히 이동시킨 하운이 유현의 옆을 쓸어나갔
다. 공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약하지만 나름대로 진중한 검로였기
에 유현 역시 가볍게 응수할 수 밖에 없었다.
'선인지로(仙人指路)?'
삼재검법 가운데 기초식으로 쓰이는 검식. 횡으로 상대를 압박해 들
어가는 검초라고는 하나 실전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 정도로
비실용적인 초식.
스릉!
그렇게 가로막힌 하운이 왼쪽 발을 앞으로 딛고 무릎을 굽히며 그것
을 축으로 빙글 돌아섰다. 물론 검을 후방으로 세웠기에 유현으로는
어쩔 도리 없이 막아야 했고.
'회두망월(回頭望月)?"
역시 삼재검법 가운데 기초적인 검식이다. 위의 두 가지 초식으로는
공격이라는 말을 붙이기조차 부끄러울 텐데.
또 한번 막힌 하운이 다시 반 바퀴 회전하여 유현과 마주한 상태에
서 몸을 뒤로 빼고 허리를 떨구면서 검마저 뒤로 당겼다. 물론 왼손도
같이.
'고월침강(古月沈江).'
그렇게 하운의 삼 초는 끝이 났다.
칼을 들이밀었으나 공격이라고 하기엔 뭔가 허무하고, 연환초임에
는 틀림없었으나 한기(寒氣)를 담지 않았으니 이 삼 초를 어떻게 해
석해야 할까.
"그래, 자네의 길이 그토록 당당하고 떳떳하다는 겐가."
유현이 감탄하여 부채를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무슨 말일까.
그건 바로 하운이 펼친 세 개의 초식을 염두하고 던진 것인데 주지
하다시피 하운은 첫 번재 검초로 선인지로를, 이초로는 회두망월을, 그
리고 삼초로는 고월침강이라는 수비식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저 삼재검법 가운데 흔하디흔한 삼재검법이지만 이를 가지고 하
운은 이렇게 노래했던 것이다.
선인이 길을 가리키다{仙人指路}
휘영청 세상을 굽어보는 달을 돌아보니{回頭望月}
오랜 달조차 문득 부끄러워 강으로 스며드는구나{古月浸江}.
이 세가지 초식명을 하나로 연결지어 뜻을 펄친 하운이나 그것을 받
아들인 유현. 뜻을 담고 펼친 검식을 바로 알고 헤아리니 무담(武談)
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순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나는 아직 수양이 깊지 못하여 강으로 숨는 달이 되기엔 멀었
구나. 그럼 각오하게나."
쫙~
부채머리를 가볍게 쥐고 흔들자 유현의 부채는 흡사 비단처럼 부드럽
게 펼쳐졌다.
"얼마 만인가. 붕익선(鵬翼扇)을 부채로서 펼치지 않는 것이."
왠지 조금은 들뜬 어조로 유현이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맹의 삼사사쯤 되면 어지간한 일 가지고는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 상례다. 아니, 나설 일이 있더라도 아랫사람들이 먼
저 처리해 버리곤 한다.
자신들의 수령에 대한 예우임에 분명하다.
그것을 나서서 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무림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탄탄한 무인의 이두박근이 술내기의 팔씨름 판에서나 불끈 서고, 전
장을 분석하던 모사의 재지(才智)는 장부 출납에나 어울리는 시대란 말
이다.
칼과 귀계가 필요없는 시대. 언제나 그렸던 태평성대였고, 분명 환
영할 일이지만 그 뒤안길에 소외된 사람들의 한숨이 곳곳에 묻어 얼룩
졌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피와 살육을 바라는 것일까. 그건 단연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인사는 이 정도로 해두세."
"그럼."
짧게 목례를 취하고 하운이 처음의 그것처럼 유현의 옆을 천천히 쓸
어왔다. 선인지로일까?
'허어~ 이 아이가.......'
부채로 하운의 검을 막아서려던 유현의 부채 위로 어느새 방향을 바
꾼 유성의 검초가 넘실거리며 다가섰다.
"차앗!"
깜짝 놀라 부채를 크게 흔들어 거대한 기운을 만들어낸 유현이 하운
과의 거리를 벌리고는 물러서며 디딘 왼 발가락들에 힘을 실어 퉁 튕
겨 들어왔다.
촤라락!
그가 손을 한번 흔들자 장내는 부채 하나에 완전히 지배되어 버렸
다. 마치 대붕이 날아들어 날개를 접기 전 한 번의 나래 짓으로 돌풍
을 일으키는 것처럼.
대붕수익(大鵬收翼).
아미파 사상 최강의 무승이라는 탄허 대사(炭虛大師)가 창시한 탄허
선법가운데 첫 번재 초식이다. 부채를 한번 폈다 접는 순간에 무려 여
덟 개의 방위를 점하니 상대방은 그저 대붕의 날개처럼 펼쳐진 부채 앞
에 무릎을 꿇는다고 했다.
팔방을 점유당했다 함은 전 방위에 걸쳐 움직일 공간을 상실한 상태
라는 의미. 그러나 하운은 부채의 파고 속에 그대로 노출되어 어떤 움
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음?'
부채를 흔들며 다가서던 유현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흘렀다. 물론
대붕수익이 무서운 초식임엔 틀림없으나 이렇게 방비도 없이 무너질 줄
은 몰랐기 때문이다.
방금 전의 삼 초는 그저 겉멋이었나?
그렇게 한 치를 남겨두었을 무렵 중극에서 움직일 줄 몰랐던 하운의
검끝이 살작 옆으로 이동했다.
스르륵 ㅡ
그저 옆으로의 한번? 아니다, 하운의 검은 마치 정지된 순간이 여러
개 겹치듯 분할적인 모습을 보이며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
다.
"헛!"
순차적으로 불어난 하운의 검은 부채에 가로막혔던 여덟 방위를 차
례로 치고 나가 마지막으로 전방에서 들어오는 유현 쪽으로 방향을 틀
어 움직였다.
'이런 움직임이!'
검을 빠르게 움직여서 여러 방위를 점하는 산검술이라면 숱하게 보
아왔다. 그러나 하운의 검식은 그렇게 일정하지도 않았고 빠르지도
않았다.
그저 적재적소에 필요한 속도로 다가갔을 뿐.
"타아아!"
만만하게 볼 성질의 찌르기가 아니라고 판단 - 세상에, 찌르기라니!
- 하여 유현이 초식을 멈추고 경호성을 지르며 부채를 서릿발처럼 쳐내
었다.
후두둑 ㅡ
산검(散劍)에는 산선(散扇)인가? 하나였던 부채가 둘, 셋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천지는 유현이 불러낸 부채로 가득 찼다. 그렇게 파생된
부채들은 하운에게로 쏟아져 내렸고 일순 검의 천재도 몸을 굳혀야만
했다.
꿈처럼 내리는 싸라기눈을 맞으며 곡주에 취해 속세의 정을 그리는
데......
몽산취련(夢霰醉戀). 신승 탄허가 속세에의 정을 끊지 못했던 젊은
날에 바치는 탄허선법의 두 번째 초식이자 젊은 날의 초상.
이 마음을 이은 유현일까? 그의 선법은 어쩐지 애달팠으며 쓸쓸하기
까지 했다. 아직가지 끊지 못한 무인의 호승심과 투기를 자책하는 걸
까.
한가로이 노니는 부채의 싸라기들이 나풀나풀 하운에게 맴돌다 어
느 순간 급강하하며 엄청난 박력으로 그를 압박해 들어왔다.
'좋구나, 이런 초식은.'
한가로이 부채의 바다를 노닐던 하운이 초식의 의미와 무게를 온몸
으로 느끼며 흥이 나 절로 발을 움직였다.
번뜩!
그렇게 쏟아지는 선설(扇雪)을 음미하던 하운의 눈이 만개하며 축
처져 있던 검을 치켜들어 간결한 무늬를 허공에 수놓았다.
... 세속과 상관없이 홀로 고고한 연꽃의 자태에 부끄러워 자리 털고
일어나네.
속외고련(俗外孤蓮). 몽산취련에 취해 즉흥적으로 펼쳐 낸 하운의
답가라고 할까. 아직도 속세의 정리에 연연하는 노강호에의 안타까움
이 그려진 걸까.
하나하나 눈발을 보듬던 그의 검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돌연 급격히
변화를 보였다. 마치 화려하게 피어나는 연꽃 봉오리처럼.
카캉!
"커헉!"
채 도약을 하지도 못하고 입에서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내리는 유현이
정비를 하기도 전에 벼락처럼 달려든 하운이 크게 검을 휘둘렀다.
"하앗!"
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부채를 힘껏 밀어내며 유현이 하운의 공세
를 틀어막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이미 봉두난발 엉망
이었고 입가에서 흐르는 선혈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쉬던 유현이 이를 악물었다.
뭔가 분했다. 번번히 막혀서? 그건 아니다. 화산의 대제자가 펼치
는 초식 하나한에 담긴 현기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단지 너무도 초라해지는 자신이 싫었다. 유성의 검식은 마치
자신을 말끔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요소요소를 찌르고 들어왔
다.
가히 무결검(無缺劍)의 경지!
유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청년은 그가 알고 있는 어느
검도고수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유능제강이라는 무학의 기초 원리
에 가장 근접한 초고수라는 걸 말이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이대로라면 얼굴조차 들 수
없는 참패밖에 되지 않을 터.
아직 웅지를 접기엔 하고픈 일이 많았다. 굴욕이라면 삼십 년 전의
한 번으로도 족하단 말이다. 그때의 완패로 꿈을 접었지만 강호를 떠
나지 못해 이렇게라도 강호를 맴돌고 있었다.
피가 끓었다. 비천혈서의 등장이라는 말에. 가슴속의 열정은 삼십
년 전에 식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피어오르는 웅심을 주체하
지 못하고 한달음에 달려온 호북이다.
그리고 그때 그 나이의 자신을 만나고 있다.
'그래, 삼십 년 전과 같구나!'
눈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청년의 모습에 문득 자신을 발견하고 유
현이 뻣뻣해져 오는 목을 가누려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때의 자신도 저렇게 당당했더라면.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리한 얼굴의 유현이었는데 정색을 하자 기세가 일변했다.
'아직도 버리지 못했습니까?'
하운 역시 중극으로 향한 검을 차분히 올렸다. 그에 반응이라도 하
듯 유현이 부채를 들어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펄럭펄럭~
오뉴월 대청마루에 누워 유유자적 부채질하는 노인처럼 한가로워
보이는 유현이었는데 반대편에 선 하운의 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풍막(風幕)?'
바람을 불러일으켜 상대방의 움직임을 둔하게 한다는 선법 기술 가
운데 극고의 경지. 말로만 들어봤기에 처음 접하게 되자 하운도 적이
놀랐다.
'강호는 넓구나. 이런 고수가 무림맹의 상층부에 숨어 있었음을 누
가 알았을까?'
'이런 고수'를 절망에 빠뜨리는 청년의 상념치고는 다소 우스꽝스
러웠지만 아무튼 유현의 풍막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 하운은 칼을 들
고 있기도 벅찬 상태가 되었다.
우우웅 ㅡ
풍막의 무서움은 상대방을 다그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무섭도록 두터운 바람의 자악은 시전자의 주위에서 원을 그리며 파생
되기에 막을 일으킨 이에게는 거의 철벽과도 같은 방패로 작용하게 된
다.
섣부른 공격은 그야말로 자멸이니 진퇴양난이 이런 경우일까.
이대로라면 공격이든 수비든 해보지도 못하고 승부가 결정날 상황.
그러나 하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 점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담담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유현의 부채질은 더욱 빨라
졌고 하운의 검끝도 천천히 지면으로 향하게 되었다.
펄럭펄럭~
가중되는 압력에 반비례한 검극과 하늘과의 각도. 그렇게 하운의 검
이 지면에 맞닿을 듯 내려갈 때 부채질에 열중이던 유현의 눈이 가늘어
졌다.
'네가 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그런 시간초자 주어지지 않는 초식은
어찌 대할까?'
팍!
그의 부채가 빛살처럼 뻗어 하운에게 일직선으로 들이닥쳤다. 이것
이야말로 탄허 대사의 최후 심득이라는 귀로망탄(歸路妄歎)이었고 그
가 입적한 이후 단 세 번 펼쳐졌다는 난망한 초식이었다.
칼을 들기조차 버거운 상태. 그리고 공격은 너무도 급하게 날아왔
다. 이대로라면 하운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대로라면.
하운이 겨우 검을 들었다. 그러나 빛살을 막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
가슴까지 이른 부채는 금방이라도 하운의 몸을 훑고 지나갈 것만 같았
다.
그런데.......
끼이익ㅡ
놀랍게도 하운의 검은 넝쿨 장미처럼 부채를 타고 올라오며 유현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치고 들어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라
방비할 틈도, 여력도 없었던 유현은 속절없이 어깨를 관통당할 지경이
었다.
찌익.
유현의 웃옷을 살짝 찢고 하운의 검이 멈췄다. 그러나 완벽한 제어
가 불가능했는지 슬픈 노강호의 어깨에서는 눈물처럼 핏물이 배어 나
왔다.
"죄송합니다. 아직도 조절하지......"
"얼마나 더 노부를 비참하게 해야 분이 풀리겠나."
사과의 말을 건네던 하운이 작은 탄식과 함께 검을 거두었다.
"정말로 저 아이는 다른 이의 초식에 담긴 마음을 헤아린다는 건가.
기사로다, 기사야. 두 눈으로 똑똑히 봤거늘 아직도 믿기지 않아."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들 가운데 가장 강한 인물은 선우호운이다.
사실 채무관과 유현이 연수한다고 해도 선우호운에게 승기를 잡기 어
려울 지경이었다.
그런 선우호운이기에 유현과 하운의 마지막 수 나눔이 가지는 의미
를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귀로망탄이라 했다. 세상사 모든 것을 잊고 처음으로 돌아감에 문
득 허망한 탄식을 짓는다는 초식명에 어울리는 쾌속함을 가진 선법
이다.
그렇다면 귀로망탄은 그저 빠른 선법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단
지 빠름만을 논한다면 귀로탄망보다 쾌속한 선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
다.
귀로망탄의 무서움은 풍막을 동반한다는 데 있다. 사전에 상대방
을 철저히 무력화시키고 마지막의 가일수처럼 들이닥치기에 무서웠던
거다.
풍막과 쾌초의 조화. 그것이 바로 귀로망탄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또한 유현의 풍막은 상대방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하운은 분명히
당황했으며 유현의 의도대로 이끌렸었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
"원심력으로 뻗어 나오는 바람에 몸을 맡겨 부채가 들어오는 순간
만큼만 벌린 거리.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칼을 들이밀어 부채가 원하
는 지점을 무력화시키고는 위로하듯 타고 올라가는 검로... 저 아이
는 풍막의 흐느낌뿐 아니라 귀로망탄의 탄식까지 들었다는 건가."
선우호운의 감탄처럼 풍막에 막혀 있던 하운이 만약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면 결과는 절망적으로 흘렀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풍막의
와선(渦旋)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자연스레 흘러 다녔다.
워낙 미미한 움직임이었기에 유현으로는 하운이 그저 제자리에서
씨름하는 것으로 비춰졌지만 알고 보면 유성의 위치는 처음과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
그렇게 몸으로 알게 된 풍로(風路)를 따르려 검의 힘을 줄였고 풍
막의 힘을 최대한으로 적게 받으려 검끝을 지면으로 내리는 일방 유
현의 다음 목소리를 들으려 모든 행동을 멈춘 것이다.
풍막은 비록 거대했으나 그 자체만으로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정
도까지는 아니었으니까.
하나 유현으로는 하운의 이런 모습이 굴복으로 비쳐졌기에 예비되
었던 다음 수, 즉 귀로망탄을 주저없이 뻗어내었던 거다. 완벽한 승기
라고 여기고.
"전장에서의 한 치는 일 장과 진배없거늘. 그나저나 유현 저 친구,
완전한 풍막으로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선우호운이 어깨를 한번 올려 목 근육
을 풀었다.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로구나. 당년에 저들과 같은 성취를 이룬 이
들은 아마도 전무후무할 것이다. 그렇다면 네 실력이 어떨지 심히 궁
금하구나."
스릉 ㅡ
긴말이 필요할까. 북궁단야는 등에 맨 거검을 힘껏 뽑아 들었다. 삼
사사라는 희대의 걸물들을 맞아 충분히 훌륭한, 아니 우위까지 점하는
동료들의 무위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좋다!"
고개를 끄덕인 선우호운이 양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구부리고 기
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
"이게 얼마 만인가?"
낮지만 거역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천지를 뒤덮었고 운기 중이던 선우
호운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누가 삼사사의 싸움 가운데에서
소란이라는 건가.
그렇게 고개를 돌리던 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아, 아니.....!"
"정말 간만일세. 그간 잘 지냈는가?"
강호상 최고 배분을 다투는 오송 가운데 맏형인 청목자를 보고 놀라
는 걸까? 아니면 강호를 주름잡는 양대 문파 가운데 하나인 무당 장
문인 죽선자를 대했기에 그러는 걸까?
그러나 선우호운의 눈은 그들의 뒤에서 뒷짐을 지고 천처히 걸어나
오는 북궁노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길......."
"발 달린 사람에게 가지 못할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는 자네
야말로 여긴 어쩐 일인가?"
유쾌하게 웃으며 북궁노백이 다가오자 선우호운은 급급히 공력을
풀었다. 여태까지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먼, 그런 공손함이었지만 선
우호운의 태도엔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어라, 저들은?"
반갑게 손을 뻗으려던 북궁노백이 식식거리며 장추삼을 쏘아보는
채무관과 어깨를 감싸 쥔 채로 고개를 떨어뜨린 유현에게 시선을 옮겼
다.
"허어, 오늘 무슨 날인가?"
웅웅웅 ㅡ
그저 감탄처럼 던진 말이다. 물론 단 한 점의 내력도 싣지 않고.
그런데 북궁노백의 독백과도 같은 감탄은 서로 다른 상념의 늪에 빠져
있던 두 노강호에게 똑바로 전달되었다.
"......?"
"......?"
문득 고개를 돌린 그들이 선우호운과 북궁단야를 지나 백의를 펄럭
이며 허허 웃고 있는 북궁노백으로 시선을 모았다.
"아, 아니!"
"이럴 수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두 사람이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
기 시작했다. 그렇게 북궁노백의 앞으로 다가온 둘이 거의 엎어지듯
포권을 올렸다.
"그간 별래무양하셨습니까."
"대체 얼마 만입니까! 이렇게 소식을 끊어도 되는 겁니까!"
차분한 유현과 대조적으로 채무관은 고함처럼 반가움을 표했다. 이
들의 어깨에 손을 얹는 북궁노백의 표정에도 만감이 스쳤고 물끄러미
지켜보는 선우호운 역시 옅은 웃음을 그려냈다.
"그래, 그래. 나는 잘 지냈다네.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면서도 그저
거리 타령만 하다 이제야 만나게 되는구먼."
이들의 의외롭고, 호들갑스러운 재회에 어이없는 것은 삼성뿐이 아니
었다. 알고자도, 무당의 사람들도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황
당한 건 대겸형이었다.
"흠, 흠. 처음 뵙겠습니다."
"음?"
불쑥 나타나 포권 올리는 대겸혐을 곁눈으로 한번 쳐다보고 북궁노백
이 고개를 돌렸다.
"자네들도 모두 신수가 훤하구먼. 어라, 붕익선의 몰골은 왜 이 모양
이란 말인가!"
"아... 그게......"
"말씀도 마십시오. 푸하하하!"
버벅이는 유현을 보며 채무관이 좋아라 킬킬거렸다. 그렇게 모두가
즐거웠지만 인사를 건넨 대겸형은 뻘쭘함을 넘어서 거의 바보가 된 느
낌이었다.
그래도 삼사사가 존대하는 이들이라 나름대로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거늘 이런 홀대가 어디 있는가!
"회포를 푸시는 데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저는 무림맹에서 문상을
맡고 있는 대겸형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 번 정식으로 포권을 올리자 이번에는 북궁노백도 화답을 했
다.
"북궁노백이라고 하내."
라고.
포권도, 그렇다고 별칭도 없이 그저 이름 넉 자라니. 하지만 뭐라
고 꼬투리를 잡을 건덕지도 없는, 그야말로 깔끔한 자기소개가 아닌
가.
"으음........"
대겸형이 당황으로 얼룩진 침음성을 흘리는데 할 말 다 한 북궁노백
은 다시 고개를 돌려 세 노인들과 어울렸다. 여기에 불만 어린 사람
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쁜데........"
평소라면 버럭 소리를 질렀을 순간이지만 방금 전 대겸형의 그것처
럼 모기 왱왱대는 소리로 장추삼이 중얼거렸다. 하도 작은 음성이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정말 바쁜데....."
다시 궁시렁. 이번에는 그나마 소리를 좀 키웠지만 그래 봐야 파리
날개짓이라 역시 알아들은 이는 없었다.
"에잇!"
끝내 참지 못하고 장추삼이 네 명의 노인 앞으로 튀어나갔다. 더 정
확하게는 북궁노백 앞으로.
"어르신! 저희가 지금 대단히 바쁜 관계로 먼저 자리를 떠야겠습니
다. 앞뒤 정황없이 이런 말 올리는 건 죄송하지만 정말로 급합니다!"
말을 끝낸 장추삼이 북궁노백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운과 북
궁단야에게 눈짓을 하자 멍청히 서 있던 둘도 선잠에서 깨어난 사람처
럼 화들짝 반응을 보였다.
"어딜 간다는 겐가!"
말을 하는 일방 삼성을 살피던 선우호운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북궁
노백이 대소를 터뜨렸다.
"어서 가보게나. 나도 곧 뒤따름세."
뭔가 굉장히 친숙한 어조. 삼사사가 의혹 어린 눈길을 보내려는데
북궁노백이 웃음기를 잃지 않은 음성으로 세 노인들의 어깨를 감싸 쥐
었다.
"이제 강호는 저들에게 맡기세. 우리의 청춘은 삼십 년 전의 그때
이미 사그라진 거야."
"공무 중입니다. 저 아이들에겐 비천혈서를 소지하고 있다는 혐의가
있는 관계로......"
"일을 마치면 다시 올 것이네. 그곳이 무림맹이 아니라 지옥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내가 보증하지."
저 자신감은 어디에서 유래한 걸까. 삼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북궁노백이 낮게 읊조렸다.
"손자 때문에 이런 말을 담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자네들도 알겠
지?"
"음?"
그제야 선우호운은 북궁단야에게서 받았던 친숙함의 정체를 알았
다. 지금은 인자한 할아버지와도 같지만 삼십 년 전의 북궁노백은 찬
서리를 뒤집어쓴 검사였었다.
지금의 북궁단야처럼.
"뭐 하는가! 어서 저들을 막아! 삼사사 어르신들도 이러시면 직무
유기의 죄를 범하시는 겁니다!"
길길이 날뛰는 대겸형이었지만 세 노인은 미동도 없이 떠나가는 세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뒷모습에서 삼십 년 전의 자신들을 투영이
라도 할 것처럼.
"삼사사 어르신!"
"됐네, 됐어."
선우호운이 손짓으로 대겸형을 말렸다. 그러나 무림맹의 문상으로
서 이건 묵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대체 저 노인네가 누구기에 천하의
삼사사가 이런 모습이라는 건가.
붉으락푸르락 이르러지는 대겸형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던 북궁노
백이 한 발 나서서 정중하게 포권을 건넸다. 악이 받쳤든, 난리를 부
리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다.
이런 이는 존중해야 한다.
"막아야 할 입장이 있다면 반드시 가야만 할 사람들도 있는 법이라
네. 저들은 신의를 저버릴 만큼 얄팍하지는 않으니 믿고 기다리게나."
"이건 신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노인장이 뉘신지는 모르나 이렇게
되면 무림첩을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두라고 했지 않나, 문상."
"지부지휘사 어르신,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 노인장이 무슨
부처님이라도 된다는 겝니까!"
이해할 수 없는 삼사사의 반응에 대겸형이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특히나 선우호운이라고 하면 일 처리도 일 처리려니와 지닌 바 무위가
천하를 오시할 수준인데 저런 노인에게 쩔쩔매다니.
"부처라... 저분은 부처님과 다르네."
유현이 문득 말을 받았다. 이에 채무관도 엄숙한 어조로 덧붙였다.
"저분에게 패배를 배웠고,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를 배웠다네. 그야
말로 인생의 사부님이시지."
이 말에 알고자와 오송이 깜짝 놀랐다. 무림맹의 삼사사에게 처음으
로 패배를 안긴 인물. 그러면서도 패자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숭앙을
끌어내는 인물.
그러나 대겸형은 삼사사의 과거사에 관심을 둘 처지가 아니었다.
"철갑기마대!"
그의 부름에 철갑기마대원들이 일제히 반응했다.
"문상."
"더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어르신들도 문책을 피할 길이 없을 겁니
다!"
선우호운의 말을 막으며 대겸형이 명령을 내리려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의 귓전에 믿기 어려운 말 한마디가 들려와 대겸형은 얼이
빠진 얼굴이 되어야 했다.
"호북지부에서 철갑기마대가 사라져야 직성이 풀리겠나?"
이게 무슨 말일까? 설마 삼사사가 노인네의 편을 들어 철갑기마대와
상대라도 하겠다는 걸까? 물론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하면...
'저 노인 혼자 오십여 철갑기마대를 몰살시킨다는 건가!'
다른 이의 말이었다면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삼사사,
그 가운데에서도 선우호운의 말이기에 신경 쓰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건 으름장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지부지휘사 어르신, 저들이 처음의 철갑대로 보이십니까? 저들이
어떤 고련을 겪었는지 아신다면 그런 말씀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할 텐
데........."
"실험해 보고 싶은가, 저분의 검을?"
물론 대가를 치러야하겠지만, 하고 말을 맺은 선우호운이 눈을 감았
다. 해줄 말은 다 했으니 선택하라는 걸까.
'으으.........'
십 년, 무려 십 년이나 고심하고 노력해서 가꾸어낸 철갑기마대다!
제아무리 천고의 무인이라도 단신이라면 십의 팔은 승리를 이끌어 낼
전력이란 말이다!
그야말고 절대오존이라면 몰라도.
절대오존?
'혹시?'
침을 꿀꺽 삼키고 대겸형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북궁노백을 뜯어보
았다. 커다란 몸과 그에 걸맞는 대검(大劍), 압도적인 기도와 당당함.
여느 고수에게서나 볼 수 있는, 어찌 보면 평범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풍모.
"내 말을 믿지 못하는군. 이분은 바로......."
한숨처럼 선우호운이 입을 열려는데 채무관이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답답하기는! 이분의 백의가 또다시 상대의 피로 검붉게 물들고서야
정신을 차리겠나! 그것도 자네가 아끼는 철갑기마대의 것으로 말이
야!"
"에?"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대겸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알고자가 잠꼬
대처럼 중얼거렸다.
"한혈... 흑의존........."
"음?"
그의 곁에 서 있던 오송이 알고자와 북궁노백을 번갈아 바라보다 입
을 떡 벌렸다. 그리고 대겸형이 비척비척 몇 발을 물러섰다.
한혈흑의존이란다.
절대오존의 다섯 이름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검수가 바로 저 노인이
란다.
단 한 번의 강호출두로 뭇 고수들을 연파하여 그 피로 온몸을 적셨
다는, 그래서 흐르는 땀방울마저 피같이 붉다는 절대의 무인이 저 노
인이란다.
"진정... 흑의존이십니까?"
대겸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북궁노백은 말없이 떠나간 세
청년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