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고통이 덜 했을 텐데
남궁무학은 망연한 얼굴로 싸움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바라봤다.
갈 때는 수천이 갔다. 한데 돌아온 것은 고작 백여 명뿐이었다. 중간에 다른 무가나 세가의 무사들이 돌아갔다 하더라도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이, 이럴 수가......'
이 정도 무사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정협맹 자체를 유지할 수도 없는 숫자였다.
더구나 곧 무한의 상권을 가지고 정체불명의 적과 세력 다툼까지 해야 하는데, 고작 백 명으로는 상권을 장악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장악은 고사하고 무한의 상가들을 감시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맹주, 돌아왔소."
서문공복이 남궁무학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남궁무학은 멍한 얼굴로 서문공복에게 물었다.
"설마...... 이들이 전부요?"
서문공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무학은 고개를 돌려 서문공복 옆에 안쓰러운 얼굴로 서 있는 모용강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고작 흑사맹과 싸우면서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아, 은왕곡이 있었군. 그래, 은왕곡의 기습이라도 받은 건가?"
모용강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은왕곡은 약속대로 뇌룡장에서 처리했습니다. 흑사맹을 물리친 후에 확인했는데, 그들이 있던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이 살아남은 흔적은 없었습니다."
모용강의 말에 남궁무학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뇌룡장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은왕곡은 정협맹과 흑사맹을 동시에 괴멸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이건 불가능해. 분명 뭔가가 있다.'
남궁무학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이내 힘없이 꺼졌다. 뭔가가 있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정협맹 자체가 와해되기 일보 직전인 것을.
"다른 무가들에 연락을 해서 무사를 충원해야겠군."
남궁무학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모용강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굳이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남궁무학도 모용강이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흑사맹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이들이 전부가 아니다.
이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물론 그들을 다 합해봐야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없을 정도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협맹으로 오지 않았다. 그들은 왔던 곳, 각자의 무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남은 무사들 중에도 머지않아 돌아갈 사람들도 있었다.
'각 무가에서 그냥 두지 않겠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정협맹을 이끌어 나갈 수 없게 된다.
예전처럼 정협맹이 스스로 키워낸 무사들이 많았다면 다른 무가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겠지만, 그들이 대부부 사라져 버린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의 정협맹은 그저 작은 무가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만 물러들 가시오."
남궁무학은 힘없이 말했다.
모용강은 안타까운 눈으로 남궁무학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포권을 취한 후, 무사들을 이끌고 물러갔다. 이들에게는 지금 휴식이 필요했다.
서문공복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차갑게 눈을 빛냈다. 정협맹의 미래가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맹주."
남궁무학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문공복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오? 오늘은 쉬고 싶으니 중요하지 않은 얘기라면 나중에 하시오."
남궁무학의 말에 서문공복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얘기요."
서문공복은 그렇게 말해 남궁무학의 시선을 잡아놓은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맹을 떠나야겠소."
"그게 무슨 말이오? 한창 어려울 때 떠나겠다니. 지금 맹의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거요?"
"어차피 서문세가도 사라진 마당인데 맹에서 내가 필요하오? 맹이 필요한 건 서문세가지. 나 서문공복이 아니지 않소?"
남궁무학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지 안소. 그러니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합시다."
사실 서문공복의 말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문공복은 맹에서 그런 존재였다.
무공마저 별 볼일 없었다면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그래도 서문세가까지 망한 마당에 외당주라는 직책을 계속 유지해 왔으니 능력은 꽤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남궁무학은 그런 능력을 가진 서문공복이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필요하다가 여겼다. 하지만 서문공복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미 결정한 일이오. 이번 흑사맹과의 싸움이 내 마지막 임무였소. 그나마 승리라도 했으니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어 다행이오."
서문공복의 말에 남궁무학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생존자가 고작 백 명인 승리를 어떻게 승리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승리라기보다는 양패구상에 훨씬 더 가까웠다.
"아무튼 내 뜻은 전했으니 그리 알고 계시오."
서문공복은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남궁무학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어금니만 꽉 물고 방금 전 서문공복이 서 있던 자리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무영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그래서 걸음을 서둘렀다. 올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동정호에 올 때는 정협맹이나 무림맹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렀지만, 지금은 마음에 남은 불안감 때문에 서둘렀다.
"뭘 그리 서두르느냐."
금령이 앞에서 말했지만 무영은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데 집중했다. 금령은 그런 무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서두른다고 나쁠 것은 없었다. 집에 빨리 돌아가면 좋지 않겠는가.
"조금 더 빨리 가겠습니다."
무영의 말에 금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야 더 빨리 가건 천천히 가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영은 금령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다. 자연히 금령도 따라서 달려야 했다.
그렇게 일 각이 지나자, 금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온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력을 써서 달리는데도 마치 내력을 전혀 쓰지 않고 달리는 것처럼 힘들었다.
금령은 그제야 무영이 왜 자신에게 허락을 구했는지 깨달았다.
'허허, 이거 당했군.'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금령은 무영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묵묵히 달렸다.
그렇게 조금 더 달렸을 때, 하늘에서 번쩍 빛이 일었다.
금령은 그 빛을 발견하고는 심각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철패를 살폈다. 철패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서둘러라! 위험하다!"
금령의 말에 무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금령을 바라봤다. 금령은 빛나는 철패를 무영의 눈앞에 보여줬다.
"섬뢰를 하늘로 쏘았다는 뜻이다."
무영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금령은 몇 마디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위험할 때 섬뢰를 쏘라고 말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영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무영을 중심으로 뿌연 안개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안개는 순식간에 무영과 금령을 감쌌다. 그것은 기(氣)의 결정이었다.
후아아앙!
마치 구름이 날아가는 듯했다. 거친 바람소리와 함께 뭉글거리는 안개 뭉치가 빠르게 나아갔다.
뇌룡장 사람들은 뇌룡장에서 가장 큰 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그곳은 한 번에 천 명이 넘는 무사가 동시에 수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이었기에 뇌룡장 사람들이 모두 모이고도 상당한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그들은 연무장 한가운데 빽빽이 모여서 웅크리고 있었다. 아니,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조금이라도 무공을 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그들을 감싸고 전의에 불타는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악은 번득이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연무장을 감싸는 담장 위에 수많은 흑의인들이 올라서 있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강악의 외침에는 내공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흑귀들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섬뜩한 눈빛으로 연무장에 모인 뇌룡장 사람들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강악은 고개를 돌려 당백형을 바라봤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흑귀들의 실력을 대번에 파악했기에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자들인지 알 수 있었다.
둘은 눈빛을 교환한 후, 동시에 몸을 날렸다. 각각 반대쪽으로 이동해 흑귀들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꽈르릉!
파파파파팟!
강악의 손바닥에서 굉뢰번천장이 뿜어져 나갔다. 그것은 단숨에 담장 위를 휩쓸었다. 당백형의 손에서도 천여 개의 비침이 하늘을 날아 흑귀들을 덮쳤다.
퍼버버버벅!
순식간에 흑귀들의 일각이 무너졌다. 하지만 흑귀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공격을 받는데도 담장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쓸어버려라!"
누군가의 명이 터졌다. 그러자, 그때까지 미동도 않고 서 있던 흑귀들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흑귀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조용했다. 순식간에 담장에서 연무장 한가운데로 달려든 흑귀들은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채채채챙!
뇌룡대와 녹룡대가 흑귀들과 맞부딪쳤다. 사방에 검광이 번득였고 쇳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흑귀들의 실력은 놀라웠지만, 녹룡대와 뇌룡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동안 강악과 당백형, 엽광패에게 혹사당하다시피 수련을 해왔기 때문에 실력이 상당히 늘었다.
게다가 뇌룡대는 몸을 사리지 않고 덤비기 때문에 흑귀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뇌룡대나 녹룡대가 위험한 순간에는 언제나 엽광패가 활약했다. 엽광패는 사방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위기에 빠진 뇌룡장 사람들 근처의 흑귀들을 박살냈다.
서하린과 모용혜의 활약도 엽광패 못지 않았다. 그녀들의 실력은 이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들도 엽광패와 마찬가지로 위기에 빠진 뇌룡장 사람들을 도와 흑귀들을 물리쳤다.
당비연은 가끔 암기를 날리며 간간히 흑귀들을 견제해 주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런 견제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강악과 당백형은 연무장이 좁다고 휘저으며 닥치는 대로 흑귀들을 박살냈다. 그리고 흑귀들 틈에 숨어 있는 흑령들도 찾아 공격했다.
흑령들의 실력은 상당했지만 강악과 당백형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싸움의 흐름이 좋지 않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은왕곡은 뇌룡장에 대해 꽤 자세히 파악한 상태다. 흑귀와 흑령만으로 이들을 부술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들이 있었다.
"삐이이익!"
흑령 중 하나가 날카롭게 피리를 불었다. 그러자, 새로운 무리가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흑의를 입었기에 얼핏 보면 흑귀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흑귀와는 다르게 피부가 새까맸다.
그저 거무튀튀한 정도가 아니라 새까만 피부를 가진 자들이 우르르 담장을 넘어 들어오자 그 위압감이 엄청났다.
그들은 마철령이 새로 만들어낸 철강시였다. 마철령은 은왕으로부터 흑귀들을 지원받아 수백 구의 철강시를 새로 만들어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재료로 만들었기에 상당히 강력한 철강시가 되었다. 게다가 흑귀들은 생전에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철강시들의 힘이 배가되었다.
은왕이 뇌룡장에 투입한 강시의 수는 모두 일백 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강시들은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심장이 박살나도 움직인다. 강시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는 머리를 부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온몸을 부수거나.
철강시를 투입한 효과가 대번에 나타났다. 강악과 당백형에게 다가간 철강시들은 완전히 박살이 났지만, 두세 구에 불과했다.
흑령들은 철강시가 강악과 당백형 쪽으로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강악과 당백형은 흑귀들이 몸으로 막는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서 나머지 사람들을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강악과 당백형은 몰려드는 흑귀들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흑귀들은 목숨을 내던지듯 달려들었다. 죽이고 또 죽여도 그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
"대체 몇 명이나 온 거냐!"
강악은 그렇게 외치며 강렬한 벼락을 사방으로 쏟아냈다.
꽈르르르릉!
순식간에 열 명의 흑귀가 새까맣게 타 버렸다. 하지만 그 빈자리는 금세 다른 흑귀들이 메웠다.
당백형도 별다를 것 없었다. 당백형이 쏟아내는 암기는 생각보다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흑귀들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흑령들이 그것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흑령들의 실력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그렇게 강악과 당백형의 발을 묶어 놓은 틈에 철강시들이 뇌룡장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철강시는 빠르고 강했다.
깡! 깡! 깡!
뇌룡대는 철강시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나서 크게 당황했다. 마치 쇠기둥을 후려친 듯한 느낌이었다. 철강시들은 검에 찔리고 베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쩡!
철강시가 휘두른 검에 실린 힘은 정말로 엄청났다. 뇌룡대는 순식간에 열세에 빠졌다. 빠른 속도로 신선단과 신선고를 소비했다. 그만큼 철강시는 무서웠다.
다른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녹룡대는 검기를 일으켜 철강시를 공격했지만 철강시는 검기에도 멀쩡했다.
당비연은 가운데 서서 당황한 얼굴로 암기를 날렸다. 철강시의 눈을 겨냥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동자에 맞은 암기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대로 가다가 다 죽겠어!'
당비연은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보아하니 그것도 힘들 듯했다. 엽광패가 애쓰고 있긴 하지만 거의 한계에 가까웠다.
그 순간 당비연은 자신이 잊고 있던 것 하나를 떠올렸다.
"아! 섬뢰!"
당비연은 급히 품에서 섬뢰를 꺼냈다. 사실 섬뢰는 벼락을 쏘아내는 암기다.
하지만 한 번 발사를 하고 나면 뇌기를 채우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내력을 주입해야 섬뢰를 채울 수 있다.
단 한 발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건 무리였다. 당비연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금령의 말을 떠올렸다. 만일 섬뢰에 장착된 쇠구슬을 보지 않았다면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을 향해 쏘라고 했지?'
당비연은 미련 없이 섬뢰를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내력을 집어넣었다.
번쩍!
섬광이 하늘로 솟았다. 마치 벼락 한 줄기가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섬광은 나타났던 검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당비연은 멍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왠지 중요한 한 발을 그냥 낭비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익!"
당비연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암기를 날렸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그렇게 반 각이 흘렀다.
뇌룡대는 대부분 부상을 입은 채 싸우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신선단과 신선고를 모두 썼기 때문에 더 이상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다.
녹룡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애초에 신선단이나 신선고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계속해서 부상이 누적되고 있었다.
엽광패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지만 그의 검에 쓰러진 철강시는 고작 열 구 정도에 불과했다. 철상시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마물이었다.
"이런 젠장! 뭐 이딴 놈들이 다 있어!"
엽광패는 그렇게 외치며 단전에 남아 있는 내력을 모조리 쥐어짰다.
후아아앙!
엽광패를 중심으로 거대한 기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엽광패는 그 기운을 도에 싣고 마구 도강(刀剛)을 쏟아냈다.
콰과과과광!
엽광패의 도강이 철강시 다섯 구를 박살냈다. 팔다리가 떨어져도 움직이니 아예 몸을 박살낸 것이다. 머리를 박살내면 더 간단하지만 그것도 사실 쉽지 않았다.
그리고 철강시 다섯 구의 장해가 바닥에 쏟아지는 순간 녹룡대와 뇌룡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직 목숨을 잃은 자는 없지만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쓰러진 자들을 향해 흑귀들이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뇌룡장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이를 악물고 철강시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당비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섬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철컹.
섬뢰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벼락이 쏟아져 내렸다.
꽈과과과과과과광!
수십 개의 벼락이 철강시들의 정수리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벼락에 맞은 철강시들은 그대로 무너졌다. 바닥에 쓰러진 철강시의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꽈르르르르릉!
또다시 수십 줄기의 벼락이 아직까지 서 있는 철강시들을 후려쳤다. 철강시들은 이번에도 그저 바닥에 쓰러져 모락모락 김을 피워댔다.
당비연은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연무장 입구에 서 있는 무영을 발견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무영의 몸 주위에는 미처 흩어지지 못한 하얀 안개가 떠다니고 있었다.
갑작스런 무영의 등장으로, 아니, 갑자기 수십 줄기의 벼락이 연달아 떨어진 탓으로 싸움이 잠시 멈췄다.
무영은 양손에 뇌기를 모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 물러가는 게 좋을 거야."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흑령 중 하나였다. 이번 임무가 실패하면 어차피 자신들의 목숨은 없었다.
철강시도 모두 쓰러졌기에 더 이상 승산이 없었지만 그래도 꼬리를 말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쳐라!"
흑령의 명령은 마치 최면처럼 흑귀들의 귀로 스며들었다. 흑귀들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무영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무영은 뇌기가 가득 모인 주먹을 연달아 내질렀다. 빠르고 강력한 권격이 헤아릴 수 없이 쏟아져 나갔다.
쩌저저저저정!
무영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뇌전 줄기가 뻗어 나갔다. 마치 굵고 긴 채찍이 사방으로 요동치는 듯했다.
잔가지가 잔뜩 달린 거대한 뇌전 줄기가 마구 몸부림치며 흑귀들을 휩쓸었다. 무영이 주먹을 내지르거나 휘두를 때마다 뇌전의 채찍이 꿈틀거렸다.
빠지지지지지직!
뇌전의 채찍은 순식간에 뇌룡장 사람들 근방의 흑귀들을 정리해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흑귀와 흑령들을 잡아먹었다.
흑귀와 흑령들은 그렇게 당하면서도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뇌룡장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무영은 질린 얼굴로 주먹질을 멈췄다. 어느새 모든 적을 쓰러뜨렸다.
파직. 파직. 파지직.
연무장을 온통 휩쓸고 다니던 뇌전의 채찍이 사라지며 그 흔적만 남아 번득였다. 뇌전의 흔적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꽤 오래 남아 사람들에게 전투의 여운을 남겼다.
무영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이 만든 광경을 바라봤다.
뇌전의 강도를 조절했기 때문에 무영이 직접적으로 죽인 흑귀나 흑령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무영의 기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충분했다.
무영은 이내 시선을 뇌룡장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서하린과 모용혜, 당비연이었다.
세 여인은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을 바라보자 거짓말처럼 기분이 나아졌다.
무영은 굳었던 표정을 조금 풀고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실패?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은왕의 눈이 차갑게 빛나자, 비천은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사실 비천이 잘못한 건 없었다. 이번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건 오로지 은왕이었다. 하지만 은왕의 기분을 그런 사소한 일로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계획에 허점이라도 있었던가? 미끼로 삼은 흑귀들이야 그렇다 치고, 뇌룡장에 쏟아 넣은 흑귀와 흑령이 몇인데 실패를 했단 말이냐."
동정호 변에 있던 이백의 흑귀는 철강시를 만들기 위해 대법을 시행한 흑귀였다.
그들의 역할은 정협맹의 힘을 잔뜩 끌어내는 것도 있지만, 사실 그곳으로 온 무영의 발목을 잡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목표는 뇌룡장이었고, 예상대로 무영과 금령이 뇌룡장을 나섰다. 그들이 빠진 뇌룡장을 박살내는 것쯤 은왕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십대고수가 셋이나 있다 하지만 철강시를 백 구나 투입한 만큼 절대 실패할 이유가 없었다.
은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완벽한 계획이었다. 한데 어찌 실패를 했단 말인가.
"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것이...... 뇌룡장이 무너지기 직전에 뇌룡장주자 나타났다 합니다."
"뇌룡장주? 그놈이 거길 어떻게 간단 말이냐. 동정호에 있던 놈이 갑자기 뇌룡장에 나타나다니, 그놈이 분신술이라도 쓴단 말이냐?"
비천은 조금 당황했다. 은왕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은왕은 그저 공포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듯한 자였다. 한데 지금 보니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보였다.
이번에 잃은 흑귀의 수는 물경 천이 넘어간다.
동정호에서 잃은 흑귀가 이백이고, 뇌룡장에 투입한 흑귀의 수는 그 네 배가 넘는다. 게다가 백 구의 철강시에 수많은 흑령들까지 잃었다.
은왕의 기반 중 거의 삼분지 일이 날아간 것이다. 그 자체로 천하를 아우를 수 있는 은왕의 힘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은 사맹을 상대로 그렇게 음모를 꾸몄던 게 결국 도움이 된 셈이군. 사맹이 몰락했으니 축소된 힘만으로 충분히 천하를 아우를 수 있을 테니까.'
비천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은왕의 눈치를 살폈다. 은왕은 한참이나 씩씩대다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단 분위기가 원래대로 돌아오니 은왕은 예전처럼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비천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어쩔 수 없지. 그놈들은 혈왕에게 맡긴다. 일단 혈마맹주, 아니, 혈교주에게 흑귀들을 더 넘겨라. 철강시가 더 필요하니까. 그리고 혈강시의 재료가 될 사람을 알아보도록."
"존명."
비천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대전에서 물러났다.
은왕은 비천이 완전히 물러가자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했다.
"과연 약선의 제자라 이건가? 스승이 사라지니 그 제자가 내 앞길을 막는군.
치 떨리는 족속들 같으니. 금령까지 포함해서 네놈들을 결코 곱게 죽여주지 않겠다. 혈왕단의 재료가 되게 해주지. 큭큭큭큭."
은왕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현재 뇌룡장은 처참한 상태였다. 뇌룡대나 녹룡대에서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뇌룡대나 녹룡대에 속하지 않은 일반 무사들은 상당수가 죽었다.
뇌룡대는 벌써 대부분 회복을 했다.
그들은 그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신선단과 신선고가 있었다. 물론 고통이야 심하겠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겪어오던 고통 아닌가.
뇌룡대는 좀 더 많은 신선단과 신선고를 몸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이번에만 해도 더 오래 버틸 수 있었고, 더 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었는데 신선단과 신선고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물론 근본적으로 신선단과 신선고가 없어도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훨씬 더 혹독한 수련을 계획했다.
아무튼 그런 뇌룡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상당히 처참한 상태였다. 그래서 무영은 서둘러 신선단과 신선고를 만들었다. 그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면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무영은 일단 남아 있는 재료를 이용해 신선단을 만들기로 했다. 남은 재료가 그리 많지 않아 조만간 또 산을 타야겠지만 그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듯했다.
무영은 가루로 만든 재료를 한 웅큼 들고 한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우우웅.
손바닥에 새하얀 기운이 어렸다.
그리고 약초가루를 쥐고 있던 손을 풀고 아래로 내렸다. 놀랍게도 약초가루는 허공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아래로 내린 무영의 손에 새까만 기운이 어렸다.
무영은 그렇게 양손에 기운을 가득 모은 후, 신중하게 그것을 허공에 뜬 약초가루로 가져갔다.
화아악!
손과 손, 기운과 기운이 만나면서 눈부신 빛이 일었다. 그 빛이 재료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무영은 양손에 강렬한 뇌기를 보냈다.
파지지직!
새하얀 기운과 새까만 기운, 그리고 두 기운이 만나 만들어낸 섬광과 그것을 감싸는 뇌전이 어우러졌다.
번쩍!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밝은 빛이 순간적으로 무영의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자, 무영의 손바닥 위에 매끈한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신선단이었다.
"후우우. 쉽지 않구나."
약초가루를 손에 쥐고서 기운을 모아 신선단을 만드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눈 몇 번 깜빡일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정신력이 너무 많이 소모됐다.
평소 같으면 연달아 펼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시간조차 없었다.
무영은 서둘러 약초가루를 다시 한 웅큼 쥐었다. 작업실 안에 하얗고 검은 기운이 어렸고, 섬광이 번득였다.
그렇게 무영은 옴몸의 기력과 정신력을 소모해가면서 끊임없이 신선단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무영은 급하게 완성한 신선단을 들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무영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걸음을 재촉한 무영은 순식간에 연무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싸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흑귀들의 시체도 다 치우지 못햇다. 환자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무영은 싸움이 끝나자마자 사라져서 채 반 각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환자들을 모두 이동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무영은 서둘러 환자들을 살폈다. 우선 가장 상태가 심한 사람을 찾았다. 일단 상태가 심각한 순으로 신선단을 먹일 생각이었다.
무영이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녹룡대원 중 한 명이었다.
내장이 다 드러날 정도의 상처를 입은 데다 팔 하나는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리에도 뼈가 드러날 정도의 검상이 십여 개나 있었다.
이 정도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단 신선고를 듬뿍 발라 외상을 다스린 후, 신선단을 먹여 내상과 전체적인 치료를 도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선고가 아예 없었다.
녹룡대원은 약간 두려운 눈으로 무영의 손에 들린 신선단을 바라봤다.
이렇게 급하게 만든 신선단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오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녹룡대원은 이내 입을 벌렸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이지만, 그래도 죽기는 싫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고통이 덜 했을 텐데.'
녹룡대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선단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정신을 잃었더라도 신선단이 주는 고통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신선단을 먹는 순간 머리가 맑아져 정신이 깨어나기 마련이다.
녹룡대원의 입으로 신선단이 들어갔다. 그동안 보아오던 것과 조금 다른 모양의 신선단이었지만 효과는 똑같았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녹아 목을 타고 넘어갔다.
청량한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 향은 녹룡대원의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그리고 몸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던 고통까지 대폭 줄여 주었다.
녹룡대원은 이제 찾아올 끔찍한 고통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졌다.
슬며시 눈을 뜨고 살펴보니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갈라져 내장이 비어져 나오던 배가 서서히 아물고 있었다.
아니, 빠르게 아물어갔다. 반이 넘게 잘려 덜렁거리던 팔이 다시 붙었고,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는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없어졌다.
단전에서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불끈거리며 솟아났다. 그 기운들은 녹룡대원의 혈도를 따라 움직이며 내상을 말끔히 치료했다.
게다가 그렇게 내상을 치료하고 남은 기운이 고스란히 단전으로 들어가 안착했다. 그것은 꽤 큰 힘이었다.
녹룡대원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돌려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은 어느새 다른 환자의 입에 신선단을 넣고 있었다. 아마 그 역시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리라.
그렇게 멍하니 무영을 바라보던 녹룡대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영을 향해 최대한 공경과 경이를 담아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무영이 보건 말건 상관없었다. 이건 자신의 마음이었어닌까.
무영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환자의 입에 신선단을 넣었다. 그렇게 신선단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영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후우, 이제 끝났다."
무영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연무장을 바라봤다.
연무장에는 이제 더 이상 남은 사람이 없었다. 무영은 몇 번이나 산을 왕복하며 재료를 채집하고 신선단을 만들어 모두의 상처를 말끔히 치료해 주었다.
무영이 신선단을 만드는 동안 멀쩡한 사람들은 연무장에 가득했던 흑귀들의 시체를 치웠다. 본래는 멀찍이 떨어진 들판에 묻어 주려고 했지만, 금령의 주도 하에 모든 시체를 태워 버렸다.
그렇게 모두가 합심해 서두른 덕에 연무장은 처음처럼 깨끗해졌다. 물론 부서진 부분은 어쩌지 못했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소명학이 알아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아직 피 냄새는 가지시 않았군.'
그토록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아직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피 냄새가 사라질 리 없다. 무영은 은은한 피냄새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오라버니, 여기 계셨군요."
무영은 고개를 돌려 연무장으로 막 들어서고 있는 세 여인을 바라봤다. 서하린을 비롯한 세 여인은 무영이 신선단을 만드는 동안 장원의 여러 가지 일을 도왔다.
연무장을 정리하는 일에서부터 사람들을 관리하고 지시를 내리는 일까지 능숙하게 해냈다. 그렇게 대충 일이 정리된 후, 무영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어요?"
모용혜가 다가와 묻자 무영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자신도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발길이 이곳으로 닿았고, 피 냄새를 맡았을 뿐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혈향을 맡아야 하는 걸까.'
어쩌면 평생을 피와 함께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일단 강호에 발을 들인 이상, 그건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일 테니까.
무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연무장을 바라보자,
서하린이 조용히 다가가 무영을 등 뒤에서 포근히 끌어안았다. 무영은 흠칫 놀랐지만 피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부드럽고 청초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서하린이 하는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모용혜가 용기를 내서 무영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팔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러자 당비연도 질 수 없다는 듯 남은 한 팔을 차지했다.
무영은 자신을 사방에서 차지한 세 여인을 슬쩍 내려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세 여인의 향기가 절묘한 조화를 이뤄 무영을 덮쳤다.
더 이상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남궁무학은 집무실에 앉아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돈은 있으니까 그걸로 어찌 해봐야 하나?'
현재 정협맹의 재정 상태를 꽤 훌륭한 편이었다. 물론 앞으로 돈 나올 구석이 없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그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황금 삼만 냥이면 꽤 괜찮은 무사들을 대거 고용할 수 있다. 그렇게 무사를 고용해 잃어버린 상권을 되찾고 나면 급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 후, 각 무가들과 적절히 연계해서 다시 정협맹을 키우면 된다.
고용한 무사들은 정협맹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만 쓰면 된다. 황금 삼만 냥은 그 정도로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돈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면 돼.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남궁무학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맹주님! 저 총관입니다."
남궁무학은 총관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들어오게."
집무실로 들어오는 총관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왜 그러는가? 표정이 좋지 않군."
"돈이 사라졌습니다."
총관의 말에 남궁무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돈이 사라졌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방금 확인해 보니 금고가 텅 비었습니다. 맹이 어수선한 틈을 타 누군가 가져간 모양입니다."
총관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남궁무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상권을 정리하고 받은 황금 삼만 냥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다. 총관이 보관하는 돈은 그저 정협맹의 운영비일 뿐이었다.
"쯧, 앞으로는 관리를 잘 하도록 하게. 일단 맹에 남은 무사들을 동원해 도둑을 찾아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총관은 그렇게 대답한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맹의 운영비는......"
최근 정협맹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기에 총관도 섣불리 돈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조만간 내가 해결해 주겠네."
그제야 총관은 약간 얼굴을 폈다. 남궁무학이 손을 휘휘 젓자, 총관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남궁무학은 못마땅한 눈으로 총관이 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득 황금 삼만 냥이 잘 있는지 궁금해졌다. 조금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누가 감히 자신의 집무실에 숨어 들어 몰래 그것을 가져가겠는가. 게다가 이곳에 황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남궁무학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치웠다. 의자를 치우자 문 하나가 나타났다.
손잡이도 없고 너무나 잘 만들어져 얼핏 봐서는 그곳에 문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남궁무학은 손바닥에 내력을 모아 흡(吸)자결을 운용했다. 문이 손바닥에 달라붙자, 서서히 손을 당겨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안으로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공간 구석에 무쇠로 만든 금고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남궁무학은 아래로 훌쩍 뛰어내린 후, 금고로 다가갔다.
"흐음, 별다른 이상은 없군."
누군가 만진 흔적은 없는 듯했다. 남궁무학은 품에서 열쇠를 꺼내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나 금고를 열면 그를 반겨주던 황금빛 광채가 보이지 않았다. 금고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 황금이 다 어디로......!"
남궁무학은 멍하니 금고 안을 바라보다가 이내 분노한 표정으로 집무실로 올라갔다.
문을 닫고 의자를 원래 자리에 놓은 후, 자리에 앉아 호흡을 고르며 분을 삭였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대체 누가 이 곳에 있는 금을 가져갔는지 말이다.
용의자는 몇 없었다. 이곳에 돈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 중 가장 유력한 사람은 서문공복이었다.
'맹에서 나가겠다는 걸 못 나가게 해 앙심을 품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랬다. 서문세가가 망하지 않았던가.
"하긴, 세가를 재건하려면 돈이 필요하겠지. 으드득."
남궁무학은 서문공복을 범인으로 일단 단정했다. 그래서 그를 불러 죄를 추궁하기로 했다.
결정을 내린 남궁무학은 무사 하나를 불러 서문공복을 불러오라 시켰다.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 잠시 앉아서 마음도 가라앉히고 생각도 정리했다.
섣불리 죄를 추궁하다가는 잘못될 수도 있었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빈틈을 보이는 순간 확 낚아채야 했다.
잠시 후, 남궁무학의 명령을 받고 서문공복을 데리러 갔던 무사가 돌아왔다.
남궁무학은 그 무사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문공복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무사 혼자 왔기 때문이다.
"외당주가 뭐라 하더냐?"
남궁무학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무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외당주께서는 자리에 안 계셨습니다."
"자리에 없어?"
"그렇습니다."
남궁무학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서문공복은 어제 탈맹 의사를 밝혔다. 생각해 보면 서문공복이 정협맹에 남은 미련이 있을 리 없다. 이미 몰락한 서문세가에 정협맹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설마!"
남궁무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 밖으로 달려 나가다. 그리고 서문공복의 거처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서문공복의 거처에 도착한 남궁무학은 방 안을 샅샅이 살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짐도 그대로였고, 서둘러 떠난 흔적도 없었다. 마치 어디 산책이라도 나간 듯했다.
달라진 건 딱 하나였다. 언제나 벽에 걸려 있던 서문공복의 애검이 사라졌다. 서문공복은 정협맹을 떠난 것이다.
"으드득! 이놈!"
남궁무학은 금고의 황금을 털어간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서문공복이었다. 또한 정협맹의 운영비를 털어간 범인도 그였다.
남궁무학은 이를 갈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작정하고 도망간 서문공복을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이제 정협맹에 남은 것은 백여 명의 무사, 그리고 거대한 장원뿐이었다.
그나마 무사들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하니 무사들을 부릴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서문공복을 하루라도 빨리 잡아 돈을 되찾지 않으면 정협맹은 진정으로 끝이었다.
남궁무학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근처에 아무도 없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협맹에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마저 몽땅 도망쳤을 것이다.
남궁무학은 온몸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결정을 내렸다. 지금 서문공복을 잡는 건 불가능했다.
차라리 무한의 상권을 중간에서 가로챈 놈들과 싸우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다.
남궁무학은 서문공복의 거처에서 나와 무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적거릴 필요 없이 당장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일 이번 일이 실패했을 경우에 대비해 정협맹을 담고 있는 장원을 조용히 처분할 계획도 함께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