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 틈 움푹 들어간 곳에는 만신창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인물이 몸을 바위틈에 끼운 채 앉아 있었다. 그 인물은 상대가 담천의인지 알아보았는지 웃는 듯 했다.
"자네는 참으로 고약한 친구야…!"
추혼귀견수(追魂鬼見手) 하공량(厦公亮)이었다. 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전신에는 성한 곳이 없었다. 그는 오른팔을 바위에 걸쳐 놓고 손에 한 자 정도 길이의 죽통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비침은 그것에서 발출된 것 같았다.
"모두 어찌 되었소?"
"하지만 이런 때에 오다니 고맙기도 하군."
"……?"
"노부는 매우 졸렸다네. 하지만 수마(睡魔)가 덮고 나면 다시 깨어나지 못할 길을 가야한단 말일세. 그렇게 잠든 채 죽고 싶지는 않았어."
하공량은 정말 졸린지 눈꺼풀이 눈을 자꾸 덮으려 하고 있었다. 인간의 몸에서 피가 많이 빠져 나가면 혼절하게 된다. 아마 그것을 정신력으로 버티어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네에게는 고역이겠지만 노부가 잠들 때까지 노부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이제 죽으려는 사람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텐가?"
정말 고역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표공도의 죽음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같은 날, 거의 같은 날 비슷한 시기에 전대의 기인 두 사람의 죽음을 본다는 것은 확실히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담천의는 청각을 최대한 올려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하지만 기척은 전혀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하공량이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유곡을 찾는 겐가? 그는 이틀 전에 떠났네. 유곡이 이 여음곡에 들어 온 것은 이미 이곳의 지형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이야.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듯 상대에게 안심시키고, 도망 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지."
"어디로 빠져나간 것이오?"
여음곡의 뒤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원숭이라도 타고 넘을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무공이 고절하다해도 사람의 힘으로 저런 절벽을 타고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폭포 뒤에 보면 사람 하나 가까스로 빠져 나갈 수 있는 구멍이 있네. 그 구멍은 뒷산 너머로 연결되어 있지."
"하선배는 왜 같이 떠나지 않았소?"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네. 놈들은 쉬지 않고 진을 파해하려 들었지. 유곡과 비견될 비상한 두뇌를 가진 자가 있었던 것 같아……. 유곡은 노부에게 무리하지 말고 불리하다 싶으면 몸을 피하라 했지만…… 노부는 그에게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고 싶었네. 쿨럭---!"
참았던 기침이 터져 나온 것 같았다. 그는 갑작스럽게 기침을 심하게 해대기 시작했다.
"쿨럭---쿡--컥---!"
피가 터져 나와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담천의는 하공량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아무 말 하공량을 부축해 편안한 자리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담천의는 즉시 손바닥을 하공량의 배심혈(背心穴)에 대고 끓어오르는 진기를 진정시키며 부드럽게 내공을 넣어 주었다.
"손을 치우게. 쓸데없이 내공을 낭비할 필요 없네."
하공량은 기침이 멎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칠년… 아니 팔년 전에 죽었을 목숨이었네. 내장이 제자리를 벗어나고 너무 피를 많이 흘려 자네의 내공만 허비할 뿐이야."
하공량이 담천의의 손을 피해 움직이려 하자 담천의는 나직하게 한숨을 불어내며 손을 치웠다. 하공량의 말대로 살아날 가망성이 없었다. 내상이 너무 심해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되돌릴 수 없었다. 잠시 생명을 연장할 뿐이었다.
"놈들이 누구요? 천지회의 인물들이 맞소?"
담천의의 물음에 하공량은 고개를 끄떡였다.
"일부는…… 모용화천이 이끄는 천지회의 인물들이었네. 하지만 천지회 인물이 아닌 자들도 상당수 있는 것 같았네. 유곡조차 모르는 인물들이었으니까…."
유곡마저 모르는 인물들이 상당수 있었다면 천지회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유곡이라면 최소한 천지회 인물에 대해서는 손바닥의 손금 보듯이 알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유곡조차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쫓긴 것이오?"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네. 유곡은 뭔가 알고 있는 듯 하더만… 쫓기면서도 유곡은 많은 양의 정보를 취합했고,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보였네. 그 때문에 그들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지도 못했고… 하지만 쫓는 자들의 정체는 유곡 역시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네. 한 가지……."
하공량은 숨이 찬 듯 한 두 번 말을 끊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유곡이 그랬네. 지금까지 중원에서는 엄청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낼 시기가 온 것 같다고 말일세."
비슷한 말은 조금 전 표공도를 통해 들었다. 수십 년간 준비해 온 일이 자신으로 인해 틀어질지 모르겠다고.
"유곡은 어디로 피신한 것이오?"
"천마곡(天魔谷)! 그곳에 가서 반드시 확인할 것이 있다고 했네."
유곡이 천마곡에서 반드시 확인할 일이 무엇일까? 과거 초혼령에 의해 갇힌 백련교도들이 있는 곳이오, 또한 절대구마의 후인들이 태동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대해서는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이미 무림에 몸담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거품을 물고 이야기 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이미 전 무림이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구파일방을 위시해 각 무림세가와 군소방파들이 절대구마의 후인들을 척결한다는 미명 아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일촉즉발 전 무림을 혈우성풍(血雨腥風)으로 몰고 갈 곳이 바로 천마곡이었다. 유곡이 이러한 시기에 그곳으로 달려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다른 일행 역시 그를 따라갔소?"
"그렇다네. 이곳엔 노부와 상화낭자만 남았지. 그리 따라가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니만… 결국 노부 앞에서 죽었어…."
하공량의 눈길이 상화의 시신으로 가 멎었다. 그의 눈에서는 애절한 빛이 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놈들… 아홉 명 중 네 명을 죽였으니 손해 본 장사만은 아니야…. 지독한 놈들이었네. 특히 사십대 전후로 보이는 네 명의 인물들은 한 명 한 명이 노부와 비견될 정도였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들을 키워냈는지 모르겠더군. 또 초로의 쥐상을 한 늙은이는 두뇌가 비상하게 좋은 놈 같더군. 그 놈 때문에 아직 목숨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살려 준 것이오?"
"한시라도 빨리 유곡을 뒤쫓아야 한다고 생각한 게야. 방어망이 뚫리는 순간에 유곡이 도망간 것으로 알았을 테니까…. 게다가 이미 곧 죽어버릴 목숨 없애려고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을 게야. 상화낭자의 죽폭(竹爆)이 노부 손에 들어 있는 이상 간단히 제압하기도 어려웠을 테고…… 헌데 지독하더군. 그 바쁜 와중에도 동료의 시신을 수습해 가니 말일세."
그러더니 문득 하공량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섞여 있었는데 상화의 시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멍하니 그녀의 시신을 바라보더니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런 말을 자네에게 왜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저 죽기 직전의 늙은이가 망령을 부리는 것이라고 들어 주게나."
죽을 임박에 왜 이 청년에게 가슴에 담긴 말을 하고 싶었을까? 남에게 알려지면 부끄러운 이야기꺼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을. 하지만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두 가지 이야기를 이 청년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아마 마지막이라 느끼는 순간에 이승에서 끝맺지 못한 일을 부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담천의가 천천히 고개를 끄떡이자 하공량이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노부는 평생 가정을 가지지 못했지. 가문의 참화로 노부 혼자 살아남았으니까…. 무공을 배우고 복수를 했네. 그 덕분에 손에 피가 마를 사이가 없었지."
오죽 했으면 그에게 추혼귀견수란 명호가 붙었을까? 멈칫거리는 하공량의 시선엔 아직까지 상화의 시신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제 65 장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