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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시 작품방

[스크랩] 궁예

작성자태공 엄행렬|작성시간24.08.12|조회수66 목록 댓글 2

 

 

궁예

* 재위기간 : 901~918(17년)

* 사망 : 향년 49세 혹은 61세

 

<긍적적 평가>

 

 우선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은 장군으로서의 능력과 카리스마. 쿠데타로 몰락하기 전까지 전장에 부딪친 군웅들을 모두 쓰러뜨렸고 수전과 육전을 가리지 않고 능했다. 궁예는 동시기 그 어떤 군웅보다 빠르게 세력을 쌓아올렸다. 왕건의 생사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견훤이 궁예 생전에는 단 한 번도 우세를 점하지 못 한 채 끌려다녔다. 894년 양길에게 600 명 군사를 받아 명주의 순식의 귀부를 받았고, 898년 송악에 도읍해 왕을 칭하기까지는 겨우 4년 남짓. 염주에서 완강히 저항한 염주의 긍순도 결국 무너졌고 신라 5소경 중 3소경을 차지하고 춘천, 원주 일주의 신라 정예 부대를 아울러 영토가 서해와 동해를 이을 정도로 거대해진 양길은 궁예가 배신한 직후에도 팽창한 이후에도 모두 패하고 900년에 궁예는 잔당까지 완전히 소멸했다.

 견훤이 서라벌에서 지방으로 뻗는 루트를 활용하기 위해 신라 대야성 공략에 매달리는 903~4년경 해군 대장군 왕건을 시켜 나주를 점령해 백제의 등뒤에 비수를 겨눴고 단순히 왕건에게 맡겨두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나주까지 나아가 수전을 이끌었음이 확인된다. 전남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에선 아예 나주 경략의 주역을 왕건이 아닌 궁예로 비정한다.

 동시에 교통의 요지이자 견훤의 고향인 사벌주를 공략해 30여 군현을 손에 넣고, 마군대장군 이흔암을 별도로 웅주로 파견해 성주 홍기를 물리치고 918년 이흔암이 처형될 때까지 안정적으로 경영했다.

 궁예 시대에 후백제는 태봉-신라-나주라는 삼중의 포위망에 갖힌 처지였고, 북쪽 요충지는 궁예의 맹장 이흔암에게 틀어막혀 신라 공격해서 균열 만드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처지였고 결코 길지 않은 기간에 이 구도를 만들고 이끈 사람이 궁예이니 장군으로서의 자질은 견훤보다 윗열로 볼 만 하며 왕건보다도 월등했다.

 통치자로서의 궁예도 현대에는 마냥 폭군만은 아니었다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즉, 후대에 궁예를 몰아내어 고려를 건국한 왕건측에 의해서 왜곡되어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당대 전라도 고승 선각대사 형미(864~917)의 탑비 내용을 근거로 나주 경략의 주역이 왕건이 아닌, 궁예임을 주장한다.

 

 궁예가 부인 강씨와 그 두 아들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 것은, 당시 호족 중에서 궁예의 중앙 집권에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강씨의 친정이었고 게다가 궁예만 이런 것도 아니었거니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이들은 강씨와 그녀의 두 아들을 앞세워 순군부를 설치해 호족들의 군권을 뺏으려던 궁예의 왕권 강화에 저항했다는 역사학자들 사이의 추측이 있었고 불교 고승들을 숙청하는 일과 해괴망측한 불경을 저술한 것도 당시 교종에 익숙한 불교계에 선종을 전파하려는 갈등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더구나 궁예의 호족과 공신 숙청은 다른 왕조에서도 보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뒤 광종이 등극하여 개혁할 때까지 고려 왕실과 조정이 호족과 외척, 공신들로 인한 심각한 혼란에 종묘 사직이 위협받을 정도로 강했던 호족과 공신 문제를 진정시키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오히려 궁예의 공신 숙청과 미륵불 자처 행동은 당시 백성들의 삶을 외면한 기득권층과 종교계에 대한 궁예의 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 만큼 그 당시의 상황에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궁예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어 태봉국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그 후손들이 기록한 고려측의 기록들 밖에 없다. 즉, 본인들의 역성혁명과 왕조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기록 수정작업들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며 실제로 학계에서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 같은 1차 자료들을 재검토하여 궁예에 대한 고려측의 여러 기록 수정작업들이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등 고려측이 남긴 궁예에 대한 여러 기록들에 대해서 반론들이 계속 나오는 상황이다. 즉, 후대에 왕건의 업적을 선양하고 고려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궁예의 역할이 지워졌다고 보는 시각이 실제로 학계내에서도 꽤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부정적 평가>

 

 그러나 위와 같은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통설에 반박하는 학설들일뿐 기존 통설을 완전히 폐기하고 대체하는 상황은 아니다. 물론 먼 훗날에 관련 연구 자료들이 더 쌓인다면 궁예에 대한 기존 통설도 바뀔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통설이 완전히 폐기되고 대체된 상황은 아니라는 점은 유념 할 필요가 있다. 궁예가 나주를 직접 공략했다는 선각대사비의 내용도 공략의 주체인 '대왕'의 해석을 왕건이 아닌 궁예로 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당시에 왕이 궁예였기 때문에 '대왕'은 궁예를 가리킨다는 정도의 해석에 불과하고, 비문에서 이미 궁예를 '전주'로 표현하고 있어서 개연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대왕'을 왕건으로 해석하면 형미가 왕건의 권유로 그를 따라갔다가 궁예에게 미움을 사서 처형됐다고 볼 수 있고, 후대의 고려왕들에게도 '대왕'이라는 표현은 궁예가 아닌 왕건에게 하는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궁예의 나주 공략설은 전체적으로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또, 궁예가 직접 나주에 간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나주는 통일이 될 때까지 고려와 후백제간의 공방전이 수차례 있었던 지역이고, 이미 903년과 909년에 걸쳐 왕건이 점령한 지역이기 때문에 912년에 궁예가 직접 한번 친정했다고 해서 왕건의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2023년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선각대사비 탁본을 새로 해석해서 발표했는데, 비문에서 말하는 나주를 공략한 대왕은 궁예가 아닌 왕건이 맞으며, 궁예가 선각대사를 잔인하게 고문하여 죽인 정황 등 폭군으로서의 궁예의 모습과 당시의 상황들을 자세하게 해석했다.

 또, 궁예의 불경 제작에서 인정되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궁예가 불경을 스스로 썼다는 것 뿐이다. 그 내용이 정말 백성들에게 희망을 설법하고 기득권층에게 일갈하는 간지폭풍의 내용일지, 아니면 궁예 자신을 최고존엄의 미륵불로 신격화하기 위한 헛소리로 가득찬 불쏘시개에 불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둘 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설법하고 기득권층들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절대적인 왕권 강화로 나가는 내용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20세기의 군사, 공산 독재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고, 동시에 자신들의 절대 권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애초에 귀족 중심 불교를 타파한다면서 정작 기존 미륵 신앙의 본산인 법상종과 피를 뿌리면서까지 척을 진 시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궁예의 명백한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법상종은 기본적으로 교종 종파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애초에 대중 중심이라던 정토종조차 분류상으로는 교종에 들어간다. 왕으로서의 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상대 종파에 대해 피를 볼 정도의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는 것은 결국 궁예의 교리가 대중적으로 그다지 큰 반향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좋은 사례일 뿐이다.

 민간의 궁예 전승들과 신앙을 예로 들어 반박할 수 있지만 문제가 있는 것이 궁예의 민간 신앙의 경우 전국적으로 널리 민간에서 신으로 숭배되는 인물이 아니라 경기도 안성시 등 몇몇 산골 마을들에 한정돼 숭배되고 있는 것이라 이걸 가지고 궁예가 폭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한참 떨어진다. 또한 궁예가 내세운 교리가 그 정도로 백성을 위한 혁명이었다면, 적어도 궁예에게 우호적이던 철원군 지역에서는 궁예의 교리가 최소한 구전으로라도 전해지는 것이 있을텐데 오늘날 궁예의 경전이나 설법은 단 1가지도 전해지는 것이 없이 오히려 철원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안성시에서 궁예의 미륵 신앙이 드문드문 발견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철원 지역 민간 전승의 경우도 궁예에게 좋은 민간 전승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예가 철원에 도읍할 당시의 곤암산 전설, 궁예가 궁예의 왕후로 둔갑한 구미호에 홀려 재위 기간에 무수히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이야기, 한 대신이 이 구미호의 정체를 눈치채고 이를 잡으려 다리가 3개밖에 없는 전설상의 신비한 개인 삼족구를 구해 구미호를 잡았다는 이야기, 이 사건 이후 궁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무녀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무녀가 18세 된 여성의 유방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날마다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 등 철저하게 고려의 입장에서 쓰여진 <삼국사기> 궁예전보다 더한 만행도 구전되어 오고 있다. 궁예가 자신의 아내와 왕건을 강제로 사통시켰다는 이야기, 이후 왕건에게 축출되어 쫓기게 되었을 당시 한탄강 곰보돌의 전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철원 지역의 민간 전승들이 궁예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진술들을 하고 있어 신뢰도가 떨어져 민간의 궁예 신앙과 궁예에 대한 민간 전승들을 가지고 궁예가 폭군이 아니고 비운의 창업 개혁 군주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궁예가 강비와 두 아들을 살해한 목적이 왕권 강화를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궁예는 공포 정치를 펼쳤으며, 그 과정에서 관심법을 이용한 자의적인 법 집행과 공포 정치로 패서 호족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반면 그 숙청의 와중에 자신의 친위세력을 육성하는 방법은 고작 청주를 비롯하여 중앙에서 먼 옛 백제계 세력들에 대한 우대 정도였으며 명주의 순식은 여전히 독립 제후 수준의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후계자들까지 씨를 말려버렸다. 후사야 다시 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비가 죽은 915년 궁예의 나이는 이미 46세다.(869년설을 따를 경우. 857년설의 경우 58세) 갓난아기를 후계자로 육성시킬 궁예의 수명 자체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정도 성숙한 정비 소생의 아들 둘을 스스로 죽여버린 것이다. 적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점에서 태자를 핍박하긴 했지만 끝내 죽이진 않은 광종과 비교된다.

 일단 강비를 숙청하는 명분이 간통인 것 자체가 궁예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행동이다. 더군다나 궁예가 패서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비를 숙청하고 자녀들까지 제거했다면, 새롭게 밀어주려는 세력, 예컨대 청주 호족들의 딸을 새로운 정비로 세웠을텐데 궁예는 그런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정비야 그렇다 쳐도 후계자인 적자들까지 죽여야 할 정도의 위협에 시달리는 궁예의 태봉 왕조가 과연 백성의 지지를 제대로 얻기는 했을지도 의문이다. 정당한 어린 후사를 살해한 군주치고 민심이 고운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궁예에게 신광, 청광을 제외한 다른 사생아가 있었다는 기록, 궁예가 새로운 후계자를 지정했다는 기록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신광, 청광을 뒤를 이을 후계자는 지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장 다른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후계 구도를 박살내고 후계자를 모조리 지워버린 상황이 왕권을 손상시킬 우려에 비하면 강비의 숙청 명분이 간통이라는 것은 차라리 사소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실제로도 왕건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바로 왕위를 가져갈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줬다. 궁예가 아무리 폭정을 했어도 명주나 청주에 지지세력이 남아있던 만큼 원래대로라면 반란세력도 왕자를 옹립하는 작업을 해야 했겠지만, 후계자 둘이 모두 궁예에게 직접 죽으면서 자연스레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왕건이 손쉽게 왕위를 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쯤되면 궁예의 목적이 순수하게 왕권 강화에 있었긴 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이 폭군 논쟁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들이 있는데 바로 '업적이 있으니' 혹은 '국가를 이룰 정도의 능력을 보이고 추종자들을 모을 수 있었으니', '죽은 후에도 추종자들이 있었으니', 또 '왕조를 창업한 군주'이니 무조건 폭군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업적 있음 = 무조건 폭군 아님이 아니다. 아무리 업적이 있어도 통치의 방식이 폭압적이라면 충분히 폭군의 범주에 들어간다. 강력한 숙청을 동반한 급진적 왕권 강화책을 쓰는 군주 모두가 폭군은 아니지만 이들이 폭군으로 불리지 않거나 재평가를 받는 것은 적어도 백성에 해당되는 피지배층에게는 크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고, 그러한 숙청이 결과적으로 국가의 안정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궁예는 매우 직접적으로 백성의 삶에 너무나도 큰 피해를 끼쳤다. 바로 그가 추진한 철원 천도 때문이다. 애초에 일부에서 제기하는 대로 민본사상과 애민정신을 가진 군주였다면 구태여 철원 같은 말도 안 되는 입지에 백성들을 몰아 넣으면서까지 천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수도 건설을 강행하면 물론 호족들이 물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면서 왕권이 반사적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호족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징수당하고, 또 호족들과 달리 직접 수도 건설 공사에 동원되어 고통받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다. 게다가 철원 천도는 그냥 천도도 아니고, 이제 막 건설한 송악을 간단히 버리고 허허 벌판에 신도시를 지어 강행한, 역사상 보기 드문 사례였다. 스케일의 차이일 뿐이지 수양제의 낙양 건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막장 정책이다. 당연히 호족을 쥐어짜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필연적으로 민간에 대한 수탈과 과중한 부역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의 천 년 뒤인 조선시대 말기,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의 경우 처음에야 지배층의 헌금이 주였지만 결국에는 당백전과 도성 통행세 등 갖은 무리수로 이어졌다. 도시도 아니고 그저 궁궐이었음에도. 궁예의 종교 탄압 역시 반론의 여지가 없는 폭압정치의 사례다.

 궁예가 도주할 때 우호적인 설화가 많이 남은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도 철원의 지정학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 한탄강 수운에 의한 물자 공급이 어려운 철원에서는 값이 급등했는데, 그렇다면 철원에 쌀을 공급했던 철원 근교의 지주나 농민들은 상당한 이익을 보았을 것이며 이들은 궁예에게 호의적이었을 가능성이 꽤 높다. 또한 정변의 수장 왕건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지역의 옛 고구려 지역의 패서계 호족의 맹주였으며 옛 수도 송악을 건설한 장본인이었으니, 그가 집권하면 철원이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 뻔한 이치다.

 철원은 전근대 관점에서는 도저히 도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입지였다. 태봉국 철원성 문서에서 자세하게 지적하고 있지만 수도의 인구를 부양할 생산력도, 물자를 보장할 교통로도 갖춰지지 않았고, 결국 고려가 송악으로 천도하자 철원은 강원 서북권의 지역거점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런 철원이 궁예 당시에 수도 노릇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궁예라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고, 불완전한 입지는 궁예의 몰락을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오히려 사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궁예는 최소한 자신의 절대 권력 수립을 위해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공포 정치를 펴다가 실패한 임금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특히나 그 행동들을 보면 개별적으로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언정 전체적인 틀에서 봤을때는 모순이 발견되는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즉 궁예가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아예 정신을 놔버렸다는 설이 괜히 나오는 이유다. 납득할 수 없는 궁예의 이상성격에 드라마는 흥미를 더해가지만, 불행히도 이런 궁예의 이상성격은 편집성 성격장애의 한 단면이다. 공포 정치를 자행한 시점에서 폭군의 요소는 충분하며, 백성의 삶에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친 철원 천도에 이르면 빼도 박도 못하고 폭군이다. 다만 수양제해릉양왕연산군 급의 톱클래스 폭군이 아니고, 다소간 개인적 능력을 재평가할 여지가 있을 뿐이다. 사실 능력으로 폭군 여부를 따지자면 수양제는 아버지가 살아있을 시절에는 남진 평정에 참여했으며 대운하를 완성시키는 등 능력은 꽤 준수했던 사람이니 폭군에서 빠져야 한다. 한 가지 정상참작을 하자면 궁예의 경우는 당시 신라 말기는 급격히 몰락해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고, 궁예 역시 한쪽 눈을 잃었다는 점과 무리한 왕권 전제화에 대해서도 내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 어느 정도 참작이 될 부분은 참작이 된다.

 또 하나 궁예에 대한 변호 논리 중 하나는, 왕조를 개창한 창업 군주는 난세속에서 갖은 고초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에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고, 또 마음이 매우 굳세지는 이유로 폭군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가 있는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중국의 수양제의 경우를 들면, 그는 아버지 수문제처럼 창업 황제가 아닌 수나라의 수성 황제였지만 제위 등극 후 폭정을 저질러 나라와 수 왕조와 자신을 망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수양제의 경우, 그가 황제로 즉위했을때, 이미 수나라는 통일이 다 된 상태였고, 수양제는 뒤를 이어 수성을 해야할 판국에 되려 폭정과 전쟁을 벌인 통에 처참히 멸망했으나 궁예의 경우는 아직 통일을 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내전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서 보면 궁예와 비교되는 인물은 중국의 경우, 진나라 말기의 항우와 남북조 시대의 북조 전진의 황제 부견과 남조 양무제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런 지도자들도 다들 초기에 나름 잘나갔다가 시간이 갈수록 실정을 저질러 끝내 망했던 인물들이라고 보면 된다. 직언을 듣지 않았다는 면에서도 꽤나 비슷했다. 또한 '항우'의 경우는 궁예보다 군사적 재능이 훨씬 탁월했으나, 대신에 궁예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으며, 부견의 경우는 궁예가 나주 전투에서 승리해 통일에 근접했던 것과 달리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비수대전에서의 엄청난 실책을 보여 대패해 몰락한 것을 보면, 이는 견훤이 고창 전투에서 대패해서 몰락한 것과 비슷해서 부견의 경우는 궁예보단 견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양무제'의 경우가 궁예랑 비슷한 케이스에 근접하는데 둘 다 불교를 혹신했고, 실정을 했을때도 비슷한 면이 있었다.

 다만, 양무제는 항우나 수양제, 궁예 같은 폭정을 저지른 폭군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인자한 성군이었지만 지나친 불교에 대한 혹신과 이로 인한 불교계의 극심한 부패, 그리고 지나치게 어질기만 한 정치로 망한 케이스로 소위 '인자한 창업 암군' 스타일이지, 항우, 수양제, 궁예 같은 '창업형 폭군' 스타일은 아니었다.

 즉, 궁예 같이 초심을 잃어 망한 창업군주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창업 군주는 위에서 이야기된 이유들 때문에 무조건 어질고 유능하고, 절대 무능해지지 않고, 타락하지 않는다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음을 잘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단순히 그냥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 패배자인 궁예가 폄훼됐을 것이라거나, 아니면 가족을 잔인하게 죽였으니 폭군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냥 기록을 1차원적으로 거부하거나 수용하는 흑백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궁예에 대한 평가에는 나말여초의 정치적 혼란상과 주류층 호족들의 이합집산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후삼국 호족들의 무법성과 횡포는 후대의 고려 왕들도 신경병증에 시달리게 할 정도로 심각했다. 광종은 이에 맞서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으로 1차 대처를 했지만 적어도 광종은 정치적 명분을 확실히 가지고 한 것이다. 그러고도 반역을 걱정해 계승순위가 높은 왕족들을 죽여야했다. 궁예는 그 호족들을 처음부터 확실히 통제하기 위해 신정일치와 감시통제라는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다가 민생을 파탄내어 실패한 군주라고 평가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궁예가 꽤 능력있는 지도자이자 임금이었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객관적으로 따지고 보면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나라를 건국했다는 업적은 한국사에서도 몇 안 되는 인물만이 이룩한 업적이며, 후삼국시대 이후로 새 왕조 국가가 건국되는 과정은 모두 혁명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능력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를 돌이켜봐도 위대한 장군이나 군사 지도자로서 위업을 달성한 인물들은 많으나, 그 인물들 중에서 나라를 직접 세운 업적을 달성한 사람은 흔치 않다는 것을 고려하면 건국 과정에서 보여준 궁예의 군사적 능력이나 리더십 자체는 폄하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신정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삼국의 후예라면서 세를 모으던 다른 국가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일개 떠돌이 승려라는 보잘 것 없는 신분에서 출발해 양길의 휘하에 들어갈 적에는 이미 그의 심복이 되어 장수로 이름을 널리 떨쳤던 것과 비뇌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여러 세력들을 규합했는데, 대호족이었던 왕륭은 아예 자기 지역을 수도로 삼아달라고 했으며 왕순식 또한 궁예에게 바로 항복하고 평생동안 충성을 바치다가 궁예 사후에도 왕건에게 대놓고 반역자라면서 반항하는 등 이러한 사례를 종합하면 군사적인 재능과 통솔력, 카리스마 자체는 꽤 뛰어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개 정변 이후에는, 으레 구 지배 체제를 격하하고 업적 같은 것들을 깎아내리는 행위들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궁예는 "대왕전주(大王前主)"라고 일컬어졌다. 즉 당시 국왕(대왕)인 왕건 즉위 이의 군라는 의미. 이 호칭은 선각사 대사비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궁예를 추종한 잔존 세력의 비중이 왕건의 고려 정권 핵심부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크기였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초기까지도 궁예의 영향력이 꽤나 남아있었다는 추측의 반증이 된다.
 그러나 말년의 치세가 파멸을 불렀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왕전주로 호칭되기는 했으나 반란으로 폐위된 군주들도 받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호조차 받지 못하고 무덤마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려에서 그의 취급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계속된 연구로 궁예의 악행이 후대에 의하여 조작되었을 수 있다는 설이 있긴 하지만 궁예의 악행은 명백히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며 역사서에만 기록되어 다른 증거를 찾기 힘들어 과장 되었을지 모르는 악행을 다 제외하더라도 건국 명분으로 삼았던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고구려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철원으로 수도를 무리하게 옮긴데다가 나중에는 미륵 신앙을 내세워 고구려와는 아무 상관없는 신정국가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그 명분을 스스로 부정한 것은 단순히 후대의 조작으로 날조 될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철원 천도는 유적이 남아 있는 명백한 사실이며 후삼국시대 당시 백제를 국호로 걸었던 후백제와 멀쩡히 살아있는 신라가 있는 와중에 고구려의 후예라면서 걸었던 고려라는 국호를 스스로 폐기처분하고 갑자기 자기가 미륵이라는 헛소리를 해대면서 수도까지 옮긴 것은 정상이 아니다.

 보다 궁예에게 우호적으로 이 사안을 해석해보자면, 기본적으로 구백제계에 가까운 성장배경을 지닌 궁예라는 인물이 현실적인 이유로 패서 호족들과 결탁하면서 생긴 불협화음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패서 고구려계와 청주/웅주 백제계는 이 신라 분열이라는 상황에서 서로 원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고구려계가 평양을 비롯한 옛 고구려 영토의 수복에 주안점을 두고 신라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복속 정도면 족한 데 반해, 백제계는 이러한 고구려 고토 수복보다는 수 세기를 이어온 신라와의 악연을 잔혹한 보복으로 정리하는 것이 지상목표였으니 사실상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궁예의 고구려색 지우기 정책의 대표 사례로 제시되는 마진 국호 변경(904년)과 철원 천도(905년)는 900년대 초 왕건으로 대표되는 패서계 군사력이 광충청 일대를 정리한 직후, 더불어 아직 궁예에게 항복하지 않았던 고구려계 호족인 염주 류긍순과 평양 금용, 백제 고토인 웅주 등을 제압함과 거의 동시였는데 이 광충청은 바로 고구려의 남하 한계선이었다.   직후 906년 사화진 전투로 마진은 신라로의 남진을 본격화했으니 이 시점부터 국가의 방향성을 놓고 신라행을 원하는 백제계와 평양의 귀부로 고구려 고토 수복이 현실로 다가온 고구려계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궁예의 고구려계 견제와 대신라 강경책은 그를 '후고구려의 군주'로 놓고 보면 매우 비이성적으로 보이겠지만 '서원경 출신의 구백제계'를 들고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궁예는 잘 나가던 시절의 행적을 봐도 복잡한 문제를 아주 단순하게 해결해버리는 불도저형 보스에 가깝지, 복잡한 관계를 잘 풀어나가는 정치가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처럼 패서계와 청주계로 대표되는 고구려계와 백제계 간의 정책적 대립을 중재하거나 세력균형을 이루어 권력을 공고화 할 능력은 부족한 상황에서 스스로의 포지션을 무리하게 백제계의 수장으로 변경하고, 패서계를 단기간에 팽하는 아주 단순무식한 방식을 택한 것이 역사에 남은 각종 악행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미 견훤이 '백제'를 부활시켰으니 그는 백제왕을 자칭할 수도 없었고, 또한 그나마 지리적으로 겹치는 '마한'은 이미 고구려와 동일시되는 상황에서 남은 카드는 미륵신앙에 기댄 신정체제 뿐이었다. 군사력을 쥔 패서계를 배제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적절한 구실을 만들어가며 백제계의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할 인내심은 없는 궁예가 그나마 택한 것이 미륵관심법이라는 희대의 비상식적인 숙청 방식이었던 것이다. 고려에서 궁예의 취급이 박한 것은 정통성 차원의 껄끄러움이 물론 첫 번째지만, 대외정책이 한 순간에 돌변한 것은 이런 측면도 무시하기 힘들다. 고구려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끝내 '고구려왕'이기를 거부한 백제인, 그나마도 견훤처럼 제대로 백제를 칭하지조차 못한 '어정쩡한 경계인'에 불과하니까.

 젋은 시절엔 성군이었다가 말년엔 폭군으로 타락한 지도자가 한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사에도 수두룩한 것을 생각하면 젋은 시절 성군이었던 궁예가 말년에 폭군으로 기록된 이유가 후대의 날조 때문이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며, 궁예가 잘못된 통치를 가한 폭군이었다는 정황증거가 훨씬 넘쳐나기 때문에 궁예가 폭군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대의 평가>

결정적으로 왕건은 궁예의 태봉을 계승하지 않았다. 왕건은 궁예의 미륵 신앙도 버리고, 철원성을 버리고 송악으로 천도하는 등 궁예 시절에 세운 것을 대부분 무시했으며 ,고려라는 명칭은 궁예가 나라를 세울때 처음 쓴 국호이지만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호가 장수왕 시대부터 고려로 바뀌면서 그걸 그냥 가져다 쓴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궁예와는 별 상관이 없다. 왕건이 태봉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 고려를 건국하면서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역성혁명의 원인 중 하나였던 고구려 호족들의 불만과 아직 남아있는 친 궁예 세력의 불만을 동시에 잠재울수 있는 국호가 고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한국사학자들 대부분은 궁예가 독자적으로 지은 불교 경전은 궁예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이비 경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종교학자들은 궁예가 치성광여래 신앙, 법상종의 미륵 신앙도교 사상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았던 인물이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형미와 같은 선사를 한때나마 중용했던 것을 보면 선종에도 관심을 가졌을 여지가 있다.

 철원군에서는 군부(郡父) 대접을 받고 있다. 현대의 철원군 지역이 태봉의 수도가 되면서 이후 태봉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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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태공 엄행렬

 

 

궁색窮色한 차림으로 속마음을 숨기며

치밀한 계획으로 상대를 홀린 뒤에

군사를 얻어내고는

홀로서기 하였다

  

예지叡智였나 예지豫知였을까

빈손에서 대왕으로

17년 동안 막강한 권력 휘둘렀으니

이 세상 살 때까지야

불행했다 말할까

 

  

* 궁색 : 곤궁한 기색

* 예지(叡智) :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뛰어난 지혜

* 예지豫知 : 미리 앎(예견)

-2024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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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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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베베 김미애 | 작성시간 24.08.13


    대업을 이루는 영웅들은
    뭔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요
    영웅들의 삶을
    행시로 맛보는 시간
    배움도 함께
    이미 여러 번 읽었으나
    몰아 댓글 답니다
    양지하십시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태공 엄행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8.13 우뚝 서기까지 굴하지 않는 의지
    뜻한 바
    비록 모두 다 이루지 못했다 하여도
    과정이 중요한 것
    영원한 건 없기에 한탄하면 못난 사람!

    요즘에 일이 없어 글만 쓰고 있답니다.
    '조선시대 4대 사화'(무갑기을)'
    자료는 발췌했으니 내일은 2탄 올리려 합니다!~~~^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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