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 환자다. 최초의 기억할 수 있는 우울했던 경험으로부터 거슬러 올라오면, 9년차 우울증 환자인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신질환자들이 그렇듯이 상태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는 1년하고 절반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매일같이 자살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내가 치료를 받기로, 즉 살아보기로 결심한 건 ‘넥스트 투 노멀(이하 넥)’ 덕분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4년 전 처음으로 넥의 가사를 들었을 때 얼마나 울었던가. 나탈리가 울먹이며 말하는 “평범함 그 주변 어디. 거긴 가보고 싶어.”를 들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뛰어내릴 것만 같아 창문을 잠그고, 차도에 몸을 날릴 것만 같아 의식적으로 길 안쪽에서 걷고, 눈에 들어오는 물건들이 모두 자살하는데 쓸 용도로 보이는 수준이었던 내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마치 섬기던 신이 형상을 드러낸 때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가사나 대사를 넘어서 넥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은 부분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했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이었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됨은 많은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극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하고 있단 사실을 내포하기에, 다이애나의 감정이 정신질환자에게는 ‘평범하고 일반적’이라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당시 세상에서 혼자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닐까, 내가 아주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고 겁났던 나는 다이애나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음이 너무나도 눈물겹게 고마웠다. 나만 이런 게 아니야,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비정상이라고, 평범하지 않다고, 이상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내 감정이 처음으로 이해받은 순간이었다. 나는 비록 우울증이라는 비정상에 속하지만 비정상 그 안에서는 평범한 감정을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비정상 안의 평범함. 내게 꼭 필요한 안식처였다.
정신질환을 앓는 당사자들의 *자조모임에 나가면 항상 나오는 불만이 있다. 본인이 느끼는 감정은 지극히 일반적인데 의사들은 자꾸만 병으로 바라본다는 이야기였다. 나도 정신과 상담을 다닐 때에 그랬던 경험이 많았기에 늘 고개를 끄덕이곤 했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놓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일까? 정규분포에서 양 극단의 10%를 잘라내고 남은 80%가 아니라, 의사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특별한 탈이 없이 제대로인’ 정상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서부터 시작된 혼란은 나를 절망감에 빠뜨렸다.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내게 정상적이고 평범한 틀을 씌우려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이 답답함의 해결을 막연히 기대하며 자조모임에 참여했던 어느 하루, “한줄기 빛”이 새롭게 눈을 뜨게 했다. 다음과 같은 견해를 듣고: 1급수에서 서식하는 어종은 3급수에서 서식하지 못한다. 이는 1급수 어종과 3급수 어종의 선천적인 차이에서 기인함이지, 1급수 어종의 극복하려는 노력이 모자라서 서식하지 못함이 아니다. 정신질환도 이와 같은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당사자들은 그들의 정신력이 약하다거나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정신질환을 앓는 것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예민한 기질이나 유전적 소인에 특정한 트라우마가 쌓이면서 이들을 1급수에서만 생존하도록 이끈다. 요컨대 일단 병이 발병하면 이전의 삶의 방식대로 살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 정신질환의 가장 큰 딜레마는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1급수 어종이 제아무리 노력한들 3급수에서 서식할 수는 없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아등바등 평범한 척하지 않으면 살아갈만하지 않을까.
여기서 나는 ‘빛’에서 느낀 위안의 출처에 대해 어렴풋이 깨달았다. ‘빛’에서 굿맨패밀리는 시간이 다 해결해주리라고, 살다보면 살아지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오리란 달콤한 이상에 젖어있지도 않으며, 보이지 않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좇는 것도 아니다. 비록 병이 재발해도 이젠 찾아갈 빛―진정한 자기 자신을 되찾음―을 얻은 자신감. ‘빛’에서 느껴지는 희망은 거기서부터 비롯한다.
다이애나가 사회, 가족, 심지어는 그녀가 원하고 요구했던 ‘정상적’이고 ‘평범한’ 틀에 끼워지기를 거부하자 빛은 터 오른다. 내가 정상이 아님을 깨닫자 “안다고 믿던 세상을 저 빛이 새롭게” 만든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포기나 좌절로 보기도 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희망이다. 스스로가 “넥스트 투 노멀”에 있음을 알고 획일적으로 정제된 “노멀”의 모습을 포기하는 순간, 자기 자신과 온전히 포옹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넥은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신문 부고란을 질투”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던 다이애나와 내가, “행복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있어야 행복해”라고 말하게 된, 그것만으로도, 넥은, 해피엔딩이다.
*공통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목적을 위하여 자발적인 비전문적 활동을 함으로써 집단 성원 개개인이 도움을 얻는 모임.
공연이 3월 13일 끝났는데 이제서야 감상문을 올리니 늦어도 아주 늦었지요;
촛불님께 많이 죄송하네요...
그리고 밑에 글은 다른분의 공연리뷰인데 좋은 감상인것 같아 퍼왔습니다. 출처는 http://monthly-theater.tistory.com/139 이곳입니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극시즌
1.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E: 뮤지컬 타이틀 넥스트 투 노멀. 정상, 혹은 평범의 근처에 있다는 말인데, 그 말은 곧 정상은 아니라는 소리지.
H: ‘정상’이 뭔데?
E: 갑자기 그런 철학적인 질문을…….
H: 흠. 좋은 극이었어. 미국적인 뮤지컬이라고 할까. 물론 브로드웨이 발 뮤지컬 중에도 굉장히 클래식한 작품들이 많지만, 이 작품은 클래식하다고 하기 보다는 트렌디했지.
E: 3층의 철제 구조물로 만들어진 세트, 마치 콘서트 장처럼 강렬한 조명, 밴드가 직접 연주하는 강렬한 락과 재즈 음악. ‘클래식’했다고는 말하기 힘들지. 송스루 뮤지컬인데, 음악의 베이스를 락과 재즈로 하는 만큼 다소 가볍고, 빠르고, 신나는 비트로 쭉 진행되었어.
H: 하지만 극의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았어. 가볍고 빠른 비트, 가벼운 몸놀림의 배우들이 입으로 쏟는 대사들은 무거워.
E: 그건 이 극의 주인공 가족과 꼭 닮지 않았어? 겉으로 보기엔 가볍고 멀쩡해 보이는 가족, 그러나 가족구성원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각자 썩어 들어가고 있지.
H: 내용이 무거운 만큼 이 극의 가볍고 빠른 템포는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봐. 템포까지 무거웠다면 정말이지 너무 무거운 극이 되었겠지. 넘버들의 가사를 듣지 않고 멜로디만 들으면 즐거운 희극이라고 생각할 만한 비트의 넘버 덕분에 관객들에겐 부담스럽지 않은 극이 되었어.
E: 중간중간 나오는 느린 템포의 넘버로 진행되는 부분의 무게 역시 더욱 확실히 잡혀주고 말이야.
H: 등장인물은 크게 다섯이었지.
E: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엄마, 그런 엄마를 감싸 안기 위해 노력하는 자상한 아빠, 늠름하면서도 부드럽고 장난기도 많은, 사랑스러운 아들과 그런 오빠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막내 딸. 그리고 그런 딸의 남자친구. 이 중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어.
H: 다시 한 번 묻겠지만, ‘정상’이 뭔데? 안정적인 뇌파를 보이는 거?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얻는 거? 그 정상이라는 건 어떻게 결정되는 거야?
E: 뭐, 정상이라는 상태의 정의를 내리는 건 어려울 수 있어. 하지만 비정상에 대해 선고하는 건 훨씬 쉽게 할 수 있잖아? 정상적인 생활이 힘든 상태가 바로 비정상이지. 정상적인 생활이 뭔지는 묻지 마라.
H: 극을 보고 나오니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 ‘정상’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 기준을 어디로 잡는가, 그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야. ‘비정상’이라는 선고를 받으면, 왠지 고쳐야 할 것 같잖아. 뭔가 잘못된 것 같고, 어딘가 결함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그런 생각이 오히려 사람을 더욱 벼랑으로 몰고 가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
E: 하지만, 비정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걸 문제로 인식하는 과정 자체도 중요하지 않을까?
문제는 문제로 인식해야 해.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 거 아냐. 문제가 있는데 그건 그저 덮어두고, 아니야, 난 정상이야, 난 괜찮아, 덮어 두면 다 괜찮아 질 거야, 하고 스스로 자기세뇌를 하는 건 오히려 더 나쁜 결말로 이어질 수 있어. 크든 작든, 살면서 생기는 문제는 다 그런 것 같아.
H: 어려워.
E: 그럼 쉽겠냐? 사는 게.
2. 고통이란 무엇인가
E: 모두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족이야. 가장 두드러지는 건 엄마지. 굉장히 오래 전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니까. 벌써 18년째야. 그런 엄마와, 아빠와, 이 부부 아래에 아들과 딸이 있지. 네 명의 가족이야. 정신병을 앓고 있는 엄마를 둘러싸고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들 하나씩 문제를 가지고 있어.
H: 그래, 하나같이 말이야. 먼저 아버지는 엄마에게 굉장히 헌신적이야. 정신과 진료에 돈이 많이 들지만, 그런 건 어떻든 상관없이, 엄마의 치료를 계속하려 해. 그녀를 정상으로 돌리고 싶으니까.
하지만 그게 20여 년째. 아빠도 아마 지쳤을 거야. 하지만 그녀를 놓을 수가 없는 거지.
E: 어떤 측면에서는 숭고한 희생정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아내를 보며 그의 내면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아내를 뒤치다꺼리 하기 위해 정신이 없는 그는 아들을 무시하고, 딸에게 신경을 써 주지 못하지.
H: 어, 이 와중에 아들은 가장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이야.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쳐. 고통을 겪는 엄마를 위로하고, 엄마에게 힘을 주려 노력해. 굉장히 매력적인 아들이야. 비록, 아버지와 여동생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아빠와 여동생에겐 아랑곳하지 않아. 항상 든든하게 엄마를 위로하지.
E: 그리고 딸, 나탈리. 딸은 언제 정신이 나가버릴지 모르는 엄마에 대한 스트레스와, 부모님께 제대로 케어 받지 못한 채 살아온 16년 세월 동안 쌓여온 설움이 가슴속에 단단히 얹혀 있는 상태야. 오빠에 대한 열등감 역시 대단하지.
H: 그럴 수 밖에. 정신이 나간 엄마의 모든 신경은 오빠에게 쏠려 있으니까. 겉보기엔 굉장한 모범생이야.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고, 그를 통해 아이비스쿨을 노리고 있어. 하지만 속앓이를 단단히 하고 있어. 완벽한 오빠, 그리고 그런 오빠에 가려 마치 투명인간 같은 자신.
E: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모든 것이야. 그걸 오빠에게 빼앗긴 채 살아왔으니, 최소한 겉보기엔 모범생으로 곧게 잘 자라온 것 만도 대단한 거지.
H: 이 가족의 모든 문제의 키를 쥐고 있는 건 바로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은 이 가족의 모든 불행,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지.
E: 그래, 맞아. 하지만, ‘그 사람’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 처음에, 가족은 어떻게든 ‘그 사람’을 찍어 누르려 노력해. ‘그 사람’이 있으면, 이 가족은 결코 평범해질 수 없으니까. 절대로,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없으니까.
H: 어, 특히 아빠가 그에 앞장섰지. 위에서 말했듯 아빠는 엄마에게 지독하게 헌신적이야. 그녀의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극정성이지. 엄마를 정상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아빠에겐 엄청나게 비싼 정신과 치료비 같은 건 큰 문제가 못 돼.
E: 그리고 아빠에게 엄청나게 비싼 진료비를 청구하는 의사 및 전문가들은 엄마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
H: 치료하는 방식이…….
E: 떨떠름하지? 그들이 엄마를 위해 처방하는 알약 및 치료법은, 모두 엄마의 문제를 억누르는 치료야.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나. 현기증, 졸림, 불감증, 두통, 손 떨림, 조급증, 악몽, 발작, 신경쇠약, 두근거림, 분노, 무력, 짜증, 피곤함, 불면, 폭력성, 현기증, 박탈감, 구토증…….
하지만 그건 모두 가벼운 부작용으로 취급돼. 왜냐면 더 큰, 반드시 찍어 눌러야 할 망상증이라는 문제가 있으니까.
H: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약을 먹고, 상담 치료를 받고…… 1주가 지나가고, 3주가 지나가고, 5주가 지나가. 그러는 동안 그녀의 망상증은 천천히 가라앉지. 하지만 가장 큰 부작용은, 그녀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거야. 점점 그 무엇에 대해서든 감흥이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 거지.
E: 결국 그녀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게 돼. 의사는 빙긋 웃으며 상태를 선고하지. “환자 상태, 안정.”
H: 아니, 어떻게 그런 부작용이 일어나는데도 사람을 정상이라고 할 수가 있어?
E: ‘정상’에 속하는 체크리스트를 모두 만족했으니까.
H: 그게 정상이야? 현기증, 두통, 손 떨림, 조급증, 악몽, 발작, 신경쇠약, 두근거림, 분노, 무력, 짜증, 피곤함, 또 뭐?
E: 불면, 폭력성, 현기증, 박탈감, 구토증…….
H: 그래. 그런 증상만 가득한 가운데, 내가 나인지도 느껴지지 않는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어?
E: 그래서 그녀는 결국 자살을 시도하지.
H: 휴. 엄마의 자살 시도에 가족은 뒤집어져. 아빠는 의사와 새로운 상담을 하지만 의사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 이런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말할 뿐이지. 딸 나탈리는 어릴 때부터 이어져온,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에 다시 휩싸여.
E: 아들은 그 와중에도 엄마를 격려하지……. 하지만, 누가 알았겠어? 그 아들이, 바로 불행의 불씨였다는 걸.
이 가족이 지닌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된,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걸.
3. 뒤돌아 달리다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가 있을 뿐이야.
E: 엄마의 증상은 바로 그거였지. 아들이 보인다는 것.
H: 왜냐면…… 아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18년 전에, 겨우 생후 8개월의 나이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어…….
E: 하지만 아들은 엄마의 상상 속에서 엄마와 같이 무럭무럭 자라온 거야. 도저히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엄마의 머릿속에서. 죽은 아들을 생생하게 보는 엄마의 망상증. 이건 분명히 비정상이지?
H: 비정상이지.
E: 엄마는 아들이 죽은 이후 계속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 왔어. 전문가들은 엄마의 상태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20년 가까운 세월을 노력하지만 엄마의 증상은 결코 나아지지 않아. 결국 엄마는 아빠의 설득에 의해 극단적인 치료에까지 이르게 되지.
H: 전기 충격을 주는 거…….
E: 하지만 과연 그걸로 문제는 해결되었을까?
H: 그럴 리가. 하지만 아빠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의사와 몇 번이나 상담하고, 저어하는 엄마를 설득하지.
E: 그럴 만해. 그 상황에서 아빠가 믿을 수 있는 게 의사 외에 누가 있었겠어. 아빠는 절대로 엄마를 포기하지 않아. 희망도 놓지 않아.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돈이 얼마가 들든 그녀를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려 놓으려 노력해.
H: 대단해…….
E: 맞아, 대단해. 그리고 그런 아빠가 믿을 수 있는 건 전문가들 밖에 없어. 그녀를 정상, 혹은 비정상이라고 진단할 수 있는 것도, 비정상인 그녀를 정상으로 돌릴 수 있는 것도 전문가들뿐 인걸.
비록…… 전기충격요법의 부작용으로 엄마의 모든 기억이 싹 날아가버리지만 말이야.
H: 집도, 딸도, 아들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지. 하지만 맞아, 네 말대로 아빠는 절대로 희망을 놓지 않아.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이 기회를 통해, 아들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덮어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아름다운 기억으로 그녀의 머릿속을 차곡차곡 채우려 해.
E: 그게 가능하다면야.
H: 가능했으면 좋았겠지만.
E: 아빠는 사진을 내밀며 모든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해서 알려줘. 그리고 아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주지 않지. 아예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숨겨버려.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 해 보였어.
H: 하지만 아들을 지우고, 덮어버리려 할수록 아들은 더욱 생생하게 살아 날뛰어. 뇌를 전기로 싹 다 태워서 기억은 지워버렸지. 하지만 가슴 속에 남은 상처, 그것까지 지워버릴 수 있을까?
E: 그럴 리가.
H: 분명히 아픈 곳은 없어. 상처도 없어. 하지만 고통은 남는 거야. 알 수 없는 고통,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텅 빈 가슴 속 빈 자리, 숨기는 것으론 그것까지 메워버릴 순 없었어.
E: 슬퍼할 대상이 없으니 슬픔은 멎어. 하지만 고통은 남아. 그게 오히려 사람을 더 미쳐버리게 만드는 거야. 분명히 상처가 없는데, 고통이 남아 있다니.
H: 그 와중에 아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 자신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엄마에겐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뿐, 결코 죽진 않아. 아빠가 아들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 할수록, 아들을 부부의 삶에 들여놓지 않기 위해 그를 거부할수록 아들은 그들 곁에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
E: 고통이 뭐라고 생각하냐? 고통은 피하면 피할수록 좋은 걸까?
H: 뜬금없이 웬……. 뭐, 아픈 것 보단 안 아픈 게 좋지 않겠냐.
E: 음…… 상처가 생겼다고 치자.
H: 상처?
E: 어, 상처. 뭐 칼 같은 거에 살이 베였어. 무엇부터 해야 하지?
H: 소독을 해야지.
E: 소독하면 아프잖아.
H: ……그래도 해야지.
E: 그렇지. 아파도 참고 소독을 해야지. 아플 게 무서워서 소독을 피하고 가만히 있으면, 당장은 아프지 않아. 하지만 그 속으로 상처는 점점 더 곪아 들어갈 거야. 훨씬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었던 상처도 커다란 상처로 번지기 마련이지.
H: 그렇지.
E: 마음의 상처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걸 간과하기 쉬워.
H: 마음의 상처에도 소독은 필요하다?
E: 물론. 아마 엄마가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한 건, 아들이 죽고 난 후 4개월 즈음부터였을 거야. 전문가들이 진단하기로, 아들 사후 4개월째 슬픔의 증상이 지속된다면 그걸 바로 비정상으로 진단하니까.
H: 엄마가 소리치던 게 생각나네. “씨발, 내 아들이 죽었는데 겨우 4개월?”
E: 맞는 말이야. 그녀는 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어야 했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그 슬픔을, 슬픔에서 오는 고통을 충분히 느껴야 했어. 하지만 그러기 전에, ‘비정상’으로 진단받고 더 이상 슬픔을,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되었지. 약으로 슬픔을, 고통을 억누름으로써,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거야.
H: 슬퍼할 수 있을 리가 없었겠지. 곁에는 자신을 끔찍이도 위하는 남편이 있어. “당신은 곧 괜찮아 질 거야, 금방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그렇게 끝도 없이 격려하는 남편 곁에서 ‘비정상’으로 진단될만한 행동을…… 계속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E: 하지만, 그래야 했어. 그저 고통을 묻어버리려고만 하면 안 되는 거였어. 고통을 겪음으로써 변화를 맞을 수 있으니까.
H: 고통을 통해 변화를 맞는다?
E: 어. 대부분의 경우,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있으면 아프지 않아. 절대로. 하지만 아픈 건 언제야?
H: 무언가 변할 때…… 아프고 힘들지. 뭔가를 하려고 생각할 때만 아파. 일을 하고, 움직이고, 뭔가를 위해 노력하고 움직이고 말하고, 숨 쉬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아프지.
E: 모든 게 그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픔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
H: 웅크리고 앉아 문제가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 이 가족은 그렇게 살아왔지.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그와 함께 아들의 죽음, 그것이 불러온 고통도 함께 지나가기를 그저 빌어왔어. 모든 문제점을 꾹꾹 눌러선 그저 지나 갈 때까지 견뎌왔어.
E: 응. 하지만 아들은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아. 시간이 갈수록 점점 함께 나이를 먹어 가며 아들의 키는 점점 커지지. 마음 속에서 차지하는 아들의 비중도 점점 커져갈 뿐이야. 그에 따라 점점 지쳐가는 엄마의 손을 잡고 아빠는 지치지 않고 격려해. “곧 괜찮아 질 거야, 곧 정상이 될 거야. 조금만 더 해보자,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아깝잖아.”
H: 하지만 그건 결국 도피일 뿐이었다는 거지.
E: 그래. 결국 더 이상 도피하지 않기로 결정한 건 바로 엄마였어. 엄마는 전문가들을 향해 소리쳤지. 어, 뭐라고?
H: “씨발. 내 아들이 죽었는데 겨우 4개월?”
E: 그래. 엄마는 그 순간 “그런 게 정상이라면 난 정상을 벗어나겠다”고 표명한 것과 마찬가지야.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오랫동안 멈춰 있던 바퀴가 삐걱거리며 다시금 돌아가기 시작한 거지.
4. 네게 완벽한 짝이 될게
E: 사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엄마의 선택은 포기일 수도 있어. 그 이전엔 희망이 있었어. 전문가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증상을 치료하고,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그걸 사실상 놓은 거지.
H: 전문가들의 말이 전적으로 틀린 건 아니야. 슬퍼하는 건, 지독하게 괴로운 일이잖아. 그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거니까.
E: 맞아. 하지만, 그 곳은 낭떠러지나 마찬가지야. 앞에는 고통, 뒤에는 낭떠러지.
고통을 피해 뒤돌아 달려 보아도, 낭떠러지가 있을 뿐이야. 그렇게 달리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디면 아래로, 아래로 떨어질 뿐이지.
그럼 어떡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뒤돌아 고통을 마주보는 수 밖에 없어.
H: 그래서 엄마는 고통을 마주보기로 결정한 거야.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기로 결정한 거지.
E: 고통을 마주 보기로 결정하는 순간, 그 순간부터는 이제 끝 없는 밤이야. 어두워. 가이드를 줄 수 있는 전문가들도 없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터널 속이야. 여기에 끝이 있을지, 끝이 없을지, 그것도 알 수 없어. 그 어둠은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어. 그 끝에 빛은 없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묻어두기만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그녀는, 두렵지만, 뛰어들기로 결정한 거지. 그 어두운 터널 속으로.
H: 만약 아빠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처음부터 고통을 직면할 수 있게 되었을까?
E: 모르지. 그랬을 수도 있고, 고통을 다독여준 아빠조차 없었다면 애초에 고통을 견딜 수 조차 없었을 수도 있고.
H: 아빠는 끝까지 엄마를 받쳐 줬었지. 엄마가 쓰러질 때면 항상 그녀를 잡아줬어. 엄마가 절망할 때 마다, “당신은 비록 지금 비정상이지만 곧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며 그녀를 다잡아줬어. 그렇기 때문에 엄마는 진정으로 바닥까지 떨어져 본 적이 없었지.
E: 하지만 바로 그 차가운 땅바닥의 느낌,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것이었을지도 몰라.
H: 그래. 어쩌면 아빠가 정말로 해야 했던 건…… “나을 거야, 좋아질 거야” 하고 희망을 속삭이며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주는 게 아니라, 같이 쓰러져 바닥을 굴러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네.
E: 그래. 미쳐버린 그녀를 정상으로 되돌리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같이 미쳐주는 것,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건 그거였을지도 모르겠다.
H: 딸 나탈리와 그 남자친구의 대화가 생각나네.
E: 네가 미치면 나도 같이 미쳐주겠다고 했었지.
사실 엄마와 나탈리는 참 많이 비슷해. 1층의 엄마아빠 커플과 2층의 나탈리 커플이 오버랩되는 장면이 대표적이지. 어쩌면 나탈리도 엄마의 유전자를 받아 나중엔 정신적 불안정을 겪을지도 몰라.
H: 하지만 남자친구와 함께니 나탈리는 엄마보단 나은 삶을 살 거야. 정상만이 완벽한 게 아니라는 걸 아는 남자친구, 광기와 엉망 그 자체가 이미 완벽한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나탈리에게 말해주는 남자친구가 있으니까.
E: 웃기지 않아? 정상에 대한 실체 없는 희망을 놓고, 절망은 영원히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그 순간 빛이 보인다니.
H: 정상, 평범이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놓았을 때 말이지.
E: 엄마는 그래서 아빠를 떠날 수 밖에 없었을 거야. 평범한 삶을 그렇게도 원했던 아빠였으니까. 아빠를 덜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게 아니었어.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잠시 손을 놓은 거지.
H: 손을 잡고 있으면 결국 기대게 되지.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무래도 사람이니까. 엄마는 지금껏 자신을 받쳐주던 아빠의 손을 놓고 스스로 서기로 결심한 거야. 그렇지?
E: 그렇지.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 아빠 역시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었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평범한 가족이 깨지는 것을 목도하는 그 순간, 그제서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들을 직시하게 돼. 그리고…… 이름을 불러줘.
그제서야,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멈춰 있던 바퀴가 비로소 돌아가기 시작해. 오랫동안 멈춰 있었던 만큼 삐걱거려. 그 움직임은 아주 느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그 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다는 거고, 움직이기 시작한 바퀴는 결코 멈추지 않을 거야.
H: 그리고 그 바퀴는 구르고 굴러 그들을 터널 끝으로 데려다 주겠지.
E: 한 줄기 빛이 비추는 곳으로.
H: ……아이러니해. 이 가족은 지금까지 평범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왔어. 하지만 엄마가 가족을 떠난 이 순간, 이 가족은 ‘평범한 상태’를 벗어난 거야. 어떻게 보면 웅크린 상태로 있던 ‘가족’이 ‘고통’을 겪게 된 거지.
하지만, 웃기게도, 이 순간은 이 극에서 가장 희망적인 순간이야. 엄마는 비로소 딸을 마주봐. 딸은 엄마를 마주보며 서로 꼬옥 안아줘. 아빠는 괴로워하지만, 드디어 고통을 마주보기 시작했어. 평생 엄마가 사라질 까봐 두려움에 떨어왔던 딸은, 지금까지 중에 가장 밝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아빠를 격려해. ‘잠깐 동안’만 우리 둘인 거라고.
E: ……그들은 아들을 잃었어.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아픔이었겠지. 그 아픔을 억지로 묻어두려고, 지워버리려고 하니 탈이 날 수 밖에.
아픔은 잔뜩 느껴야 해. 죽도록 아파해야 해. 그 칠흑 같은 밤을 지나야만…….
H: 비로소 한 줄기 빛이, 비쳐.
5. 빛
E: 이들은 수많은 밤 동안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어. 웅크리고는 상처가 무뎌지기만을 기다렸지. 조용히, 모두 지나가기만을 빌며, 고통을 마주보지 못하고 고통에 쫓겨 도망쳐왔어. 아픔에서 도망쳐 왔지.
H: 하지만 그렇게 해선 결코 상처는 낫지 않아. 아픔을 견디지 않고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숨을 쉴 수도, 노력을 할 수도, 생각을 할 수도, 일을 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지. 그래서 그들은 움직이기로 결정했어.
E: 맞아. 유령에 쫓기더라도 가야만 해. 상처가 아프더라도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해. 그래야만 살 길이 생겨. 아픔은 삶의 일부고, 삶을 삶답게 살아가기 위한 대가니까.
H: 행복만을 위해 사는 건 아니지만…… 살아있어야 행복한 거니까.
E: 그리고, 힘겹게 버텨 아픔과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겐 언젠가 반드시 긴 밤에 지나고, 한 줄기 빛을 맞게 될 테니까.
H: 길고 긴 밤이 끝내 지나고, 먼 동이 트고, 환한 빛 아래에 서면, 그제서야 알게 되겠지.
해 뜨기 직전 칠흑 같은 어둠. 그게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다는 걸.
@관극시즌; 대화 형식의 공연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블로그 I http://blog.naver.com/theatergoing_people
트위터/인스타그램 I @theatres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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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눈누난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4.04 제가 느끼고 전달하고자하는 부분에 대해 공감해주셔서 감사해요 소피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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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raum 작성시간 16.04.04 눈누나님!♡
넥스트 투 노멀에 대해 올려주신 후기를 통해 이 작품이 눈누나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것인지, 또한 공연리뷰를 통해 작품의이해, 등장인물의 이해,심지어 남자친구까지 무엇을 얘기하는지 알 수있었고.
근본적인 엄마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고통( 상실의 아품을 충분히 애도했어야 했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었는지까지 언급하고있어 공감하며 제대로 읽었어요!♡
공연관람을 앞두고 저희카페의 '넥스트 두 노멀 찿아오기' 란의 글들을 밤새 반복해서 읽으며 작품에대해 이해했었는데 이번에 올려주신 글을 통해 구체적으로 자세히 제대로 이해한거 같아요!♡
소중한글 펌해 갑니다. 감사해요!♡ -
답댓글 작성자눈누난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4.17 라움님 부족한 글 스크랩해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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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연두 작성시간 16.04.17 글 잘 읽었습니다. 한울센타에서 본 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저의 아이가 겪었던 상황을 누구나 겪는 상황이라고 알게해줘서 고맙습니다. 고통도 나누면 정말 힘이 되는 것 같아요. 눈누난나님이 자이프렉사를 20미리에서 5미리로 줄여 복용하고 계신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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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눈누난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4.17 연두님 감상 감사드립니다! 저는 자이프렉사는 복용한적이 없어요~다른분 얘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