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오 스님 집중수행(2004/2/13~2/19)
장소 : 천안 호두마을
2/13(금)
19:00~20:00 성오 스님 법문
작년에는 사념처를 주로 법문했는데 이번에는 미라래빠 2회, 초전법륜경 4회를 법문하겠습니다.
삼귀의는 생사의 바다에서 부처님, 담마, 승가라는 섬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에 의지해서 살아가겠다, 법을 안심입명처로 삼겠다, 부처님의 제자인 스님들을 의지처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오계는 청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마음을, 밖으로는 다른 생명을 중히 여겨 남을 괴롭히거나 살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코의 호흡을 보는 것은 상기의 우려가 있다는 단점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장점도 있습니다.
① 호흡이 시작될 때 처음 부딪치는 직접적인 대상처라는 것입니다. 배는 2차 대상처입니다.
② 배는 범위가 넓지만 코는 범위가 좁아서 대상을 바로 보고 수행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코를 대상으로 할 때는 상상에 빠질 가능성이 적습니다. 공기가 직접 부딪치는 차고 따뜻하고 등의 느낌을 느끼기 쉬우므로 풍대의 본성을 보기가 쉽습니다. 대상처가 좁기 때문에 몰입하기가 쉬워 마음을 집중하여 에너지를 집약시키기가 쉽습니다.
③ 대상처를 보는 명료함의 차이가 있습니다. 배라는 좀 막연한 넓은 부위를 보는 게 아니라 코끝이라는 일부를 보기 때문에 특성을 세밀하고 깊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배는 초보자가 쉽게 볼 수 있고, 주석서에 배를 보는 것도 풍대를 보는 것이므로 대상으로 삼아도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코는 물론 경전과 주석서에 다 나와 있지요.
배를 볼 때, 배의 피부 부위(앞쪽)가 일어남, 꺼짐을 보는 것보다는, 호흡이 배의 피부의 반대쪽인 등뼈 있는 쪽에서부터 부풀기 시작하여 나중에 배의 피부 부위가 일어난다고 봐야 합니다.
초보 단계에서는 보통 앞쪽의 배의 형태, 모양, 빤냣띠를 보는데, 계속 이렇게만 보면 한계가 있습니다. 본성을 보는 공부를 하려면 마음이 표피를 뚫어야 합니다. 뒤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것을 놓치지 말고, 집중을 계속해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 빤디따 사야도가 가르치는 것을 제대로 하면 입술이 부르틉니다.
잘 보려면 다음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① 일차 대상(배, 코)에 ② 마음을 밀착시키고 ③ 마음의 눈으로 그곳을 주시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적습니다. 이게 삼위일체입니다. 이렇게 한 시간 하면 눈이 들어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고행상 사진을 보면 눈이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① 당처(배 혹은 코)에 ② 마음을 붙이고 ③ 호흡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이게 중요합니다. 위빳사나는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풍대(바람의 요소)를 안 놓치고 보는 것입니다. 왜 따라가서는 안 되는가? 따라가면 호흡의 중간과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가다 보면 호흡이 흩어져 버립니다. 문을 지켜야 됩니다.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들어올 때 들어오는 것을 알고, 중간을 알고, 끝을 알면 호흡의 전체를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가? 길고 짧고 느리고 빠르고 거칠고 미세한 것을 압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일어나는 느낌을 알고 어떻게 변하는가를 알고 등을 차차로 알게 됩니다.
통증이 나타나면 마음을 집중하여 뚫고 들어가서 밀착하여 보십시오. ① 내 몸이 아니고 통증의 본성을 보겠다고 굳게 결심하십시오. 내 몸이라고 보면 통증이 가중됩니다.
② 호흡 당처에 마음을 밀착시키십시오. 그러면 통증이 가장 강한 곳이 두드러질 것입니다.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뚫고 들어가십시오. 쉽진 않습니다. ③ 집중하여 뚫고 들어가면 어느 순간 비수같이 통증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통증의 본성이 선명히 보입니다.
행선:
걸으려는 의도를 알아차리십시오. 의도를 보면 마음을 본 것입니다. 의도를 알아차리겠다는 의도로 사띠하십시오. 마음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관념을 본 것입니다.
6단계 행선은
① 발을 들려고 함 ② 듦 ③ 나가려는 의도 ④ 나감 ⑤ 놓으려는 의도 ⑥ 놓음
입니다.
명칭을 붙이면 “③ 나가려는 의도”할 때 이미 발은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명칭을 붙이는 것이 방심하는 마음을 가다듬는 효과는 있습니다. 처음에는 명칭을 붙여야 하겠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 진 다음에는 붙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명칭을 붙이면 한 스텝 늦으니까요.
망상이 많을 때에는 6단계 경행을 10~20분 계속한 다음에 좌선하십시오. 그러나 계속하지는 마십시오. 일상생활 중에서 깨어 있으려면 자연스럽게 수행해야 합니다.
걸으려는 의도를 보기는 비교적 쉬우나 발을 들려고 하는 의도는 보기 어렵습니다. 들려고 하는 의도는 잘 보아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발바닥에 밀착시키십시오. 그 이상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대상처는 좁을수록 좋습니다. 걷기 전에 발바닥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걸어야 하겠다는 의도가 생겨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인내를 가지고 발바닥을 사띠하고 있으면 걷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지금 내 마음이 발바닥에 와 있는가?”
“지금 내 마음이 발바닥에 와 있는가?”
“지금 내 마음이 발바닥에 와 있는가?”
감각이 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무거움, 뜨거움을 느낀 후에 걷기 시작하십시오. 그래야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합니다.
① 걷고자 하는 의도를 본다.
② 발바닥에 마음을 갖다 둔다.
③ 발바닥의 느낌을 느낀다.
④ 서서히 발을 들면서 감각의 변화를 알아차린다. 발을 떼면 감각이 어떻게 변하는가?
위빳사나 집중 수행 제1일 법문(2/13)
오늘부터 6박 7일간 여러 수행자들과 함께 춘계 위빳사나 수련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명칭이나 형상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그는 진정한 비구이다.” 라고 법구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삶은 이름, 형상, 그리고 생각과 관념의 틀 속에 얽매여 살고 있지만 정녕 그 주인공인 우리는 허상의 그물에 걸려있는 줄 모르고 자유롭고 지혜로운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수행자들께서 이번 수련에 특별한 법을 구하거나 무엇인가 얻으려는 마음으로 여기에 참석하셨다면 실망을 하거나 빈손으로 귀가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수행이란 무엇이기에 우리들이 이렇게 모였을까요. 한마디로 변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변하는가? 지금까지 보태고 빼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의 삶에 형태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는 쪽으로 변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한 작업입니다. 그렇게 무위로 바꾸는 작업이 수행이며 진정한 우리들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 일은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담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일에 단순하게 노력하십시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단순하면서 명료해 질 것입니다. 여기 수련기간 동안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설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 판단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하나의 망념에 지나지 않으며 여러분에 수행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있는가? 자문하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올바른 수행자입니다. 많이 알면 일이 많다고 했듯이 여기 있는 동안 책을 보거나 라디오를 청취하는 것 법우들과 잡담을 하는 것을 모두 여러분 자신의 올바른 수행을 위해 삼가야 합니다. 그러한 정진이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목표를 두고 원대한 서원을 세우되 목적지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쉬지 않는 불방일(不放逸)의 노력만이 여러분을 평화와 자유의 세계로 안내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작년 춘계수련은 사념처경(四念處經)을 중심으로 법문하고 지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번에는 부처님의 경전 가운데에서 초전법륜경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면서 수행을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법문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실 일주일 동안은 수행할 시간이 너무 짧은 편입니다. 그래서 실제 수행에 필요한 부분을 되도록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불교전통 수행인 위빳사나를 남방불교 권에서 배우고 익혔다 하더라도 각기 그 스승들마다 독창적인 가풍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방법은 맞고 다른 방법은 맞지 않다고 내세우면 방법 병에 걸린 것입니다.
간혹 북방불교를 부처님의 가르침을 으뜸으로 삼지 않고 역대 고승의 가르침과 가풍을 더 믿고 따른다고 해서 조사 불교라고 힐난하는 사례가 후기에 생겼듯이, 남방 권에서 수행하고 온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고 각기 지도 받은 사야도의 가르침이 최고인양 집착하고 내세운다면 사야도 불교라는 비방을 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국내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이견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수행에 관한 의문은 메모 하셨다가 인터뷰 시간에 제출하십시오.
우선 합장을 하시고 삼귀의와 오계를 다 같이 합송합시다.
지금 여러분들이 낭송하신 것은 남방의 전통적인 삼귀의, 오계입니다.
첫째 붓당 사라낭 갓차미 - 저는 부처님을 나의 의지처로 삼아가겠습니다. 갓차미( gacchāmi) 는 나는 간다는 뜻인데, 저는 부처님을 의지해서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더없이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셨으며 모든 중생을 그 길로 안내하시는 자비의 스승이시기에 그분을 의지해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맹서지요.
둘째 담망 사라낭 갓차미 - 저는 부처님을 나의 의지처로 삼아가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위없는 깨달음의 성자이신 붓당에 의해 완전무결하게 설해졌으며 현세에 유익하고 내 안에서 스스로 증험되며 우리들을 승화시키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상강 사라낭 갓차미 - 저는 상가를 나의 의지처로 삼아 가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모인 참사람들은 여래의 담마를 훌륭하게 실천하고 지혜롭게 수행하며 조화롭게 살아감으로써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기 때문에 저는 상가를 의지해서 인생을 가치 있고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다섯 가지 청정하고 윤리적인 생활규범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살아있는 생명의 안과 밖을 헤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안은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밖은 그 육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생명의 육신을 상하게 하거나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마음에 고통과 번민을 주지 않겠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 다른 사람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 것 모두가 불자들은 삼가야 될 일입니다.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자비심을 함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살생은 자연히 멀어지게 되겠지요.
둘째 주인의 허락 없이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재산이나 소유물을 힘 따라 베풀어서 공덕을 심으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8계를 낭송 할 때는 아브라마짜리야(abrahmacariya),라고 하는데 범천에 있는 무리들이 깨끗하고 고매한 삶을 살아가듯이 나도 그와 같이 깨끗하고 고결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맹세합니다. 비록 우리들이 욕망으로 가득 찬 사바세계에 살고 있지만 천상세계 있는 무리들처럼 살기를 다짐해 보는 것입니다. 재가 불자들은 불사음(不邪淫) 계를 지킴으로서 사랑과 신뢰의 바탕을 쌓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요.
넷째-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 되고 유익하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겠습니다. 말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에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 위빳사나 수행자들이 말을 할 때 알아차림을 통해서 구업을 짓는 일이 점점 줄어들 것은 틀림없습니다. 말을 하고 싶은 의도를 알아차리십시오. 당신이 적절한 시기에 담마를 나누는 것은 유익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침묵 속에서 스스로 해답을 얻는 것이 더 현명하리라고 봅니다. 되도록 밖을 향해 치닫기를 삼가 하십시오. 그 만큼 번뇌는 불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하거나, 마음을 혼탁하게 하는 그런 종류들을 마시거나 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맑고 깨끗한 지혜를 기르도록 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들은, 나만 위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과 행복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다보면 다 힘들고 어려운데 이런 어려운 계율을 왜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하는가, 라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넓게 보면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고 자유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이러한 삼귀의, 오계를 낭송하는 것은 그런 마음의 맹서와 그런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함으로서 내가 수행의 길의 정도에 벗어나지 않고 그러한 공덕과 서원의 힘으로 내 수행을 훨씬 더 힘 있고 용맹스럽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호흡을 보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미얀마 수도원 자체에서도 배로 호흡하는 것과 코로 호흡하는 두 가지가 방법이 실행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하시 큰스님 계통에서 하고 있는 수도원에선 지금 rising & falling은 배로 호흡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장 많이 성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둘째로 모곡사야도 회상이나 파욱 사야도와 순륜 수도원 등에서는 코로 호흡을 성찰합니다.
그런데 사념처경이나 안반수의경을 보면 위빳사나 수행자나 사마타 수행자들이 호흡수행을 할 때 모두 일차 대상처를 코끝에 두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도 처음에 우 빤디따 사야도님이나 우 자나까 사야도아래서 수행할 때는 배로 호흡을 했습니다. 그 후 줄 곳 같은 방법으로 수행해오다가 여름 안거를 파욱 사야도를 모시고 사마타 수행을 코로 하면서 대상처만 다르지 전에 위빳사나 하던 때에 느끼던 현상이나 감각이 유사함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코로 호흡 대상처를 옮겨도 되겠구나, 하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 후, 다시 쉐우민 사야도를 친견하고 수행을 시작하면서 ‘호흡을 코로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여쭈어 보니까. ‘코로 계속 수행하도록 해라’ 하시더군요. 제 생각에는 배로 하는 것이나 코로 하는 것이나 모두 바람의 요소를 성찰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코끝을 일차 대상처로 수행해 오던 것을 마하시 큰스님은 배를 1차 대상처로 상정하시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성찰하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이나 재가신도들에게 코끝을 보는 것보다 쉽고 크기 때문에 배를 보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두 가지 방법이 다 좋은데,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어떤 수행자들은 코끝을 성찰하면 상기(上氣)가 많이 되는 성향이 있어요.
제가 출가해서 처음에는 전북 내소사 해안큰스님 회상에서 간화선(看話禪)을 배웠고 그 후 경봉 큰스님 구산 큰스님 등을 모시고 수행하다가 인도에 유학 가서 처음으로 고엔까 센터에서 코로 위빳사나 수행을 했는데 상기가 되고 화두가 들려서 많이 혼란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상기를 내리고 호흡에 몰두했더니 3일째 되는 날부터 서서히 자리가 잡히면서 호흡이 보이고 감각을 느끼고 새로운 담마를 경험하면서 아, 이대로 계속하면 틀림없이 여래가 말씀하신 법을 경험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미국인 아난다스님으로부터 미얀마의 빤디따라마 수도원 소개를 받아 갔었는데 그곳에서는 배를 성찰하도록 지도해주시니까 아주 쉽게 적응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배를 성찰하신 분들은 배로 하십시오.
오늘 저녁에 제가 코끝을 성찰하는 방법을 이야기 하니까 ‘오늘부터 코로 바꿀까? 지금까지 소득이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방법이 틀렸던 것 같아. 지금까지 당장 코로 바꾸자.’이렇게 방황하시면 안 됩니다.
배를 성찰해서 안 되던 수행이 갑자가 코로 해보면 더 안 되겠지요. 그러니 배로 대상처를 삼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망설이지 말고 계속 배를 대상처로 삼으십시오.
지금부터 코끝의 성찰과 배를 성찰하는데 있어서 두 대상처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코끝을 호흡의 대상처로 삼았을 경우,
첫째-호흡이 부딪치는 직접적인 대상처에서 본성을 볼 수 있다
둘째는 성찰의 대상처가 좁다. 호흡에 마음을 강하게 몰입할 수 있고 그 몰입에서 집중 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에너지가 훨씬 집약될 수 있다.
셋째로 대상처를 볼 때 아주 명료하고 미세하다.
넷째로 코로 호흡하는 것은 배로 호흡하는 것 보다 imagination 에 빠질 우려가 적다.
다섯째 남방수행 소의경전에 언급되었다.
배를 호흡의 대상처로 삼았을 경우
첫째- 바람의 요소를 내 안에서 바라보고 느낄 수 있다.
둘째- 주 대상처의 범위가 넓다.
셋째-간접적인 대상처이기 때문에 관찰함에 있어 코보다는 한 스텝 느리다.
넷째-주석서에 의거하고 있으며 미얀마 고승에 의해 잘 체계화되고 지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호흡 관찰은 바람의 요소를 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대상처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념처경에 보면, 수행자가 몸을 바르게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다음 마음을 전면에 두고,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 쉬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전면이라는 것이 어디냐? 전면이라면 입의 주위를 말하는 것이다, 또는 코끝에서 호흡이 들어가는 거니까 코끝일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호흡이 부딪치는 당처를 전면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리라 봅니다. 물론 사람의 코의 형태에 따라서 숨을 들이마실 때 인중에 부딪치는 사람, 윗입술에 부딪치는 사람, 콧구멍 입구에 부딪치는 사람, 안쪽에 부딪치는 사람 등 다양합니다. 호흡의 당처, 즉 전면에 문제는 여러분이 수행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경험을 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나 이미지가 아닌 실제호흡이 왕래하는 자리여야 됩니다.
어떻게 올바른 Rising & Falling을 할 것인가
우선rising & falling을 하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그 방법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 쉴 때 배로 rising & falling을 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코를 인식하면 안 됩니다. 대상처를 오로지 한 곳에 정해야하고 만약에 1차 대상처가 배와 코로 옮겨가면서 주시하면 마음은 어디에도 주처(住處)를 못 잡기 때문에, 처음에 수행할 때 몰입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로 접어들기 쉽습니다.
내가 배로 rising & falling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챙김을 하면서 반가부좌를 하거나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야 하는데, 손을 놓는 방식도 인도 사람하고 중국 사람은 다릅니다. 중국 사람들은 체(體)와 용(用)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오른손을 밑에 놓고 움직이지 않는 정(靜)의 왼손을 위에 가지런히 놓습니다.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정(淨)과 추(醜)를 생각하기 때문에 오른 손은 깨끗한 손이라고 해서 위에 놓고 왼손을 추한 손이라고 아래에 놓습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가볍게 감은 다음 R/F의 호흡이 분명히 인지되도록 5회 또는 10회 정도 가늘고 긴 호흡을 합니다. 마음을 배 위에 부드럽게 밀착시킨 다음 rising&falling이 시작되는 처음부터 알아차리는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아주 밀착해서 호흡을 해야 합니다.
대개 수행자들이 미얀마에 가서 어떻게 수행을 하느냐 하면, 배가 사르르 일어나면 배 앞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감지한단 말이지요. 배가 일어나는구나! 해서 라-이-시-o―(rising 느리고 낮은 음성), 앞의 배의 표피가 들어가면 포-ㄹ-리-o―(falling 아주 느리고 낮은 음성) 하고 배가 쑥 꺼진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배의 앞쪽에 있는 부분이 일어나고 들어가는 형태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배의 양태를 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위빳사나 수행 초보단계에선 양태를 볼 수밖에 없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양태뿐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처음에 배의 표피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부터 보는 공부가 쉬운 것 같지만 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공부는 빤sit띠(paññatti :이미지, 개념, 형상) 허상을 보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빠라맛타(paramattha) 궁극적인 진리의 본성을 보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배 앞면이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들어 마신 공기가 차서 뒤에서부터 불러오니까 마음이 배의 표피를 뚫고 들어가서, 배 안에서의 공기의 움직임 과 감각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처음부터 rising & falling을 하는 사람은, 마음을 배 앞면에 부착했다가 그 다음에 호흡이 들어감과 동시에, 마음을 표피 속으로 뚫고 들어가 배의 뒷면으로부터 라-이-시-o― [rising]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마음이 대상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진행되면서 공기(호흡)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어떤 감각들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리고 rising이 끝나고 이어서 falling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같은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배로 성찰하는 수행을 바르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은 쉬운데 그렇게 하기가 실제로는 어렵지요. 이렇게 여러분이 위빳사나 공부를 하루에 9시간에서 12시간을 하는데 자기 전에 침대에 갈 때 기운이 남아 힘차게 가는 사람은 공부를 애써서 안 한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우 빤디따 사야도께서 일 년이 지났을 때 구체적인 호흡방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느 날, 인터뷰를 하고 나서 이곳에서 수행한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으시기에 약 일 년쯤 됩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내가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아직도 가르쳐 주실 것이 있으십니까?”
“지금처럼 해서는 깊고 세밀한 호흡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해서는 진전이 느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시면서 ‘들어가는 화살을 비유해서, 여기서부터 rising 과 falling을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시는데 그때 “아!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했지요. 그러나 말은 쉽지만 그와 같이 여일 하게 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가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 자리에서 공기의 요소가 보이는 것입니다. 정지된 호흡이 배 안으로부터, 움직이는 공기의 특성이 보이는 단계에 가야만이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이구나, 하고 긍정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공부를 지어 가는 것이 쉽지는 않으나 쉬지 않고 계속 해나가면 점차 익숙하게 됩니다.
처음에 rising 호흡을 들이마실 때, 가장 깊은 배 뒷면으로부터 공기의 요소가 rising이 시작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노력이 간절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나 기도할 때 간절한 소망을 발원할 때처럼 호흡을 안 놓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rising &falling을 주시해야합니다.
Rising & Falling을 배로 하는 수행자의 요건.
첫째- rising falling의 일차 대상처를 배에 상정한다.
둘째- 마음을 그곳에다 밀착(집중)시킨다.
셋째- 마음의 눈으로 일차 대상처를 주시해야 된다.
넷째-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된다. (1차 호흡과 2차 다른 대상들)
세 번째는 물론 경전에는 없는 것이지만, 지도자들의 테크닉에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하는가? 마음의 눈으로 1차 대상처를 주시하면 마음이 밖에 대상을 따라 가거나 방황하는 횟수가 틀림없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고 무딘 마음으로는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 대상에 온전히 집중해야 됩니다.
그래서 rising falling 으로 호흡을 볼 때에
(1)1차 대상처가 정해지고
(2)마음을 그 곳으로 끌고 가고
(3)마음의 눈으로 1차 대상처를 보아서 삼위일체가 될 때,
(4)있는 그대로의 지금 현재 나타나고 있는 대상이 보입니다.
그때 마음이 어떻게 다른 대상처로 쉽게 옮겨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호흡을 성찰하고 공부를 하면서 마음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1) 1차 대상처를 놓쳤던지,
(2)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던가
(3) 마음의 눈으로 그곳을 주시하는 힘이 떨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파키스탄 박물관에 있는 부처님의 고행상(苦行像)을 보셨을 텐데, 부처님 눈이 안쪽으로 푹 들어가 있어요.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성관조(內省觀照)의 하나의 징표 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애를 써서 두 시간 세 시간 공부하고 난 후에 거울을 보면 틀림없이 눈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웃음)
내가 공부를 해보니까 눈이 안으로 푹 들어갔다가 한참 후 눈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 되는 허구는 이미지나 생각으로 공부를 지어 가는 겁니다. 혹 인터뷰 때 보면 호흡이 등 뒤에서나 옆에서 됩니다. 또는 R/F가 실처럼 부드럽고 가늘어 많은 형상을 이룬다거나 육체 이탈을 한다고 보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마음이 지어낸 그림자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누가 그런 경험들이 위빳사나 수행이라 했습니까? 올바른 수행은 상을 타파하고 있는 그대로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상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우리 몸과 마음을 통해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단지 이 순간입니다.
또 rising falling을 주시하고 있는 중에 신체 어느 부분에 통증이 일어나 마음을 2차 대상처로 옮겨서 주시하니까 그 2차의 현상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1차 대상처로 왔을 때 호흡이 안 보인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흡이 선명하지 않을 때 두 가지 테크닉이 있습니다.
첫째 sitting과 touching을 할 것
sitting - 앉아있는 몸의 형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 정수리에서부터 몸이 시트에 닿아있는 부분까지를 성찰해 내려오면서 어떠한 현상들이 어느 부분에 일어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지요. 예를 든다면 겨드랑부분에 따뜻한 느낌, 닿아 있는 부분의 딱딱함, 또는 몸을 지탱하고 하고 있는 느낌, 바이브레이션 등을 단순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touching - 엉덩이나 다리부분이 바닥에 닿아있는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각이나 여러 가지 현상을 순간적으로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호흡은 저절로 살아나게 됩니다.
둘째 길고 조용한 호흡을 5회에서 10회 정도해서 호흡의 당처를 선명하게 할 것
경전에는 없지만 지도자들의 말씀에 따르면, 5-10회 정도 rising falling 호흡을 아주 조용하고 길게 쉬어서 호흡이 선명해졌을 때 자연스런 호흡으로 돌아와야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호흡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은 공부를 제대로 지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1차 대상처가 안 보이는 사람이 어찌 2차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부를 지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1차 대상과 2차 대상을 놓치지 않고, 간단히 없이 왕복을 하면서 공부를 부지런히 해 나갈 때에 그 사람이 수행을 잘해나가는 것이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1차 대상에만 몰입 한 나머지, 2차 대상은 별로 관심이 없이 공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공부를 잘 지어간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수행 대상인 현상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상관없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1차 대상에 몰입하는 것이 아주 강하게 되면 그때는 다른 2차 대상이 일어나도 스스로 모르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일부러 1차 대상만 보려고 하지 말고 1차 대상에서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강한 대상을 보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 2차 대상에서 선명하고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대상으로 삼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주어진 결정된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그 순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상이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주의해야 될 점은 수행을 좀 한 사람들이 1차 대상처가 미약해지고 2차 대상이 일어났을 때 1차 대상의 성찰을 그만두고 2차 대상처로 옮겨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갈 때 사념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1)일어났다가 (2)머물렀다가 (3)사라지는 3단계(생生, 주住, 멸滅)를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현상의 끝까지를 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상의 고유한 특성 담마를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지금 내가 호흡을 성찰하는 가운데 코끝에서 뜨거운 현상이 일어났다면 그 현상이 변해 아주 사라질 때까지 주시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사라지는 때를 놓치지 않고 봐야 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현상이 거칠고 클 때에는 마음 집중이 강하지 않아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상이 미세해지고 적어질수록 그것을 보려면 더 많은 집중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미세한 것을 보고 마음 집중을 쏟을 때에 집중력이 향상됩니다. 크고 거친 현상만 주시하는데 익숙한 사람은 미세한 과정을 보는데 미숙합니다. 진행되는 현상이 사라지기 전 미세해질 때 더 많은 집중을 해서 주도면밀하게 성찰해야 마지막에 그 현상이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시를 통해서 알 때에 진정한 실재에 대한 분명한 앎이 내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며 이렇게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2차 대상 현상이 미약해지면 속히 1차 대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1차 대상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빨리 돌아 가고자하는 그 자체가 지금 공부를 서두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헐떡거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수행자의 바른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대상을 선별하지 말고 분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끝까지 보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지극한 도란 어려운 것이 아니나 그대가 선별하는 마음을 낼까 염려되는구나. 그대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면 법은 그대 앞에 확연히 드러나리라.” [증도가(證道歌) 중에서] 수행에 관한 내용을 다음 시간에 추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심히 들 하십시오. 모두에게 담마에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004/2/14
4:00~4:30 예불. 석가모니 정근. 자비축원문
4:30~5:00 법문
부정관(不淨觀) - 예: 백골관(白骨觀)
스리랑카에서는 뼈와 그 주인이 젊었을 때의 사진(독일 여성)을 같이 놓고 백골관을 합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죽어서 부패된 다음에는 저처럼 뼈만 남겠구나 하면서 관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와 같이 시체를 관하는 부정관을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정관을 하면 많은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적절하게 지도하기가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념처(신수심법) 네 가지 중 한 가지만 하면 나머지가 석연치 않습니다. 마하시법에서는 몸을 많이 보고, 순륜 법은 느낌을 많이 봅니다. 담마를 많이 보는 선원도 있습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급한 마음에 빗나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없이 수행할 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경계가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도 안 나타나면, 바라는 마음 때문에 그 경계를 마음이 지어냅니다. 이것은 무시(無始) 이래로 우리가 쌓아온 욕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를 근절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행하면 무슨 이익이 있는가?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나중 이야기이고, 우선은 현실적으로 자비스러워 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행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했는데 삭막해 졌다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자비를 보내는 자비관을 하려면 우선 나에게 좋은 마음, 긍정적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부정적인 마음이 갈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뉴욕에 오셨을 때,
종을 치면 “숨을 들이쉰다.”
또 종을 치면 “내쉰다.”
또 종을 치면 “숨을 들이쉼을 안다”
또 종을 치면 “내쉼을 안다”
또 종을 치면 “(들이쉬면서) 나는 미소 짓는다.”
또 종을 치면 “(내쉬면서) 나는 행복하다”
미소 짓는다는 마음을 내는 것과 동시에 경직된 근육이 릴렉스 되어 편안해 집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감에 젖습니다.
일상에서의 많은 번민과 고통을 수행을 통해서 내려놓는 방법을 틱낫한 스님께서 창안하신 것 같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할 때 행복이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미소 짓는다고 말할 때 미소가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미소 짓는다고 말할 때 그 마음을 깊이 바라봐야 합니다. 과연 그런 마음이 생겨서 미소 짓는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미소 짓는지 아는 상태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면 정말 행복감을 느끼면서 행복감에 젖어듭니다.
자비관을 할 때에도 우선 내 마음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평화롭게 자비스러운 내 얼굴이 떠오른 다음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방사해야 진정한 자비관입니다. 나에게 자비가 많아야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실제 내 마음 속에 자비스런 마음이 부족하면 남에게 잘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수행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자비~ 자비~ 하면서 자비스런 내 모습을 자꾸 떠올리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큰 이익이 있습니다.
.................
2004/2/14 0800 법문
불교는 인간에게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생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합니다. 다만 언제 죽을지 모를 뿐입니다.
티베트의 성인 미라래빠는 "젊음은 여름날의 꽃과 같이 금방 시든다"라고 노래했습니다.
2004/2/14 13:00 경행에서 21:00 면담까지
21:00 면담
스님: 호흡은 풍대를 보는 수행이며, 몸과 마음 두 가지를 모두 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사물이 수행의 대상이 아니라 내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 수행의 대상입니다.
경행을 시작할 시점에 “내가 발바닥의 감각을 느끼는가?”를 보고 그 다음에 서서히 다리를 들어야 합니다.
2/15(일) 4:30 법문
소리를 듣고 “들음, 들음, 들음”하면 이미 소리는 지나갔습니다. “들음을 앎”은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명칭을 붙이면 위빳사나가 뒤따라가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처음 위빳사나를 시작할 때는 몰라도 어느 정도 지난 다음에는 명칭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08:00 법문
골드슈타인, 미국인이라 행복.
2004/2/16 - 21:00 문답
수행자1 “좌선할 때 다리 아픈 것은 놔두면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등이 아픈 것은 자세가 나쁘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고치곤 합니다. 왼쪽을 향해서 망상을 하면 고개가 그쪽으로 숙여져서 등이 아픕니다. 오른쪽을 향해서 망상을 하면 고개가 그쪽으로 숙여져서 등이 아픕니다. 이때 아파도 자세를 고치지 말고 그대로 명상을 계속해야 하는지요?
스님: 고칠 때 사띠하면서 고치십시오. 집중을 오래 유지하려면 바른 자세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될 때는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바로 잡으십시오.
수행자2: 첫 날은 다리를 들어서 앞으로 갈 경우와 다리를 회전할 때의 감각이 구별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동작을 천천히 하는 구별이 가능해 졌습니다.
또한 경행을 빨리 할 때에는 왼발이 닿음과 동시에 오른발 뒤꿈치가 들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해 보니 왼발이 들린 다음에 오른 쪽이 많이 있던 체중이 왼쪽으로 많이 이동한 다음에 오른쪽 발의 뒤꿈치가 들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빨리 걸을 때에는 왼발 닿는 것과 오른발 닿는 것은 알겠는데, 그 사이는 느낄 수 없습니다.
스님: 정상입니다.
수행자2: 움직이는 발에 마음을 두라고 하셔서 천천히 경행하면서 사띠해 보니, 예를 들어 왼발이 허공을 지날 때에는 그 느낌이 미세하여 움직이지 않는 오른쪽 발바닥에서 더 강한 느낌을 느꼈습니다. 즉 움직이는 발만이 아닌 양쪽 발 모두에서 느낌을 느끼고 있는데 이것이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까?
스님: 두 가지를 느끼는 것이 보통이지만 마음은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합니다. 무게를 느낄 뿐입니다. 움직이는 발에 집중하십시오. 내 경험에 의하면 움직이지 않는 발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하지만 집중이 안 돼서 두 군데처럼 생각됩니다. 주와 객이 있습니다. 주(主)인 움직이는 발에 몰입하다 보면 객(客)은 신경 안 쓰게 됩니다. 움직이는 발에만 집중하십시오.
좌선 전에 천천히 걸어서 경행이 끝나는 종소리를 사띠하면서 천천히 앉으면 일어남-꺼짐만 단순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종소리가 “땡”하고 나면, “휴~ 이제 경행 끝났네. 이제 좌선하자”라고 생각하면서 행동을 빨리 하면 사띠가 깨집니다. 경행에서 좌선으로 바꿀 때 천천히 행동하면서 앉는 과정을 세밀히 성찰하면 호흡을 밀착하여 보는 것으로 사띠가 이어집니다.
수행자3: 경행을 발을 들어서 나아가고 내리고 딛는 4단계를 한 것 같습니다. 이때 막대기가 움직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 경행을 스텝을 1, 2, 3 혹은 1, 2, 3, 4로 나누어서 하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좀 하신 분들은 단계를 무시하고 그냥 디뎌서 들고 나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어떤 형상이 생겼다가 사라지는지 보십시오.
1, 2, 3단계를 배제하기 위해서는 스텝을 인식하지 말고 처음부터 들고-나아가고-놓는 것을 하나로 보십시오. 들고-나아가고-놓는 것을 단순한 풍대(공기의 요소)로 보십시오. 상(相)을 개입시키지 마십시오. 전에 수행을 많이 하셨더라도 다 비워 놓고 처음 공부할 때의 자세로 돌아가서 “단순히 일어나는 대로 보리라”라는 마음 자세로 수행하십시오.
수행자4: 좌선 시에 파노라마 상영이 보입니다.
스님: 호흡이 고요해 지고 목표가 빗나가면 이미지가 생깁니다. 깨끗한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대상을 보십시오.
위빳사나에서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삼법인을 깨닫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진행만 있는 것입니다. 소리를 듣고 압니다. 누가 압니까?
아는 마음이 압니다.
2/18(수)
12:00~14:30 만복사(萬福寺) 지(址) 등산.
눈. 방글라데시 출신(스리랑카 유학) 스님 눈을 처음 밟아 보다.
면담:
수행자1: 무상과 고는 봤지만 무아는 아직 못 본 것 같습니다.
스님: 둑카는 이론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해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담마를 체득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수행으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체험으로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지요. 삼법인은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를 알면 나머지는 자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 내가 삼법인을 가슴으로 느꼈다고 알면 되지 봤다 못 봤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꾸준히 정상적으로 수행하다보면 따라오는 것이니 욕심 내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삼법인을 보려는 욕심을 내지 마십시오. 수행이란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만 보리라”라고 결심하고 계속 노력하면 담마는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아, 이게 축복의 순간이구나”라고 압니다. 부담 갖지 말고 수행을 계속하십시오. 내적 경험이 있을 때 수행을 계속하겠다는 신심이 납니다.
수행자2: 제법공상의 법과 신수심법의 법은 같은 것입니까?
스님: 같은 것입니다.
수행자3: 움직이는 발에 사띠를 두는데 언제 왼발에서 오른발로 사띠가 옮겨가는가를 성찰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왼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오른발로 사띠가 이동하는 줄 알았는데 천천히 경행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왼발이 완전히 바닥에 닿은 다음 체중의 상당 부분이 왼발에 실려야 오른발이 들렸습니다. 즉 왼발이 바닥에 닿은 다음에 체중이 이동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딛고” 다음에 “누르고”로 표현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왼발이 완전히 바닥에 닿은 다음 바닥을 누르고 난 다음에 사띠를 오른발 발바닥으로 옮겼습니다.
바닥에 닿았을 때는 발바닥에 사띠를 두지만, 바닥에서 떨어져서 허공을 지나갈 때에는 무릎 이하 발까지의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보면 서두르는 마음과 잘난 척하려는 마음이 대부분입니다. 서두르는 마음 때문에 무얼 좀 하려면 가슴이 뛰고 심지어는 아프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손이나 발이 여기저기 부딪치고, 물건을 어느 자리에 놓을 경우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음 동작으로 눈과 마음이 가서 물건을 떨어뜨리곤 합니다.
남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또, 잘난 척하려는 구나”라고 알면 절반 정도는 그만 두지만, 절반 정도는 말해버리고 “아, 또 잘난 척했구나”라도 압니다. 그 버릇이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좌선할 때, 30분, 20분 서원을 세워도 등이 아파서 10분도 자세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코의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멈춤”을 보다가 가끔은 멈춤 대신에 “자세는 바른가”를 보았습니다. 즉
“들이쉬고 내쉬고 멈춤”
“들이쉬고 내쉬고 멈춤”
“들이쉬고 내쉬고 멈춤”
“들이쉬고 내쉬고 자세는?”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자세가 약간이라도 기울어진 느낌일 때에는 서서히 숨을 크게 들이쉬어 가슴을 부풀리면 등뼈는 바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제 4시부터는 10분 유지에 성공했습니다. 즉 등의 통증이 심해서 호흡의 리듬을 깨뜨리고 자세를 바꿔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호흡의 리듬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자세를 교정하는 기술을 개발한 것입니다. (여기서 일상(앉을 때, 밥 먹을 때, 컴퓨터 할 때)에서도 심호흡으로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또한 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를 더 개발하여 오늘 아침 5:30에는 처음으로 30분간 자세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다음 10:00 좌선시간에는 1시간 계속 앉아있는데 성공했습니다. 처음 30분은 가끔 자세를 돌이켜보고 심호흡으로 자세를 바로 펴기도 했으나, 30분이 지나자 “이제는 더 이상 자세를 바로 펴려고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흡이 어린아이가 숨쉬듯 쌔근쌔근 느껴지더니 아주 미세해 졌습니다. 그래서 “호흡이 어디 갔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님께서 “그럼 내가 죽었단 말여?”라고 하신 것이 생각나서 자세히 보니 미세하지만 호흡이 있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리듬을 따라서 들이쉼-내쉼-멈춤을 되풀이했습니다.
침을 삼키면 미세한 호흡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삼키는 동안 호흡이 멈췄다가 미세한 호흡이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침소리, 문 여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비행기 소리 모두 방해되지 않았습니다.
등이 약간 아프고 다리는 저려서 감각이 없었지만 미세한 호흡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엉덩이뼈가 아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깝지만 좌선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미세한 호흡도 깨졌습니다. 시계를 보니 꼭 1시간이 지났습니다.
스님: 좋은 경험하셨네요. 호흡이 미세하게 되었을 때 마음을 몰입함 없이 보십시오. 명칭을 붙이지 마십시오. 명칭으로 마음의 일부를 빼앗깁니다. 미세한 호흡을 보는데 있어서 분석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더 밀착하여 가만히 보기만 하십시오. 보려고 하는 마음이 노력입니다. 이 노력이 지나치면 집중이 깨지고 평정을 잃게 됩니다.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호흡을 보십시오. 우뻭카의 마음으로 보십시오.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십시오.
호흡이 미세해진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경우와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아도 꽤 괜찮은 것입니다. 고통이 적어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면 계속 호흡을 보십시오. 그러나 고통이 극심하다고 판단되면 사띠하면서 서서히 다리를 바꾸든지 하십시오. 왜냐하면 고통과 싸우게 되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경험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 되풀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집착이 되어 호흡이 잦아들어 그런 상태가 또 오기를 기대합니다. 그 마음을 떨쳐내야 합니다. 어제의 것이 또 나타나기를 바라지 말고 새로운 자연스런 호흡을 순수한 마음으로 보십시오. 욕심을 버리고 자연스런 상태에서 호흡을 보십시오.
위빳사나는 마치 사전을 뒤져 계속 새로운 단어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숨겨진 나의 본성을 찾는 것입니다. 나의 본성은 사대에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찾는 탐구가 위빳사나입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깊은 담마가 나옵니다. “이제 이만큼 했으니 됐다”는 것은 없습니다. 호흡이 끊어졌다 다시 깊은 호흡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하면서 보다 정미(精微)로운 다음 단계로 갑니다.
경행은 망상이 많은 것을 없애주고, 에너지를 보충하며, 거친 집중을 유도합니다. 움직임이 좌선보다 크므로 보기가 쉽습니다. 이에 반하여 좌선은 미세한 집중을 하도록 합니다.
수행자4: 고요한 호흡을 본 것을 몸과 마음의 분리라고 봐도 되는지요?
스님: 호흡에 대해서 깨어 있는 것일 뿐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을 알면 위빳사나 수행자로서의 가능성을 갖는 시점입니다. 큰스님께서 “그는 자동으로 길을 가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 느꼈다면 유신견이 일부지만 사라집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미얀마 갔다 와서 느꼈다고 말을 하지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수행자4: 염처경의 “몸에서 몸을 보고 느낌에서 느낌을 보고”는 어떻게 해석했으면 좋겠습니까?
스님: “몸을 대상으로 해서 몸을 보고, 느낌을 대상으로 해서 느낌을 보고”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4: 실제 수행에서는 “몸을 대상으로 수행을 몸을 보다가 느낌이 나타나면 느낌을 보고”가 아닐까요?
스님: 실제 수행에서는 그렇더라도 일단 번역은 “몸을 대상으로 해서 몸을 보고, 느낌을 대상으로 해서 느낌을 보고”로 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5: 마음보는 공부는 어떻게 합니까?
스님: 마음공부를 한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마음은 안 보입니다. 공부가 성숙되지 않은 초보자가 마음이 마음을 보는 공부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자연스럽게 보느냐 하면, 몸이나 느낌의 성찰과정에서 의도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쉬우면서도 진실한 방법입니다. 욕심으로 마음 보면서 아는 마음을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의 그림자를 보고 마음 본다고 착각합니다. 수행이 고도로 향상된 다음에....
마음이 생긴 후에 마음 보는 것은 사라진 다음에 뒷북치는 격이다. 알고, 아는 마음을 또 본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광석화 같은 마음을 보기가 쉽지 않다.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장소 : 천안 호두마을
2/13(금)
19:00~20:00 성오 스님 법문
작년에는 사념처를 주로 법문했는데 이번에는 미라래빠 2회, 초전법륜경 4회를 법문하겠습니다.
삼귀의는 생사의 바다에서 부처님, 담마, 승가라는 섬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에 의지해서 살아가겠다, 법을 안심입명처로 삼겠다, 부처님의 제자인 스님들을 의지처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오계는 청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마음을, 밖으로는 다른 생명을 중히 여겨 남을 괴롭히거나 살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코의 호흡을 보는 것은 상기의 우려가 있다는 단점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장점도 있습니다.
① 호흡이 시작될 때 처음 부딪치는 직접적인 대상처라는 것입니다. 배는 2차 대상처입니다.
② 배는 범위가 넓지만 코는 범위가 좁아서 대상을 바로 보고 수행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코를 대상으로 할 때는 상상에 빠질 가능성이 적습니다. 공기가 직접 부딪치는 차고 따뜻하고 등의 느낌을 느끼기 쉬우므로 풍대의 본성을 보기가 쉽습니다. 대상처가 좁기 때문에 몰입하기가 쉬워 마음을 집중하여 에너지를 집약시키기가 쉽습니다.
③ 대상처를 보는 명료함의 차이가 있습니다. 배라는 좀 막연한 넓은 부위를 보는 게 아니라 코끝이라는 일부를 보기 때문에 특성을 세밀하고 깊이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배는 초보자가 쉽게 볼 수 있고, 주석서에 배를 보는 것도 풍대를 보는 것이므로 대상으로 삼아도 된다고 나와 있습니다. 코는 물론 경전과 주석서에 다 나와 있지요.
배를 볼 때, 배의 피부 부위(앞쪽)가 일어남, 꺼짐을 보는 것보다는, 호흡이 배의 피부의 반대쪽인 등뼈 있는 쪽에서부터 부풀기 시작하여 나중에 배의 피부 부위가 일어난다고 봐야 합니다.
초보 단계에서는 보통 앞쪽의 배의 형태, 모양, 빤냣띠를 보는데, 계속 이렇게만 보면 한계가 있습니다. 본성을 보는 공부를 하려면 마음이 표피를 뚫어야 합니다. 뒤에서부터 부풀어 오르는 것을 놓치지 말고, 집중을 계속해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 빤디따 사야도가 가르치는 것을 제대로 하면 입술이 부르틉니다.
잘 보려면 다음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① 일차 대상(배, 코)에 ② 마음을 밀착시키고 ③ 마음의 눈으로 그곳을 주시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적습니다. 이게 삼위일체입니다. 이렇게 한 시간 하면 눈이 들어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고행상 사진을 보면 눈이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습니다.
① 당처(배 혹은 코)에 ② 마음을 붙이고 ③ 호흡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이게 중요합니다. 위빳사나는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풍대(바람의 요소)를 안 놓치고 보는 것입니다. 왜 따라가서는 안 되는가? 따라가면 호흡의 중간과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가다 보면 호흡이 흩어져 버립니다. 문을 지켜야 됩니다. 문을 지키고 있으면서, 들어올 때 들어오는 것을 알고, 중간을 알고, 끝을 알면 호흡의 전체를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가? 길고 짧고 느리고 빠르고 거칠고 미세한 것을 압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일어나는 느낌을 알고 어떻게 변하는가를 알고 등을 차차로 알게 됩니다.
통증이 나타나면 마음을 집중하여 뚫고 들어가서 밀착하여 보십시오. ① 내 몸이 아니고 통증의 본성을 보겠다고 굳게 결심하십시오. 내 몸이라고 보면 통증이 가중됩니다.
② 호흡 당처에 마음을 밀착시키십시오. 그러면 통증이 가장 강한 곳이 두드러질 것입니다. 그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뚫고 들어가십시오. 쉽진 않습니다. ③ 집중하여 뚫고 들어가면 어느 순간 비수같이 통증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통증의 본성이 선명히 보입니다.
행선:
걸으려는 의도를 알아차리십시오. 의도를 보면 마음을 본 것입니다. 의도를 알아차리겠다는 의도로 사띠하십시오. 마음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개는 관념을 본 것입니다.
6단계 행선은
① 발을 들려고 함 ② 듦 ③ 나가려는 의도 ④ 나감 ⑤ 놓으려는 의도 ⑥ 놓음
입니다.
명칭을 붙이면 “③ 나가려는 의도”할 때 이미 발은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명칭을 붙이는 것이 방심하는 마음을 가다듬는 효과는 있습니다. 처음에는 명칭을 붙여야 하겠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 진 다음에는 붙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명칭을 붙이면 한 스텝 늦으니까요.
망상이 많을 때에는 6단계 경행을 10~20분 계속한 다음에 좌선하십시오. 그러나 계속하지는 마십시오. 일상생활 중에서 깨어 있으려면 자연스럽게 수행해야 합니다.
걸으려는 의도를 보기는 비교적 쉬우나 발을 들려고 하는 의도는 보기 어렵습니다. 들려고 하는 의도는 잘 보아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발바닥에 밀착시키십시오. 그 이상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대상처는 좁을수록 좋습니다. 걷기 전에 발바닥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걸어야 하겠다는 의도가 생겨서 자연스럽게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인내를 가지고 발바닥을 사띠하고 있으면 걷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지금 내 마음이 발바닥에 와 있는가?”
“지금 내 마음이 발바닥에 와 있는가?”
“지금 내 마음이 발바닥에 와 있는가?”
감각이 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무거움, 뜨거움을 느낀 후에 걷기 시작하십시오. 그래야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합니다.
① 걷고자 하는 의도를 본다.
② 발바닥에 마음을 갖다 둔다.
③ 발바닥의 느낌을 느낀다.
④ 서서히 발을 들면서 감각의 변화를 알아차린다. 발을 떼면 감각이 어떻게 변하는가?
위빳사나 집중 수행 제1일 법문(2/13)
오늘부터 6박 7일간 여러 수행자들과 함께 춘계 위빳사나 수련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명칭이나 형상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그는 진정한 비구이다.” 라고 법구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중생들의 삶은 이름, 형상, 그리고 생각과 관념의 틀 속에 얽매여 살고 있지만 정녕 그 주인공인 우리는 허상의 그물에 걸려있는 줄 모르고 자유롭고 지혜로운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수행자들께서 이번 수련에 특별한 법을 구하거나 무엇인가 얻으려는 마음으로 여기에 참석하셨다면 실망을 하거나 빈손으로 귀가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수행이란 무엇이기에 우리들이 이렇게 모였을까요. 한마디로 변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변하는가? 지금까지 보태고 빼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의 삶에 형태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는 쪽으로 변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한 작업입니다. 그렇게 무위로 바꾸는 작업이 수행이며 진정한 우리들의 변화인 것입니다.
그 일은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담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일에 단순하게 노력하십시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단순하면서 명료해 질 것입니다. 여기 수련기간 동안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설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 판단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하나의 망념에 지나지 않으며 여러분에 수행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있는가? 자문하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올바른 수행자입니다. 많이 알면 일이 많다고 했듯이 여기 있는 동안 책을 보거나 라디오를 청취하는 것 법우들과 잡담을 하는 것을 모두 여러분 자신의 올바른 수행을 위해 삼가야 합니다. 그러한 정진이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목표를 두고 원대한 서원을 세우되 목적지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쉬지 않는 불방일(不放逸)의 노력만이 여러분을 평화와 자유의 세계로 안내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작년 춘계수련은 사념처경(四念處經)을 중심으로 법문하고 지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번에는 부처님의 경전 가운데에서 초전법륜경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면서 수행을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법문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실 일주일 동안은 수행할 시간이 너무 짧은 편입니다. 그래서 실제 수행에 필요한 부분을 되도록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불교전통 수행인 위빳사나를 남방불교 권에서 배우고 익혔다 하더라도 각기 그 스승들마다 독창적인 가풍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방법은 맞고 다른 방법은 맞지 않다고 내세우면 방법 병에 걸린 것입니다.
간혹 북방불교를 부처님의 가르침을 으뜸으로 삼지 않고 역대 고승의 가르침과 가풍을 더 믿고 따른다고 해서 조사 불교라고 힐난하는 사례가 후기에 생겼듯이, 남방 권에서 수행하고 온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고 각기 지도 받은 사야도의 가르침이 최고인양 집착하고 내세운다면 사야도 불교라는 비방을 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국내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이견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수행에 관한 의문은 메모 하셨다가 인터뷰 시간에 제출하십시오.
우선 합장을 하시고 삼귀의와 오계를 다 같이 합송합시다.
지금 여러분들이 낭송하신 것은 남방의 전통적인 삼귀의, 오계입니다.
첫째 붓당 사라낭 갓차미 - 저는 부처님을 나의 의지처로 삼아가겠습니다. 갓차미( gacchāmi) 는 나는 간다는 뜻인데, 저는 부처님을 의지해서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더없이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셨으며 모든 중생을 그 길로 안내하시는 자비의 스승이시기에 그분을 의지해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맹서지요.
둘째 담망 사라낭 갓차미 - 저는 부처님을 나의 의지처로 삼아가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위없는 깨달음의 성자이신 붓당에 의해 완전무결하게 설해졌으며 현세에 유익하고 내 안에서 스스로 증험되며 우리들을 승화시키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상강 사라낭 갓차미 - 저는 상가를 나의 의지처로 삼아 가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모인 참사람들은 여래의 담마를 훌륭하게 실천하고 지혜롭게 수행하며 조화롭게 살아감으로써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기 때문에 저는 상가를 의지해서 인생을 가치 있고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다섯 가지 청정하고 윤리적인 생활규범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살아있는 생명의 안과 밖을 헤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안은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밖은 그 육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생명의 육신을 상하게 하거나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마음에 고통과 번민을 주지 않겠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 다른 사람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 것 모두가 불자들은 삼가야 될 일입니다.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하고 자비심을 함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살생은 자연히 멀어지게 되겠지요.
둘째 주인의 허락 없이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재산이나 소유물을 힘 따라 베풀어서 공덕을 심으라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8계를 낭송 할 때는 아브라마짜리야(abrahmacariya),라고 하는데 범천에 있는 무리들이 깨끗하고 고매한 삶을 살아가듯이 나도 그와 같이 깨끗하고 고결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맹세합니다. 비록 우리들이 욕망으로 가득 찬 사바세계에 살고 있지만 천상세계 있는 무리들처럼 살기를 다짐해 보는 것입니다. 재가 불자들은 불사음(不邪淫) 계를 지킴으로서 사랑과 신뢰의 바탕을 쌓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요.
넷째-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 되고 유익하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겠습니다. 말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에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 위빳사나 수행자들이 말을 할 때 알아차림을 통해서 구업을 짓는 일이 점점 줄어들 것은 틀림없습니다. 말을 하고 싶은 의도를 알아차리십시오. 당신이 적절한 시기에 담마를 나누는 것은 유익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침묵 속에서 스스로 해답을 얻는 것이 더 현명하리라고 봅니다. 되도록 밖을 향해 치닫기를 삼가 하십시오. 그 만큼 번뇌는 불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하거나, 마음을 혼탁하게 하는 그런 종류들을 마시거나 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맑고 깨끗한 지혜를 기르도록 하겠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들은, 나만 위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과 행복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다보면 다 힘들고 어려운데 이런 어려운 계율을 왜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하는가, 라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넓게 보면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고 자유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이러한 삼귀의, 오계를 낭송하는 것은 그런 마음의 맹서와 그런 삶을 살기를 간절히 원함으로서 내가 수행의 길의 정도에 벗어나지 않고 그러한 공덕과 서원의 힘으로 내 수행을 훨씬 더 힘 있고 용맹스럽게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호흡을 보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미얀마 수도원 자체에서도 배로 호흡하는 것과 코로 호흡하는 두 가지가 방법이 실행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하시 큰스님 계통에서 하고 있는 수도원에선 지금 rising & falling은 배로 호흡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지금 가장 많이 성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둘째로 모곡사야도 회상이나 파욱 사야도와 순륜 수도원 등에서는 코로 호흡을 성찰합니다.
그런데 사념처경이나 안반수의경을 보면 위빳사나 수행자나 사마타 수행자들이 호흡수행을 할 때 모두 일차 대상처를 코끝에 두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도 처음에 우 빤디따 사야도님이나 우 자나까 사야도아래서 수행할 때는 배로 호흡을 했습니다. 그 후 줄 곳 같은 방법으로 수행해오다가 여름 안거를 파욱 사야도를 모시고 사마타 수행을 코로 하면서 대상처만 다르지 전에 위빳사나 하던 때에 느끼던 현상이나 감각이 유사함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코로 호흡 대상처를 옮겨도 되겠구나, 하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 후, 다시 쉐우민 사야도를 친견하고 수행을 시작하면서 ‘호흡을 코로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여쭈어 보니까. ‘코로 계속 수행하도록 해라’ 하시더군요. 제 생각에는 배로 하는 것이나 코로 하는 것이나 모두 바람의 요소를 성찰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코끝을 일차 대상처로 수행해 오던 것을 마하시 큰스님은 배를 1차 대상처로 상정하시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호흡을 성찰하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이나 재가신도들에게 코끝을 보는 것보다 쉽고 크기 때문에 배를 보는 방법을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두 가지 방법이 다 좋은데,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어떤 수행자들은 코끝을 성찰하면 상기(上氣)가 많이 되는 성향이 있어요.
제가 출가해서 처음에는 전북 내소사 해안큰스님 회상에서 간화선(看話禪)을 배웠고 그 후 경봉 큰스님 구산 큰스님 등을 모시고 수행하다가 인도에 유학 가서 처음으로 고엔까 센터에서 코로 위빳사나 수행을 했는데 상기가 되고 화두가 들려서 많이 혼란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상기를 내리고 호흡에 몰두했더니 3일째 되는 날부터 서서히 자리가 잡히면서 호흡이 보이고 감각을 느끼고 새로운 담마를 경험하면서 아, 이대로 계속하면 틀림없이 여래가 말씀하신 법을 경험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미국인 아난다스님으로부터 미얀마의 빤디따라마 수도원 소개를 받아 갔었는데 그곳에서는 배를 성찰하도록 지도해주시니까 아주 쉽게 적응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배를 성찰하신 분들은 배로 하십시오.
오늘 저녁에 제가 코끝을 성찰하는 방법을 이야기 하니까 ‘오늘부터 코로 바꿀까? 지금까지 소득이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방법이 틀렸던 것 같아. 지금까지 당장 코로 바꾸자.’이렇게 방황하시면 안 됩니다.
배를 성찰해서 안 되던 수행이 갑자가 코로 해보면 더 안 되겠지요. 그러니 배로 대상처를 삼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망설이지 말고 계속 배를 대상처로 삼으십시오.
지금부터 코끝의 성찰과 배를 성찰하는데 있어서 두 대상처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코끝을 호흡의 대상처로 삼았을 경우,
첫째-호흡이 부딪치는 직접적인 대상처에서 본성을 볼 수 있다
둘째는 성찰의 대상처가 좁다. 호흡에 마음을 강하게 몰입할 수 있고 그 몰입에서 집중 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에너지가 훨씬 집약될 수 있다.
셋째로 대상처를 볼 때 아주 명료하고 미세하다.
넷째로 코로 호흡하는 것은 배로 호흡하는 것 보다 imagination 에 빠질 우려가 적다.
다섯째 남방수행 소의경전에 언급되었다.
배를 호흡의 대상처로 삼았을 경우
첫째- 바람의 요소를 내 안에서 바라보고 느낄 수 있다.
둘째- 주 대상처의 범위가 넓다.
셋째-간접적인 대상처이기 때문에 관찰함에 있어 코보다는 한 스텝 느리다.
넷째-주석서에 의거하고 있으며 미얀마 고승에 의해 잘 체계화되고 지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호흡 관찰은 바람의 요소를 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대상처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념처경에 보면, 수행자가 몸을 바르게 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다음 마음을 전면에 두고,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 쉬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전면이라는 것이 어디냐? 전면이라면 입의 주위를 말하는 것이다, 또는 코끝에서 호흡이 들어가는 거니까 코끝일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호흡이 부딪치는 당처를 전면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리라 봅니다. 물론 사람의 코의 형태에 따라서 숨을 들이마실 때 인중에 부딪치는 사람, 윗입술에 부딪치는 사람, 콧구멍 입구에 부딪치는 사람, 안쪽에 부딪치는 사람 등 다양합니다. 호흡의 당처, 즉 전면에 문제는 여러분이 수행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경험을 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나 이미지가 아닌 실제호흡이 왕래하는 자리여야 됩니다.
어떻게 올바른 Rising & Falling을 할 것인가
우선rising & falling을 하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그 방법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 쉴 때 배로 rising & falling을 하는 사람인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코를 인식하면 안 됩니다. 대상처를 오로지 한 곳에 정해야하고 만약에 1차 대상처가 배와 코로 옮겨가면서 주시하면 마음은 어디에도 주처(住處)를 못 잡기 때문에, 처음에 수행할 때 몰입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로 접어들기 쉽습니다.
내가 배로 rising & falling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챙김을 하면서 반가부좌를 하거나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야 하는데, 손을 놓는 방식도 인도 사람하고 중국 사람은 다릅니다. 중국 사람들은 체(體)와 용(用)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오른손을 밑에 놓고 움직이지 않는 정(靜)의 왼손을 위에 가지런히 놓습니다.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정(淨)과 추(醜)를 생각하기 때문에 오른 손은 깨끗한 손이라고 해서 위에 놓고 왼손을 추한 손이라고 아래에 놓습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가볍게 감은 다음 R/F의 호흡이 분명히 인지되도록 5회 또는 10회 정도 가늘고 긴 호흡을 합니다. 마음을 배 위에 부드럽게 밀착시킨 다음 rising&falling이 시작되는 처음부터 알아차리는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아주 밀착해서 호흡을 해야 합니다.
대개 수행자들이 미얀마에 가서 어떻게 수행을 하느냐 하면, 배가 사르르 일어나면 배 앞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감지한단 말이지요. 배가 일어나는구나! 해서 라-이-시-o―(rising 느리고 낮은 음성), 앞의 배의 표피가 들어가면 포-ㄹ-리-o―(falling 아주 느리고 낮은 음성) 하고 배가 쑥 꺼진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배의 앞쪽에 있는 부분이 일어나고 들어가는 형태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배의 양태를 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위빳사나 수행 초보단계에선 양태를 볼 수밖에 없기는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양태뿐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처음에 배의 표피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부터 보는 공부가 쉬운 것 같지만 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공부는 빤sit띠(paññatti :이미지, 개념, 형상) 허상을 보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빠라맛타(paramattha) 궁극적인 진리의 본성을 보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배 앞면이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들어 마신 공기가 차서 뒤에서부터 불러오니까 마음이 배의 표피를 뚫고 들어가서, 배 안에서의 공기의 움직임 과 감각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처음부터 rising & falling을 하는 사람은, 마음을 배 앞면에 부착했다가 그 다음에 호흡이 들어감과 동시에, 마음을 표피 속으로 뚫고 들어가 배의 뒷면으로부터 라-이-시-o― [rising]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마음이 대상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진행되면서 공기(호흡)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어떤 감각들이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리고 rising이 끝나고 이어서 falling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같은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배로 성찰하는 수행을 바르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은 쉬운데 그렇게 하기가 실제로는 어렵지요. 이렇게 여러분이 위빳사나 공부를 하루에 9시간에서 12시간을 하는데 자기 전에 침대에 갈 때 기운이 남아 힘차게 가는 사람은 공부를 애써서 안 한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우 빤디따 사야도께서 일 년이 지났을 때 구체적인 호흡방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느 날, 인터뷰를 하고 나서 이곳에서 수행한지 얼마나 되는가 하고 물으시기에 약 일 년쯤 됩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내가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아직도 가르쳐 주실 것이 있으십니까?”
“지금처럼 해서는 깊고 세밀한 호흡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해서는 진전이 느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시면서 ‘들어가는 화살을 비유해서, 여기서부터 rising 과 falling을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시는데 그때 “아!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했지요. 그러나 말은 쉽지만 그와 같이 여일 하게 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가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그 자리에서 공기의 요소가 보이는 것입니다. 정지된 호흡이 배 안으로부터, 움직이는 공기의 특성이 보이는 단계에 가야만이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이구나, 하고 긍정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공부를 지어 가는 것이 쉽지는 않으나 쉬지 않고 계속 해나가면 점차 익숙하게 됩니다.
처음에 rising 호흡을 들이마실 때, 가장 깊은 배 뒷면으로부터 공기의 요소가 rising이 시작되는 것을 알아차리는 노력이 간절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나 기도할 때 간절한 소망을 발원할 때처럼 호흡을 안 놓치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rising &falling을 주시해야합니다.
Rising & Falling을 배로 하는 수행자의 요건.
첫째- rising falling의 일차 대상처를 배에 상정한다.
둘째- 마음을 그곳에다 밀착(집중)시킨다.
셋째- 마음의 눈으로 일차 대상처를 주시해야 된다.
넷째-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려야 된다. (1차 호흡과 2차 다른 대상들)
세 번째는 물론 경전에는 없는 것이지만, 지도자들의 테크닉에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하는가? 마음의 눈으로 1차 대상처를 주시하면 마음이 밖에 대상을 따라 가거나 방황하는 횟수가 틀림없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고 무딘 마음으로는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 대상에 온전히 집중해야 됩니다.
그래서 rising falling 으로 호흡을 볼 때에
(1)1차 대상처가 정해지고
(2)마음을 그 곳으로 끌고 가고
(3)마음의 눈으로 1차 대상처를 보아서 삼위일체가 될 때,
(4)있는 그대로의 지금 현재 나타나고 있는 대상이 보입니다.
그때 마음이 어떻게 다른 대상처로 쉽게 옮겨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호흡을 성찰하고 공부를 하면서 마음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1) 1차 대상처를 놓쳤던지,
(2) 마음이 다른 곳에 가있던가
(3) 마음의 눈으로 그곳을 주시하는 힘이 떨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파키스탄 박물관에 있는 부처님의 고행상(苦行像)을 보셨을 텐데, 부처님 눈이 안쪽으로 푹 들어가 있어요.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성관조(內省觀照)의 하나의 징표 일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애를 써서 두 시간 세 시간 공부하고 난 후에 거울을 보면 틀림없이 눈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웃음)
내가 공부를 해보니까 눈이 안으로 푹 들어갔다가 한참 후 눈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자가 가장 경계해야 되는 허구는 이미지나 생각으로 공부를 지어 가는 겁니다. 혹 인터뷰 때 보면 호흡이 등 뒤에서나 옆에서 됩니다. 또는 R/F가 실처럼 부드럽고 가늘어 많은 형상을 이룬다거나 육체 이탈을 한다고 보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마음이 지어낸 그림자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누가 그런 경험들이 위빳사나 수행이라 했습니까? 올바른 수행은 상을 타파하고 있는 그대로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상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우리 몸과 마음을 통해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단지 이 순간입니다.
또 rising falling을 주시하고 있는 중에 신체 어느 부분에 통증이 일어나 마음을 2차 대상처로 옮겨서 주시하니까 그 2차의 현상이 사라지고 나서 다시 1차 대상처로 왔을 때 호흡이 안 보인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호흡이 선명하지 않을 때 두 가지 테크닉이 있습니다.
첫째 sitting과 touching을 할 것
sitting - 앉아있는 몸의 형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머리 정수리에서부터 몸이 시트에 닿아있는 부분까지를 성찰해 내려오면서 어떠한 현상들이 어느 부분에 일어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지요. 예를 든다면 겨드랑부분에 따뜻한 느낌, 닿아 있는 부분의 딱딱함, 또는 몸을 지탱하고 하고 있는 느낌, 바이브레이션 등을 단순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touching - 엉덩이나 다리부분이 바닥에 닿아있는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각이나 여러 가지 현상을 순간적으로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호흡은 저절로 살아나게 됩니다.
둘째 길고 조용한 호흡을 5회에서 10회 정도해서 호흡의 당처를 선명하게 할 것
경전에는 없지만 지도자들의 말씀에 따르면, 5-10회 정도 rising falling 호흡을 아주 조용하고 길게 쉬어서 호흡이 선명해졌을 때 자연스런 호흡으로 돌아와야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호흡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앉아 있다고 하는 것은 공부를 제대로 지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1차 대상처가 안 보이는 사람이 어찌 2차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부를 지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1차 대상과 2차 대상을 놓치지 않고, 간단히 없이 왕복을 하면서 공부를 부지런히 해 나갈 때에 그 사람이 수행을 잘해나가는 것이지요.
만약 어떤 사람이 1차 대상에만 몰입 한 나머지, 2차 대상은 별로 관심이 없이 공부를 한다면 그 사람은 공부를 잘 지어간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수행 대상인 현상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상관없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1차 대상에 몰입하는 것이 아주 강하게 되면 그때는 다른 2차 대상이 일어나도 스스로 모르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입니다. 일부러 1차 대상만 보려고 하지 말고 1차 대상에서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강한 대상을 보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 2차 대상에서 선명하고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대상으로 삼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주어진 결정된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그 순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상이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주의해야 될 점은 수행을 좀 한 사람들이 1차 대상처가 미약해지고 2차 대상이 일어났을 때 1차 대상의 성찰을 그만두고 2차 대상처로 옮겨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갈 때 사념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1)일어났다가 (2)머물렀다가 (3)사라지는 3단계(생生, 주住, 멸滅)를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은 현상의 끝까지를 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상의 고유한 특성 담마를 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지금 내가 호흡을 성찰하는 가운데 코끝에서 뜨거운 현상이 일어났다면 그 현상이 변해 아주 사라질 때까지 주시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사라지는 때를 놓치지 않고 봐야 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현상이 거칠고 클 때에는 마음 집중이 강하지 않아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상이 미세해지고 적어질수록 그것을 보려면 더 많은 집중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미세한 것을 보고 마음 집중을 쏟을 때에 집중력이 향상됩니다. 크고 거친 현상만 주시하는데 익숙한 사람은 미세한 과정을 보는데 미숙합니다. 진행되는 현상이 사라지기 전 미세해질 때 더 많은 집중을 해서 주도면밀하게 성찰해야 마지막에 그 현상이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시를 통해서 알 때에 진정한 실재에 대한 분명한 앎이 내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며 이렇게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2차 대상 현상이 미약해지면 속히 1차 대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1차 대상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빨리 돌아 가고자하는 그 자체가 지금 공부를 서두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이 헐떡거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는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수행자의 바른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 있는 대상을 선별하지 말고 분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끝까지 보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지극한 도란 어려운 것이 아니나 그대가 선별하는 마음을 낼까 염려되는구나. 그대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면 법은 그대 앞에 확연히 드러나리라.” [증도가(證道歌) 중에서] 수행에 관한 내용을 다음 시간에 추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심히 들 하십시오. 모두에게 담마에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004/2/14
4:00~4:30 예불. 석가모니 정근. 자비축원문
4:30~5:00 법문
부정관(不淨觀) - 예: 백골관(白骨觀)
스리랑카에서는 뼈와 그 주인이 젊었을 때의 사진(독일 여성)을 같이 놓고 백골관을 합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죽어서 부패된 다음에는 저처럼 뼈만 남겠구나 하면서 관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와 같이 시체를 관하는 부정관을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정관을 하면 많은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적절하게 지도하기가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념처(신수심법) 네 가지 중 한 가지만 하면 나머지가 석연치 않습니다. 마하시법에서는 몸을 많이 보고, 순륜 법은 느낌을 많이 봅니다. 담마를 많이 보는 선원도 있습니다.
수행을 하다 보면 급한 마음에 빗나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없이 수행할 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경계가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도 안 나타나면, 바라는 마음 때문에 그 경계를 마음이 지어냅니다. 이것은 무시(無始) 이래로 우리가 쌓아온 욕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를 근절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행하면 무슨 이익이 있는가?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나중 이야기이고, 우선은 현실적으로 자비스러워 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행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했는데 삭막해 졌다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자비를 보내는 자비관을 하려면 우선 나에게 좋은 마음, 긍정적인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부정적인 마음이 갈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뉴욕에 오셨을 때,
종을 치면 “숨을 들이쉰다.”
또 종을 치면 “내쉰다.”
또 종을 치면 “숨을 들이쉼을 안다”
또 종을 치면 “내쉼을 안다”
또 종을 치면 “(들이쉬면서) 나는 미소 짓는다.”
또 종을 치면 “(내쉬면서) 나는 행복하다”
미소 짓는다는 마음을 내는 것과 동시에 경직된 근육이 릴렉스 되어 편안해 집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감에 젖습니다.
일상에서의 많은 번민과 고통을 수행을 통해서 내려놓는 방법을 틱낫한 스님께서 창안하신 것 같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할 때 행복이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미소 짓는다고 말할 때 미소가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내가 미소 짓는다고 말할 때 그 마음을 깊이 바라봐야 합니다. 과연 그런 마음이 생겨서 미소 짓는지 아니면 형식적으로 미소 짓는지 아는 상태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면 정말 행복감을 느끼면서 행복감에 젖어듭니다.
자비관을 할 때에도 우선 내 마음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평화롭게 자비스러운 내 얼굴이 떠오른 다음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방사해야 진정한 자비관입니다. 나에게 자비가 많아야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실제 내 마음 속에 자비스런 마음이 부족하면 남에게 잘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수행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자비~ 자비~ 하면서 자비스런 내 모습을 자꾸 떠올리는 연습을 하십시오. 그것만으로도 큰 이익이 있습니다.
.................
2004/2/14 0800 법문
불교는 인간에게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인생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합니다. 다만 언제 죽을지 모를 뿐입니다.
티베트의 성인 미라래빠는 "젊음은 여름날의 꽃과 같이 금방 시든다"라고 노래했습니다.
2004/2/14 13:00 경행에서 21:00 면담까지
21:00 면담
스님: 호흡은 풍대를 보는 수행이며, 몸과 마음 두 가지를 모두 보는 것이 수행입니다. 사물이 수행의 대상이 아니라 내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 수행의 대상입니다.
경행을 시작할 시점에 “내가 발바닥의 감각을 느끼는가?”를 보고 그 다음에 서서히 다리를 들어야 합니다.
2/15(일) 4:30 법문
소리를 듣고 “들음, 들음, 들음”하면 이미 소리는 지나갔습니다. “들음을 앎”은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명칭을 붙이면 위빳사나가 뒤따라가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처음 위빳사나를 시작할 때는 몰라도 어느 정도 지난 다음에는 명칭을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08:00 법문
골드슈타인, 미국인이라 행복.
2004/2/16 - 21:00 문답
수행자1 “좌선할 때 다리 아픈 것은 놔두면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등이 아픈 것은 자세가 나쁘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고치곤 합니다. 왼쪽을 향해서 망상을 하면 고개가 그쪽으로 숙여져서 등이 아픕니다. 오른쪽을 향해서 망상을 하면 고개가 그쪽으로 숙여져서 등이 아픕니다. 이때 아파도 자세를 고치지 말고 그대로 명상을 계속해야 하는지요?
스님: 고칠 때 사띠하면서 고치십시오. 집중을 오래 유지하려면 바른 자세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될 때는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바로 잡으십시오.
수행자2: 첫 날은 다리를 들어서 앞으로 갈 경우와 다리를 회전할 때의 감각이 구별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동작을 천천히 하는 구별이 가능해 졌습니다.
또한 경행을 빨리 할 때에는 왼발이 닿음과 동시에 오른발 뒤꿈치가 들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해 보니 왼발이 들린 다음에 오른 쪽이 많이 있던 체중이 왼쪽으로 많이 이동한 다음에 오른쪽 발의 뒤꿈치가 들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빨리 걸을 때에는 왼발 닿는 것과 오른발 닿는 것은 알겠는데, 그 사이는 느낄 수 없습니다.
스님: 정상입니다.
수행자2: 움직이는 발에 마음을 두라고 하셔서 천천히 경행하면서 사띠해 보니, 예를 들어 왼발이 허공을 지날 때에는 그 느낌이 미세하여 움직이지 않는 오른쪽 발바닥에서 더 강한 느낌을 느꼈습니다. 즉 움직이는 발만이 아닌 양쪽 발 모두에서 느낌을 느끼고 있는데 이것이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까?
스님: 두 가지를 느끼는 것이 보통이지만 마음은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합니다. 무게를 느낄 뿐입니다. 움직이는 발에 집중하십시오. 내 경험에 의하면 움직이지 않는 발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한 번에 두 가지를 못하지만 집중이 안 돼서 두 군데처럼 생각됩니다. 주와 객이 있습니다. 주(主)인 움직이는 발에 몰입하다 보면 객(客)은 신경 안 쓰게 됩니다. 움직이는 발에만 집중하십시오.
좌선 전에 천천히 걸어서 경행이 끝나는 종소리를 사띠하면서 천천히 앉으면 일어남-꺼짐만 단순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종소리가 “땡”하고 나면, “휴~ 이제 경행 끝났네. 이제 좌선하자”라고 생각하면서 행동을 빨리 하면 사띠가 깨집니다. 경행에서 좌선으로 바꿀 때 천천히 행동하면서 앉는 과정을 세밀히 성찰하면 호흡을 밀착하여 보는 것으로 사띠가 이어집니다.
수행자3: 경행을 발을 들어서 나아가고 내리고 딛는 4단계를 한 것 같습니다. 이때 막대기가 움직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 경행을 스텝을 1, 2, 3 혹은 1, 2, 3, 4로 나누어서 하라고 한 것은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좀 하신 분들은 단계를 무시하고 그냥 디뎌서 들고 나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어떤 형상이 생겼다가 사라지는지 보십시오.
1, 2, 3단계를 배제하기 위해서는 스텝을 인식하지 말고 처음부터 들고-나아가고-놓는 것을 하나로 보십시오. 들고-나아가고-놓는 것을 단순한 풍대(공기의 요소)로 보십시오. 상(相)을 개입시키지 마십시오. 전에 수행을 많이 하셨더라도 다 비워 놓고 처음 공부할 때의 자세로 돌아가서 “단순히 일어나는 대로 보리라”라는 마음 자세로 수행하십시오.
수행자4: 좌선 시에 파노라마 상영이 보입니다.
스님: 호흡이 고요해 지고 목표가 빗나가면 이미지가 생깁니다. 깨끗한 거울처럼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대상을 보십시오.
위빳사나에서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삼법인을 깨닫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진행만 있는 것입니다. 소리를 듣고 압니다. 누가 압니까?
아는 마음이 압니다.
2/18(수)
12:00~14:30 만복사(萬福寺) 지(址) 등산.
눈. 방글라데시 출신(스리랑카 유학) 스님 눈을 처음 밟아 보다.
면담:
수행자1: 무상과 고는 봤지만 무아는 아직 못 본 것 같습니다.
스님: 둑카는 이론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해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담마를 체득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수행으로 체득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체험으로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지요. 삼법인은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를 알면 나머지는 자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 내가 삼법인을 가슴으로 느꼈다고 알면 되지 봤다 못 봤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꾸준히 정상적으로 수행하다보면 따라오는 것이니 욕심 내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삼법인을 보려는 욕심을 내지 마십시오. 수행이란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실상만 보리라”라고 결심하고 계속 노력하면 담마는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아, 이게 축복의 순간이구나”라고 압니다. 부담 갖지 말고 수행을 계속하십시오. 내적 경험이 있을 때 수행을 계속하겠다는 신심이 납니다.
수행자2: 제법공상의 법과 신수심법의 법은 같은 것입니까?
스님: 같은 것입니다.
수행자3: 움직이는 발에 사띠를 두는데 언제 왼발에서 오른발로 사띠가 옮겨가는가를 성찰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왼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오른발로 사띠가 이동하는 줄 알았는데 천천히 경행해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왼발이 완전히 바닥에 닿은 다음 체중의 상당 부분이 왼발에 실려야 오른발이 들렸습니다. 즉 왼발이 바닥에 닿은 다음에 체중이 이동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딛고” 다음에 “누르고”로 표현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왼발이 완전히 바닥에 닿은 다음 바닥을 누르고 난 다음에 사띠를 오른발 발바닥으로 옮겼습니다.
바닥에 닿았을 때는 발바닥에 사띠를 두지만, 바닥에서 떨어져서 허공을 지나갈 때에는 무릎 이하 발까지의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을 보면 서두르는 마음과 잘난 척하려는 마음이 대부분입니다. 서두르는 마음 때문에 무얼 좀 하려면 가슴이 뛰고 심지어는 아프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손이나 발이 여기저기 부딪치고, 물건을 어느 자리에 놓을 경우 채 바닥에 닿기도 전에 다음 동작으로 눈과 마음이 가서 물건을 떨어뜨리곤 합니다.
남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또, 잘난 척하려는 구나”라고 알면 절반 정도는 그만 두지만, 절반 정도는 말해버리고 “아, 또 잘난 척했구나”라도 압니다. 그 버릇이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좌선할 때, 30분, 20분 서원을 세워도 등이 아파서 10분도 자세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코의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멈춤”을 보다가 가끔은 멈춤 대신에 “자세는 바른가”를 보았습니다. 즉
“들이쉬고 내쉬고 멈춤”
“들이쉬고 내쉬고 멈춤”
“들이쉬고 내쉬고 멈춤”
“들이쉬고 내쉬고 자세는?”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자세가 약간이라도 기울어진 느낌일 때에는 서서히 숨을 크게 들이쉬어 가슴을 부풀리면 등뼈는 바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제 4시부터는 10분 유지에 성공했습니다. 즉 등의 통증이 심해서 호흡의 리듬을 깨뜨리고 자세를 바꿔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호흡의 리듬을 유지하면서 서서히 자세를 교정하는 기술을 개발한 것입니다. (여기서 일상(앉을 때, 밥 먹을 때, 컴퓨터 할 때)에서도 심호흡으로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또한 습관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를 더 개발하여 오늘 아침 5:30에는 처음으로 30분간 자세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다음 10:00 좌선시간에는 1시간 계속 앉아있는데 성공했습니다. 처음 30분은 가끔 자세를 돌이켜보고 심호흡으로 자세를 바로 펴기도 했으나, 30분이 지나자 “이제는 더 이상 자세를 바로 펴려고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흡이 어린아이가 숨쉬듯 쌔근쌔근 느껴지더니 아주 미세해 졌습니다. 그래서 “호흡이 어디 갔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님께서 “그럼 내가 죽었단 말여?”라고 하신 것이 생각나서 자세히 보니 미세하지만 호흡이 있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리듬을 따라서 들이쉼-내쉼-멈춤을 되풀이했습니다.
침을 삼키면 미세한 호흡이 깨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삼키는 동안 호흡이 멈췄다가 미세한 호흡이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침소리, 문 여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비행기 소리 모두 방해되지 않았습니다.
등이 약간 아프고 다리는 저려서 감각이 없었지만 미세한 호흡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엉덩이뼈가 아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깝지만 좌선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미세한 호흡도 깨졌습니다. 시계를 보니 꼭 1시간이 지났습니다.
스님: 좋은 경험하셨네요. 호흡이 미세하게 되었을 때 마음을 몰입함 없이 보십시오. 명칭을 붙이지 마십시오. 명칭으로 마음의 일부를 빼앗깁니다. 미세한 호흡을 보는데 있어서 분석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더 밀착하여 가만히 보기만 하십시오. 보려고 하는 마음이 노력입니다. 이 노력이 지나치면 집중이 깨지고 평정을 잃게 됩니다.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호흡을 보십시오. 우뻭카의 마음으로 보십시오.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십시오.
호흡이 미세해진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경우와 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아도 꽤 괜찮은 것입니다. 고통이 적어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면 계속 호흡을 보십시오. 그러나 고통이 극심하다고 판단되면 사띠하면서 서서히 다리를 바꾸든지 하십시오. 왜냐하면 고통과 싸우게 되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경험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 되풀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집착이 되어 호흡이 잦아들어 그런 상태가 또 오기를 기대합니다. 그 마음을 떨쳐내야 합니다. 어제의 것이 또 나타나기를 바라지 말고 새로운 자연스런 호흡을 순수한 마음으로 보십시오. 욕심을 버리고 자연스런 상태에서 호흡을 보십시오.
위빳사나는 마치 사전을 뒤져 계속 새로운 단어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숨겨진 나의 본성을 찾는 것입니다. 나의 본성은 사대에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찾는 탐구가 위빳사나입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깊은 담마가 나옵니다. “이제 이만큼 했으니 됐다”는 것은 없습니다. 호흡이 끊어졌다 다시 깊은 호흡으로 돌아오기를 되풀이하면서 보다 정미(精微)로운 다음 단계로 갑니다.
경행은 망상이 많은 것을 없애주고, 에너지를 보충하며, 거친 집중을 유도합니다. 움직임이 좌선보다 크므로 보기가 쉽습니다. 이에 반하여 좌선은 미세한 집중을 하도록 합니다.
수행자4: 고요한 호흡을 본 것을 몸과 마음의 분리라고 봐도 되는지요?
스님: 호흡에 대해서 깨어 있는 것일 뿐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을 알면 위빳사나 수행자로서의 가능성을 갖는 시점입니다. 큰스님께서 “그는 자동으로 길을 가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 느꼈다면 유신견이 일부지만 사라집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미얀마 갔다 와서 느꼈다고 말을 하지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수행자4: 염처경의 “몸에서 몸을 보고 느낌에서 느낌을 보고”는 어떻게 해석했으면 좋겠습니까?
스님: “몸을 대상으로 해서 몸을 보고, 느낌을 대상으로 해서 느낌을 보고”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4: 실제 수행에서는 “몸을 대상으로 수행을 몸을 보다가 느낌이 나타나면 느낌을 보고”가 아닐까요?
스님: 실제 수행에서는 그렇더라도 일단 번역은 “몸을 대상으로 해서 몸을 보고, 느낌을 대상으로 해서 느낌을 보고”로 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5: 마음보는 공부는 어떻게 합니까?
스님: 마음공부를 한다고들 하지만 실제로 마음은 안 보입니다. 공부가 성숙되지 않은 초보자가 마음이 마음을 보는 공부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자연스럽게 보느냐 하면, 몸이나 느낌의 성찰과정에서 의도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쉬우면서도 진실한 방법입니다. 욕심으로 마음 보면서 아는 마음을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마음의 그림자를 보고 마음 본다고 착각합니다. 수행이 고도로 향상된 다음에....
마음이 생긴 후에 마음 보는 것은 사라진 다음에 뒷북치는 격이다. 알고, 아는 마음을 또 본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광석화 같은 마음을 보기가 쉽지 않다.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