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적 진리(개념)와 절대적 진리(실재)
(레디 사야도의 『유럽 불교 답변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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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용어 수정
.예를 들어 끝이 없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관습적 진리(개념)로는 옳은 말입니다. 끝이 없는 허공은 실재성품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절대적 진리(실재)로는 옳은 말입니다. 무한한 허공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각각의 영역으로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중생, 개인이라는 하는 것은 범부들의 마음과 인식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관습적 진리(개념)로는 중생이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중생이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겨 간다. 윤회한다'라는 말도 관습적 진리로는 옳습니다.
하지만 물질과 정신, 성품법만을 다루는 아비담마에 따르면 중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절대적 진리[實在]로는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물질과 정신만 존재합니다. 그 물질과 정신들도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일이 없습니다. 돌고 도는 일이 없습니다. 생기는 곳에서만 사라져 버립니다.
절대적 진리와 관습적 진리는 각각의 영역에서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 법들이기 때문에 '중생이 있다, 중생이 없다'라는 이 두 구절도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관습적 진리에 따르면 중생은 존재합니다. 절대적 진리에 따르면 중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각각의 영역에 따라 말한다면 모두 옳기만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생이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간다, 옮겨가지 않는다.'라는 이 구절도 각각의 영역에 따라 적당한 말일 뿐입니다. 이 구절에서 '중생이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간다.'라고 강하게 집착하며 견지하면, '정신·물질도 옮겨간다, 전전(轉傳)한다'고 견지(堅持)하면 상견(常見. 영원주의)이 생깁니다.
반면에 '물질·정신은 옮겨감이 전혀 없다'고 강하게 견지하면, '중생도 옮겨가는 일이 없다, 한 생에서 끝난다, 한 생에서 중생의 삶은 끝난다, 나무가 죽어서 다른 나무로 태어난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강하게 견지하면 단견(斷見. 허무주의)이 생깁니다.
관습적 진리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상견이 생긴다.
절대적 진리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단견이 생긴다.
상견을 가지면 열반의 문을 닫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처럼 윤회하는 정신·물질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윤회의 마당에서 계속 머물기 때문입니다.
단견을 가지면 천상의 문을 닫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단견을 가지면 선업과 불선업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 사견도 정신과 물질, 이 두 가지일 뿐인 것을 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에만 존재합니다. 자아(自我)야말로 모든 사견(邪見. 잘못된 견해)의 뿌리입니다. 자아사견에서 여러 가지 사견교리들이 나왔습니다. 자아가 있다고 견지하면 모든 사견의 뿌리를 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견과 단견이라는 양극단, 비법(非法) 두 가지를 제거하고, 앞에서 말한 관습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로 분석하는 것을 통해 적절하게 각각의 영역에 맞게, 모순되지 않게 실천하면 천상의 문, 열반의 문을 열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진리를 잘 나누어 분석해서 바르게 실천하면 천상의 문, 열반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