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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

[자띨라 사야도]수행의 이익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1.02.16|조회수62 목록 댓글 4

수행의 이익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느 때 어떤 천신(天神)이 부처님께 와서 예를 표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확인하려고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 제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저는 모든 중생들이 자신의 어린이들을 가장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장 부자입니다. 햇빛이 우주에서 가장 밝습니다. 물을 담고 있는 호수 중에서는 대양(大洋)이 가장 크고 넓습니다.”

 

그의 말은 전통적인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을 너무도 사랑하여 자식들을 안기도 하고 목말을 태우기도 합니다. 아이가 부모 옷에 똥오줌을 싸도 화를 내거나 싫어하지 않고 더욱더 사랑과 자애를 퍼붓습니다. 이런 것들을 알아차린 천신은 중생들이 자기 후손을 가장 사랑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소를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을 가장 부유하다고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난 곳은 소를 신성하게 여기는 인도입니다. 힌두문화는 고기를 먹지 않으나 우유를, 사람들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해 주는 자연의 원천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버터, 요구르트와 치즈도 우유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소를 많이 키우고 소를 많이 가진 사람을 부유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햇빛이 가장 밝다는 그의 말은 진실인 것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전깃불, 배터리 불 혹은 다른 빛의 원천들은 밝기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수 중에서 대양이 가장 넓고 크다는 말도 또한 아주 그럴 듯하고, 이 말들의 적절함은 전통적인 진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평범한 사람들의 보통 지식과, 일체지자이신 부처님의 훌륭한 지혜의 현명함과의 차이를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신의 여러 가지 말을 검토해 보신 부처님께서는 천신에게 다음과 같이 반박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비교해 보면 천신의 주장은 모두 틀린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모든 중생은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후손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언젠가는 의견 차이가 생겨 서로 헤어집니다. 우리들은 부모가 그들의 자녀와 여러 가지 이유로 인연을 끊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끔찍하게 서로 사랑하던 부부도 불화가 생기면 이혼합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지극히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그들의 후손을 가장 사랑한다는 천신의 말은 옳지 않으며 모든 중생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2) 가장 부유한 사람은 곡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말도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궁핍할 때, 즉 기근이 들었을 때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쌀(곡식)이기 때문입니다. 쌀이 없으면 비참한 재앙이며 죽음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차빳띠(chapatti, 인도 빵)나 빵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밀도 곡식이기 때문입니다. 곡식에는 쌀, 보리, 귀리, 옥수수, 기장, 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곡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이 가장 부자인 것입니다.

 

(3) 지혜의 빛이 가장 밝습니다.

햇빛이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밝은 것 같지만, 깊은 곳, 예를 들면 동굴 속을 비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貪瞋癡)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줄 수는 없습니다. 또한 햇빛은 선량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착하고 현명하게 바꿀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지혜에 의해서만 착하고, 현명하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교육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빛이 가장 밝습니다. 부처님께서 “지혜의 빛보다 밝은 빛은 없다”고 하신 말씀은 매우 지당합니다.

 

(4) 비와 샘물이 대양으로 가는 물의 근원입니다.

바다와 대양은 빗물과 샘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면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샘물과 빗물이 작고 큰 수많은 강을 거쳐서 대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점은 중생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나면,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집에서 재빨리 뛰쳐나옵니다. 모든 중생은 자신의 안전과 안락을 추구하며 부유해지고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최대한 이롭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감각적 쾌락만 즐기는 것은 자신을 적절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대학자들은, 게으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업(善業)을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선업을 쌓아야 합니다. 선업을 행하려면 바른 견해와 더불어 바른 신념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선업은 반드시 청정하며 항상 좋은 과보를 가져옵니다. 선한 행위를 하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보시는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받는 사람도 이롭지만, 보시의 목적은 보시하는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너그럽게 남에게 줌으로써 자신의 탐욕을 제거하는 것과, 수혜자가 보시자의 자애에 보답하는 것이므로 이는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도 선업입니다. 살생이나 도둑질을 하지 않고, 다른 나쁜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선업입니다. 이런 선업을 행함으로써 탐욕과 성냄을 막고, 그 결과 건강하고 오래 살게 됩니다. 지혜에 관련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도 선업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육문에서 발생하는 탐욕과 성냄을 예방합니다. 그리하여 탐욕과 성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슬픔과 불안에서 벗어난 마음의 청정함을 즐기게 됩니다.

 

수행의 마지막 목표는 도과(道果)의 지혜를 얻어서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업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보시, 지계(持戒), 수행을 실천하는 것만이 자신을 바른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수행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보시, 지계, 사마타 수행(평온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지혜 수행)은 선업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기는 이로운 점은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보시와 지계는 인간계와 천상계에서의 부유함과 행복을 가져오는 선업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범천계에 태어납니다. 선정(禪定)의 지복(至福)에 사는 범천들은 음식, 물, 다른 영양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범천들의 수명은 대단히 깁니다. 그러나 천상계나 범천계의 단점은 길고도 행복한 삶이 끝나면 인간계나 사악도(四惡道, 지옥․축생․아귀․아수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잘하면 유신견이 제거되어 도과를 거쳐 열반이라는 소중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네 가지 선업 중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가장 좋습니다.

 

다시 정리를 해 보면, 보시와 지계의 선업은 천상계나 인간으로 태어나는 좋은 과보를 받습니다. 사마타 수행이란 선업은 범천계에 태어나는 좋은 과보를 받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열반의 지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 여러분들은 열반이란 소중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해서 열반에 들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열반에 들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기 직전에 수밧다라는 고행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열반에 든 다음이라도, 승려나 재가불자나 내가 설한 법문대로 실천하고, 올바른 통찰로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면 아라한이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올바른 통찰로 수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생멸의 지혜(새로운 현상이 언제나 재빨리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를 얻은 사람이 다른 수행자나 친구를 자기처럼 수행하도록 격려해서 같은 결과를 얻었다면, 그것을 올바른 통찰로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수행으로 정신적․물질적 현상이 소멸하는 지혜를 획득한 수행자가 다른 수행자를 격려하여 정신적․물질적 현상이 소멸하는 지혜를 알도록 한다면, 올바른 통찰로 수행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마하시 선원에서는 고참 수행자가 자신이 수행하여 얻은 것을 신참 수행자들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도 또한 올바른 수행자의 삶을 사는 것이며, 올바른 통찰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여러분들이 부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부처님 말씀을 잘 실천하고 서로 도우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면, 아라한이 사라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아라한이 성취된다면, 자연적으로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도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 올바른 통찰로 수행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서도 성인의 지위에 도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지금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맛지마빤나사 마하 라훌로와다 숫따 앗타까타(중부 62경 교계라훌라 대경의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수행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의 생애에서 한 번 또는 몇 번의 좌선으로 성인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수행 방법에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조건이 성숙된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그 호기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완전한 수행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순간에 도과의 지혜를 얻을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을 하는 여러분이 소중한 목표를 달성할 첫 번째 좋은 기회입니다.

 

(2) 만약 수행하는 여러분이 위와 같은 기회를 실현하지 못하더라도 죽기 직전에 두 번째 기회가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모든 중생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위안과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첫 번째 부류는 초인(超人)으로, 코끼리형 영웅(elephant-hero), 황소형 영웅(bull-hero)입니다. 그들은 유신견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 부류는 벽지불(辟支佛, 홀로 깨달은 붓다), 아나함, 아라한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유신견이 없으며 두려움의 원인이 되는 성냄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아무도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어디에 다시 태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두려운 사건입니다. 죽을 때 도와주기를 바라면서 자식이나 의사나 누구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죽는 순간에는 어떤 약도 효험 없고, 자식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죽는 순간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은 수행입니다. 수행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법(마음의 대상)을 관찰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식들에게 나 좀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것뿐입니다. 마치 날개 잃은 새가 날지 못하고 개나 고양이의 먹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사람이 죽을 때 법을 관찰하지 못하면 사악도에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은 위빠사나 지혜를 관찰하게 되고, 그로 인해 도과(道果)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며, 죽기 직전에 성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죽는 순간에 법을 관찰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상상해 보면, 살아생전에 위빠사나 수행을 했던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3) 비록 성인이 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법을 관찰하면서 죽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가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계에 천신으로 태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고따마(Gotama) 붓다 시절에 수행을 한 천신들을 만날 것이며, 이 경건한 천신들과 함께 성인이 될 또 한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천상계는 인간계와 조건이 비슷합니다. 즐거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천신이 있는가 하면, 법을 추구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천신도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법을 관찰했기 때문에 천상계에 태어난 사람은 다른 경건한 천신을 만날 것이고, 천신들은 보다 지성적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을 경험한 사람들이 깨달을 세 번째 기회입니다.

 

(4) 천상계에서 깨달을 세 번째 기회를 놓쳤지만 윤회하여 부처님과 불법이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가정하더라도, 여러 생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벽지불이 될 수 있습니다. 벽지불은 부처님 가르침 없이 ‘독자적으로 깨달은 분(獨覺)’입니다. 벽지불은 그렇게 별도로 혹은 개인적으로 깨달은 분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성제를 이해했지만 완전하게 깨달은 부처님처럼 다른 사람이 알아듣게 법문을 할 능력은 없습니다. 여성들도 이때 의식을 고양시켜 벽지불이 될 수 있습니다.

 

(5) 네 번째 기회인 벽지불이 되는 데 실패했다 하더라도, 이전에 수행했던 힘으로 다음에 오는 불법시대에 쉽게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선례가 있습니다. 깟사빠 붓다(Kassapa Buddha) 시절에 7일 동안 용맹정진을 했지만 성인위를 성취하지 못한 ‘바히야 다루짜리야’라는 사람이 고따마 붓다 시절에 살았습니다. 그는 고따마 붓다의 법문을 듣고 한 번의 충실한 좌선으로 아주 쉽고도 편안하게 사성제를 즉시 깨닫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며, 여러분은 바로 이 순간 위빠사나 수행을 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1) 첫 번째 기회에 도(道)의 지혜와 과(果)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2) 첫 번째 기회에 성인이 되지 못한다면, 두 번째 기회인 죽는 순간에 그것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3) 두 번째 기회에 실패한다면, 세 번째 기회인 천상계에서 천신이 되어 도과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4) 세 번째 기회를 놓친다면, 불법이 없는 시대에 태어나도 벽지불이 될 수 있습니다.

5) 벽지불이 되는 네 번째 기회를 놓치더라도, 다음 불법시대에 사성제를 증득하고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수행의 이득이 이렇게 위대하며 틀림없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출처 : 아신 자띨라 사야도 법문, 오원탁 번역, “큰 스승의 가르침”, 행복한 숲, 102-114쪽.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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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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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1.02.16 사두사두사두
  • 작성자백련 | 작성시간 21.02.16 사두 사두 사두 ~~
  • 작성자혜문 | 작성시간 21.02.16 사두 사두 사두 ~~^^
  • 작성자보드히 | 작성시간 21.02.28 사두사두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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