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의사
한국마하시선원 아비담마 제15강
우 또다나 사야도 법문/일창 스님 통역
https://cafe.naver.com/koreamahasi/ 참조.
꾸살라의 의미
빠알리어 사전에서는 ‘선kusala’을 4가지 의미로 분석했습니다.
꾸살라는 병이 없음, 원하는 과보를 줌, 그리고 단어의 성性에 따라 허물없음
또한 능숙함으로 쓰인다. (Ārogye kusalaṁ iṭṭha vipāke kusalo tathā;
Anavajjamhi cheke ca kathito vāccaliṅgiko. AbṬ.게송 803)
요약하자면 ‘선kusala’이라는 단어는 병이 없음, 좋은 결과를 줌, 허물이 없음, 능숙함이라는 뜻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그중에서 병이 없는 모습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병에는 몸의 병과 마음의 병 2가지가 있습니다. 몸의 병이란 원하지 않는aniṭṭha 몸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의 병이란 마음을 오염시키고 괴롭히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의 번뇌를 말합니다. 몸의 병에 걸리면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의사가 약을 처방하거나 수술을 하는 등 치료해 줍니다. 마음의 병에 걸리면 어디로 갑니까? 물론 마음의 병도 정신과 의사나 심리치료사, 그리고 다른 종교 가르침 종사자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치료를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서 생기는 여러 병을 남김없이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부처님만이 가르쳐주실 수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의사’란 아라한이며 정등각자인 여래의 동의어이다. (‘Bhisakko’ti, bhikkhave, tathāgatassetaṁ adhivacanaṁ arahato sammāsambuddhassa. A8:85/A.iii.153)
부처님만이 ‘의사’라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byatireka 방법이나 자연성취avuttasiddhi 방법으로는167 그 외에 다른 이들은 가짜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의사들은 몸만 치료할 수 있습니다. 몸도 한 생 안에서만 치료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이라는 번뇌 병은 치료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병이 제거되지 않고서, 잠재워지지 않고서는 몸의 병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습니다. 다시 아픕니다. 윤회 윤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의 병인 번뇌와 함께하는 한 지옥에서 거듭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사악도의 중생은 ‘정신병’으로 사악도에 태어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의 병 때문에 사악도에 태어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병인 번뇌 때문에 사악도에 태어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훌륭한 의사이십니다. 마음의 병이 치료돼 완전히 없어지면 몸의 병도 뿌리째 뽑힙니다.(태어난 생에서는 몸의 병이 없을 수 없다. 마음의 병인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어 다음 생에 태어나지 않으면 그 생에 몸의 병도 더 이상 없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뿌리째 뽑히도록 치료할 수 있어야 진짜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진짜 의사가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의사’란 아라한이며 정등각자인 여래의 동의어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진정한 의사에 비유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의사가 처방하는 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이라는 약은 4종류로 쓰입니다.
실천하는 이들에겐 구토약과 같네.
과위果位에 있는 이들에겐 설사약下劑과 같네.
결과를 열망하고 복 밭을 구하는 그러한 이들에겐 응급약과 같네.
가르침과 적대적으로 행하는 이들에겐 즉시 죽게 하는 독약과 같네.
보기만 해도 죽이는 맹독의 독사처럼 그를 태워서 죽인다네.
(Vamanaṁ paṭipannānaṁ, phalaṭṭhānaṁ virecanaṁ;
Osadhaṁ phalalābhīnaṁ, puññakkhettaṁ gavesinaṁ.
Sāsanena viruddhānaṁ, visaṁ halāhalaṁ yathā;
Āsīviso diṭṭhaviso, evaṁ jhāpeti taṁ naraṁ. Ap.i.51)
첫째, 구토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수행 중인 이들의 사용법입니다.
둘째, 설사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과의 위치에 있는 이들의 사용법입니다.
셋째, 응급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윤회윤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좋은 과보를 원하는 이들의 사용법입니다.
넷째, 독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가르침을 적대시하는 이들의 사용법입니다.
첫 번째, 거룩한 가르침을 구토약으로 사용하는 이들은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얻기 위해 실천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보시와 지계와 수행을 실천하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가르침을 구토약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보시와 지계와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토해내고 있을까요? 중생들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머나먼 과거로부터 윤회하는 동안 수많은 번뇌를 삼켰습니다. 중생들의 심장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질투, 인색, 자만, 아만 등 번뇌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면 토하게 하는 약을 먹어야 합니다. 설사약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토하게 하는 약이 없으면 손가락을 집어넣어서라도 토하게 해야 합니다. 소화되지 않은 음식이 밖으로 나오면 편안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은 시작을 알 수 없는 긴 세월을 윤회하면서 계속해서 삼켜 왔던 탐욕, 성냄, 어리석음, 질투, 인색, 자만 등의 번뇌가 심장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편안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탐욕 때문에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성냄 때문에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합니다. 어리석음, 자만, 질투, 인색 때문에도 편하지 않습니다. 시작을 알 수 없이 거듭거듭 윤회를 해 오면서 심장 속에 가득 차서 자신을 답답하게 하는 그 번뇌를 보시,
계, 수행이라는 선업을 통해 토해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번뇌를 토하게 해서 번뇌라는 병을 없애기 때문에 보시, 계, 수행을 ‘선kusala’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거룩한 가르침을 설사약처럼 사용하는 방법은 범부들과는 무관한 방법입니다. 과의 위치에 있는 성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방법입니다. 과의 위치에 있는 성자들은 자신들이 증득한 열반의 적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과 증득phalasamāpatti에 자주 입정합니다. ‘kā phalasamāpattīti? yā ariyaphalassa nirodhe appanā 과 증득이란 무엇인가? 성스러운 과가 소멸에 몰입하는 것이다’라는 『위숫디막가』의 설명대로 (Vis.ii.341) 과 증득이란 물질과 정신이라는 모든 형성이 소멸되고 사라진 열반이라는 대상에 들어가서 머무는 것처럼 성스러운 과의 마음이 계속 생겨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무슨 이익 때문에 성자들은 자주 과 증득에 입정할까요?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머물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세상에서 왕이나 천신이 왕의 영화, 천신의 영화를 마음껏 누리듯이 성자들도 이제 자신들의 소유가 된 과의 행복, 열반의 행복이라는 출세간의 행복을 현생에서 누리기 위해 ‘이 정도의 기간 동안 과의
마음만 생겨나게 하면서 지내리라’라고 미리 결의하고서 자신이 원하는 만큼 과 증득에 입정해 지냅니다.
이것은 마치 설사약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소화된 음식이 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막혀 있으면 지내기에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설사약을 먹어서라도 편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의 위치에 있는 성자들은 각각의 단계마다 여러 번뇌를 제거했습니다. 적당한 만큼 음식들이 소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이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하면서 고통이 생겨납니다. 그러한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성자들은 과 증득에 입정합니다. 설사약을 먹어 편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의 위치에 있는 성자들이 과 증득에 입정해 열반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가르침을 설사약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르침을 응급약처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목숨을 구하는 응급약은 항상 사용하는 약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매우 긴박한 순간에만 응급약을 사용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르침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다시 말하면 가르침을 의지하고 공경하는 사람들도 절체절명의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가르침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기서 ‘절체절명의 위험’이라는 것은 늙음이라는 위험, 병듦이라는 위험, 죽음이라는 위험을 말합니다. 이러한 큰 위험에 닥쳤을 때는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 즉 늙음과 병듦, 죽음이라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르침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르침을 목숨을 구하는 응급약처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은 사업의 번창이나 높은 지위, 명성 등 세간적인 일을 위해 삼보에 귀의하고 가르침에 의지합니다. 가르침을 전승시킬 의무가 있는 출가자들 중 일부도 4가지 필수품과 보시를 많이 얻거나 명성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가르침에 의지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문헌의 의무gantha dhura와 위빳사나의 의무vipassanā dhura라는 원래 해야 할 일을 버려둡니다. 이것은 ‘saṁsāra vaṭṭadukkhato mocanatthaya 윤회윤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라는 출가의 근본목적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입문한 재가자와 출가자 모두 이렇게 세간적인 목적을 위해 가르침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세간적인 목적으로 의지하면 매우 가치가 높은 가르침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르침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응급약처럼 가르침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가르침을 독처럼 사용하는 이는 가르침을 거스르는 이, 가르침과 반대되게 행동하는 이를 말합니다. ‘가르침을 거스른다.’라고 할 때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들의 가르침에는 모든 불선업을 행하지 않는 것, 모든 선업을 행하는 것, 각자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는 3가지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불선업을 행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생각하지 마라”라고 설하시고 교시해 놓으신 것을 따르지 않고 반대로 불선업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가르침을 독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을 먹으면 고통스럽습니다. 죽기까지 합니다. 설사 죽지 않더라도 죽을 만큼의 고통스러운 느낌을 겪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선업을 행하라”라고 하셨는데,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선한 행위들을 하지 않으면 가르침을 독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라고 하신 부처님의 훈계를 따르지 않고 마음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고 있다면 가르침을 독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윤회하면서 탐욕이나 성냄 등으로 아주 더럽혀져 있습니다. 이렇게 더럽혀진 마음이 깨끗해지도록 행하지 않고 더욱 더럽혀지도록 행한다면, 이것은 가르침을 독처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첫 번째로 보시와 지계와 수행 선업을 닦는 것을 통해 번뇌를 토해내게 하는 구토약으로 가르침을 사용해야 합니다. 두 번째인 설사약처럼 사용하는 것은 과의 지혜를 얻은 성자들에게만 해당합니다. 범부들과는 관계없습니다. 범부들은 가르침을 설사약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 각자가 매일 만나고 있는 늙음의 위험, 병듦의 위험,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가르침에 의지하고 공경하는 것을 통해 생명을 구하는 응급약으로 가르침을 사용해야 합니다. 네 번째, 가르침이라는 부처님의 교시와 반대되게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독약처럼 사용하는 방법은 할 수 있는 만큼 삼가야 합니다. 번뇌를 토하게 하는 부처님의 구토약은 바로 팔정도입니다. 바른 견
해는 삿된 견해를 토하게 합니다. 바른 생각은 삿된 생각을 토하게 합니다. 바른 말은 삿된 말을 토하게 합니다. 바른 행위는 삿된 행위를 토하게 합니다. 바른 생계는 삿된 생계를 토하게 합니다. 바른 노력은 삿된 노력을 토하게 합니다. 바른 새김은 삿된 새김을 토하게 합니다. 바른 삼매는 삿된 삼매를 토하게 합니다.
구토약을 먹고 편해지듯이 팔정도라는 약을 복용하면 마음의 병인 번뇌가 모두 사라집니다.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 등이 다 사라집니다. 이것은 바로 꾸살라, 선의 힘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번에 되지 않습니다.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근본 도 구성요소라고 합니다. 업과 업의 결과에 대한 바른 견해, 청정한 계, 바탕이 되는 삼매가 그것입니다. 이어서 앞부분 도 구성요소를 실천해야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생겨나는 팔정도, 도 구성요소가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위빳사나 지혜가 무르익으면 성스러운 도 구성요소가 생겨납니다.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토약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들어서 아는 지혜가 생긴 것일 뿐입니다. 혹은 이 내용을 숙고하고 마음에 담았다면 생각해서 아는 지혜가 생긴 것일 뿐입니다. 이 지혜들에 만족하면 안 됩니다. 스스로 실천해서 아는 지혜가 생겨나도록 열심히 수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수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수행하려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일어나려면 경각심이 있어야 합니다. 경각심은 사람마다 특별한 상황에서 생겨납니다. 부처님 당시에 뛰어난 능력으로 제일 칭호를 받게 된 아라한 존자들도 경각심을 일으키는 어떤 계기를 만나야만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경각심이 없었다면 일반인들과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빠따짜라Paṭācārā 여인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빠따짜라는 부호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일하던 하인과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첫째 아이를 출산했고, 둘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도중, 큰비를 만나숲속에서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남편은 땔감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독사에 물려 죽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남편이 뱀에 물려 죽은 것을 발견했고, 막 낳은 아이와 첫째를 데리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강을 만나 첫째 아이는 이쪽 언덕에 혼자 둔 채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 다음 갓난아이를 반대 언덕에 눕혀놓고 첫째 아이를 데리러 다시 돌아가던 중 강 중간쯤 이르렀을 때 독수리가 갓난아이를 채가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빠따짜라는 팔을 휘저으며 채가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엄마가 소리치며 팔을 휘젓는 모습을 본 첫째 아이는 오라고 하는 신호로 알고서 강으로 향했습니다. 빠따짜라는 아이에게 오지 말라고 다시 팔을 휘저었습니다. 첫째 아이는 그것도 오라는 신호로 알고서 물속으로 들어가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빠따짜라는 그렇게 남편과 두 아이를 모두 잃고서 다시 친정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친정이 있는 사왓티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쪽에서 오는 사람에게서 아버지, 어머니, 오빠가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멀리서 보이는 연기가 바로 그들을 화장하는 연기라고 말했습니다. 하루 사이에 모든 가족을 잃은 빠따짜라는 큰 충격으로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려 발가벗고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발가벗은 채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부처님의 법회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빠따짜라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빠따짜라는 정신이 돌아왔고 곁에 있던 사람의 도움으로 옷을 걸쳤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황을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의 고통과 관련해서 부처님께서는 알맞은 법문을 해 주셨고, 빠따짜라는 법문을 들으면서 위빳사나 지혜가 향상되어 수다원도와 과를 증득해서 수다원이 됐습니다. 이어서 비구니계를 받고 수행을 계속해 머지않아 아라한 도와 과를 증득해서 아라한이 됐습니다.(Dhp.113 일화)
이와 같이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까지 아라한이 되게 하신 부처님이야말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최고의 의사, 진짜 의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방하신 팔정도라는 꾸살라kusala 약, 좋은 약을 끼니마다, 시간마다 잘 복용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 번뇌라는 마음의 병을 잘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