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비방업
한국마하시선원 아비담마 제22강
우 또다나 사야도 법문/일창 스님 통역
https://cafe.naver.com/koreamahasi/ 참조.
성자비방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명은 실제 아라한 성자를 “계도 안 지킨다. 멍청하다”라고 비난했고, 다른 한 명은 계도 안 지키고 수행도 안 하는 이를 “이 분은 아라한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합시다. 두 사람 중 누가 허물이 있을까요? 둘 모두 허물이 있습니다. 둘 모두 성자비방업에 해당하고 똑같이 허물이 큽니다. 이 내용은 『앙굿따라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등에 나옵니다. 왜 두 경우 모두 허물이 있을까요?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견해를 틀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아닌 분을 아라한이라고 믿고 말해서 다른 사람이 ‘이런 분이 아라한이구나.’라고 믿으면 견해가 그릇됩니다.
또한 그것에 따라서 ‘아라한도 이렇게 실천하므로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고 실천하기 때문에 실천도 그릇되게 만듭니다. 이렇게 견해와 실천 모두를 그릇되게 하므로 성자가 아닌 이를 성자라고 칭송하는 것도 진짜 성자를 비방하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자비방업에 둘 다 해당하며, 허물도 똑같이 큽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시고 난 뒤, 스리랑카 어느 마을에 사람들이 아라한이라고 칭송하는 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은 수행주제를 청하고자 그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어떻게 오셨는지요?”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수행주제를 하나씩 주시기를 청하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한번 앉은 자리에서 바로 아라한이 될 수 있는 수행주제를 드리겠습니다. 이 수행주제를 대상으로 열심히 수행하다 보면 빛이 한 번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수다원이 된 것입니다. 또 수행을 열심히 하다 보면 다시 한 번 빛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사다함이 된 것입니다. 다시 수행을 계속해서 세 번째로 빛이 나타나면 그것이 아나함이 된 것입니다. 또 계속해서 수행을 하면 한 번 더 빛이 번쩍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라한이 된 것이고, 일이 끝나게 된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라한 스님이 알려 준 수행주제라며 그대로 믿고 따라했고, 나중에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스스로 아라한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스님이 돌아가시자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유해를 잘 화장해서 사리탑까지 장엄하게 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스님이 그 마을을 찾아와 그 스님을 뵙고자 청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완전열반에 드셨습니다. 스님의 유해는 저희가 사리탑에 잘 모셨습니다.”
“혹시 돌아가신 스님이 어떤 수행 방법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서 아라한이 되셨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스님께 어떤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돌아가신 스님이 알려 준 방법과 함께, 그 스님도 그렇게 아라한이 되셨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나타나는 빛은 위빳사나 수행 과정에서 희열 등으로 나타나는 빛일 뿐입니다. 도와 과가 아닙니다. 그 방법은 바르지 않고, 그 스님도 아라한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것은 잘못됐고, 스님들이 아는 것만이 옳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라며 마을을 찾아온 스님들에게 화를 내며 대들었습니다.(MA.iv.25)
사실 그렇게 나타나는 빛은 수행 과정 중에 나타나는 희열, 경안에 불과하며, 10가지 위빳사나 부수번뇌에 포함되는 것이지 도나 과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해서 나타나는 10가지 부수번뇌를 도나 과, 혹은 열반으로 착각하는 것은 수행의 실천, 지혜의 향상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주석서에 설해져 있습니다. 열심히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나타나는 여러 희열이나 힘이 좋은 새김, 지혜, 빛 등은 세간의 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세간의 도는 여러 장애가 될 수도있고, 흔들림이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수행해서 얻어지는 출세간의 도는 장애도 없고 흔들림도 없습니다. 이 세간적인 도로써 얻어지는 희열이나 행복 등을 도나 과, 열반이라고 착각하면 수행의 진전에 장애가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은 선정이나 도와 과를 무너지게 합니다. 가짜가 드러나면 진짜가 사라지는 것처럼, 가짜 황금이 있으면 진짜 황금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렇게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드러나면 진짜인 것을 얻기가 힘들어집니다. 무너지게 합니다.
정리하자면 성자비방업에 해당되는 경우는 첫 번째, 바라이죄를 범하지 않은 성자에게 “이 스님은 바라이죄를 범했기 때문에 스님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사람은 도와 과도 없고 열반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출가자뿐만 아니라 성자인 재가자를 비방하는 것도 해당됩니다.
성자비방업을 행하면 다음과 같은 11가지 나쁜 결과가 따라오게 됩니다.
첫 번째, 아직 얻지 못한 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범부라면 열심히 위빳사나 수행을 해도 수다원과를 증득하지 못합니다. 만약 수다원이 그러한 잘못을 했다면 그 위의 더 높은 도와 과를 아주 오래 걸려서 매우 힘들게 증득하게 됩니다.
아라한인 장로와 함께 탁발을 나간 한 젊은 비구가 있었습니다. 장로는 속이 좋지 않아 탁발하며 받은 죽이 식기 전에 서둘러 길 옆 나무토막 위에 앉아 공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젊은 비구가 마음으로 ‘부끄럽지도 않으신가’라고 비난했습니다. 정사에 돌아왔을 때 장로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이 교법에서 의지할 만한 법을 얻었는가?”
“저는 수다원입니다, 스님.”
“그렇다면 그보다 더 위의 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무엇 때문입니까, 스님?”
“그대는 아라한을 비방했다네.”
그제야 젊은 비구는 스님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Vis.ii.55)
아래의 일화처럼 성자인지 아닌지는 사실 매우 알기 어렵습니다. 아라한 장로와 함께 탁발을 나간 늦깎이 비구가 도중에 물었습니다.
“스님, 성자란 어떠한 분들입니까?”
“성자를 성자라고 알기란 어렵다네. 이 세상에 어떤 늦깎이 비구는 성자의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여러 소임을 행하면서 함께 지내더라도 그분이 성자인 줄 모른다네. 이 정도로 어렵다네.”
그 늦깎이 비구는 스승의 대답을 듣고도 여전히 자신의 스승이 성자인지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MA.i.23)
두 번째, 얻은 법도 후퇴하게 됩니다. 성자의 법은 후퇴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이 없고, 위빳사나 지혜나 선정을 얻었다면 그것들이 후퇴하거나 사라지게 됩니다.
세 번째, 계·삼매·통찰지라는 3가지 수련(三學)이 청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청정하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네 번째, 아직 얻지 않은 법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선한 이들의 법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며, 지겨워하게 되고 싫어하게 됩니다.
여섯 번째, 중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출가자는 바라이죄가 될 것이고, 재가자는 오계가 무너지거나 오무간업 등을 저지르게 됩니다.
일곱 번째, 출가자의 경우 속퇴하게 될 수도 있고, 재가자의 경우 수행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덟 번째, 큰 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홉 번째, 정신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열 번째, 죽을 때 정신을 못 차리고 혼미하게 죽게 됩니다.
열한 번째, 죽은 후 바로 악처에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자비방업의 11가지 나쁜 결과입니다. 하지만 성자비방업을 이미 저질렀다고 해서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자비방업이 나쁜 병이라면 그것을 고치는 치료약도 있습니다.
첫 번째, 잘못을 범한 그 분이 아직 살아계시고 직접 갈 수 있다면, 그 앞에서 합장하고 자신의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받게 되면 완전히 성자비방업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두 번째, 잘못을 범한 그 분이 직접 갈 수 없는 곳에 계시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갈 수 없는 사정과 함께 그분께 용서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용서받아도 비방업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세 번째, 잘못을 범한 그 분이 다른 곳에 잠시 머무시게 될 때는 그 분이 주로 계셨던 곳에 찾아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던 것과 직접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사정을 다른 분들에게 말하고 대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잘못을 범한 그 분이 자주 옮겨 다니는 분이면 어느 쪽에 계실지 예상되는 방향을 향해 예경을 한 후 마음속으로 용서를 구하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잘못을 범한 그 대상이 돌아가신 분이면 시신에 대고 “용서를 구합니다”라고 해도 되고, 화장을 해서 사리탑을 세운 것을 알게 됐다면 탑으로 가서 용서를 구해도 허물이 용서가 됩니다.
성자비방업은 허물이 매우 크지만 이렇게 각각에 맞게 합장하고 예경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구하는 것만으로 11가지 장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려면 좋은 스승과 도반이 필요합니다. 올바르게 수행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스승이나 도반 없이 혼자 수행하면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강가 강 근처에 마하와짜깔라Mahāvācakāla라는 재가자한 명이 있었습니다. 마하와짜깔라는 32가지 신체부분의 혐오스러움을 관조하는 더러움asubha 수행을 30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배우지 않고 수행했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 수행해도 표상조차 드러나지 않자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만 생기게 하는 법이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견해를 가진 마음으로 죽었을 때 강가강에 우사바usabha 크기의 악어 아귀로 태어났습니다. 이 악어 아귀는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깟차까 나루터로 난 길을 따라 소들이 60대의 수레에 돌을 싣고 왔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던 악어 아귀는 그 모습을 보고서 소와 수레에 실린 돌까지 모두 잡아먹었다고 합니다.(AA.ii.108)
이와 같이 아무리 열심히 수행하더라도 올바른 견해, 올바른 마음가짐이 없으면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악처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