쭐라웨달라숫따 21강-괴로운 느낌에서 적의 제거-일부 메모
우 또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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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쭐라웨달라숫따(교리문답의 짧은 경)” 법문(2021-4-24)참조.
교재 : 『쭐라웨달라숫따(M44)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0년 10월 23일 출간
모든 괴로운 느낌에서 적의를 제거하는 것은 아님
경전: 위사카 장자 질문 : 담마딘나 스님, 모든 괴로운 느낌에 대해 적의 잠재번뇌를 제거해야 합니까? 담마딘나 스님 대답 : 위사카 장자여, 이 가르침에서 비구가 다음과 같이 바라면서 숙고합니다. ‘성자는 지금 의지할 만한 거룩한 법에 이르러 살아간다. 나는 언제 그 의지할 만한 거룩한 법에 이르러 살아갈 것인가?’라고 숙고합니다. 이렇게 위없는 해탈에 대해 열망을 생기게 하고 있는 이에게, 그 열망을 조건으로 근심이 생깁니다. 그 근심을 기본으로 하여 얻은 아나함도로 적의를 제거합니다. 그 아나함도의 기본이 되는 근심에 대해서는 적의 잠재번뇌가 잠재하지 않습니다. |
설명:
‘나는 언제나 그 의지할 만한 거룩한 법에 이르러 살아갈 것인가?’라는 열망을 조건으로 근심이 생기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성스러운 도와 과를 한 달 내에, 두 달 내에, 혹은 석 달 내에 꼭 얻겠다.’라고 결심하고 기대하면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에게는, 그 바라는 날이 다가왔을 때 아직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했을 때, ‘다른 이들은 도와 과를 얻었는데, 나는 아직 얻지 못했구나. 나도 과연 얻기는 얻을 것인가?’라고 숙고하면서 마음의 불편함(근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근심에는 적의 잠재번뇌가 잠재하는 괴로운 느낌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법을 얻는 것과 생기는 이러한 근심은 제거해야할 법이 아니고, 오히려 의지해야할 법입니다. 이를 비세속적 정신적 괴로움이라고 하는데, 이런 법들은 의지해야할 만한 법이라는 것을 제석왕문경에도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그 근심을 의지해서 다시 열심히 수행해서 성자의 도와 과에 도달하게 되면, 적의 잠재번뇌를 제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세속적 느낌인 그런 종류의 근심, 출세간법을 얻는 것과 관련된 근심이라는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는 적의 잠재번뇌가 잠재하지 않고, 그렇게 잠재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에 생기는 적의 잠재번뇌도 제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성스러운 도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근심을 기본으로 하여 얻은 아나함도로 적의를 제거합니다. 그 아나함도의 기본이 되는 근심에 대해서는 적의 잠재번뇌가 잠재하지 않습니다.”가 됩니다.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근심 그 자체로는 적의를 제거할 수 없지만, 특별한 법을 얻으려고 했는데 얻지 못해서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아나함도를 얻고, 그렇게 얻은 아나함도로 적의를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비세속적인 괴로움(근심)을 의지해서 아라한이 된 일화”로 마하풋사데와 장로와 마하시와 장로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① 마하풋사데와 장로-오가며 실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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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 일창 담마간다 옮김, 불방일, 『마하시 사야도의 마하사띠빳타나숫따 대역』 pp.116~118
네 번째 비구는 갈 때와 올 때 둘 모두에 수행주제를 드는 이다. 첫 번째 비구처럼 밤과 낮에, 또한 탁발하러 갈 때도 수행주제를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탁발하고 돌아올 때도 끊임없이 수행주제에 마음 기울이고 관찰하면서 돌아오는 비구이다. 또한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온 밤, 온 낮, 어느 때도 수행주제를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는 비구이다.
이렇게 여러 일이 많아 수행주제를 놓치기 쉬운 탁발하러 갈 때나 돌아올 때조차도 수행주제를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오가며 실천하기gatapaccāgatika’128)라고 한다.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해서 불기 900년 즈음까지 실천의 교법이 성행했던 그 당시에 이 오가며 실천하기를 구족한 비구들의 모습을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29)
자신의 진실한 이익을 바라는 선남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출가하여 비구가 된 후 열 분, 스무 분, 서른 분, 마흔 분, 쉰 분, 백 분 등의 비구스님들과 함께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맹세를 한다. 어떻게 맹세를 하는가?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빚 때문에 출가한 것도 아니다. 왕의 위험 등이 두려워 출가한 것도 아니다. 생계유지가 힘들어서 출가한 것도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윤회윤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출가한 것이다. 하지만 출가한 것 정도만으로는 윤회윤전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윤회윤전의 근본 원인인 번뇌를 제거할 수 있어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가는 중에 생겨나는 번뇌는 바로 그 가는 중에 사라지도록 제어해야 한다.130)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생겨난 번뇌는 바로 그렇게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는 바로 그때 사라지도록 제어해야 한다.”라고 맹세를 한다.
이렇게 지내다가 가고 있는 중에 번뇌가 생겨난 비구는 가고 있는 바로 그때 번뇌를 제어한다. 제어할 수 없으면 선다. 앞에 가고 있는 그 비구가 서면 뒤에 따라오던 비구들도 선다. 그때 번뇌가 생겨난 그 비구는 ‘뒤에 따라오는 비구들도 그대의 망상을 알아버렸다. 이 생각은 그대에게 적당하지 않은 생각이다. 그대는 부끄럽지도 않은가’라는 등으로 스스로 경책하여 위빳사나를 실천한다. 이렇게 실천하여 성자의 지위에 이른 이들도 있다. 서 있으면서도 제어되지 않으면 다시 앉는다. 그때 뒤에 따라오던 비구들도 앉는 모습, 경책하는 모습 등은 앞과 동일하다.
이렇게 마음 기울이고 관찰하는 것으로 성자의 지위에 오를 수 없다 하더라도 생겨난 번뇌를 제거하여 수행주제를 계속해서 마음 기울이며 간다. 수행주제를 포함하지 않고서는 다리를 뻗지 않는다. 혹시 무심코 뻗거나 들거나 했다면, 원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 관찰하면서 다시 간다.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알린다까Āḷindaka 승원에서 지내던 마하풋사데와Mahāphussadeva 장로 등의 실천을 통해 설명해 놓았다.
마하풋사데와 장로는 19년 내내 오가며 실천하기를 행하면서 지냈다. 탁발하는 길 근처에서 밭을 갈고, 파종하고, 벼를 베고, 탈곡하는 등의 여러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장로가 계속해서 뒤로 돌아가서 다시 가는 모습을 보고서는 “저 장로스님은 뒤로 자꾸 돌아가서 다시 간다. 길을 잃어버리셨나?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셨나?”라고 서로서로 말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장로는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새김을 놓치지 않은 마음으로만 사문의 법을 노력하여 20년째에 아라한이 되었다.
128) 원) ‘gata 감’ + ‘paccāgata 옴에’ + ‘ika 끊임없이 생겨나는 실천’.
129) DA.i.168~170;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 pp.143~149 참조.
130) 원) 이치에 맞게 합리적으로 마음 기울이든 관찰을 해서든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② 마하시와 장로 - 대강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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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 일창 담마간다 옮김, 불방일,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pp.483~487
비세속적 괴로움
생멸의 지혜 등 특별한 위빳사나 지혜들에 도달한 이는 수행한 시간이 오래 되었을 때 ‘성자들만 아는 도와 과를 언제나 알 수 있을 것인가?’라고 숙고하기도 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수행을 하였어도 바라는 대로 성취되지가 않아 ‘도와 과를 이번 생에서는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슬퍼하기도 한다. 오랜 기간 수행하였어도 특별한 위빳사나 지혜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그러한 슬픔이 생겨난다.
위빳사나와 관련되어 생겨나는 이러한 슬픔을 비세속적 괴로움nirāmisa dukkha이라고 부른다. 출리에 바탕한 근심nekkhammassitadomanassa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슬픔이 생겨날 때마다 ‘슬픔, 슬픔’하며 새겨 알아야 한다. “nirāmisaṁ vā dukkhaṁ vedanaṁ vedayamāno nirāmisaṁ dukkhaṁ vedanaṁ vedayāmīti pajānāti(비세속적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는 ‘비세속적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라는 경전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비세속적 괴로운 느낌’이 생겨나는 모습을 「제석천왕 질문 경」의 주석에서 마하시와Mahāsiva 장로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마하시와 장로의 일화
마하시와 장로는 열여덟 종파의 스님들에게 경전을 강의하는 대강백이었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아라한이 된 스님들이 무려 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분들 중 한 스님이 자신의 공덕을 반조하고 나서 ‘나의 공덕이 한계를 헤아릴 수 없이 많구나. 나의 스승께서는 공덕이 얼마나 되실까?’라고 반조하였을 때 스승께서 아직 범부인 것을 알고는 ‘오, 나의 스승께서는 다른 이의 의지처는 되실지언정 당신 자신의 의지처는 아직 되지 못하셨구나.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드려야겠다.’라고 생각하고는 즉시 하늘을 날아서 마하시와 장로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절 근처에 다다르자 하늘에서 내려와 스승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라고 마하시와 장로가 물었다.
“축원법문 하나 배우려고 왔습니다.”라고 제자가 청하였다.
“빈 시간이 없네.”
“탁발 준비하려고 잠시 서 계실 때 묻겠습니다.”
“그때는 다른 비구가 질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네.”
“탁발하시러 마을에 들어가실 때 묻겠습니다.”
“그때도 다른 비구가 질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네.”
“그러면 가사를 고쳐 입으실 때, … 발우를 꺼내실 때, … 죽을 마시고 나셨을 때 묻겠습니다.”
“그때도 주석서를 배우려고 하는 여러 장로스님들이 질문하고 있네.”
이러한 방법으로 제자가 시간을 청하였지만 장로는 탁발하는 마을에서 나올 때, 마을에서 절로 돌아올 때, 공양을 마쳤을 때, 낮을 보내는 곳에서 지낼 때,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발을 씻을 때,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할 때, 세수하고 났을 때, 방 안에서 잠시 앉아 있을 때, 이러한 여러 시간에도 질문하는 이들이 다 약속이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제자가 “오, 스님! 세수하고 나서는 방 안에 들어가 잠자리를 따뜻하게 하도록 잠시 앉아서 수행할 정도의 시간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과 같은 생활이라면 스님께는 죽기 위한 시간도 없지 않겠습니까? 스님은 등받이 의자와 같습니다. 남의 의지처는 될지언정 자기 스스로의 의지처는 될 수 없습니다. 스님의 축원법문은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늘로 날아올라 떠나갔다.
그때 장로는 ‘이 스님이 나에게 온 것은 법문을 배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고 온 것이구나.’라고 알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발우와 가사 등을 지니고 수행하기 위해 절을 나섰다. ‘나 정도면 아라한 과를 증득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면 아라한이 되어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제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을 근처 숲에서 지내며 음력 6월469) 13일부터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보름날이 되어도 특별한 법을 얻지 못하였다.
장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오, 이틀, 사흘이면 아라한 과를 증득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왔는데 아직 얻지 못했구나. 어쩔 수 없지. 이 안거 3개월을 3일처럼 생각하고 수행하자. 안거가 끝나 해제하면 알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결제에 들어가 다시 수행하였다. 하지만 해제하였어도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하였고 장로는 다시 ‘오, 이틀, 사흘이면 일이 다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건만 석 달이 지나도 일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구나. 안거를 지낸 다른 많은 대중들은 아라한으로서 자자pavāraṇā 自恣를 행할 텐데’라고 생각했고 그러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서 ‘잠자리에 들어갈 때 발을 씻어야 하고, 기대고, 눕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침대를 치워 버렸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앉고, 서고, 가는 이 세 가지 자세로만 수행하며 지냈다. 하지만 그렇게 29년 동안 수행했어도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29년간 자자를 행하는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30년째 자자날이 되었어도 도와 과를 여전히 얻지 못하자 장로는 ‘오! 내가 수행한 지 어언 30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아라한 과를 증득하지 못했다. 맞구나. 나는 이번 생에서는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하는 이구나. 다른 대중들과 아라한으로서 자자를 행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또다시 매우 격렬한 슬픔이 생겨나 눈물을 흘렸다. 그때 근처에 있던 한 천녀가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는 목적으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울면서 서 있었다.
“이보시오. 누가 거기에서 울고 있소?”라고 장로가 물었다.
“저는 천녀입니다, 스님.”
“무엇 때문에 울고 있소?”
“스님께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우는 것으로도 도와 과를 증득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해 도와 과를 두 개, 세 개 얻을 요량으로 울고 있습니다, 스님”이라고 천녀가 대답했다.
그때 장로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오! 마하시와! 보아라! 천녀도 그대를 놀리고 있지 않는가? 그대의 이런 행동이 그대에게 여법한가?’라고 숙고하고 〔스스로를〕 훈계하고 나서 슬픔을 제거하고 위빳사나 수행을 차례대로 닦아가서 아라한과에 이르렀다.
부연 설명
이 마하시와 장로가 오랜 기간 수행을 해야만 했던 것은 경전지식이 많아서 자세한 방법으로 사유했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한다. 마하목갈라나 존자보다 사리뿟따 존자가 더 오랜 기간 수행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ettakaṁ kālaṁ vipassanāyā suciṇṇabhāvato ñāṇassa paripākaṁ gatattā470) = 그러한 30년의 시간 동안 위빳사나를 열심히 수행했기 때문에 지혜가 무르익어서 <<아라한 과를 증득했다>>”라고 그 이유를 밝혀 주는 복주서의 구절도 자세한 방법으로 닦아서 생기는 위빳사나 지혜가 성숙된 것으로만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아라한이 되게 하는 정도의 간략한 방법으로 닦아서 생기는 위빳사나 지혜가 성숙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471)
무엇 때문인가? 삼장에 그 정도로 해박한 특별한 이에게 간략한 방법으로 단지 도와 과를 증득하게만 하는 정도의 바라밀과 지혜는 수행하기 이전에 벌써 충분히 구족되어 있었다. ‘아직 구족되어 있지 않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보살인 수메다 행자에게도 단지 도와 과를 증득하게 할 정도의 제자로서의 바라밀과 지혜는 이미 구족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469) 안거결제를 시작하는 달.
470) DAṬ.ii.267.
471) 마하시와 장로가 간략한 방법으로 수행했다면 빠른 시일에 아라한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세한 방법으로 위빳사나를 수행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세한 방법의 위빳사나 지혜가 성숙되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말이다. 간략한 방법으로 수행했어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