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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마하시선원]쭐라웨달라숫따 22강-평온한 느낌에서 무명 제거-일부 메모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1.04.28|조회수103 목록 댓글 1

쭐라웨달라숫따 22강-평온한 느낌에서 무명 제거-일부 메모

우 또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이것은 강의 내용 일부의 메모를 편집한 것으로 스님들의 검증을 받지 않은 것이며, 주석과 첨부는 메모자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내거나 인터넷에 게시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강의 내용 전체는 한국마하시선원 카페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022

“쭐라웨달라숫따(교리문답의 짧은 경)” 법문(2021-4-25)참조.

 

교재 : 『쭐라웨달라숫따(M44)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0년 10월 23일 출간

 

모든 평온한 느낌에서 무명을 제거하는 것은 아님

경전:
위사카 장자 질문 : 모든 괴롭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명 잠재번뇌를 제거해야 합니까?
담마딘나 스님 대답 : 위사카 장자여, 이 가르침에서 비구는 제4선정에 이르기 전에 이미 몸의 행복이 제거됐기 때문에, 몸의 괴로움도 제거됐기 때문에, 즐거움(마음의 행복)과 근심(마음의 괴로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괴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평온 때문에 사띠(새김)가 완전히 청정한 제4선정에 도달하여 머뭅니다. 아라한도를 얻기 위한 기본이 되는 그 제4선정으로 무명을 제거합니다. 거기에는 무명 잠재번뇌가 잠재하지 않습니다.


 

설명:

비구가 제4선정에 입정해서 머물 때 다른 선정요소는 사라지고 평온한 느낌만 남아 있습니다. 그럴 때 원래 무명 잠재번뇌가 잠재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무명 잠재번뇌가 생길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그 경우에는 무명 잠재번뇌를 제거할 필요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도 수행자인 경우에 선정을 증득하면 자신이 얻은 선정에 대해서 탐욕 잠재번뇌 등이 잠재합니다.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도 성스러운 도과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채 선정만 증득한 수행자라면, 자신이 얻은 선정에 대해서 탐욕 잠재번뇌 등이 잠재합니다. 예를 들면 데와닷따가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아나함이라도 다음 생에 범천으로 한 번만 태어나니, 범천 생에 대한 존재 번뇌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라한이 되어야 제거되는 무명이나 자만이 제거되지 않고 잠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담마딘나 비구니 스님은 “어떤 제4선정의 평온한 느낌에는 무명 잠재번뇌가 잠재하지 않기 때문에 제거할 필요가 없고,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했는가? 아라한도에 이르려고 특별히 열심히 노력하는 수행자인 경우에는, 위빳사나의 기본이 되는 제4선정에 입정한 뒤, 그 선정에서 나와서 즉시 위빳사나 관찰을 통해서 아라한의 도에 이르러 아라한이 된다면, 그때 그 아라한도의 바탕이 되는 4선정의 평온한 느낌에는, 즉시 위빳사나 관찰을 하기 때문에, 무명이 생길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 종류의 제4선정의 평온한 느낌에 대해서는 잠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명 잠재번뇌를 제거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무명 잠재번뇌를 실제로 제거하는 것은 아라한도입니다. 하지만 그 아라한도를 얻는데 바탕이 되는 제4선정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제4선정의 평온한 느낌이 그 무명 잠재번뇌를 제거한다고 해도 틀리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도끼로 나무를 자를 때 실제로 나무를 자르는 것은 도끼날이지만 도끼 자루로 나무를 자른다고 해도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너무 깊이 생각하면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중의 하나가 선정의 경지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법문을 듣는 것으로 끝내기 바랍니다.

 

제4선정에 대해서 설명하면, 경전에서 “이미 몸의 행복이 제거됐기 때문에, 몸의 괴로움(고통)도 제거됐기 때문에, 즐거움(마음의 행복)과 근심(마음의 괴로움)이 사라졌기 때문에”라고 했습니다. 이는 제4선정에는 몸의 행복, 몸의 괴로움, 마음의 행복, 마음의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저림 뜨거움 아픔 등의 몸의 괴로움(고통)은 초선정의 근접삼매에서 사라졌고, 마음의 괴로움(근심)은 제2선정의 근접삼매에서 사라졌고, 몸의 행복함은 제3선정의 근접삼매에서, 마음의 행복함(즐거움)은 제4선정의 근접삼매에서 사라졌습니다.

 

선정을 위빳사나 지혜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초선정 ≒ 명상의 지혜(초선 5요소: 사유 고찰 희열 행복 집중)

제2선정 ≒ 생멸의 지혜 여린 부분(이선정 3요소: 희열 행복 집중)

제3선정 ≒ 생멸의 지혜 성숙한 부분(삼선정 2요소: 행복 집중)

제4선정 ≒ 소멸의 지혜부터 형성평온의 지혜에서 가장 분명(사선정 2요소: 평온 집중)

 

희열과 몸의 행복함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제3선정의 근접삼매가 생기기 전에는 기쁨과 격앙인 희열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법인 희열 때문에 수승한 마음생성물질이 생깁니다. 그렇게 수승한 마음생성물질 때문에 몸에서도 좋은 감촉들이 생기기 때문에 특별히 몸과 관련된 행복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희열을 버리고 제3선정을 얻으려고 계속 노력하다가 힘이 좋은 삼선정의 근접삼매가 생길 때, 희열이 사라지므로 몸의 행복이 사라집니다. 제4선정이 되면 마음의 행복함도 사라지고 평온한 느낌과만 결합합니다.

 

형성평온의 지혜에 이르러 어떤 병이 저절로 낫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괴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평온 때문에 사띠(새김)가 완전히 청정한 제4선정”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평온은 느낌으로서의 평온이 아닙니다. 같이 생기는 법들이 서로 균형을 맞추도록 도움을 주는 중립이라는 마음부수입니다. 이 중립이 믿음과 통찰지의 균형을 맞춰주고, 정진과 삼매도 균형을 맞춰줍니다.

 

과거의 바라밀에 의해서 신통(타심통)이 생긴 사례는 첨부된 “마띠까마따 청신녀 일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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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마띠까마따 청신녀 일화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023

 

비구 일창 담마간다 옮김, 불방일, 『마하시 사야도의 헤마와따숫따 법문』, pp.212~226

 

타심통지

 

타심통지cetopariyañāṇa란 다른 이의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도 제4선정과 결합한 특별한 앎과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증득한 이가 다른 이의 생각을 숙고하면 지난 일주일 동안 일어났던 생각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내에 일어날 생각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생겨나고 있는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은 특별히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111)

 

 

이러한 타심통지를 증득한 이와 함께 지내는 것은 조금 부담이 될 것입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다른 이의 생각을 아는 이와 함께 지내면 불선업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내용과 관련해 마띠까마따Mātikamātā 노청신녀의 일화를 설명하겠습니다.

 

마띠까마따 청신녀 일화

 

언젠가 부처님께서 사왓티 성의 제따와나 정사에 머무실 때 60명의 비구가 부처님으로부터 수행주제를 받고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렇게 찾다가 마띠까Mātika라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그 마을에는 마띠까마따Mātikamātā라는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마을 촌장의 모친이었습니다. 마띠까마따 노청신녀는 마을에 도착한 60명의 비구에게 이 마을에서 안거를 지내달라고 청하며 머무를 정사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60명의 비구는 그 정사에서 마을을 의지하여 안거를 보내게 됐습니다.

 

어느 날, 그 비구들은 한데 모여서 다음과 같이 서로 훈계했습니다.

Āvuso, amhehi pamādacāraṁ carituṁ na vaṭṭati. Amhākañhi sakagehaṁ viya aṭṭha mahānirayā vivaṭadvārāyeva, dharamānakabuddhassa kho pana santike kammaṭṭhānaṁ gahetvā mayaṁ āgatā, buddhā ca nāma padānupadikaṁ vicarantenāpi saṭhena ārādhetuṁ na sakkā, yathājjhāsayeneva ārādhetuṁ sakkā, appamattā hotha, dvīhi ekaṭṭhāne na ṭhātabbaṁ, na nisīditabbaṁ. (DhpA.i.184)

 

【대역】

Āvuso도반들이여, amhehi우리가 pamādacāraṁ carituṁ방일하게 지내는 것은 na vaṭṭati적당하지 않습니다. hi맞습니다. amhākaṁ우리에게는 aṭṭha mahānirayā팔대지옥이; 여덟 개의 대지옥이 sakagehaṁ viya자신들의 집처럼 vivaṭadvārāyeva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습니다. 《kho pana더욱이》 mayaṁ우리는 dharamānakabuddhassa분명히 현존하시는 부처님의 santike면전에서 kammaṭṭhānaṁ gahetvā수행주제를 받고서 āgatā왔습니다. buddhā ca nāma부처님이라고 하시는 분도 saṭhena정직하지 않고 교활한 이가 padānupadikaṁ vicarantenāpi뒤를 졸졸 따라다니더라도 ārādhetuṁ na sakkā흡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yathājjhāsayeneva원하시는 대로 실천하는 이만이 ārādhetuṁ sakkā흡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appamattā hotha방일하지 마십시오. ekaṭṭhāne한 장소에 dvīhi두 명이 na ṭhātabbaṁ서 있어서도 안 됩니다. na nisīditabbaṁ앉아 있어서도 안 됩니다.

 

비구들은 이와 같이 훈계와 맹세를 하고 실천하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날, 마띠까마따 노청신녀가 버터와 기름, 당밀 등 보시물을 가지고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저녁 무렵 정사로 왔습니다. 그런데 비구들이 보이지 않자 노청신녀는 “스님들은 어디에 가셨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아는 이들이 스님들은 저녁을 청정하게 보내는 곳이나 낮을 청정하게 보내는 곳에서 지낸다는 사실, 종을 치면 모두가 모일 거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노청신녀는 종을 치게 했습니다. 종소리를 들은 비구들은 어느 누가 아프거나 어떤 문제가 생겨서 종을 쳤을 거라고 생각하고서 각자 지내던 곳에서 한 사람씩 나왔습니다.

 

그렇게 뿔뿔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오해한 노청신녀는 “스님들, 다투기라도 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비구들이 다투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노청신녀는 “그렇다면 저희 집에 탁발하러 올 때처럼 같이 오지 않고 왜 따로따로 오십니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스님들은 “청신녀님, 우리는 사문의 법samaṇadhamma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자 다른 곳에서 한 스님씩 지내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사문의 법이란 혼자서 노력하면 더욱 좋습니다. 삼매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도 쉽게 생겨납니다. 하지만 지금 수행센터에서는 장소가 충분치 못해 함께 앉아서 적당한 대로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사문의 법’이라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마띠까마따 노청신녀는 사문의 법이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머리카락이나 몸털 등 32가지 신체부분dvattiṁsākāra을 외우면서 자신의 몸에 대해 다함이나 무너짐이 드러나도록 마음 기울이는 것입니다, 청신녀님”이라고 비구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마띠까마따 노청신녀는 “그 사문의 법은 사문인 출가자만 노력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처럼 재가자들이 노력해도 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누구든지 노력할 수 있다고 비구들이 말해 주자 노청신녀는 “존자시여, 그 사문의 법을 저도 노력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비구들은 수행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가르쳐 주는 데 한두 시간 이상 걸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내용에도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일부 수행 지도자는 아비담마 성품들, 무더기, 감각장소, 요소, 진리, 연기를 배우고 이해한 뒤라야 수행할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하고자 하는 이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는 말입니다.

 

마띠까마따 노청신녀가 수행했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이 노청신녀는 승가에서 배운 그대로 자신의 집에서만 수행했습니다. 며칠 동안 수행했는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스승인 비구들이 특별한 법을 얻기 전에 노청신녀가 먼저 법을 증득했습니다. 아나함도과까지 증득했습니다. 아나함도를 증득하는 것과 동시에 네 가지 분석지paṭisambhidāñāṇa·四無碍解도 증득했습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특별한 지혜인 여러 명지도 증득했습니다. 그래서 마띠까마따 노청신녀는 자신의 스승인 스님들이 자신이 얻은 이러한 법을 언제 증득했는지 신통으로 살펴보았고, 스님들은 선정삼매와 위빳사나 지혜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무엇 때문일까?’라고 숙고했을 때 음식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적당한 죽과 반찬, 공양을 충분히 마련해 올렸습니다. 적당한 음식을 공양할 수 있게 되자 60명의 비구는 그 안거 안에 아라한도과에 도달하여 아라한이 됐다고 합니다. 이것을 근거로 살펴본다면 적당한 음식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112) 하지만 지금 미얀마의 청신사나 청신녀들의 믿음이 매우 좋아서 공양이나 음식이 부족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수행자의 노력이 부족할 뿐입니다.

 

그 60명의 비구는 안거가 끝나고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러 떠났습니다. 제따와나 정사에 도착했을 때 그 비구들은 마띠까마따 노청신녀의 덕목과 은혜를 칭송하며 말했습니다. 노청신녀가 승가의 의향을 잘 알아서 적당한 밥과 반찬을 준비하여 올렸다는 사실, 그렇게 올린 음식을 공양하여 자신들에게 특별한 삼매와 특별한 지혜가 향상됐다는 사실 등을 설명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비구에게 마띠까 마을의 숲속 정사에 가서 수행하고 싶은 열망이 생겨났습니다. 그 비구는 부처님께 수행주제를 청한 뒤 그 숲속 정사로 떠났습니다.

 

생각이 많은 비구

 

숲속 정사에 도착했을 때 그 비구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이 정사의 창건주 청신녀는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안다고 한다. 나는 오늘 유행에서 갓 도착했다. 그래서 정사의 쓰레기를 치우고 청소할 수가 없다. 창건주 청신녀가 청소를 위해 한 사람을 보내 주면 좋겠다.’

 

마띠까마따 노청신녀는 집에서 숙고하다가 그 사실을 알고 정사 청소를 위해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뒤 비구는 목이 말라서 ‘달콤한 과즙을 보내 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청신녀는 보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에는 ‘고기무침과 부드러운 죽을 보내 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청신녀는 이번에도 비구의 생각대로 보내 주었습니다. 죽을 마신 뒤에는 ‘이러이러한 과자나 빵을 보내 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청신녀는 비구의 생각대로 바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비구는 ‘이 청신녀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보내 준다. 이 노청신녀와 만나고 싶구나. 여러 좋은 음식을 준비해서 하인에게 들게 해서 직접 오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창건주 노청신녀는 ‘오, 나의 아들 스님이113) 나와 만나고 싶어 하는 구나. 내가 직접 오기를 바라는구나’라고 알고서 하인에게 먹을 것을 들게 해서 직접 정사로 갔습니다. 그리고 비구에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공양을 마쳤을 때 그 비구는 “그대가 마띠까마따 청신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 스님.”

“청신녀는 다른 이의 마음을 압니까?”

“그것을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아들 스님.”

“제가 생각하는 모두를 청신녀가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비구들은 많습니다, 아들 스님”이라고 청신녀는 우회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다른 이에 대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 청신녀에게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청신녀는 “그렇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긍정하지 않고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이들은 이렇게 할 수 있지요”라고 방편으로 둘러말했다고 합니다. 특별한 법을 진실로 얻은 성자들은 자신이 얻은 특별한 법을 다른 이들도 얻게 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덕목을 직접 밝히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성자들이 갖춘 소욕의 덕목입니다. 어찌할 수 없어 말을 해야만 할 때도 이렇게 방편을 통해서만 둘러서 말하곤 합니다. 마띠까마따 노청신녀도 둘러말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그 비구는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이 노청신녀가 보시한 정사에서 지내는 것은 매우 부담스럽다. 범부라면 좋은 생각이나 훌륭한 생각도 하지만 나쁜 생각이나 저열한 생각도 하게 된다. 만약 내가 나쁜 생각을 하면 물건을 훔친 도둑이 상투를 잡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처럼 창피스럽게 비난과 비방을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서 두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청신녀님”이라고 비구가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아들 스님?”

“스승이신 부처님께 가려 합니다. 청신녀님.”

“이곳에서 그냥 지내십시오, 아들 스님.”

“지내지 않겠습니다, 청신녀님”이라고 말하고 그 비구는 억지로 떠났습니다. 몹시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두려워할 만합니다. 그 비구는 생각이 많았고, 적당하지 않은 생각을 하면 곤란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 도착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왜 돌아왔는가?”라고 물으셨습니다. 비구는 도저히 그곳에서 지낼 용기가 없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지낼 용기가 없었는가?”

“그곳의 마띠까마따라는 창건주 여신도는 제가 생각할 때마다 계속해서 그 생각을 모두 알았습니다. 만약 적당하지 않은 것을 제가 생각하기라도 한다면 물건을 훔치다 상투를 잡힌 도둑처럼 될 것 같아 두려워서 도저히 지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에게 적당한 장소를 숙고해 보시고는 바로 그 장소만이 제일 적당한 장소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맞습니다. 그 비구는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아는 이가 있는 장소라야 생각이 적어져 삼매와 지혜가 쉽게 생길 것입니다. 지금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들도 마음속 생각을 아는 수행지도자 앞이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일부 수행자는 “망상을 하지 마십시오. 단지 새기기만 하십시오”라고 말해도 스승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망상을 많이 합니다. 일부는 망상 정도가 아니라 방만하게 서로 말까지 하며 지내기도 합니다. 수행지도 스승이 눈치를 채고 묻고 조사해 볼 때라야 그러한 행위의 일각 정도가 드러납니다. 확실하게 알고서 질문하며 조사한다면 감히 그렇게 망상하거나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비구도 망상과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아는 그 노청신녀가 있는 곳이 제일 적당한 장소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장소로 다시 돌아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비구는 도저히 다시 갈 수 없다고 거듭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마음 하나만 잘 보호하면 된다, 마음을 관찰하고 새겨 보호하고 있으면 전혀 걱정할 일이 없다’는 내용을 설하시면서 마음 거듭관찰cittānupassanā과 관련된 게송 하나를 설해 주셨습니다.

 

Dunniggahassa lahuno, yatthakāmanipātino;

Cittassa damatho sādhu, cittaṁ dantaṁ sukhāvahaṁ. (Dhp.35)

【해석】

다스리기 어렵고 매우 빠르며

좋아하는 곳에 이리저리 치달리는

마음의 길들임은 훌륭하나니

길들여진 마음은 행복을 가져오네.

 

【대역】

Dunniggahassa붙잡기가 매우 어려운; 이성이라 불리는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대상들에 가지 않게 붙잡기가 매우 어려운, lahuno매우 빨리 생겨나는; 빗방울의 물거품이 매우 빨리 사라지듯 생멸이 매우 빠른, yatthakāmanipātino떨어지는 대상들에 마음대로 치달리는; 나이와 성품을 고려하지 않고 원한다면 모든 대상에 마음대로 치달리는 cittassa아는 성품 그 마음을 damatho길들이고 다스리는 것은 sādhu매우 훌륭하다; 지금의 위험을 물리치고 나중의 생을 위해 매우 훌륭하다. 《어떻게 좋은가 하면》 dantaṁ길들이고 다스리면; 길들이고 다스려진 cittaṁ그 마음은 sukhāvahaṁ행복을 가져다준다; 사람·천신 두 가지의 부귀영화 누리면서 열반까지 행복을 가져다준다.

 

먼저 “dunniggahassa붙잡기가 매우 어려운”이란 구절을 살펴봅시다. 마음이라는 것은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붙잡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것은 생각하지 마라’라고 해도 그러한 것을 거듭 함부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마음은 때려서 훈계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스리기가 어렵다’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은 “lahuno매우 빨리 생겨나는”이란 구절입니다. 마음은 매우 빠릅니다. 관찰을 갓 시작했을 때는 그 마음을 따라잡아 새기지 못합니다. 여기서 새기면 저기에 도달해버리고 저기서 새기면 여기로 다시 돌아와 버립니다. 휙휙 매우 빠르게 생겨납니다.

 

그리고 “yatthakāmanipātino떨어지는 대상들에 마음대로 치달리는”이란 구절에서 마음이란 몸처럼 가로막거나 제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방 안에 가두고 열쇠로 채워버리면 어디로 갈 수 없지만 마음은 그렇게 가두거나 제지할 수 없습니다. 수행센터에 있지만 마음은 밖으로 달아납니다. 시내로도 달아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상 쪽으로 계속 달아납니다.

 

마지막으로 “dantaṁ길들이고 다스려진 cittaṁ그 마음은 sukhāvahaṁ행복을 가져다준다”라는 구절은 표현 그대입니다. 마음을 다스려서 잘 길들인다면 그렇게 잘 길들여진 마음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행복을 얻게 해 줍니다. 그러니 마음을 잘 길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괴롭기를 바라는 이는 없습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하게 하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그 행위가 바로 마음을 잘 길들이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는 것을 통해서도 다스려야 합니다. 합리적 마음기울임yonisomanasikāra을 통해 올바르게 숙고하고 마음 기울여서도 다스려야 합니다.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도 다스려야 합니다. 조금 길들여지면 행복을 조금 가져다줄 것입니다. 많이 길들여지면 행복을 많이 가져다줄 것입니다. 완벽하게 길들여지면 행복을 완벽하게 가져다줄 것입니다.

 

최소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공경할 수 있을 정도로, 삼귀의를 수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길들인다면 사람의 생이나 천상의 생에 태어나 사람의 행복이나 천상의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마음을 훈계하지 못하고 길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예경하지 못합니다. 가르침과 승가도 공경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이들의 마음은 전혀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경gārava 선업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삼귀의 선업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선업과 관련된 이익과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허물을 범한다면 그 불선업으로 사악도에 떨어져 고통을 당합니다.

 

삼귀의를 수지하는 것 외에 오계 중 한두 가지라도 수지하여 실천할 수 있으면 마음을 더 잘 길들일 수 있습니다. 계 수련 다섯 가지를 모두 실천할 수 있으면 마음은 더욱 잘 길들여질 것입니다. 보시 선업을 할 수 있으면 역시 잘 길들여집니다. 자신의 필수품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잘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계 선업이나 보시 선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길들여지면 그 마음은 사람의 행복과 천상의 행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수행으로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 두 가지 중 사마타 수행으로 길들이면 색계탄생지나 무색계탄생지에 태어나 몇 대겁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길들이면 아라한도과까지 도달하여 제일 좋고 제일 거룩한 열반의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게송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위빳사나로 훈계하라는 내용입니다. 새김확립 네 가지 중 마음 거듭관찰cittānupassanā에 따라 마음이 생겨날 때마다 계속 관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겨날 때마다 계속 마음을 관찰하여 단속하고 있으면 적당하지 않은 마음은 생겨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가끔 새김을 놓쳐 적당하지 않은 마음이 생겨나더라도 관찰하여 제거하기 때문에 즉시 사라져버립니다.

 

하지만 처음 수행을 시작한 이는 한 번 관찰하는 것만으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 세 번 사라질 때까지 관찰해야 합니다. 마음은 제압하고 훈계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매우 빠릅니다. 자신이 원하는 곳이나 대상 쪽으로 휙휙 달아납니다. 지금 수행하고 있는 여러분이 제일 잘 알 것입니다. 그렇게 빠르게 자신이 가고 싶은 대상으로 달아나버리는 마음을 관찰해서 제압할 수 있도록 훈계하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이것을 쉽게 기억하도록 게송으로 만들었습니다.

 

잡기곤란 매우 빨라 원하는 곳 치달리는

나쁜 의식 거친 마음 단속관찰 훈계하여

길들여진 그 마음은 많은 행복 가져오네.

 

이 게송에서 “잡기곤란 매우빨라”는 “dunniggahassa lahuno”의 번역입니다. “원하는곳 치달리는”은 “yatthakāmanipātino”의 번역입니다. “나쁜의식 거친마음”은 “cittassa”, 즉 마음이라는 것을 자세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훈계해야 할 마음이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다스리기 힘들다,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치달린다’라고 했기 때문에 나쁘고 거친 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단속관찰”이라는 표현과 운율을 맞추도록114) 그 마음과 의식을 “나쁘다, 거칠다”라고 첨가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damatho 길들인다”라는 것도 여기서는 나쁜 마음이 생겨날 때마다 그것을 단속하여 관찰함으로써 길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damatho sādhu”라는 구절에 따라 “단속관찰 훈계하여”라고 게송으로 표현했습니다. “길들여진 그마음은 많은행복 가져오네”라는 표현은 “cittaṁ마음은 dantaṁ길들여서 잘 다스려지면 sukhāvahaṁ행복을 가져다준다”라는 구절에 따른 것입니다.

 

이 게송에 따라 “마음을 제압하기가 어렵다”라는 것을 지금 관찰하고 있는 수행자는 직접 경험으로 분명히 압니다. “빠르다”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마음이 원하는 곳, 대상 쪽으로 달아나버린다”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은 적당하다. 적당하지 않다’라고 마음은 숙고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적당하지 않은 것도 계속 생각합니다. 이것은 수행하지 않는, 관찰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분명합니다. 자신의 나이나 위치에 걸맞지 않은 것을 함부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만 달아나는 거친 마음이 얌전해지도록 잘 단속하고 훈계해야 합니다.

 

​훈계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마음은 적당하지 않은 것을 생각합니다. 비방하거나 죽이라고 부추기기도 합니다. 도둑질과 약탈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감각욕망 대상을 범할 생각도 합니다. 그러한 마음은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줍니다. 지옥의 고통도 줍니다. 앞서 설명했던 아귀의 고통도 줍니다.

 

그래서 “cittena nīyati loko 마음이 중생이라는 세상을 이끈다”(S.i.36)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훌륭한 마음은 좋은 곳, 좋은 탄생지, 좋은 생으로 이끕니다. 나쁜 마음은 좋지 않은 곳, 좋지 않은 탄생지, 좋지 않은 생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그렇게 나쁜 곳으로 이끄는 마음을 잘 길들이도록 관찰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훈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나쁜의식 거친마음 단속관찰 훈계하여”라고 게송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부푼다, 꺼진다; 앉음; 닿음> 등으로 관찰하고 있다가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버리면 관찰하여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관찰하여 제거할수록 마음은 부드럽고 미세해집니다. 자신이 두고자 하는 곳에 둘 수 있습니다. 형성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ñāṇa에 도달하면 그 마음의 부드러운 모습, 미세한 모습, 길들여진 모습이 매우 분명합니다. 그렇게 부드럽고 미세하게 잘 길들여지면 머지않아 수다원도의 행복, 수다원과의 행복에도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나쁜의식 거친마음 단속관찰 훈계하여 길들여진 그마음은 많은행복 가져오네”라고 게송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게송을 다시 독송해 봅시다.

 

(*그림 출처: https://tipitaka.fandom.com/wiki/Dhammapada_Verse_35_-_Annatarabhikkhu_Vatthu)

 

Dunniggahassa lahuno, yatthakāmanipātino;

Cittassa damatho sādhu, cittaṁ dantaṁ sukhāvahaṁ. (Dhp.35)

 

【해석】

다스리기 어렵고 매우 빠르며

좋아하는 곳에 이리저리 치달리는

마음의 길들임은 훌륭하나니

길들여진 마음은 행복을 가져오네.

 

마띠까마따 노청신녀의 정사로 갈 용기가 없던 비구에게 부처님께서는 이 게송 보호주로 용기라는 약을 처방해 주셨습니다. 그 비구는 부처님께서 훈계하신 대로 부처님을 떠난 뒤부터 계속해서 마음이 생겨날 때마다 관찰해 나갔습니다. 다른 곳으로 달아나더라도 그 마음을 관찰하여 제거했습니다. 마띠까 마을의 숲속 정사에 도착했을 때도 자신의 마음만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이전처럼 생각이나 망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띠까마따 노청신녀도 신통으로 그 비구가 돌아오는 것을 보았고, 적당한 음식 등을 마련해서 올렸습니다. 그 비구는 ‘katipāhenava’, 4,5일 정도, 며칠 사이에 아라한과에 이르러 아라한이 됐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타심통지cetopariyañāṇa는 부처님뿐만 아니라 마띠까마따라는 노청신녀도 얻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그 노청신녀를 연유로 적당하지 않은 생각을 제거하여 특별한 법을 얻었다는 사실, 이 두 가지입니다.

 

주해

111) 『청정도론』 제2권, pp.351~355 참조.

112) 음식과 더불어 장소도 강한 의지조건 중의 하나이다.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빳타나-조건의 개요와 상설』, p.99 참조.

113) 주석서 원문에는 ‘mama putto 나의 아들이’라고 표현됐다.(DhpA.i.187) 스님에 대한 친근함으로 당시나 지금이나 이렇게 신도가 스님을 부르기도 한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나의 아들, 딸’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114) 미얀마어 원문으로는 “윈냐나뚠 세이떠얀고우 사운판슈예이”로 표현했다. 여기서 ‘사운판’의 ‘판’이라는 단어와 운율을 맞추도록 ‘뚠(나쁜)’, ‘떠얀(거친)’이라는 단어를 첨가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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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1.04.29 사두사두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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