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관한 법문 1강-열반-일부 메모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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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15)참조.
교재 : 『열반에 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1년 4월 5일 출간)
열반
마하시 사야도의 “열반에 관한 법문”입니다.
열반(nibbhāna)은 “적정한 곳, 적정하게 하는 성품, 적정한 성품”을 말합니다. 무엇이 적정(고요)한가? 번뇌 윤전(굴레), 업 윤전, 과보 윤전이라는 윤전의 고통이 사라져서 없는, 적정한 성품입니다. 계 삼매 통찰지를 잘 닦으면 끝에 가서는 확실히 열반에 도달합니다. (교재 3쪽 참조.)
열반의 의미는 적정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남김없이 제거되어서 없는 고요한 것”을 적정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적정한 곳, 적정하게 하는 성품, 적정한 성품입니다. 무엇이 제거되었는가 하면, 번뇌 윤전, 업 윤전, 과보 윤전이라는 윤회의 고통이 사라져서 없는 적정한 성품입니다.
번뇌 윤전은 무명, 갈애, 취착인데 쉽게 말하면 번뇌입니다. 업 윤전은 형성과 업존재, 쉽게 말하면 선업과 불선업입니다. 과보 윤전은 선업과 불선업의 결과인 의식, 정신물질, 여섯 감각장소, 접촉, 느낌을 말합니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과보 윤전은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 맡을 때마다 먹어서 알 때마다 닿아서 알 때마다 생각해서 알 때마다, 분명하게 생기고 있는 물질 정신법들을 말합니다. 그런 물질 정신법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성품, 혹은 잘못 아는 성품이 무명입니다. 어떻게 잘못 아는가? “보아서 아는 것은 ‘나’야,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라고 아는 것이 무명입니다. 혹은 “보는 것, 보이는 것, 듣는 것, 들리는 것은 모두 항상한 것이고 좋은 것이고 행복한 것이야.”라고 잘못 아는 것도 무명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나 들리는 것을 항상하고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즐기고 거머쥡니다. 그것을 갈애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집착하게 되면 취착이라고 합니다. 갈망하는 정도는 갈애이고, 그것을 꼭 가지려고 하고 이미 가진 것을 도저히 놓지 못하고 심하게 집착하는 것을 취착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좋아하고 즐겨서 집착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행합니다. 애씁니다. 이것이 바로 형성, 업존재라는 업 윤전입니다. 그 업 때문에 죽은 바로 다음에 재생연결 마음을 시작으로 새로운 생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생에서 제일 먼저 의식 정신물질 여섯 감각장소 접촉 느낌이라는 과보법들이 생깁니다. 이것을 과보 윤전이라고 합니다. 이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거나 들을 때 생기는 과보로서의 정신물질법들을 말합니다.
보는 것 듣는 것들에 생기는 과보 윤전에 해당되는 물질정신에 의지해서 무명 등의 번뇌 윤전이 다시 생깁니다. 번뇌 윤전 때문에 다시 업 윤전이 생기고, 그 업 윤전 때문에 새로운 생의 결과법인 과보 윤전도 다시 생깁니다. 이런 식으로 세 가지 윤전(굴레)이 거듭해서 돌고 돌아서 생깁니다. 그래서 굴레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를 끊는 방법은 위빳사나 관찰인데) 관찰로 끊지 못하면 계속해서, 수행자가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세 가지 굴레가 계속 돌아갑니다.
계속 회전하고 있을 때, 위빳사나 관찰을 통해서 지혜의 위력으로 성스러운 도가 생기고, 그 성스러운 도로 열반을 깨달으면(열반을 대상으로 하면), 윤회 윤전이 더 이상 생기지 못합니다. 윤회 윤전이 끊어져서, 번뇌 윤전이 없어지면, 업도 생기지 못합니다. 아라한이 되면, 생긴 업도 과보를 생기게 하지 못합니다. 업이 끊어지기 때문에 아라한에게는 완전 열반(반열반)에 든 뒤에 새로운 생의 물질정신이라는 결과법들이 생기지 못하고 완전히 없어집니다. 이것은 아라한 도로 열반을 체험해서 적정한 모습입니다.
지금 설명한 것을 근거로, 열반(닙바나)라는 단어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윤회 윤전의 고통이 적멸한 곳이기 때문에 열반이라고 한다. 또는 이 적정한 것을 아라한도를 통해서 얻으면 모든 윤전 고통이 적멸한다. 그렇게 적멸하게 하는 원인이므로 열반이라고 한다.”
정리하면, 첫 번째로 열반이라는 곳에 도달하면(실제로는 경험하는 것임) 모든 윤회 윤전의 고통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 적정한 곳을 열반이라고 하고, 두 번째는 그것을 증득하면 고통이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 열반이라고 단어 분석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엄밀한 의미가 아니라 방편으로 말한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로 단어 분석을 하면, 적정함이 열반입니다. 아라한도의 위력으로 윤회 윤전의 고통이 더 이상 생기지 못하고 없어진 성품인 적정, 그것이 바로 열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열반이란 것은 ‘적정함 바로 그것이구나.’라고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이 적정한가? 무엇이 완전히 없어졌는가 하면 번뇌 윤전, 업 윤전, 과보 윤전 세 가지 윤회 윤전의 고통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의 특성을 산띠(적정)라고 합니다. 산띠도 완전히 없어져서 고요한 것 즉 적정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게 여러 주석서에서 열반의 특성은 적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생기고 있는 윤회 윤전의 고통이 생긴 다음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기지 못한 채 완전히 끊어지고 소멸해진 것, 적정해진 성품이라는 것이 여기서 원래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멸한 성품이야말로 제일 좋고 제일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배경(라따나숫따) - 아라한의 덕목을 칭송하는 게송(교재 4쪽)
이전 것도 다했고 새로운 것 안 생기네.
나중의 생에 대해 집착마음 없다네.
종자도 다했고 원함(찬다)도 끊어졌네.
등불이 꺼지듯이 현자(아라한)들은 적정하네.
설명: 아라한들에게 이전의 업도 아라한 도과의 위력으로 다해 버렸다. 새로운 생을 생기게 하는 새로운 업도 없다. 아라한들은 나중의 생에 대해 애착하는 마음이 없다. 아라한들은 원함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생에 태어나는 씨앗이 다해 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생의 정신물질 무더기가 생기지 않아 적정하다. 마치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아라한들도 적정하다.
아라한은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위빳사나 지혜가 차례차례 향상되어 아라한 도과에 도달하여 모든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성자입니다.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번뇌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업들도 새로운 생의 결과를 더 이상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 것(업)도 다했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번뇌가 없기 때문에 불선업이나 악업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아라한도 선행을 하기는 합니다. 법을 설하고, 타인이 설하는 법문도 듣고, 부처님께 예경올리고, 법랍이 높은 비구에게 예경을 올리고, 남은 음식이나 가사나 필수품을 다른 승가에게 보시도 하고, 계도 공손하게 잘 지키고, 사마타 위빳사나 수행도 (성취할 도는 없지만) 계속합니다. 그렇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행을 합니다. 그러나 번뇌라는 짝이 없기 때문에 그런 행위가 과보를 줄 수 있는 업이 되지 못하고 단지 작용으로만 끝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 안 생기네.”라고 한 것입니다.
선행은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보시할 수 있을 때 보시를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악행을 하지 않기란 어렵습니다. 범부는 선행을 하지 않으면 탐진치 자만 사견 등의 불선법들이 계속 부추기기 때문에 그때마다 불선업을 거침없이 행하여 사악도에 떨어집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먼저 계를 지키고 삼매와 통찰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해서 선정이 생기면 그 선정을 바탕으로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되고, 선정이 생길 정도로 사마타 수행을 할 수 없다면, 대념처경의 방법에 따라 6문에서 생기는 정신 물질 현상을 계속 관찰하면 됩니다. 그렇게 관찰하는 것을 위빳사나라고 합니다.
6문에서 생기는 분명한 대상이 생길 때마다 모두 관찰하지 못하는 초보 수행자는 분명한 육체적인 현상 하나를 기본으로 삼아서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가고 있을 때에는 가는 움직임을 기본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좋고,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는 상태를 관찰하면 됩니다. 그때 다른 현상이 나타나면 그 분명한 현상을 관찰해야 됩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앉아 있을 때 그냥 앉아 있는 상태보다 더욱 분명한 배가 부풀고 꺼지는 것을 먼저 관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부풂 꺼짐을 잘 관찰하다가 중간에 생각이나 망상이 분명하게 나타나면 그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혹은 저림, 뜨거움, 아픔 등의 느낌들이 분명하면 그것들을 관찰한 다음에 부풂 꺼짐으로 돌아옵니다. 봄 들림 좋아함 싫어함 등도 분명하면 분명하게 드러날 때마다 관찰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삼매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납니다. “부푼다, 꺼진다.” 다섯 번 정도 하면 다른 곳으로 달아나기도 합니다. 누구를 만나고, 시장가고 하는 식으로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납니다. 그런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실망하지 말고 생각을 관찰해서 알 수 있도록 노력하기만 하면 됩니다. “달아남, 달아남, 망상함, 망상함, 생각함, 생각함” 등으로 관찰하면 됩니다.
그렇게 잘 관찰해 나가서 삼매의 힘이 좋아지면 더 이상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습니다. “부푼다, 꺼진다.” 관찰 대상에만 마음이 착착 잘 붙어 있습니다. 가끔 생각이 다른 곳으로 달아난다고 해도 그 생각을 즉시 관찰해서 압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관찰해서 알고, 알자마자 바로 생각이 멈추고, 멈추자마다 “부푼다, 꺼진다.”로 계속 관찰하는 대로 알아갑니다. 이때는 앞의 마음도 관찰하는 마음, 그 다음 마음도 관찰하는 마음,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만 계속해서 깨끗하게 이어지는데, 이것을 “마음 청정”이 생겼다고 합니다. 마음청정이 생기도록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관찰해서 알게 되는 대상과, 관찰해서 아는 정신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물질 대상이라면 “관찰해서 알게 되는 물질이 따로 이고, 관찰해서 아는 정신이 따로 이구나.”라고 구분해서 알게 됩니다. 관찰할 때마다 저절로 많이 알게(경험하게) 되면,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지는 물질과 아는 마음(정신) 두 가지만 있을 뿐이구나.” 라고 알게 됩니다. 이것이 “정신 물질 구별의 지혜”, 청정으로는 “견해청정”이 생긴 것입니다.
계속 관찰해 나가면 조건과 결과가 계속 생기고 있는 것을 스스로의 지혜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로는 “조건 파악의 지혜”라고 하고, 청정으로는 “의심 극복 청정”이라고 합니다.
계속 관찰해 나가면 관찰해서 알아지는 대상들이 새록새록 생긴 뒤에 찰나마다 즉시 사라지는 성품 혹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라는 세 가지 성품을 모두 분명하게 경험합니다. “생겨서는 사라져 버리니 이것은 무상한 것이구나.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닌 괴로움이구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아일 뿐이구나.”라고 약간 명상하는 듯 혹은 숙고하는 듯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명상의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