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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마을]열반 10강 관련 - 질투와 인색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1.06.27|조회수126 목록 댓글 1

[열반에 관한 법문 10강 관련] 이전에 행한 질투와 인색이라는 불선업 때문에 공양음식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로사까띳사 장로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199

 

2021.06.25.

 

이전에 행한 질투와 인색이라는 불선업 때문에 공양음식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로사까띳사 장로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옮김, 불방일, 『어려운 것 네 가지』 pp.240~244

 

여기서 같이 기뻐함muditā의 반대인 질투와 인색에 대해 너무 길지도 않고 너무 짧지도 않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빠알리어로 ‘issāmacchariya’, 한국어로 ‘질투와 인색’이라고 부릅니다.

 

질투는 다른 이들의 번영과 행복, 훌륭하고 옳은 일들을 듣고 싶지 않은 것, 보고 싶지 않은 성품입니다. 인색은 자신의 이익을 손해 보면서 다른 이들의 이익, 다른 이들의 의무를 대신 짊어지려 하지 않는 것, 대신 하지 않으려는 성품입니다.

 

불선법 중에서 탐욕을 뿌리로 하는 도둑질이나 강도질, 성냄을 뿌리로 하는 살생, 괴롭힘 등은 세간의 법으로도 범죄라고 인정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도 범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질투와 인색의 경우에는 세간의 법으로는 범죄라고 인정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일으킵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질투와 인색은 생기기는 쉽지만 없애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오무간업 다음으로 제일 두려워할 만한 불선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무간업이란 과보가 매우 무거운 다섯 가지 업을 말합니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아라한을 죽이고, 부처님 몸에 피가 나게 하고, 승단을 분열하는 것이라는 다섯 가지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행한 사람은 죽었을 때 바로 무간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무간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장 과보가 심한 오무간업 다음으로 심한 과보를 주는 것이 질투와 인색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손톱 끝으로 종치기’라는 미얀마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고따마 부처님 당시, 로사까띳사라는 아라한 장로 스님의 전생 이야기인 「로사까띳싸 본생담」을 연유로 생겨난 말입니다. 장로는 과거 깟사빠 부처님 당시, 계행을 지키면서 한 마을 근처에 있는 숲속 사원의 주지였습니다.

 

어느 날, 아라한 스님 한 분이 그 마을에 오셨을 때 숲속 사원의 창건주가 새로 온 스님을 존경해서 공양을 올리고 자신이 보시한 사원으로 배웅해 드렸습니다. 주지스님은 객스님에게 방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녁 무렵, 창건주는 사종감미(catumadhū 四種甘味), 즉 스님들이 저녁에 먹을 수 있는 꿀 등의 달콤한 음식을 가지고 사원으로 와서 다음날도 계속해서 공양을 올리고 싶다고 공양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지스님에게도 공양청을 한 뒤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스님 두 분 모두에게 공양청을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지스님에게 질투와 인색이 생겼습니다. 앞서 “스님도 사람에 포함됩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스님에게도 질투와 인색이 생겨난 일화를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언급한 주지스님은 스님도 아니게 되었고, 사람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둘 다 잃어버렸습니다.

 

​저녁이 되자 주지스님은 객스님의 방에 가서 “내일 날이 밝으면 종을 울릴 겁니다. 그러면 공양하러 갑시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주지스님은 손톱 끝으로 종을 살짝 건드리면서 종을 치는 시늉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방문도 살짝 건드리기만 했습니다. 아라한 객스님은 주지스님의 속내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깨어나 있었지만 그대로 있었습니다. 주지스님 혼자 마을에 공양하러 간 뒤에 발우와 가사를 가지고 다른 곳으로 선정의 힘을 통해 가셨습니다.

 

주지스님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창건주가 “객스님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종을 쳤는데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방문을 두드려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찌 그런 사람을 존경할 수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로도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창건주는 주지스님에게 공양을 잘 올리고 객스님을 위해서도 훌륭한 밥과 반찬들을 발우에 담아 보시했습니다. 주지스님은 이것마저도 ‘이렇게 훌륭한 음식들을 보시 받으면 그 스님은 이 마을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한 나머지 길가에 타고 있는 쓰레기 더미 속에 던져 함께 태워 없애버렸습니다.

 

주지스님은 왜 이러한 불선업을 저질렀을까요? 질투와 인색 때문입니다. 왜 질투와 인색이 생겼을까요? 범부였기 때문입니다. 범부에게 질투와 인색은 계속해서 일어나는 법입니다. 수다원이 되어야 질투와 인색이 없어집니다. 질투와 인색이 있으면 아직 수다원이 아니라고 아십시오. 하지만 위빳사나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질투와 인색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주지스님이 절에 돌아왔을 때 객스님이 없자 ‘객스님이 떠났구나’라고 후회했지만 용서를 구할 시간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잘못 때문에 다음 생에 악처에 태어났습니다. 다음 생에만 악처, 지옥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생마다 악처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생마다 굶주리고 목마르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깟사빠 부처님 시대가 끝나고 고따마 부처님께서 출현하셨을 때까지 많은 생을 악처에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도 가장 저열하고, 가장 고통받는 신분으로만 태어났습니다.

 

마지막 생에 로사까띳사라는 이름을 가진 스님이 될 때까지 그 많은 생 동안 배부르게 음식을 먹은 적은 단 세 번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야차로 태어났던 생에서 한 임산부가 출산하고 난 뒤 버려진 찌꺼기를 먹은 것이 첫 번째, 개로 태어났던 생에서 한 여행자가 구토한 것을 먹은 것이 두 번째, 아라한이 된 후 완전한 열반에 들 때 사리뿟따 존자가 직접 손으로 받아서 그에게 보시한 사종감미를 먹은 것이 세 번째, 이렇게 세 번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질투와 인색 때문에 아라한이 먹을 음식을 버려서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질투와 인색은 개념입니까, 빠라맛타(실재성품)입니까? 실재성품입니다. 실재성품이기 때문에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 등에 상관없습니다. 실재성품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성품, 변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예를 들어 출가자에게 생겨도 그 출가자를 괴롭게 하고, 재가자에게 생겨도 그 재가자를 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출가자에게 생겼을 때는 좀 덜 괴롭게 하고 재가자에게 생겼을 때는 더 괴롭게 하지 않습니다. 출가자의 마음에 생긴 질투와 재가자에게 생긴 질투는 다릅니까?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에게 일어나는 질투와 사람에게 일어나는 질투도 똑같습니다. 정신법으로 똑같습니다. 개가 자기 밥그릇에 있는 먹이에 다른 개가 다가오면 ‘멍, 멍’ 짓지 않습니까? 그렇게 짓게 하는 법이 바로 질투와 인색입니다.

 

질투와 인색은 각각 질투하고 인색했던 것과 관련하여 굶주리게 하고 잃어버리게 하는 나쁜 결과를 줍니다. 그래서 이 로사까띳사라는 스님은 열반을 증득하여 아라한이 될 때까지 윤회하는 동안 계속해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얻지 못하고 굶주리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과 얻는 것이 많은 것은 별개입니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위빳사나 지혜 바라밀과 관련이 있습니다. 얻는 것이 많은 것은 질투와 인색이 없는 것, 보시 바라밀과 관련이 있습니다.

 

보시를 한 번 하려고 하면 질투와 인색이 천 번 생겨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보시한 분들은 마음속에서 질투와 인색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긴 것입니다. 질투와 인색을 이겨야만 보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투와 인색에 지면 보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군인과 똑같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군인은 자신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적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전쟁터에 임할 때 적을 죽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속의 질투와 인색을 죽였을 때, 이겼을 때 보시라는 선업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서 적을 이기는 것과 질투와 인색을 이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요? (대중: 질투와 인색을 이기는 것이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어려울까요? 전쟁터에서 상대방과 싸울 때는 상대방을 볼 수도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어서 조준해서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투와 인색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언제든지 불쑥 생겨나서 자기를 죽이기 때문에 질투와 인색이 더 죽이기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질투와 인색이라는 법이 이러이러한 나쁜 점이 있다고 질투와 인색의 허물을 확실히 알아서 질투와 인색을 물리쳐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보시를 하면 이러이러한 좋은 결과가 있다고 보시의 이익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를 갖추어야 보시를 행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말하면 질투와 인색이라는 좋지 않은 법이 생기기는 쉽지만 없애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 말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일으키기 쉽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같이 기뻐함입니다. 쉽게 생겨나지만 없애기 어려운 것이 질투와 인색입니다.*5 잘못하지 않아야 할 것을 잘못하지 않도록, 없애야 할 것을 없애도록 새김과 지혜를 갖추어 조심해야 합니다.

 

질투와 인색이 생기면 같이 기뻐함이 무너집니다. 자신이 지내는 집, 자신이 지내는 지역, 자신이 지내는 도시, 자신이 지내는 나라에 진짜사람은 얼마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질투와 인색이 많아서 같이 기뻐함을 증장시킬 수 없는 사람 모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도 진짜사람이 아니라고 알아야 합니다. 자애와 연민과 같이 기뻐함이라는 이러한 거룩한 마음가짐이 있는 이라야 진짜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진짜사람 되기가 매우 어렵다”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주5: 같이 기뻐하는 것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마음으로 그냥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기뻐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일으키기는 쉽다. 하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의 좋은 점에 대해 기뻐하는 이는 드물다. 어렵다. 그래서 실천하기는 어렵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좋은 점에 대해 질투하는 이는 많다. 쉽다. 그러나 질투하지 않는 것, 질투를 없애는 것은 어렵다.

 

 

[출처] [열반에 관한 법문 10강 관련] 이전에 행한 질투와 인색이라는 불선업 때문에 공양음식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로사까띳사 장로 (한국마하시선원) | 작성자 한국마하시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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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1.06.27 사두사두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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