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 12강 열반은 시간을 벗어난 것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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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 『열반에 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1년 4월 5일 출간)
열반은 시간을 벗어난 것
질문 : “아라한도의 찰나에 번뇌가 적멸한다고 할 때, 그 도는 적멸하고 있는 (현재의)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가, 혹은 완전열반으로 임종 이후에 무더기가 적멸한다고 하니, 미래의 무더기의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가?”
대답 : “열반은 현재나 미래라고 할 수 없다. 적멸하는 번뇌들 자체가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과거도 아닌 세 가지 시간에서 벗어난(kālavimutta)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 : 성스러운 도를 통해서 아직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범부나 성자의 존재 상속에 조건이 갖추어지면 생길 잠재력이 있는 번뇌를 (상속) 잠재번뇌라고 합니다. 그 잠재번뇌는 실제로 지금 생성 머묾 소멸에 따라서 생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형성되면 생길 가능성이 있는 번뇌입니다. 고로 현재의 번뇌가 아닙니다. 생겨서 마음을 얽어매는 번뇌를 현전번뇌라고 하는데, 그것은 성스러운 도가 적멸시킬 수 없습니다. 성스러운 도는 열반을 대상으로 하므로 현전번뇌를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생긴 번뇌는 생성 머묾 소멸 세 가지 소찰나를 거치면서 저절로 없어집니다.
또한 미래의 번뇌는 조건이 갖춰지면 생길 수 있는 잠재번뇌이기 때문에 확실히 생긴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번뇌도 아닙니다. 미래의 번뇌라고 하면 그 시간이 됐을 때 확실히 생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번뇌를 성스러운 도가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가 아니라는 사실은 매우 분명합니다. 사라진 것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조건이 갖춰졌을 때 생길 가능성이 있는 (상속)잠재번뇌를 제거한다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 세 가지 시간에서 벗어난 것을 성스러운 도가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스러운 도가 제거해서 번뇌가 적멸된 성품은, 성스러운 도가 제거한 잠재번뇌가 세 가지 시간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뇌가 제거된 성품도 세 가지 시간에서 벗어난 성품이어야 합니다. 적멸(적정)하다는 것은 생겼다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기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에 생겼다고 할 수도 없고, 지금 생기고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앞으로 생길 것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도의 위력 때문에 생길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기 때문에 적멸이라고 표현하고, 도의 찰나에 그 성품이 성취된다고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번뇌가 적멸하면(생길 가능성이 없게 되면), 그 번뇌에 의지해서 생길 새로운 탄생지의 물질정신 무더기들도 생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적멸해 버립니다. 그래서 무더기의 적멸도 시간에서 벗어난 법입니다.
“미래의 무더기의 적정함을 대상으로 하는가?” 라고 질문할 여지도 없습니다.
또 특별히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성스러운 도의 대상으로서의 열반은 그냥 일반적인 적정함임을 이전 시간 법문에서 설명했습니다. 경전에서는 열반을 애착의 적정함, 성냄의 적정함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실제로 성스러운 도의 대상인 열반은 이번에는 애착이 적정하다, 이번에는 성냄이 적정하다, 번뇌가 적정하다, 무더기가 적정하다는 등으로, 어떤 것 하나를 골라서 그것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번뇌, 업, 물질정신 무더기 이런 것들이 모두 없어진(적정해진, 공(空)한, 비어 있는), 성품만 대상으로 합니다. 이것은 세 가지 윤전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애착 성냄 이런 것들은 번뇌 윤전이 다한 것입니다. 번뇌 윤전이 없어지니 업 윤전이 없어지고, 그것 때문에 생긴 물질정신 무더기인 과보 윤전, 세 가지 윤전이 모두 적정해진 보통의 일반 열반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열반을 대상으로 합니까, 미래의 열반을 대상으로 합니까?”라는 질문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교재 22쪽으로 되돌아갑니다.
“아라한들은 법의 진수인 아라한과와 열반을 증득하고서, 다함을 즐긴다. 그 아라한 존자들은 좋고 나쁜 두 대상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여의 덕목을 갖추고서 모든 존재들을 버렸다.”(It.221)
여여하게(tādino): 좋고 나쁜 두 대상을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여(如如)의 덕목을 갖추고서. “여여하게 모든 존재들을 버렸다.”라는 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존재들을 좋아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완전열반의 임종마음 다음에는 물질정신 무더기가 생기지 않고 적멸해 버립니다. 아라한은 모든 존재들을 대변이라고 생각하고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생성 머묾 소멸이 있는 법 중에 제일 거룩한 법이 아라한과의 마음이고, 생성 머묾 소멸이 없는 법은 열반 한 가지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교재 24쪽과 같이 열반을 칭송하셨습니다.
법구경 184번 게송(https://cafe.daum.net/satisamadhi/8l9L/500 참조)
“열반을 제일 거룩하다고 부처님들께서는 칭송하시네.”
아라한과의 마음은 열반을 대상으로 해서 생깁니다. 그때는 모든 형성 괴로움들이 완전히 적정해진 어떤 성품 속으로 도달하듯이 생깁니다. 매우 적정하고 매우 고요하고 매우 행복합니다. 아라한과의 마음만 그런 것은 아니고, 아나함도와 과의 마음, 사다함도와 과의 마음, 수다원도와 과의 마음도 열반을 대상으로 할 때, 모든 형성 괴로움들이 완전히 적정해진 어떤 성품 속으로 도달하듯이 생깁니다.
그래서 아라한 존자들은 열반을 대상으로 과 증득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입정했다가 출정했을 때 그 열반의 맛이 너무나 수승하여 다음과 같이 감흥어를 읊기도 합니다.(교재 25쪽)
장로게 227
참으로 행복하네, 열반이란 것은.
정등각자께서 설하신 그 열반은.
슬픔 없고 때 없고 안온하다네.
그곳에선 괴로움이 소멸한다네.
아난다 존자의 스승인 벨랏타시사 장로는 아라한과 선정에 입정해서 누리는 행복이 너무나 좋아서 탁발을 나가면 선정에 들어갈 수 없으니, 탁발해서 얻은 밥을 말려서 다음 날 물에 불려서 먹고 아라한과 선정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아라한에게는 탐욕이 아니지만 다른 비구들이 음식을 저장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음식을 저장하는 것을 금하는 계율을 새로 만드셨습니다. (법구경 게송 92 이야기 https://cafe.daum.net/satisamadhi/8l9L/420 참조)
이상으로 마하시 사야도의 제2강 “형성과 열반” 법문이 끝났습니다.
제3강 바히야 다루찌리야 일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감흥어 (Ud. 86) 교재 26쪽.
물과 땅도 자리 잡지 못하는 곳 / 불도 바람도 자리 잡지 못하는 곳,
그곳에는 별들도 빛나지 않고 / 태양도 그곳에선 반짝이지 않는다네.
그곳에선 달도 비추지 않고 / 그곳에선 어둠도 발견되지 않는다네.
언젠가 깨달은 이, 깨달음을 통해 / 스스로 알고서 브라만(아라한)이 된다네.
그때 물질에서, 또한 비물질에서 / 행복과 고통에서 완전히 해탈하네.
이 게송은 바히야 다루찌리야라는 아라한이 무여열반에 든 것을 연유로 읊은 게송입니다. 저(마하시 사야도)는 이 빠알리어 게송을 독송할 때마다 믿음과 희열이 샘솟습니다. 매우 존경할만한 게송입니다.
“열반이라는 곳에는 물 요소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는다. 땅 요소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는다. 물과 바람도 요소도 확고하게 머물지 않는다. 그 열반이라는 곳에는 별들도 빛나지 않는다. 태양도 반짝이지 않는다. 그 열반이라는 곳에는 달도 비추지 않는다. 그 열반이라는 곳에는 어둠도 없다. (모든 물질법이 없기 때문에 빛도 없고 어둠도 없다.) 어느 때 깨달은 이는 아라한도의 지혜로 그 열반을 알고서 스스로 안다네. 스스로 알고 나서 악행을 떨쳐내 버린 아라한이 된다네. 그렇게 아라한이 됐을 때 물질로부터도 비물질(정신)로 부터도 행복과 고통이라는 모든 형성 고통으로부터라도 완전히 해탈한다네.”
여기서 앞부분은 물질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고 뒷부분은 비물질(정신)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열반이라는 곳에는 어둠도 없다.” 설명 : 모든 물질법이 없기 때문에 빛도 없고 어둠도 없습니다. 그러면 열반은 어디에 있는가? 번뇌와 업 때문에 끊임없이 계속 생기고 있는 물질정신의 연속이, 아라한도의 위력으로 모든 번뇌와 업이 완전히 제거됐습니다. 번뇌와 업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완전열반 이후에 새로운 물질정신 연속이 생기지 않고 적정해 졌습니다. 그렇게 적정한 성품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여러 번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물질정신의 연속이 더 이상 생기지 않고 불이 꺼진 것처럼 적정해졌습니다. 이 적정한 성품은 어디에 머물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재 27쪽) “기대는 곳이 없다”고 설하기도 하시고, “한 길 정도 되는 이 무더기 안에서만 네 가지 진리를 천명한다.”라고 설하시기도 했습니다.
바히야 다루찌리야 일화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