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왕과는 타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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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창스님, 불방일, 『부처님을 만나다』, pp.401~407부처님께서는 열여덟 번째 안거를 짤리야Cāliya 산에서 보내신 후 다시 사왓티의 제따와나 정사로 가셨습니다.670) 사실 부처님께서는 그때부터 3년 전에 알라위Āḷavī를 방문해 ‘죽음 명상’에 대한 법문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죽음 명상이란 ‘삶은 불확실하다. 죽음만이 확실하다. 이 몸은 언젠가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 혹은 ‘죽음, 죽음, 죽음’이라고 죽음에 관해 명상을 계속 하는 것을 말합니다.671)
하지만 대부분의 알라위 사람들은 죽음 명상을 하라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도 그 법문을 잊고 지냈습니다. 다만 한 사람, 직조공의 딸만이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 죽음 명상을 계속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부처님께서 열여덟 번째 안거 후 해제 기간 동안 제따와나 정사에 머무실 때 그 직조공의 딸이 법을 얻을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아시고 그녀를 제도하기 위해 500명의 비구와 함께 알라위로 다시 오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알라위 사람들은 모두 거리로 나와 부처님과 승단을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직조공의 딸도 부처님을 뵈러 가고 싶었지만 실을 감아서 공장으로 가져다 달라는 아버지의 심부름 때문에 잠시 망설였습니다. 소녀는 ‘아버지께 실을 먼저 갖다드릴까, 아니면 법문을 먼저 들을까’라고 고민을 하다가 일단 실을 가져다 드리고 나서 법문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실을 감기 시작했습니다.
알라위 사람들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공양을 올린 후 축원 법문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직조공의 딸이 온 다음에 법문을 설하려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대중들도 모두 조용히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실을 다 감은 소녀는 아버지께 실을 가져다 드리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소녀는 아버지의 직조 공장으로 가는 길에 멀리서 부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고개를 들어 소녀를 바라보셨습니다. 부처님과 눈이 마주친 소녀는 자기를 오라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부처님께 다가갔습니다. 소녀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적당한 곳에 앉았을 때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모릅니다, 부처님!”
“어디로 가느냐?”
“모릅니다, 부처님!”
“모르느냐?”
“압니다, 부처님!“
“아느냐?”
“모릅니다, 부처님!”
알라위 사람들은 ‘어디서 왔느냐’라는 부처님의 물음에 ‘집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감히 부처님께 ‘모릅니다’라고 대답하고, 실을 들고 아버지 공장으로 가면서도 ‘어디로 가느냐’라는 물음에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니 소녀가 참으로 무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소란을 피우자 부처님께서 다시 소녀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너는 왜 모른다고 했느냐?”
“일체지를 갖추신 부처님께서는 제가 집에서 왔다는 사실은 이미 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생에 어떤 생에서 이생으로 태어났는지 그걸 아느냐고 물으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생에 어디에서 어떤 존재로 있다가 지금 이생에 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릅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두, 사두, 사두!”라고 칭찬하시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을 때는 왜 모른다고 대답했느냐?”
“부처님께서는 당연히 제가 아버지한테 가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고 나서 어디에 태어나는지 아느냐’라고 물으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사두, 사두, 사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모르느냐고 물었을 때 왜 안다고 대답했는가?”
“제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압니다. 그래서 ‘압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사두, 사두, 사두!” 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아느냐고 물었을 때 왜 모른다고 대답했는가?”
“제가 죽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모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두, 사두, 사두!”라고 칭찬하시고 게송을 읊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혜가 없어] 눈이 멀었고
그중 몇몇만 [형성들의 삼특상을] 있는 그대로 보네
몇몇 새만이 그물을 벗어나듯
몇몇 사람만이 천상으로 가네672)
소녀는 게송을 듣고 그 자리에서 수다원 과를 증득했습니다. 수다원이 된 소녀는 실 바구니를 들고 아버지가 있는 직조공장으로 갔습니다. 그때 마침 아버지는 베틀에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소녀가 실 바구니를 베틀 옆에 올려놓는데 그만 바구니가 북 끝에 닿으면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습니다.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아버지가 무심코 북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소녀는 날카로운 부분에 가슴이 찔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죽음의 고통으로 흘린 눈물은 사대양의 물보다 많았다”라고 윤회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셨고, 그 가르침을 들은 소녀의 아버지는 출가하여 곧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직조공의 딸이 그날 죽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만약 죽기 전에 수다원이 되지 못하면 다음 생에 사악처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다원이 되면 다음 생에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부러 알라위까지 와서 법문을 설해 직조공의 딸을 제도하신 것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죽음 명상은 ‘나의 목숨은 확실하지 않다, 나의 죽음만이 확실하다, 나는 확실히 죽을 것이다, 나의 목숨은 죽음으로 끝난다, 목숨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죽음만이 정해진 것이다’ 등의 문구를 통해서, 혹은 ‘죽음, 죽음’이라고 새김과 경각심과 지혜를 통해 죽음에 대해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마치 살인자가 칼을 내 목에 들이대고 있는 것처럼, 큰 영화를 가진 이들도 언젠가는 모두 죽음으로 무너지는 것처럼, 정등각자 부처님께서도 결국 죽음에 이르신 것처럼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고 마음을 기울여도 됩니다.
또는 언제든지 뱀에 물리거나 병이 나거나 음식을 잘못 먹거나 해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 또 자신의 수명, 죽게 하는 병, 죽는 시간, 죽은 후 묻히는 곳, 죽어서 태어날 곳을 알 수 없다는 사실,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찰나에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 등을 반조해도 됩니다.
이러한 죽음 명상을 잘 실천하면 게으르지 않게 되고 목숨에 대한 집착도 버리게 됩니다. 길을 가다가 독사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손에 막대기 하나 없는 사람은 두려움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모르지만 막대기를 가진 사람은 독사를 만나도 두려움 없이 잘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 명상을 닦지 않은 사람은 임종할 때 두려움과 공포에 빠지지만 죽음 명상을 닦은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헤매지 않으면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설령 이생에서 열반을 증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음 생에 선처에 태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일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한 달이나 일 년 뒤에 죽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살면서 선업 짓는 것을 게을리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 나도 죽을 수 있구나,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채찍의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은 모습을 직접 보고 ‘나도 죽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선업을 실천하는 사람은 채찍이 털에 닿았을 때 달리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지가 죽었을 때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선업을 실천하는 사람은 살이 파일 정도로 때렸을 때 달리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큰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해서야 ‘내가 지금 선업을 실천하지 않은 채로 죽으면 다음에 어떤 세상에 태어날지 모른다. 지금 살아 있을 때 열심히 선업을 행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때렸을 때 달리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673)
죽음에 대한 경각심이 없으면 이처럼 선업을 짓거나 수행을 할 생각을 내기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지금 바로 선업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언제 나에게 죽음이 다가올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마음속에 투철하게 새기고 부지런히 선업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죽음이 닥칠 때 두렵지 않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죽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열심히 행하라
내일 죽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왕과는 그대 타협하지 못한다674)
죽음을 흔히 왕에 비유합니다. 옛날에는 왕이 마음대로 백성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세간의 왕에게는 뇌물을 주어 처벌을 피하거나 도망치거나 대항할 수 있어도 죽음의 왕에게는 뇌물도 통하지 않고 도망칠 수도 없고 그 어떠한 무기로도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미리 죽음에 대해 반조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선업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죽음에 임박해서는 좋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죽음 직전에 일으키는 생각이 그 사람의 내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이 실제로 죽음을 맞이할 때 좋은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미리미리 선업을 닦고 열심히 수행을 해서 좋은 생각 일으키는 연습을 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 앞에서는 울거나 애착하는 말을 삼가고 그가 평소에 행했던 선업을 반조하고 삶의 무상함 등을 관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한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슬퍼하는 것이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사실을 반조하여 슬픔을 잘 다스리고 할 수 있는 만큼 선업의 공덕을 회향해야 됩니다.
670) 참고로 《Mahābuddhawin》에서는 이때 가난한 한 농부를 제도하신 일을 소개하고 있다. 《법구경 이야기》 제3권, pp.28~30; 《대불전경》 VII, pp.265~268 참조.
671) 《청정도론》 제2권, pp.21~39 참조.
672) 《Dhammapada》 게송 174. 게송 해석은 《Mahābuddhawin》 제4권, p.370을 참조했다. 번역본은 《법구경 이야기》 제2권, pp.526~531 참조.
673) 《앙굿따라 니까야》 제2권, 〈채찍 경〉, pp.282~285 참조.
674) 《맛지마 니까야》 제4권, <지복한 하룻밤 경>, p.382. 해석은 《Vipassanā Shunyikyan》 제1권, p.5를 참조했다.
[출처] [2021년 7월 29일 목요수행 게송 관련] 죽음의 왕과는 타협하지 못한다 (한국마하시선원) | 작성자 한국마하시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