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관한 법문 21강 관련] 다시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하는 갈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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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하는 갈애
마하시 사야도 지음, 비구 일창 담마간다 옮김, 불방일, 『담마짝까 법문(초전법륜경 해설)』, pp.53~57
갈애는 좋아하고 들러붙는 성품이어서 도달한 생에서 자신의 생을 좋아하고 애착해서 즐깁니다. 얻게 된 대상들도 좋아하고 애착해서 즐깁니다. 이렇게 좋아하며 즐기기 때문에 자신의 생, 자신의 몸을 계속해서 그대로 존재하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대로 유지되게 하려 합니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대상도 그대로 존재하게 하려 합니다. 그대로 유지되게 하려 노력하고 애써 행합니다. 이렇게 노력하고 행하기 때문에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할 수 있는 불선업과 선업이 각각 적절하게 생겨납니다.
그래서 죽음에 즈음해서 어느 한 업이든, 그 업을 행했을 때의 여러 상황이 대상으로 나타나는 업 표상이든, 그 업 때문에 태어날 생의 여러 상황이 대상으로 나타나는 거취 표상이든 어느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이라는 대상을 갈애가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 집착합니다. 없애려 해도 없앨 수 없습니다. 저녁에 산 그림자가 대지에 퍼져 덮어 버리듯이 그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이라는 대상이 마음을 덮어 버리면서 드러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대상을 업형성 의식abhisaṅkhāraviññāṇa이라는 죽음인근maraṇasanna 속행 마음이246) 마치 잡아 두는 것처럼 집착해서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247) 그때, 제일 마지막 죽음 순간의 물질·정신 무더기가 소멸하는 것과 동시에 그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만을 집착하고 대상으로 하여 새로운 탄생지, 새로운 생에, 의지하는 물질과 함께 재생연결 마음이 생겨납니다. 마음이 생겨날 때 그것과 함께 여러 마음부수 정신법들도 생겨납니다. 그 재생연결 마음 이후에도 업의 힘이 있는 만큼 존재요인bhavaṅga248) 마음들이 평생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새로운 생에 태어나는 것은 업과 갈애라는 두 가지 원인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애 없이 업만으로는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할 수 없습니다.249) 그래서 새로운 생에 태어나게 하는 데 있어 갈애가 근본 원인입니다. 그렇게 근본 원인으로서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ponobhavikā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한다’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다음 생이 있다는 사실은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실 때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있음에도 “현재 한 생만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다음 생은 설하지 않으셨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설법을 단멸론ucchedavāda과 결부시키려는 목적으로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제멋대로 주장하는 말입니다. 사실은 팔정도를 닦지 않거나, 닦더라도 완벽하게 닦지 않아서 갈애가 다하지 않으면 이 갈애 때문에 새로운 생에 거듭 태어나게 됩니다.
팔정도를 닦아 완벽하게 성취하여 아라한도과에 이르러 갈애가 사라지면 새로운 생에 더 이상 태어나지 않습니다. 다음 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라한이 된 후 ‘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 이 생이 마지막 생이다, 이제 다시 태어나는 생은 더 이상 없다’라고 반조의 지혜로 숙고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담마짝까숫따」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그렇게 숙고하는 모습이 포함돼 있습니다.250) 그렇게 숙고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갈애가 아직 다하지 않으면 다시 새로운 생에 거듭 태어난다고 하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246) 대림스님·각묵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1, pp.526~533 참조.
247) 원) 『앙굿따라 니까야(세 가지 모음)』 「바와숫따Bhavasutta 존재경」에서 “kammaṁ khettaṁ, viññāṇaṁ bījaṁ, taṇhā sineho(업은 밭, 의식은 종자, 갈애는 수분이다)”(A.i.224)라고 설하신 대로 새로운 생에 재생연결 의식이 생겨나는 데 있어 선업과 불선업은 씨앗이 자라는 밭과 같다. 업형성 의식은 재생연결 의식을 생겨나게 하는 종자와 같다. 도달한 생과 얻은 대상에 대해 좋아하고 즐기는 갈애는 젖게 하는 물 요소와 같다.
그중, 업형성 의식, 즉 새로운 생을 행하는 의식이라는 것은 의도인 업과 함께 생겨나는 마음·의식이라고 주석서에서 설명해 놓았다. 원래 업이 생겨날 때 그 업과 함께 생겨나는 것처럼, 나중, 그 나중에도 의도와 함께만 생겨나기 때문에 그러한 나중, 그 나중의 마음도 업형성 의식이라고만 불러야 한다. 특히 죽음에 인근해서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을 집착해서 대상으로 하여 생겨나는 죽음 인근 속행 마음을 ‘업형성 의식’이라고 불러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그 죽음 인근 속행 마음에서 재생연결 의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밖에, 종자는 젖게 하는 요소인 물 요소와 닿아야만 새싹을 틔울 수 있듯이, (업형성) 의식이라는 종자도 그것과 함께 생겨나든, 이전에 근처에서 생겨나게 하든, 갈애가 자신의 여세를 얻게 해서 부추기기 때문에 업이나 업 표상이나 거취 표상 대상을 집요하게 대상으로 하는 것을 통해 그 대상을 의지하여,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 의식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248) 재생연결 직후나 깊은 잠에 빠졌을 때, 혹은 인식과정 사이에 존재가 계속 지속되게 하는 요인으로서 작용하는 마음의 역할을 말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1, pp.329~332 참조.
249) 원) 아라한들에게는 과거 선업이 완전열반에 들기 전에 좋은 결과를 준다. 시왈리Sīvali 존자가 많은 공양을 받은 것, 바꿀라Bākula 존자가 건강한 것 등처럼 좋은 과보를 말한다. 과거의 불선업도 나쁜 결과를 준다. 로사까띳사Losakatissa 존자가 공양을 많이 얻지 못한 것,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ana 존자가 도적들에게 맞아서 그 때문에 입적한 것 등처럼 나쁜 과보를 말한다. 그래도 그러한 과거 업들은 재생연결의 과보는 더 이상 줄 수 없다. 무엇 때문인가? 갈애가 없어 그 갈애의 부추김을 받지 못해 죽음 즈음에 업형성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애를 ‘ponobhavikā 다시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라고 설하신 것이다.
250) 본서 pp.436~439 참조.
[출처] [열반에 관한 법문 21강 관련] 다시 새로운 생을 생겨나게 하는 갈애 (한국마하시선원) | 작성자 한국마하시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