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상좌불교

[호두마을]열반 23강 - 생각해서 앎과 열반, 부처님의 오도송-일부 메모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1.08.17|조회수67 목록 댓글 3

열반 23강 - 생각해서 앎과 열반, 부처님의 오도송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이것은 강의 내용 일부의 메모를 편집한 것으로 스님들의 검증을 받지 않은 것이며, 주석과 첨부는 메모자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내거나 인터넷에 게시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상세한 강의 내용 전체는 한국마하시선원 카페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359 참조.

일부 용어 변경.

 

교재 : 『열반에 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1년 4월 5일 출간)

 

생각해서 앎[意識]과 열반

 

생각할 때 관찰해서 알지 못하면 괴로움의 진리에 의지해서 생겨남의 진리(갈애)가 생기고, 다시 생겨남의 진리인 갈애에 의지해서 다시 괴로움의 진리가 생깁니다. 닿아서 아는 앎과 마찬가지로 생각해서 앎도 매우 광범위합니다. 보고 나서 알고 다시 생각해서 알고 나서, 듣고 나서도 알고 다시 생각해서 알고, 맡고 나서도 알고 다시 생각해서 알고, 먹고 나서도 알고 다시 생각해서 알고, 닿고 나서도 알고 다시 생각해서 압니다. 그런 것과 관련 없이 자체적으로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숙고해서도 압니다. 그렇게 생각과 관련된 앎이 생겨날 때마다 계속해서 잘 알도록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해야 되는데 생각이나 망상을 관찰하지 못해서 사실대로 바르게 알지 못하면, 생각해서 아는 것을 ‘나’라고 여깁니다. 혹은 ‘생각해서 아는 것은 좋은 것이야.’라고도 생각하고 그것을 즐깁니다. 그러면 갈애가 생긴 것입니다. 혹은 마음속으로 행복이나 번영을 바라고 기원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도 갈애입니다. 갈애가 생기면 심한 갈애인 집착이 생기고, 집착 때문에 그것을 이루려고 어떤 행위를 합니다. 그것이 업이 생기는 것입니다. 업이 있으면 새로운 생에 물질정신 무더기가 생기고, 그것은 괴로움의 진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관찰하지 않으면 갈애, 취착, 업, 새로운 생의 정신물질 무더기가 생깁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생각이나 망상이 생길 때마다 ‘생각한다, 망상한다, 계획한다.’ 등으로 계속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을 열심히 잘 한 수행자가 위빳사나 지혜의 힘이 매우 좋아지면 생각이 생기더라도 생각해서 아는 미세한 성품이 하나씩 하나씩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수행자가 ‘방금 내가 무엇을 생각했는가?’ 라고 돌이켜 생각해 봐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도 경험합니다. 이렇게 생각과 망상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은 성품이구나.’라고 스스로의 지혜로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알다가, (여기서는 생각해서 앎에 관한 법문이기 때문에) 형성 평온의 지혜가 생기고, 그것이 무르익었을 때 생각해서 아는 어떤 성품 하나를 알면서, 관찰해서 아는 성품도, 관찰의 대상인 성품도 모두 소멸한 성품(열반)을 경험합니다.

 

교재 32쪽을 참조하십시오.

 

“열반이라는 곳에는 마노(mano. 맘, 의식)도 소멸하고, 법인식(dhammasaññā. 성품대상을 인식하는 것)도 소멸하는데, 그 감각장소(āyatane. 마음과 법인식이 소멸하는 곳인 열반이라는 그 대상 원인)를 알도록 노력해야 한다.” (“감각적 욕망의 가닥 경(S35:117)” S.ii.318)

 

눈과 형색, 귀와 소리 등은 법체가 어느 정도 분명한데, 여기서 마노(mano)와 법인식이라고 번역한 것은 미세합니다. 마노(mano)는 바왕가(존재요인) 마음과 전향 마음을 뜻합니다.

 

존재요인 마음은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들었을 때 계속해서 생명이 유지되도록 생명하고 있는 아주 미세한 마음을 말합니다. 알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 존재요인 마음이라고 하는가 하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에도 그 존재가 죽지 않고 계속 생명이 유지되도록 생멸하는 역할도 하고, 깨어 있을 때에도 어떤 것을 보거나 들을 때, 보는 것 혹은 듣는 것과 관련된 인식과정의 마음들이 일어나는 사이에, 존재요인 마음들이, 인식하는 마음들이 끊어지지 않도록, 존재요인 마음이 계속 일어남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존재가 유지되는데 중요한 요인이므로 존재요인(바왕가) 마음이라고 합니다. 존재요인 마음이 없으면 죽은 사람입니다. 이 존재요인 마음은 제자들이 알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알기가 어렵습니다. 할 수 있으면 마음 기울이는 성품(즉 처음에 대상으로 향하는 성품)인 전향하는 마음의 소멸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 마노(mano)의 대상은 법인식(dhammasaññā)이라고 한 것은 생각해서 아는 마음이나 관찰해서 아는 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인식이라고 설하셨지만 그것은 대표로 설하신 것입니다. 보통 마음을 대표로 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마음이라고 설명하기로 합니다. 이 마음의 소멸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형성 평온의 지혜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대상으로 향하는 성품 즉 마음을 살짝 기울이는 성품인 전향하는 마음(마노) 그리고 생각하는 보통의 마음과 관찰해서 아는 마음이 모두 끊어져서 소멸하면 그것이 열반이라는 뜻입니다. 아는 마음이 존재하고 있으면 형성 대상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형성된 성품 모두가 소멸된 성품이 열반입니다.

 

소멸된 성품을 아는 마음을 도 마음(혹은 과 마음)이라고 하는데, 그 마음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대상 자체가 모든 형성이 완전히 소멸된 성품이기 때문에 그것은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道 마음)이 있긴 있지만 마치 아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분명합니다.

 

아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드러난다면, 그 마음의 생멸도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면 생멸이 있는 것이니 위빳사나로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일 것입니다. 열반을 경험하기 전에 부풂 꺼짐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하다가 나중에는 아는 성품만 분명하게 됩니다. 아직 아는 성품이 남아 있을 때 그것을 ‘안다. 안다’라고 관찰하다가, 적정한 열반을 경험할 때는 그 아는 성품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가정법으로) 만약 아는 성품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생멸할 것이고, 생멸한다면 위빳사나로 관찰할 수 있을 것인데, 그 도 마음은 위빳사나 관찰 대상이 아니므로, 아는 마음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드러난다고 가정하면 위빳사나 관찰의 대상이 될 것인데, 열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도의 마음은 위빳사나 관찰대상이 아닙니다. 위빳사나로 관찰할 수 없는 법입니다. 열반을 직접 경험할 때 아는 도의 마음은 있지만, 실제로는 아는 성품까지 소멸해 버린 것처럼, 소멸해 버린 것으로만 수행자의 지혜에 직접 경험됩니다.

 

그래서 “열반이라는 곳에는 법인식도 소멸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입니다. 이 법문을 들으면 수행자에게 “법인식이 소멸할 때까지 수행해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보아서 아는 것을 관찰해서 알다가 열반을 경험할 때에는 눈과 형색 인식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성품을 경험합니다.

들어서 아는 것을 관찰해서 알다가 열반을 경험할 때에는 귀와 소리 인식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성품을 경험합니다.

먹어서 아는 것을 관찰해서 알다가 열반을 경험할 때에는 혀와 맛 인식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성품을 경험합니다.

닿아서 아는 것을 관찰해서 알다가 열반을 경험할 때에는 몸과 감촉 인식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성품을 경험합니다.

생각해서 아는 것을 관찰해서 알다가 열반을 경험할 때에는 마노(mano)와 법인식(dhammasaññā)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성품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괴로움의 진리)을 알다가 세상의 끝이라는 열반(소멸의 진리)을 대상으로 해서 직접 경험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끝을 경험하는 것은 단지 생각하고 숙고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경험하는가? 여섯 문에서 분명하게 생기는 물질정신법들을, 분명한 대로 끊임없이 잘 관찰하여 알다가, 위빳사나 지혜가 향상되어서 형성 평온의 지혜가 생기고, 그것이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그렇게 직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정신 형성들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을, (대표방법으로) 아라한도의 지혜로 경험하면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구분해서 알 수 있습니다. 즉 ‘끊임없이 생기고 있는 봄 들림 등의 물질정신 형성들은, 번뇌들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괴로움(고성제)일 뿐이로구나.’라고 구분해서 압니다. ‘갈애(집성제)는 그 괴로움이 생기게 하는 원인일 뿐이로구나.’라고도 구분해서 압니다. 그래서 즐기고 갈망하는 갈애가 완전히 소멸해 버립니다. 그렇게 갈애가 생길 기회가 없이 없어지기 때문에, 새로운 생의 물질정신 무더기라는 괴로움의 진리도 더 이상 생기지 못한 채 적멸해 버립니다.

 

그렇게 갈애와 갈애 때문에 생길 새로운 생의 물질정신 무더기가 완전히 적멸해 버리는 모습을 직접 보신 뒤에, 정등각자(아라한)가 되셨을 때 부처님께서 기쁨이 흘러넘치셔서,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감흥어[悟道頌]를 읊으셨습니다. 교재 43-45쪽 참조.

 

부처님의 오도송

 

“한량없는 세월의 생사윤회 속에서 집(오온)을 짓는 자(갈애)가 누구인지 알려고

찾아 헤매다 헤매다 찾지 못하여 계속해서 태어났나니 이는 고통이었네.

아, 집을 짓는 자여! 내 이제 너를 보았으니*

너는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리라.

이제 모든 서까래(번뇌)는 부서졌고 대들보(무명)는 산산조각 났으며

내 마음은 열반에 이르러 모든 욕망 파괴되어 버렸네.

 

*주: 이제 아라한도의 지혜라는 통찰지의 눈(안경)을 얻어서 너를 보았으니

 

관정(灌頂) 게송: 『우다나』 성전(Ud1:1~3)에 따라 부처님이 된 뒤 7일째 밤에 숙고하셨던 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과 직접 소리 내어 읊으신 게송 세 가지도 같이 독송하여 헌공.

 

감흥어 1

열심히 노력하여 선정에 든 바라문에게 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네.

그리하여 모든 의심 사라지나니. 원인법과 함께 법을 알기에.

 

감흥어 2

열심히 노력하여 선정에 든 바라문에게 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네.

그리하여 모든 의심 사라지나니. 조건법들의 다함을 알기에.

 

감흥어 3

열심히 노력하여 선정에 든 바라문에게 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네.

그때 마라의 군대를 물리치나니. 태양이 허공을 비추며 머물 듯이.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장뇌산삼 | 작성시간 21.08.17 감사합니다._()_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1.08.18 사두사두사두
  • 작성자혜 수 | 작성시간 21.08.18 고맙습니다.... _()_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