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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마을]열반 24강 의지처가 없는 열반-일부 메모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1.08.19|조회수45 목록 댓글 2

열반 24강 의지처가 없는 열반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이것은 강의 내용 일부의 메모를 편집한 것으로 스님들의 검증을 받지 않은 것이며, 주석과 첨부는 메모자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내거나 인터넷에 게시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상세한 강의 내용 전체는 한국마하시선원 카페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367 참조.

일부 용어 변경.

 

교재 : 『열반에 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1년 4월 5일 출간)

 

열반에는 의지처가 없다

출처 :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371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근본 내용은 “appatiṭṭhaṃ”, 열반에는 의지처가 없다는 가르침에 따라 소멸의 진리라는 열반에는 엄밀하게는 의지처(기반, 장소)가 없고, 방편으로 「로히땃사숫따」에서 “한 길 정도의 무더기 안에 있다”라고 설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괴로움의 진리(고성제)와 생겨남의 진리(집성제)는 보통 개인의 상속에 실제로 생겨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볼 때 등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도의 진리(도성제)는 위빳사나 관찰하는 중에, 성스러운 도에 도달하는 중에 있는 개인이 상속에 확실하게 생겨난다는 사실도 설명했습니다.

 

소멸의 진리(멸성제)라는 열반은 도과에 도달한 개인의 상속에 (방편으로 말해서) 존재한다는 사실, 특히 아라한의 상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이 내용과 관련해서 근거가 되는 성전 구절 하나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네 가지 진리 모두를 인식이 있고 마음이 있는 이 한 길 정도의 몸에서 천명한다는 구절에서 괴로움과 생겨남과 도라는 세 진리는 분명하다. 소멸의 진리인 열반은 개인마다 상속에 있는 것인가? 어디에 어떻게 있다는 것인가?’라고 숙고할 여지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각 개인의 상속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자의 상속에, 소멸된 번뇌와 무더기를 연유로 있다고 방편으로 설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이 『위숫디막가 마하띠까』에 다음과 같이 설명돼 있습니다. (교재 48-49쪽)

 

“그 열반은 머무는 장소가 없지만 번뇌와 무더기들의 소멸이기 때문에, 그 소멸된 번뇌와 무더기에 의해서, 번뇌와 무더기들이 의지하는 곳에 비유해서, 의지하는 장소인 것으로도 보이셨다. (무엇과 같은가 하면) 형성 세상 중에, 눈은 좋아할 만한 성품이고 즐거워할 만한 성품인데, 그 갈애가 제거될 때는, 좋아할 만한 성품이고 즐거워할 만한 성품이 눈에서 제거된다. 소멸할 때는, 좋아할 만한 성품이고 즐거워할 만한 성품이 눈에서 소멸한다.(D.ii.401) 이렇게 설하신 것과 마찬가지다.”

 

​Adesampi hi taṃ yesaṃ nirodho, tesaṃ vasena upacārato, desatopi niddisīyati yathā cakkhuṃ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pahīyamānā pahīyati, ettha nirujjhamānā nirujjhatīti.(Pm.i.236)

 

【대역】

Taṃ그것은; 그 열반은 adesampi장소가 없지만; 머무는 장소가 없지만 yesaṃ그것들의; 그 번뇌와 무더기들의 nirodho소멸이기 때문에 tesaṃ vasena그것들에 의해서; 그 소멸된 번뇌와 무더기에 의해서 upacārato비유로; 번뇌와 무더기들이 의지하는 곳에 비유해서 desatopi장소로; 의지하는 장소인 것으로도 niddisīyati보이셨다.

《무엇과 같은가 하면》 loke세상에서; 형성 세상 중에 cakkhuṃ눈은 piyarūpaṃ좋아할 만한 성품이고 sātarūpaṃ즐거워할 만한 성품인데 esā taṇhā그 갈애가 pahīyamānā제거될 때는 ettha pahīyati그곳에서 제거된다.; 좋아할 만한 성품이고 즐거워할 만한 성품이 눈에서 제거된다. nirujjhamānā소멸할 때는 ettha nirujjhati그곳에서 소멸한다.; 좋아할 만한 성품이고 즐거워할 만한 성품이 눈에서 소멸한다.(D.ii.401) iti yathā이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설하신 것과 마찬가지다.

 

번뇌의 소멸, 무더기의 소멸이라는 열반은 소멸함, 다시 생겨남이 없음이라는 성품일 뿐이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머물러 있는 장소란 없습니다.

 

하지만 소멸된 번뇌와 무더기는 성자의 상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도 실제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소멸한 성품도, 그렇게 소멸한 번뇌와 무더기가 머무르는 곳인 성자의 상속에 머무는 것으로 비유해서 설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소멸하는가? 아라한도의 위력으로 갈애가 더 이상 생겨나지 못한 채 소멸하는 것은 엄밀하게는 어느 곳에서 소멸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갈애가 생겨나면 좋아할 만하고 즐거워할 만한 눈이나 귀 등의 여섯 문, 형색이나 소리 등 여섯 대상, 보아 앎이나 들어 앎 등 여섯 의식 등을 대상으로 생겨납니다. 그래서 생겨나는 장소인 좋아할 만하고 즐거워할 만한 눈 등에서 소멸한다고 비유적으로 설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비담마 가르침에서는 자신의 외부에서 성취되는 법이라고 엄밀하게 설하셨습니다. 이 아비담마의 가르침에 따라 외부에서 성취된다고 말하더라도 자기 내부의 법이 아니라는 사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외부 어느 곳에 머문다고 어떤 머무는 장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우다나』 성전에서도 “열반에는 의지처가 없다"라고 엄밀하게 읊으신 것입니다. 추론으로 숙고해 보더라도 조건이 형성되면 생겨날 수 있는 번뇌와 무더기가 아라한도의 위력으로 더 이상 생겨날 수 없이 적멸해 버린 성품은 어떤 곳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이상으로 마하시 사야도의 제4강이 끝났습니다.

 

제5강 갈애 다함이 열반(교재 50쪽부터)

 

갈애 다함이 열반

 

갈애로부터 벗어나므로 열반이라고 한다.

이 적정의 요소에는 결박이라는 갈애가 없으므로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을 좋아하지 않는 갈애 : 예화 생략

 

열반에 도달하게 하는 선업을 행하기 힘들다 : 케마 왕비 예화 생략

(케마 테리 이야기는 https://cafe.daum.net/satisamadhi/4vdS/19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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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1.08.20 고맙습니다
  • 작성자혜 수 | 작성시간 21.08.20 고맙습니다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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