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 27강 열반은 알기 어렵다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이것은 강의 내용 일부의 메모를 편집한 것으로 스님들의 검증을 받지 않은 것이며, 주석과 첨부는 메모자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내거나 인터넷에 게시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상세한 강의 내용 전체는 한국마하시선원 카페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396 참조.
일부 용어 변경.
교재 : 『열반에 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1년 4월 5일 출간)
열반은 알기 어렵다 (교재 53쪽 참조)
“모든 형성이 가라앉은 곳, 모든 근거들을 놓아버린 곳, 갈애가 다한 곳, 애착이 빛바랜 곳, 소멸된 곳인 어떤 적정한 성품(열반)이 있는데, 이 경지도 보기 어렵다. (D.ii.30)”
여기서 “모든 형성이 가라앉은 곳, 모든 근거들을 놓아버린 곳, 갈애가 다한 곳, 애착이 빛바랜 곳, 소멸된 곳”이라고 한 것은 마하시 사야도께서 비유해서 번역한 것일 뿐이고, 실은 모든 형성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 적정한 성품, 모든 근거를 놓아버린, 갈애의 다함, 애착의 빛바램인 성품일 뿐이고, 어떤 장소로 번역한 것은 비유로서 번역한 것입니다.
근거 네 가지
출처 :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401
부처님께서는 붓다가 되신 뒤 50일째쯤에 열반이 매우 미묘하고 심오한 모습, 알기 어려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숙고하셨습니다.
모든 형성이 가라앉은 곳, 모든 근거들을 놓아버린 곳, 갈애가 다한 곳, 애착이 빛바랜 곳, 소멸된 곳인 어떤 적정한 성품(열반)이 있는데 이 경지도 보기 어렵다.
이 숙고하신 모습 중에 ‘가라앉은 곳; 놓아버린 곳; 다한 곳; 소멸된 곳’이라는 설명은 비유해서 번역한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형성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고 적정함, 모든 근거를 놓아버림, 갈애의 다함, 애착의 빛바램이란 성품일 뿐입니다.
위의 설명 중에 ‘근거upadhi’란 ‘괴로움과 행복이 기반하는 곳’을 말합니다. 근거에는 ① 감각욕망근거 ② 무더기근거 ③ 번뇌근거 ④ 업형성근거라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감각욕망근거란 다섯 감각욕망거리입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다섯 감각욕망거리를 원인으로 괴로움이 많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감각욕망거리를 ‘근거’라고 부릅니다. 범부들이라면 감각욕망거리에 의지해서 행복이 생겨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무더기근거란 다섯 무더기[五蘊]입니다. 다섯 무더기를 의지해서 괴로움이 많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다섯 무더기를 ‘근거’라고 부릅니다. 범부들이라면 다섯 무더기에 의지해서 행복이 생겨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근거’ 자체는 ‘기초, 의지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행복의 기초라고도 말할 수 있고 괴로움의 기초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범부들은 감각욕망거리 대상을 누리는 것을 제일 좋은 것이라고, 제일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아서 행복하다고, 듣고 싶은 것을 들어서도 행복하다고, 좋은 냄새를 맡아서도 행복하다고, 좋은 맛을 먹어서도 행복하다고, 좋은 감촉과 닿아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상을 생각하고 상상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작게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망상하는 것을 행복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의 시각으로는 그러한 행복은 괴로움일 뿐입니다.
그리고 감각욕망거리를 연유로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괴로움이 많이 생겨납니다. 감각욕망거리를 얻도록 구하고 궁리하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일부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구합니다. 얻은 것을 지켜야 하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일부는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고 보호합니다. 매우 친한 친구들끼리도 감각욕망거리를 연유로 갈라섭니다. 싸웁니다. 매우 가까운 형제자매끼리도 재산이라는 감각욕망거리를 연유로 갈라섭니다. 상속권 분쟁이 일어납니다. 부모와 자식도 재산을 연유로 다투고 싸우고 갈라섭니다. 이것은 모두 괴로움일 뿐입니다. 이 괴로움은 감각욕망거리를 연유로 생겨납니다. 그래서 감각욕망거리를 괴로움의 근거, ‘감각욕망근거’라고 부릅니다.
범부라면 ‘물질‧정신 무더기가 있어서, 물질‧정신 무더기에 의지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이 있어서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귀가 있어서 듣고 싶은 것을 듣는다. 코가 있어서 원하는 향기를 맡는다. 혀가 있어서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몸이 있어서 여러 감촉을 경험한다. 심장과 마음이 있어서 여러 대상을 안다. 이것은 모두 행복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의 관점으로는 그러한 행복들은 모두 괴로움일 뿐입니다.
그리고 물질이 있어서 물질에 의지해서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정신이 있어서 정신에 의지해서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물질‧정신이 없으면 어떠한 괴로움도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물질‧정신 무더기는 괴로움이 생겨나는 기초, 근거일 뿐입니다. 이렇게 괴로움이 생겨나는 데 근거, 기초이기 때문에 다섯 무더기를 ‘무더기근거’라고 부릅니다. 이 내용을 잘 기억하도록 게송을 독송합시다.
감각욕망 다섯 거리 감각욕망 근거라네
다섯 가지 무더기가 무더기∼ 근거라네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의 번뇌들 때문에 현생에서도 여러 고통과 괴로움을 겪어야합니다. 윤회에서도 지옥의 괴로움, 아귀의 괴로움, 축생의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사람의 괴로움, 천신의 괴로움도 겪어야 합니다. 이렇게 현생의 괴로움과 윤회의 괴로움이 생겨나는 기초, 근거이기 때문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의 번뇌들을 번뇌근거라고 부릅니다. 이 게송도 같이 독송합시다.
탐진치 등 번뇌들을 번뇌근거 라고 하네
선업과 불선업을 ‘업형성’이라고 한다는 내용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보시, 지계, 사마타 수행이라는 선업, 업형성은 사람, 천신, 범천이라는 선처의 생에 태어나게 합니다. 범부의 시각으로는 그렇게 태어나는 것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의 시각으로는 태어난 생에서 늙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 등 여러 괴로움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나는 것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선업 업형성은 사악도에 태어나게 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괴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업형성도 괴로움의 기초, 근거이기 때문에 ‘업형성근거’라고 말합니다. 이 게송도 같이 독송합시다.
선업과∼ 불선업이 업형성∼ 근거라네
적정의 요소인 열반을 아라한도를 통해 보면 이 네 가지 근거가 모두 없어집니다. 그 네 가지 중에 번뇌근거가 제일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번뇌가 없으면 업형성이라는 업이 더 이상 과보를 생기게 할 수 없습니다. 업이 새로운 생의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면 다섯 무더기라는 근거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무더기가 없으면 감각욕망거리라는 근거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번뇌근거가 제일 바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한도 통찰지의 위력으로 번뇌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근거들도 완전히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열반을 “모든 근거들을 멀리 버린 곳”이라고 말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어떤 장소가 아니라 아라한도의 위력으로 모든 근거가 적정해진 성품일 뿐입니다.
선(善)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불선업을 하면 사악도에 태어나므로 괴로움인 것을 알겠는데, “선업을 해서 선처에 태어나도 늙고 죽는 괴로움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도 부처님의 시각으로는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선업도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레디 사야도께서는 “불선업은 괴로움을 초래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고, 범부들이라면 선업을 하지 않으면 불선업을 하게 된다. 그러면 지옥 등에 태어나서 과보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보다는 사람 천신 범천 세상에 태어나서 받는 고통이 사악처의 고통보다는 낫기 때문에 선업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소멸의 엄밀한 의미
열반을 “갈애가 다한 곳, 애착이 빛바랜 곳”이라고도 설명하셨는데 이것도 제2강에서 “애착이 생기지 않음. 적정함”이라고 설명한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소멸된 곳”이라고도 설명하셨는데 이것은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업)이 소멸한다. 형성이 소멸하기 때문에 의식(재생연결마음 등 새로운 생의 의식)이 소멸한다.” 등으로 설명하신 환멸 연기 가르침과 동일합니다. 환멸 연기에 대한 주석에서 ‘소멸’이란 열반을 뜻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모든 형성이 가라앉은 곳”
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께왓따 숫따를 인용하여 부연 설명하겠습니다.
께왓따(Kevaṭṭa, Kevaddha) 경. https://cafe.daum.net/satisamadhi/8fL2/542 참조)
“특별한 지혜로 알아지는 열반은
①볼 수 없고, ②한계 없고, 모든 곳에서 분명하다.
그곳에는 물도 땅도 바람도 불도 머물지 못하며
긴 것 짧은 것, 작거나 큰 것,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
정신과 물질이 남김없이 소멸한다.
의식이 소멸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모든 법이 소멸한다.
(의식=완전열반의 임종의식, 업형성의 의식)”
설명 :
① 열반은 볼 수 없다. : 형체로서 어떤 같은 것이 없습니다.
알아지는 것(viññāṇaṁ) : 적정의 요소인 열반은 네 가지 도의 지혜(특별한 지혜)로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위빳사나 수행을 하지 않고서 그냥 보통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유추해서는 볼 수도 알 수도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물질정신법들이 생길 때마다 분명한 물질정신법들을 위빳사나로 거듭 관찰해서, 물질과 정신, 조건과 결과, 생김과 사라짐, 무상 괴로움 무아인 특성을 계속 알고보고, 또 알고보아서, 형성평온의 지혜가 생기고, 이 지혜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때,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그 물질을 관찰해서 알고 알다가, 성스러운 도라는 특별한 지혜로 물질정신 형성이 완전히 적멸한 열반을 알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하시 사야도께서 가장 간략하게 설하신 수행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념처경에서도 이 방법이 열반으로 가는 오직 한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따라 계속 수행한다면 그 길의 끝인 열반에 확실하게 도달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열반을 알고 볼 때 앞에 놓여 있는 어떤 사물을 보는 것처럼 형체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열반은 보통의 눈으로 봐서 알 수 없습니다. 또 궁리하고 연구하고 생각하고 숙고하는 지혜로도 볼 수 없습니다. ‘무엇과 비슷하게 생겼다.’라고 비교할 만한 형체도 없습니다. 관찰해서 아는 앎까지 포함해서 모든 물질정신 형성들이 완전히 소멸해 버린 성품으로만 압니다. 한 순간도 끊임없이 계속 생멸하고 있는 물질정신 형성들이 완전히 없는 성품으로만 압니다. 어떤 것을 잡아서 완전히 버린 것처럼, 완전히 내동댕이친 것처럼 모든 형성들이 다 해버린 것으로만 압니다. 정신적인 측면에도 그 찰나에는 대상으로 기울이는 마음, 숙고하는 마음, 관찰해서 아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몸을 포함한 모든 물질도 모두 비워버린 것처럼만 압니다. 이것이 적정의 요소인 열반을 성스러운 도라는 특별한 지혜로 알고 보는 모습입니다. 마음이 없다는 것, 몸이 비어버렸다는 것을 지금은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수행을 열심히 하셔서 직접 열반을 경험하실 때 ‘아, 스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거로구나.’라고 아실 것입니다. 언제? 열반을 직접 경험할 때까지 계속 수행한 다음에.
② 열반은 한계가 없습니다. 열반을 제외한 실재 성품들(마음, 마음부수, 물질)은 조건에 따라서 생겨서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생김과 사라짐이 있지만, 열반은 처음인 생김과 끝인 사라짐이 없습니다. 열반은 번뇌 업 무더기가 생기지 않는(소멸한) 성품입니다. 생김이 없으므로 사라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처음과 끝이라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 생기지 않음(적정함)이라는 성품은 아라한도의 지혜의 힘에 의해서 갖춰집니다. 하지만 아라한도 지혜의 순간에 그 적정함이 생기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아라한이 완전열반할 때의 임종마음 바로 이후에 새로운 생의 물질정신 무더기가 더 이상 생기지 않고 완전히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서야 완전히 적정한 성품이 생긴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생기지 않는 성품, 적정한 성품이므로 당연히 생김이 없습니다. 생김이 없기 때문에 사라짐도 없습니다.
이상 열반은 심오해서 매우 보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