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시 사야도의 병문안 법문(재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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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코로나19를 비롯해 중병에서 가벼운 병까지 여러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께서 병과 관련된 훈계해주신 법문을 다시 소개합니다.(2021.02.11 올려진 글)
위험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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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 市에 보내는 인사 1952.7.2.(음력 6월 하현의 11일)
오늘은 양곤 市, 사사나 수행센터에서 고향인 쉐보 市에 있는 재가자들, 세익쿤 마을에 있는 재가자들, 비구들, 이러한 모든 제자들에게 훈계의 말을 하려고 합니다. 훈계라 하지만 본승(마하시 사야도)이 최근에 겪은 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수행센터로 돌아왔을 때 신도들이 인사하러 왔고, 그때 축원의 의미로 훈계한 내용을 들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법문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서 설하겠습니다.
본승이 병에 걸려, 건강이 좋지 않아 양곤 병원에 입원해서 지낼 때 마음에 고향의 신도들도 생각나고, 법의 성품도 반조하고 숙고해서 이러한 내용을 말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그렇게 몸이 좋지 않다가 어느 정도 편하게 되어 건강이 좋아졌을 때 생각마다, 생각마다 지혜가 선명해서 매우 좋았습니다. 마음 기울일 때마다, 마음 기울일 때마다 법들도 잘 드러나서, 고향에 있는 신도들에게 법을 설하려는 마음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건강이 어느 정도 좋아서 잘 지내기는 했지만 밤이 되면 잠을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수면제를 복용하고서야 하룻밤에 한 시간, 두 시간 정도 잠에 들었습니다. 잠에 들지 못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 있을 때가 많아지자 밤이나 낮이나 차소리, 기차소리, 이러한 소리들이 거의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들렸습니다. 그렇게 들릴 때마다 마음에 어떤 생각들이 일어났는가 하면 네 가지 진리(사성제)가 특별히 드러났습니다.
음, 지금 오가는 사람들은 각자 행복하게 해 주는 것들을 구하고 찾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고, 오고, 일하고, 먹고, 마시면서 자신의 몸 무더기를 여러 가지로 부양하고 돌보고 있는 것을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행복이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물질법, 정신법, 괴로움들만 존재합니다. 자세하게 숙고해 본다면 여러 가지로 돌보고 있는 중에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돌봐야 하다면 어찌 그것이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괴로움일 뿐입니다. 대략적으로 계산해 본다면, 그렇게 오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돈을 구하기 위해 가는 것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즐기려고 가는 것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과 관련된 이가 건강하지 않아 급하게 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가 건강하지 않아 자신의 건강을 위해 이리저리 다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부는 자신과 관련된 이가 어떤 위험, 장애가 생겨 그 위험, 곤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방편을 찾으러 다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숙고하자 ‘이리저리 다니는 중생들 중에 어떠한 이도 편안한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모두가 진실로 괴로움을 겪고 있구나’라고 본 승의 지혜에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간략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지금처럼 가거나 올 때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을 의지해서 움직이고 바뀌는 물질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매번 생겨나는 물질과 정신들은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법들이기 때문에 괴로움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오가고 있는 사람들 모두의 상속에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법들은 괴로움(고성제)일 뿐입니다. 온 세상에 있는 중생들 모두의 상속에도 이렇게 생멸하고 있는 법들은 괴로움일 뿐입니다. 그것을 괴로움인 줄 모르기 때문에 중생들은 지금처럼 가고, 오고, 먹고, 마시고, 지내는 것도 즐길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을 사람의 행복이라고, 천상의 행복이라고, 범천의 행복이라고, 매우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즐기고 거머쥐고 다시 지냅니다. 그렇게 즐기고 거머쥐면서 지내는 것은, 좋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겨남의 진리(집성제. 탐욕. samudayasaccā)입니다.
그 괴로움의 진리(고성제)와 생겨남의 진리가 중생들의 상속(몸과 마음의 연속)에 밤낮으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은 이전에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몸이 불편하기 시작하자 숙고할 때마다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렇게 분명한 것을 구족하게 설하려는, 말해 주려는 마음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밤낮으로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물질·정신 형성법들이라는 괴로움의 진리들과, 그 괴로움일 뿐인 것들을 행복한 것, 즐길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즐기고 좋아하는 생겨남의 진리들, 이렇게 괴로움의 진리와 생겨남의 진리가 있는 한, 그 기간 내내 결코 고요하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 두 가지 진리 모두가 완전히 생겨나지 않아야, 완전히 없어져야 그것이 진짜 행복, 소멸의 진리입니다.
소멸의 진리에 도달해서 직접 알고 보도록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팔정도 법들도, 매우 고요하고 행복한 열반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에 도달하게 하는 진짜 바른 법이구나라는 사실도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잠에 들지 못할 때마다 숙고의 지혜에 선명하게,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때 어느 날, 병원 근처에 있는 떠예또짜웅다익에 주석하는 따운빌루 바야도가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문안을 왔습니다. 당시 사야도는 법 선물로 게송 하나를 빠알리어로만 독송했습니다. 자신도 이전에 몸이 불편할 때 어떤 사야도가 법 선물로 준 적이 있어서, 그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마하시 사야도에게도 이 법 선물을 주고 싶다고 하면서 그 게송을 빠알리어로만 세 번 독송해 줬습니다.
Ābādhe me samuppanne, sati me udapajjatha;
Ābādho me samuppanno, kālo me nappamajjituṃ.(Thag.30게/Thag.226)
나에게 병이 생겨나자, 나에게 새김(사띠)이 일어났네;
나에게 병이 생겨났으니, 방일할 때가 아니네.
이 게송은 『테라가타』 성전에 나옵니다. 웃띠야Uttiya 장로의 감흥어 게송입니다.
Ābādhe me samuppanne, sati me udapajjatha;
Ābādho me samuppanno, kālo me nappamajjituṃ.
이렇게 따운빌루 사야도가 빠알리어로 독송하자, 본승도 매우 기뻐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야도, 지금 독송해 주신 법 선물 게송이 매우 가치가 큽니다, 스님. 게송에서 말하고자 하는 원래 의미도 매우 심오합니다. 도의 지혜, 과의 지혜에 도달하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 법 선물 게송을 듣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라는 등으로 말하고 나서 자신의 지혜에 드러나는 대로 그 의미도 본 승이 다시 설명하면서 말했습니다. 사야도도 기뻐하며 사두를 외치신 뒤 돌아가셨습니다.
그 게송의 의미를 이제 설하고자 합니다. 건강하지 않아 병이 생겨나면 새김(사띠. 알아차림. 관찰)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새김이 일어나는가 하면, ‘나에게 병이 생겨났다. 이렇게 병이 난 시기는 방일하게 지낼 시기가 아니다’라고 새김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그 게송이 말하고자 하는 간략한 원래 의미입니다.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건강하지 않을 때, 병에 걸렸을 때 새김이 일어났다는 것은 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에 도달하는 데 조건이 됩니다. 여기서 ‘새김이 일어났다’라는 것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나에게 병이 생겼다. 이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죽기 전에, 아직 힘이 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갖출 수 있는 만큼 갖추도록, 증득할 수 있는 만큼 증득하도록 노력하리라’라고 이렇게 일어나는 새김이 한 종류입니다. 이러한 새김은 선법을 노력하도록 자극하고 격려하기 때문에 그것을 ‘kārāpaka sati’라고 합니다. ‘행하게 하는 새김, 행하도록 격려하고 시키는 새김, 근본원인이 되는 새김’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조건이 되는 새김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일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 조건인 새김을 통해 실제로 일어나는 결과인 새김이 기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행하는 새김입니다. 그래서 이 새김을 ‘kāraka sati’라고 말합니다. ‘행하는 새김’이라는 뜻입니다. 행하는 새김이 생겨나는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건강하지 않을 때, 병에 걸려 괴로움을 겪을 때 그 괴로운 느낌을 비롯해 그때 존재하는 물질법과 정신법이 생겨날 때마다, 생겨날 때마다 순간도 끊임없이 따라서 새겨야 합니다. 괴로운 느낌이든, 몸의 행위라는 물질법이든, 마음 현상이라는 정신법이든, 어떠한 하나도 놓치지 말고 관찰하고서 새겨야 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기는 것을 두고 방금 언급함 ‘kāraka sati, 행하는 새김, 결과인 새김’이라고 부릅니다. 이 결과인 새김은 단계단계 향상되면 도의 지혜, 과의 지혜, 열반에 단번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도달할까요? 보통 사람들이라면 건강하지 않을 때, 병에 걸렸을 때 새김을 확립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전에는 건강했다. 좋았다. 지금은 건강하지 않다. 괴롭다. 고통을 겪고 있다. 심한 병이다. 잘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등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으면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나는 원래 행복했는데 이제 건강하지 않은가? 왜 괴로운가?’라고 성냄이 늘어납니다. 그렇게 화를 내면서 성냄이 늘어나면 그에게는 새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김을 확립하지 못합니다. 각각, 자신의 찰나에 따라 생멸하고 있는 물질·정신 성품법들을 그는 지배할 수 있는 나라고, 중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행복했던 것도 나, 지금 괴로운 것도 나’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각각 생멸하고 있는 괴로운 느낌을 지배하지도 못하면서 즉시 사라지도록 조정하려고 합니다. 기대하고 바랍니다. 하지만 물질·정신 법들은 그가 생각한 대로 지배할 수 있는 자아가 아니라서 그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정신 법들이 생겨날 때마다, 사라질 때마다 새겨서 사실대로 바르게 알지 못해서입니다.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인 이들이라면 병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다음과 같이 새김을 확립합니다. ‘음, 이 병을 조건으로 화를 내면 안 된다’라고 새김을 확립합니다. ‘음, 나에게 죽음 왕의 부하인 병으로 인한 괴로운 느낌과 맞닥뜨렸다. 내편인 약사나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이나 치료가 이길지, 죽음 왕의 편인 병이 이길지 모른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병이 이겨서 이 병으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 죽기 전에 특별한 법, 거룩한 법을 얻도록 노력하리라’라고 이렇게 새김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수행주제를 직접 가지고 있는 수행자들에게 새김이 생겨나는 모습입니다. 수행주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매우 수준 높은 새김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계를 수지하리라. 보호경을 들으리라. 가사를 보시하리라. 약을 보시하리라’라는 이 정도의 새김만 생겨나서 보시와 계 정도만 행할 수 있습니다. 수행주제를 가진 이들은 방금 언급한 대로 특별한 법, 거룩한 법을 얻을 때까지 노력하려는, 수준 높은 새김을 확립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새김을 확립한 것만으로는 일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김을 확립한 대로 끊임없이 새겨 특별한 법을 얻을 때까지 노력해야 일이 성취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새김을 확립한 이들은 자신의 상속에서 생겨나는, 받아들이기 힘든 괴로운 느낌을, 그것이 생겨날 때마다, 생겨날 때마다, 그것이 생겨나는 그곳에 집중하고 집중해서 따라서 새겨야 합니다. 아프면 <아프다, 아프다>라고 새깁니다. 쓰리면 <쓰리다, 쓰리다>라고 새깁니다. 찌르면 <찌른다, 찌른다>라고 새깁니다. 쑤시면 <쑤신다>라고, 피곤하면 <피곤하다>라고, 힘들면 <힘들다, 힘들다>라는 등으로 몸에서 생겨나는 느낌들을, 그것이 생겨날 때마다, 생겨날 때마다 집중해서 새겨야합니다. 삼매와 지혜의 힘이 구족됐을 때라면 그렇게 집중해서 새길 때, 저쪽 몸에서 견디기 힘든 느낌 하나가 생겨나면, 여기서 새기는 마음이 하나가 생겨나고, 다시 저쪽에서 괴로운 느낌 하나가 생겨나고, 이렇게 괴로운 느낌이 생겨날 때마다, 생겨날 때마다,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구분해서 압니다. 느낌만이 아닙니다. 새기는 새김과 지혜도 새겨 알고 사라지고, 다시 새겨 알고 사라지고, 이렇게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면서 항상하지 않은 모습이 분명합니다. 비유하자면 콧수염을 털집게나 족집게로 한 가닥씩, 한 가닥씩 집어서 뽑아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몸에 견디기 힘든 괴로운 느낌이 생겨나면, 그것을 새기고, 다시 사라지고, 이것은 느낌과 새김이 한 쌍씩, 짝을 이루어 탁, 탁, 끊어지는 것을 차례대로 새겨 아는 것입니다.
지금 언급한 느낌만이 아닙니다. 느낌 외에도 본 것들, 들은 것들, 닿은 것들, 안 것들 등 여섯 문에 드러나는 모든 대상들도 그렇게 드러난 대로 관찰해서 알고 있습니다. 대상 하나가 드러나면 그것을 관찰해서 알고, 다시 그것이 사라지고, 다른 대상이 다시 드러나고, 그것을 관찰해서 알고, 다시 그것이 사라지고,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의 앎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질이든 느낌·인식·형성이든, 의식이든, 생겨나는 대로,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놓치지 않고 모두 새겨 알고 있습니다. ‘나는 죽기 전에 이 법을 노력하리라. 특별한 법을 얻기 전에는 이 법을 놓쳐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놓치지 않고 쭉 새기리라’라고 마음 기울여 끊임없이 새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의 새김 다음에 다시 하나의 새김, 단계단계 잊어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고 새겨 아로 있는 것을 ‘결과인 새김’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겨 알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앞의 게송에서 “kālo me nappamajjituṃ”이라고 한 것입니다. ‘도와 과에 도달하도록 방일하지 말고 끊임없이 관찰해야 할 시간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관찰하다가 그 새김이 단계단계 향상되고 무르익어서 마지막엔 그렇게 새기고 새기는 중에 끊임없이 생멸하는 물질·정신 형성들, 괴로움들이 완전히 소멸한 열반이라는 법에 도의 지혜, 과의 지혜로 도달합니다. 그렇게 도달할 때까지 웃띠야 장로가 스스로도 노력했고,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이 웃띠야 장로가 감흥어를 읊은 것입니다.
Ābādhe me samuppanne, sati me udapajjatha;
Ābādho me samuppanno, kālo me nappamajjituṃ.(Thag.30게/Thag.226)
나에게 병이 생겨나자, 나에게 새김(사띠)이 일어났다네;
나에게 병이 생겨났으니, 나에게 방일할 시간 아니네.
Me나에게 ābādhe병이 samuppanne생겨나자 sati새김이 me나에게 udapajjatha일어났다. kinti어떻게 일어났는가? me나에게; 나의 상속에 ābādho병이 samuppanno생겨났다. (iminā eva ābādhena바로 이 병으로 maraṇaṃ vā pāpuṇeyya죽음에도 이를 수 있다. tasmā그러니 idāni지금은) me나에게 pamajjituṃ방일할; 관찰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지내는 na kālo시간이 아니다. atha kho사실은 nappamajjituṃ kālo방일하지 말아야 할; 잊어버리지 않고 하나의 새김으로 끊임없이 관찰해 나가야 할 때이다. iti이렇게; 이렇게 숙고하고 마음 기울이며 sati새김이 udapajjatha일어났다.
지금 본승이 직접 갈 수 없어서 이 게송을 법의 선물로 삼아 녹음해서 북쪽 도시에 있는 관련된 사람들 모두가 듣도록 보내는 것입니다. 이 훈계를 듣고 특히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인간 세상에 포함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물질, 느낌, 인식, 형성, 의식이라는 다섯 무더기, 물질·정신 무더기도 전혀 의지할 만한 법이 아니라는 것, 조건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막론하고 병에 걸려 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만약 건강이 좋지 않으면 이 웃띠야 장로의 감흥어대로 마음 기울여서 노력하면서, 나쁜 일 중에 좋은 것을 얻도록, 거룩한 것을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끄집어내도록 그렇게 생겨나고 있는 느낌을 시작으로 물질과 정신이 생겨날 때마다, 생겨날 때마다 그것에 집중해서 끊임없이 관찰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관찰해 나가다가 그 웃띠야 장로처럼 건강하지 않는 중에 특별한 법, 거룩한 법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법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특별한 삼매와 지혜는 확실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관찰과 새김에는 새김 깨달음 구성요소 등 깨달음 구성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에 질병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편해지는 것은 확실히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하시 새김확립회 모두와 관련된 규율을 제정하는 일과 관련해서 5분 정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마음 기울여야 할, 제일 중요한 것으로 특히 새겨야 할 것은 자신의 상속에 있는 형성법들은 ‘vayadhammā saṅkhārā’라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사라지기 마련인 법이라는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상속에 있는 몸도, 생각하는 마음 등의 정신도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대로 유지되던 대로 유지된다고, 나로서, 중생으로서, 한 존재로서 그대로 유지되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상속에 있는 물질법과 정신법이라는 것은 눈 한 번 깜박할 사이, 번갯불이 한 번 번쩍할 사이조차 그대로 유지되지 않고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습니다. 찰나마다, 찰나마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혀 의지할 만한 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닌 형성법들을 높게 평가해서 의지하지 않도록, ‘나는 아직 어리다. 건강하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다’라는 등으로 그것을 의지하며 지내지 않도록, 그렇게 의지하지 않고서 그 형성법들을 ‘언제든 상관없이 병들 수 있는, 죽을 수 있는 법이다. 매우 두려워할 만한 법이다’라고 사실대로 바르게 보도록 숙고하고 마음 기울이고서 자신의 상속, 여섯 문에서 드러나는 모든 물질·정신 법들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도록 ‘appamāda’라는 새김법으로 새겨서 각자 바라는 도와 과, 열반이라는 특별한 법, 거룩한 법을 직접 손에 거머쥘 때까지, 아직 좋은 시기일 때, 노력하고 노력하도록 본 승이 매우 강조하며, 특별히 격려합니다.
이렇게 본 승이 격려한 대로
자신의 상속에 물질·정신 형성법들을 의지하지 말고,
끊임없이 생멸하는 그 물질·정신 형성들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도록
‘appamāda(불방일)’라는 새김법으로 구족하게 관찰하고 새겨서
모든 고통이 완전히 소멸한 열반이라는 거룩한 법을
각자 기원하는 도의 지혜, 과의 지혜로
빠르게 도달하여 실현하기를.
[출처] 마하시 사야도의 병문안 법문(재업로드) (한국마하시선원) | 작성자 담마간다
일부 용어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