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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마을]열반 33강 고따미 장로니의 완전열반-일부 메모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1.10.14|조회수57 목록 댓글 3

열반 33강 고따미 장로니의 완전열반(2)

우 소다나 사야도 법문

일창 스님 통역

이것은 강의 내용 일부의 메모를 편집한 것으로 스님들의 검증을 받지 않은 것이며, 주석과 첨부는 메모자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보내거나 인터넷에 게시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상세한 강의 내용 전체는 한국마하시선원 카페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541 참조.

https://cafe.naver.com/koreamahasi/2542 도 참조.

일부 용어 변경.

 

교재 : 『열반에 관한 법문』 (마하시 사야도 원법문, 한국마하시 사야도 우 소다나 재법문, 비구 일창 담마간다 편역, 도서출판 불방일, 2021년 4월 5일 출간)

 

고따미 장로니의 완전열반(2)

 

부처님께서 발을 펴시자 고따미 장로니는 그 발에 이마를 대며 예경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장로니는 길상스런 게송 세 개를 읊었습니다.

 

길상스런 세 게송

 

울려야 할 울림으로 북을 울리듯

대중 가운데서 읊으시는 당신의

설하시는 모습을 어떤 이들 본다면

그들은 복자福者입니다, 사람들의 앞선 분이여.

 

“거룩하신 부처님의 존안을 지금 제가 뵙는 것은 마지막입니다. 이후로는 뵐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천신들은 부처님께서 법문하실 때 황금 입과 존안을 뵐 것입니다. 그렇게 친견할 수 있는 사람이나 천신들은 모두 복덕이 매우 크고 많습니다. 복덕이 큰 사람과 천신들은 부처님의 황금 입과 존안을 뵐 것입니다. 제가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긴 발가락, 붉은 발톱.

뒤꿈치가 길쭉한 아름다운 발.

당신의 발에 어떤 이들 예경한다면

그들도 복자입니다, 덕목 지닌 분이시여.

 

“거룩하신 부처님의 발에 지금 제가 예경 올리는 것은 마지막입니다. 이후로는 예경 올릴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천신들은 분명히 현존하시는 부처님께서 예경을 올릴 것입니다. 그렇게 예경 올릴 수 있는 사람이나 천신들은 모두 복덕이 매우 크고 많습니다. 복덕이 크기 때문에 나중에도 예경할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①달콤하고 부드럽고 ②기쁘고 즐겁게 해.

허물 없애 ③청량하고 ④들을 때 이익 주는

어떤 이들 그분 법문 들을 수 있다면

그들도 복자입니다, 사람 중에 으뜸이신 분이시여.

 

게송 중에 “들을 수 있다면; 들을 것입니다(sossanti)”라는 표현과 관련해서 원문은 “suyyanti”라고 표현됐습니다. 이것은 “ye”라는 관계대명사와도 격이 맞지 않고 앞서 두 게송에서 미래 시제로 표현한 ‘dakkhanti’, ‘paṇamissanti’라는 단어들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고따미 장로니가 자신이 완전열반에 들 나중의 시기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상황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sossanti”라고 대역했습니다.

 

이 게송에 의하면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이들은 매우 기뻐할 만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시는 법문을 들을 수 있었던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서도 업이 좋고 법을 알아서도 업이 좋은 것입니다. 두 종류, 두 방면 모두로도 업이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시대 부처님의 제자들은 한 번 거쳐서 전해지는 가르침을 듣기 때문에 법을 아는 한 종류, 한 방면으로 업이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을 아는 것입니다. 소리만을 대상으로 하고 법을 알지 못하면 가치에 그리 걸맞지 않습니다. 법을 알고 이해한 뒤 그 법에 바르게 마음 기울이고 노력해서 특별한 법까지 깨달으면 그것이야말로 제일 좋고 거룩합니다.

 

따라서 지금 시대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한다는 것, 수행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구족한다는 것, 위빳사나 지혜가 무르익어 성스러운 도과의 지혜로 열반을 실현하고 경험하고 본다면 그러한 이들은 매우 업이 좋은 것입니다. 제일 낮은 단계로 수다원만 되도 매우 업이 좋습니다. 사다함이나 아나함, 나아가서 아라한까지 된다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매우 업이 좋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법문을 듣는 여러분들도 ‘우리들은 매우 업이 좋구나.’고 회상하면서 기뻐할 만합니다.

 

이 게송의 처음에 부처님의 음성을 “①달콤한(madhurāni); 달콤하고 부드러워 매우 듣기에 좋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지금은 부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헌에 가릉빈가(Karavīka) 새의 음성처럼 부드럽다고 표현하고 있어서 그 새의 음성을 들으면 비교하여 추측하며 존경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리담마소까(줄여서: 아소까) 대왕의 왕비인 아산디밋따(Asandhimittā)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손가락 관절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아름답고 우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결이 없는(asandhi)’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 왕비가 가릉빈가 새소리를 듣고서 ‘부처님의 음성은 이 새소리보다 몇 백배나 더 부드러웠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온 몸에 희열이 퍼졌습니다. 그 희열에 마음 기울여 관찰해서 찰나에 수다원이 됐다고 합니다.

 

지금 미얀마에는 그 가릉빈가 새가 없는 듯합니다. 어디에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전에 야카인 주의 시트웨 부근, 묘우하웅이라는 도시에서 법문을 하러 갔을 때 옛날 야카인 왕이 창건했던 법당 한 곳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 건물의 한쪽 벽에 보살의 여러 모습과 새의 모습, 짐승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소개하는 이가 가릉빈가의 모습이라고 보여 줬습니다. “이 새를 직접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묻자 직접 본 적이 있다는 사실, 묘우하웅의 논에서 볼 수 있고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데 소리가 매우 좋다는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직접 가릉빈가를 보고 듣고자 한다면 그 지역으로 가서 조사해 보십시오. 미얀마 지역에 있는 새들 중에 미얀마의 귀에 제일 듣기 좋고 달콤한 새는 우오새(뻐꾸기)입니다. 부처님의 음성은 그 뻐꾸기보다 더 달콤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의 음성을 “듣는 이의 마음을 ②기쁘고 즐겁게 하는”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까마숫따(감각욕망 경)」에 나오는 농부 바라문이 자신의 밀밭이 홍수에 망가져서 크게 슬퍼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그에게 가셔서 그 상황에 적당한 「까마숫따」를 설하셨습니다. 법문을 듣고서 그 바라문과 바라문의 아내는 위빳사나 지혜가 차례대로 향상돼 수다원이 됐습니다. 마음의 깨끗함,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첨부 법구경 게송 216 참조)

 

아자따삿뚜 왕은 부왕인 빔비사라 왕을 시해해서 잠도 들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부처님께 가서 사문됨의 이익(sāmaññaphala)에 관해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를 시작으로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 계가 청정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등으로 아라한이 되는 것까지 여러 이익을 차례대로 설하셨습니다.

 

​아자따삿뚜 왕은 그 법문을 들으면서 마음이 깨끗하고 편안하고 행복해졌습니다. 부친을 시해한 불선업이 없었다면 그 법문을 들으면서 수다원 도과라는 특별한 법을 얻을 수 있을 정도의 바라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친을 시해한 업 때문에 도과를 얻지 못한 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 법문을 들은 뒤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것, 마음이 깨끗하고 편안한 것 등의 이익들을 얻었습니다.

 

이어서 “여러 허물을 없애 깨끗하고 ③청량한(dosagghāni)”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악행, 불선업의 허물을 없앨 수 있습니다. 법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행했던 악행의 허물을 보고서 ‘그러한 악행은 다시 하지 않으리라’라고 결심하고서 삼가면 그 불선업의 허물로부터 청정해질 수 있습니다. 법문을 듣고 마음 기울이고 관찰해서 위빳사나 선업을 닦아 나가면 사악도에 떨어지게 하는 불선업의 허물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55년간 사형을 집행한 땀바다티까라는 망나니는 사리뿟따 존자의 법문을 들으면서 위빳사나 선업을 닦아 다음 생에 사악도에서 벗어나 도솔천에 태어났습니다. 앙굴리말라 존자처럼 불선업의 허물 모두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사람을 죽여 검지손가락을 하나씩 가졌습니다. 문헌에는 999명을 죽였다고 하지만 일부 손가락은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죽인 사람은 천 명 이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부처님께서 제도하셔서 부처님의 앞에서 출가한 뒤 수행해서 아라한이 됐습니다. 천 명 이상 죽인 불선업의 허물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④들을 때마다, 귀 기울일 때마다 즉시 이익도 생겨나게 하는”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법문을 듣고 그 법에 따라 실천하면 세간의 이익과 번영도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음주나 도박, 유흥 등으로 재산이나 사업이 무너진 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여 그렇게 재산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사라져 다시 재산이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윤회의 이익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특별히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귀의를 하는 것만으로도 악도에서 벗어나 천상계 등 선처에 태어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계를 수지하는 것 등으로는 더욱 큰 이익을 생겨나게 합니다. 위빳사나 관찰을 하면 지금 현재 마음의 걱정이 사라지는 이익도 얻을 수 있고 성스러운 도과에 도달하는 이익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첨부

햇곡식을 부처님께 바치지 못해 괴로워하는 바라문

 

갈애에서 슬픔이 생기고

갈애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갈애에서 벗어난 이에게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법구경 게송 216)

 

사왓티에 아직 불법을 받아들이지 않은 바라문 농부가 살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가 머지않아 수다원을 성취할 것을 아시고 자주 그를 찾아가시어 대화를 나누시곤 하였다. 그러자 농부는 자기가 불교 신도가 아닌데도 부처님께서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을 매우 고마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고따마 사문이시여, 이 논에서 수확을 하면 제가 먹기 전에 당신께 먼저 햇곡식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께 햇곡식을 바치기 전에는 단 한 톨의 곡식도 먹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농부가 그 해에는 논에서 수확을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므로 그의 제안에 대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가 벼를 거두어들이려는 바로 전날 밤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그만 애써 키운 곡식이 모두 홍수에 휩쓸려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농부는 고따마 사문께 햇곡식을 바치고자 하는 소원을 이룰 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는 무 척 괴로워했다. 그때 그의 집을 방문하신 부처님께 그가 홍수로 인 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씀드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바라문이여, 슬픔이나 두려움은 갈애에서 생긴다.”

이어서 부처님께서 게송을 읊으시자 바라문 농부는 수다원을 성취 하고 재가신도가 되었다.

 

출처 : 오원탁 엮음, 『법구경_하루를 살더라도』, 불교시대사, 267-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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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금강 | 작성시간 21.10.15 사두사두사두
  • 작성자혜문 | 작성시간 21.10.15 사두 사두 사두 ~~^^
  • 작성자혜 수 | 작성시간 21.10.15 고맙습니다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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