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초전법륜경 법문
구나라타나 스님
오원탁(향원) 메모
2018년 3월 수정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뚜띠얌삐 붓당 사라낭 갓차미
뚜띠얌삐 담망 사라낭 갓차미
뚜띠얌삐 상강 사라낭 갓차미
따띠얌삐 붓당 사라낭 갓차미
따띠얌삐 담망 사라낭 갓차미
따띠얌삐 상강 사라낭 갓차미
목차
일러두기 …
1. 경전의 배경 …
2. 경전의 개략적 설명 …
3. 마라 …
4. 여래 …
5. 양 극단 다섯 가지 …
6. 검은 소와 흰 소 …
7. 눈을 뜬 장님과 꼰단냐 존자 …
8. 60가지 즐기는 것 …
9. 숩빠붓다 이야기 …
10. 차제설법 …
11. 수다원 …
12. 지계의 중요성 …
13. 십바라밀 …
14. 말 조련사와 찬나 비구 …
15. 스승의 잘못을 안 부처님의 천재성 …
16. 진리의 권위자 …
17. 진리의 맛 …
18. 기억해야 할 것 …
19. 기타 사항 …
첨부
1. 초전법륜경 …
2.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 …
3. 12가지 진리 …
4. 케마까 경 …
5. 팔정도에 대한 사띠의 요점 …
6. 계 경 …
7. 위빳사나 제1선~제4선 …
8. 보배경(일부) …
.................
일러두기
1. 이 자료는 홍원사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신 구나라타나 스님께서 20008년 10월 27일에서 2008년 11월 2일까지 집중수행을 지도하시면서 초전법륜경에 대해서 법문(최숙희 선생님 통역)하신 다음 DVD의 일부를 메모한 것입니다. 훌륭한 스님을 초청해 주신 성오스님을 비롯한 홍원사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구나라타나 스님 DVD 법문, 『초전법륜경 강의』, 홍원사.
일부 용어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로 하여 변경하였으나 가급적 스님께서 법문하신 내용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① 마하시 아가 마하 빤디따 지음, 김한상 옮김, 『초전법륜경』, 행복한 숲, 2011.
② Translated by U Ko Lay, 『A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f Dhamma (Dhammacakkappavattana Sutta by The Venerable Mahāsī Sayādaw』, 1995, Buddha- sāsana Nuggaha Organization, Mahasi Sāsana Yeiktha, Yangon, Myanmar.
③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 6』, “초전법륜경”, 2009, 초기불전연구원, 384-392쪽.
④ 일창 스님, 『부처님을 만나다』, 이솔, 2012.
⑤ 한국마하시선원, 『수행독송집』, “초전법륜경”, 2014, 174-201쪽.
⑥ 빤디따라마 서울 위빳사나 명상센터, 『예경독송문』, “초전법륜경”, 2008, 246-285쪽.
⑦ http://www.accesstoinsight.org/tipitaka/sn/sn56/sn56.011.than.html
2. 생략
3. 모든 주석은 메모자의 주석이며 첨부도 메모자가 첨부한 것입니다.
1. 경전의 배경
<20081027>
지금부터 초전법륜경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이 경의 배경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부처님께서 자신의 가장 큰 과제를 깨달으시고 극복했는지 여러분이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셨을 때, 진리를 발견한 결과가 100% 확고하고 순수하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것이므로 그 배경을 여러분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날 밤 초경(오후 6시-10시)에 부처님 자신의 전생을 아는 숙명통(宿命通)을 얻으셨고, 이경(오후 10시-새벽 2시)에 다른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각자의 업에 따라 윤회하는지를 아는 천안통(天眼通)을 얻으셨고, 삼경(새벽 2시-6시)에는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누진통(漏盡通)을 얻으셨습니다. 이때 부처님의 가장 큰 질문인 ‘왜 모든 인간들이 계속해서 오랫동안 끊임없이 윤회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연기(緣起)입니다.
부처님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마음이 100% 완전히 청정하고 마음이 빛나고 해탈의 행복이 넘쳤습니다. 너무나 행복이 넘쳐나서 결가부좌한 상태로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칠일 간 앉아계셨습니다. 그 동안 되풀이해서 연기에 대해서 되풀이해서 반조하셨습니다. 초경에 다음과 같은 감흥어(우다나)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열심히 정진하여 명상에 든 바라문에게
37보리분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모든 의심이 사라지나니
원인과 함께 결과를 알기 때문이다.
이경에 부처님께서 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거듭 관찰하여 모든 의심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기쁨에 넘쳐서 다음과 같은 감흥어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열심히 정진하여 명상에 든 바라문에게
37보리분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모든 의심이 사라지나니
조건의 소멸인 열반을 알기 때문이다.
삼경에 부처님께서 또다시 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거듭 관찰하여 마음이 이전보다 더 청정하고 빛나고 편안하고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그러자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감흥어가 저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열심히 정진하여 명상에 든 바라문에게
37보리분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하여 마라의 군대를 물리치나니
마치 태양이 구름을 쫓아내듯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칠일 동안 결가부좌 자세로 앉아계실 때 누가 무슨 질문을 하든지 모두 대답하실 수 있는 확신과 지혜를 가지게 되셨습니다.
칠일이 지난 다음에 반얀 나무 아래에 다시 칠일 간 앉으시고 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반조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세상으로 내려오는 준비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의 부처님의 상태는 그지없이 청정하시고 확고부동한 깨달음을 가지고 해탈의 기쁨으로 넘쳐나는 상태였습니다.
그 칠일이 끝난 후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성자는 어떤 사람인지 질문하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자란 모든 번뇌를 전부 소멸한 자, 모든 지혜를 얻은 자, 모든 족쇄에서 벗어난 자, 모든 성자가 해야 할 일을 다 한 자, 그리고 확고부동하고 불퇴전의 깨달음에 서 있는 자이다.”
2. 경전의 개략적 설명
<20081028>
이 경은 부처님 경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45년간 설법하신 내용은 모두 이 경전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는 왜 거룩한 진리라고 하는가 하면 첫째 누구든지 부처님이 가르치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성인이 되기 때문이며, 둘째 아무도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에 대적할 수 없기 때문에 즉 토론해서 이길 수 없고 버금가는 다른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경전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두 극단 즉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과 고행을 추구하는 것을 피해야 하고 중도(팔정도)를 추구해야 한다.
괴로움이라는 진리의 예화 : 우리는 괴로움을 반대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태어나는 순간 사람들은 축하하고 기뻐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는 것을 피하려고 하고 병드는 것을 피하려고 약을 먹고 운동하고 죽지 않으려고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애쓰는 것 자체가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81세인데 얻는 것이 없이 계속 잃기만 했습니다.
결혼해서 배우자로부터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회사에 가면 상사가 계속 잔소리하고 일을 계속 시키니 이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사실은 원하는 것을 갖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을 갖는 순간부터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불안합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서 괴로웠는데, 그것을 갖게 되면 역시 괴로우니 괴로움이 계속됩니다. 부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사실은 괴로움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싫어하는 것도 따라옵니다. 하나 사면 하나가 덤으로 따라옵니다.(1 플러스 1) 대표적인 예가 부모가 아이를 갖는 경우인데, 아이가 생기면 부모는 아주 기뻐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자신의 자유가 줄어들고 밤낮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쁨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원하지 않는 것도 따라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괴로움이라는 진리에서 부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오취온이 괴로움”이라고 하셨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는 갈애를 말합니다.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는 열반을 말합니다.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팔정도)이라는 진리는 행복한 숲의 『초전법륜경』의 148~199쪽 참조.
네 가지 진리에 대해서 각각 세 가지씩 모두 12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즉 사성제를 진리임을 아는 지혜인 삿짜 냐나(sacca ñāṇa), 이 진리와 관련하여 어떤 기능이 행해져야 하는지 아는 지혜인 낏짜(kicca) 냐나(역할을 아는 지혜), 되돌아봄에 의해서 그 기능이 바르고도 완전하게 행해 졌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kata) 냐나(완수하였음을 아는 지혜)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고성제에 대한 삿짜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고, 고성제에 대한 낏짜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고, 고성제에 대한 까따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다.
집성제에 대한 삿짜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고, 집성제에 대한 낏짜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고, 집성제에 대한 까따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다.
멸성제에 대한 삿짜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고, 멸성제에 대한 낏짜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고, 멸성제에 대한 까따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다.
도성제에 대한 삿짜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고, 도성제에 대한 낏짜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고, 도성제에 대한 까따 냐나가 나타났을 때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다.”
이렇게 모두 12번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 생겼을 때 부처님은 다섯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씩,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해지기 전까지, 나는 천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과 천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씩,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해졌을 때, 나는 천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과 천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스스로 천명하였다.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제 더 이상의 태어남은 없다.’라고 앎과 봄이 생겼다.”
<20081029>
이 상세한 설명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생기는 법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안이 생겼습니다. 즉 수다원이 되었습니다.
3. 마라
지금부터는 경전 중에서 좀 더 깊이 이해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마라입니다.
마라는 부처님을 여러 번 방해했습니다. 출가할 때, 고행할 때 그리고 법을 펴기 시작할 때도 방해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비구들이 다른 종파들의 도전을 받았을 때 적절히 대응하고 법을 펼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그들이 사과(四果: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와 아라한과)를 얻을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 또 마라가 나타나서 이제 그만 열반에 들라고 하자, 비구니들이 다른 종파들의 도전을 받았을 때 적절히 대응하고 법을 펼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그들이 사과를 얻을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 또 마라가 나타나서 이제 그만 열반에 들라고 하자 남자불자들이 다른 종파들의 도전을 받았을 때 적절히 대응하고 법을 펼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그들이 사과를 얻을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됐을 때 또 마라가 나타나서 이제 그만 열반에 들라고 하자 여자불자들이 다른 종파들의 도전을 받았을 때 적절히 대응하고 법을 펼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그들이 사과를 얻을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초전법륜경은 수다원과에서부터 아라한과까지 모두 얻을 수 있는 법문입니다.
5가지 종류의 마라
가. 오온
나. 번뇌(마라의 10가지 군대) : ① 욕망(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 ② 혐오 ③ 기갈(飢渴) ④ 갈애(무언가를 애타게 원하는 것) ⑤ 졸림과 게으름 ⑥ 탐욕(남의 것을 탐함) ⑦ 의심 ⑧ 위선 ⑨ 잘못된 방법으로 얻은 명예 ⑩ 잘난 척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다. 업을 짓는 행위(아비상카라)
라. 죽음
마. 악마의 마음을 갖고 천신의 형상을 가진 악마 천신
4. 여래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경에서 처음으로 부처님께서 스스로를 지칭할 때 여래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쿳다까니까야[小部經]의 이띠웃따까에서 여래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의하셨습니다.
첫째 “비구들이여, 세상은 여래에 의해서 완전히 이해되었다. 여래는 세상으로부터 해탈하였다.
세상의 원인은 여래에 의해 완전히 이해되었다. 세상의 원인은 여래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었다.
세상의 소멸은 여래에 의해 완전히 이해되었다. 세상의 소멸은 여래에 의해 경험되었다.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여래에 의해 완전히 이해되었다.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여래에 의해 계발되었다.”
이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이해한 분,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의 기능을 이해한 분,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완성하신 분을 여래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오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의 몸, 느낌, 인식, 상카라, 마음이 오온입니다. 이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오온에의 집착[五取蘊]을 괴로움(suffering)이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비구들이여, 신이나 마라나 범천이나 수행자나 사제(司祭)나 왕이나 사람의 세상에서, 마음이 보고 듣고 감지하고 인지하고 얻고 추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여래에 의해서 완전히 이해되었다. 그래서 여래라고 한다.”
마음이 보고 듣고 감지하고 인지하고 얻고 추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오온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인지하고 얻고 추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오온에 관한 것입니다. 즉 여래는 오온을 완전하게도 완벽하게 아는 분입니다.
다음의 세 번째 정의는 가장 중요합니다.
셋째 “비구들이여, 여래가 스스로 무상정등정각을 완전히 깨달은 그날 밤부터,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무여열반에 든 그날 밤까지, 여래가 말하고 가르치고 설명한 모든 것은 그러한(tatha)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래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 깨달은 다음부터 열반에 들 때까지 45년간 가르치고 말한 모든 것 즉 사성제는 진리입니다. 그 누구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고통을 고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고통의 원인이 갈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즉 깨달음의 성취인 열반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 열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팔정도를 고통의 원인을 소멸시키는 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사성제를 그 누구도 진리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래라고 한다는 뜻입니다.
넷째 “비구들이여, 여래는 자신이 가르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똑같은(tatha) 이이며, 자신이 행하는 것과 똑같이 가르치는 이이다. 그래서 여래라고 한다.”
이는 부처님의 생각 말 행동은 부처님 자신의 가르침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 자신의 생각 말 행동과 완전히 똑 같다, 완전히 일치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세상은 여래에 의해서 완전히 이해되었다. 세상의 원인은 여래에 의해 완전히 이해되었다. 세상의 소멸은 여래에 의해 완전히 이해되었다.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여래에 의해 완전히 이해되었다.”는 것은 여래가 사성제를 완전히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위의 정의는 초기경전에 의한 것이고, 후기의 다른 주석서에서는 “tatha”라는 말 자체로부터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게 오신 분(Thus come)”이라고 여래를 정의합니다.
또 다른 정의는 부처님 이전의 모든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바라밀을 닦으셔서 깨달음을 얻으신 분”으로 정의합니다.
마지막 정의는 부처님 이전의 모든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열반으로 가신 분 즉 “그렇게 가신 분(Thus gone)”으로 정의합니다.
정리하면 여래란 “그렇게 오신 분, 그렇게 가신 분, 그렇게 깨달으신 분(Thus come. Thus gone. Thus enlightened.)”입니다.
5. 양 극단 다섯 가지
양 극단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① 쾌락주의와 고행주의
② 존재한다와 존재하지 않는다.
③ 상견(영원주의)과 단견(허무주의)
④ 업을 통해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와 업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⑤ 세상은 끝이 있다와 없다.
6. 검은 소와 흰 소
<20081030>
검은 소와 흰 소가 멍에로 묶여 있을 때, 흰 소가 검은 소에 매여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는 것입니까? 흰 소가 검은 소의 족쇄입니까, 아니면 검은 소가 흰 소의 족쇄입니까? 둘 다 아니죠. 둘을 묶고 멍에입니다.
이것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감각기관도 족쇄가 아니고 감각대상도 족쇄가 아닙니다. 이 둘을 묶고 있는 것은 욕심입니다.
7. 눈을 뜬 장님과 꼰단냐 존자
태어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이 치료를 받아서 눈을 떠서 사물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팔정도를 실천하면 눈이 열리고 지혜가 생겨서, 감각기관이 우리로 하여금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알도록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꼰단냐 존자가 법안이 열린 경우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과 소멸로 인도하는 길에 대해서만 설명했지만, 꼰단냐 존자는 온 정신과 온 몸을 기울여 들었기에 무상과 무아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법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고 한 것은 부처님께서 표현하지 않으신 무상과 무아도 알아차리고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합니다. 그 무상한 것을 좋아하고 원하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면 깨달은 다음에는 무상한 것이 무상하지 않게 변합니까? 아니지요. 모든 것이 무상한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깨달으면 집착이 없어지기 때문에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꼰단냐 존자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8. 60가지 즐기는 것
여러분에게는 매순간 60가지 즐기는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입니다. 눈이 있어서 볼 수 있어서 즐겁고, 귀, 코, 혀, 몸, 마음이 있어서 즐겁습니다. 다음에 색성향미촉법 여섯 가지 대상이 있어서 즐겁습니다.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여섯 가지 마음, 육촉(눈 접촉, 귀 접촉 … 마음 접촉)이 있어서 즐겁고, 여섯 가지 느낌(눈 접촉으로 생긴 느낌, … 마음 접촉으로 생긴 느낌), 여섯 가지 인식(형상에 대한 인식, … 법에 대한 인식), 여섯 가지 의도(형상에 대한 의도, … 법에 대한 의도), 여섯 가지 갈애(형상에 대한 갈애, … 법에 대한 갈애), 여섯 가지 일으킨 생각(형상에 대한 일으킨 생각, … 법에 대한 일으킨 생각), 여섯 가지 지속적 고찰(형상에 대한 지속적 고찰, … 법에 대한 지속적 고찰) 모두 60가지, 이러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60가지 감각적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순간입니다. 이것 중에 하나가 생겼다 사라지면 즉시 다른 하나가 생깁니다. 이것들을 추구하면 성스러운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성자의 법문을 듣고 성자의 삶을 동경하고 성자의 수행을 따르면 여러분도 팔정도를 잘 실천할 수 있습니다.
9. 숩빠붓다 이야기
보통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계적으로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꼰단냐 장로의 경우는, 상세하게 가르치지도 않으셨고 60가지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가르치시지 않고 팔정도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법하기만 하셨는데, 그는 깨달았습니다. 거지이자 문둥병 환자였던 숩빠붓다도 설법을 듣는 순간 깨달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부처님으로부터 단계적인 설법(차제설법)을 들은 다음에 깨달았습니다.
10. 차제설법
<20081031>
부처님께서는 보통 차제설법을 하시지만, 초전법륜경의 오비구들은 이미 수행을 많이 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법하셨습니다. 그러나 숩빠붓다에게는 보시, 지계, 천상에 태어나는 법, 사성제 설법을 차례로 하셨습니다. 보시에 대한 설법을 해서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되면, 지계 설법을 하는 등의 순서로 하신 것입니다.
계는 빠알리어로 ‘실라(sīla)’인데 영어로는 ‘sealant(접합제)’ 즉 금이 갔거나 틈이 생긴 것을 메꾸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또한 ‘습관’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계를 계속 지키면 도덕적인 삶이 좋은 습관이 됩니다.
보시하고 계를 지켜서 도덕적인 삶을 살면 천상에 태어납니다. 천상에 태어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에 따라 살고, 화를 내지 말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주면 됩니다.
부처님께서 감각적 쾌락의 허물에 대해서 법문하셨을 때 숩빠붓다의 마음이 열려서 부처님의 법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고, 마음에 장애가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희열이 생겼고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가장 심오한 설법을 하셨는데 그것이 부처님만 하실 수 있는 사성제입니다. 사성제 법문을 듣는 순간 꼰단냐 존자에게 티끌 없고 청정한 사구게가 흘러나왔습니다. “생기는 법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 이는 수다원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수다원이 된 꼰단냐 존자의 마음 상태는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표현됩니다. 이는 숩빠붓다나 여러분이 수다원이 돼도 마찬가지입니다.
① 법(진리)을 본다. ② 법을 얻는다. 즉 법의 속으로 들어간다. ③ 법을 이해한다. ④ 더 깊이 깨쳐서 들어간다. ⑤ 의심이 사라진다. ⑥ 혼동이 없어진다. ⑦ 법이 그의 마음에 확립되어 있어서 아무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 ⑧ 불법 안에서 다른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깨닫는 경지에 들어간다.
11. 수다원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리불 존자에게 “소따(sotā)가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소따’에는 ‘귀[耳]’라는 뜻도 있고 ‘흐름(stream)’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사리불이 아주 아름다운 대답을 했습니다. “소따라는 것은 팔정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옳다. 옳다. 그러면 수다원이란 무엇이냐?” 사리불이 대답했습니다. “수다원이란 팔정도를 체득(possess)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팔정도를 닦고 있는데 우리들 모두 수다원입니까? 아니라면 수다원은 또 어떤 특성을 가져야 할까요?
수다원이 되려면 입류자 즉 흐름에 든 자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흐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팔정도에 대해서 알기도 하고 말도 많이 하고 남에게 설명하지만 아직 자기 것으로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다원이 아닙니다.
수다원이 되면 세 가지 족쇄 즉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에서 벗어납니다.
수다원이 되면 어머니, 아버지, 아라한을 죽임, 부처님 몸에 상처를 냄, 삿된 견해를 갖지 않고, 다른 종교로 개종하지 않는 여섯 가지 공덕을 지니게 됩니다. 또한 오계를 범하지 않게 되어 오계를 지키지 못할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그리고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승가[僧]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고 계행이 완전해지는 네 가지 성스러운 품성을 갖게 됩니다. 수다원의 도덕적인 삶은 완전해서 가끔 실수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또한 오력인 믿음, 정진, 사띠, 삼매, 지혜가 아주 강력해집니다.
나아가서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 스님인 경우 의복 음식 약 숙소 등과 관련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유스럽습니다. 또한 성자들이 그를 칭찬합니다. 또한 수다원은 ‘나는 더 이상 사악처에 태어나지 않는다. 내가 얻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나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게 된다.’라고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수다원이 되었을 때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다원을 얻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한때 손톱 위에 흙을 올려놓고 “비구들이여, 이 손톱 위에 있는 흙과 이 세상에 있는 나머지 흙과 어느 것이 더 많으냐?” “이 세상에 있는 나머지 흙이 훨씬 더 많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수다원이 제거한 번뇌는 이 세상에 있는 나머지 흙과 같고 남아 있는 번뇌는 이 손톱 위에 있는 흙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수다원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왕이 되는 것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 왜냐하면 수다원이 되면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완전히 깨닫는다는 100%의 보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수다원은 사정근(四正勤)을 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출세간의 수행을 합니다. ①~③ 불법승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을 갖습니다. ④성자들처럼 계를 지키고 ⑤ 훌륭한 삼매에 들고 ⑥ 부지런히 정진하며 ⑦ 항상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토의하고 질문합니다.
12. 지계의 중요성
<20081101>
부처님의 깨달음은 단계적인 수행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가나까 목갈라나 경”에 나와 있는데, 수행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계를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말 조련사가 말을 길들일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입에 재갈을 물려서 말이 그것에 익숙하게 된 다음부터 다른 일들에 익숙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의 도덕적인 삶이 완전해 졌을 때 여래께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13. 십바라밀
초전법륜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부처님께서는 연등불로부터 수기를 받은 다음부터 한없이 긴 세월 동안 열 가지 바라밀(완성)을 닦았습니다. 보리수 밑에 앉아서 금방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바라밀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자신의 재산을 보시하는 기본바라밀(빠라미),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포기하면서 실천하는 중간바라밀(우빠빠라미), 자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실천하는 최상바라밀(빠라맛타 빠라미)입니다. 열 가지 바라밀을 세 단계로 실천하기 때문에 ‘삼십 바라밀’이라고도 합니다.
십바라밀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시 바라밀은 보시를 완전하게 한다는 것인데 그러자면 보시할 때 집착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지계바라밀, 지계를 완성하는 것은 계를 지키는 것이 생활화되어 호흡을 하듯 부드럽게 되는 것입니다. 출리바라밀은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수행자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지혜바라밀은 수행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정진바라밀은 노력하는 힘인데 육체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선업을 행하는 정신력을 말합니다.
인욕바라밀은 참을성, 받아들임, 참아내는 것인데 전생록에 많이 예화가 나와 있습니다. 진실바라밀은 진실만을 말하고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것인데 재산이나 신체나 목숨이 위험하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결심바라밀은 깨달음을 추구함에 있어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애바라밀은 중생들의 행복을 바라는 자애관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평온바라밀은 평온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십바라밀을 모두 완벽하게 닦은 결과로 부처님의 법문은, 욕망이 없고 진리만을 말씀하시고 지혜가 있고 평온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부처님의 행동과 말과 마음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14. 말 조련사와 찬나 비구
말 조련사가 부처님에게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을 어떻게 훈련시키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그에게, “그대는 말을 어떻게 훈련시키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부드러운 방법을 씁니다. 그 방법이 먹히지 않으면 거친 방법을 씁니다. 거친 방법들로도 안 되면 말을 죽여 버립니다.”
부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같은 방법을 쓴다. 나는 부드러운 방법을 쓴다. 그 부드러운 방법으로 제자들을 훈련시킬 수 없는 경우에는, 거친 방법들을 쓴다. 거친 방법들로도 안 되면 그들을 죽인다.”
그러자 말 조련사가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비폭력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일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이 자신의 살해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잘못하는 사람을 철저히 배척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죽인다.” 그러면 그는 승가를 떠나게 됩니다.
부처님이 이 방법을 사용한 유명한 사건이 경전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에게는 찬나라는 오래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부처님의 마부이고, 어릴 적에는 놀이친구였으며, 보살이 출가자 생활을 하기 위해서 궁전 밖으로 마차를 타고 나갔을 때의 마부였습니다. 찬나는 고령(高齡)의 나이에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에 기여한 자신의 역할 때문에,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른 것을 자신의 공로라고 생각하고 몹시 거만했습니다. 수계했을 때부터 승가를 경시했습니다. 한 예로, 자신보다 법랍이 많은 비구가 찾아와도 일어나서 방석을 드리거나 발과 얼굴을 씻을 물을 갖다 주는 등의 관습상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찬나에게 행동이 아주 오만하다고 지적하고, “너는 비구들을 존경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찬나는 부처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세상을 떠날 때, 아난다 존자가 찬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부처님에게 물었을 때, 부처님은 승가에게 그를 배척하라(보이콧하라. 상대해주지 말라. 왕따 시켜라.)고 일렀습니다. 배척하라는 부처님의 말을 승가에게 알리는 것은 아난다의 몫이었다.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뒤, 찬나는 충격을 받고 비탄에 젖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모든 명성과 힘과 용기는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 그가 갔으니 나를 받쳐줄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이제 온 세상이 텅 비었다. 내가 수많은 비구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그들은 더 이상 내 친구가 아니다.”
아난다가 찬나에게 부처님께서 그대를 배척하라고 말씀하셨다는 말을 전했을 때, 찬나는 두 번째로 놀라서 기절했습니다. 의식을 되찾은 뒤부터 그는 아주 겸손해졌습니다. 부처님은 찬나가 이렇게 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찬나는 고분고분하면서도 부지런히 수행했습니다. 결국 그는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거친 방법도 때로는 효과가 있습니다.
15. 스승의 잘못을 안 부처님의 천재성
부처님이 스승이었던 알라라와 웃다까 라마뿟따 밑에서 수행할 때, 부처님은 그들이 오력(믿음 사띠 정진 집중 지혜)을 모두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릇된 오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그릇된 것인가? 그들의 오력의 출발점인 믿음이 대범천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했는데, 그것은 맹신이었으며, 정진 또한 대범천을 향한 정진이어서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사띠와 집중과 지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스승들 밑에서 배우면서도 그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 수행의 잘못된 점을 발견했다는 것은 부처님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 다음에 바른 수행을 추구해서 결국 팔정도라는 바른 수행법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16. 진리의 권위자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모두 부처님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발견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권위에 대해서 반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진리를 추구해서 진리를 발견하면 권위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어떤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은 불교의 권위자다.’라고 말하지만 심지어는 부처님도 불교의 권위자가 아닙니다.
17. 진리의 맛
부처님은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에 살고 진리를 가르치신 분입니다. 여래라는 뜻에는 이러한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맛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실(진리)을 알면 다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는 진리는 가장 맛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경험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대적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바퀴는 지금도 돌아가고, 돌아가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18. 기억해야 할 것
<20081102>
⑴ 진리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결코 진리가 아닌 적이 없습니다. 항상 진리입니다.
⑵ 진리를 이해한 사람(수다원)은 믿음(확신, faith)이 강력해져서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처님 시대에 어떤 불자가 부처님을 집으로 초대하여 법문을 듣고 수다원이 되어 확고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다음날 마라가 부처님으로 변신하여 그 집을 찾아가서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불자가 나가보니 부처님이 또 오셔서 방으로 모시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가짜 부처님이 말했습니다.
“어제 내가 자아가 없다고 말했는데, 돌아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아가 아주 조금은 있다.”
그러나 수다원인 불자가
“너는 마라가 아니냐?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틀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당장 나가라.”라고 말해서 마라를 쫓아버렸습니다.
⑶ 깨달음을 얻는 5가지 방법
또 한 가지 이 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수행입니다. 수행을 계속하면 우리의 마음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진리를 보기 시작하게 되어 진리를 받아들이고 나아가서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법문을 듣는 동안, 들리는 단어 하나하나에 100% 주의를 기울여 들으면서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때, 법문이 끝나기 전에 지혜의 눈(eye of wisdom)이 열려서 깨닫게 됩니다.
둘째 법문하면서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도중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진리를 보고 깨달음의 단계를 성취하게 됩니다.
셋째 염송(chanting)을 하는 도중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염송하거나 경전을 읽으면서, 그 경의 내용을 분명하고도 분명하게 그 의미를 이해할 때, 집중이 되기 시작하어 진리를 보기 시작하게 되고, 깨달음의 단계를 성취하게 됩니다.
넷째 심오한 법문을 읽으면서 주의를 기울여서 단어 하나하나를 알 뿐만 아니라 그 깊은 뜻까지 조사하는(investigating) 도중에 희열과 행복감과 집중이 깊어질 때 깨닫게 됩니다.
다섯째 수행주제를 택해서 계속 수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앉음, 섬, 걸음 등의 수행 대상을 놓치지 않고 항상 수행할 때 깨달음을 성취하게 됩니다.
스승과 제자가 한꺼번에 깨닫는 사례가 상윳따니까야 케마까 경에 나와 있습니다. 케마까 존자가 나이 많은 장로 비구들에게 법문을 하는 도중에 법문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 동시에 동일한 깨달음의 단계를 성취하였습니다.
19. 기타 사항
- 초전법륜경에는 계정혜 삼학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내가 경험하면 알 수 있게 항상 열려 있다.
- 사성제
고성제와 집성제는 세간의 진리이다.
멸성제는 출세간의 진리이다.
팔정도는 세간의 진리도 되고 출세간의 진리도 된다.
- 수행을 마쳐서 완전히 깨달으면 스스로 “할 일을 다 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스스로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증명서를 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다.
첨부 1.
초전법륜경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鹿野苑]에서 오비구(五比丘)에게 설하신, 열반에 이르게 하는 최상의 법인 이 초전법륜경을 사함빠띠 대범천(大梵天)이 청하여 세상의 의지처이신 부처님께서 사성제(四聖諦)를 드러내어 설명하시면서 설하셨습니다.
오, 선한 이들이여. 모든 천신들이 좋아하고 모든 번영을 성취하게 하고 모든 세상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초전법륜경을 독송합시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 국,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에서 머무셨다.
2. 그때 세존께서는 오비구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3. “비구들이여, 출가자들은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저열하고 천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욕망 대상들에 대해 즐기면서 행복해하는 것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혜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혜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正道],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사띠[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혜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
5.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고성제)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취착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다.”
6.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집성제)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나게 하고, 즐김과 애착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욕망 갈애[欲愛], 존재 갈애[有愛], 비존재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7.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멸성제)이다. 그것은 바로 그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8.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도성제)이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正道],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이다.”
9.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성제(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cakkhu)이 생겼다. 지혜(ñāṇa)가 생겼다. 통찰지(pañña)가 생겼다. 명지(vijja)가 생겼다. 광명(āloka)이 생겼다.”
“‘이 고성제는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이 고성제는 바르게 잘 이해되었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10. “비구들이여, ‘이것이 집성제(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이 집성제는 제거되어야 한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이 집성제는 제거되었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11. “비구들이여, ‘이것이 멸성제(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이 멸성제는 실현되어야 한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이 멸성제는 실현되었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12. “비구들이여, ‘이것이 도성제(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이 도성제는 수행되어야 한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이 도성제는 수행되었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13.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씩,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해지기 전까지, 나는 천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과 천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다.”
14.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씩,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해졌을 때, 나는 천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과 천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스스로 천명하였다.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제 더 이상의 태어남은 없다.’라고 앎과 봄이 생겼다.”
15.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비구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상세한 설명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생기는 법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티 없고 때가 없는 법안이 생겼다.
16. 이와 같이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을 때 지신(地神)들이, “세존께서 바라나시 국,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에서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천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환호하였다.
17. 지신들의 환호성을 듣고 사대왕천 천신들이, “세존께서 바라나시 국,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에서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천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환호하였다.
18. 사대왕천 천신들의 환호성을 듣고 도리천 천신들이, “세존께서 바라나시 국,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에서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천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환호하였다.
도리천 천신들의 환호성을 듣고 야마천 천신들이, “세존께서 바라나시 국,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에서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천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환호하였다.
야마천 천신들의 환호성을 듣고 도솔천 천신들이, “세존께서 바라나시 국,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에서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천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환호하였다.
도솔천 천신들의 환호성을 듣고 화락천 천신들이, “세존께서 바라나시 국,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에서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천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환호하였다.
화락천 천신들의 환호성을 듣고 타화자재천 천신들이, “세존께서 바라나시 국,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에서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천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환호하였다.
타화자재천 천신들의 환호소리를 듣고 범천 세상의 범천들이, “세존께서 바라나시 국, 이시빠따나 미가다야 숲에서 어떤 사문도, 바라문도, 천신도,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라고 환호하였다.
19. 이처럼 그 찰나, (그 짧은 시간), 그 순간에 범천 세상에 이르기까지 환호성은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만 우주가 위아래로 진동하였고, 사방으로 요동쳤고, 격하게 흔들렸다. 한계 없이 광휘로운 빛도 천신들의 광채를 뛰어넘어 분명하게 나타났다.
20. 그때 세존께서는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라고 감흥어를 읊으셨다. 이 감흥어로 인해 꼰단냐 존자는 안냐시 꼰단냐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전법륜경이 끝났다.
첨부 2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
십이연기(12緣起)를 생기는 순서로 관찰[順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서 저것이 생긴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가 생기고,
상카라를 조건으로 의식이 생기고,
의식을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생기고,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생기고,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기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기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기고,
취착을 조건으로 [업]존재가 생기고,
[업]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기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비탄·고통·
근심·절망 등의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있다.
십이연기를 소멸하는 순서로 관찰[逆觀]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하여 저것이 소멸한다. 즉,
무명이 소멸하여 상카라가 소멸하고,
상카라가 소멸하여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여 정신·물질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여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여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여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여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여 취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여 [업]존재가 소멸하고,
[업]존재가 소멸하여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여 늙음과 죽음, 슬픔·비탄·고통·
근심·절망 등의 모든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
첨부 3.
12가지 진리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경에서 사성제(고집멸도) 각각에 대해서 세 가지 지혜 즉 진리임을 아는 지혜인 삿짜 냐나(sacca ñāṇa), 이 진리와 관련하여 어떤 기능이 행해져야 하는지 아는 지혜인 낏짜(kicca) 냐나(역할을 아는 지혜), 되돌아봄에 의해서 그 기능이 바르고도 완전하게 행해 졌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kata) 냐나(완수하였음을 아는 지혜)를 설하셨다. 이 세 가지 지혜가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에 각각 적용되므로 지혜는 모두 열두 가지가 된다. 초전법륜경에서 고성제(괴로움이라는 진리)의 삿짜 냐나에 해당하는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성제이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cakkhu)이 생겼다. 지혜(ñāṇa)가 생겼다. 통찰지(pañña)가 생겼다. 명지(vijja)가 생겼다. 광명(āloka)이 생겼다.”
‘이것이 고성제이다.’라고 아는 것이 삿짜 냐나이다.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특별한 지혜를 ‘혜안, 지혜, 통찰지, 명지, 광명’이라고 다섯 가지로 설명하셨지만, 이들은 상윳따 니까야의 주석서에 의하면 지혜의 비슷한 말이다. 왜냐하면 지혜에는 보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혜안(慧眼), 아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지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적으로 알기 때문에 통찰지, 꿰뚫어 알기 때문에 명지(明知), 빛을 발산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광명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 것은 듣는 사람의 특성에 따라서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성제의 낏짜 냐나에 해당하는 법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고성제는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이 고성제는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아는 것이 낏짜 냐나이다. 고성제를 스스로의 관찰에 의해서 완전히, 바르게, 잘 이해해야 함을 아는 지혜이다. 즉 고성제에 대해서 어떤 기능이 행해져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는 성자의 도의 지혜를 얻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을 시작하기 전일지라도, 볼 때 주시함으로써,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할 때 주시함으로써, 무상 고 무아를 광범위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수행자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위빳사나 수행 중에도 이 과업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현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서 완전히 주목할 수 있고, 위빳사나 지혜를 완벽하게 향상시킬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주시를 계속하면, 처음에는 잘 모르겠지만, 무엇을 관찰해야 되는지 곧 알게 된다. 이렇게 아는 것이 행해져야 할 기능을 아는 지혜, 낏짜 냐나이다.
고성제의 까따 냐나에 해당하는 법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고성제는 바르게 잘 이해되었다.’라고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혜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통찰지가 생겼다. 명지가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까따 냐나는 고성제가 바르고도 완전하게 잘 이해되었음을 되돌아봄에 의해서 아는 지혜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과 유사하게, 집성제(괴로움 원인이라는 진리), 멸성제(괴로움 소멸이라는 진리), 도성제(괴로움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진리)를 분명하게 사실대로 바르게 아는 것이 삿짜 냐나이다.
‘고성제는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고 아는 것이 고성제에 대한 낏짜 냐나이며, ‘집성제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아는 것이 집성제에 대한 낏짜 냐나, ‘멸성제는 실현되어야 한다.’고 아는 것이 멸성제에 대한 낏짜 냐나, ‘도성제는 수행되어야 한다.’고 아는 것이 도성제에 대한 낏짜 냐나이다.
이러한 네 가지 기능 지혜들이 바르고도 완전하게 행해졌음을 아는 것이 각각 고성제에 대한 까따 냐나, 집성제에 대한 까따 냐나, 멸성제에 대한 까따 냐나, 도성제에 대한 까따 냐나이다.
고집멸도 네 가지 진리 각각에 대한 세 가지 지혜 즉 삿짜 냐나(진리를 아는 지혜)와 낏짜 냐나(역할을 아는 지혜)와 까따 냐나(완수하였음을 아는 지혜)를 요약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⑴ 사성제를 도의 지혜를 깨닫는 순간에, 혹은 그 전에, 혹은 그 후에 아는 것이 삿짜 냐나(진리를 아는 지혜)이다.
이것이 ‘고성제다, 집성제다, 멸성제다, 도성제다’라고 바르고도 완전하게 아는 것이 삿짜 냐나이다. 이 지혜는 도의 지혜를 얻기 전에도 나타난다. 수행자가 도의 지혜를 얻기 전에 멸성제나 도성제에 대한 삿짜 냐나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들어서 아는 지혜인 문혜(聞慧)에 불과한 것으로서, 수행의 결과로 실제로 체험하여 아는 지혜인 수혜(修慧)는 아니다.
⑵ 무엇이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하는지, 무엇이 제거되어야 하는지, 무엇 직접 실현되어야 하는지, 무엇이 수행해서 계발되어야 하는지를 사전에 아는 것이 낏짜 냐나(역할을 아는 지혜)이다.
사성제에 대해서 행해져야 하는 ‘괴로움은 완전히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 괴로움 원인(갈애)은 제거되어야 한다, 소멸(열반)은 직접 실현되어야 한다, 소멸로 인도하는 길(팔정도)은 수행해서 계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낏짜 냐나이다. 이 지혜는 위빳사나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도 일어나고, 도의 지혜가 나타나기 전까지 수행하는 도중에도 일어난다.
⑶ 필요한 기능이 완수되었음을 아는 것이 까따 냐나(완수하였음을 아는 지혜)이다.
세속의 일에 있어서도 해야 될 일이 완수되었을 때 완료되었음을 안다. 마찬가지로 바르게 이해되고, 버려지고, 실현되고, 수행이 완수되는 네 가지 기능이 행해졌을 때, 이 사실을 되돌아봄에 의해서 안다. 이렇게 아는 것이 행해져야 할 것이 완료됐음을 아는 지혜인 까따 냐나이다.
이를 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2가지 진리 | ||||
고성제 괴로움(오취온) | 집성제 괴로움의 원인 (갈애) | 멸성제 괴로움의 소멸 (열반) | 도성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 (팔정도) | |
삿짜 냐나 |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것,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것,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요컨대 오온에 대한 집착. | 갈애 즉 감각 욕망 갈애, 존재갈애, 비존재 갈애. |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 |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 |
낏짜 냐나 |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 | 제거되어야 한다. | 체험되어야 한다. | 실천되어야 한다. |
까따 냐나 | 바르게 잘 이해되었다. | 제거되었다 | 체험되었다 | 실천되었다. |
첨부 4.
케마까 경
8. 케마까 존자 “도반들이여, 나는 오취온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지만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취온에 대해서 ‘나가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 관찰하지는 않습니다.”
9. 장로 비구들 “사량분별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대는 물질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물질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느낌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느낌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인식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인식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상카라를 두고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상카라를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의식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아니면 의식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 말합니까?”
12. 케마까 존자 “도반들이여, 나는 물질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느낌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인식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인식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상카라를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상카라를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의식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의식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오취온에 대해서 ‘나가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어 연꽃에서 향기가 날 때, 향기가 꽃잎에서 난다고 하거나 꽃자루에서 난다고 하거나 암술에서 난다고 하면 바르게 말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꽃에서 향기가 난다고 해야 바르게 말한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물질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물질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느낌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인식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인식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상카라를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상카라를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의식을 두고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고, 의식을 떠나서 ‘나가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나는 오취온에 대해서 ‘나가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13.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五下分結]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오취온에 대한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취온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상카라다. 이것이 상카라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상카라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그가 오취온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살아갈 때 오취온에 대한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14. “도반들이여, 예를 들어 더럽고 때 묻은 천이 있는데 주인이 그것을 세탁소에 맡긴다고 합시다. 그러면 세탁소에서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비벼서 빤 뒤 물에 헹굴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천은 깨끗하게 되었지만 미세한 소금물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세탁소에서 이런 천을 받은 주인은 그 천을 냄새를 제거하는 상자에 넣을 것입니다. 그러면 뿌리 뽑히지 않고 남아 있던 미세한 소금물 냄새나 잿물 냄새나 쇠똥 냄새는 모두 뿌리 뽑히게 될 것입니다.
도반들이여, 그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에게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가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오취온에 대한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취온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느낌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인식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상카라다. 이것이 상카라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상카라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의식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다.’라고.
그가 오취온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살아갈 때 오취온에 대한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자만과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욕구와 ‘나가 있다’라는 미세한 잠재성향이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됩니다.”
……
……
16. 케마까 존자의 말을 들은 장로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케마까 존자의 말에 크게 기뻐하였다.
17. 이렇게 상세히 설명했을 때 60명의 장로 비구들과 케마까 존자는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
첨부 5
팔정도에 대한 사띠의 요점
1. 능숙한 이해(정견)에 관한 사띠의 요점
다음은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것을 도와줄 능숙한 이해에 대한 요점들이다,
○ 능숙한 이해는 인과응보와 사성제를 이해하고 그것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 업의 법칙에 따라, 능숙한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은 행복한 결과의 원인이 되고, 미숙한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은 불행한 결과의 원인이 된다.
○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의 영향을 받은 마음에서 나온 행위는 무엇이든 고통으로 이끌기 때문에, 미숙한 행위 즉 잘못된 행위다.
○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의 영향을 받지 않은 마음에서 나온 행위는 무엇이든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능숙한 행위, 즉 올바른 행위다.
○ 사성제는 불만족,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팔정도를 말한다.
○ 괴로움의 진리를 직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 생로병사,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싫어하는 사람과의 만남,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얻는 것, 이런 것들 모두가 괴로움이다.
○ 모든 현상의 본성이 무상하고, 본질적으로 불만족스럽고, 자아가 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괴로움이 생긴다.
○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탐욕(갈애)이다. 탐욕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고통 받는다.
○ 자신의 탐욕과 그 탐욕이 동기가 된 의도적인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만 한다.
○ 자신의 의도적인 행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때,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바꾼다.
○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
○ 부처의 행복으로 가는 여덟 단계의 길은 괴로움을 소멸시키고 완전한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 사띠는 사성제와 행복으로 가는 여덟 단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2. 능숙한 생각(정사유)에 대한 사띠의 요점
행복으로 가는 부처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가고자 할 때, 여덟 개의 각 단계를 실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관대한 선물을 받아 주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자애를 고무시키는 친구와 적이 있어야 한다. 우리기 자애를 계발하도록 고통 받는 중생이 있어야 한다. 인간 사회는 다음의 능숙한 생각의 요점들을 위한 완벽한 시험장이다.
○ 능숙한 이해를 계발하면 능숙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 생각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고,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
○ 부처는 세 가지 능숙한 생각을 가르쳤다. 놓아버리기(출리), 즉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의 보시와 자애와 연민이 그것이다.
○ 보시의 실천은 물건을 남에게 주는 것부터 시작하라.
○ 무엇(몸, 느낌, 인식, 상카라, 의식)에 집착하든 상관없이, 집착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 두려움이 생기면, 커지게 내버려 두고, 그것이 절정에 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라.
○ 자애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모두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멀리까지 영향을 미친다.
○ 화를 내면 궁극적으로 상대방보다도 화내는 사람 자신을 해친다. 자신의 화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
○ 사띠는 화를 최소화시키고 결국에는 없애도록 돕는다.
○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어 하는 바람이 함께 담긴 자발적이고 건전한 마음이다.
○ 자기자신과 부모와 아이들과 배우자에 대한 연민을 계발하는 것은 여러분을 이완시키고 여러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수행 중에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오를 때, 그저 그것들의 지나가는 특성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들이 사라질 것이다.
○ 최선을 다했는데도 부정적인 생각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삶의 습관 속에서 지혜를 계발하기 위하여 그 생각을 철저히 탐구하라는 신호다.
○ 불건전한 생각을 숙고하는 것은 수행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 좌선하면서 능숙한 생각을 수련하는 것은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화와 갈망을 점검하게 해준다.
3. 능숙한 말(정어)에 관한 사띠의 요점
능숙한 말로 불행을 예방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 능숙한 말은 거짓말, 악의적인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을 삼가는 것이다.
○ 침묵에 의한 거짓말도 거짓말이다.
○ 악의적인 말이란 우정이나 평판을 해치는 말을 말한다.
○ 말의 남용, 모욕, 빈정거림, 위선, 지나치게 무뚝뚝하거나 남을 얕잡아 보는 것은 모두 거친 말의 예이다.
○ 거친 말은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 가십과 쓸데없는 말은 불화와 오해를 불러오고,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 보시와 자애와 연민 때문에 우러나온 것이 아닌 불필요한 말은 모두 해롭다.
○ 능숙한 말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말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갖고, 자신에게 “그 말이 사실인가? 친절한가? 유익한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가? 지금이 말하기 적절한 때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 사띠를 사용하여, 해로운 말을 삼가고 온화하고 잘 고른 단어만을 쓰겠다고 확고히 결심하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화목해질 수 있다.
4. 능숙한 행위(정업)에 대한 사띠의 요점
○ 영적인 향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살생, 도둑질, 거짓말, 삿된 음행, 그리고 술이나 약물을 복용을 삼가야 한다. 즉 오계를 지켜야 한다.
○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반드시 살생은 아니다.
○ 살생은 의도, 앎, 계획과 그 계획의 실행까지를 포함한다.
○ 살생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해를 끼치지 않고 자애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 도둑질은 주지 않은 것을 갖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이에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가 포함된다.
○ 도둑질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물건을 존중하게 되고 더불어 기뻐함(喜)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 삿된 음행을 삼가라는 계에서의 삿된 음행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를 갖는 것, 미성년자나 동물이나 다른 사람의 파트너, 혹은 부모나 보호자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사람과의 성행위를 포함한다. 이미 관계를 맺은 상대를 배신하는 것도 포함된다.
○ 삿된 음행을 피하면 다루기 힘든 욕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 배우자나 파트너와의 성적 관계는 잘못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 모든 고의적인 감각의 남용을 피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탐욕을 내려놓는 것을 도와주고, 이런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 관한 관대한 마음을 계발한다.
○ 술이나 약물 중독은 빨리 진행될 수도 있고, 조건 지어진 행동에 의해 점차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그것은 아주 해로우니 시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 취하게 하는 것들을 그만두면, 명료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고,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사띠를 계발하고 실재(reality)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 추가적인 계, 즉 훈련 팔계 혹은 평생 팔계를 받는 것은, 집중하는데, 그리고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진도를 촉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 사띠는 유혹을 극복하고, 분쟁을 피하고,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의 도덕적인 실수에 대해 연민으로 대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5. 능숙한 생계(정명)에 대한 사띠의 요점
○ 생존 수단이 영적 향상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 3단계 질문을 하여, 이 직업이 능숙한 생계인지 아닌지 판단한다.
○ 첫 번째 단계로 이 직업이 본질적으로 남과 자신에게 해로운지 아닌지를 고려해본다.
○ 두 번째 단계로 이 직업이 오계 중에 어떤 것을 위반하게 하는지 안 하는지 고려해본다.
○ 마지막으로, 직업과 관련된 다른 요인들이 마음의 안정을 방해하는지 안 하는지 묻는다.
○ 자애가 어려운 업무 환경을 개선할 수도 있다.
○ 여러분에게 해를 끼치겠다는 의도가 없었다면, 직업상의 나쁜 결과로 인해 여러분의 마음이 해 입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능숙한 생계는 자신의 영적 수행이 성숙해지는 데 따라 점진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목표다.
6. 능숙한 노력(정정진)에 대한 사띠의 요점
○ 별로 강조되지는 않지만 능숙한 노력은 영적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다.
○ 능숙한 노력에는, 부정적인 마음 상태의 예방, 부정적인 마음 상태의 극복, 긍정적인 마음 상태의 계발, 긍정적인 마음 상태의 유지,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
○ 족쇄들은 탐욕에서 생기는 불건전한 마음의 성향에 깊게 뿌리박고 있어서, 중생을 괴로운 상태에 묶어놓는다. 열 가지 족쇄들은, 영원한 자아나 영혼에 대한 믿음(유신견), 의심, 실천과 의례의 효험에 대한 믿음, 탐욕, 성냄, 색계에 재탄생하겠다는 욕망, 무색계에 재탄생하겠다는 욕망, 자만, 후회, 어리석음이다.
○ 장애는 족쇄가 강하고 거칠게 나타난 것이다. 여러분은 다섯 가지 장애, 즉 탐욕,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걱정, 의심을 예방하고 극복하기 위하여 능숙하게 노력해야 한다.
○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무시하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장애를 그 반대의 특성을 가진 것으로 치환하기, 자신을 설득하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안 되면, 온 힘을 다하여 짓밟아버리기가 있다.
○ 족쇄들이 부서지기 전까지는 눌러놓을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사띠와 집중으로 약해진다. 그 반대되는 것을 계발하면 더욱 약해진다. 족쇄들이 끊어지게 되면 깨달음의 단계들이 나타난다.
○ 부정적인 생각이 안 생기도록 하려면 사띠를 유지하라. 사띠는 지계(持戒)와 사띠의 실천과 지혜와 인내와 노력으로 계발된다.
○ 일어난 부정적인 생각들을 극복하려면, 그냥 그것들을 주시하라.
○ 부정적인 생각들을 재빨리 주시하지 못하면 그것들은 강력해진다. 그러면 다 그만두고, 모든 주의를 그것들에 기울여라. 그것들이 초래한 해악과 그것들을 촉발시킨 것들에 대한 무상함을 숙고하려고 노력하거나, 그것들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치환하라.
○ 부정적인 생각들이 사라지면, 건전한 생각들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떠올리거나, 자애와 결심과 인내 등에 관한 생각을 의도적으로 일으킴으로써 건전한 생각들을 계발하라. 여러분이 아는 건전한 마음 상태를 계발하는 방법은 무슨 방법이든 다 동원하라.
○ 수행하면서 사소한 것에 얽매여 방황하지 말고, 큰 그림을 잊지 말라. 여러분의 노력이 더 건전한 상태를 실제로 가져다주는지 항상 확인하라.
○ 마음 맞는 도반들과 어울린다든지, 불교 관련 서적을 탐독하는 등의 건전한 생각들을 유지하게끔 도와주는 생활 방식을 가져라.
○ 강력한 사띠가 없으면 마음은 급속히 과거의 습관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니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전한 생각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부지런히 되풀이해야 한다.
7. 능숙한 사띠(정념)의 실천을 위한 요점
○ 사띠는 매순간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사띠는 간명하고, 꿰뚫어보고, 균형 잡혀 있고, 혼란스럽지 않다. 그것은 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일그러뜨림 없이 비치는 거울 같다.
○ 사띠는 무상(無常), 괴로움(苦), 영원하거나 변하지 않는 자아나 영혼이 없다(無我)는, 모든 존재의 세 가지 특성(三法印)에 관한 통찰지혜를 생기게 한다.
○ 이들 세 가지 특성에 대한 통찰지혜를 얻는 데 도움이 되는 대상이면 무엇이든지 사띠를 증진시키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
○ 사띠의 심오한 목적은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데 있다. 실재의 진정한 특성에 대한 통찰지혜는 영원한 평화와 행복의 궁극적인 비밀이기 때문이다.
○ 네 가지 사띠의 기초는 몸에 대한 사띠, 느낌에 대한 사띠, 마음에 대한 사띠, 마음의 대상에 대한 사띠이다.
○ 몸에 대한 사띠에 있어서 중요한 세 가지는 호흡에 대한 사띠, 자세에 대한 사띠, 몸의 구성 요소들에 대한 사띠이다.
○ 호흡을 알아차리면 집중을 계발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호흡은 관찰하기 쉽고 항상 있기 때문이다.
○ 마음을 호흡과 결합시키면 마음을 현재로 가져오게 된다. 호흡은 또한 다른 현상들을 고찰한 다음에 마음이 돌아올 수 있는 집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걷는 것은 무상, 괴로움, 무아가 어떻게 순간순간마다 스며드는지 알아내는 데 아주 좋은 수행이 될 수 있다. 앉고, 서고, 눕는 등의 다른 자세에서도 같은 수행을 할 수 있다.
○ 하루 종일, 자세에 대한 사띠를 유지하는 것은 오온의 특징을 분명히 보도록 마음을 훈련시켜 준다.
○ 몸은 항상 변하는 42가지 구성 요소와 과정들의 집합체라고 명상하면, 여러분이 집착하기 쉬운 몸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 즐겁고 불쾌한 감정들은 자기자신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자기자신의 느낌을 기준으로 하여 남을 비난하는 것을 그만두어라.
○ 느낌에 대해 깨닫지 못한 마음의 세 가지 반응, 즉 즐거운 느낌에 집착하기, 불쾌한 것을 혐오하기, 덤덤한 것을 ‘자아’라고 잘못 인식하기로 인해 힘을 받아서 고통이 되풀이된다.
○ ‘세속적 느낌’은 세속적 추구로부터 생기고,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을 향하는 잠재된 경향이 있다. ‘비세속적 느낌’은 통찰지혜로부터 생기고 어떠한 잠재된 경향도 없다.
○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은 일상적 통찰 수행의 일부이다. 느낌의 무상을 봄으로써, 우리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잠재된 성향을 놓아버리는 것과, 비세속적인 느낌을 계발하는 것을 익힌다.
○ 부처는 우리에게 감각적 쾌락들을 “알아차리면서 즐기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에 대한 욕망은 사띠함으로써 놓아버리고, 그로부터 초연함으로 생긴 비세속적 즐거운 느낌을 즐기라고 가르쳤다.
○ 마음에 대한 사띠를 익혔을 때, 탐욕스러운 혹은 탐욕을 비운 마음 상태, 위축된, 혹은 산만한 마음 상태 등의 마음 상태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안다.
○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다섯 가지 장애들, 열 가지 족쇄들, 다섯 가지 무더기들, 사성제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주시하는 것을 뜻한다.
○ 깨달음의 요소들은 사띠 수행의 열매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들은 사띠가 깊어짐에 따라, 사띠와 고찰과 노력과 기쁨과 편안함과 집중과 평온의 순서로 나타난다.
○ 모든 깨달음의 요소들이 완전해졌을 때, 완벽한 행복이자 완전한 평화인 열반에 이른다. 우리는 이번 생에서 이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8. 능숙한 집중(정정)에 대한 사띠 요점 정리
능숙한 집중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 능숙한 집중의 특징은, 건전할 것, 초점이 하나의 대상에 모아져 있을 것, 사띠와 함께 작용할 것, 이렇게 세 가지이다.
○ 부처는 능숙한 집중을 얻기 위한 단계별 훈련법을 제시했다.
○ 건전한 집중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는 집중이다. 그것은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자유롭다.
○ 능숙한 집중을 계발하려면, 우선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건전한 집중을 연습하라. 호흡 등의 주된 대상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다른 대상들이 생기더라도 관찰하지 마라.
○ 상당 기간 동안 건전한 집중을 연습하면, 호흡이 아주 미세해져서 사라진 것 같을 것이다. 코 끝 등 초점을 맞추고 있던 지점의 기억이 ‘집중의 표상’이라고 하는 즐거운 감각으로 바뀐다.
○ “하나의 대상에 초점이 모아짐”은 집중의 표상이 사라진 다음에 마음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하나의 대상에 초점이 모아진 마음은 완전한 집중, 즉 선정의 요소 중 하나다.
○ 완전한 집중 1단계의 구성 요소는 일으킨 생각, 지속적 고찰, 기쁨, 행복감, 통합하는 기능을 하는 집중이다. 그것은 대단히 즐겁다.
○ 깨달음을 성취하려면, 최소한 1단계의 완전한 집중이 필요하다.
○ 일단 1단계 집중을 얻는 방법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 단계를 다시 얻겠다고 마음먹고, 1단계에 얼마 동안 머물는지, 언제 이 집중에서 나올 것인가를 결정하라.
○ 완전히 익힐 때까지 1단계 집중에 이르기를 여러 번 연습하라.
○ 1단계의 집중을 수없이 많이 성취하여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그 생각들을 지나치게 됨으로써 그것들이 사라졌을 때, 2단계 집중이 생긴다.
○ 3단계의 집중은 2단계를 자주 되풀이해서, 집중으로 생기는 기쁨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을 때 생긴다. 기쁨이 사라지면서, 행복감은 심오하고도 정제되고, 사띠와 평온은 좀 더 뚜렷해진다.
○ 행복감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사띠가 심오한 평온에 의해서 정화될 때 4단계의 집중이 생긴다.
○ 완전한 집중 상태에 있는 마음은 건전하고 강력한 동적 특성들로 꽉 차 있지, 바위나 잠든 사람처럼 둔감하지 않다.
○ 완전한 집중은 통찰 수행에 필요한 특성과 힘을 준다.
○ 가장 강력한 수준의 완전한 집중에 아무리 오래 머물러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깨닫지 못한다. 깨닫기 위해서는 족쇄들을 끊어버려야만 한다.
○ 좌선은 그날의 마음의 안정성에 따라, 완전한 집중의 계발 혹은 사띠 수행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또는 둘을 번갈아가며 해도 좋다.
○ 어떻게 좌선을 시작했든, 강력한 통찰지혜가 생기려면 완전한 집중과 사띠가 함께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 모든 존재의 특성인 무상과 괴로움(불만족)과 무아를 보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찰지혜가 필요하다. 통찰지혜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고통이 생기게 하는 탐욕의 역할을 보게 하고, 그것들을 모두 놓아버리게 해준다.
○ 완전한 집중만으로 혹은 사띠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 통찰지혜를 통해서 족쇄들을 끊기 위하여 완전한 집중이 사띠와 결합할 때에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 완전한 집중에 이르자면 며칠이 걸릴 수도 있고, 몇 해가 걸릴 수도 있다. 더디다고 낙담하지도 말고, 용쓰지도 마라.
첨부 6.
계 경
상윳따니까야(相應部)의 무더기(蘊)에 대한 장(Khandha Vagga Saṁyutta)에 있는 ‘계 경(戒經. S22:122)’에는 위빳사나 수행방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경은 수행의 절차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수행하는 여러분들에게 아주 적합합니다. 여기서는 대장로 꼿티까(Koṭṭhika) 존자가 질문하고 대장로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경전 결집(기록)을 할 때 이 경은 서문부터 시작하여 가장 완벽한 형태로 편집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계경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때, 사리뿟따 존자와 꼿티까 존자가 베나레스에 있는 이시빠따나 미가다와나 숲의 사원에 같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꼿티까 존자는 과정(果定) 수행을 한 다음 사리뿟따 존자를 찾아갔습니다. 두 대장로 간에 서로 안부를 교환한 다음 꼿티까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명한 두 대장로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가장 박식하고 세존의 상수 제자입니다. 꼿티까 존자는 가장 저명한 분석적인 지식(分析智)의 대가입니다.
분석지는 다음 네 가지(四無碍解)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의미를 통달한 분석지(義無碍解)는 세존의 모든 가르침의 의미, 목적, 결과와 기능적 필요성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법에 대한 분석지(法無碍解)는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인과법, 연기법), 고귀한 팔정도, 설해진 법, 법과 관련된 범위 내에서 있는 모든 지식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언어에 대한 분석지(詞無碍解)는 실재를 표현하는 언어에 관한 지식으로서 언어로 표현하는 데 걸림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4) 언어 구사력에 대한 분석지(辯無碍解)는 임기응변에 능한 분석지인데, 법의 의미에 대해 미사여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알아듣도록 설명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세존을 제외한 모든 아라한들 중에 네 가지 분석지(四無碍解)에 관한 한 꼿티까 존자가 단연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두 장로는 모두 여덟 가지 성인위(네 가지 출세간의 도와 네 가지 출세간의 과)를 증득한 성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에 수록된 질문과 대답은 모든 관점에서 수행에 대해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들은 다음 세대를 위한 선례와 참고 사항으로 알아야 합니다.
꼿티까 존자가 물었습니다. “고귀한 계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은 무슨 종류의 수행을 해야 합니까?” 여기서 중요한 말은 ‘고귀한 계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히 “보통 사람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계를 완전히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지하게 수행하기 전에 법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도 필요하다는 것이 ‘계 경’에 나와 있습니다. 수행하는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법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무엇일까요?
마하시 큰스님에 의하면, 조건에 따라 모든 몸과 마음의 행들이 무상하고 고통이며 무아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위빳사나 수행을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대답했습니다. “고귀한 계를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은 오취온(五取蘊)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오취온은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을 말합니다. 이 오취온에 대한 알아차림은 현재 여러분들이 염처경에 의거하여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왼발, 오른발’을 알아차릴 때, 발의 움직임은 색온(물질의 무더기)이며, 좋거나 싫어하는 것은 수온(느낌의 무더기)입니다. 발걸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상온(지각의 무더기)이며, 걸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행온(정신적 형성의 무더기)입니다. 걷는 것을 자각하는 것은 식온(의식의 무더기)입니다. 그래서 오취온(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요약하면, 걷는 것은 몸(물질)이고 발걸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며, 존재하는 것은 몸과 마음뿐입니다. 그것을 상세하게 나누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오취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음과 물질의 진정한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내가 가고 있다, 사람이 가고 있다, 여자가 가고 있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며, 이런 신념이 자아라는 실체가 있다고 잘못된 개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집착(upādāna)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배의 ‘일어남, 꺼짐’을 알아차릴 때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은 색온입니다. 좋고 싫은 느낌은 수온이며,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리는 것은 상온이며,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알아차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행온입니다. 일어나고 꺼짐을 자각하는 것은 식온입니다.
형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과 형상은 색온이며, 형상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은 수온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상온이며, 노력하는 것은 행온이며, 자각하는 것은 식온입니다. 이 모든 알아차림이 오취온인데, 간단히 설명하면 오취온은 마음과 물질 두 가지로 구성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들 오취온의 진정한 본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나, 사람, 여자’ 등을 자아라는 실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집착에는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 2) 견해에 대한 집착, 3) 계율과 의례일 뿐인 것에 대한 집착, 4) 유신견의 집착, 이렇게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의 대답은 ‘오취온을 알아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취온을 알아차리면 무엇을 발견할 것이라고 기대합니까?” 대답은 광범위하지만, 요약해서 결론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알 수 있을 때까지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차려서 무슨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다음 질문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대답했습니다.
“나의 벗 꼿티까 존자여, 고귀한 법을 완전히 지키고 오취온을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마음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언제나 새로운 현상이 신속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서, 모든 정신적․물질적 현상이 소멸하는 것을 증득할 때까지의 위빳사나 지혜를 차례차례 획득하고, 마지막에는 수다원도와 수다원과를 증득하여 완전히 성숙한 수다원 성자가 됩니다.”
최종적으로 수다원도의 지혜를 얻은 다음에는 ‘서원을 세우는 것’에 의해 검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지한 서원을 세울 때의 내용은 보통 다음과 같습니다.
(1) “정신적․물질적 현상이 소멸된 상태에 오랫동안 머물겠다.” 오랫동안이라는 것은 ‘30분, 45분,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동안 계속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런 서원이 성공적으로 달성된 다음에는 검증해야 할 두 번째 서원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2)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모든 현상이 소멸하는 상태에 이르겠다.” 이 서원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오랫동안 알아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빠른 시간 내에 ‘모든 현상의 소멸’은 쉽게 달성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검증해야 할 세 번째 서원으로 넘어갑니다.
(3) “모든 현상의 소멸에 매우 자주 도달하겠다.” 어떤 수행자들은 정신적․물질적 현상의 소멸에 성공적으로 매우 자주 도달합니다. 다음으로 검증해야 할 네 번째 서원으로 넘어갑니다.
(4) “이번 좌선에 소멸에 도달하겠다.” 또는 “다음 좌선에는 소멸에 도달하지 않겠다.” 이 서원이 이루어지면 검증해야 할 다섯 번째 서원으로 넘어갑니다.
(5) “정신적․물질적 현상의 소멸을 달성한 다음에 의식을 그때의 상황에 따라 오후 8시에 혹은 오전 10시에 되찾겠다, 혹은 30분 만에 의식을 되찾겠다.”
어떤 수행자들은 진지한 서원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성공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시도하여야 합니다. 검증과정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확실하게 성취되면, 다음 단계는 상위 수준을 향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꼿티까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또다시 묻습니다.
“사리뿟따 존자여, 수다원도를 획득한 사람은 사다함도(一來者의 道)를 성취하기 위하여 무엇을 알아차려야 합니까?”
사리뿟따 존자는 대답했습니다.
“사다함도를 위해서 노력하려는 수다원도를 경험한 사람은 마찬가지로 오취온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높은 수준의 달성을 위한 절차는 이렇습니다. 수행하는 여러분들은 진지하게 “나는 이전에 성취한 모든 법을 버리고, 내가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보다 높은 법을 성취하겠다.”라고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는 같은 방법으로 같은 수행을 되풀이합니다.
그런 수행자는 마음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등을 구하는 초보 단계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보통 그들은 모든 새로운 현상이 신속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는 ‘생멸의 지혜부터 시작’합니다. 거기서부터 소멸의 지혜, 두려움에 대한 지혜, 고난의 지혜, 혐오감에 대한 지혜, 해탈을 원하는 지혜, 다시 살펴보는 지혜,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적응의 지혜 등을 거쳐서 드디어는 사다함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취한 다음,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소멸되고, 빠른 시간 내에 소멸되고, 아주 자주 소멸되고, 필요한 정해진 시간에 의식을 되찾기를 바라는 진지한 서원, 즉 결심을 세움에 의한 검증 과정이, 모든 검증이 성공할 때까지 적용됩니다.
꼿티까 존자는 다시 사리뿟따 존자에게 사다함을 성취한 사람이 아나함도와 과의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아나함도와 과의 지혜를 얻기 바라는 사다함을 성취한 사람은 같은 오취온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다함을 성취한 사람은 대개 생멸의 지혜로부터 시작해서 연속적으로 지혜의 단계들을 거쳐 머지않아 아나함도와 아나함과의 지혜를 획득하게 됩니다.
아나함 도과의 지혜를 얻은 사람은 더 이상의 감각적 욕망과 악의(惡意)와 분노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나함을 성취한 사람은 가정생활을 즐기지 않게 되어 8계(八戒)를 영원히 지킬 것입니다. 그에게는 적극적인 분노나 소극적인 분노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불안도 없고 비탄도 없습니다. 아나함도의 지혜나 아나함과의 지혜의 성취도 또한 진지한 서원에 의해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소멸되고, 빠른 시간 내에 소멸되고, 아주 자주 소멸되고, 필요한 정해진 시간에 의식을 되찾기를 바라는 진지한 서원, 즉 결심이 모든 검증이 성공할 때까지 행해집니다.
꼿티까 존자는 또다시 아나함을 성취한 사람이 보다 높은 상태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아라한도를 성취하기를 바라는 아나함을 성취한 사람은 마찬가지로 오취온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나함을 성취한 사람이 마찬가지로 오취온을 알아차린다면 위빳사나 지혜가 차례로 발전되어 머지않아 아라한위를 획득할 것입니다. 아나함을 성취한 사람이 오취온을 알아차리기 시작할 때, 그도 또한 생멸의 지혜로 돌아가서 위빳사나 지혜의 각 단계를 거쳐 또다시 모든 정신적․물질적 현상의 소멸에 이르고 아라한도의 지혜와 과의 지혜를 증득하게 될 것입니다.
아라한도의 지혜와 과(果)의 지혜를 성취해도 오랫동안 소멸, 빠른 시간 내의 소멸, 대단히 자주 소멸, 정해진 시간에 다시 의식을 찾는 것 등등에 대한 서원을 세워서 모든 검증이 성공될 때까지 검증하는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검증해서 성취가 확인된 다음에 아라한도를 획득한 사람(성자의 도를 증득한 사람)이 계속적으로 수행할 때 아라한과에 도달하여 그것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출세간의 과실(果)에 도달하고 그것을 즐길 수 있으려면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같은 원리가 다른 세 가지 출세간도를 성취한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예류자의 도(수다원도)를 증득한 사람이 규칙적인 수행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예류자의 과(수다원과)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고 수다원과를 즐기지도 못합니다. 일래자의 도(사다함도)를 증득한 사람이 규칙적인 수행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일래자의 과(사다함과)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고 사다함과를 즐기지 못합니다. 불환자의 도(아나함도)를 증득한 사람이 규칙적인 수행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불환자의 과(아나함과)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고 아나함과를 즐기지 못합니다. 개인의 축적된 성향을 극복하고 완전히 없애려면 지속적이고 끈기 있게 수행을 해야 합니다.
꼿티까 존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아라한을 성취한 사람은 어떤 법을 알아차려야 합니까?”
사리뿟따 존자는 대답했습니다.
“꼿티까 존자여, 아라한을 획득한 사람도 오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라한을 획득한 사람은 오온을 알아차림으로써 더 높은 경지, 즉 벽지불(스승 없이 깨달은 분)이나 정등각자(완벽하게 깨달은 붓다)를 획득할 수는 없지만, 그는 현 생애 동안 지복(최고의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가 지속적이고 끈기 있게 오온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함으로써 그가 원할 때는 언제나 출세간의 과실(果)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축적된 성향을 완벽하게 뿌리 뽑았으므로 모든 세상사와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며,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계를 지키고 법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오취온을 알아차리는 수행으로써 수다원위를 얻을 것이며, 같은 과정을 반복하여 수행함으로써 여러분은 차례로 사다함위, 아나함위, 아라한위를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첨부 7
위빳사나 제1선~제4선
사띠가 분명하면, 특히 사물의 소멸이 뚜렷하게 보이면 모든 현상에 내재한 무상∙고∙무아의 특징을 직관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특징을 직관으로 이해하는 것은 ‘명상의 지혜(Sammasana Ñāṇa)’의 단계에 속한다. 보통 이 용어를 ‘알고 확인한 지혜’라고 번역한다. 현상의 사라짐을 개인적 체험을 통해 봄으로써 삼법인을 알고 확인한다.
흔히 쓰고 있지만, ‘통찰(insight)’이라는 말은 빠알리어인 위빳사나를 옮긴 말로는 적당치 않다. 위빳사나는 여러 가지 형태로 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여러 가지란 물론 무상∙고∙무아 세 가지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의 보다 완전한 번역은 ‘무상∙고∙무아의 형태로 본다.’가 된다.
수행으로 위빳사나 지혜가 되풀이해서 생길 때, 무상∙고∙무아가 현재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숙고하게 된다. 삼법인을 과거에 보았듯이, 미래에도 계속해서 지배적으로 나타날 것임을 추론에 의해 깨닫게 된다. 다른 존재, 다른 대상도 같은 무상∙고∙무아라는 요소로 구성된다. 이 같은 숙고를 추론적 지혜라 한다. 이 지혜는 선정의 요소인 위딱까(일으킨 생각)와 위짜라(지속적 고찰)에 이어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생각으로 떠오른다.
이 단계가 되면 위빳사나 제1선이 완전히 계발되었다고 하고, 수행 단계로는 ‘명상의 지혜(Sammasana Ñāṇa)’가 성취된다. 이때 수행자는 조건지어진 현상의 세 가지 특징 즉 무상∙고∙무아를 분명하게 깊이 이해한다. 이 세상에서 삼법인이 미치지 않은 상황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추론적 결론에 이른다.
제1선에서는 추론과 깊은 생각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수행자의 정신을 주도하지 않는 한 해롭지 않다. 그러나 특히 지적인 사람, 상상력과 철학적 사변이 뛰어난 사람은 깊은 생각으로 인하여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에 방해될 수가 있다. 실제로 지혜로 나가는 길을 막을 수 있다.
이런 성향의 사람이 자신의 수행이 지체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으로 위로할 수 있다. 이런 경우의 깊은 생각은 탐욕이나 혐오보다는 법과 관련이 있다. 그렇긴 하더라도 수행자는 순수하게 현상을 체험하는 순수 관찰로 돌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선한 위딱까와 선하지 않은 위딱까
정확한 겨냥을 뜻하는 선정의 요소 위딱까는 앞서 말한 깊은 선정을 포함하여, 떠오르는 생각을 주목한다. 위딱까에도 선하고 선하지 않은 두 종류가 있다.
감각적 즐거움으로 가면 선하지 않은 겨냥이라고 한다. 출리(出離)로 가는 위딱까는 그 반대이다. 악의(惡意)나 공격으로 가는 위딱까도 선하지 않다. 싫어하지 않거나 비폭력으로 가는 위딱까는 선하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무상∙고∙무아를 추론하는 지혜가 생기면 감각적 즐거움으로의 겨냥은 없다. 자기가 직접 통찰해서 생긴 일련의 생각에 어떤 욕망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아마도 세간의 즐거움, 명성, 성, 부귀, 재산 등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속세와 인연을 끊겠다, 관대해지겠다, 법을 널리 펴겠다는 등의 매우 선한 욕망일 것이다. 이런 생각은 겨냥되고 숙고되더라도 곧 단념, 출리와 연결된다.
악의로 가는 위딱까는 공격적인 마음 상태로서, 다른 사람이 손해와 불운으로 고통 받기를 바란다. 악의에 뿌리를 두면 그 이면에 파괴적 특질을 지닌다. 싫어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것은 자애라는 사랑의 특질에 속한다. 증오가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특질을 가진 반면, 자애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바란다. 앞서 말한 개인적 체험으로 법의 향기를 맛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법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사람과 체험을 공유하기를 바란다. 이런 생각이 자애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위딱까는 남을 해치거나 해치지 않는 두 갈래로 간다. 즉 폭력적 사고나 비폭력의 사고이다. 전자는 다른 생명을 해치고, 억압하고, 괴롭히고, 죽이고 싶은 욕망을 담고 있다. 이것은 증오에 뿌리를 둔 매우 파괴적인 마음이다. 반대로 후자는 다른 이를 돕고, 고통에서 구하고, 근심을 덜어주는, 즉 동정하는 특성이 있다. 강한 동정심을 느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고통에서 구할 길과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깊이 생각하는 지혜, 위짜라
그렇게 거듭해서 생각이 일면, 이 과정을 위짜라라고 한다. 겨냥한 곳을 계속 비벼댄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자신의 생각을 깊이 음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로 수행자는 직접 직관적 통찰을 체험한다. 그리고서 통찰에 대한 추론적 지혜가 생긴다. 추론적 지혜는 자극적이고 즐겁지만 지나치면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되어 직접 관찰의 과정을 방해한다. 비록 그것이 매우 성스러운(출리, 자애, 동정 등의) 생각일지라도 사로잡히고 휩쓸려 들어가게 되면 지혜의 성장은 멈춘다.
마음의 중요한 요소인 위딱까와 위짜라를 이루도록 하라. 조심스럽게 겨냥해서 대상을 분명히 보고, 참모습을 꿰뚫어 볼 때까지 철두철미 비벼대라. 아주 훌륭한 생각이 떠오른다 할지라도 사로잡히지는 말라. 그러면 위빳사나 지혜의 여러 단계를 걸쳐 마침내 열반에 이를 것이다.
보다 높은 단계의 위빳사나 선정에 도달하기
위빳사나 제1선에서는 현상이 급속히 일어나고 사라짐을 통찰하게 된다. 이러한 통찰을 체험하고 그 다음 단계로 가면서 수행자는 성장하게 된다.
위빳사나 제2선
수행자는 떠오르는 생각을 따라가는 유아기를 뒤로 하고 단순, 순수 응시라는 성숙한 단계로 들어간다.
이제 수행자의 정신은 명석하고 예리해 진다. 매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현상을 빠른 속도로 뒤쫓아 갈 수 있다. 무상 즉 몸과 마음의 덧없는 성품에 대한 의심도 없다. 이때 수행은 힘이 들지 않는 듯하다. 부지런한 노력도, 거듭되던 생각도 사라지고 기쁨과 희열이 들어선다. 이처럼 생각 없는 순수 응시를 위빳사나 제2선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위빳사나 제1선에서는 노력과 산만한 생각으로 마음이 혼잡하다. 선명함과 희열, 믿음과 편안함이 뚜렷해지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생멸, Udayabbaya)을 통찰하기 시작하는 위빳사나 제2선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믿음과 고요함과 희열과 행복이 장애가 되다
정신은 더욱 미세해지고 집중이 잘 된다. 집중이 잘 되면 자기 체험으로 확실히 입증된 믿음이 생긴다. 그리고 깊은 확신이 생긴다. 수행을 계속하면 부처님과 스승이 약속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생긴다. 이때가 되면 마음과 몸이 편안해지고 희열도 강렬해 진다. 위빳사나 제2선에 이르면 전에 겪지 못하던 희열 상태에 들게 되며, 또 이것에 집착할 가능성이 많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강렬한 행복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믿을 정도이다. 그렇게 되면 수행의 발전이 늦어진다. 그러면 수행이 ‘안’에서 멈추게 된다.
비상한 체험을 했다면 그것을 사띠하고 이름을 붙이라. 희열, 믿음, 고요함 등은 마음의 상태일 뿐이라고 분명히 사띠하라. 사띠하는 동안 집착했음을 깨달으면 즉시 집착을 끊고 기본대상인 배로 주의를 돌리라. 그러면 수행이 다시 진전되기 시작하고 달콤한 열매까지 얻을 것이다.
위빳사나 제3선이 생기다
희열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러나 사띠하는 힘과 집중은 깊어진다. 일어나는 대상의 참 본성에 대한 통찰도 예리하다. 이때 깨달음의 요소인 평온(우뻭카)이 우세해 진다. 즐겁거나 불쾌해도 개의치 않게 되고 몸과 마음은 편안하다. 고통 없이 오래 좌선할 수 있고 몸이 홀가분해 지고 가볍고 강건해 진다. 이것이 위빳사나 제3선인데, 편안함과 마음의 집중, 이 두 가지가 제3선의 요소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지혜가 성숙해 질 때 제3선이 생긴다.
제2선에서 제3선으로 넘어가는 것이 수해에서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다. 인간이란 마음을 뒤흔드는 전율과 흥분에 자연스럽게 집착한다. 희열은 마음을 뒤흔드는 기쁨 중의 하나이다. 마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이것은 성장의 한 과도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희열을 체험하면 경계를 강화시켜 조심스럽게 사띠한다. 희열에 집착하는 한, 평화와 편안함이 있는 차원 높은 행복으로의 걸음이 지체될 것이다.
행복의 절정
경전에는 제2선에서 제3선으로의 변화를 새끼에게 젖을 주는 어미 소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인간에게 우유가 돌아가려면 젖을 일찍 떼야 한다. 젖을 떼지 않으면 새끼가 몽땅 먹어버리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새끼소는 희열을 먹고 자라는 제2선과 같다. 어미 소는 제3선이 될 것이고, 신선하고 달콤한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희열의 집착에서 벗어난 수행자와 같다.
제3선에서 맛보는 행복과 편안함이 위빳사나 수행에서 체험하는 절정의 행복이라고 경전은 말한다. 이 행복은 가장 달콤한 것이다. 그럼에도 수행자는 평온으로 인하여 집착 없이 제3선에 머물 수 있다.
세밀하게 사띠하면서 몸과 마음의 편안함과, 통찰의 예리함과 명료함에 대해 미묘한 집착이 생긴다. 그러나 통찰이 예리하고 명료할 때 그것을 잘 사띠해야 한다. 나타나는 대상마다 쉽게 사띠해서, 놓치지 않는 총괄적이고 개괄적인 사띠가 생긴다면 집착이 덜 생긴다.
현상의 소멸 : 편안함이 사라지다
제3선을 행복의 절정이라 한다. 왜냐 하면 그 이상의 선정에서는 행복감이 없기 때문이다. 현상에 사띠하면서 생멸의 지혜 단계에서 점차 소멸의 지혜(Bhaṅga Ñāṇa)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 시점에서는 대상의 처음과 중간이 분명치 않다. 그 대신, 현상이 계속해서 사라진다. 즉 현상을 사띠하자마자 즉시 사라진다. 나타난 현상들이 계속 사라지면서, 번번이 몸이 사라진 듯 여겨진다.
이때 수행자는 심란해지고 당황하는 경향이 있는데, 편안함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현상의 재빠른 소멸로 어리둥절하기 때문이다. 대상을 사띠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고 텅 빈다. 뒤따르는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관념이 불분명해진다. 이제까지는 수행자가 현상을 분명히 본다고 해도 인식이라는 정신적 요소가 같이 있었다. 그래서 관념이 아닌 궁극적 실재(빠라맛타)뿐 아니라 몸, 팔, 다리, 머리, 아랫배 등의 형태의 개념(빤냣띠)도 볼 수 있었다. 소멸의 지혜 단계에서는 빤냣띠가 떨어져 나간다. 현상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라져 버리니까.
당신은 ‘무슨 일이지?’하면서 울부짖을지 모른다. ‘이제까지 잘 해 왔는데 이제 엉망이야.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사띠할 것도 사라졌어.’ 자기비판, 불만으로 가득 찰 것이다. 물론 편안함도 사라진다.
그러나 결국, 이 새로운 국면에서도 차차 편안함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속되는 현상의 흐름을 관찰한다. 이 단계의 지혜를 ‘소멸의 지혜’라고 한다. 이때 흥미로운 점이 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편안함이 사라지지만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움도 전혀 없다. 마음의 느낌 역시 보다 중립적이다.
위빳사나 제4선이 나타나다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완전히 통찰할 수 있을 때, 제2선의 특징이던 희열이 지나가고 제3선의 요소인 편안함이 나타난다. 강렬한 기쁨이던 희열 대신 부드럽고 미세한 부분으로 편안함과 부드러움이 자리 잡는다. 소멸의 지혜 단계에서, 편안함이 사라져도 정신적 불쾌감은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제3선이 지나고 제4선이 들어서는데, 이때의 특징적인 선의 요소는 평온과 집중된 마음이다.
모든 구성물에 대한 평온을 통찰하다
기쁘지도 불쾌하지도, 편안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마음인 평온이 생긴다. 평온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만드는 대단한 힘이 있다. 이 특별한 양상을 따뜨라맛자땃따(tatrama- jjatattā, 中立)라고 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므로, 사띠는 완벽하게 순수하고 예리하다. 현상의 모호한 측면도 놀라울 만큼 분명하게 티끌이나 미세한 진동으로 보여 진다. 사실 중립은 선의 단계마다 처음부터 나타난다. 제1, 제2, 제3선에서는, 대낮에 해에 밀려 달이 보이지 않듯이, 강렬한 다른 것 때문에 가려져 있었다.
위빳사나 4가지 선의 요약
제1선에서 평온은 아직 계발되지 않았다. 그 대신 겨냥과 비벼댐, 즉 처음의 마음 기울임과 지속적 마음 기울임, 위딱까와 위짜라가 뚜렷하다. 앞서 얘기한 대로, 제1선의 겨냥과 비벼댐에는 산만한 생각이 자주 온다.
제2선에서는 희열과 전율과 오싹함이 평온을 가린다. 제3선에서는 가장 달콤한 행복과 편안함으로 평온이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편안함이 사라지고, 기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이 나타나면 평온이 빛을 발한다.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찬란한 달빛이 펼쳐지듯이.
소멸의 지혜가 있고, 이어서 두려움의 지혜, 허물의 지혜, 염오의 지혜가 있고, 여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현상에 대한 평온의 지혜(Sankhārupekkhā Ñāṇa)’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는 평온이 그리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물이 매우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때가 수행이 깊어진 단계이다. 사띠가 민첩하므로 불쾌함이나 기쁨으로 흔들리기 전에 대상을 알아차린다. 집착이나 불쾌함이 생길 틈이 없다. 열광케 하던 좋은 대상도, 불쾌한 대상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영향력을 잃는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모두 이러하므로, 이렇게 나타난 평온을 “여섯 가지 평온”이라 한다.
사띠가 매우 미세한 것도 이때의 또 다른 특징이다. 일어남과 사라짐의 과정에 변화가 생긴다. 짧게 끊어지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그럴 때에는 앉은 자세를 전체적으로 훑어 내리면서 관찰하거나, 엉덩이 닿는 부분과 무릎 등 더 세분화해서 관찰해야 한다. 몸의 감각이 사라지면서 이것도 역시 사라질 수 있다. 감지할 몸의 현상이 사라지기 때문에 몸의 고통, 아픔, 가려움 등도 사라진다. 오로지 몸의 현상이 사라졌음을 아는 의식만 남는다. 이때에는 이 의식 자체가 사띠의 대상이 된다. ‘알고 있음, 알고 있음.’이라고 사띠하다 보면 그 의식마저도 깜빡 사라졌다가 되돌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명료하고 예리하게 관찰된다.
정신적 균형을 잘 이룬 이런 상태를 아라한의 정신과 같다고 하는데, 이때의 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어떤 대상도 흔들림 없는 상태로 대면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단계에 왔다고 해도 아직 아라한은 아니다. 이 특별한 사띠의 순간 동안 아라한과 유사한 정신을 체험했을 뿐이다.
위빳사나의 4가지 선은 단계마다 독특한 행복이 있다. 위빳사나 제1선에는 벗어남으로부터 오는 행복이 있다. 마음은 장애에서 벗어나 격리된다.
제2선에서는 집중의 행복을 경험한다. 집중이 잘 되면 희열과 편안함의 상태로 행복감이 나타난다. 희열을 떨칠 때, 편안함의 행복이라고만 알려진 제3선의 행복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제4선에서는 지혜의 행복을 체험한다. 물론 이 네 번째가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조건지어진 현상의 영역에서 생긴 것이다.
여러분이 이 영역을 초월할 때 비로소 궁극적 행복, 진정한 평화의 행복을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을 빠알리어로 산띠수카(santisukha)라고 한다. 수행 대상이나 정신적∙신체적 현상뿐만 아니라, 사띠하는 마음조차도 완전히 머물 때 산띠수카는 생긴다.
수행자 여러분들도 위빳사나 선으로 이 네 가지 행복을 체험하고 더 나아가 최상의 행복, 열반을 누리기 바란다.
첨부 8.
보배경(일부)
35. 땅 속에 견고히 박힌 문기둥을
사방에서 부는 강풍이 흔들지 못하듯이
선한 이(수다원)들은 거룩한 진리를
꿰뚫어 알기 때문에
그 문기둥과 같다고 나 여래는 말하네.
이(수다원) 승가라는 보배는
참으로 수승하다네.
이러한 진실의 서언으로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36. 심오한 통찰로 잘 설해 놓으신
거룩한 진리들을 분명하게 깨달은
그 수다원들은 설사
매우 방일하게 지내더라도
여덟 번째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네.
이(수다원) 승가라는 보배는
참으로 수승하다네.
이러한 진실의 서언으로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37. 수다원 지혜라는 봄[見]을
구족함과 동시에 그(수다원)에게는
존재 무더기 사견[有身見]과 의심,
실천·의례 집착[戒禁取]이라는
세 가지 법은 완전히 사라지고
일부만 남는다네.
38. 그리고 그(수다원)는 사악처에서도
완전히 벗어났으며
여섯 가지 매우 심한 허물도
행하지 않는다네.
이(수다원) 승가라는 보배는
참으로 수승하다네.
이러한 진실의 서언으로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39. 또한 몸이나 말, 마음으로
설령 어떠한 악행을 하더라도
그(수다원)는 그 허물을 감출 수 없게 된다네.
진리를 본 이들이 허물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도 설하셨다네.
이(수다원) 승가라는 보배는
참으로 수승하다네.
이러한 진실의 서언으로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금강 작성시간 21.11.23 사두사두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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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혜 수 작성시간 21.11.23 고맙습니다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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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그림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11.23 우리는 괴로움을 반대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태어나는 순간 사람들은 축하하고 기뻐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는 것을 피하려고 하고 병드는 것을 피하려고 약을 먹고 운동하고 죽지 않으려고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애쓰는 것 자체가 즐거움입니까, 괴로움입니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81세인데 얻는 것이 없이 계속 잃기만 했습니다.
결혼해서 배우자로부터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회사에 가면 상사가 계속 잔소리하고 일을 계속 시키니 이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사실은 원하는 것을 갖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을 갖는 순간부터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불안합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서 괴로웠는데, 그것을 갖게 되면 역시 괴로우니 괴로움이 계속됩니다. 부처님께서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사실은 괴로움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작성자그림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1.11.23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싫어하는 것도 따라옵니다. 하나 사면 하나가 덤으로 따라옵니다.(1 플러스 1) 대표적인 예가 부모가 아이를 갖는 경우인데, 아이가 생기면 부모는 아주 기뻐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자신의 자유가 줄어들고 밤낮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쁨입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원하지 않는 것도 따라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괴로움이라는 진리에서 부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몸과 마음이 괴로움”이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