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9일 목요수행 게송 관련] 부처님께 대연민이 생겨나는 모습
부처님께 대연민이 생겨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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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 사야도 지음, 비구 일창 담마간다 옮김, 불방일, 『마하시 사야도의 헤마와따숫따 법문』, pp.62~77
대연민이 생겨나는 모습
늙음과 병듦으로 끌려간다
부처님께서는 지혜의 눈으로 온 세상을 널리 관찰하실 때 매우 불쌍한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비유하자면, 연민심이 많은 이가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리 깊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연민은 매우 깊고 광범위합니다. 현재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불쌍히 여기십니다. 지금은 행복하지만 머지않아 지옥이나 축생, 아귀 탄생지에 태어나 고통당할 것을 보고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한 생 한 생 태어나서 머지않아 늙고 병들어 고통을 겪은 뒤 거듭거듭 죽는 것을 보고서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지금 사람들을 보십시오. 새로운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일정한 나이가 되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30세쯤 되면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합니다. 그러는 사이 젊었던 용모는 차츰차츰 늙고 노쇠해져 갑니다. 늙을 뿐만 아니라 건강도 잃게 됩니다. 치료하지 못할 정도로 병이 깊어지면 결국 죽게 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지냅니다. 하지만 사람은 젊음에서 늙음 쪽으로 끌려갑니다. 늙음에서 병듦으로 끌려갑니다. 병듦에서 죽음으로 끌려갑니다.
그렇게 죽음이 임박해서 심하게 아플 때가 돼서야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때가 되면 가족이나 친척, 친지들이 곁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봅니다. 일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매우 슬퍼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습니다. 죽으면 시체를 묘지로 보냅니다. 묘지에서 가족들은 울고 통곡하며 시체를 화장합니다. 그 뒤에도 며칠, 혹은 몇 달, 이렇게 한동안은 죽은 이를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한 생의 여정입니다.
다음 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면 늙어야 합니다. 늙으면 병들어야 합니다. 병들면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각각의 생마다 젊음에서 늙음의 단계로 끌려갑니다. 늙음에서 병듦의 단계로 끌려갑니다. 병듦에서 죽음의 단계로 끌려갑니다.
그렇게 중생들이 늙음의 단계와 병듦의 단계와 죽음의 단계로 차례대로 끌려가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보셨습니다. 늙음의 단계에 이른 중생들도 ‘몇 백만’이나 보셨습니다. 병듦의 단계에 이르러 주위 친척들이 슬퍼하는 것도 몇 백만이나 보셨습니다. 죽음의 단계에 이르러 울고 통곡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몇 백만이나 보셨습니다.
여기서 ‘몇 백만’은 요즘 쓰는 말이기 때문에 언급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에 처한 중생들은 아승기로 무한합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중생 각각 한 존재에게 차례대로 늙는 모습과 병든 모습과 죽는 모습을 판자에 적어서 나열한다면 대지조차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생에 태어나서 늙도록, 늙어서 병들도록, 병들어서 죽도록, 계속 끊임없이 끌려가는 모습을 부처님께서는 보셨습니다.
그렇게 보시는 부처님께 ‘매우 불쌍한 중생들이구나.’라고 숙고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대연민이 생겨났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으로 경각심을 북돋기 위해 독송하고 마음에 새기도록 게송으로 “노병사로 내몰려 중생실로 덧없네”라고 표현했습니다.
노병사로 내몰려 중생실로 덧없네.
‘중생들은 늙고 병들고 죽고, 다시 늙고 병들고 죽고 이렇게 반복하면서 괴로움을 겪고 있다. 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라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나 여래만 구해 줄 수 있다. 나 여래 외에 구해 줄 수 있는 다른 존재는 없다. 이 중생들이 나 여래의 가르침대로 실천해야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실천하지 않으면 이전과 같이 늙고 병들고 죽으면서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불선업이 과보를 줄 때는 지옥에 떨어져 한계를 알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아귀로 태어나서도 고통을 겪어야 한다. 축생으로 태어나서도 고통을 겪어야 한다’라고 이렇게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보셨기 때문에 부처님에게 아들인 라훌라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모든 중생에게도 고르게 불쌍히 여기는 연민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에 대해; 모든 중생에 대해 특별하게 가다듬어서 관조할 수 있는 여여한 덕목을 갖추어 마음을 잘 둘 수 있다네”라고 사따기리 천신이 대답한 것입니다. 이것을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붓다 맘잘두니 모두여여 연민고루”라고 게송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붓다 맘잘두니 모두여여 연민고루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
중생들에게 의지할 만한 보호자가 없다고 보기 때문에도 부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의지할 만한 보호자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어린 자식은 부모가 보호합니다. 늙은 부모도 착한 자식들이 보호합니다. 제자를 스승이 보호합니다. 스승을 제자가 보호합니다. 형제와 자매도 서로 보호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늙지 않도록 보호하지는 못합니다. 부모의 늙음을 자식이 나누어 가질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병들지 않도록 보호하지는 못합니다. 의사나 약사가 어느 정도 병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고칠 수 없을 정도의 병은 의사나 약사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더욱 어찌할 수 없습니다. 임종의 순간 가까운 사람들이 곁에서 지켜봐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중생들에게는 늙지 않도록, 병들지 않도록, 죽지 않도록 보호해 줄 수 있는 의지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죽고난 뒤에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도록, 아귀로 태어나지 않도록, 가난한 이로 태어나지 않도록 보호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거룩한 부처님만 구해주고 보호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도 행복하게 하는 좋은 방법과 바른길을 설하고 제시해 주는 것 정도로만 구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설해 주신 방법과 길대로 실천하는 이들만 늙음의 위험과 병듦의 위험과 죽음의 위험과 악처의 위험과 윤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의사가 환자를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사는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약을 처방합니다. 적당하거나 적당하지 않은 음식과 생활 습관 등도 알려 줍니다. 단지 이 정도만 할 수 있습니다. ‘병이 사라지기를’이라고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환자는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어야 합니다. 의사가 제시한 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병이 낫습니다.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구해주고 보호해 주실 수 있다고 했지만 행복하게 하는 좋은 방법과 바른길을 설하고 제시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설해주신 대로 따라서 실천하는 이들만 악처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 등 윤회의 위험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꼬라뱌 왕과 랏타빨라 존자의 문답
과거에는 위력이 대단한 왕들이 많았습니다. 그 왕들에게는 군대나 경호원이 많았기 때문에 세간의 측면으로는 기댈 곳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군대도 그 왕들을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구해줄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랏타빨라라는 아라한 장로 한 분이 있었습니다. 장로는 재가자였을 때 꼬라뱌 왕의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꼬라뱌 왕이 장로에게 “무엇 때문에 출가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랏타빨라 장로는 “중생들은 늙음과 병듦과 죽음으로 끌려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보호해 줄 사람이나 의지할 곳이 없다”라는 등으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의 요약’ 네 가지 법을 듣고서 출가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꼬라뱌 왕은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질문했습니다.
“존자여, 저희 왕들에게는 코끼리 부대나 말 부대 등이 많습니다. 그렇게 의지할 만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의미로 보호해 줄 사람이나 의지할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러자 랏타빨라 장로가 대답했습니다.
“왕이여, 그대는 가끔 심한 병에 걸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걸린 적이 있습니다, 존자여.”
“그렇게 심한 병에 걸렸을 때 고통을 덜기 위해 그 괴로운 느낌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대 혼자 그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그 고통은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없습니다, 존자여. 저 혼자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왕이 대답하자 랏타빨라 장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왕이여, 바로 그것을 두고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는 보호해 줄 사람이나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세간의 측면으로는 보호해 주고 지켜 주는 것이 많은 것 같아도 늙지 않도록, 병들지 않도록, 죽지 않도록,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도록, 고통을 겪지 않도록 진실로 보호해 줄 사람이나 의지처는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것을 “보호없어 의지처 없어실로 힘없네”라고 게송으로 표현했습니다.
보호없어 의지처 없어실로 힘없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부처님이란 존재는 수많은 대겁이 지난 뒤 아주 가끔만 출현합니다. 출현 후에는 수명까지만 머물고 완전열반에 듭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을 듣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교법이 아직 사라지기 전이라면, 지혜가 있고 참사람(부처님의 제자)인 출가자나 재가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설하기 때문에 원하는 이들은 이들을 따라서 실천하여 악도와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설해 주는 참사람인 스승들도 태어나는 생마다 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여러 교리나 종교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을 설하고 지도하는 이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들을 만나 잘못된 법이나 잘못된 길을 따른다면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잘못된 길을 실천하면 실천할수록 불선의 허물이 많이 생겨나 윤회의 고통 속으로 더욱더 깊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에게 귀의한 불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다른 가르침이나 잘못된 길에 빠진 이들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도 숙고하시고 연민하셨습니다.
중생들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구나. 이렇게 불안(佛眼)을 통해 자세하게 관찰하고 보시는 세존께 중생들에 대해 대연민이 생긴다.
사실은 이렇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이가 더욱더 불쌍합니다. 가엾게도 그들은 행복을 바라면서 바른길을 찾다가 잘못된 길인데도 바른길이라고 생각해서 따릅니다.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고통만 더해질 뿐인데도 말입니다. 불교에 입문한 이들도 ‘우리들은 올바른 길을 얻었다’라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최소한 수다원이라도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스러운 도과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아직 안심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불자인 부모나 스승을 만나 불교에 입문하고 수행한다 해도 다음 생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부모와 스승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부처님의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늙음의 위험과 병듦의 위험과 죽음의 위험과 악도의 위험과 윤회의 위험과 사견의 위험으로부터 구하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귀의처가 없는 중생들을 자신의 제자나 다른 이의 제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기 것이 없다
중생들에게는 자신의 진짜 재산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구하고 모아 놓은 재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 은, 쌀, 소, 물소, 코끼리, 말, 차, 집, 땅, 논, 밭, 공장, 사무실 등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이것들을 모두 버리고 가야 합니다. 몸에 걸친 장식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모두 다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자기 몸조차 버리고 가야 합니다.
마지막 날은 오늘이 될 수도 있고 내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코 ‘아직 멀었다’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죽기 전이라도 도둑이 훔쳐 가면 자기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것이 돼버립니다. 힘이 센 이들에게 억지로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간의 재산이나 물건은 진짜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신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보시 선업이나 계 선업이나 수행 선업 등의 선업입니다. 선업이야말로 자신의 진짜 재산입니다. 선업이라는 재산은 누구도 훔쳐갈 수 없고 빼앗을 수 없습니다. 여러 생에 걸쳐 연속해서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선업 재산이 많은 사람은 연속된 생에서 행복할 것입니다. 따라서 선업 재산이 가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업 재산이 없거나 부족하다면 선업 재산을 쌓는 데 힘써야 합니다.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면 됩니다. 보시 선업도 가난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계 선업도 가난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수행 선업도 가난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위빳사나 선업은 더욱 중요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하루나 이틀 정도만 노력할 수 있다면 하루나 이틀이라도 노력하고 관찰하십시오. 그렇게 하루나 이틀 정도 수행해서 방법을 배웠다면 집에서도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비용도 들이지 않고 선업 재산을 늘리고 있는 것입니다.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선업 재산이 있는 사람은 죽을 때 그 선업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올바르게 관찰하고 수행했다면 자기가 관찰하던 법에 마음 기울이면서 편안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은 후에도 천상계 등의 선처에 가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진짜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보시와 계와 수행 선업을 특히 신경 써서 늘려나가야 합니다.
금이나 은 등의 세간적인 재산은 죽을 때 버리고 가야 할 것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진정한 재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이와 관련된 재산일 뿐입니다. 그러한 재산에 애착하면서 죽는다면 아귀로 태어날 수 있다고까지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태어나는 생마다 계속해서 재산을 모은 뒤 죽을 때는 버리고 가는 것을 보시고서 부처님께서는 그런 중생들을 고르게 연민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자기재산 없다네 버리고서 가야해”라고 게송으로 표현했습니다.
자기재산 없다네 버리고서 가야해
원하는 것이 갖춰지지 않는다
중생들의 상황을 부처님께서 지혜를 통해 관찰하셨을 때 갈망하고 갈구하는 갈애라는 법에 뒤덮여 제압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갈애는 배고픔이나 목마름과 마찬가지입니다. 갈애는 좋은 대상을 바라고 좋아하며 갈구합니다. 좋은 형상 대상들을 보고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좋은 소리 대상들을 듣고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좋은 냄새 대상들을 맡고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좋은 맛 대상들을 먹고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좋은 감촉 대상들에 닿고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좋은 생에 태어나거나 오래 살아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칭송받을 만한 덕목을 아무리 많이 갖추더라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재산이나 필수품도 하나를 얻으면 두 개 세 개를 얻으려 합니다. 두 개 세 개를 얻으면 네 개 열 개를 얻으려 합니다. 제자들도 한 명이 생기면 두 명 세 명이 있었으면 합니다. 두 명 세 명이 생기면 네 명 열 명이 되길 바랍니다. 도무지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얻을 때마다 더욱 갈망하고 기대합니다. 어떤 나라에는 몇 조 이상의 엄청난 재산을 가진 부자들이 있습니다. 그 부자들조차 ‘충분하다’라고 끝내는 법이 없습니다. 끝없이 오르려고만 합니다. 왕들은 가능한 한 더 많은 영토를 확장하려 합니다. ‘충분하다’라고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천신들도 갈망하고 갈구하는 힘이 사람 못지않거나 때론 더 큽니다. 위력이 큰 어떤 천신은 천녀를 500명이나 천 명 등으로 아주 많이 거느립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더 갖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좋은 대상들을 누리더라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거듭거듭 더 많은 대상을 누리고자 하며, 늘 새로운 대상들에 목말라 합니다. 제석천왕은 이를 두고 아귀와 같다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모자라서 만족하지 못하는구나. 갈애의 노예가 되어 있구나”라고 부처님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생들은 갈애가 시키는 대로 따르고 행합니다. 갈애가 이것을 원한다고 하면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따릅니다. 어떤 이들은 갈애가 시키는 것을 힘써 구하다가 사형까지 당하기도 합니다. 갈애가 시키는 모든 것을 매일, 매달, 매년 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죽을 때까지 행해야 합니다. 다음 생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갈애가 시키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잠시도 쉬지 못합니다.
세상의 노예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한 생입니다. 하지만 갈애의 노예는 한계가 없습니다. 아라한이 돼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이 되고 나면 온 세상에 대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무명(어리석음)이 좋아할 만한 것이라고 갈애가 시킵니다. 갈애가 충동질하는 대로 중생들은 그것들을 끝없이 구하고 즐깁니다. 원하는 것이 구족되거나 만족하는 법이란 없습니다. 항상 갈망하고 갈구하면서 괴로움에 처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시고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 내용과 관련해 “구족못해 불만족 갈망갈애 노예네”라고 게송으로 표현했습니다.
구족못해 불만족 갈망갈애 노예네.
“노병사로 내몰아 중생실로 덧없네”
“보호없어 의지처 없어실로 힘없네”
“자기재산 없다네 버리고서 가야해”
“구족못해 불만족 갈망갈애 노예네”
이것이 바로 랏타빨라 존자가 듣고서 경각심을 일으켰던 ‘가르침의 요약’ 네 가지를 번역한 게송입니다. 이 내용에는 대연민이 생겨난 모습도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을 부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에 포함시켜 설한 것입니다.
부처님께 대연민이 생겨나는 모습은 매우 많습니다. 중생들이 윤회라는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모습, 여러 위험과 장애와 만나야 하는 모습, 애착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의 열한 가지 불(애착, 성냄, 어리석음,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불타고 있는 모습 등을 통해서도 부처님께서는 ‘나를 제외하고 구해줄 수 있는 다른 이가 없구나’라고 숙고하며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모습 정도면 고르게 연민하시는 모습을 이해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붓다 맘잘두니 모두여여 연민고루”라고 게송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붓다 맘잘두니 모두여여 연민고루
이 게송 중 “연민고루”라는 표현을 통해 “불쌍히 여기신다.”라고 하면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애도 고르게 있다”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 대해 고르게 행복하기를 바라시고 고르게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사따기리 천신이 “모든 중생에 대해 특별하게 가다듬어서 관조할 수 있는 여여한 덕목을 갖추어 마음을 잘 두실 수 있다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