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일 - 마음 청정
11/15(화)
4:30 법문
마음 청정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 중에서 두 번째인 ‘마음 청정[心淸淨]’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수행자는 계를 청정하게 지키면서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을 빨리어로 찟따 위숫디(Citta Visuddhi)라고 합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주제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사마타(samatha, 止) 수행자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마타 수행주제의 기본 연습에 집중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수행 초기에는 근접삼매(初期三昧)와 본삼매(本三昧, 깊은 삼매)를 닦은 수행자가 계속해서 사마타 수행에 의한 고요함 속에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2) 순수 위빠사나(suddha vipassanā) 수행자는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마타 수행을 하지 않고 처음부터 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수행은 순수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는 육문(六門)에서 생기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주시해야 합니다. 수행자는 수행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기는 모든 대상을 찰나삼매로 알아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주시하기 시작할 때부터 수행자의 마음이 방황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약해질 때는 마음을 제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대상을 향해 방황하게 되면 즉시 마음의 상태를 알고 지속적으로 주시하여야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방황하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지속적으로 주시하게 되면 마음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마음의 주시를 마음을 관찰한다고 합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도 법입니다.
이 수준의 관찰에서 마음은, 대상을 주시하고 있고, 대상과 함께 생기면서, 대상에 밀접하게 고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에 마음이 고정된 것이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입니다. 그것을 ‘마음 청정(citta visuddhi)’이라고 합니다.
마하시 큰스님께서는 “다른 대상으로 방황하지 않고 오직 주시해야 할 대상만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마음(observing mind)만을 마음 청정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끊임없이 마음을 청정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몸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이를 닦고 화장실에 갑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몸을 깨끗하게 합니다. 한낮에도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합니다. 이런 것들도 몸을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녁때도 똑같이 합니다. 같은 방법으로 매일 하루에 세 번 몸을 청정하게 합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만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몸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사악도, 즉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 중의 하나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마음이 사악도 중의 하나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간들은 우리 자신의 눈으로 물소, 암퇘지, 황소, 개, 오리, 돼지, 암탉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동물들은 그들의 몸이 더러웠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고 열등하고 저열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들이 행한 악한 생각과 말과 행위의 결과로 이들 동물들은 천하고 비참한 세계에 떨어졌습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 도입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중생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대들이 마음을 청정하고자 한다면 사띠를 확립하는 길을 계발해야 한다.”
유일한 길은 사띠를 확립하는 네 가지 수행 즉 다음의 네 가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1) 몸 관찰
(2) 느낌 관찰
(3) 마음 관찰
(4) 법 관찰
모든 사람들이 가르침에 제시한 그대로 엄격하게 그리고 면밀하고도 지속적으로 수행한다면, 그들은 모두 틀림없이 마음이 청정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사띠 확립을 실천한다면 부처님들도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그리고 벽지불들도, 아라한들도, 성인위를 얻은 제자들도 모두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마음이 청정해지기를 바란다면 사띠 확립을 계발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지 못하게 만드는 번뇌인 불순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는 탐욕이 바로 번뇌입니다. 악의, 분노와 자만도 번뇌입니다. 여러분이 번뇌들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란다면 사띠 확립을 계발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하시 큰스님께서도 “번뇌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사띠 확립을 계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사띠 확립을 계발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최상의 길입니다.
마음은 야생 코끼리와도 같습니다. 야생 코끼리는 숲 속에 있을 때는 행복하지만, 도시에서는 빌딩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생 코끼리들을 그대로 놓아두면 유용하지 않고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다. 그러므로 보통은 야생 코끼리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길들이고 훈련된 코끼리를 이용하여 울타리 안으로 유인한 다음 먹이와 물을 주지 않고 방치합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 꺼내서 말뚝에 묶어 놓고 먹이와 물을 조금만 주면서 코끼리 조련사에 의해 길들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잘 길들은 코끼리들이 되어 아주 유용해집니다.
그와 같이 야생 코끼리인 마음을 관능의 한가운데에 빠지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마음이 사람을 지옥으로 보냅니다. 그러므로 야생 코끼리인 마음을 다른 훈련된 코끼리로 유인해야 합니다.
훈련된 코끼리란 삿다(saddhā)라고 하는 믿음과 확신 그리고 의지를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법을 실천하는 것은 좋은 것이며, 그것은 사악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며, 열반을 성취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열의’를 의미하는 빨리어 ‘찬다(chanda)’는 욕망을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수행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야생 코끼리인 마음은 삿다와 찬다, 즉 믿음과 확신 그리고 의지에 의해 유인되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영화나 연극을 관람한다든지, 노래, 음악을 듣는 등의 세속적 대상을 잘라내야 합니다. 이 잘라내는 것이 야생 코끼리인 마음에게 먹이와 물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수행 대상이라는 기둥에 묶이고 길들여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게송으로(법구경 게송 37) 말씀하셨습니다.
멀리 가고 홀로 다니며
형체도 없이 동굴에 사는
마음을 제어하는 사람은
마라의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법구경_하루를 살더라도』, 불교시대사, 61쪽 참조)
마음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마음이 원하는 장소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위의 게송은 삼가락키따(Samgharakkhita) 장로의 조카와 관련하여 부처님께서 읊으신 것입니다.
조카의 이름은 삼가락키따 바기네야(Samgharakkhita Bhagineyya)였습니다. 그도 비구였습니다. 조카는 숙부 비구에 의해 어떤 마을의 선원의 주지로 임명되어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조카 비구에게 가사용 옷감을 드렸습니다. 그는 그 옷감을 숙부에게 가사용으로 드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단식기간이 끝난 직후에 숙부에게 가기로 작정하고 옷감을 접어서 잘 간수했습니다.
단식기간이 끝난 다음에 옷감을 가지고 숙부에게 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조카 비구는 앉아 계신 숙부 장로에게 부채질을 해 드리면서 말했습니다.
“숙부 존자님, 가사로 만들 옷감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존경하는 스님이시여, 옷감을 친절하게 받아 주시고, 저를 측은히 여기시어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그러자 숙부는 자신은 많이 있으니까 그것들은 네가 써야 한다고 하면서 옷감을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조카는 다시 말했습니다.
“스님, 아닙니다! 저는 스님께 드리려고 그것들을 받았습니다.”
그의 요구는 되풀이되었지만 장로는 끝내 받지 않았습니다. 젊은 비구는 낙담했습니다. 그리고 숙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물건을 자신과 나누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환속하여 재가자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마음은 방황하기 시작해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교단을 떠난 다음에 이제 막 환속한 재가자가 가난하게 산다면 비난받을 것이므로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계속 생각했습니다.
옷감을 팔아서 생계를 위해 암염소를 사고, 암염소는 염소들과 새끼들을 많이 낳고, 그러면 곧 염소들 중 일부를 팔아서 결혼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 것이다. 염소를 돌본 다음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먹을 요리를 스스로 해야 하니 따분할 것이다.
도와줄 사람을 찾을 것이고 결국 배우자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결혼을 하고, 아내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의 아들은 훌륭하신 숙부를 닮을 것이다. 그는 원추 모양의 덮개를 한 상자에 음식을 가지고 숙부에게 그의 아들을 보여 드릴 것이다. 푸른 황소 두 마리가 끄는 작은 수레를 사서 아내에게 말할 것이다.
“여보, 내 숙부 스님께 밥과 카레 요리를 해 드리러 갑시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작은 수레에 태우고 선원의 숙부에게로 향할 것이다.
그는 푸른 소들에게 멍에를 씌우고 음식 상자를 수레에 실을 것이다. 수레에 타고 소의 고삐를 세게 당기면서 아내에게 말할 것이다. “여보, 아이를 나에게 줘요.” 아내는 “아이 걱정은 말고 수레나 잘 몰으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우격다짐으로 아이를 빼앗으려 하다가 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렸고 바퀴가 아이 위로 지나갈 것이다.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몰이 막대기로 아내를 때릴 것이다.
그 순간 팔미라(palmyra) 야자나무 부채로 장로에게 부채질하고 있었던 그는 정신없이 부채로 장로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러나 장로는 이미 젊은 비구의 망상을 알고 말했습니다.
“너는 네 마누라를 때려서도 안 되는데, 어찌 늙은 비구를 때리느냐?”
젊은 삼가락키따는 늙은 숙부 비구의 말에 대단히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잔뜩 겁을 먹고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선원의 젊은 비구들과 행자들이 쫓아가서 마침내 그를 붙들어 부처님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대상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생각할 능력이 있으며, 갈애나 악의나 무지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마음은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매우 빠르고,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마음을 억제하면 갈애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러자 젊은 비구는 이 마음을 주시하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했습니다. 그는 욕망이 나타나면 욕망을 주시했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려는 순간 주시했습니다. 만약 분노가 이미 생겼다면 그는 ‘분노, 분노’ 하면서 주시했습니다. 행복하다면 ‘행복, 행복’ 하면서 주시했습니다.
이렇게 주시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주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주시해서 비구는 도과에 들어 성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계를 청정하게 지킨 다음에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의 더러운 때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비가 내리면 물 때문에 흙이 진창이 됩니다. 그러나 진창으로 더러워졌다면 더러움을 다시 물로 씻어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 때문에 탐욕과 분노가 생겨 마음이 더러워졌다면 다시 마음으로 그것을 주시해야 합니다.
미얀마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배가 떠내려가면 다른 배를 타고 쫓아가야 한다.
돈의 일부를 잃었다면 남은 돈으로 잃은 돈을 되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방황한다면 마음으로 주시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시할 수 있다면 마음이 청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방황하지 않고 평온하고 차분해질 것입니다.
마하시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대상으로 방황하지 않고 주시해야 할 대상에만 집중하고 있는 아는 마음만을 청정한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여러분들 모두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마음이 생길 때마다 주시하고, 계청정과 심청정 등의 일곱 가지 청정을 순서대로 주시해서 모든 고통의 소멸인 열반을 성취하기 바랍니다.
출처 : “큰 스승의 가르침”, 행복한 숲, 271-283쪽.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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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경행하면서 “걷는 것은 몸이다.”라고 알고, “걷는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마음이다.”라고 아는 것은 택법각지입니까 아니면 삼빠잔냐(분명한 앎)입니까?
대답: 삼빠잔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걷는다.” 혹은 “나의 몸이 걷는다.”라고 아는 것은 삼빠잔냐가 아니다.
질문: 좌선할 때 30분이 지나면 등이 너무나 아파서 참을 수가 없어서 자세를 바꾸게 됩니다.
대답: 잠들기 전에 베개를 베지 말고 똑바로 누워서 배호흡을 100회 하라.
질문: 묵언을 해야 하는데 남이 말을 걸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 꼭 필요한 말만 간단하게 하라. 그러면 남이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질문: 좌선을 하면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니다.
대답: 사마디가 생기면 영상이 나온다. 영상만이 아니라 소리, 냄새 등의 이상한 현상이 나온다. 이때 단지 알기만 하면 된다.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지켜보라.
질문: 망상이 왜 자꾸 나옵니까?
대답: 대상이 생기고, (이때 밖에서 갑자기 ‘쿵’하고 큰 소리가 들렸다.) 지금처럼 ‘쿵’하는 큰 소리가 나면 순간적으로 마음이 저절로 그리로 간다. 대상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그것이 끝나면 주 대상(배의 호흡)으로 돌아오라. 육문에 나타나는 대상을 사띠하는 마음으로 놓치지 않고 나타나는 대로 지켜보라.
질문: 1시간 동안 26번 망상을 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줄어들겠습니까?
대답: 망상을 몇 번 해도 상관없다. 탐욕이나 성냄이 생겨 고함지르지 않고 있으니 지금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띠로 잘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16:30 법문
법(담마)으로 병을 치유
인간의 어떤 고통들은 ‘법으로 치유(dhamma therapy)’됐거나 증세가 호전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어떤 질병이 법으로 치유되는지 알아보기로 합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병은 수없이 많습니다. 옛 말에 의하면 병을 96가지로 크게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중 32가지는 점액질, 32가지는 담즙, 32가지는 바람(風)과 관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현대과학이 에이즈나 악성 질환 등의 수많은 혐오스런 병들을 발견하여 이 목록에 추가하였습니다.
이런 병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과학적인 약과 민간요법에 의한 약들이 시장에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질환을 이상적으로 치료하는 약은 단 하나도 증명된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훈계하셨습니다.
“비구들과 선남선녀들이여, 법이라는 약보다 효험 있는 약은 없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수행하여 법이라는 약을 복용하여라.”
확실히 법이라고 하는 약은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정신적 번뇌에 의한 정신적인 장애에도 효험이 있습니다.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身受心法) 네 가지에 사띠를 확립하는 수행을 함으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모두 뿌리 뽑혀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법에 의한 치유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경행을 할 때 ‘왼발, 오른발’ 혹은 ‘발을 들어서, 놓음’ 혹은 ‘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음’을 주의 깊게 관찰합니다. 걸음을 멈추었을 때는 ‘서 있음, 서 있음’을 관찰하고, 돌 때는 ‘돌고 있음, 돌고 있음’을 관찰합니다. 좌선할 때에는 배의 ‘부풀음, 꺼짐’을 관찰하거나, 육문(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생기는 봄, 들음, 냄새맡음, 맛봄, 고통이나 통증 등의 느낌, 그리고 생각, 즉 망상하는 마음 등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단히 설명한 법에 의한 치유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때는 법에 의한 치유법으로 제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한때 마하깟사빠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 두 대장로가 아팠을 때, 부처님께서 그들의 침대 곁으로 가셔서 ‘깨달음의 일곱 요인 경(七覺支經)’을 암송하셨습니다.
그 일곱 가지는 1) 사띠 2) 법 탐구 3) 정진 4) 기쁨 5) 편안함 6)집중 7) 평온입니다. 그것들은 깨달음으로 인도하므로 깨달음의 일곱 요인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일곱 요인 경을 암송하시는 것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동안, 두 대장로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들이 깨달음의 일곱 요인들 모두를 고무하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병은 점점 회복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됐을 때, 쭌다 장로에게 깨달음의 요인 경을 암송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또한 주의 깊게 경청하시고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인을 모두 고무시킴으로써 그 병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셨습니다.
깨달음의 일곱 요인 경을 경청하면 병이 치유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1) 병에 의한 괴로움은 과거에 행한 불선업의 결과인데, 그것이 법을 경청하는 선업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펌프의 흡입 배관에 공기가 차 있어서 물이 안 나오던 것이 외부에서 물을 주입하여 공기를 빼내면 물이 잘 나오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 부처님의 법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잘 설해진 것이므로 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즉각적으로 고귀한 효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얀마의 우 테인 몽이라는 병든 수행자가 있었는데, 지방의 의사가 한 달밖에 더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사띠를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하는 통찰명상 수행으로 몇 년을 더 살았습니다.
(3) 끊임없이 사띠를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는,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인 전부 혹은 일부를 계발합니다.
예를 들면 수행자가 좌선 시 배의 ‘부풀음, 꺼짐’을 관찰할 때 언제나 알면서도 평온하다면, 사띠라는 깨달음의 요인(念覺支)을 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찰하면서 법을 현명하게 조사하고 연구하고 생각하며 배의 부풀고 꺼지는 물질적 대상과 관찰하는 마음의 정신적 요소를 명백하게 안다면, 법 탐구라는 깨달음의 요인(擇法覺支)을 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노력이 확고하고 흔들림 없을 때 정진이라는 깨달음의 요인(精進覺支)을 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이 가볍다든지 몸 전체가 진동한다든지 차가워지는 초감각적인 기쁨이 생기는데, 그때 기쁨이라는 깨달음의 요인(喜覺支)을 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쁨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그의 몸과 마음은 차분하고 침착해집니다. 그럴 때 편안함의 깨달음의 요인(輕安覺支)을 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침착하고 몸이 차분할 때는 언제나 아는 마음은 알아야 할 대상에 고정되어 대상이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럴 때 집중의 깨달음의 요인(定覺支)을 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거나 싫거나 기쁘거나 불쾌하거나 간에 모든 대상에 대해서, 완전히 중도에서 관찰할 때는 평온이라는 깨달음의 요인(捨覺支)을 계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마음의 평화와 평온이 이번에는 육체의 병이 치유되도록 작용합니다.
병이 나은 예들이 많은데, 한 가지는 자동차 사고로 오랫동안 허리의 통증에 시달리던 일본 여성이 사띠를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완전히 나았습니다. 또 다른 사례는 한국인인 아마라야노 비구가 사띠를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만성심장병을 완전히 고쳤습니다.
사띠를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법에 따라 부지런히 사띠함으로써 여러분들 모두 모든 종류의 병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출처 : “큰 스승의 가르침”, 행복한 숲, 213-219쪽. 일부용어 수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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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나 에이즈나 조류독감보다 더 두려움 것은 굶주림이라는 병이다. 이 병은 음식을 먹으면 약간 진정되지만, 몇 시간 지나면 또 배고프니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다.
눈은 TV 등 좋은 것에 굶주려 있다.
귀는 좋은 음악에 굶주려 있다.
코는 향기에, 몸은 부드러운 촉감에 굶주려 있다.
이런 것들은 어떤 의사도 치료하지 못한다.
이 굶주림이라는 병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그 누구도 치료해 줄 수 없는 병이다.
그러나 이 굶주림은 법으로 치유될 수 있다.
심장병이나 당뇨병 환자는 항상 약을 가지고 다닌다. 이 부처님의 법이야말로 항상 지니고 다닐만한 약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병이 치료된다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원인과 결과가 있을 경우에만 치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