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일 - 견해 청정
1/17(목)
04:30 법문
견해 청정
일곱 가지 청정 중에 세 번째인 ‘견해 청정[見淸淨]’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열성적인 수행자는 수행 단계를 하나 올라가고자 할 때 도덕성[戒]을 청정하게 해야 합니다. 도덕성이라는 바탕에 발을 확고히 디딘 다음에 마음을 청정하게 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사띠(관찰)함에 의해 마음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되며, 주의력은 사띠의 대상들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즉각 아는 찰나삼매를 통해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사띠가 이어질 때, 하나하나의 사띠마다 생기는 마음과 물질을 구분하는 통찰 지혜가 생깁니다. 마음과 물질을 구별할 수 있을 때 유신견(有身見)이 어느 정도 제거됐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단계가 견해 청정(diṭṭhi visuddhi)입니다.
삿된 견해에는 62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상견(常見), 단견(斷見), 유신견(有身見)이 대표적인 삿된 견해입니다.
(1) 상견은 존재 안에 생을 구성하는 육체적 정신적 과정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죽은 다음에까지 계속되어 영속하는 자아라는 실체, 영혼이라는 개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영혼은 결코 죽지 않고 몸만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번 생에서 현재의 몸이 소멸되면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현 생명체로부터 영혼이 다음 생으로 이어 간다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서 영혼에게 그들의 공덕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과 별도로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죽을 때 현생에서의 정신과 물질은 현생에서 정지되고 끝납니다. 다만 선업과 불선업, 의도와 어리석음과 갈애로 구성된 원인만이 남는 것입니다. 생존의 원인들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의 새로운 마음과 물질이 새로운 생에서 다시 생성됩니다.
죽은 다음에 일부는 아귀의 세계에서 아귀[施餓鬼]로 재탄생합니다. 그런 아귀의 세계에서는 다른 존재가 공덕을 베푼 것에 대해서 아귀들이 ‘잘했습니다(sādhu)’라는 말로써 공덕을 베푼 존재들을 기쁘게 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바 영혼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그러한 영혼은 오지 않으며, 아귀의 세계로부터 ‘잘 했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2) 단견은 상견에 반대되는 것인데, 죽은 다음에 마음과 물질의 절멸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단견에 의하면 물질적 몸과 영혼은 죽은 다음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다음 생으로 윤회하지 않기 때문에, 선행과 악행에 대한 아무런 과보가 없으므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단견은 다른 존재의 세계를 부정합니다. 이것도 삿된 견해입니다.
(3) 유신견은 수행하는 여러분이 명확하게 알아야 할 것으로,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유신견은 수행의 장애물이므로 제거해야만 수행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유신견은 마음과 물질, 즉 정신과 육체를 ‘자아’ 혹은 ‘나’라고 생각하는 삿된 견해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물질, 즉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지혜를 얻을 때까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유신견을 없앨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하시 큰스님께서는 “사띠하는 동안 마음과 물질만 있다는 견해가 ‘견해 청정’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행선을 할 때 걷는 것은 물질이고 걷는 것을 아는 것은 마음이라고 구별합니다. 여러분은 걸을 때 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는 것을 알면서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아는 동안 발을 드는 것, 앞으로 내미는 것, 내려놓는 것은 물질이고, 아는 것은 마음이라고 확실히 알게 됩니다. 마음과 물질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 이런 식으로 인지하여 아는 것이 견해 청정입니다.
또한 배의 부풂, 꺼짐을 관찰할 때 생기고 꺼지는 움직임을 의식과 별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생기고 꺼지는 것은 물질이고 움직임을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볼 때, 눈과 형상의 대상은 물질이고, 보는 것을 아는 것은 마음이라고 구분합니다. 냄새 맡고, 맛보고, 닿는 것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할 때 마음의 대상과 마음의 대상을 아는 것은 모두 마음입니다.
또한 쑤심이나 통증이 있을 때 쑤심이나 통증을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여기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는 동안 대상을 아느냐, 즉 인지하느냐와 그것을 구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정신적 계발을 통해서 수행자에게 얻어진 통찰 지혜가 ‘정신적 계발에 기반을 둔 통찰 지혜[修慧]’입니다.
책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서 생긴 지혜는 ‘배움으로 구성된 지혜[聞慧]’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배우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여 생긴 지혜가 ‘사고에 의한 지혜[思慧]’입니다. 그러나 수행하는 여러분들은 수행을 통한 정신적 계발에 기반을 둔 통찰 지혜를 획득해야 합니다.
이런 지혜를 얻으면 알고 있을 때 거기에는 주시해야 할 대상과 아는 마음뿐이라는, 마음과 물질의 본성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주시할 때마다 개별적인 자아 혹은 ‘나’라는 것이나 남자나 여자는 없고 오직 마음과 물질뿐입니다.
처음부터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하여 여러분은 견해 청정을 계발합니다. 하나에 집중된 마음으로 소위 말하는 존재를 분석하고 조사합니다. 이 분석과 조사에 의해서 그것이 ‘나’라거나 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속적인 흐름이며, 생기고 사라지는 상태에 있는 마음과 물질의 복잡한 혼합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그것은 마음과 물질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여러분은 분명하고 올바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소위 존재의 참된 본성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됨으로써 여러분은 영원한 영혼이라는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견해는 완전히 정화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유신견에 대해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빨리어 삭까야(sakkāya)는 보이는, 즉 인지할 수 있는 물질과 마음 무더기를 의미하고, 딧티(diṭṭhi)는 삿된 견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물질과 마음, 즉 물질과 마음 무더기를 ‘개별적 자아’, ‘나’ 혹은 ‘중생’이라고 보는 견해를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음과 물질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것은 남자다, 이것은 여자다, 이것은 스님이다, 이것은 동물이다” 등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존재들을 개별적 자아라고 부르지만, 이것들은 실재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사람입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머리카락입니다.”
“사람의 근육을 사람이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심장이나 간 등의 내장을 사람이라고 합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뼈를 사람이라고 합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사람이란 것을 찾고자 할 때는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교 응용심리학인 논장(論藏)에 의하면,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명칭(이름), 즉 빤냣띠(paññatti)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자, 여자, 사람과 중생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이름일 뿐입니다. 실재이고 존재하는 것은 마음과 물질의 본성입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머리카락은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그것은 물질입니다.”
“몸의 근육은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물질입니다.”
“뼈는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물질입니다.”
“내장은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그것도 물질입니다.”
“그러면 의식은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그것은 마음입니다.”
그런 식으로 누가 어느 것이 실재이고 존재하는 것인지 물으면, 여러분은 실제로 존재하는 마음과 물질을 말할 수 있습니다.
법을 분명하게 알고 이해하려면, 법의 두 가지 분야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실재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빠라맛타(실재․ 최승의법)라는 분야와, 다른 하나는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빤냣띠(개념․ 모양․ 명칭․ 관념)라는 분야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는 단지 네 가지가 실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빠라맛타(paramattha)라고 하는 절대적인 실재입니다. 이 절대적인 실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마음(citta)
(2) 마음부수(cetasikā)
(3) 물질(rūpa)
(4) 열반(nibbāna)
네 번째 실재하는 열반은 지극히 행복한 최고의 상태이며, 고통이나 쇠퇴함이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것이며, 이름일 뿐이며, 환영이나 환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상대적인 것도 다루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어떤 것이 실재하고 절대적인가라는 생각을 통하여 통찰(위빠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지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실재하는 것을 구별할 때 혼동이 돼서 수행자가 신기루와 같은 환영을 좇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생물과 무생물의 본성을 철저하고도 엄밀하게 조사해 보고, 우리들 스스로 그들이 생물적으로 실재하는지, 즉 실체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판정해 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소위 남자나 여자나 짐승은 그 내부에 아무런 실체가 없는 단지 명칭일 뿐이어서 그것을 엄밀하게 조사해 보면, 오직 실재하고 실체적인 것인 마음과 물질의 범주 안에 들어오는 관념들만 그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짐승은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이며 단지 명칭일 뿐인 빤냣띠라는 것입니다.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빤냣띠, 즉 명칭의 분야에서는 인간, 비구, 남자, 여자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마음과 물질이라는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점심을 먹고 있을 때를 가정해 봅시다. 그때 밥은 물질이고, 카레는 물질이고, 수저도 물질이며 돼지고기도 또한 물질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내가 “이 물질을 이 물질로 떠서 저 물질 안에 넣는다.”고 말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빤냣띠라고 하는 명칭 분야에서는 우리는 실재하고 절대적인 빠라맛타 분야의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실재하고 절대적인 빠라맛타 분야에서는 ‘나’라고 하는 것이나 그 사람은 없고, 남자나 여자도 없고, 사람이나 존재도 없으며, 실제적으로 마음과 물질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는 순간에는 눈과 형상과 형상을 인지하는 정신의 기능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앞의 두 가지는 물질이고, 정신의 기능은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보는 순간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물질과 마음이며, 오직 물질과 마음만 있다고 아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며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재이며 존재하는 것인 물질과 마음이 내 몸이고 내 무더기이며 내 것이라고 보는 것은 삿된 견해입니다. 세속인이라고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삿된 견해인 유신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자신이 물질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 즉 몸 무더기, 느낌 무더기, 지각 무더기, 정신적 형성 무더기, 의식 무더기를 ‘나’, ‘내 물질’, ‘내 중생의 물질’ 그리고 ‘나’를 포함한 물질이라고 잘못 인지합니다.
수행하는 여러분들이 이 삿된 견해를 버리거나 끝내기 위해서는 물질과 마음을 구별할 수 있을 때까지 부처님께서 『염처경』에서 가르치신 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행선을 할 때에는 ‘왼발, 오른발’ 혹은 ‘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음’을 주시해서 알아야 합니다.
앉을 때에는 다리와 팔을 뻗고 구부리는 것을 포함한 모든 움직임을 주시해야 하며, 앉은 다음에는 배가 부풀고 꺼지는 것을 주시해야 합니다. 보거나 듣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거나 피부에 무엇이 닿거나 생각하거나 망상할 때나, 이런 현상이 생기는 순간 무엇이든지 놓치지 말고 주시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시하는 동안 이러한 정신적 물질적 현상이 동시에 함께 생긴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배가 부풀고 꺼지는 것을 주시할 때 부풀고 꺼지는 형상은 물질이며, 주시하는 것, 즉 아는 것의 본성은 마음입니다. 앉아 있음을 주시할 때 앉아 있는 형상은 물질이고 주시하는 것, 즉 아는 것의 본성은 마음입니다.
볼 때 눈과 형상은 물질이고, 형상을 주시하는 것, 즉 아는 것의 본성은 마음입니다. 코와 냄새, 맛과 혀, 감촉과 피부도 그렇습니다. 또한 마음의 대상을 생각하거나 망상할 때는 마음의 대상이나 그것을 주시하는 것, 즉 아는 것이 모두 마음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주시하고 있을 때만 이것은 물질이고 이것은 마음이라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 단계에 도달하면 마음과 물질 무더기들을 살아 있는 개인인 ‘나’라든지 ‘내 몸’이라든지 ‘내 소유물’이라고 잘못 인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것들이 실제 존재하는 그대로 깨닫게 되면, 여러분들은 즉시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되어 견해 청정을 얻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 청정으로 유신견은 거의 뿌리 뽑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꾸준히 주시를 계속해 간다면, 유신견이 완전히 제거되어 뿌리 뽑히고 고귀한 흐름에 든 자가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흐름에 든 자가 되어 수다원위를 성취하면 유신견이라는 짐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그 이후로는 사악도에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염처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신으로부터 유신견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되풀이되는 윤회의 위험을 인지한 수행자가 고통으로부터 즉각적으로 구원되기를 추구한다면, 가슴에 창이 꽂혔거나 찔린 사람 혹은 머리에 불이 붙은 사람과 같은 정도로 화급하고도 신속하게 유신견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급히 서둘러야 합니다.
재가수행자들은 해야 할 많은 의무가 있을 것이며, 다른 것보다 그들이 의무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그 의무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들이 유신견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는 수다원과의 지혜를 성취한다면, 그러한 사악도로부터 해방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번 생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혜택을 받는 황금과 같은 기회를 가진 훌륭한 인간으로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자신으로부터 유신견을 완전히 제거하고 견해 청정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모두 견해의 정화를 위해 정신적 물질적 현상이 생길 때마다 주시하는 노력을 계속하여, 유신견을 완전히 뿌리 뽑는 도과의 지혜를 얻음으로써, 모든 고통이 소멸한 열반을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큰 스승의 가르침”, 행복한 숲, 286-299쪽 참조.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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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좌선을 시작하여 20분이 지나면 오른쪽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가 40분이 지나면 다리가 상쾌해지면서 사르르 풀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답: 사마디가 생기면 통증이 사라진다.
질문: 좌선 중에 등이 아파서 호흡에 대한 사띠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움직이니 호흡에 대한 사띠가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대답: 호흡을 무시하고 통증을 느끼는 마음을 보면서 천천히 움직여라. 앎을 유지하라.
질문: 냐나와 빤냐는 어떻게 다릅니까?
대답: 같은 것이다.
질문: 저는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영혼이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대답: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가르친다는 것이지 그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니니 좋을 대로 하라.
질문: 대중에 법문하실 때 언제 어떻게 해서 대승불교가 생겼는지에 대해서 법문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답: 사야도는 이익이 없는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2,000년 전에 의견이 틀려서 달라진 것을 지금 이야기해 봐야 이익이 없다.
질문: 집중수행처에 들어온 지 4일이 지나지 과거의 기억, 애인과 헤어졌던 일, 남의 돈 갚지 않은 것 등이 생각이 납니다.
대답: 위빠사나를 하다 보면 과거의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질문: 사띠하려면 머리가 멍청해지고, 슬픈 느낌도 생깁니다.
대답: 계속 알아차려라. 일어나는 성품을 일어나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망상을 끊으려 해도 잘 안 끊어진다. 망상을 따라가지 말고 단지 보이는 것만 보아라. 아는 마음만 잡고 있으면 된다. 알면 된다. 과거의 잘못, 내가 나쁜 놈이라는 생각 등도 그냥 알기만 하라.
16:30 법문
수행의 이익: 언젠가는 아라한이 된다.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느 때 어떤 천신(天神)이 부처님께 와서 예를 표한 다음 자신의 견해를 확인하려고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 제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저는 모든 중생들이 자신의 어린이들을 가장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장 부자입니다. 햇빛이 우주에서 가장 밝습니다. 물을 담고 있는 호수 중에서는 대양(大洋)이 가장 크고 넓습니다.”
그의 말은 전통적인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을 너무도 사랑하여 자식들을 안기도 하고 목말을 태우기도 합니다. 아이가 부모 옷에 똥오줌을 싸도 화를 내거나 싫어하지 않고 더욱더 사랑과 자애를 퍼붓습니다. 이런 것들을 알아차린 천신은 중생들이 자기 후손을 가장 사랑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소를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을 가장 부유하다고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난 곳은 소를 신성하게 여기는 인도입니다. 힌두문화는 고기를 먹지 않으나 우유를, 사람들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해 주는 자연의 원천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버터, 요구르트와 치즈도 우유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소를 많이 키우고 소를 많이 가진 사람을 부유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햇빛이 가장 밝다는 그의 말은 진실인 것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전깃불, 배터리 불 혹은 다른 빛의 원천들은 밝기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호수 중에서 대양이 가장 넓고 크다는 말도 또한 아주 그럴 듯하고, 이 말들의 적절함은 전통적인 진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평범한 사람들의 보통 지식과, 일체지자이신 부처님의 훌륭한 지혜의 현명함과의 차이를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신의 여러 가지 말을 검토해 보신 부처님께서는 천신에게 다음과 같이 반박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비교해 보면 천신의 주장은 모두 틀린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모든 중생은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후손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언젠가는 의견 차이가 생겨 서로 헤어집니다. 우리들은 부모가 그들의 자녀와 여러 가지 이유로 인연을 끊은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끔찍하게 서로 사랑하던 부부도 불화가 생기면 이혼합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상대방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지극히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그들의 후손을 가장 사랑한다는 천신의 말은 옳지 않으며 모든 중생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2) 가장 부유한 사람은 곡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말도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궁핍할 때, 즉 기근이 들었을 때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쌀(곡식)이기 때문입니다. 쌀이 없으면 비참한 재앙이며 죽음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차빳띠(chapatti, 인도 빵)나 빵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밀도 곡식이기 때문입니다. 곡식에는 쌀, 보리, 귀리, 옥수수, 기장, 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곡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사람이 가장 부자인 것입니다.
(3) 지혜의 빛이 가장 밝습니다.
햇빛이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밝은 것 같지만, 깊은 곳, 예를 들면 동굴 속을 비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탐욕, 성냄, 어리석음(貪瞋癡)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줄 수는 없습니다. 또한 햇빛은 선량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착하고 현명하게 바꿀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지혜에 의해서만 착하고, 현명하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교육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빛이 가장 밝습니다. 부처님께서 “지혜의 빛보다 밝은 빛은 없다”고 하신 말씀은 매우 지당합니다.
(4) 비와 샘물이 대양으로 가는 물의 근원입니다.
바다와 대양은 빗물과 샘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면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샘물과 빗물이 작고 큰 수많은 강을 거쳐서 대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점은 중생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나면,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집에서 재빨리 뛰쳐나옵니다. 모든 중생은 자신의 안전과 안락을 추구하며 부유해지고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최대한 이롭게 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감각적 쾌락만 즐기는 것은 자신을 적절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대학자들은, 게으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업(善業)을 실천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적극적으로 선업을 쌓아야 합니다. 선업을 행하려면 바른 견해와 더불어 바른 신념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선업은 반드시 청정하며 항상 좋은 과보를 가져옵니다. 선한 행위를 하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보시는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보시를 받는 사람도 이롭지만, 보시의 목적은 보시하는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너그럽게 남에게 줌으로써 자신의 탐욕을 제거하는 것과, 수혜자가 보시자의 자애에 보답하는 것이므로 이는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도 선업입니다. 살생이나 도둑질을 하지 않고, 다른 나쁜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선업입니다. 이런 선업을 행함으로써 탐욕과 성냄을 막고, 그 결과 건강하고 오래 살게 됩니다. 지혜에 관련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도 선업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육문에서 발생하는 탐욕과 성냄을 예방합니다. 그리하여 탐욕과 성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슬픔과 불안에서 벗어난 마음의 청정함을 즐기게 됩니다.
수행의 마지막 목표는 도과(道果)의 지혜를 얻어서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업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보시, 지계(持戒), 수행을 실천하는 것만이 자신을 바른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수행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보시, 지계, 사마타 수행(평온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지혜 수행)은 선업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기는 이로운 점은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보시와 지계는 인간계와 천상계에서의 부유함과 행복을 가져오는 선업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범천계에 태어납니다. 선정(禪定)의 지복(至福)에 사는 범천들은 음식, 물, 다른 영양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범천들의 수명은 대단히 깁니다. 그러나 천상계나 범천계의 단점은 길고도 행복한 삶이 끝나면 인간계나 사악도(四惡道, 지옥․축생․아귀․아수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잘하면 유신견이 제거되어 도과를 거쳐 열반이라는 소중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네 가지 선업 중에서 위빠사나 수행이 가장 좋습니다.
다시 정리를 해 보면, 보시와 지계의 선업은 천상계나 인간으로 태어나는 좋은 과보를 받습니다. 사마타 수행이란 선업은 범천계에 태어나는 좋은 과보를 받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열반의 지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 여러분들은 열반이란 소중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해서 열반에 들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열반에 들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기 직전에 수밧다라는 고행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열반에 든 다음이라도, 승려나 재가불자나 내가 설한 법문대로 실천하고, 올바른 통찰로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면 아라한이 끊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올바른 통찰로 수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생멸의 지혜(새로운 현상이 언제나 재빨리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를 얻은 사람이 다른 수행자나 친구를 자기처럼 수행하도록 격려해서 같은 결과를 얻었다면, 그것을 올바른 통찰로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수행으로 정신적․물질적 현상이 소멸하는 지혜를 획득한 수행자가 다른 수행자를 격려하여 정신적․물질적 현상이 소멸하는 지혜를 알도록 한다면, 올바른 통찰로 수행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마하시 선원에서는 고참 수행자가 자신이 수행하여 얻은 것을 신참 수행자들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도 또한 올바른 수행자의 삶을 사는 것이며, 올바른 통찰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하는 여러분들이 부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부처님 말씀을 잘 실천하고 서로 도우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면, 아라한이 사라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아라한이 성취된다면, 자연적으로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도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이 올바른 통찰로 수행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서도 성인의 지위에 도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지금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계라훌라 대경(M62)의 주석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수행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의 생애에서 한 번 또는 몇 번의 좌선으로 성인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수행 방법에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조건이 성숙된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그 호기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완전한 수행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순간에 도과의 지혜를 얻을 기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을 하는 여러분이 소중한 목표를 달성할 첫 번째 좋은 기회입니다.
(2) 만약 수행하는 여러분이 위와 같은 기회를 실현하지 못하더라도 죽기 직전에 두 번째 기회가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모든 중생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위안과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첫 번째 부류는 초인(超人)으로, 코끼리형 영웅(elephant-hero), 황소형 영웅(bull-hero)입니다. 그들은 유신견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 두 번째 부류는 벽지불(辟支佛, 홀로 깨달은 붓다), 아나함, 아라한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유신견이 없으며 두려움의 원인이 되는 성냄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아무도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어디에 다시 태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두려운 사건입니다. 죽을 때 도와주기를 바라면서 자식이나 의사나 누구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죽는 순간에는 어떤 약도 효험 없고, 자식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죽는 순간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은 수행입니다. 수행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법(마음의 대상)을 관찰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식들에게 나 좀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것뿐입니다. 마치 날개 잃은 새가 날지 못하고 개나 고양이의 먹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사람이 죽을 때 법을 관찰하지 못하면 사악도에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은 위빠사나 지혜를 관찰하게 되고, 그로 인해 도과(道果)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며, 죽기 직전에 성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죽는 순간에 법을 관찰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상상해 보면, 살아생전에 위빠사나 수행을 했던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3) 비록 성인이 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법을 관찰하면서 죽었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가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계에 천신으로 태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고따마(Gotama) 붓다 시절에 수행을 한 천신들을 만날 것이며, 이 경건한 천신들과 함께 성인이 될 또 한 번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천상계는 인간계와 조건이 비슷합니다. 즐거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천신이 있는가 하면, 법을 추구하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천신도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법을 관찰했기 때문에 천상계에 태어난 사람은 다른 경건한 천신을 만날 것이고, 천신들은 보다 지성적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을 경험한 사람들이 깨달을 세 번째 기회입니다.
(4) 천상계에서 깨달을 세 번째 기회를 놓쳤지만 윤회하여 부처님과 불법이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가정하더라도, 여러 생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벽지불이 될 수 있습니다. 벽지불은 부처님 가르침 없이 ‘독자적으로 깨달은 분(獨覺)’입니다. 벽지불은 그렇게 별도로 혹은 개인적으로 깨달은 분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성제를 이해했지만 완전하게 깨달은 부처님처럼 다른 사람이 알아듣게 법문을 할 능력은 없습니다. 여성들도 이때 의식을 고양시켜 벽지불이 될 수 있습니다.
(5) 네 번째 기회인 벽지불이 되는 데 실패했다 하더라도, 이전에 수행했던 힘으로 다음에 오는 불법시대에 쉽게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선례가 있습니다. 깟사빠 붓다(Kassapa Buddha) 시절에 7일 동안 용맹정진을 했지만 성인위를 성취하지 못한 ‘바히야 다루짜리야’라는 사람이 고따마 붓다 시절에 살았습니다. 그는 고따마 붓다의 법문을 듣고 한 번의 충실한 좌선으로 아주 쉽고도 편안하게 사성제를 즉시 깨닫고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며, 여러분은 바로 이 순간 위빠사나 수행을 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1) 첫 번째 기회에 도(道)의 지혜와 과(果)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2) 첫 번째 기회에 성인이 되지 못한다면, 두 번째 기회인 죽는 순간에 그것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3) 두 번째 기회에 실패한다면, 세 번째 기회인 천상계에서 천신이 되어 도과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4) 세 번째 기회를 놓친다면, 불법이 없는 시대에 태어나도 벽지불이 될 수 있습니다.
5) 벽지불이 되는 네 번째 기회를 놓치더라도, 다음 불법시대에 사성제를 증득하고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수행의 이득이 이렇게 위대하며 틀림없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출처 : 아신 자띨라 사야도 법문, 오원탁 번역, 『큰 스승의 가르침』, 행복한 숲, 102-114쪽.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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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나 벽지불이나 아라한은 삶을 똥으로 본다. 조금 있어도 혐오해 하고, 많이 있으면 많이 혐오해 한다. 사람이나 천신이나 범천으로 태어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죽는다. 불선업을 제거하면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수다원이 된다. 나머지 모든 업을 제거하면 아라한이 된다. 모든 고통이 소멸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에 몰두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