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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

[자띨라 사야도]제9일 - 소멸의 지혜 - 2005년 집중수행 마지막 날

작성자그림자|작성시간22.01.27|조회수46 목록 댓글 1

제9일 - 소멸의 지혜 - 마지막 날

11/20(일)

 

04:30 법문

 

소멸의 지혜(방가 냐나)

 

자신이 어느 단계의 지혜에 이르렀는가를 가늠할 수 있도록 소멸의 지혜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사띠를 지속적으로 잘 하다 보면 머리에 담요를 뒤집어씌운 것처럼 갑자기 눈앞이 까맣게 되기도 한다. 어두운 바다 가운데 혼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도 한다. 과거에는 사띠가 분명했는데, 이제는 사띠가 듬성듬성하다고 느껴진다.

 

손이나 발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사띠하고 있지만 사띠하지 않는 듯 느껴지기도 하고 지겨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띠하면서도 무료하고 지루하여 사띠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눈으로 볼 때도 뭉텅뭉텅하면서 조용하지도 않아 좋지 않게 생각된다. 물체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

 

경행도 어지럽고, 귀에서 소리도 들리고, 대상들이 고요하지 않고, 어른거리며 파괴되는 것 같다.

 

소리가 하나의 소리로 들리지 않고 끊어져서 들린다. 배가 고파도 점점 끊어져서 보인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과거에 자신이 가졌던 나쁜 의도가 생각이 나서 상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들은 지혜의 성품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왜 그런가? 이것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나?’라고 생각할 필요 없다. 단지 지혜의 성품일 뿐이다. 단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니 사띠하기만 하면 된다.

 

눈물을 흘리고 싶고 울고 싶어도 단지 사띠하기만 하라. 사띠하지 않으면 때로는 고함지르고 싶기도 하고 통곡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꼭 알아야 할 것은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사띠하기만 하라는 것이다.

 

왜 일어났는가 하고 궁리하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다.

 

지금 두려움이 일어나도 그냥 사띠하기만 하라. 현상들의 원인을 찾을 필요가 없다.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할 필요 없다.

 

수행자의 의무는 단 한 가지, 나타나는 현상을 나타나는 대로 사띠(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이를 참고하여 내가 소멸의 지혜의 단계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를 스스로 점검하면 된다. 아직 도달하지 않았으면, 도달하도록 수행하라.

 

07:30 법문

 

마하시 수행법은 사띠 확립의 긴 경(大念處經) 중의 몸의 자세(行住坐臥)와 분명한 앎(삼빠잔냐, 正知)에 대한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배의 호흡을 주 수행대상으로 하면서 육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분명히 아는 훈련을 하여, 찰나삼매에 들어서 지혜가 나도록 하는 방법이다. (『큰 스승의 가르침』, pp. 13-26 참조.)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 도입부에서 다음의 7가지 이익을 주는 법이 신수심법 4가지에 대한 사띠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① 마음을 번뇌에서 벗어나게 한다.

② 슬픔을 가라앉게 하고 ③ 비탄을 가라앉게 한다. 슬픔과 비탄은 어떻게 다른가? 끓는 물이 비유하면 슬픔은 김이 나오는 정도이고, 비탄은 물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즉 큰 고통이 생겨서 울부짖고 통곡하는 것이 비탄이다.

④ 육체적 고통과 ⑤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정신적 고통은 아직 슬픔이나 비탄까지는 가지 않은 괴로움이다.

⑥ 도와 과를 획득하게 한다.

⑦ 열반을 증득하게 한다.

 

이것을 다시 설명하는 이유는 수행자들이 수행을 하고 있지만, 스승의 법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설하는 것이다.

 

사띠하고 있으면 법대로 하는 것이요,

사띠하지 않고 있으면 법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사띠는 식사와 비슷하다. 좋아하는 반찬이건 싫어하는 반찬이건 가리지 않고 먹으면 영양분이 되는 것처럼,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이나 사띠(관찰)하면 법이 된다. 망상 혹은 통증을 혐오하기 때문에 사띠하지 않는다면, 마치 싫어하는 반찬을 먹지 않음에 의해 영양실조에 걸리는 것과 유사하다. 싫은 것도 사띠해야 법이 된다.

 

씀바귀는 쓰지만 먹으면 위장에 좋다.

 

통증을 관찰(사띠)하면 웨다나누빠사나, 수념처(느낌에 대한 사띠의 확립 훈련)가 된다. 밥을 조금 먹었으면 더 먹듯이, 사띠를 더 하면 배의 호흡이 사라진다. 그러면 내가 좌선하려고 앉아 있는 전체 모습을 보면서 ‘앉아 있음’을 알아차리고, 엉덩이와 발이 바닥에 ‘닿아 있음’을 느끼라. 혹은 호흡이나 몸은 사라졌지만, 사라졌음을 알고 있는 ‘아는 마음’을 보라.

 

밥을 다 먹은 후에 후식을 먹듯, ‘앉아 있음, 닿아 있음, 아는 마음’을 보라.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아는 마음도 끝난다. 그러면 마치 후식이 끝나면 식사가 끝나는 것처럼, 몸과 정신이 적정(寂靜)한 곳에 도달하여 수행이 끝난 것이 된다. 그 이후는 “계를 지키는 경(『큰 스승의 가르침』, pp. 181-182 참조.)”에 나와 있는 5가지를 테스트해 보라.

 

그것이 완전해 진 다음에 수다원의 상태, 즉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이 없는지 점검하라.

 

마하시 방법은 대념처경의 가르침에 의한 부처님의 수행 방법이다.

 

질의응답

 

사야도: 법에 대해서 무지한 목동의 질문이라도, 전생의 부처님인 보살이라도 대답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질문이 이상하면 질문을 할 수 없다. 일체지자(一切智者)이신 부처님이 아닌 본인은 아는 것은 대답하겠지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겠다. 특히 남방불교 북방불교에 대한 질문은 삼갔으면 좋겠다. 2,000년 전에 견해가 달라서 갈라진 것을 지금 와서 이야기해 봐야 그 자체가 문제가 되니 부적절하다.

 

질문: 부처님은 돌아가실 때 “법등명(법에 의지하고 살아라), 자등명(자신에게 의지하고 살아라)”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대답: 사띠하라는 말이다. 자신을 사띠하라는 말과 법을 사띠하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볼 때 봄을 알아차리면서 살아가라는 말이다.

 

질문: 보시할 때 어떤 마음으로 보시해야 합니까?

대답: 선을 원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불선을 원하면 나쁜 과보를 받는다. 의도가 중요하다. 아라한은 선과 불선이 모두 소멸해 버렸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끼리야)만 있다.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열반에 들게 해 달라고 서원하면서 보시하는 것이 가장 좋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서원하면 인간과 천상계에서 윤회하게 된다. 보시와 지계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서원을 세우며 보시하면 열반을 겨냥한 것이다.

 

질문: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보시하면 어떻게 됩니까?

대답: 별로 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축구를 하는데 골대가 없는데 공을 차는 것과 같다.

 

질문: 오후불식을 하니 배가 고파서 수행이 안 됩니다.

대답: 부처님 당시에 저녁에 탁발을 하니, 어두워서 소가 누워 있는 것을 모르고 올라탄다든지, 집에서 어떤 여자가 나오는 것을 귀신인 줄 알고 놀라는 경우가 있어서 오후 불식을 하게 되었다.

위산 과다인 사람은 굶으면 속이 쓰리니 저녁을 먹어도 된다. 그럴 경우에는 오후불식을 제외한 7계와 정명(바른 생계)을 계로 주기도 한다.

 

여기서는 채식을 해서 그렇지만, 남방에서는 육식을 하기 때문에 오후불식을 해도 영양이라든지 배고픈 문제가 덜하다.

 

질문: 오후불식을 안 하면 무슨 과보를 받습니까?

대답: 계를 잠깐 위반한 것일 뿐 불선을 행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오후불식을 어기면 수행할 때 정신이 맑지 않다.

 

질문: 몸이 사라졌다는 것은 실제로 몸은 있지만 느낌이 사라진 것 아닙니까?

대답: 그렇다. 느낌이 사라진 것이다. 몸이 사라진 다음에 나중에는 아는 마음도 사라진 때가 오기도 한다. 이것은 일시적 현상이다.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면 죽는 것이다.

 

질문: 묵언을 하면 무슨 이익이 있는지요?

대답: 말을 하면 좌선 중에 말했던 것이 되풀이된다. 말에 이어서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삼매가 생기는 것을 방해한다.

 

질문: 모기가 물었을 때 무의식으로 때렸다면 불살생계를 위반한 것인가?

대답: 의도가 없으면 계를 범한 것이 아니다.

 

질문: 그렇게 때려서 모기가 죽었을 때 ‘좋은 데로 가라’고 하면 좋은 데로 갈까요?

대답: 그럴 것 같지 않다.

 

질문: 모기를 직접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대답: 두 사람 모두 살생한 것이 된다.

 

질문: 몸이 죽으면 영혼 죽는다는 것을 쉽게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답: 남방불교에는 영혼이라는 개념이 없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귀를 귀신으로 잘못 아는데, 그것은 다른 중생이지 영혼이 아니다.

 

질문: 임종할 때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대답: 대상이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려라. 통증이 생기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심장 박동이 늦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지옥이 나타나면 ‘봄, 봄’하고 알아차리고, 두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는 마음밖에 없으면 그것을 알아차려라.

 

질문: 알아차리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여쭈었을 때, ‘오직 법뿐이고, 오직 마음뿐’이라고 대답하셔서, 모든 의혹을 내려놓게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확인하는 의미에서 다시 좌선하는 ‘나’는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없고 오직 법, 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대답: 경행할 때 경행하는 자는 없고, 있는 것은 움직이는 발인 물질과, ‘움직이는 발은 물질’이라고 아는 마음인 정신뿐이다. 자동차가 가는 것이 아니고 엔진의 힘으로 가듯이, 의도가 원인이 되어, 가는 현상이라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있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을 뿐이다.

 

질문: 생계를 위해 고기를 잡는 어부와 취미로 낚시를 하는 사람이 받는 과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대답: 살생의 요소를 구비했으니 차이가 없이 같은 과보를 받는다. 살생의 과보는 다음 생에 단명하거나, 피살되거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질문: 유체이탈은 무엇입니까?

대답: 사마디의 힘이다.

 

질문: 벌레를 잡아서 12층에서 떨어뜨렸다면 어떤 과보를 받습니까?

대답: 의도가 중요하다. 죽이려고 했으면 살생이고, 좋은 데 가서 살라고 생각했으면 불살생계에 해당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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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띠하고 있는 수행자는 마치 비가 내리지 않는 호수와 같다

 

수행자에게는 번뇌가 많습니다. 이는 마치 물(번뇌)이 엄청나게 많은 호수(수행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띠하고 있는 수행자에게는 번뇌가 더 이상 증가되지 않습니다. 이는 호수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호수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물이 아종파 많아도 그 호수의 물이 마를 날이 있습니다. 사띠함에 의해 번뇌라는 물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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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붙은 불이 저절로 꺼진 다음에 일을 계속하라.

 

질문: 집에서 일상생활을 할 때, 어떤 일을 언제까지 꼭 끝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니까, 빨리 해치우겠다는 성급한 마음이 앞서서 가슴이 답답하고, 조금 지나면 가슴이 아프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상태가 며칠 계속되면 속이 타서 입술이 마르고 나아가서는 입술이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대답: 그 마음을 지켜봐서 성급함이 사라진 다음에 일을 계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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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혜문 | 작성시간 22.01.28 사두 사두 사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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