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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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 사야도의 『마음거듭관찰과 법 거듭관찰 법문』, pp.382~383
어리석음은 이렇게 잘못된 것을 이리저리 압니다.
올바른 성품은 모릅니다. 무명avijjā라고도 부릅니다.
무명과 어리석음은 동일합니다.
게송을 독송합시다. 매우 중요합니다.
바른성품 모르네 어리석음은
그렇게 바른 성품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없어지도록
지금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여섯 문에서 생겨날 때의 물질과 정신을
사실대로 알지 못합니다.
수행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사람들은
이 어리석음으로만 이리저리 알고 있습니다.
보고 나서, 듣고 나서 항상한 어떤 실체로 압니다.
행복한 어떤 실체로 압니다.
아름답고 좋은 어떤 실체로 압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윤회하는 내내
‘나다. 개인이나 중생이다. 항상 지속된다. 행복하다. 좋다’
라고만 압니다.
볼 때도 이렇게만 압니다.
들을 때, 맡을 때, 먹을 때, 닿을 때,
여섯 문에서 모든 것을 이렇게만 압니다.
어리석음이 장악한 영역에 이제 위빳사나를 투입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에서 장악한 곳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해서 첫 번째 전투를 벌인 지역에 침투해서 승리한다면
그곳은 이제 자신의 영역이 된 것입니다.
상대편이 다른 곳으로 후퇴했다면
다시 그 후퇴한 곳을 따라가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지역을 다 빼앗았다면
승리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장악한 영역이 있습니다.
여섯 문에서 생겨나는 다섯 취착무더기 전체가 다
어리석음의 영역입니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이러한 법들을(오취온) 대상으로 해서 생겨납니다.
‘개인이다. 중생이다. 항상하다. 행복하다. 좋은 것이다’
라고 윤회하는 내내 이리저리 생각합니다.
볼 때도 생각하고, 들을 때도 생각하고,
맡을 때, 먹을 때, 닿을 때, 어디에서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어리석음이 생겨나는 영역을
통찰지를 통해 바르게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법들을
‘통찰지의 땅paññābhūmi’
이라고 『위숫디막가』에서 명칭을 붙였습니다.
‘통찰지의 땅paññābhūmi’이란
통찰지가 생겨나는 장소, 생겨나는 법들을 말합니다.
다섯 무더기가 바로 통찰지가 꿰뚫어야 할 법들입니다.
열두 가지 감각장소, 열여덟 가지 요소,
이러한 법들이 통찰지의 땅입니다.
‘통찰지가 생겨나는 장소’라고 해도
저절로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심어야 생겨납니다.
심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습니다.
좋고 기름진 땅이 있어도 씨를 심어야 결실을 맺습니다.
씨를 심지 않으면
잡초나 가시나무들만 이리저리 무성합니다.
그러한 잡초를 뽑아내고 제거한 뒤
씨앗을 심으면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곡식이 자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다섯 취착무더기를 의지해서 싹을 틔우고 자라고 있습니다.
볼 때도 어리석음이 생겨나고,
들을 때, 맡을 때, 먹을 때, 닿을 때,
모든 곳에서 어리석음만 이리저리 생겨납니다.
통찰지는 씨를 심어줘야 합니다.
보자마자 알도록 관찰해야 합니다.
각각 찰나에 생겨나는 성품법들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도록 관찰해야 합니다.
부푸는 순간에, 꺼지는 순간에, 굽히는 순간에, 펴는 순간에,
각각 드러나는 물질·정신 법들의 바른 성품을
새길 때마다, 새길 때마다 통찰지가 압니다.
생겨나서 사라지므로 무상하다고 압니다.
무상하다고 알며 괴로운 성품이라고도,
개인이나 중생이 아니라고도 압니다.
그렇게 알 정도가 되면 이제
어리석음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볼 때, 들을 때, 맡을 때, 먹을 때, 닿을 때, 생각할 때
알아야 할 모든 것에서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나
어리석음이 물러날 것입니다.
[출처] 어리석음과의 전쟁 (한국마하시선원) | 작성자 담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