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머묾-26-220403-자애경14-일부 메모-일요정기법회
우 또다나 사야도 법문/일창 스님 통역
2022년 4월 3일/한국마하시선원
이것은 강의의 일부만 메모한 것이며, 스님들의 검증을 받지 않은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보내거나 인터넷에 게시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상세한 내용은 https://cafe.naver.com/koreamahasi/3188 참조
두 번째 멧따숫따에서 위빳사나 수행 모습
괴로움, 괴로움특성, 괴로움 거듭 관찰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상윳따 니까야(S.ii.19)에 ‘무상한 것[五蘊]이 괴로움이다.(yadaniccaṃ taṃ dukkhaṃ)’라고 설하셨다. 자세하게 설명하면, 괴로움이라고 하는 다섯 무더기 중에서 느낌 무더기, 그 다섯 가지 느낌 무더기 중에서도 괴로운 느낌 한 가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인 물질 형성 인식 의식 무더기, 그리고 느낌 중에서도 행복한 느낌과 평온한 느낌은 받아들이기 힘든 성품은 아니다. 이것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좋아하고 즐길만한 것이 없어서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괴로운 느낌을 생기게 한 뒤에 괴롭히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게송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가)생멸핍박 물질정신 무더기가 괴로움법
이 다섯 무더기(오온)는 한 순간도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기 때문에, 생멸이 오온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실제로 괴로운 느낌인 저림, 뜨거움 등으로 자주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오온은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만한 것이므로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괴롭히는 성품이 어떤 것을 괴로움이라고 알게 하는 특성이다. 이를 게송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나) 생성소멸 핍박하는 특성바로 고통특성
생성하고 소멸하는 오온은 어디에서 생기고 사라지는가? 육문에서 생멸한다. 생멸하고 있는 물질정신을 잘 관찰하고 있는 수행자는, 한 순간도 끊임없이 물질정신 무더기가 생멸하고 있는 것도 경험한다. 육문에서 대상이 생길 때마다 ‘본다, 들리다, 맡는다, 먹는다, 닿는다, 생각한다, 부푼다, 꺼진다. 앉는다, 닿는다, 왼발, 오른 발, 듦, 감, 놓음’ 등으로 관찰하고 관찰할 때마다, 관찰되는 대상과 관찰하는 마음이 생기고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것을 분명히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부푼다, 꺼진다.’라고 관찰하다가 망상 좀 관찰하고, 통증 좀 관찰하면서 수행이 좀 향상되면, 중간중간에 ‘봄, 들림, 맡음’을 펼쳐서 관찰되고, 수행이 더욱 향상되면 더 이상 펼쳐지지 않고 다시 ‘부풂 꺼짐’에만 마음이 집중되어 그것만 잘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중간에 다시 생멸하는 물질정신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몸이 저렸다가 뜨겁고 아픈 느낌인,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괴롭히는 성품도 경험한다.
그렇게 직접 생멸하는 것도 경험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괴로운 느낌도 경험하기 때문에, ‘좋아할 만한 것이 없는 괴로움이구나. 두려운 것이구나.’라고 스스로의 지혜로 알고보고 이해한다. 이것이 진짜 괴로움 거듭 관찰의 지혜이다.
두 가지로 정리하면, 괴로움 거듭 관찰의 지혜라는 것은, 첫 번째 물질정신이 계속 생기고 사라지는 것 자체가 마치 핍박하는 것처럼 괴롭히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두 번째로는 저림, 뜨거움, 아픔이라는 괴로움 느낌이 생겨서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괴롭히기 때문에도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게송으로 만들었다.
(다) 관찰할때 생멸함을 알고보고 경험하여
괴롭다고 아는것이 고통거듭 관찰지혜
그렇게 관찰할 때마다 괴롭다고 알고 보는 이가 괴로움 거듭 관찰자인데, 이를 게송으로 만들었다.
(라)관찰마다 괴롭다고 아는이가 고통거듭 관찰자
지난번에 무상 관찰할 때 해 본 것처럼, 어렵지만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이라고 독송한 직후에 ‘내가 지금 독송한 물질(소리 등)이 지금 없어졌다. 괴로움이다.’라고 관찰할 수 있으면 관찰해 보기로 한다.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잠깐 멈춤)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잠깐 멈춤)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잠깐 멈춤)
무아, 무아특성, 무아 거듭관찰
무아란 무엇인가? 상윳따 니까야(S.ii.19)에 ‘괴로움인 것은 무아다.(yaṃ dukkhaṃ tadanattā)’라고 설하셨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다섯 무더기가 바로 자아가 아닌 무아인 법이다. 무아인 법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무상한 법이 실제로는 무상한데 그것이 ‘항상 지속되기를. 항상 무너지지 않고 계속되기를.’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고, 바꿀 수 없다. 실제로는 괴로움인데 그것을 ‘행복하기를’이라고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바꿀 수 없다.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 무너지지 않는 어떤 실체, 자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법을 무아인 법이라고 한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가)생멸본성 물질정신 무더기가 무아인법
생멸본성이라는 것은 자기 성품대로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지, 누가 어떻게 생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멸하는 것이 자기의 성품 따라 생멸하기 때문에, 물질정신 무더기가 무아인 법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가 있고 그것이 그 자신이라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어야 한다. 오온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 관련된 조건이 있어야 생긴다. 관련된 조건이 있으면 생기지 않으려고 해도 생기기 마련이다. 또 생긴 뒤에 생긴 것이 좋은 것이라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되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내부에 어떤 자아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위방가 주석서(VbhA.47)에서 ‘지배할 수 없는 양상이 무아특성이다.(avasavattanākāro anattalakkhaṇaṃ.)’라고 설명했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나) 마음대로 되지않는 특성바로 무아특성
생기고 있는 물질정신을 생길 때마다 잘 따라서 관찰하고 있는 수행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관련된 조건에 따라서, 각각의 성품이 따라서 생멸하고 있는 것은 끊임없이 경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구나. 무아인 법이구나. 무아인 성품법일 뿐이구나.’라고 스스로의 지혜로 잘 구분해서 알게 된다, 이렇게 경험해서 아는 것이 진짜 무아 거듭 관찰의 지혜이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다) 관찰할때 마음대로 되지않음 경험하여
무아라고 아는것이 무아거듭 관찰지혜
‘행복하기를, 행복하기를.’이라고 자애를 닦을 때에도, 수행자들은 하루 종일, 밤새도록 자애만 계속 생기게 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기도록 격려하는 성품, 북돋는 성품, 노력이 없으면 밤새도록 생기지 않는다. 강력한 열의, 노력, 의도가 갖춰져야만 밤새 자애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의미로도 ‘내가 바라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구나. 무아법이로구나.’라고 알 수 있다. 이러한 무아 성품도 자애수행을 하면서 닦아 보기로 하자. 천천히, 천천히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이라고 독송한 직후에 ‘내가 지금 독송한 물질(소리 등)가 지금 없어졌다. 무아이다.’라고 관찰해 보기로 하자.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잠깐 멈춤)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잠깐 멈춤)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 (잠깐 멈춤)
지금 한 것처럼 ‘모든 중생들 행복하기를’이라고 마음을 기울여서 독송한 뒤에 무상이나 괴로움이나 무아가 드러나도록 관찰하는 것은 욕계 선업 자애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두 번째 멧따숫따에서는 자애선정에서 출정한 뒤, 자애 선정과 함께 생겼던 마음이나 느낌 등을 관찰한다. 이것은 고귀한 색계 선정 마음과 관련된 마음부수 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대상이 욕계에 해당되는 법인가, 고귀한 법에 해당하는 것인가만 차이가 나지, 거기에 관찰되는 법들을 관찰하는 모습으로는 동일하다. 그래서 자애 선업 마음 등을 관찰하면서 위빳사나 지혜가 완전히 구족되면,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물질정신이 완전히 소멸된 열반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면 도의 지혜 바로 다음에 과의 지혜로도 열반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처음 열반을 경험하면 수다원이 된다. 일반적으로 자애 선정을 얻은 이라면 수다원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이어서 관찰하면, 사다함, 아나함까지 도달하기 때문에 두 번째 멧따숫따를 설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나함이 되면 감각욕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다음에 욕계 탄생지에서 태어날 기회가 사라져버리고, 한 번 더 태어나더라도 보통 정거천에 태어난다.
두 번째 멧따숫따에 이렇게 설하셨다.
자애선정을 무상 등으로 관찰해서 아나함이 된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정거천 탄생지 천신들의 동료 범천으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은 범부들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A.i.444/A4:126)
정거천(無煩天, 無熱天, 善現天, 善見天, 色究竟天)에 범부는 없고 아나함과 아라한만 있기 때문에 범부의 냄새가 나지 않는 깨끗한 곳이어서 정거천(淨居天)이라고 한다. 떼인구 사야도께서 사람들은 잠을 많이 자고, 일을 많이 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 정거천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제4선정도 얻은 상태여야 한다. 하지만 자애수행으로는 제3선정까지만 얻을 수 있다. (제4선정을 닦으려면 평온을 대상으로 해야 함) 그렇다면 두 번째 멧따숫따에서는 왜 정거천에 태어난다고 했을까?
자애선정을 증득한 다음에 위빠사나 관찰해서 아나함이 된 성자는 그 다음에 평온수행을 해서 4선정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자애선정으로 아나함이 된 성자가 사마타 수행을 해서 제4선정을 얻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정거천에 탄생 가능하다.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아나함이 된 성자일지라도, 부처님께서 아나함은 삼매를 완전히 갖춘 성자라고 하셨으므로, 원하기만 하면 쉽게 제4선정을 얻으니 정거천에 도달할 수 있다.
아비담맛타 위바위니 띠까(띠까 쬬)에 의하면, 선정을 닦지 않고 아나함이 된 성자는, 선정을 닦지 않고 지내더라도, 아나함은 삼매를 갖춘 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죽을 즈음에 선정이 저절로 계발되어 제4선정을 얻어서 정거천에 태어난다고 한다.
● 수다원과 사다함도 정거천에 태어나지 못한다. 왜 위에서 ‘범부들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라고만 설하시고 ‘수다원, 사다함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설하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정거천에 태어날 가능성이 적은 범부를 언급하신 것이다.
게송 무상, 무상특성, 무상 거듭관찰 무상한법 알아야해 무상특성 알아야해 무상하다 거듭관찰 세가지를 알아야해 (가)생멸모든 물질정신 무더기가 무상한법 (나) 생겨나서 사라지는 특성바로 무상특성 (다) 관찰할때 소멸함을 알고보고 경험하여 무상하다 아는것이 무상거듭 관찰지혜 (라)관찰마다 무상하다 아는이가 무상거듭 관찰자 괴로움, 괴로움특성, 괴로움 거듭관찰 괴로움법 알아야해 고통특성 알아야해 괴로움의 거듭관찰 세가지를 알아야해 (가)생멸핍박 물질정신 무더기가 괴로움법 (나) 생성소멸 핍박하는 특성바로 고통특성 (다) 관찰할때 생멸함을 알고보고 경험하여 괴롭다고 아는것이 고통거듭 관찰지혜 (라)관찰마다 괴롭다고 아는이가 고통거듭 관찰자 무아, 무아특성, 무아 거듭관찰 무아인법 알아야해 무아특성 알아야해 무아라고 거듭관찰 세가지를 알아야해 (가)생멸본성 물질정신 무더기가 무아인법 (나) 마음대로 되지않는 특성바로 무아특성 (다) 관찰할때 마음대로 되지않음 경험하여 무아라고 아는것이 무아거듭 관찰지혜 (라)관찰마다 무아라고 아는이가 무아거듭 관찰자 |
● 『앙굿따라 니까야』 「두띠야 멧따숫따」⇒ 자애선정 증득 → 관찰 → 아나함 → (평온수행) → 정거천
VS. 『앙굿따라 니까야』 「빠타마 멧따숫따」⇒ 자애선정 증득 →범천(~제3선정천): 범부→욕계 선처→사악도
:성자 → 그 범천세상에서 아라한이 되어 완전열반
▣첫 번째 멧따숫따
비구들이여, 이 교법에서 일부 개인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애 요소와 함께 생겨나는 마음으로 한 방향에 있는 중생들을 펼쳐서 지낸다. 두 번째 방향을 그와 마찬가지로 펼치면서 지낸다. 세 번째 방향을 그와 마찬가지로 펼치면서 지낸다. 네 번째 방향을 그와 마찬가지로 펼치면서 지낸다. 이러한 방법으로 위의 지역에 있는 중생들을, 아래 지역에 있는 중생들을, 옆에 있는 남은 간방에 있는 중생들을 모든 곳에서 온 마음으로 모든 중생들을 포함하는 세상을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광대한 마음으로 고귀한 마음이라는 선정 마음으로 한계가 없는 마음으로 원한이 없는 마음으로 마음의 불편함이 없는 마음으로 펼치면서 지낸다.
그 자애선정을 얻은 이는 자애선정을 즐긴다. 그것을 좋아한다. 자애선정으로 만족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그 자애선정에 머물면서 자애선정에 마음 기울이고 집착하면서 자애선정에 여러 번 입정하면서 물러서지 않고서 죽은 뒤에 초선정 범천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이것은 자애 초선정만 얻은 이가 태어나는 모습이다.》 … 제2선정을 얻은 이는 제2선정을 즐긴다. 제2선정에 여러 번 입정하면서 물러서지 않고서 죽은 뒤에 광과천 범천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그 범천 세상에서 범부는 수명만큼 머물다가 그 범천들의 수명이 모두 다하면 지옥에도 가고 축생의 모태에도 가고 아귀의 영역에도 간다.
하지만 세존의 성제자는 《이 구절을 통해 자애선정을 바탕으로 위빳사나 관찰을 하여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라는 성제자가 된 사실을 밝혔다.》 그 범천 세상에서 수명의 한계만큼 머물다가 그 범천들의 수명한계가 모두 다하면 바로 그곳에서만; 바로 그 범천의 생에서만 완전열반에 든다. 비구들이여, 선정을 얻은 범부는 범천 세상에 태어나 수명이 다했을 때 욕계 선천에 다시 도달한 뒤 그곳에서 지옥이나 축생, 아귀의 생에도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과 자애선정을 얻은 성제자는 범천 세상에 태어나면 그 범천세상에서만 아라한이 되어 완전열반에 든다는 이 사실이 차이점이다.